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실비평’이나 ‘주례사비평’처럼 표층은 칭찬과 격려로 가득 차 있지만 심층은 친분이나 인맥, 혹은 권력관계로 인해 의식적으로 목적화된 비평이 좋은 것일 리 없다. 역으로, 이번 사태로 언론에 ‘급부상’한 몇몇 비평가들처럼 입바른 소리를 쩍쩍 해댄 비평가들은 표층적으로 ‘나쁜 말’을 쏟아냈지만 심층으로는 ‘좋은’ 결과를 노정했을지도 모른다. 핵심은 그들이 ‘좋은 비평가’였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게 아니다. 근대 문학은 무엇보다도 제도로서 기능하며, 비평가는 그 제도 속의 한 부분이라는 현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비평가의 자의식은 대개 이러한 제도와의 갈등과 대결 속에서 성립하며, 그에 순종하기도 일탈하기도 하면서 표현된다. 비평의 무의식이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발자크가 왕당파로서의 자의식(이 역시 명료한 현실의식, 곧 ‘리얼리즘’이다)을 넘어서 더 높은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을 향해 자신의 글을 밀고 갔다면, 그것은 글쓰기의 무의식에 자신을 합류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도 내의 한 장치인 비평가가 자신의 자의식 너머로까지 글쓰기를 밀어붙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비평이라는 글쓰기의 무의식에 자신을 동조시켰기 때문이다. 비평가의 무의식은 그 자체로 성립하는 게 아니라 비평의 무의식과 공명할 때 작동하는 것이고, 제도를 넘어서는 비평행위의 출발점은 필연코 그렇게 비롯될 수밖에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 잘 알려져 있듯, 비평은 비판이다. 미하일 바흐친은 자기비판이 되지 못하는 비판은 냉소적 풍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와 같은 풍자는 대상과 자신의 연루를 부인하고, 홀로 고고한 입장에서 대상에 칼질을 해대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자기비판을 함축하는 비판, 즉 비평이란 무엇인가? 비평이 버티고 선 지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이 아닐까? 이는 다분히 무의식적 힘을 경유하지 않고는 어려운 노릇이다. 누구도 자기의 근거지반을 무너뜨릴 생각을 하기 어려운 탓이다. 하지만 진정한 윤리의 거처는 거기 아닌 다른 곳이 될 수 없다. 비평의 무의식이 제도를 넘어서는 힘이며, 윤리적 차원을 향한다고 말할 때, 그 전제는 비평이 도덕과 제도를 우선적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면돌파야말로 비평가의 자의식이 가장 꺼리는 작업 아닌가. 자기파멸의 위험을 안고서 주사위를 던질 수 있는 ‘목숨을 건 도약’ 혹은 비평의 무의식에 비평가는 자신을 실어보낼 수 있을까? 도덕과 제도를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은 채 윤리의 지평을 정신적으로 획득하는 행위는 우스꽝스런 정신승리법에 불과할 것이다.
최진석의 "비평의 무의식과 비평의 자의식"
출처: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letters_vilage&ps_boid=23
아주 오랜만에 정독한 에너지 넘치는 글이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자기 파멸의 위협을 안고서 본인이 몸담은 제도와 도덕을 질타하는 평자가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나는 그러한 평론가를 조영일, 이명원 등 극소수들 말고는 본 적이 없다. 내가 보기에는 대다수 평론가들의 지성과 논리는 지금의 제도를 넘어선 대안의 장을 마련하는 데 바쳐지기보다는, 기존의 구습과 타협하는 자신의 처지를 교묘하게 옹호하고, 반복하는 차원에서만 발동되고 있는 듯하다. 공부로 습득한 지식의 양은 방대하되 그 지식이 비판 정신을 견인하기보다 제도와의 공모(共謀)를 추구하려는 수단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