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뫕님의 서재 (뫕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Mon, 11 May 2026 11:39:54 +0900</lastBuildDate><image><title>뫕</title><url>http://image.alad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뫕</description></image><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나이 묻는 사회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기 위해. - [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65418</link><pubDate>Fri, 08 May 2026 22: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6541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8162&TPaperId=1726541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9/84/coveroff/k69213816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8162&TPaperId=1726541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a><br/>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5월<br/></td></tr></table><br/>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듣고 말해본 적이 있을 말들이 있다. 싸가지 없는 놈, 나이도 어린 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노친네… 너무 쉽게 말해져 혐오라고 불리지도 않는 이 말들에는 나이라는 공통점이 도사리고 있다. '애새끼'도 모자라 '유충'에서부터 잼민이, 급식충, MZ, 아줌마, 영포티, 틀딱, 노친네까지, 우리 사회에서 멸시 어린 연령 집단으로 묶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br/><br/> 툭하면, 주로 저 마음 불편한 소리에 '갈라치기 하지 말라'며 예의 '준엄한 꾸짖음'이 횡행하는 시대에 누구보다도 서로를 촘촘하게 규정짓고 혐오한다. 나이보다는 개인적 속성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청년세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고하게 사회 전반을 구성하는 연령주의적 제도 및 인식은 필연히 개인과 사회 수준 모두에서 충돌하고 갈등한다.<br/><br/> p.9 연령차별주의는 가장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차별이면서 가장 잔혹한 거부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는 달리 연령차별주의 피해 당사자들은 차별에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이는 누구나 다 평등한 속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연령차별주의가 너무나 우리 의식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제도화된 관행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br/><br/> p.65 기존의 나이 멸칭이 지겨워지면 새로운 나이 멸칭을 만들어 특정 세대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행태, 계속해서 낙인찍을 나이대를 찾는 행태, 이제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나이대는 다 제각각의 멸칭을 갖게 되었다. 멸칭이 없는 나이대가 없을 지경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이 멸칭으로 조롱하는 사회, 지독한 연령주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br/><br/><br/> 언젠가 SNS 댓글에서 본 적이 있다. 임산부 우선석에 노인이 앉아 비켜주지 않았다는 토로에 달린 내용 중 "10년만 지나면 그런 노인네들이 다 없어져서 깨끗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나름의 '위로'가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나. 황당하고 참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혐오에 있어 개인의 문제와 사회구조의 문제가 이렇게나 뒤섞여 있구나, 하는 생각에 댓글창을 떠나지 못했다. 우리 시대의 초상은 배제와 구분에 다름아니다.<br/><br/> 어쩌면, 아니, 확실히, 한국사회의 키워드 중 하나는 조롱과 혐오일 것이다. 이 둘은 극단적인 타자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익히 알려져있듯 구분짓기는 혐오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혐오할 수 없다. 혐오 대상으로서의 용납할 수 없는 속성은 타집단, 그것도, 지금 현재의 기준으로서는 절대 내가 아닌 이들에게 전가되어야 하므로.<br/><br/> p.88 나이에 따른 혐오스러운 멸칭들이 각종 언론과 일상 대화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이는 '일상성'을 넘어서 '사회성'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 (...) 이제는 우리 사회가 언어를 통한 탈인간화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인식하고, 이를 줄이기 위한 대안적 표현을 학습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는 데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br/><br/> p.144 늘어난 평균수명으로 인해 현대사회에서 노년을 살아간다는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삶을 산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전의 어떤 세대도 지금의 노년 세대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오랫동안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의 고령층은 문화적 전위 의 역할을 떠맡아 새로운 노년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적 전위의 역할을 하거나 새로운 노년의 의미를 받아들이기에 우리 사회의 연령주의는 너무 막강하다.<br/><br/><br/> 우리 사회에서 나이는 단순히 살아온 햇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대되는 역할과 태도에서 벗어나기를 금지하는 강력한 규범이자 위계로 기능한다. 이것은 탈-규범적 전위를 요구하는 동시에 '감히' 전형을 벗어나는 이레귤러를 가혹하게 조롱하고 탄압하는 모순적 사회에서 이중구속으로 기능한다. 연령주의의 폐단은 개인의 삶에 그치지 않는다. 아젠다 선정에서 실질적 참정권까지, 정치-제도의 곳곳에 연령주의의 뿌리는 깊고도 촘촘하다.<br/><br/> 예의 청년정치를 표방하는 모 정치인을 떠올려보자. 무능과 도덕성은 차치하고라도, 청년유권자에 '우리'로 묶이려 시도하며 그 자신이 마치 아이콘인 것처럼 행세하는 전략이 왜 무시 못할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가 청년이라고 불릴 만큼, 사회초년생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정치기득권이 고령화 되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br/><br/> p.64 나이 멸칭은 특정한 개인들의 행태를 전체 나이대의 공통적인 특성처럼 확대 재생산한다. 우리 사회는 특정 나이대에 대한 틀에 박힌 이미지와 이들에게 기대하는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자꾸 특정 나이대 사람들에게 뭘 해야 한다고 규정을 내린다. 그 규정에 어긋나면 멸칭이 만들어지고, (...) 유행이 되어 빠르게 번지고 오프라인까지 선을 넘어 퍼져 나간다.<br/><br/> p.321 연령대마다 따라붙는 편견과 차별은 언제나 부정적인 모습만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맞이하게 될 인생의 여러 단계를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행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국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에 꼽히는 것도 이런 나이에 대한 차별이 한 측면을 담당하고 있다. 나이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전제가 해소될 때 우리는 생애주기별로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있다.<br/><br/><br/> '유권자의 목소리'는 평등하게 대표되지 않는다. 소구와 '표밭'이 따로 노니 아젠다는 자연히 과시행정에 급급해진다. 고령화와 동시에 경제-기득권화 된 정치권이 호소하는 부양 부담의 증가는 과연 누구의 '억울함'인가. 그놈의 '갈라치기', 과대표와 청년 호도 정치인의 부상은 이런 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 끊임없이 나 아닌 집단을 배격하는 인식은 과거와 미래, 사회와 개인 모두를 옭아맨다.<br/><br/> 삶은 분절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어리게 태어나 늙어 죽는다. 어느 순간도 삶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어려서, 젊어서, '적당한 나이'를 지났기 때문에 '임시'로 밀려나기를 요구받는 사회에서는 모든 순간이 불행하고 불안하다. 결국 나이는 수로 계산될 수 없는 삶을 욱여넣지 않는, 그저 '중요한 숫자'일 뿐이어야 할 것이다. 