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의 고난은 끝나지 않고, 공권력은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폭압하며, 여성가족부는 레즈비언은 여성 국민이 아니라고 몰아세우고, 정권 차원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는 와중에, 나는, 우리는 도대체 국가란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가난하고 늙은 파월 장병의 통장 입금 내역에서든, 연예인 위문 공연에 눈물 줄줄 흘리는 새까맣게 탄 젊은 파월 장병의 가슴에서든 이영식들이 말하는 조국의 실마리를 찾아내고 이영식들하고 함께 가닥가닥 발라내어 새로운 실마리를 만들어야겠다. 그래야 내가 살고 싶은 나라의 시민들을 그려볼 수 있다.

참전 용사들을 보수 할배로 취급하고 마는 진보는, 월남전 참전 용사 이영식이 자기 아버지를 혐오한 그 혐오의 다른 모습이다. 성찰 없는 자식들은 젊어 자기 부모를 혐오하다, 나이들어 자기가 그 부모를 닮은 사실을 알고서야 울면서 그 부모를 달랑 용서해버리고는, 자식에게 미움 받으며 살다, 죽는다. 아버지를 제대로 죽이지 못한 자식이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은, '너도 늙어봐라'가 전부다. 

새롭게 꾸려질 진보는 가난의 구조화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비하에 개입할 길을 먼저 찾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왜 보수화되느냐는 질문에 내놓을 답도 그 언저리에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는 지배자를 향한 선망과 숭배로 이어진다.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비하를 깊이 살피고, 그 사람들을 옹호하되 함께 분석한 뒤, 자기 긍정의 에너지를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힘으로 모아내야 한다. 그저 계급과 임금과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어느 시절 어느 순간이든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성찰과 직립과 통찰의 실마리가 거기에 있다. 거기서 이어지는 삶은 그것 자체가 실천이다.

ㅡ 최현숙의 "할배의 탄생" 마지막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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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고위 공직자를 만날 일이야 손톱만큼도 없겠지만 만약에라도 기회가 생긴다면 이들에게 추천하고픈 책이 두 권 있다. 하나는 변진경의 "흙밥 청년 보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최현숙의 "할배의 탄생"이다. 각각 청년과 노인을 다루는 이 두 책은 저자의 성실성과 글의 현장성과 약자들에 대한 이해도가 두드러진다. 

미안한 말이지만 "90년생이 온다'와 같은 책이 국가 원수의 추천을 받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풍경이야말로 나에게는 희비극적인 상황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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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나 취미 생활의 고상함과 천박함의 차이는 여유의 문제이며, 여유 있는 사람들이 만든 구별 짓기다.

'데리고 논다', '건든다', '싼다', '줄줄줄줄', '미친다' 등 성애적 관계와 행위를 꾸미는 김용술의 표현을 천박하다고 낙인찍는 시각은 그렇게 해야 사정할 수 있는 배운 놈들의 자위일 뿐이다.

나는 고상함과 천박함의 구별 짓기를 지배자들이 계급과 정상성으로 약자를 차별하고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규범으로 본다. 김용술 같은 여유 없는 사람들은 천박할 수밖에 없고, 나는 그 점을 말과 글로 옹호한다. 상대가 천박해서 불편하다면 내 소갈머리를 살펴야 한다. 천박을 옹호하려는 내 말과 글이 고상한 단어들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내 삶과 언어의 치명적 한계다. 내가 그 사람들보다 덜 천박하다면 내 삶의 여유에서 비롯된 '배운 년'의 체면과 껍데기 때문이다.

김용술은 깊고 무거울 기회가 없었다. 생각이 깊고 무거웠다면 자괴에 빠져 생존이 어려웠다. 막 살아서 살아남았다. 천박한 덕에 자유롭기도 하다.

빌어먹으려고 탈탈 털고 패스보트 하나만 챙겨 혼자 떠나며 살았다. 다행히 낙천적이다. 어린 시절이 좋았던 게 평생 힘이라고 했다. 말하지 않았다 해서 고민과 후회와 자기 성찰을 하지 않았을 리 없지만, 몸과 마음의 발목을 잡지는 않았다. 마흔 초반에 돼지호박 5500원 어치를 니야까(리어카)에 싣고 다시 일어섰고, 혈액암에 걸린 채 일흔하나로 지하 모퉁이에서 사는 지금도 혼자서 온갖 생각을 다 한다. 할 수 있는 일도 많고, 하자는 사람도 많다. 의미 없게 살았다는 반성도 하고, 의미 있게 사는 방법을 찾아서 실천도 한다.

