이 세상엔 확실히 도둑놈 같은 것들이 들끓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나라와 동족에게 예사로 해를 끼치고, 사회를 좀먹는 해충이나 독충 같은 인간들 말이다. 정치적인 투철한 신념도 없고, 국가와 민족에게 봉사하려는 정신자세도 돼 있지 않으면서, 이권과 감투욕에 미쳐서 정치를 한답시고 휘젓고 돌아가는 놈들, 국민의 공복이라는 책임있는 자리를 이용해서 뇌물이나 받아먹고 공금이나 들어먹는 탐관오리배들, 국가의 동량인 인재 양성을 빙자하여 육영사업을 한다는 미명 아래 폭리도 이만저만이 아닌 지독한 학교 장사꾼들, 사업을 합네 하고 기상천외의 간계를 꾸며 어머어마한 나랏돈을 끌어내어다가는 뒷구멍으로 말아먹지 않으면 고작 독점할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내 가지고는 시세의 몇 배인 엄청난 가격으로 소비자를 골탕먹이는 협잡 사업가들, 품질을 속이고 가격을 속이고 심지어는 가짜 물건을 진짜로 속여 팔아먹는 사기상인들, 이런 악질 도배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이니, 제 정신 가진 사람치고, 그 입에서 욕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손창섭, "길", 북갤럽, 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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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부녀"를 읽고 손창섭의 매력에 푹 빠져서 그의 전 작품들을 사 모으는 중이다. 단편전집은 작년에 다 샀고 장편인 "삼부녀"와 "인간교실", "길"까지 구했지만 그의 최후의 대표작인 "유맹"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이 책이 헌책방에도 없었기에 출판사(실천문학사)에까지 직접 전화를 걸었지만, 재고는 출판사 보관용으로만 한 권 남아 있다고 하며, 앞으로 재판을 찍을 일은 없을 거라고 한다. 이 책은 E북으로라도 사거나 아니면 도서관에서 빌려 제본이라도 뜨려고 한다. 

특히 위와 같은 손창섭 특유의 독설은, 흠모하지 않을 수 없다. 신형철은 "김애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냐며 감탄을 표했지만, 나는 달리 말하고 싶다. 대체 "손창섭을 존경하지 않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냐고 말이다. 나는 이 이야말로 한국의 진정한, 거의 유일한 리얼리스트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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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19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손창섭 책을 삼부녀 빼고는 모두 도서관에서 봤습니다. ( 유맹은 저도 못 읽었군요. ) 3일 연휴일 때 도서관 가서 창섭 소설, 평론, 기타 기사 등등..... 그래서 집에는 달랑 삼부녀가 전부예요.
뭘 좀 말하고는 싶은데 후다닥 읽어서 서평을 쓰기는 그렇고...

그러다가 오직 서평을 쓸 목적으로 오늘 인간교실 구매했습니다. 인간교실 기억나는게 이게 막 신간이어서 도서관 신간 코너에 있더라고요... 유맹은 아무래도 그 이후에 출간되었나 봅니다. 도서관에 없었던 걸 보면 말이죠...하여튼 지금 읽고있는 책들만 읽고 나면 손창섭에 대해 말 좀 해야겠습니다.

수다맨 2014-03-19 22:08   좋아요 0 | URL
삼부녀에 확실히 과장이나 비약이 없지 않아 있다면 "인간교실"은 조금 더 정통소설에 가까우면서도 장차 "삼부녀"와 이어지는, 고리 같은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곰곰발님도 말씀해주신 것 같은데, 손창섭은 혈연주의적 공동체와 계약에 묶인 일처일부제를 끔찍이도 증오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구성원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또다른 패거리주의나 패밀리주의(우리가 남이가!)로 변질되기 쉽지 않습니까. 손창섭이 꿈꾸었던 공동체는 ㅡ다소 추상적인 문학적 형상화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ㅡ 핏줄이 다르고 연령이 달라도 상처 입은 사람들의 유대와 믿음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삼부녀"에서 그런 것을 아주 멋지게 보여줬죠 ㅎㅎ 곰곰발님 말씀처럼 이 사람이야말로 한국 최고의 작가라고 봅니다.
 