생의 모든 시기가 그 때만의 가치를 갖는, 제각기 어떤 사람의 바로 그 순간이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라 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br/><br/> p.204 대통령이 될 나이를 높게 잡은 것은 2030 청년세대의 정치적 역량 약화와 기회의 제한으로 이어진다. 고령화로 인해 선거에서 노인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게 되고, 정치인들은 고령층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공약 경쟁을 함으로써 청년을 위한 정책은 감소할 가능성이 있는데 피선거권 제한까지 더해지니 문제는 한층 심각하다.<br/><br/> p.243 한국 사회에서 노인은 기본적으로 계급적 개념이라는 주장이 있다. 정치인이나 재벌 등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노인이라 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서민'에게만 노인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노인이 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된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9/84/cover150/k69213816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698413</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노동을 말함은 곧 삶을 대함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의 삶이 아닌가. - [생업(生業) - 그 징하고도 찡한 노동의 표정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52846</link><pubDate>Fri, 01 May 2026 21: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5284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52138163&TPaperId=1725284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70/11/coveroff/k55213816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52138163&TPaperId=1725284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생업(生業) - 그 징하고도 찡한 노동의 표정들</a><br/>은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5월<br/></td></tr></table><br/>생업.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 생계를 위해 하는 일. 먹고 사는 일. 밥벌이. 그 징하고 찡한 이야기들. 비단 먹고 숨쉬며 살아가듯이 자연스러운, 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기꺼이 나서는 일, 이렇게 해야만 살 수 있기에 떨쳐일어나는 일. 그 모든 일들이 생업,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이다. 생업이란 사람을 살리고, 살게 하는,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이다.<br/><br/>  이 책은 저자가 말 그대로 밥을 짓고 먹이는 사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 함께 사는 삶으로 나아가자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 듣고, 묻고, 나눈 시간의 기록이다. 그래서일까, 곳곳에 먹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매일같이 상 차려 먹이는 사람, 그 사람 밥 먹이던 이야기, 낯 모르는 사람들 끼니를 따라다니며 챙기는 사람…<br/><br/> p.12 밥과 일에 대한 가치 정립. 우리는 이 절대적인 삶의 필수 조건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 투자로 얻은 금융 소득이 근로 소득을 앞서는 사회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은 갈수록 초라해진다. 좋은 직업의 '좋음'은 연봉만 우선시 된다. 그러나 돈이 없어도 살기 어렵지만 또 돈만으로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다.<br/><br/> p.32 "밥 하는 엄마보다는 혁명가 엄마가 좋아요." 하지만 매일 1700인 분의 밥을 짓는 사람이 혁명가다. 밥은 타인에 대한 사랑의 실행이며, 밥은 흩어진 존재들을 모으는 점성 강한 연결의 수단이다. 인간은 밥 주위로 모여든다.<br/><br/><br/> 그가 만난 사람들은 덤덤하게, 그러나 뿌듯하게 말한다. 뼈빠지게 일하고, 때로는 일신의 안락함마저 내던지고 달려들었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일은 하지 않았다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노동의 고귀함을, 스스로와 세계를 떠받치는 자의 자부심이란 것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눈물은 아래로 떨어져도 밥숟가락은 위로 올라간다고 했던가, 하루하루를 먹고 살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br/><br/> 어느 작가는 먹는 일에는 구차한 데가 있다, 고 말했다. 그 말은 그 밥 한 술 떠넣지 못하는 입을 아는 자의 치욕이다. 먹을 때가 아닌데, 들어갈 속이 아닌데도 꾸역꾸역 밀어넣어야 하는 자의 수치심이다. 정의에 가장 가까운 감정은 수치심이다. 긍지에 가장 가까운 말이 슬픔이듯이.<br/><br/> p.92 "환대란 내가 뭘 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있던 자리에서 내려오고 그가 주가 될 때, 주객이 뒤집어질 때 가능하죠. 그래서 내 자리를 뺏길 각오가 돼 있어야 해요. 저는 그게 나쁘지 않았어요. 한 번이라도 관계가 전복되는 건 달라요."<br/><br/> p.278 화살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화살이 제대로 사람을 찌르지 못할까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갑옷이 사람을 보호하지 못할까를 걱정한다. 국어 교사 박민영은 갑옷을 만드는 사람이다. 아이들에게 입힐 언어의 씨줄과 경험의 날줄로 짠, 세상에서 제일 튼튼한 갑옷을 짜는 예술가다.<br/><br/><br/> 이 글을 쓰는 오늘은 노동절이다.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본다. 도처에 일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채널 자막에는 일하다 죽고 다친 사람들이 줄지어 흘러갔다. 하루도 빠지는 날 없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으로 밀려갔다.  앞서 생업은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이라 했다. 그러니 일하다 죽는 사람, 일 때문에 죽는 사람, 그 일이 아니었다면 견디지 않았어도 될 일에 죽어버린 사람이, 그 죽음이 얼마나 처참하고 참담한 일이란 말인가.<br/><br/> 누구도 일하는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사람이 사는 모든 일에 노동이 있다. 그러므로 노동을 말하는 것은 곧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과도 같다. 노동이 천함과 그악스러움의 대명사로 읽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수고와 감사를 자주 잊는다. 무심히 지나치는 얼굴들, 말끔한 공간의 곳곳을 보며 묻는다. 나의 오늘에는 어떤 노동이, 몇 명의 일하는 사람이 있었을까.<br/><br/> p.100 한국 사회에서 유가족이 된다는 건 바다 같은 슬픔에 잠기고 하늘 같은 분노에 휩싸이는 일이다. 사망 원인을 죽은 사람의 과실로 돌아가는 사용자 측과 질긴 싸움이 시작되고 사람이 일하다가 죽었는데도 기업은 벌금만 내면 그만인 잔인한 현실을 맞닥뜨려야 하니 가슴에 불길이 잦아들 날이 없다.<br/><br/> p.227 그가 싸우는 건 과격해서가 아니라 절실해서다. 자식을 낳은 엄마이자 자식이 죽는 걸 본 사람이라서다. 사랑을 줄 때조차 사랑을 받은 한 존재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커서다. 모르는 이들을 향한 이타심,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사명감 같은 인간 보편의 감정에 따르는 것이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br/>#은유 #생업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70/11/cover150/k55213816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70110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철학은 말이야, 우리가 단지 우리이기만 하지 않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사유의 문을 열어젖힐 힘이 있다는 걸, 알게 해주는지도 몰라. - [소피의 세계 (30주년 특별판) - 소설로 읽는 철학]</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44085</link><pubDate>Tue, 28 Apr 2026 18: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4408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4492&TPaperId=1724408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281/51/coveroff/893232449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4492&TPaperId=1724408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소피의 세계 (30주년 특별판) - 소설로 읽는 철학</a><br/>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2025년 12월<br/></td></tr></table><br/>철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처음 읽은 철학책을 기억하시나요? 