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문단에서 나름 멀리 있었던 이유로는, 첫째로는 제가 ‘작가가 되겠다’라는 생각이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의 인간이 극히 보통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가 어느 날 불현듯 소설을 하나 써서, 그것이 뜬금없이 신인상을 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문단이 어떤 것인지, 문학상이 어떤 것인지, 그런 기초적인 지식이 아예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때 저는 ‘본업(재즈카페 운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하루하루 생활이 너무도 바빠서 처리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빴습니다. 몸이 몇 개 있어도 부족하달까, 필요불가결한 것 외에는 무언가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전업작가가 되어서는 그만큼 바빠지지는 않았지만, 저만의 어떤 다짐을 가지고 극단적으로 빨리 자고 빨리 일어나는 생활을 하게 되고, 일상적으로 운동을 하게 되고, 덕분에 밤에 어디 나가는 일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신주쿠의 골든가(문단bar가 주로 밀집된 술집거리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닙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런 장소에 관여하거나 실제로 가거나 하는 필연성도 시간적 여유도 그 당시의 저에게는 ‘어쩌다보니’ 없었던 것 뿐입니다.
-아쿠타가와상에게는 ‘마력이 있다’고 하던데 저는 잘 모르겠고 ‘권위가 있다’고 하는 것도 잘 모르겠고 그런 것 자체를 의식한 적도 없었습니다. 여태까지 누군가가 이 상을 타고 누가 타지 못했는지 그런 것도 모릅니다. 예전부터 관심도 없었고 지금도 비슷한 정도로(랄까 점점 더) 관심이 없습니다. 혹시 그 칼럼의 저자가 말씀하셨듯이 아쿠타가와상의 마력같은 것이 있다고 해도 최소한 그 마력은 저 개인 가까이까지는 미치지 못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마력은 아마 길 어드매에서 헤매다가, 저한테까지 도달하지 못한 거겠지요.
-이런 것을 말하면 열받을지 모르지만, 아쿠타가와상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문예춘추’라고 하는 민간출판사가 영업의 일환으로 만든 상에 불과합니다. 문예춘추는 그걸로 장사하고 있는 거지요-까지는 말 못하지만, 장사에 활용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 됩니다. 어쨌든 간에, 이만큼 오랫동안 소설가를 하고 있는 인간의 실감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신인레벨의 작가가 쓴 것들 중에서 정말로 괄목할 만한 작품이 나오는 일은 대개 5년에 한 번 꼴 정도입니다. 조금 더 관대하게 말하자면 2,3년에 한 번 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해에 두 번 뽑는 거니까 결과적으로 퍼주는 격이 됩니다. 물론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지만(상이라는 것은 많든 적든 축제의식같은 것이고, 문호를 넓히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서 그렇게 매번 매스컴 대상으로 행사하면서 소란피울만한 레벨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밸런스가 좀 이상해지고 있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한 편지 속에서 노벨문학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대작가가 되고 싶은 것일까? 나는 노벨문학상을 타고 싶을까? 노벨문학상이 뭐란 말이냐. 너무나 많은 이류작가들에게 이 상이 주어지고 있다. 읽을 마음도 들지 않은 그런 작가들에게 말이다. 저런 상을 타면 스톡홀름까지 가서 정장입고 연설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벨문학상이 그 수고를 할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나는 단연코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인작가 넬슨 올그렌은 커트 보네거트의 강한 추천을 받아서 1974년에 미국문학예술아카데미의 공로상수상자에 뽑혔는데 그 부근의 바에서 어떤 여자와 술을 마시다가 그만 수상식을 펑크내고 말았습니다. 물론 의도적이었습니다. 나중에 따로 보내진 수상메달을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 “음…어딘가 던져버렸던 것 같기도 하고…”라고 대답했습니다. [스터즈 터켈 자전]이라는 책에 그런 에피소드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과격한 예외일지도 모릅니다. 독자적 스타일과 일관된 반골정신을 가진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던 것은 아마도 ‘진정한 작가에게 있어서 문학상보다 중요한 것이 몇 가지가 있다’라는 것이겠지요. 그 중 하나는 자신이 의미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확신이고, 또 하나는 그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독자가 – 숫자는 둘째치고 – 제대로 거기에 존재해준다는 확신입니다. 그 두 가지의 확실한 감촉을 감지할 수만 있다면 작가에게 있어서 상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버립니다. 그런 것은 그저 사회적인 혹은 문단적인 형식상의 인정에 불과합니다.