달과 어릿광대


김신용

 

나는 지금도 내 얼굴이 몇 개인지 모른다

 

뿌리가 도끼에 찍힐 때마다 얼굴을 하나씩 바꾸어 달았다

 

그러고 보면 얼굴은 모든 표정들의 집합체-

 

나는 얼굴에서 하나씩의 표정을 뜯어낼 때마다ㅡ 새로운 얼굴을 달았다

 

표정이라는 무수한 구름들이 흘러갔을 얼굴의 정거장,

 

눈이 고장난 신호등처럼 삐뚜룸히 매달려 있다

 

그 사시(斜視)로, 나는 수많은 구름의 궤적들을 보았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던 길들-, 그 불구의 궤적을 끌며

 

거울 앞에 서면 아직도 달은 어디에 있나? 하고 묻고 있는

 

물음표 같은 얼굴이 떠오른다. 깊게 패인 주름살의 레일 위에는

 

그 검은 석탄을 가득 실은 무개화차가 완강하게 얹혀 있다

 

그래, 표정은 관념의 움푹한 함정-, 죽음은

 

언제나 마분지의 살갖을 가지고 있었다. 마분지는 말의 분뇨로 만들어진

 

종이라는 고정관념을 뇌리에 깊게 각인시켜 준, 그 누렇게 퇴색되고

 

검버섯 같은 피부를 가진 죽음이, 내 몸에 닿기도 전에''


나는 텅 빈 상자 같은 몸통 위에 얼굴을 바꾸어 달았다.

 

그래, 뿌리에 도끼가 찍힐 때마다 잎만 떨어뜨려 주는 나무처럼

 

잎만 떨어트려 주는 나무처럼..... 그래, 잎만......


이제 말하는 것 외에 얼굴이 할 일은? 우는 걸까?

 

아직도 검은 물음표를 가득 실은 무개 화차는 레일 위에 완강하게 얹혀 있는데?


-김신용 "천년의 시작"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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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한 해석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그저 읽으면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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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문단에서 나름 멀리 있었던 이유로는, 첫째로는 제가 ‘작가가 되겠다’라는 생각이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의 인간이 극히 보통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가 어느 날 불현듯 소설을 하나 써서, 그것이 뜬금없이 신인상을 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문단이 어떤 것인지, 문학상이 어떤 것인지, 그런 기초적인 지식이 아예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때 저는 ‘본업(재즈카페 운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하루하루 생활이 너무도 바빠서 처리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빴습니다. 몸이 몇 개 있어도 부족하달까, 필요불가결한 것 외에는 무언가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전업작가가 되어서는 그만큼 바빠지지는 않았지만, 저만의 어떤 다짐을 가지고 극단적으로 빨리 자고 빨리 일어나는 생활을 하게 되고, 일상적으로 운동을 하게 되고, 덕분에 밤에 어디 나가는 일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신주쿠의 골든가(문단bar가 주로 밀집된 술집거리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닙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런 장소에 관여하거나 실제로 가거나 하는 필연성도 시간적 여유도 그 당시의 저에게는 ‘어쩌다보니’ 없었던 것 뿐입니다. 


-아쿠타가와상에게는 ‘마력이 있다’고 하던데 저는 잘 모르겠고 ‘권위가 있다’고 하는 것도 잘 모르겠고 그런 것 자체를 의식한 적도 없었습니다. 여태까지 누군가가 이 상을 타고 누가 타지 못했는지 그런 것도 모릅니다. 예전부터 관심도 없었고 지금도 비슷한 정도로(랄까 점점 더) 관심이 없습니다. 혹시 그 칼럼의 저자가 말씀하셨듯이 아쿠타가와상의 마력같은 것이 있다고 해도 최소한 그 마력은 저 개인 가까이까지는 미치지 못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마력은 아마 길 어드매에서 헤매다가, 저한테까지 도달하지 못한 거겠지요. 