처음으로 좌절케한 개념은? 또, 처음으로 이해의 빛을 마주하고 전율했던 때의 그 기쁨을 기억하시는지. 수많은 이들의 처음과 최고를 차지하고 있는 그 이름, 『소피의 세계』를 다시 만났다. 여전히 불친절의 구덩이에 상냥하게 내던져지는 느낌이라니. 나도 모르게 '그렇지, 이거지!'를 외쳤다고 하면, 알 사람은 알겠지요.<br/><br/> 유사 이래 철학과 철학자는 사회의 주류 관심사, 쉽게 말해 메이저였던 적이 없었다. 대체로 골치 아프고 포도청 저리가라 하는 목구멍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소리로 여겨져왔다는 뜻이자, 일상 바깥의 문제로 치부된 탓에 남는 게 시간이거나 아예 존재의 고통을 선명히 느껴본 적 있는 사람이나 사색에 잠긴다는 게 거지반 통설이었다는 뜻이다.<br/><br/> p.151 소피는 플라톤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자신의 영혼이 육체에 자리 잡기 전 이데아의 세계에서 영원한 '다람쥐'를 소피가 보았을지도 모른다. 소피가 이미 한 번 산 적이 있다는 생각이 맞을까? 지금의 육체 를 얻기 이전에 정말 소피의 영혼이 실재했을까? 시간이 지나도 소멸하지 않는 작은 금괴, 바로 소피의 육체가 늙어 죽어도 계속 살아 있는 보석과도 같은 영혼이 소피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걸까?<br/><br/> p.626 우리는 살아 있는 행성이야. 소피야! 우주 안에서 불타는 태양 주위를 항해하는 커다란 배지. 하지만 우리 각자는 유전자라는 짐을 싣고 인생을 항해하는 배이기도 해. 우리가 이 짐을 다음 항구로 실어 나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헛된 것은 아니겠지…<br/><br/><br/> 느닷없이 시작된 소피와 크눅스 선생의 철학 여정은 서양철학사의 기원에서 지금 여기의 인간 정신과 물질성까지 총망라하며 종잡을 수 없이 이어지는 중에 때때로 갈등에, 벽과 '낯섦'에 맞부딪힌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야말로 '순식간에' 박차를 가하며 독자에게 달려들다 급기야 종국에는 아주, 낯설고 고난스러운 시작을 예고하며 독자에게 다음을 넘긴다.<br/><br/> 실존과 현실, 존재와 관념이 마주치는, 힐데와 소피 그리고 크눅스 선생과 이 이야기의 '동인' 그리고 독자가 만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반전하고 합의 길로 솟구치게 되는 걸까? 읽는 내내 '천천히'를 되뇌어야 했던 이야기의 끝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철학적 사고에 발을 들여놓는 책들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각을 다시 맛보는 기쁨과 동시에 충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br/><br/> p.408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이성을 통해 논증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어. 책임 있는 행동은 이성을 예민하게 갈고닦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고통과 행복을 같이 느낄 수 있도록 감정을 예민하게 갈고닦아야 가능해지는 거야. (…) 전쟁이 끝난 뒤에 많은 나치가 처벌을 받았지만 그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비이성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잔인했기 때문이야."<br/><br/> p.451 "소령은 우리의 작은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게 그가 전능하다는 뜻은 아니야. 어떤 경우든 우리는 그가 전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해. (…) 문제는 우리가 존재 하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이며 누구냐는 거야. 우리가 단지 소령의 분열된 의식 속의 자극, 그의 의식 속의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쩌지는 못할거야."<br/><br/><br/> 이 길고 사뭇 공격적이기까지 한 이야기에는 이성의 어떤 면에 초월적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이전의 '당연한' 도식에 꼭 들어맞지 않는, 그 안에 구겨넣을 수 없는 어떤 신비한 체험과 같은 사건들이 드러내는 철학의 속성이 있다. 세계를 묻는 일은 나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것, 근원을 뒤흔들 수밖에 없다는 것. 철학의 개념과 명제들은 안도와 순종을 위해 밝혀지고 선언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영혼을 지져놓는(전기가오리!) 충격에 가깝다.<br/><br/> 철학의, 사유의 죽음이 공언되는 이 시대에 누군가 내게 철학이란 무엇인가, 묻는다면 바로 이렇게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학문이라 하겠다. 깊이 생각하는 것, 발견하는 것, 나의 자리를 기꺼이 떠나고 뒤집어 엎는 용기. 지혜를 사랑하고, 깊이 사유하여 밝히는(哲) 것은 그렇게 세계와 존재를 잇는다고,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도 또다시 물을 수 있게 한다고. 그러니 함께 철학-함으로 나아가자고, 기꺼이 묻고 또 사유함으로 나아가자고.<br/><br/> p.10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은,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 우리에게는 서로를 이어주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함께 책을 읽는 경험은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br/><br/> p.679 "문제는 역사가 종말로 향해 가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인가 하는 거야. 우린 더 이상 한 도시나 한 국가의 시민이 아니야. 우리는 전 지구적인 문명 속에 살고 있는 거란다. (...) 어쩌면 지금 우리가 체험하는 현상은 아직 시작 단계일 뿐일지도 몰라…"<br/><br/><br/>*서평도서제공: 현암사]]></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281/51/cover150/893232449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2815192</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미일동맹이라는 거울에 비치는 우리 사회 - [미일동맹이라는 거울 - 한미일 안보 체제의 한계와 가능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36423</link><pubDate>Fri, 24 Apr 2026 17: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364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741&TPaperId=172364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28/15/coveroff/k85213774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741&TPaperId=172364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미일동맹이라는 거울 - 한미일 안보 체제의 한계와 가능성</a><br/>지지와 야스아키 지음, 길윤형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미일동맹이라는거울 #지지와야스아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br/><br/> 시작하기에 앞서, '국경'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이른바 '자국과 타국' 사이에는 경계가 있다고 간주된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고 저기까지는 그들, 이라는 식으로. 책임과 권리, 방어와 침입의 구분선으로 기능하는 '국경'은 어떻게 정해져야 할까? 내륙 국가라면 차라리 해결이 쉽다. 문제는 남한과 같은 '실질적 섬'이나 일본처럼 아예 전국이 섬으로 구성된 경우이다. 그것도 인접국이 명목상으로나마 전쟁태세를 늦추지 않는 경우 말이다.<br/><br/> 수백년간의 침략과 분쟁으로 단단히 얽힌 나라, 한국과 일본. 이 두 극동국가가 얼치기 펴와라는 현상유지에 도달한 것은 아무리 좋게 쳐줘도 양국 간 합의의 결과라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주축에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진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물음이 발생한다. 이 다글다글 붙어 있는 체제적, 정치적 '접경과밀지'에서 미국의 군사력이라는 '퍽 이질적인 세력'의 주둔이 발휘하는 힘은 어떻게 해석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극동의 군사안보적 미래는 어떻게 그려지고 또 받아들여지는가?<br/><br/> p.7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1945년 일본 제국이 붕괴한 뒤에도 '극동 1905년 체제'는 지속됐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이 체제를 힘으로 뒷받침하게 된 것은 '한미·미일 양 동맹'이라는 안전보장 시스템이었다.<br/><br/> p.70 미일동맹은 아시아·태평양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허브 앤 스포크형 동맹망의 일부이다. 