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티처 - 제2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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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단점만 빼면 빼어난 저작. 작품 속 한국어학당이 단순한 언어 교육의 장소가 아니라 한류를 이용해 돈벌이에 혈안이 된 공간이라는 것, 이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노동력 착취와 젠더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문화강국‘ 한국의 실상이자 심층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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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21-04-26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만점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상술했듯이 내가 보기에는 이 작품에 하나의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저작이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장편이 아니라 일종의 연작소설로 읽혔다. 부언하면 한국어학당이라는 공간은 멀게는 행복동(조세희의 ˝난쏘공˝)과 원미동(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고 가깝게는 별어곡역(임철우의 ˝이별하는 골짜기˝)을 상기하게 만든다. 즉 장소성은 특별하지만 해당 장소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이 서사적, 전체적으로 긴밀하게 맞물리기보다는 각자의 사정과 감정을 드러내는 데만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는 소설집의 미덕일 수는 있어도 장편의 강점으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저작에서 계절 별로 나뉘는 각각의 장(chapter)들은 점층적으로 종합성을 확보하는 형태가 아니라 지나치리만치 독립적인 개별체의 인상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순서대로 이어지는 장들이 유기적인 총체성을 가지기보다는, 느슨한 연결성을 갖춘 중단편소설 너댓 편을 한 책으로 묶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이 책이 만일 연작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면 더없이 고평했을 테지만 장편이라고 부르기에는 각 장의 독립성과 파편성이 도드라진다.
 
- 서용좌 장편소설
서용좌 지음 / 문학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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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적인 노년 여성의 고백이 곡진하다. 그 고백에는 오래전 장애 남성의 청혼을 거절했던 자의 자책감이 있으며, 자유와 풍요를 만끽하며 사는 지인들에 대한 거리감도 있다. 고립된 자의 연민과 인멸의 정서가 우러난 이 작품에는 동물성으로 팽배한 한국사회를 들여다보려는 진지한 정신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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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21-04-1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전에도 썼듯이 나는 서용좌라는 소설가를 알지 못했다. 이 책이 도서관에 없었다면 작가의 이름을 앞으로도 영영 몰랐을 것이다. 계속 읽기는 하지만 최근 한국소설에 심드렁해진 나로서는 이런 숨은 고수를 만나면 반가움과 아쉬움이 동시에 든다. 내가 보기에는 (사실상 개점휴업이거나 지나치게 수필화된 작품을 쓰는) 동세대의 유명한 원로 작가군보다 더 뛰어나고, 더 치열하다.
이 작가의 작품을 좀 더 찾아보고자 한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 실은 두려웠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막연하게 작은 삶과 작은 행복을 꿈꾸었었다. 요즈음 말로 소확행이다. 그래서 요즈음 젊은이들이 소확행 어쩌고 하는 일에 신경이 곤두선다. 삶은 소확행으로 재단되어서는 아니 되는 무엇이다. 살 만큼 살고 보니 그렇다. 일찍 가신 우리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고 보니 확실히 그렇다.

강아지한테 미안한 말이지만, 누군가의 무릎에 졸고 있는 강아지나 고양이게는 소확행이 괜찮을 가치일는지 모른다. 어차피 누군가에게 소유되어 버렸으니까. 야생의 개와 고양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반려동물 말이다. 만일 요즈음 젊은이들이 소확행을 가치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구조의 신에게 소유되어 버렸다는 뜻이 된다. 현상의 구조 앞에 무릎을 꿇었거나 외면한다는 말이다. 이 구조는 모두가 외면한다고 해도 거기 그대로 버티고 있을 것이고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들이 이 구조에 굴한다면 더는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말하고 싶다. 그렇게 살고 나면 너무도 허무할 뿐이라고. 너무 허무해서 감당하기 힘든 노년을 맞게 된다고, 노인이라고 해서 시시함과 허무함을 다 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ㅡ 서용좌의 "숨" 151~152쪽.