-이런 것을 말하면 열받을지 모르지만, 아쿠타가와상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문예춘추’라고 하는 민간출판사가 영업의 일환으로 만든 상에 불과합니다. 문예춘추는 그걸로 장사하고 있는 거지요-까지는 말 못하지만, 장사에 활용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 됩니다. 어쨌든 간에, 이만큼 오랫동안 소설가를 하고 있는 인간의 실감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신인레벨의 작가가 쓴 것들 중에서 정말로 괄목할 만한 작품이 나오는 일은 대개 5년에 한 번 꼴 정도입니다. 조금 더 관대하게 말하자면 2,3년에 한 번 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해에 두 번 뽑는 거니까 결과적으로 퍼주는 격이 됩니다. 물론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지만(상이라는 것은 많든 적든 축제의식같은 것이고, 문호를 넓히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서 그렇게 매번 매스컴 대상으로 행사하면서 소란피울만한 레벨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밸런스가 좀 이상해지고 있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한 편지 속에서 노벨문학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대작가가 되고 싶은 것일까? 나는 노벨문학상을 타고 싶을까? 노벨문학상이 뭐란 말이냐. 너무나 많은 이류작가들에게 이 상이 주어지고 있다. 읽을 마음도 들지 않은 그런 작가들에게 말이다. 저런 상을 타면 스톡홀름까지 가서 정장입고 연설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벨문학상이 그 수고를 할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나는 단연코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인작가 넬슨 올그렌은 커트 보네거트의 강한 추천을 받아서 1974년에 미국문학예술아카데미의 공로상수상자에 뽑혔는데 그 부근의 바에서 어떤 여자와 술을 마시다가 그만 수상식을 펑크내고 말았습니다. 물론 의도적이었습니다. 나중에 따로 보내진 수상메달을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음…어딘가 던져버렸던 것 같기도 하고…”라고 대답했습니다. [스터즈 터켈 자전]이라는 책에 그런 에피소드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과격한 예외일지도 모릅니다. 독자적 스타일과 일관된 반골정신을 가진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던 것은 아마도 ‘진정한 작가에게 있어서 문학상보다 중요한 것이 몇 가지가 있다’라는 것이겠지요. 그 중 하나는 자신이 의미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확신이고, 또 하나는 그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독자가 – 숫자는 둘째치고 – 제대로 거기에 존재해준다는 확신입니다. 그 두 가지의 확실한 감촉을 감지할 수만 있다면 작가에게 있어서 상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버립니다. 그런 것은 그저 사회적인 혹은 문단적인 형식상의 인정에 불과합니다. 


-저는 태어나서 여태껏 문학상의 심사위원을 맡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의뢰받은 적은 있지만 ‘죄송합니다, 저는 못합니다’라고 거절해왔습니다. 심사위원을 할 자격이 저에게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고 하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너무나도 개인적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저라고 하는 인간 안에는 저 자신의 고유의 비전이 있고 그에 형식을 입혀가는 고유의 프로세스가 있습니다. 그 프로세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포괄적인 삶의 방식부터 시작해서 개인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글을 잘 쓸 수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저 자신의 ‘잣대’이고, 저한테만 그렇다는 것이지 다른 작가들한테까지도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의 방식 외의 모든 방식을 배척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만(저와 해나가는 방식은 달라도 경의를 가지는 대상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이것은 어떻게 해도 나와는 안 맞는다’ 혹은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라는 것들은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자신이라고 하는 축만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평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적인 것이고, 걍 말하면 제멋대로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저의 제멋대로인 잣대를 가지고 타인의 작품을 평가한다면, 그걸 당한 사람은 왠지 억울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미 작가로서의 지위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세상에 나온지 얼마 안 되는 신인작가의 운명을, 저의 편견이 들어간 세계관으로 좌우하는 일은 무서워서 할 수가 없습니다. 


