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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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러한가? 역사는 승자의 말로 쓰여진다. 역시 그러한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기록되는 역사, 역사로 기록된 내용은 공평하지 않다. 보이고 싶은 것과 사소한 것을 결정짓는 자는 힘 있는 자다. 목소리를 가지는 자다. 말의 지위를 부여받은 자다.

그러므로 교과서의 설명과 교양있는 말투로 전해지는 거장과 대작을 둘러싼 휘광과 명성은 모범과 체면, 흥미로운 소문과 뒤엉켜 그 뿌리를 알아채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들은 작품의 명성만큼이나 위대하지 않았다. 어떤 그림은 '그렇게' 그려지지 않았다. 만일 그들에게 지금의 '정설'을 묻는다면 십중팔구 "내가 언제...?"가 돌아오고도 남을걸.

p.40 '타히티의 고갱'은 결국 고된 현실과 이상화된 환상이 교차하는 인물이다. 신화의 껍질을 벗겨보면, 그가 남긴 찬란한 색채와 풍경 뒤에는 병든 몸과 외로운 정신, 그리고 식민적 시선으로 형성된 왜곡된 '낙원'의 초상이 자리하고 있다. 고갱은 위대한 예술가였지만 (...) 작품 속 타히티는 예술적 열매이자 식민적 욕망이며, 예술가를 이해하는 그간의 방식이 남긴 문제적 유산이다.

p.77 20세기 초 프랑스 제3공화국은 농민과 노동자의 삶을 존중하는 공화주의적 이념을 내세우며 국가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 〈만종〉은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프랑스 민중에게는 산업화로 사라져가는 전통적 삶의 표상으로, 종교계에는 경건한 신앙의 이미지로, 애국자들에게는 '잃어버렸다 되찾은 국보'로 받아들여졌다.


그런가하면 우아한 교양의 세계, 매끄러운 담론에 감춰진 세계 또한 엄연히 캔버스 너머에 살아 숨쉬고 있다. 예술가는 그저 보기 좋은 것을 그리고 만들어내지 않았다. 예술품에는 단순히 의뢰받은 목적이나 겉보기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자의식, 상처와 분노 뿐만 아니라 시대와 도전이 담겨있다.

그 그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까? 이 그림은 어떻게 읽힐 수 있는가? 그 이름은 그렇게 불리는 게 옳을까. 그림과 조각은 '그곳'에 멈춰있다. 그러나 그것을 창조한 이는 한때 살아있었으며, 그의 사유는 후대에 의해 재해석되고, 발굴된다. 예술가의 시간은 죽음과 함께 정지했지만 작품의 의미와 의의는 여전히 살아 숨쉬는 셈이다.

p.136 그의 그림은 일상의 단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철저하게 구성된 시각적 조작이다. 〈폴리 베르제르 바〉는 이 전환의 결정체다. 마네는 기억과 관찰을 바탕으로 화실에서 장면을 '재조립'함으로써 단순한 현실 묘사를 넘어 근대성의 본질을 예술적으로 번역해낸다.

p.154 오늘날 미술사학자들은 이 작품을 원한의 투사로만 보지 않는다. (...) 이 작품은 카라바조로 대표되는 강렬한 명암 대비(키아로스쿠로)의 전통 안에서 여성이 능동적 주체로 등장하는 보기 드문 바로크 회화다. 단호한 표정의 유디트, 협업하는 하녀, 제압당한 남성이라는 구성은 단순한 복수의 장면이 아니라 권력의 전복과 연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제목의 '두번째 미술사'는 기존의 상식과 '정답'을 뒤집어 '정답 아닌 것'을 조명하려는 시도이다. 즉, "예술사 안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기록되고, 누구의 존재가 지워졌는가'를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94)". 이는 비단 작품의 역사를 '발굴'해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작품이 놓인 공간, 즉 전시관의 권력에 대한 재해석에까지 나아간다.