ㅡ 최현숙 "할배의 탄생" 139~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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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가난하고 늙은 남자의 육성을 받아 적는다. 그 이의 생각과 삶에는 모순과 위선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직성과 실천성도 공존하고 있다. 여성을 성욕 해소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던 지난 삶을 합리화하면서도 아내와 자식에게 상처를 주었던 자신의 행위를 뒤늦게야 반성하기도 한다. 이 사회에 특별히 기여한 것도 없지만 남들에게 민폐 만큼은 끼치지 않고자 고령의 나이에도 옷 수선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저자는 태극기 부대와 비슷한 정서와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어느 노인의 인생을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그는 특정한 프레임(예컨대 오찬호 같은 사람들의 18번인 이십대 개새끼론이나 태극기 부대를 일컫는 꼰대론)에 갇히지 않고 그 이가 살았던 질곡의 현대사와 야만의 사회상을 반추하면서도 결국에는 그 시대가 주입했던 관념(적자생존, 반공주의, 남존여비 등등)에 연관되고 동조했던 한 남성의 모습을 구체감 있게 그려낸다. 저자는 본인의 작업을 구술 생애사 집필이라고 정의하는 듯한데 내가 보기에는 몇몇 사회학자들의 저술보다 훨씬 더 가치있고 종요롭게 보인다. 

아직 전반부만 읽었지만 이 책 참으로 괜찮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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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회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홍준표의 의견을 요약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1. 민주당은 정기국회 안에서 패스트트랙 안건을 마지막 순위로 상정할 것이다.

2. 필리버스터는 작금의 회기 안에서만 시행 가능하다.

3. 현 정기국회가 종료되면 단시일 내에 임시국회가 열릴 텐데 (국회법 106조의2 8항에 따라서) 자한당은 패스트트랙 안건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또 다시 시행할 수 없다.

 

나는 홍준표를 신뢰한 적도 없고 호감을 가진 적은 더더욱 없지만 페이스북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하지만 복구될 가능성이 전무한 고장난 시계 고치느니 차라리 새 시계를 사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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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11-30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다키스트 아워를 보면 ˝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 라는 대사를 하며 처칠을 비웃는 장면이 있는데... 그 문장에 수다맨 님 글에서 보게 되는군요..

수다맨 2019-12-01 10:46   좋아요 1 | URL
홍준표가 고장난 시계라면 현재 자한당의 절대 다수는 박살난 시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장난 시계이건 박살난 시계이건 복구 가능성이 전무해서 그 본연의 기능(제때 시간 알려주기)을 사용할 수 없다면 둘 다 폐기처분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나마 하루에 겨우 두번 맞는 시계를 사용하느니 새 시계를 사는 게 낫지요

강가딘 2019-12-27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새시계가 없어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요

수다맨 2019-12-28 15:17   좋아요 0 | URL
글쎄요. 새 시계를 도무지 구할 수 없다면 이것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그 제작 과정에서 나 자신이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제 답변도 소략하기 그지없네요.
 

 

 * 참고로 필자는 DC 유니버스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렇기에 이 평은 순전히 영화 "조커"만을 보고서 쓰는 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우리말에는 '담그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로 하나는 액체에 무언가를 넣는 것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김치/젓갈/장/술 따위를 익히거나 삭힐 때 주로 쓰인다. 그리고 사전에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담그다'는 조폭 계에서 은어로도 사용되고 있으며 그 뜻은 칼질이나 총질로 인명을 해하는 것이다.

 

나는 "조커"를 보면서 담금이라는 말을 수차례 떠올렸다. 누군가를 담그는 행위, 인명을 살상하는 행위가 작중에 나오면서 이것이 (적어도 나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문학적/사회적 의의를 지녔던 경우가 얼마나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적은 나로서는 예전에 읽었던 이 나라의 몇몇 문학서를 생각했다. 최서해의 '홍염', 조세희의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정도가 우선적으로 떠올랐다. 전자에서는 소작인이 자신의 딸을 강제로 빼앗은 중국인 지주를 죽이고 후자에서는 난장이의 큰아들이 은강기업의 중역으로 보이는 화자의 삼촌을 살해한다. 정리하면 이들은 정상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불우한 상황을 극복할 수 없을 때 살인을 통해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피억압자의 극한 심경을 폭로한다.