또 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통해 한미동맹과 특히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 '일본적 시점'에서 파악한다면, 미일 두 나라 사이의 '양자' 동맹일 뿐이고 미국의 다른 동맹망과 독립된 존재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제3자적 시점'에 서면, 실제로 이 동맹은 '극동 1905년 체제'를 떠받치는 '한미·미일 양 동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안전보장 체제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기능임을 알 수 있다.<br/><br/><br/>  현재 일본의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미군 주둔과 핵무기를 이용한 위력-전략을 어떻게 이해하고 유지 혹은 개선하려 하는가? 이는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극동의 3국, 아니 실질적으로는 6개국(남한, 북한, 읿본, 대만, 중국, 러시아)이 일종의 최전선인 동시에 잠재적 위협으로 여겨지는 형국에서 각국의 정치군사적 태도는 즉각 다른 국가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br/><br/> 이런 상황에서 '핵'의 소지 여부나, 사실상 군대인 일본 자위대 조직의 타당성에 대한 갈등이 거듭 터져나오는 것 또한 좌시할 수만은 없는 문제이다. 본문에서 거듭 거론되는 일국평화주의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에 대한 안일한 태도에 연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각종 밀약과 협정은 대중시민사회와 유리되어 맺어지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독자 또한 정치적 주체로서 거듭 물어야 한다.<br/><br/> p.150 한 발 더 나아가 말하면, 미국과 적대하는 국가는 극동유사사태가 발생할 경우 미일이 사전협의에서 어떤 결과를 내놓든, 즉 일본이 '사용 불허'를 결정한다 해도 주일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활용한] 직접전투작전행동에 나설 수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수십 년 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기시 총리에게 말한 "일본의 의사에 반해 행동할 의도가 없다"는 약속은 당연히 미국의 적대국의 인식을 바꿀 만한 요인이 되지 못한다.<br/><br/> p.160 중요영향사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자위대가 "현재 전투행위를 행하고 있는 지역이 아닌 장소"에서 미군을 후방지원 하고 있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이 활동은 미군의 무력행사와 '일체화'되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자위대는 상대방의 공격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이런 주장은 극동유사사태와 사전협의 사이의 관계처럼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국내법적 논리이자, 자국의 의회·국민을 향해 내놓는 헌법 해석이나 사고방식에 불과하다.<br/><br/><br/> 과연 그 '나쁜 짓에 연루되지 않기'로 충분한 것인가? 나에게 어떤 '공격적 의도'가 없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어떤 분쟁에도 휘말리지 않는다'며 물러서는 태도가 과연, 윤리적 책무를 떠나, 얼마나 실효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실질적으로 한 패로 묶이는 와중에 '결정권 없음'을 주장한대도 상대가 '결정권자끼리만 공격하겠습니다' 따위의 '친절한' 선택을 하리라 기대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br/><br/> 저자는 일본의 입장에서 미일동맹과 '극동유사사태'에서 일본의 안전을 중심으로 논하나, 다시금, 한국의 입장, 나아가 우리 사회의 정치적 태도와 별개로 생각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격변하는 정세와 날로 더해가는 분쟁의 위협에서 우리는 진정 '안전하기' 위해, '자주국방'을 주장하기 위해 어떻게 중심을 잡을 것인가. 어떻게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평화라는 아슬아슬한 희망의 균형을 지켜낼 수 있을까. 제국주의와 국제패권이라는 암울한 그림자 앞에서 오직 그를 물을 뿐이다.<br/><br/> p.215 성단을 통해 종전을 결정했다는 것은 [당시 일본이] 천황의 판단 없이는 [국가의 운명과 관련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일본 정부 내에] 거버넌스(통치 기능)가 결여돼 있었음을 드러내 보여 주는 예가 아닐까 한다. 만약 [일본이] '다음' 위기를 겪게 된다면, 전쟁 종결이라는 어려운 결단을 내리는 주체는 민의를 체현한 정부여야 한다. (…) 출구전략을 염두에 둔 일본의 시각을 평소에 동맹국이나 관계국·지역과 공유해 두는 것도 필요하다.<br/><br/> p.288 안보 정책은 국가 간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 이상 일국평화주의나 필요최소한론에 기초한 '일본적 시점'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결국 '나만 옳다는 독선'으로 이어져 현실과 괴리가 생겨난다. 그로 인해 미일동맹이 기능할 수 없게 돼 거꾸로 일본의 안전에 위험을 불러오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본말전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28/15/cover150/k85213774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281562</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이렇게 태어나 이렇게 살아가는 몸의, 이토록 다양한 기원이라니 - [최초의 이브들 - 인류의 진화를 이끈 첫 번째 여성들을 찾아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21738</link><pubDate>Fri, 17 Apr 2026 01: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2173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32137767&TPaperId=1722173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60/54/coveroff/k63213776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32137767&TPaperId=1722173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최초의 이브들 - 인류의 진화를 이끈 첫 번째 여성들을 찾아서</a><br/>캣 보해넌 지음, 안은미 옮김 / 시공사 / 2026년 03월<br/></td></tr></table><br/>#최초의이브들<br/><br/> 태초에 낙원이 있었으매 나약한 여자가 간악한 꼬임에 남자를 꾀어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났더라. 여자란 본래 남자의 몸에서 난 탓에 열등하고, 약하며, 감정적이고 불안정하다… 정말로? 고래로부터 여성의 존재는 몸으로 한없이 수렴되고, 모성의 신화와 열등한 짐승이라는 비난에 쉴 새 없이 시달려왔다. 과학기술로 무장한 지금, 학계는 달라졌을까?<br/><br/> 퍽이나. '비과학'의 시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저자는 남성을 인간의 기본형으로 삼아온 '통념'에 맞서 여성의 몸을 중심으로 우리 몸 곳곳의 조상, 저 구석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동굴의 현모양처가 아닌 생존을 위해 분투하던 곳곳의 시원들을 불러낸다. 젖을 먹이고 새끼를 낳고 무리를 이루며 나무에서 내려와 땅을 박차고 뛰기 시작한, 말하고 생각하고 오래, 때때로 너무 오래 살기 시작한 최초의 이브들.<br/><br/> p.13 암컷의 몸은 그저 수컷의 몸에 지방, 유방, 자궁 같은 '여분의 부위'가 달린 몸이 아니다. 고환과 난소는 바꿔 끼울 수 있는 부위가 아니다. 성별 구분은 포유류 몸에 온갖 주요 특징과 그 안에서 사는 우리 삶에 배어 있으며, 이는 생쥐에게도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과학자들이 수컷을 기준으로만 연구하면 우리는 복잡한 그림을 절반도 이해할 수 업다. 우리는 성별에 따른 차이에 대해 질문하지 않기에, 이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무엇을 놓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다.<br/><br/> p.233 여성은 근본적으로 운동 직후 근육 강도가 더 떨어지는 듯했지만 훨씬 더 빨리 회복했다. 이것은 강한지 약한지의 문제가 아니라 대사와 조직 복구의 문제다. 단기적으로 남성은 근육을 가지고 '힘 쓰는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손상도 더 입는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일찍 쉬어야 할지 모르지만, 일단 한숨 돌리고 나면 비슷한 상황의 남성보다 일찍 그 일을 다시 할 수 있다. 태초에 낙원이 있었으매 나약한 여자가 간악한 꼬임에 남자를 꾀어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났더라. 여자란 본래 남자의 몸에서 난 탓에 열등하고, 약하며, 감정적이고 불안정하다… 정말로? 고래로부터 여성의 존재는 몸으로 한없이 수렴되고, 모성의 신화와 열등한 짐승이라는 비난에 쉴 새 없이 시달려왔다. 과학기술로 무장한 지금, 학계는 달라졌을까?<br/><br/><br/> 진화가 일방향적, 선형적이라는 착각과 이분법이라는 문화적 관념 모두에 도전하며 '몸 바깥의 문제들'이 어떻게 몸-존재들에게, 몸의 유무형적 차이가 어떻게 지배 담론에 이용되어 왔는지를 보인다. 