-저는 태어나서 여태껏 문학상의 심사위원을 맡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의뢰받은 적은 있지만 ‘죄송합니다, 저는 못합니다’라고 거절해왔습니다. 심사위원을 할 자격이 저에게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고 하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너무나도 개인적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저라고 하는 인간 안에는 저 자신의 고유의 비전이 있고 그에 형식을 입혀가는 고유의 프로세스가 있습니다. 그 프로세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포괄적인 삶의 방식부터 시작해서 개인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글을 잘 쓸 수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저 자신의 ‘잣대’이고, 저한테만 그렇다는 것이지 다른 작가들한테까지도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의 방식 외의 모든 방식을 배척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만(저와 해나가는 방식은 달라도 경의를 가지는 대상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이것은 어떻게 해도 나와는 안 맞는다’ 혹은 ‘이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라는 것들은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자신이라고 하는 축만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평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개인주의적인 것이고, 걍 말하면 제멋대로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저의 제멋대로인 잣대를 가지고 타인의 작품을 평가한다면, 그걸 당한 사람은 왠지 억울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미 작가로서의 지위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세상에 나온지 얼마 안 되는 신인작가의 운명을, 저의 편견이 들어간 세계관으로 좌우하는 일은 무서워서 할 수가 없습니다.
-작가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책무는 조금이라도 질이 높은 작품을 계속 써나가고 그것을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저는 일단은 현역 작가이고, 바꿔 말하면 아직도 발전도상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아직 찾는 입장에 있는 사람입니다. 전장의 최전선에서 어떻게든 싸워나가야 하는 상태의 인간일 뿐입니다. 거기서 살아남아 계속 앞으로 전진해나가는 것, 그것이 저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타인의 작품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읽고 평가하고 책임을 가지고 추천하거나 혹은 팽하거나 하는 작업은 현재의 저의 시야에는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한다면 – 물론 일단 하면 열심히 할 수 밖엔 없겠지만 – 적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일에 들어갈 시간과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정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그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함께 제대로 잘 해나가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자기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매일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찹니다.
-제가 여기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작가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격’이라는 것입니다. 문학상은 어디까지나 그 자격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만을 해야합니다. 상이라는 것은 작가가 한 작업물의 성과도 아니고, 보상도 아니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는 물론 결론같은 것도 아니죠. 어떤 상이 그 자격을 어떤 종류의 형식으로든 보강해준다면 그것은 그 작가에게 있어서 ‘좋은 상’이 될 것이고, 그것이 안 되면, 혹은 반대로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된다면, 아쉽지만 ‘좋은 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면 올그렌처럼 메달을 멀리 내던져버리거나 챈들러처럼 스톡홀름행을 거부한다고 호언장담하게 됩니다 – 물론 그가 그런 입장에 놓인다면 실제로는 어떻게 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ㅡ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상에 대하여-무라카미 하루키 사적 강연록2" 中에서
출처:http://catwoman.pe.kr/xe/3036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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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실린 글-비록 강연록이지만-을 읽으니 하루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작가정신은 높이 평가한다. 적어도 하루키는 오늘날 시장과 문학, 독자와 문학의 관계를 정확하고 사려 깊게 숙고하는 작가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앞으로 써나가야 할 글과, 주머닛돈을 헐어 자신의 책을 사줄 독자들이다. 즉, 진정한 작가는 문단의 평가나 상의 획득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독자와, 자신과 정면 승부를 치른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는 -그 소설적 성취가 고전의 수준에 미만할지라도- 오래전에 작가혼을 불살랐던 몇몇 고전적인 작가들의 면모를 일정 부분 가지고 있다. 물론 그에게 마루야마 급의 자세를 요구할 수는 없지만, 이만하면 오늘을 살아가는 작가의 마음가짐치고 너무도 훌륭하지 않은가.
하루키의 신작이 나오면 나는 또 험궂은 비판을 가할 게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건필을 바란다. 때로 존경할 만한 적을 가진다는 것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얻는 것보다 더 기쁘고 소중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