 

영화 "조커"의 주인공인 아서 펠렉의 외양과 심경의 변화는 앞서 말했던 소작인/노동자의 모습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아서 펠렉은 고담시라는 지역에서 먹이사슬의 최하층에 속해 있다. 그는 고용주로부터 무시 받고 동료에게 배신 당하며 이웃과 모친의 관심을 바라나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주인공의 장래희망은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코미디언이지만 병적인 웃음(pathologic laughing)이라는 장애가 있어서 혼자만 발작적으로 웃어댈 뿐 그 누구도 웃기지 못한다.

 

무엇보다 아서 펠렉의 이성을 철저하게 무너뜨렸던 사람들은 그가 친부라고 생각하는 고담시의 부호인 토머스 웨인과,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유명 코미디언 머레이 프랭클린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부의 획득이나 직업적인 성공을 넘어서, 자신이 아버지라고 믿고 있는 이들이 베푸는 인정과 애정이다. 그는 토머스 웨인을 만나서 자신을 한 번만 안아달라며 애원하고, 대형 무대에서 머레이 프랭클린에게 칭찬 받는 본인의 모습을 환각한다. 그러나 그가 믿는 혈연으로서, 자신이 바라는 미래상으로서 작중에 나타나는 아버지들은 아서 펠렉에게 더없이 무례하게 군다. 웨인은 아서의 코에 주먹을 내리꽂고 머레이는 그의 병적인 웃음을 관객들 앞에서 조롱한다.

 

바로 여기, 사회적 약소자가 있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인간적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국가에서 받던 지원도 끊겼으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려 해도 사람들로부터 사회의 방외자, 하급자, 낙오자, 실패자 취급을 당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인지하게 되면서 아서 펠렉이라는 이름을 내던지고 그를 버러지처럼 보려는 이들에게 총질도 마다하지 않는 조커로 환골탈태한다.

 

위근우 같은 평자는 어느 칼럼에서 조커를 가리켜 '각성한 혁명가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타락에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관종'이자 '자의식 과잉의 범죄자'라는 혹평을 내린다. 헌데 나로서는 이러한 진단을 읽노라면 일종의 엘리트 의식과 자기 우월감, 약자에 대한 혐오 감정이 느껴진다. 이 영화는 애초에 혁명(가)의 필요성을 역설하지도 않았고 세계사적 의미를 얻고자 애쓴 것 같지도 않으며 살인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지도 않았다. 다만 힘없는 사람들이 더할 수 없는 물질적/심리적 곤경에 처해 있고 사회로부터 아무런 희망과 도움을 기대할 수 없을 때, 이들의 감정이 극단적인 폭력 행위로 분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위근우 같은 이들이 말하는 신념(세계사적 의미를 깨우친 명민한 혁명가들이 타락하지 않은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설령 광기나 반동이란 이름으로 표현될지라도, 가난하고 차별 받는 이들의 분노가 사회의 상층부와 심장부를 어떻게까지 난도질(담금)할 수 있는지를 강도 높게 서사화한다.

 

조커는 각성한 순간부터 비극의 희생자가 아닌 희극의 주동자로 맹활약하기 시작한다. 아서 펠렉이 계단을 오르는 순간은 소외자의 피로감과 슬픔을 보여주지만 조커가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이 세상을 난장판이자 우스개로 보려는 인간의 경쾌감이 느껴진다. 그는 빈민이자 장애인의 처지를 흥밋거리로 써먹는 머레이를 향해 죽어도 마땅한 인간이라고 일갈하면서 총을 쏜다. 그리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이들(형사와 금융사 직원)의 죽음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자신과 같은 하층민들의 실존을 하찮게 여기려는 이 사회에 대해서 신랄한 저주를 퍼붓는다.