흰 벽은 정말 모든 맥락에서 벗어난 순수한 공간일까? 그렇게 믿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은 누구의 이름으로 그려지는가? 미술관은 어떤 시선으로 구성되는가? 시공은 넘는 작품으로 말미암아 예술가는 감상하는 이와 소통한다. 예술은 결코 닫힌 벽과 박제된 순간이 아니다. 과연 이 책을 만날 독자가 여전히, 처음처럼 살아 숨쉬는 예술의 두 번쨰 막을 걷어젖힐 준비가 되어 있을지.

p.220 오늘날의 미술사는 인종적 맥락뿐 아니라 성별, 사회적 지위, 화가와 모델의 관계 등 다각도로 해석을 확장한다. (...)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이 초상화를 감상할 때 모델의 피부색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살았던 시대와 환경, 그리고 예술가의 시선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의 첫걸음이 바로 작품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이다.

p.255 화이트 큐브는 단순히 미술을 보여주는 장소가 아니라 미술의 의미를 규정하는 프레임이기도 하다. '중립성'이라는 명목 아래 화이트 큐브는 특정한 형식의 미술만을 이상적으로 만든다. (...) 어떤 공간이 무엇을 이상적인 예술로 간주하느냐는 기준은 결국 그 공간의 미학과 정치가 결정한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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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은 어쩌다
아밀 지음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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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죽을 만큼 미워해본 적이 있나요. 그 애가 내가 아닌 무언가라는 사실에, 나는 그들과 영영 같아질 수 없다는 생각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난 적이 있나요. 덜떨어진 인간, 부적격, 넘을 수 없는 벽... 반쪽 조금 넘는 것. 얘보단 낫지만 영영 쟤만큼은 될 수 없는. 이 모든 말들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을 아나요.

없는 것보다 모자란 것이 더 아프다. 남들 다 하는데 나는 못 하는 것, 쟤는 노력도 없이 쥐고 태어나는 걸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해낼 수 없다는 것. 그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 안다는 것. 내가 나를 너무 잘 알아 시도조차 해볼 수 없다는 것. 그 얼마나 고통스러운 치욕이고 무력인지.

p.89 여자애 하나를 싫어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며 숭고한 대의명분까지 있다고 믿는 사람들. 모아를 죽여야만 생명윤리가 바로 서고 인권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보전된다고 믿는 사람들. 그런 식의 증오를 받는 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해연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을 터였다. (...) 언제까지 이 일을 하며 살 수 있을지 단 한 순간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건 도대체 어떤 기분인지.

p.207 나윤은 인간성이라는 것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소외되고 배신당하는 경험에 지쳤다. 누구 한 명쯤은 자신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그리고 그런 사랑을 되돌려줄 수 있는 존재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았다.


이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는 완벽하지 않다. 무해하고 올바른 눈으로 정의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기는 커녕 진심으로 콱 쥐어박아야 속이 시원할 인물들로 차고 넘친다. 어쩜 그렇게 순진해서...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지. 서투르고 미숙한, 그래서 잔인한 사람들. 그래놓고도 할퀴어지고 멍든 흔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 각기의 어설픔과 미숙함, 서투름은 결국 연약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의 세계는 숭고도 거룩도 없이 그저 서로를 상처입히고 후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무결도 완벽도 없이 한없이 엉성하고 능청스러운 세계. 차마 마음 깊이 미워할 수도 없는 건, 그래서일까.

p.168 하지만 은아는 성소수자이고 싶지 않았다.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음을 인정할 수는 있었지만, 평범하지 않은 존재이고 싶다는 욕망도 인정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제도적으로 차별받고 사회적으로 혐오받는 계층의 일원이라고 인정할 마음의 준비까지는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p.305 "달밤에 체조하는 게 취미야?" 조롱이라기도 뭣한, 구태여 놀릴 가치조차 없다는 듯 대수롭잖게 나를 툭 건드리고 넘어가는 말.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아와의 비밀이 그만큼 대수롭잖은 문제가 된 것 같았어. (...) 내가 참 나쁘지. 변명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있잖아, 본래 아이들은 더없이 소중했던 누군가에게 잔인한 짓을 하고 나서야 어른이 되는 것 같아. 그렇지 않니?


아밀의 세계와 그곳에 거하는 이들은 도처에 솟은 벽을 아무렇지 않게 뛰어넘는다. 눈 깜짝할 새에 선을 넘고 금을 밟으며 뛰쳐나간다. 환상과 절대의 경계를 뒤집어버린다. 그런 이유로 이 달콤하게 반짝이는 이야기는 기실 맹렬하고 사납다. 현실을 정확히 겨냥해 뻗는다. 거기 있지. 쭉, 알고 있었어.