-작가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책무는 조금이라도 질이 높은 작품을 계속 써나가고 그것을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저는 일단은 현역 작가이고, 바꿔 말하면 아직도 발전도상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아직 찾는 입장에 있는 사람입니다. 전장의 최전선에서 어떻게든 싸워나가야 하는 상태의 인간일 뿐입니다. 거기서 살아남아 계속 앞으로 전진해나가는 것, 그것이 저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타인의 작품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읽고 평가하고 책임을 가지고 추천하거나 혹은 팽하거나 하는 작업은 현재의 저의 시야에는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한다면 – 물론 일단 하면 열심히 할 수 밖엔 없겠지만 – 적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일에 들어갈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정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그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함께 제대로 잘 해나가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자기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매일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제가 여기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작가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격’이라는 것입니다. 문학상은 어디까지나 그 자격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만을 해야합니다. 상이라는 것은 작가가 한 작업물의 성과도 아니고, 보상도 아니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는 물론 결론같은 것도 아니죠. 어떤 상이 그 자격을 어떤 종류의 형식으로든 보강해준다면 그것은 그 작가에게 있어서 ‘좋은 상’이 될 것이고, 그것이 안 되면, 혹은 반대로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된다면, 아쉽지만 ‘좋은 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면 올그렌처럼 메달을 멀리 내던져버리거나 챈들러처럼 스톡홀름행을 거부한다고 호언장담하게 됩니다 – 물론 그가 그런 입장에 놓인다면 실제로는 어떻게 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ㅡ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상에 대하여-무라카미 하루키 사적 강연록2" 中에서

출처:http://catwoman.pe.kr/xe/3036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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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실린 글-비록 강연록이지만-을 읽으니 하루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작가정신은 높이 평가한다. 적어도 하루키는 오늘날 시장과 문학, 독자와 문학의 관계를 정확하고 사려 깊게 숙고하는 작가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써나가야 할 글과, 주머닛돈을 헐어 자신의 책을 사줄 독자들이다. 즉, 진정한 작가는 문단의 평가나 상의 획득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독자와, 자신과 정면 승부를 치른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는 -그 소설적 성취가 고전의 수준에 미만할지라도- 오래전에 작가혼을 불살랐던 몇몇 고전적인 작가들의 면모를 일정 부분 가지고 있다. 물론 그에게 마루야마 급의 자세를 요구할 수는 없지만, 이만하면 오늘을 살아가는 작가의 마음가짐치고 너무도 훌륭하지 않은가. 

하루키의 신작이 나오면 나는 또 험궂은 비판을 가할 게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건필을 바란다. 때로 존경할 만한 적을 가진다는 것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얻는 것보다 더 기쁘고 소중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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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09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확실히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좋습니다. 어떤 통찰이 있거든요.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니 읽을 일이 별로 없지만 에세이'는 좋습니다. 일단 이 작가는 성실하잖아요. 아마 지금도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을 겁니다. 9시간인가... 매일 얼마간 글을 쓴다고 하더라고요.하루도 빠짐없이 말입니다. 이게 쉬운 게 아닐 겁니다....

수다맨 2014-03-09 19:46   좋아요 0 | URL
저는 이 강연문을 읽고 이상문학상을 생각했습니다. 사실 상이란 뛰어난 작품들에 줘야 하는데, 오늘날 이상문학상은 문학사상사의 장삿속에 불과해진 감이 있죠. 작품이 탁월해서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상이 있기에 작품이 받는 식으로 본말이 전도되어 버렸습니다. 현대문학상(현대문학)이나 황순원문학상(문예중앙)도 마찬가지죠.
저는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글쓰기 자세나 작가 정신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문단 진입이나 상에 욕심내기보다 자기 자신과, 독자와 정면승부하려는 저런 태도는, 높이 평가할만하다고 봅니다.