 

광대 가면을 쓴 고담시의 시위자들은 조커의 살해 장면과 독설을 방송으로 접하면서 더욱 격렬하게 폭동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시의 빈민들을 무능력자로 취급했던 토마스 웨인은 어느 시위자에게 (조커가 머레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죽어도 마땅하다는 말을 듣고 총에 맞아서 사망한다. 조커는 화마에 뒤덮인 고담의 시가지와 열광하고 있는 시위자들을 보면서 춤을 춘 다음 피를 입꼬리에 묻히면서 웃는 모습을 내보인다. 이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하나는 모든 통제에서 벗어나서 거리낌없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이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쾌감(위근우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에만 착목하고 있는 것 같다), 또 하나는 빈민을 천시했던 이들이 비참하게 죽고 약자들이 세상을 잠시나마 뒤엎는 데서 비롯하는 통쾌감, 마지막 하나는 이와 같은 파멸적인 결과를 방지하고자 한다면 사회 안전망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이다.

 

제대로 만들어진 '담금'의 서사를 볼 때면 부피는 늘었을지 모르나 내실은 어딘가 약소해진 듯한 한국 문학의 실태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총칼로 유산계급과 그들의 부역자를 담근다'는 식의 서사는 폭력적인 데다가 충분히 근본적이지도 못하고 자칫하면 조야한 누아르나 신파적인 복수극으로 변질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럼에도 환대와 친애와 치유와 사랑과 같은 말들이 어느 때부턴가 매가리가 없어 보이고, 나약하고 서글픈 마음으로나마 우리가 서로서로 연대해서 살아가는 삶에는 복됨과 소중함이 있다는 (어느 순간부터 흔해진) 류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진이 빠지는 경우가 많다. 영화 "조커"는 달달하거나 물렁해진 이야기에 싫증이 난 분이라면, 이 엉망인 세상을 예리한 시선으로 돌아보려는 욕구를 가진 분이라면, 기꺼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본 다음 오래전에 "넘버 3"에서 한석규가 했던 대사를 내 식대로 바꾸어 보았다.

 

'아무리 대단한 자본가도 심장에 기스나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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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11-26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리뷰를 뒤늦게 읽었네요. 저는 아직 못 봤습니다. 개봉하자마자 볼려고 찍은 영화였는데, 요즘은 의욕이나 흥미 자체가 없어요. 모든 장르에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수다맨 2019-11-26 16:09   좋아요 2 | URL
주변 친구들이 이 작품에 대해서 호평을 하기에 저도 간만에 영화 관람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물론 위근우와 손희정 같은 평자들은 조커에 대해서 혹평(조커는 무지하기 짝이 없으며 거칠고 한심한 관종일 뿐이다)을 하던데 저는 이런 이들의 평론을 읽고 나니 지식 좀 있다는 사람들의 어떤 거드름과 선민의식 같은 것이 느껴지곤 합니다. 이들은 조커를 가리켜 관종이니, 인셀이니 하는 식으로 폄훼하던데 저는 저런 용어들을 함부로 난사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들이 혐오하는 조커 만큼이나) 유해하고 폭력적이라고 봅니다.
 

 

 

 

 

 

 

 

 

 

 

 

 

 

"몇몇 활동가나 이론가의 생각으로는 이런저런 미시정치적 활동이, 그것이 자기수양의 생활의 실천이건 개인적 소비 선택의 실천이건 간에, 대규모로 조직된 운동보다 더 중요한 행동의 중심지다ㅡ 이러한 억측은 조직의 새로운 유형을 조성하는 일에 어려움을 더하는데, 그것이 집합성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일을 훨씬 드물게 더 어렵게 하거니와 덜 '신선'해 보이기 하게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일부 활동가나 이론가는 감성상의 대상과 창작물들을 계급/정당/노조가 놓쳐버린 정치적 잠재력을 전시하는 것으로 취급한다. 이와 같은 감성적 초점은 노동자 인민의 조직된 투쟁으로부터 정치를 절연함으로써 정치를 구경꾼이 쳐다보는 것으로 만들어낸다. 이로써 예술 생산물들은, 실제 상품이건 상품화된 경험이건 간에, 정치적 투쟁을 거리에서 쫓아낸 뒤 화랑에 가져다두면서 정치적 정동을 유통시키기 때문에 자본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구경꾼들은 자기 손을 더럽힐 필요 없이 급진적인 것을 만끽하기 위해 지불(하거나 기부)할 수 있다...... 찰나적 행동과 특이한 우발행위에ㅡ 유희적 혼란과 순간적 논쟁거리가 되는 영화 혹은 소설에ㅡ 찬사를 보내는 일 또한 마찬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ㅡ "공산주의의 지평" 2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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