이토록 꼼꼼하고 부지런하게 사랑을 찾아내는 재능을, 너무 당연해 뻔한 결말을 상큼하게 걷어차버리는 상상력을 반짝임, 재기... 그저 '아밀스러움' 외에 달리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모든 이야기를 지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이 말은 현실이 되리라.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 거야. 약속해."

p.148 "그러니 엄마를 위해... 해줄 수 있겠니?" 엄마가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말했다. "나를 용서해줄 수 있겠니?" 멜론은 고민하지 않았다.

p.315 가끔 우리는 그냥 문제를 제쳐놓고 눈과 귀를 막고 기다리고 있으면 그 문제가 그냥 지나 가거나 사라져버릴 거라고 믿어버린대. 끈덕지게 견디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그게 미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고 해. (...) 하지만 있잖아, 이제 와서는 이런 의문이 드네. 과연 환상이 죽을 수 있는 것일까? 죽여지기는 하는 것일까?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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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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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 없이 사람이 될 수 있어, 없어. 바깥은 지옥이고 여기만이 살 길이야, 아니야. 내 말이 옳아, 틀려. 네까짓 것 죽어봤자 누가 알기나 해, 아니야. 살아서도 죽어서도 순종을 해야겠어, 말아야겠어. 대답해. 죄가 있으라 하니 죄인이 되었다. 벽돌집 아이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름도 생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신 위의 신, 세상 너머의 세상. 아버지선생님에 그저 순종하는 머리통에 믿습니다 울부짖는 그 입만 있으면 족했다. 알지도 못하는 약을 한주먹씩 삼키고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니든, 벽에 머리를 처박든,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 없어지든. 거 봐. 네가 말씀 없이 살 수 있어, 없어.

p.18 해수는 늘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야. 벽돌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럼 인간이 아니고 뭐냐 되물으면 해수가 답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가인이야. 허락할 가, 사람 인, 인간임을 허락받아야 하는 존재.

p.46 벽돌집 아이들은 자책하고 회개하고, 자책하고 회개하기를 되풀이하며 수렁으로 한 발씩 걸어 들어갔다. 아이들의 약한 마음을 움켜잡는 회개의 의식은 벽돌집이 돌아가는 원동력이었다.


믿음이 있으니 아무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곳, 타락한 세상에 맞서 사람이 될 아이들을 길러내는 곳. 아버지선생님 말씀만 따르며 눈 감고 입 막으면 족한 곳. 두려워할 것은 오직 말씀 뿐이니. 네까짓 게 사람이야, 아니야.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어서도 죽어야겠어, 아니겠어.

벽돌집, 말씀의 성전, 그들의 세계는 언제나 고립되어 있었다. 있으되 보이지 않았다. 만찬 앞의 굶주림으로, 밀실로 불려가는 앳된 얼굴로, 난장판의 용역꾼으로, 환호도 승리도 없이 얻어맞는 사람만 있는 '공놀이'의 밤으로, 비명과 울음을 구분할 수 없는 회개의 낙원으로.

p.140 그 기도문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온몸을 흔드는 떨림만이 있었고, 그것은 아버지 선생님이 베푸신 은혜에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신호였다.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 우리는 여기 있다! 그 강렬한 감정에 아이들은 먹혀버렸다.

p.153 그날 벽돌집은 흔들렸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기자들이 벽돌집 너머에 진을 치고 있지도 않았고, 텔레비전에는 벽돌집에 대한 뉴스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 아이들이 아이들을 고발하고, 아이들이 아이들을 때렸다. 아이들이 아이들을 때리고 또 때렸다. 참지 못한 아이들이 울음과 회개를 토해냈다. 그런 때 유림과 해수는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수의 죽음은 사유 없는 순종의 결실이자 인간성의 죽음이다. 그런 이유로, 뒤섞이는 기억, 갈라졌다 합쳐지기를 반복하는 목소리로 이어지는 해수와 유림의 여정은 나와 타자, 내가 버린 선택의 결과를, 뒤늦은 애도를 마주하기 위한 여정이다. 연약하고 투명했던, 어리고 작았던 너를 기억해. 그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는 걸, 이제는 알아.