그의 예시들에서 알아볼 수 있듯 생물학은 사회학과 별개가 아니다. 우리는 몸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압력이 어떻게 생물적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지, 생물적 다양성이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영향을 미치는지 샅샅이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br/><br/> 청력의 성차에 대해서도, 예를 들면, 구형 전자기기에 쓰이던 부품에서는 특정 주파수 소음이 방출되었다. 그러나 이 소리는 남성보다 여성이 예민하게 감지하기 때문에,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을 개발하는 남성들에게는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였기 때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여성들은 기기를 이용할 때마다 불쾌한 느낌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를 토로하는 이들이 여자라서 예민하다는 식의 반응에 맞닥뜨렸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성을 포함한 '비남성'들은 '규격'에 들어맞지 않는 일상과 '항상적이지 않은' 불편에 순응하도록 요구받는다. 마치 '인간'과 별도의 종인 것처럼. <br/><br/>p.158 남성은 고음을 듣는 능력이 먼저 사라지는 유형의 난청을 여성보다 훨씬 많이 겪는다. (…) 남성이 나이 들면 고음인 여성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없지만, 남성의 목소리나 그 외 덜컹거리는 낮은 소리는 여전히 들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성은 전형적으로 나이가 들며서 사회적 권력을 얻으므로, 권력을 가진 남성은 말 그대로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br/><br/> p.354 트랜스 여성이 여성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의 뇌는 자신의 방식대로 연결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발달 변화를 겪으면서 성 정체성을 만든다. 대부분의 인간 뇌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성별이 있는 존재라고 이해하는 듯이 보인다. (...) 뇌에 기반한 성 정체성이 그 신체가 속한 사회가 기대하는 바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들의 것보다 덜 실제적인 정체성이 되지는 않는다. <br/><br/><br/> 앞서 말했듯 진화는 우열과 의도의 문제가 아니다. '균일해보이는 정상 시스젠더 남성'은 인간종의 다양성을 대표할 수 없다. 성차별의 과학적 근거는 결국 전체적 손실로 이어진다. 성차는 결국 우열의 문제로 수렴되지 않는다. 이에 부득불 반대하고 싶다면, 축하한다. 그야말로 인간 가능성의 실패작이다. 책머리로 돌아가시오. 우리 인간 모두는 이브의 몸으로부터 태어난 다양한 실험실이자 가능성이다.<br/><br/> 저자가 강조하듯 인간의 가능성은 확장된 무리짓기와 돌봄의 연장에 있다. 혹자는 이 다양과 공존의 가능성을 '사회적 발명품' 따위로 취급하고 싶을지 모르나, 저자 말마따나, "우리가 바로 이런 몸이다. 고통스럽든 행복하든, 장애가 있든 없든, 병에 걸렸든 죽어 사라질 때까지 건강하든, 우리 몸과 그 안에 든 뇌가 그냥 우리다".  글쎄, 우리는 그저 이런 존재일 뿐이다. 그뿐이다. 부딪히고 고민하고 끊임없이 가능성을 탐색하며 함께 살 방도를 찾아나가는 이브의 아이들이다. 생긴대로 살자. 그래, 역시 좋은 말이다.<br/><br/> p.510 역설적이게도, 현대의 성차별은 산부인과학의 발전을 직접적으로 저해한다. 성차별적 문화는 여성에게 더 잦은 임신을 기대하는 것 같지만, 임신한 여성에게 제공되는 건강관리 기회도 줄인다. (…) 모성 사망률이 높아지도록 놔둔다? 진화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 이런 결과는 건강한 아기를 최대한 많이 낳을 수 있도록 최적화하는 것과 반대되는 일이다. 생물학적으로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다.<br/><br/> p.534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우리의 고유한 인간적 형질들을 총동원해야 하는, 다시 말해 확장된 친족 행동, 내러티브 구축, 문제 해결이 모두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하는 최고의 일은 이토록 깨지기 쉬운 확장된 유대를 지지하고 보호하는 제도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좋든 싫든, 이런 제도들은 영역성, 성차별, 우위 경쟁과 같은 우리의 덜 바람직한 행동을 극복하게 해 준다. 이 제도들은 우리 몸의 진화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이다.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는 수단이다.<br/><br/><br/>*서평도서제공: 시공사]]></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60/54/cover150/k63213776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605439</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언어라는 집, 공동체의 집을 가장 가까이 살피고 안내하는 이들의 일상에 대하여. 네, 국립국어원입니다. - [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국립국어원 상담실 연구원의 365일 노동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08644</link><pubDate>Fri, 10 Apr 2026 16: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0864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02137215&TPaperId=1720864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54/42/coveroff/k6021372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02137215&TPaperId=1720864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국립국어원 상담실 연구원의 365일 노동기</a><br/>이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감상에 앞서, 국립국어원에 대한 개인적인 심정으로 시작해야겠다. 아니, 원한 내지는 앙금 비슷한 것이라 해도 좋겠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 일로 서비스는 이용하되 그 기관의 '태도'는 곱게 보지 않으리라 다짐한 세월이 꼭 그만큼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흥! 정도라 할 수 있을 마음으로 펼쳤고, 그제야 볼 수 있었다. 기관이라는 이름과 채팅창 너머의 사람을, '요즘 누가 그걸 신경쓰냐'는 핀잔의 '누구'들의 치열한 일상을.<br/><br/> 초중고 도합 장장 12년의 교육도 해낼 수 없는 문제, 맞춤법. 오죽하면 온갖 '맞춤법 검사기'가 등장하는 판 아닌가. 그 근간에 국립국어원이, 그 안에서도 이용자와 가장 가까운 곳인 상담실이 있다. 이 책은 가장 가깝고, 그 이유로 당황과 황당 사이를 끊임없이 ('끝없이'가 더 적절한 표현일지 잠시 고민했다) 오가는 상담실 연구원의 나날을 살짝 내보인다. 이걸 다 사람이 답하나? 네, 사람이 합니다.<br/><br/> p.4(추천사) 가시처럼 알쏭달쏭한 한 글자 한 칸 앞에서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답을 구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마지막으로 국립국어원의 온라인가나다 게시판을 찾는 수밖에 없다. (…) 오늘날은 인터넷을 통해 거의 누구나 뭔가를 쓸 수 있는 시대이고, 뭔가를 써서 보이기 전에 누군가의 검사를 맡아야 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런 때에 스스로 서로 정확해지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선생이고 해방이다. 물론 그것은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br/><br/> p.182 인공지능이 빛의 속도로 많은 데이터를 길어 올리면, 우리 상담 연구원들은 그 답변이 '규범' 이라는 단단한 땅 위에 서 있는지, 그리고 '맥락' 이라는 결과 맞닿아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언어의 온기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주체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절차는 조금 달라지더라도 국어 연구원은 인공지능이 내놓은 문장들이 국어 생활자의 삶에 올바르게 닿을 수 있도록 책임지는 '최종 검토자'로서 품을 들일 것이다.<br/><br/><br/> 이쯤(이 쯤인가?)해서 물을 테다. 맞춤법 검사기 돌리면 금방인데 굳이 사람이 답해야 하느냐고. 단언할 수 있다. 해야 한다고. 문제는 옳고 그름의 정답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말은 소통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동시에 매 순간 갈라지고 다듬어지며 새로 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말이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고스란히 담아내기 때문에, 동시에 사회의 인식적 틀에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 떄문이다. 예를 들어, 잊을 만하면 한번씩 불려나오는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를 향한 조롱이라든지.<br/><br/> 그 이면에는 '감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있다. 