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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평점 :
허락 없이 사람이 될 수 있어, 없어. 바깥은 지옥이고 여기만이 살 길이야, 아니야. 내 말이 옳아, 틀려. 네까짓 것 죽어봤자 누가 알기나 해, 아니야. 살아서도 죽어서도 순종을 해야겠어, 말아야겠어. 대답해. 죄가 있으라 하니 죄인이 되었다. 벽돌집 아이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름도 생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신 위의 신, 세상 너머의 세상. 아버지선생님에 그저 순종하는 머리통에 믿습니다 울부짖는 그 입만 있으면 족했다. 알지도 못하는 약을 한주먹씩 삼키고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니든, 벽에 머리를 처박든,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 없어지든. 거 봐. 네가 말씀 없이 살 수 있어, 없어.
p.18 해수는 늘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야. 벽돌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럼 인간이 아니고 뭐냐 되물으면 해수가 답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가인이야. 허락할 가, 사람 인, 인간임을 허락받아야 하는 존재.
p.46 벽돌집 아이들은 자책하고 회개하고, 자책하고 회개하기를 되풀이하며 수렁으로 한 발씩 걸어 들어갔다. 아이들의 약한 마음을 움켜잡는 회개의 의식은 벽돌집이 돌아가는 원동력이었다.
믿음이 있으니 아무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곳, 타락한 세상에 맞서 사람이 될 아이들을 길러내는 곳. 아버지선생님 말씀만 따르며 눈 감고 입 막으면 족한 곳. 두려워할 것은 오직 말씀 뿐이니. 네까짓 게 사람이야, 아니야.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어서도 죽어야겠어, 아니겠어.
벽돌집, 말씀의 성전, 그들의 세계는 언제나 고립되어 있었다. 있으되 보이지 않았다. 만찬 앞의 굶주림으로, 밀실로 불려가는 앳된 얼굴로, 난장판의 용역꾼으로, 환호도 승리도 없이 얻어맞는 사람만 있는 '공놀이'의 밤으로, 비명과 울음을 구분할 수 없는 회개의 낙원으로.
p.140 그 기도문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온몸을 흔드는 떨림만이 있었고, 그것은 아버지 선생님이 베푸신 은혜에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신호였다.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 우리는 여기 있다! 그 강렬한 감정에 아이들은 먹혀버렸다.
p.153 그날 벽돌집은 흔들렸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기자들이 벽돌집 너머에 진을 치고 있지도 않았고, 텔레비전에는 벽돌집에 대한 뉴스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 아이들이 아이들을 고발하고, 아이들이 아이들을 때렸다. 아이들이 아이들을 때리고 또 때렸다. 참지 못한 아이들이 울음과 회개를 토해냈다. 그런 때 유림과 해수는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수의 죽음은 사유 없는 순종의 결실이자 인간성의 죽음이다. 그런 이유로, 뒤섞이는 기억, 갈라졌다 합쳐지기를 반복하는 목소리로 이어지는 해수와 유림의 여정은 나와 타자, 내가 버린 선택의 결과를, 뒤늦은 애도를 마주하기 위한 여정이다. 연약하고 투명했던, 어리고 작았던 너를 기억해.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걸, 이제는 알아.
우리는 이미 죽었어. 태어났을 때, 사람이기를 허락받아야 했을 때. '말씀'에 순종할 때마다, 사람이기를 포기할 때마다. 너희도 죽었어.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했을 때, 고통에 눈감았을 때, 그 애들이 홀로 죽어버리는 걸 외면했을 때. 우리는 모두 죽었어. 죽고도 죽은 줄을 모를 때마다, 죽기도 전에 죽었어. 내 얼굴을 봐. 똑바로, 끝까지, 제대로 봐. 혼자 죽게 하지 마. 죽어도 되는 사람이 있다고, 그렇게 믿지 마.
p.249 -너희도 다 알잖아.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누가 우리 아버지인지. 그걸… 그걸 인정하면… 내가, 정말 미칠 것 같아서! 그래서 우린, 그냥 계속 속이고 사는 거야! (...) 인간으로 살고 싶어? 그럼 내 얼굴을 봐! 똑바로! 끝까지... 제대로 봐!
p.252 그 순간, 유림이 끝내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단 하나였다. 해수가 또다시 짓밟히는 모습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것. 고통 속에 해수를 홀로 두고 떠날 수는 없다는 것. 가인은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존재였고, 해수는 그런 가인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유림은 이제 알았다. 자신이 말씀의 가인이 아니라, 해수의 가인이라는 것을.
긴 애도의 끝은 마침내 물음에 도달한다. 상처입은 세계, 부서진 인간을 회복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긴 어둠을 지나 마주한 빛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부어터진 발, 눈물로 얼룩진 얼굴, 넘을 수 없는 벽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힘은, 끝내 파, 부수고 뛰쳐나가는 힘은 무엇에 있는가.
그 이름을, 오직, 연약함이라 말하고 싶다. 작고 어리고 연약한 것이 몸부림칠 때, 함께 울고 길을 잃고, 그곳에 네가 있었음을 기억할 때,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때,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이 있었음을 깨달을 때. 미로를 통로로 만드는 것이 선택이라면, 어둠의 끝은 빛이니. 구원은 작고 약한 품에 있다고, 깊숙이 파고드는 너의 뼈를 힘껏 끌어안는 바로 그에 있다고.
p.254 그 순간, 신은 콘크리트 성전이 아니라 숲 안에 있었다. 십자가와 제단이 아니라 나무뿌리에, 가지 안에, 작은 잎사귀 안에 있었다.
p.280 스스로를 너무도 세게 끌어안은 나머지 팔과 어깨가 몸속으로 파고든 것만 같았다. 해수가 이토록 연약한 뼈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슬픔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를 감정이 밀려왔다. (...) 잃어버린 시간들이 산기슭 너머에서 이곳으로, 죽기 전에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아이들을 향해 고요히 행진해 오고 있었다. 유림은 손을 뻗어, 제 몸 깊숙이 파고든 해수의 두 날개를 꼭 붙들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