우리는 이미 죽었어. 태어났을 때, 사람이기를 허락받아야 했을 때. '말씀'에 순종할 때마다, 사람이기를 포기할 때마다. 너희도 죽었어.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했을 때, 고통에 눈감았을 때, 그 애들이 홀로 죽어버리는 걸 외면했을 때. 우리는 모두 죽었어. 죽고도 죽은 줄을 모를 때마다, 죽기도 전에 죽었어. 내 얼굴을 봐. 똑바로, 끝까지, 제대로 봐. 혼자 죽게 하지 마. 죽어도 되는 사람이 있다고, 그렇게 믿지 마.

p.249 -너희도 다 알잖아.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누가 우리 아버지인지. 그걸… 그걸 인정하면… 내가, 정말 미칠 것 같아서! 그래서 우린, 그냥 계속 속이고 사는 거야! (...) 인간으로 살고 싶어? 그럼 내 얼굴을 봐! 똑바로! 끝까지... 제대로 봐!

p.252 그 순간, 유림이 끝내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단 하나였다. 해수가 또다시 짓밟히는 모습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것. 고통 속에 해수를 홀로 두고 떠날 수는 없다는 것. 가인은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존재였고, 해수는 그런 가인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유림은 이제 알았다. 자신이 말씀의 가인이 아니라, 해수의 가인이라는 것을.


긴 애도의 끝은 마침내 물음에 도달한다. 상처입은 세계, 부서진 인간을 회복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긴 어둠을 지나 마주한 빛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부어터진 발, 눈물로 얼룩진 얼굴, 넘을 수 없는 벽을,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힘은, 끝내 파, 부수고 뛰쳐나가는 힘은 무엇에 있는가.

그 이름을, 오직, 연약함이라 말하고 싶다. 작고 어리고 연약한 것이 몸부림칠 때, 함께 울고 길을 잃고, 그곳에 네가 있었음을 기억할 때,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때,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이 있었음을 깨달을 때. 미로를 통로로 만드는 것이 선택이라면, 어둠의 끝은 빛이니. 구원은 작고 약한 품에 있다고, 깊숙이 파고드는 너의 뼈를 힘껏 끌어안는 바로 그에 있다고.

p.254 그 순간, 신은 콘크리트 성전이 아니라 숲 안에 있었다. 십자가와 제단이 아니라 나무뿌리에, 가지 안에, 작은 잎사귀 안에 있었다.

p.280 스스로를 너무도 세게 끌어안은 나머지 팔과 어깨가 몸속으로 파고든 것만 같았다. 해수가 이토록 연약한 뼈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슬픔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를 감정이 밀려왔다. (...) 잃어버린 시간들이 산기슭 너머에서 이곳으로, 죽기 전에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아이들을 향해 고요히 행진해 오고 있었다. 유림은 손을 뻗어, 제 몸 깊숙이 파고든 해수의 두 날개를 꼭 붙들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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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한 장례와 애도 - 왜 어떤 죽음은 애도가 불가능한가
김순남 외 지음 / 산지니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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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오래된 위로 혹은 체념, 어쩌면 책무에 가까운 그 말을 다시금 불러오고자 한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죽은 사람의 시간 뿐이다. 죽음 바깥에, 다른 말로는 죽음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 여전히 살아 남겨진 사람의 시간은 여전히 흘러간다. 한 사람이 사라진 세계에서도. 하나의 세계가 영영 멈춰버린 이후에도.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도 경사보다 애사가, 돌잔치나 결혼식보다 장례와 추도가 익숙한 사람들이 있다. 미래에의 막연한 기대를 품은 축사보다 '죽음 이후'에 남겨졌다는 이유만으로 쏟아부어지는 위로가 더 익숙한 사람들이 있다. 그마저도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는, 슬퍼할 권리조차 박탈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실과 앞에서도 침묵하기를 요구받는 이들이 있다.

p.9 퀴어한 장례와 애도의 정치의 장을 통해서 우리는 '왜 어떤 죽음은 애도조차 불가능한가'라는 사회적인 물음을 제기하고자 한다. 삶과 죽음에 걸쳐서 배제된 자리에서 생성되는 관계성, 돌봄, 상호의존의 장에 주목하면서, 혈연/가족주의 중심으로 관계를 상상하는 사회에 개입하고자 한다.

p.77 다시 말해, 무명의 죽음에 관한 고민은 곧 그이가 살아 있을 때 왜 무명으로 남겨져야 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며, 그 상태에서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산 자와 죽은 이가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하게 해준다.