수다맨 2014-04-17 20:24   좋아요 0 | URL
저는 통찰이 있다고 말한 적은 없는 데요. 다만 상이나 평단에 연연해하기 보다는 작가적 성실성과 충실성을 갖고 독자와 정면 승부를 하려는 것, 하루키의 이러한 태도는 존중할 가치가 있다는 거지요.
저는 하루키의 통찰이 아니라 기개를 얘기한 건데, 이것을 님께서 통찰로 읽으시니 좀 뜨악합니다.
 

나는 눈 위에 살찐 여섯 마리의 꿩을 늘어놓고 검은색과 불그스름한 갈색 무늬의 깃털을 뽑았다. 깃털은 눈가루와 함께 바람에 흐트러져서 무거운 꼬리 깃털만 발치에 남았다. 깃털 아래의 꿩의 살은 차가워져서 딱딱하고 그 위에 탄력 있는 충실한 저항감을 갖추고 있다. 깃털 사이의 솜 같은 잔털에는 투명하고 예쁘장한 이가 잔뜩 붙어 있어서 그 꿩들은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폐 속으로 이가 붙어 있는 잔털이 빨려 들어갈까 봐 두려워서 콧구멍만으로 약한 호흡을 하면서 추위에 곱아들기 시작한 손가락으로 깃털을 계속해서 뽑았다. 문자 그대로 '닭살이 돋아 있는' 버터 같은 색깔의 얇은 피부가 갑자기 맥없이 찢어지더니, 그 아래에 있는 것에 닿은 손가락 끝에 기분 나쁜  감촉이 전해져 온다. 찢어진 피부가 순식간에 균열을 확대시켜 검붉게 상처 입은 살이 나타났는데, 온통 핏멍울과 납으로 된 산탄투성이다. 완전히 벗겨진 몸에서 남아 있는 털을 뽑아내고, 모가지를 비틀어 떼어내기 위해 목을 빙글빙글 돌려 힘을 준다. 목은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잘려 나갈 것 같은데, 그렇게 힘을 조금 더 가하는 것을 내 안에서 거부하는 무언가가 있다. 잡고 있던 대가리를 놓자 비틀려 있던 목은 마치 강한 용수철처럼 힘좋게 제자리로 돌아와, 주둥이가 내 손등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래서 나는 꿩의 머리를 독립적인 하나의 물체로서 처음 발견하고 그 머리가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환기시키는 것에 주의를 집중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이야기 소리와 갑작스런 높은 웃음소리가 뒤뜰 우물가와 뽕밭을 갈라놓는 산 중턱의 눈 속에 흡수되어버리자, 새로 내리면서 나의 귓불에 닿는 눈이 눈송이끼리 서로 부집치는 소리가 아닐까 싶을 만큼 미세하게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 "만엔원년의 풋볼", 웅진지식하우스, 288~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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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가 집요한 외국 작가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이언 매큐언과 오에 겐자부로다. 이 중에서 '잔혹'이라는 성격까지 더한다면 아마 오에 겐자부로가 갑일 것이다. 

내가 읽어본 오에 초기 소설('사육', '죽은 자의 사치', "절규", "개인적인 체험", "만엔원년의 풋볼")의 묘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혹하고 화려하면서도, 단순히 이미지즘에 그치지 않고 서사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특히 이 "만엔원년의 풋볼"은 한 장면 한 장면이 버릴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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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는 동시 짓기를 좋아한다. 인수의 글솜씨는 김용택 시인도 인정한다. "나보다 인수가 월등해 보인다"라고 그는 말했다. 인수의 일기장은 새, 꽃, 안개, 구름, 아침, 고추, 옥수수, 나무, 나비 같은 것들로 가득하다. 인수는 자라서 시인이 되려나 보다. 그런데 인수한테 물어 보니까 그게 아니었다. 인수는 자라서 형사가 되겠다고 말했다. "왜 하필 형사냐?"라고 내가 묻자 "형사가 되어서 나쁜 놈들을 다 잡아 가두겠다"라고 인수는 대답했다. 이 세상에는 명백한 악이 존재한다는 운명적 사실을 어린 인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인수가 세상의 악을 알아가는 마음의 과정들을 생각하면서 속으로 울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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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평일이건 주말이건 하루에 딱 세 번만 상영한다고 했다. 