억지 땜질로 바짝 기어주지 않으면 손쉽게 갈아치워질 처지들이 있는 것이다. 말은 사람 간의 약속이다. 그 약속이 누군가를 깔아뭉개고 핍박하는 구실이 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조롱이 아니라 새로운 약속의 장을 열고 다양한 가능성을 들고 오는 일이다. 언어규정은 사람을 단죄하고 옳고 그름의 선으로 찍어누르기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된다.<br/><br/> p.192 문장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며,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어떤 길로 뜻을 전하느냐에 따라 그 움직임의 방향도 완전히 달라진다. '더 잘 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더 분명하게 전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작은 원리를 익혀 글을 쓰는 데에 사소한 도움을 얻기를 바란다.<br/><br/> p.200 왜 우리에게 '높임' 표현이 이렇게나 중요하게 되었을까? 언어는 그 사회의 정신을 반영한다는데, 이 기형적인 과잉 존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어쩌면 우리는 일상에서 채워지지 않는 존중과 인정의 욕구를 모르는 타인에게서, 특히 서비스업 종사자에게서 채우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극진한 대접을 받아야만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사회적 결핍이 '사물 존칭' 이나 '높임 어미의 과도한 중첩 사용'이라는 촌극을 빚어낸 것은 아닐까.<br/><br/><br/> 앞서 말한 10여 년 전의 '사랑' 논쟁 또한 그러하다. 저자가 거듭해 말하듯 규정은 사용자를 재단하고 혼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편협한 정의가 어떤 사랑을 '사랑' 바깥으로 밀어낸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벽을 세우고 엄격한 경계를 긋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범주를 넓히는 일이다. 슬프게도, 우리 사회의 모두는 말이 채찍이 되고 편가름의 도구가 되는 경우를 잘 알고 있다.<br/><br/> 매일같이 쏟아지는 질문 너머의 일상을 읽으며,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철학자의 말을 떠올린다. 이 말을 멋대로 읽자. 누군가는 벽을 세우고, 누군가는 먼 곳의 낯선 이를 환영하고, 또 누군가는 갈라지고 좁아진 틈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공동체의 집으로. 더 큰 집을 짓자. 넓고 다정한, 모두가 오가는 집을 짓자. 누군가를 내몰지 않는, 자유로이 열린 집을. 그 집에 함께 거할, 잘 있기 위해 매 순간 이해하고 안내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 응원을 보내며.<br/><br/> p.110 언어는 쓰임에서 의미를 얻고, 규범은 언어가 그 쓰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돕는다. (…) 그 안에는 언어가 변화하는 속도와 방향을 수용하는 우리의 자세가 담겨 있다. 변하는 언어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일은 때로는 낯설고, 때로는 재미있다. 상담으로 만나는 질문 하나에도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말을 바꾸고 있는지, 어떤 마음 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br/><br/> p.133 표기법이란 사람들을 가르치고 통제하는 교단 위의 회초리가 아니다. 우리들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맺은 약속이다. (…) 낡은 규범에 갇혀 말의 맛을 포기하기보다, 가끔은 대중의 말맛을 믿어 보는 것. 상담실에서 배운 규범 언어의 또 다른 모습이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54/42/cover150/k6021372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544217</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별 수 없이, 불가해의 거리를 껑충 넘어 맞대는 어깨. 우린 이제 한패를 먹은거야. - [너의 나쁜 무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05054</link><pubDate>Wed, 08 Apr 2026 21: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050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509&TPaperId=172050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3/21/coveroff/k85213750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509&TPaperId=172050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너의 나쁜 무리</a><br/>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쓰는 사람은 많은데 읽는 사람은 없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듣는 사람은 없다. 하루종일 넘겨본 인터넷 게시물이며 동영상이 몇 갠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묻는다면, 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고, 하루종일 쏟아진 말과 글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되묻고 싶다. 언택트니 비대면이니 하지만, 발문처럼 차고 넘치는 연결들은 정작 한없이 낮은 밀도 탓에 세계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다.<br/><br/> 뒤탈없고 가벼운 관계만 범람한다. 부스러기 차 버리듯 툭 털어내면 그만일 말과 '우리 사이'들. 이해하려 애쓸 수록 벌어지는 모호와 오해의 간극. 그런 이유로 사는 내내 이질감을 존재의 무게추로 삼아왔다. 사람을 연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연한 살을 몽땅 안으로 말아넣고 그저 둘둘 굴러다니고나 싶었다. 그래서 이따금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걸까. 북적대는 번화가에서, 볕 좋은 강가에서 우뚝 멈춰서버리고 싶었던 걸까.<br/><br/> p.157 자신의 아픔을 부정하는 사람만큼 아픈 사람이 없다는 걸 모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제야 모아는 시내와 수자, 자신 모두 마음 깊숙이 어디 한군데가 단단히 틀어진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서로를 감지했던 것일지도 몰랐다.<br/><br/> p.206 하지만 내가 느끼는 이 이상한 기분, 모멸감 같은 것들은 도대체 어떤 회로를 거쳐야 다스릴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모든 일에 진심을 다했지만 그럼으로써 깎이는 마음을 도로 채우는 법은 도무지 몰랐다.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취약한 부분을 너무도 쉽게 들키고야 말았다.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건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는데.<br/><br/><br/> 사는 일 너무 재미 없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지겨워했다. 뻔해서 지겹고, 알만해서 지루하고,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알지 않을 방도가 없어 초라하고 비참했다. 부끄러웠다. 사건도 사고도 없이 다사다난한 일상을 맴돌다 작가가 그려내는 이들을 맞닥뜨렸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른 순간 나는 그에게로 가…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흐릿한 바닥에 색이 차오르고서야 발붙일 마음이 들었다.<br/><br/> 일곱 편의 이야기, 그 안의 사람들에서 나는 낯설고 난감하고 익숙한 얼굴을 본다. 만원버스에서 한껏 움츠려 자리를 내주는 사람, 일하는 사람을 함부로 부르는 사람, 괜히 미안하고 멋쩍은 마음에 슬그머니 손을 내밀고 엉거주춤 문을 잡아주는 사람. 누구에게 보일지도 모르면서 꼭 요만큼의 벽을 세워두고 영영 지켜보이려 애쓰는 사람.<br/><br/> p.146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폐를 끼치고 누군가는 극도로 폐를 끼치지 않게 노력하고. 그건 어쩐지 좀 이상했다. 공평의 문제라기보다 경계의 문제에 가까운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이 아주 별일이라고 생각하는 무엇이 누군가에게는 그다지 별일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라는 게 발생하는 것이다.<br/><br/> p.207 문득 내가 지키고자 했던 그 최소한의 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오롯이 그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br/><br/><br/> 그 얼굴을 외면할 방도가 없어 두 손을 세워 입가에 갖다 대는 이에게 "아뿔싸, 이러면 별도리 없지, 하며 고개를 숙인 채 집중하여"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이유를 잃어버리고 슬픔만 남"은 사람, "슬픔은 잃어버리고 이유만 남"아, "이유들만 머리에 남아서 악에 받쳐" 팔팔 뛰는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하찮고 사소하게 거듭되는 실패, 좌절, 미끄러지는 의도와 떨칠 길 없는 슬픔 따위는 그렇게 곁을 내주는 마음이 된다.