여전히 살아 남겨진 사람이 있으므로 죽은 사람은 여전히 부재로서 존재한다. 부재조차 부재하기 전까지는 부재하는 존재로서, '빈 자리'의 부피와 무게로 현존하는 것이다. 완전한 망각, 마침내 수긍되고 안착한 존재로서의 망자로 이행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바로 '애도'이다.

달리 말하면 불가피한 죽음의 앞에서 잘 떠나는 것, 돌이킬 수 없는 죽음 이후에서 잘 떠나보내는 것, 이 모두가 애도의 과정이라는 뜻이다. 과연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한가? 모두가 원가족과 정상가족의 대를 이어가며 사는가? 어째서 어떤 죽음은 추모되고 애도할 권리를 박탈당하는가?

p.99 "사별에 있어서 가까운 친구, 지인, 직장 동료 관계 등 법적 가족이 아니더라도 심리적 충격을 받고 충분히 애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관계들을 사회가 외면함으로써 스스로 슬픔을 느끼는 자신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애도 과정을 생략하거나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것이 박탈된 애도이다."

p.191 고인의 삶의 서사와 생전의 돌봄과 유대의 관계에 대한 충분한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법적으로 선순위라는 이유로 혈연가족에 의해 치러지는 장례는 실제로 상실에 대한 애도가 필요한 많은 사람들을 애도의 자리로부터 추방한다.


'잘 죽을' 수 없는 사회는 '잘 살아갈' 수 없는 사회다. 죽음 앞에 존엄을 박탈당하고 애도받지 못하는 몸은 살아서도 그 성원됨을 인정받지 못한다. 퀴어, 감염인, 빈곤과 장애 커뮤니티에서 이것은 낯설지 않다. 사람으로 태어나고 존엄하게 죽을 권리는 누군가에겐 그저 요원한 일이다.

장례와 애도의 의의는 태어나 살아가다 죽는 일, 죽은 이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세계에 새로이 자리하게 사는 일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있다. 그러니 진정 두려운 것은 죽음 이후에도 '가족'에서 벗어날 자유를 박탈당해 내가 나인 채로, 그가 그인 채로 기억될 권리를 부정당하는 것이 익숙하게 받아들여지는 일이다.

p.7 혈연가족을 넘어서 내가 의지하고 함께 살아가는 시민, 동반자, 단체에게 삶의 마지막을 동행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가족의 의미가 급진적으로 변화하고 외로움과 배제의 문제가 구조적인 차별과 연결되는 우리 사회에서 시민적 유대를 생성하고 유지해 나가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p.124 결국, 퀴어로서의 애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고립되지 않은 생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이 사회적인 낙인과 편견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는 게 아니라, 존엄한 죽음의 의미를 사유하는 사회의 장을 생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혈연 중심의 전통적 가족이라는 신화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모두가 잘 죽고 잘 떠나보내게 하는, 마땅한 애도를 숨기지 않아도 되게 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도래한 현실에 적응하는 일이다. 인간이 평등히 존엄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에 제자리를 돌려주는 일이다. 존엄에 차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존엄하지 않으므로.

애도의 장에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고립되지 않게 하는 일이다. 태어나 살아가다 죽는 일, 죽은 이를 떠나보내고 우리 안에 새로이 자리하게 하는 일. 과정이자 상징인 장례와 애도가 이 잔인한 사회에 놓인 모두의 것이기를, 삶과 죽음이 그 자신의 것이기를, 이 익숙한 좌절에 마침표를 찍기를 간절히 바란다.

p.219 법제도는 아직 어쩔 수 없는데 자본은 협상할 수 있는 영역이 될 때, 장례와 애도의 과정에서 다채로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쓰레기를 만들어내기 쉽다. (...) 삶과 죽음에 걸쳐 성소수자의 존재와 관계를 가시화한다는 목적 없이 만들어지는 새로운 형식은 대안이 아니라 법적 가족 바깥에서의 차별을 상품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p.224 애도의 정치는 파트너 관계, 생활공동체 관계 외연에 돌봄의 조력이 이루어질 수 있는 '더 다양한 유대의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는 삶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나이, 질병, 장애, 지역, 빈곤 등 각자가 가진 조건이 상호의존의 생태계가 출현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회적인 배제와 차별로 이어지지 않기를 요청한다. 애도는 감정에서 그치지 않는다. 애도에는 정의가 필요하다.