나는 서용좌라는 소설가를 알지 못했다. 도서관 한편에 이 책이 꽂혀 있어서 가져왔고 특별한 기대 없이 책장을 넘기는 중이다. 윤기 도는 쌀밥보다는 질감이 거칫한 잡곡밥을 씹는 느낌인데 그러다가 이런 구절과 만나면 감흥과 감동이 일면서, 세상에는 '숨은 고수'가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나는 소확행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년에 소확행을 찬하던 어느 평론가의 소설집 해설이 기억난다. 나는 그 소설집을 가리켜 세태소설의 강점과 미덕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지닌 한계도 있다는 식으로 평했다. 즉 세태소설에는 '평균치'나 '일반적', '타협적'이라고 부를 만한 한 성격의 인물들이 대거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일상을 예민한 시선으로 관찰하면서도 '체제/구조 바깥'의 지점을 상상하기가 어려우며, 도리어 그러한 상상을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일로 간주하려는 저의를 작품에 매설할 가능성도 있다. 해당 소설집의 작가가 그러한 저의까지 품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해설을 쓴 평론가가 이 같은 부분을 짚었으면 하는 독후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평론가가 쓴 해설에는 작금의 문단에 요청되는 것은 '센스의 혁명'이자 '소확행'이며 이것이야말로 개인이 시스템을 버티는 '응전'이자 '근력'이라는 식의 설명이 나온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나는 이 평론가가 언급한 소확행이 시스템에 적응한 범인凡人들의 안분지족이자, 안빈낙도의 의미로 읽혔다. 여기에는 시스템 바깥으로 아예 밀려나간 이들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유명한 소설가와 필력 넘치는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서 생겼던 아쉬움이 서용좌의 소설을 읽으면서 누그러진다. 이 작가의 글에는 속도감보다는 마비감이 느껴지고, 달변보다는 눌변이 이어지고 있다. 자신과 타인이 살아온 시간을 간곡하게 더듬으며 세속의 풍경을 그려내는 솜씨 또한 섬세하다. 그렇게 어렵사리 말을 잇다가도 빛나는 구절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현상의 구조라는 신 앞에서 허리를 숙이거나 시선을 돌리면 안 된다고, 당신에게 (구조에 복종한 대가로) 그만한 과실은 주어지겠지만 그러한 삶은 시시하거나 허무할 수 있다고, 삶이란 소확행으로 포획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온갖 긍/부정적 경험의 혼효이자 총합이라고. 나에게는 이 전언이 꼰대의 훈계가 아니라 현자의 조언처럼 들리며, 작금의 문학에 필요한 것은 센스나 소확행이 아니라 바로 이런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작가를 만나면 반가움과 존중심이 생긴다. 이 작가의 책이 오래 읽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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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 지음, 박진철 옮김 / 리시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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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좌파 이론가가 내놓을 수 있는 최대치의 결과물은 -희망과 방향성이 담긴 전략서가 아니라- 체제의 완강함과 몫 없는 이들의 무력감을 상기시키는 팜플렛으로 보인다. 평등/해방 세상에의 상상력이 고갈되고 주어진 선택지는 ‘자본주의‘뿐인 지금 이곳의 현실을 예리하게, 절망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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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21-04-1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조디 딘이라는 저자의 ˝공산주의의 지평˝이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이 책이 팜플렛(강도 높은 체제 비판)으로는 훌륭하나 전략서(구체적인 방향성 제시)로서는 아쉽다고 평한 적이 있는데 마크 피셔의 저작을 읽고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조디 딘, 마크 피셔 두 사람 모두 ‘자본주의 종언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쉬워진 이 시대‘를 적극적으로 해부하고 비평하지만 결국 이 현실 원칙을 지양하면서,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체제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출하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어쩌면 이것은 두 저자의 한계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야만, 지금 이 시대의 타락에서 비롯된 한계일 것이다.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남성작가 편 - 세계문학의 흐름으로 읽는 한국소설 12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이현우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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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장점을 갖춘 한국문학 입문서. 첫째는 평이한 문장으로 문학사의 흐름을 포착한다는 것. 둘째는 세계문학사에 박식한 저자로서 세계와 한국(문학)의 차이를 냉철하게 비교 분석한다는 것, 셋째는 갈수록 출판사 리뷰와 흡사하다고 여겼던 그의 글에 다시금 날카로운 비판정신이 돌아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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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21-04-14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생각이나 이런 입문서를 국문학자가 썼다면 (전문성이나 논리성이 이현우의 저작보다는 더 높았을지라도) 이만큼 재미진 글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국문학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우리네 고전의 가치에 대해서는 상찬할지라도 이것이 유럽문학이 기존에 이룩한 성취와 비길 만한지에 대해서는 쉽사리 평하기 어렵다. 박하게 말해서 국문학 교육이 주된 밥벌이인 사람이라면 ‘한국문학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필수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에 놓여 있다. 이들은 나에게 때때로 한국문학이라는 보람을 지키는 수문장이면서, 한국문학이라는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로 보인다.
‘로쟈‘ 이현우는 고전의 의의를 정확히 짚으면서도 해당 작품이 내재하고 있는 한계와 단점을 냉철하게 지적한다. 간단히 말하면 조세희나 황석영의 작품들이 아무리 빼어나더라도 이는 에밀 졸라나 오노레 드 발자크가 오래전 구축한 문학적 성과와 비교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현우가 국문학이 주업이 아니라 ‘러시아문학‘이 그의 본업이기에 이런 비판과 분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요즈음 드는 생각인데 비판정신과 소신발언이 있기 위해서는 어떤 ‘외부‘가 필요하다. 자신이 발 디딘 구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면 그 ‘외부‘를 상상하는 행위라도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