시작하기 십 분 전에 들어가 보니 관객석은 절반쯤 들어차 있었다. 나는 비교적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서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내 옆에는 갓 중년이 되기 시작하는 깡마른 사내가 앉아 있었다. 딱 보기에도 어딘지 무감각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사내의 무심한 인상을 흘끗대다 갑자기 스크린에서 삼성의 광고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웃었다. 삼성을 비판하는 영화에 삼성 전자의 광고가 나오다니, 하지만 이것이 자본주의의 일면이라 생각했다. 


영화는 산업재해로 인한 후유증을 겪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씨줄로, 대기업의 횡포와 협잡을 낱줄로 엮어서 삼성 반도체 사건의 과거의 현재를 착실히 보여준다. 서사는 행복한 과거-불행한 현재-되찾은 희망이라는 구도를 따라가며 인물들은 -그들의 내면에 갖가지 어혈과 분노가 맺혀 있음에도- 다소 평면적으로 그려진다. 때문에 나는 영화에서 나오는 지극한 슬픔에 몹시 공감하긴 했지만 이것이 다분히 일반적인 구석이 있다고, 주제넘게 생각했다. 오히려 영화에서 나오는 갖가지 비극적 상황들보다는, 이 실장이 한상국에게 조소 섞어 던졌던 말(정치는 표면이고 경제는 본질입니다)에 나는 더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불쾌하고 잔인하긴 해도 그 말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사실상의 진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가벼운 금단 증상을 느끼면서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싶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날 즈음 나는 이상한 기척을 느껴 옆쪽을 살펴봤다. 내 삼촌뻘인 사내는 좀 전까지 무심했던 표정을 어느샌가 지우고 이제는 손수건을 든 채 울고 있었다. 나는 사내가 흐느끼는 모습을 보다가 스크린에 시선을 돌려 한상구가 법정에서 말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강원도 사투리의 독특한 억양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에코처럼 울리고 있을 뿐이다. 본디 사투리란 지방의 언어이며 그것은 변방의 정감과, 중심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의 절실한 애환을 담아낸다. 어쩌면 판사가 한상구에게 원고 발언을 유도하게 한 대목은 -이것이 설사 팩트일지라도- 다분히 감독의 의중이 반영된 포인트라 할 만하다. 한상구는 사투리라는 구부러진 언어로, 경직된 표준어가 오갔던 법정이라는 공간을 겨눈다. 감정에 북받친 조리 없는 언어가, 차가운 논리로 무장된 텅 빈 언어들을 질타하는 모습에서 나는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인민'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것은 한국에선 사실상 버려진 말이었고, 한 줌으로 남은 재처럼 지금의 나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인민'이란 말을 떠올리며 스크린에 빨려들 듯 감응했고, 옆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주의깊게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영화는 미완의 희망적인 엔딩으로 끝난다. 한윤미의 죽음은 산업재해로 인정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소송은 기각되었기 때문이다(이들의 싸움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영화의 끝에는 실제 모델인 황상기-황유미 부녀의 사진이 나오고, 개인 기부와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명단이 차례로 나열된다. 사실 이 영화의 진정한 백미는 바로 이 엔딩 크레딧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의 앞머리로 삼성의 화려한 광고가 나왔다면, 영화의 끝에는 장삼이사들의 소박한 이름이 나온다. 거창하게 보자면, 이것은 자본의 금력과 사람들의 연대 사이에서 이 영화가 아슬아슬하게 위치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한 편의 영화가 이 아슬아슬한 위치에 서서 박해받는 자들의 아픔과 슬픔을 억척스럽게 말한다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위의와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이 글을 쓰기에 앞서서 김훈의 에세이 한 대목을 인용했다. 사실 나는 절대선과 절대악의 구도를 따르는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한 영화는 인간 내면의 복잡성을 낮추보고 시스템의 본질을 단순화하기에 좋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세상에 절대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친일파를, 군사 깡패들을, 이명박과 이건희를 제대로 단죄했는가. 단언컨대, 처벌받지 않는 행위와 행위자는 반드시 절대악으로 진화해 사람들의 숨통을 누른다. 정치 권력의 폭압과 경제 권력의 횡포는 그 외관만 달라졌을 뿐 오늘날에도 강력하게 현존한다. 불의는 이기는가? 나는 이 질문 명제에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모른다(그만큼 나는 옹졸하고 비관적인 인간이다). 그럼에도 대답을 해야 한다면 승패를 논하기 전에 먼저 불의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가족"에 나오는 작은 승리는 불의와의 싸움에서 획득한 귀중한 희망이자 별표이다. 이 희망과 별표가 -설사 파토가 될 지라도- 끝내 마음속에 간직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솔직한 감상이다.