<br/><br/> 보풀 일고 습기 먹은 이야기들을 걸쳐입은 지금, 차마 버리지도 바꾸지도 못하는 누추한 나와 구질한 실패 따위를 박박 닦아 서랍 구석에 모셔두고야 마는 그런 마음을 아느냐 묻고 싶다. 살아봐야지, 입속말로 우물대고 싶다. 별것 아닌 친절을 건네고 요상하고 찌질한 미련을 내비치곤 "인간의 쓰임은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지점에 다다르려 애쓰는 일" 같다는 작가의 말을 한구석에 대롱, 매달아두며.<br/><br/> p.20 "그런 건 누가 죽고 나서야 알게 되더라. 인사 잘 하는 법 같은 거 말이야." 기문은 작별 인사를 아주 오랫동안 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상대가 먼 길을 갈 때는 배웅도 오래 걸리는 법이라고.<br/><br/> p.72 새들이 낮게 나는 모양을 한참 보고 있자니 무언가에 완전히 굴복되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뒤늦게 추위가 엄습했다. 이대로 죽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헛웃음을 지으며 스스로 되뇌었다. 이중일은 죽지 않는다. 그들로부터 영원히 죽지 말라는 지령을 받게 되었으므로. 그것은 활력 있는 형벌과도 같았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3/21/cover150/k85213750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832113</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그 많던 신은 다 누가 죽였을까? 그 많던 신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94968</link><pubDate>Fri, 03 Apr 2026 20: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9496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62137206&TPaperId=1719496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9/67/coveroff/k46213720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62137206&TPaperId=1719496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a><br/>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3월<br/></td></tr></table><br/>우리는 언제부터 신과 다른 세계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전지전능의 일신론이 의식체계와 기반 세계를 재편하기 전, 인간의 욕망과 충동, 명과 암의 양면성은 인간사회의 곳곳에 스며 있었다. 그것들은 신의 광휘를 입고 그 자체로 자연스레, 혹은 영광스럽게 받아들여졌다. <br/><br/> 그러나 지고의 창조주와 순종의 물결을 타고 인간 안의 감정과 욕망 생리와 사회적 본능이 피조물의 속성으로 전락해, 신성을 인간과 별개의 존재로 떼내어 숭앙하기 시작한지 기천년, 또 백여년 사이 급기야 제거 대상의 물목에 오른 지금 현대인은 수용되고 합일되지 못하는 야만과 내면세계와의 갈등을 겪고 있다.<br/><br/> p.49 편향된 신화는 우리를 현실성 없는 이상에 매달리게 하며 거듭 좌절하게 만든다. 자녀가 자기 아버지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아버지가 성숙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도 온전한 아버지 이미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융 분석가인 매리언 우드먼은 어머니의 어두운 측면을 통합하는 것이 현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진화사적 과업이라 했는데, 아버지의 어두운 면을 통합하는일 또한 이에 버금가는 중요한 숙제로 보인다.<br/><br/> p.208 심리적 위기의 정점인 '영혼의 어두운 밤'은 마치 태양빛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식과도 같다. 그런데 깜깜할 때야말로 영혼이 잠에서 깨어나며 비가식적 존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성인기에는 책임이나 성공 같은 '바깥의 빛'을 향해 매진하는 것이 주 과업이라면, 삶의 후반부에는 눈을 안으로 돌려 내면 작업에 매진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br/><br/><br/> 사라진 신들은 어디로 갔는가? 야만과 죄를 뒤집어쓴 채 영영 타르타로스의 밑바닥에 봉인되었는가? 여기서 기억해내야 한다. 신탁과 운명을 부정하던 이들의 말로를. 그들은 잠재된 위협으로 남아 시시때때로 봉인을 강하기에 억눌리는 것이 아니라 억눌렸기에 위험하고 강한 존재가 된다. 현대인에 있어 뜯겨나간 신성의 또다른 이름은 폭력, 중독, 우울과 채워질 길 없는 절망이다.<br/><br/> 그리스신화는 명백한 다신론적 세계관이다. 아니, 모든 것이 신이자 신성이다. 갈등도, 모순도, 통제할 수 없는 감정들도.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다채롭게 존재하는 세계야말로 가득한 신성의 증거이자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사잇길이다. 무턱대고 누를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을 회복하는 길이요 그 안의 자유를 찾는 방법이라 저자는 말한다.<br/><br/> p.112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즉 성과 공격성 혹은 사랑과 전쟁의 구도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몰아내길 원한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찾으려 했다. 하르모니아의 탄생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가장 감당하기 어렵고 또 가장 매혹적인 원초적 에너지들이 결합해 두 에너지 사이 균형이 이루어지자, 비로소 진정한 '조화'가 탄생했다.<br/><br/> p.241 이 신은 위협적이다. 그리고 정통의 위협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증상에는 영혼의 호소가 들어 있다. 그림자가 난무하는 지금, 억압과 배제가 아니라 디오니소스 힘을 이해하려는 열린 자세가 절실하다. 이 강력한 신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야만에서 벗어나 인류가 도약할 수 있는 지혜로운 길일 것이다. 신의 선물인 풍요의 뿔은 모두를 비옥하게 할, 결코 망각할 수 없는 힘이다.<br/><br/><br/> 신화는 분명 오래된 이야기이다. 보편에 기대어 설명하는 데에도 분명 한계가 있다. 이성과 논리의 세계의 현시대의 '남성성'에는 남신들의 속성과 그들의 이미지를 통해 참조할 모델을 잃어버린 채 안팎으로 터져나오는 폭력만이 남아있다. 모호함과 감정의 오염을 거부하는 명료한 이성과 논리의 세계는 들끓는 감정과 카타르시스, 부드러움과 유기적 자연의 이미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br/><br/> 이는 비단 물리적 '남성'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인간에 내재된 남성성의 문제다. 신화가 유비하는 인간사, 신들의 세계로 전해지는 인간 내면의 추동과 갈등을 통해 엿보는 억눌린 무의식과 원형 이미지는 다시금 차가운 이성의 세계에 무엇을 돌려줄 수 있을까. 아주 오래된 이야기, 본질에 가장 가까운 서사의 세계가 그 해답으로 가는 문을 살그머니 열어주기를 기대할 뿐이다.<br/><br/> p.91 취약함과 수치심을 수술하듯 제거하거나 깊숙이 묻어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노력은 상처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장애물을 항구적으로 만들 뿐이다. (...) 상처도 결점도 추함도 열등감도 없어 보이는 삶을 원한다는 것, 이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창조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참자기가 되는 길은 있어도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길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br/><br/> p.252 디오니소스를 몸의 영성이라 했다. 의례를 통해 몸의 감각을 일깨워 신적인 합일에 이르는 것은 신을 경배하기 시작하던 선사시대부터 있어 온 한결같은 인간의 염원이었다. 이를 상실한 우리는 두려움과 열망, 충동과 금기의 반목과 갈등을 각자 내면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경험한다. 신화는 디오니소스 신을 위한 자리를 우리 안에 마련할수록 벌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선물을 받게 된다고 분명히 이야기해 준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9/67/cover150/k46213720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796737</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존경과 환멸이, 이기와 경이가 함께할 수 있다는 건. - [모든 새를 보았다고 믿은 남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70646</link><pubDate>Tue, 24 Mar 2026 19: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7064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22137163&TPaperId=1717064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88/55/coveroff/k62213716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22137163&TPaperId=1717064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모든 새를 보았다고 믿은 남자</a><br/>켄 코프먼 지음, 조주희 옮김 / 일레븐 / 2026년 03월<br/></td></tr></table><br/>바람을 타고, 땅을 박차며 새를 본 적이 있는가? 