*도서제공: 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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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뇌과학 -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나를 설명하는 뇌의 숨겨진 작동 원리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박문호 감수 / 다산초당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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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나인가? 나는 뇌인가? 개인의 정체성, 내가 나라는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멀쩡한 두 사람을 잡아다 뇌만 바꿔친다면 뇌와 몸, '내부로부터 지각하는 나'와 '외부에 의해 관찰되는 나', '머리로 아는 나'와 '몸이 기억하는 나'. 이 중 누가 '진짜 나'일까. 우리 개인은 단일하고 영속적인 자아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며 살아가는가?

일명 '외계인 뇌 실험'으로 알려진 이 답 없는 물음은 철학과 뇌과학 양 분야에서 잘 알려진 흥미로운 주제다. 무엇이 나를 '나'로 만드는가? 감각되는 세계는 정말 있는 그대로 지각되고, 받아들여지는가? 있는데도 알아차려지지 않는 것, 없음에도 있다고 믿어지는 것, 혹은 있는 그대로 지각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지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뇌가 만들어낸 믿음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닐까?

p.122 우리는 뇌가 가진 두 개의 평행 시스템을 이용해 행동을 통제한다. 이 두 시스템은 기억 형태에 따라 강점도 다르고 접근법도 다르다. (...) 뇌는 나름의 논리를 이용해 자동 처리가 가능한 작업은 알아서 자동으로 처리한다. 그 덕분에 우리가 선택한 다른 일에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p.376 인간의 정체성은 뇌의 어느 특정 영역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는 뇌의 여러 영역과 프로세스가 협력한 결과 나타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는 크게 두 개의 시스템으로 나뉜다. 하나는 이미 잘 아는 의식계이고, 다른 하나는 신비에 싸인 프로그래밍을 통해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무의식계다.


느낀다. 이해한다. 믿는다. 기억하고 예측한다. 이 믿음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정신질환의 증상들이다. 부재하는 소리를 듣는다. 내 안에 또다른 내가 도저히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공존한다. 논리와 비존재를 넘나들며 서사를 만들어낸다.

뇌는 그저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살덩어리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때로는 감각과 경험을 뒤틀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나는 그저 뇌가 조종하는 몸이 아니다. 그런 동시에 뇌가 조직하는 세계 없이는 자아도 존재할 수 없다.

p.207 무의식계는 우리의 인생을 담은 여러 스냅사진 사이에서 연관성을 만들어내고 각 순간마다 우리의 감정을 관찰해 무엇을 강조할지 결정한다. 그리고 그 스냅사진들을 배열하고 정리해 통일되고 간명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우리가 의식하는 인생이 된다.

p.241 뇌의 무의식계는 매일같이 정보의 실타래를 무수히 모은 다음 체계적이고 개인화된 이야기로 엮는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경험한다. 그러나 뇌에서 신호의 소통이 엇갈리는 순간 우리의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즉, 몸은 뇌에, 뇌는 몸에 영향을 미친다. 감각과 해석, 의식과 무의식은 새의 양 날개처럼 세계를 구성하고 지탱한다. 이 정교하고도 모호한 신비가 우리로 하여금 끝없는 탐구에 도전하게 하며,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는 뇌의 방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존재를, 의식 바깥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여는 것과도 같다.

사회화되고 학습된 의식계 너머로 엿보이는 논리와 부정합의 세계. 3킬로 남짓의 세포 덩어리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은 우리 인간을 어디까지 뻗어나가게 할까. 부디 이 책을 만나는 독자가 이해를 넘어서는 이해, 의식 너머의 가능성을 향하는 끝없는 여정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p.377 정체성도 의식계와 무의식계의 공조에 의존한다. 의식계는 자아의식을 경험하게 해준다. 고통과 기쁨을 느끼게 해준다. 행동할 의지를 갖게 해주며 의지대로 정신과 신체를 제어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의식계 덕분에 뇌가 만드는 이야기를 실행에 옮길 수 있다.

p.378 뇌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온전히 유지해 주기에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통찰할 수 있다. 뇌의 도움으로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고, 곰곰이 추론하고, 결정을 심사숙고하고, 목표와 욕구에 딱 들어맞는 행동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정체성을 파악할 때 자신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고 세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도서제공: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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