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고로 필자는 DC 유니버스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렇기에 이 평은 순전히 영화 "조커"만을 보고서 쓰는 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우리말에는 '담그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로 하나는 액체에 무언가를 넣는 것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김치/젓갈/장/술 따위를 익히거나 삭힐 때 주로 쓰인다. 그리고 사전에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담그다'는 조폭 계에서 은어로도 사용되고 있으며 그 뜻은 칼질이나 총질로 인명을 해하는 것이다.
나는 "조커"를 보면서 담금이라는 말을 수차례 떠올렸다. 누군가를 담그는 행위, 인명을 살상하는 행위가 작중에 나오면서 이것이 (적어도 나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문학적/사회적 의의를 지녔던 경우가 얼마나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적은 나로서는 예전에 읽었던 이 나라의 몇몇 문학서를 생각했다. 최서해의 '홍염', 조세희의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정도가 우선적으로 떠올랐다. 전자에서는 소작인이 자신의 딸을 강제로 빼앗은 중국인 지주를 죽이고 후자에서는 난장이의 큰아들이 은강기업의 중역으로 보이는 화자의 삼촌을 살해한다. 정리하면 이들은 정상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불우한 상황을 극복할 수 없을 때 살인을 통해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피억압자의 극한 심경을 폭로한다.
영화 "조커"의 주인공인 아서 펠렉의 외양과 심경의 변화는 앞서 말했던 소작인/노동자의 모습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아서 펠렉은 고담시라는 지역에서 먹이사슬의 최하층에 속해 있다. 그는 고용주로부터 무시 받고 동료에게 배신 당하며 이웃과 모친의 관심을 바라나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주인공의 장래희망은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코미디언이지만 병적인 웃음(pathologic laughing)이라는 장애가 있어서 혼자만 발작적으로 웃어댈 뿐 그 누구도 웃기지 못한다.
무엇보다 아서 펠렉의 이성을 철저하게 무너뜨렸던 사람들은 그가 친부라고 생각하는 고담시의 부호인 토머스 웨인과,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유명 코미디언 머레이 프랭클린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부의 획득이나 직업적인 성공을 넘어서, 자신이 아버지라고 믿고 있는 이들이 베푸는 인정과 애정이다. 그는 토머스 웨인을 만나서 자신을 한 번만 안아달라며 애원하고, 대형 무대에서 머레이 프랭클린에게 칭찬 받는 본인의 모습을 환각한다. 그러나 그가 믿는 혈연으로서, 자신이 바라는 미래상으로서 작중에 나타나는 아버지들은 아서 펠렉에게 더없이 무례하게 군다. 웨인은 아서의 코에 주먹을 내리꽂고 머레이는 그의 병적인 웃음을 관객들 앞에서 조롱한다.
바로 여기, 사회적 약소자가 있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인간적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국가에서 받던 지원도 끊겼으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려 해도 사람들로부터 사회의 방외자, 하급자, 낙오자, 실패자 취급을 당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인지하게 되면서 아서 펠렉이라는 이름을 내던지고 그를 버러지처럼 보려는 이들에게 총질도 마다하지 않는 조커로 환골탈태한다.
위근우 같은 평자는 어느 칼럼에서 조커를 가리켜 '각성한 혁명가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타락에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관종'이자 '자의식 과잉의 범죄자'라는 혹평을 내린다. 헌데 나로서는 이러한 진단을 읽노라면 일종의 엘리트 의식과 자기 우월감, 약자에 대한 혐오 감정이 느껴진다. 이 영화는 애초에 혁명(가)의 필요성을 역설하지도 않았고 세계사적 의미를 얻고자 애쓴 것 같지도 않으며 살인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지도 않았다. 다만 힘없는 사람들이 더할 수 없는 물질적/심리적 곤경에 처해 있고 사회로부터 아무런 희망과 도움을 기대할 수 없을 때, 이들의 감정이 극단적인 폭력 행위로 분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위근우 같은 이들이 말하는 신념(세계사적 의미를 깨우친 명민한 혁명가들이 타락하지 않은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설령 광기나 반동이란 이름으로 표현될지라도, 가난하고 차별 받는 이들의 분노가 사회의 상층부와 심장부를 어떻게까지 난도질(담금)할 수 있는지를 강도 높게 서사화한다.
조커는 각성한 순간부터 비극의 희생자가 아닌 희극의 주동자로 맹활약하기 시작한다. 아서 펠렉이 계단을 오르는 순간은 소외자의 피로감과 슬픔을 보여주지만 조커가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이 세상을 난장판이자 우스개로 보려는 인간의 경쾌감이 느껴진다. 그는 빈민이자 장애인의 처지를 흥밋거리로 써먹는 머레이를 향해 죽어도 마땅한 인간이라고 일갈하면서 총을 쏜다. 그리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이들(형사와 금융사 직원)의 죽음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자신과 같은 하층민들의 실존을 하찮게 여기려는 이 사회에 대해서 신랄한 저주를 퍼붓는다.
광대 가면을 쓴 고담시의 시위자들은 조커의 살해 장면과 독설을 방송으로 접하면서 더욱 격렬하게 폭동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시의 빈민들을 무능력자로 취급했던 토마스 웨인은 어느 시위자에게 (조커가 머레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죽어도 마땅하다는 말을 듣고 총에 맞아서 사망한다. 조커는 화마에 뒤덮인 고담의 시가지와 열광하고 있는 시위자들을 보면서 춤을 춘 다음 피를 입꼬리에 묻히면서 웃는 모습을 내보인다. 이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하나는 모든 통제에서 벗어나서 거리낌없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이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쾌감(위근우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에만 착목하고 있는 것 같다), 또 하나는 빈민을 천시했던 이들이 비참하게 죽고 약자들이 세상을 잠시나마 뒤엎는 데서 비롯하는 통쾌감, 마지막 하나는 이와 같은 파멸적인 결과를 방지하고자 한다면 사회 안전망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이다.
제대로 만들어진 '담금'의 서사를 볼 때면 부피는 늘었을지 모르나 내실은 어딘가 약소해진 듯한 한국 문학의 실태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총칼로 유산계급과 그들의 부역자를 담근다'는 식의 서사는 폭력적인 데다가 충분히 근본적이지도 못하고 자칫하면 조야한 누아르나 신파적인 복수극으로 변질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럼에도 환대와 친애와 치유와 사랑과 같은 말들이 어느 때부턴가 매가리가 없어 보이고, 나약하고 서글픈 마음으로나마 우리가 서로서로 연대해서 살아가는 삶에는 복됨과 소중함이 있다는 (어느 순간부터 흔해진) 류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진이 빠지는 경우가 많다. 영화 "조커"는 달달하거나 물렁해진 이야기에 싫증이 난 분이라면, 이 엉망인 세상을 예리한 시선으로 돌아보려는 욕구를 가진 분이라면, 기꺼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본 다음 오래전에 "넘버 3"에서 한석규가 했던 대사를 내 식대로 바꾸어 보았다.
'아무리 대단한 자본가도 심장에 기스나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