이 영화를 누구는 좋아할 수도, 누구는 싫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금, 이 영화를 무시할 수는 없다.


사족: 윤유선 씨 참 아름답다. 나는 아름답게 늙은 여배우에게 언제나 애틋한 순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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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2-16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셨군요. 글이 좋습니다. 제 글에 덧붙여 링크를 걸어두었습니다. 아무래도 다음 주까지가 한계일 것 같습니다. 좀 아쉽군요.... 주말에 포텐 터지기를 바랐는데 말입니다.


+

윤유선 씨 참 예쁘죠 ? 그런 주름이 필요해요 ! 주름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요즘 중년배우들 전부 보톡스 맞아서 얼굴 탱탱하게 나오면 그거 엄청 짜증납니다

수다맨 2014-02-16 03:17   좋아요 0 | URL
막 쓴 글을 링크 걸어 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알라딘 인기 블로거이신 곰곰발님께서 홍보를 했는데도 일이 어렵게 되었네요ㅜㅜ 별 같잖은 영화들이 위세를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또 하나의 약속"이 흥행 돌풍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은 비극이자, 희극이라 봅니다.

아, 윤유선 배우의 주름에 저도 푹 빠졌습니다. 보톡스를 넣어 일부러 팽팽하게 만든 얼굴보다 관록과 연륜이 녹아든 주름이 더 아름답다는 것! 곰곰발님 평소 지론이 기막히게 들어맞더군요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2-16 03:37   좋아요 0 | URL
사람들은 늘 매끈한 봉합을 좋아하죠. 이음새 없는 봉합 말입니다.
< 수상한 그녀 > 같은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은 눈물을 펑펑 흘리죠.
판타지에 울죠. 판타지는 결국 가짜 아닙니까. 가짜를 두고 운다는 것은 결국
가짜를 진짜인 것처럼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일종의 판타지와의 합일'이죠.
하지만 < 또 하나의 약속 > 같은 영화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그것은 진짜가 주는 눈물인데 이 눈물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 불편하니까...

이 영화를 보고 울면 이마트 가서 장 보면 안 될 거 같으니까...

수다맨 2014-02-16 03:51   좋아요 0 | URL
곰곰발님 말씀해 주시니 생각난 게 제가 간 영화관에는 "수상한 그녀"를 틀어주는 상영관이 세 곳이나 있더군요. 세 상영관이 조조부터 야간까지 세 시간 간격으로 계속 틀어주니, 하루에 열댓 번도 더 상영하는 셈입니다.
반면에 "또 하나의 약속"은 상영관 하나에 하루에 딱 세 번만 틀어주더군요. 야간도 없었구요 ㅜㅜ 이 영화가 이렇게 박정한 대접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니 짜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