미련도 불평도 없이 수천 킬로미터를 수십일에 걸쳐 날아가는 새를 본 적이 있는가. 그런가하면 날개는 그저 장식이거나 숫제 달리지도 않은 녀석을 본 적이 있는가. 세상은 이 기묘한 생물을 뭉뚱그려 새라고 부른다. 철마다 노래하고 창공을 가로지르며 깃과 부리를 지닌 그들을. 얼음땅에서 적도의 사막까지, 밀림에서 바다까지, 전 지구의 목록을 모두 찾아낼 수 있다면.<br/><br/> 언젠가 이 세상의 모든 새를 보았다고 믿어진 이가 있었다. 그 자신도 방대한 경험과 하늘을 찌르는 명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학계는 경탄했다. 그의 이름은 곧 권위와 신뢰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얼마나 진실이었을까.<br/><br/> p.40 '내게 새로운 것'과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것' 사이에는 큰 도약이 있다. 전자는 배우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후자는 자존심과 경쟁, 심지어 갈등을 불러오기도 한다. 발견의 동기는 순수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동기가 없다면 이 책의 이야깃거리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새가 '과학계에 알려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 우리는 '누구의'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br/><br/> p.317 세상 곳곳으로 탐사를 나서본 자연주의자들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의 시선에서 이동이란 얼마나 더디고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그 아름다운 비행도 물론이거니와, 이들이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도 땅으로 내려앉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저 신비로울 뿐이다. 수년간의 연구로 밝혀진 새들의 이동에 대한 지식은 이런 마법 같은 느낌을 지우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경탄하게 만든다.<br/><br/><br/> 이 순간에도 산과 물은 죽어가고 있다. 불과 수십년 사이 수많은 종에 인간의 손에 의해 '절멸' 딱지가 붙었다. '생태 복원'은 헛된 희망으로 불릴 뿐이다. 이것은 정해진 미래인가. 되돌릴 수 없는 좌절의 길인가. 저자의 말을 조금 바꾸어 돌려주고자 한다. 우리는 이미 그 잔을 깨지기 직전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니 손을 모아 그 경이를 감싸안고 지켜내야 한다고,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내야만 한다고.<br/><br/> 우리 자신의 관찰 대상으로서 '그곳에 놓여있는' 동시에 우리 자신 또한 그것의 일부인 자연을 탐구하는 일의 본질적 어려움은 우리가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과 그를 부정할 수 없음에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데에 기인한다. 더이상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지식과 추정과 '발견'이 쏟아져나오는 지금 오듀본의 일화는 우리에게 오래된 물음을 던진다. 무엇을 볼 것인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br/><br/> p.199 눈에 띄는 점은 바로 부유한 (잠재적) 후원자나 영향력 있는 자연주의자, 또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는 사실이다. 마치 누군가에게 아첨하기 위해, 기존의 솔새를 새롭게 그려내고 이름 붙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처음에는 이런 해석이 너무 냉소적이고 부당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오듀본의 생애를 깊이 탐구하고 난 지금은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br/><br/> p.364 뉴저지 습지를 떠돌던 수천 마리의 클래퍼뜸부기는 사라졌고, 펜실베이니 아의 모든 나무 위에 떼 지어 앉아 있던 붉은머리딱따구리도 더는 볼 수 없다. 아무리 바람이 좋다 한들 뉴올리언스를 지나가는 수만 마리의 검은 가슴물떼새 비행 행렬도 다시 오지 않는다. 잔은 벌써 절반이나 비어버렸다. 하지만 우리의 잔에 남은 것은 여전히 경이롭다.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다양한 조류라는 보물이 남아 있다.<br/><br/><br/> 인간 오듀본은 물론 결함투성이었다. 사기꾼이자 인종주의자였다. 그의 순진한 자의식은 사죄와 성찰이라는 양심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와 문명세계의 잘려나간 시야에 자연은 발견되고 발명되었다. 완벽한 과거의 그림자는 여전히 드리워져있다. 여기서 다시 물어야 한다. 끝이겠습니까? 무엇을, 누구의 이름으로 끝이라 부르겠습니까.<br/><br/> 이를 마음 깊이 받아들일 때, 과거의 유산과 완전히 다른 세계의 지혜를 나의 세계에 포섭하는 폭력을 멈추어야 함을 깨달을 때, 사람이 아니라 업적을, 동시에 위대한 업적이 짓밟고 선 자리를 마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저자가 말하는 발견의 기쁨, 새가 온몸으로 가로지르고 누비는 세계의 아름다움, '그를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 두는' 길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자. 고요한 외침. 아, 새다.<br/><br/> p.420 오듀본은 노예제 찬성론자, 백인 우월주의자, 과학 사기꾼 등 여러모로 끔찍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더 다양한 종류의 새를 그려 경쟁자들을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와중에도, 진정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운 면이 존재했다. (…) 오듀본은 나에게 영웅도, 롤모델도 아니다. 그렇다고 나는 그의 작품까지 버리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br/><br/> p.456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과학적으로 새로운 생물을 발견한 사람들일지 모르지만, 각자의 기억에 남는 마법 같은 순간은 자기에게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바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러한 발견의 가능성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기적은 곳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br/><br/><br/>*서평도서제공: 일레븐<br/>#모든새를보았다고믿은남자 #자연사 #탐조 #신간추천]]></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88/55/cover150/k62213716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885540</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두려워하라. 아, 이것은 포식자의 아가리구나. - [대문자 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58280</link><pubDate>Wed, 18 Mar 2026 20: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5828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585&TPaperId=1715828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05/1/coveroff/893292558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585&TPaperId=1715828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대문자 뱀</a><br/>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02월<br/></td></tr></table><br/>전대미문의 살인자. 그가 지나간 자리엔 피와 죽음의 현장 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단서도, 동기도, 하다못해 꼬리를 감추려는 최소한의 노력까지도! 뒤늦은 경찰과 평범한 이들의 몫은 고작 분통을 터트리고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다.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아무도 모르게 찾아와 탕, 탕. 그리고는, 끝. 동정도 대의도 필요치 않다.<br/><br/> 그는 뭐랄까, 그래, 사람이라기보단 뱀이다. 어둠 속에 도사린 뱀, 소리 없이 다가와 아가리를 쩍 벌려 집어삼키는 포식자. 잠시 눈을 돌려보자. 한 여자가 지나간다. 늙고, 뚱뚱하고, 썩 온순하다고 볼 수는 없는, 대단한 재산도 없이 그저 개 하나 끌어안고 그저그런 나날을 반복하는. 조심하라. 눈 깜빡할 사이에 사타구니에 그야말로 주먹만한 구멍을 내줄테니. 깔끔하게 한 발 더. 그것만이 유일한 자비일 뿐.<br/><br/> p.37 마틸드가 작업을 하면, 한 발도 총알이 빗나가는 법이 없고, 아무 문제 없이 깨끗하게 일이 처리된다. 그러나 이날 저녁은 예외였다.<br/><br/> p.151 이 살인자 뱀은 필요성이 있을 때에만 움직일 것이다. 놈은 교활하고도 강력한 파충류이다. (...) 이 대문자 뱀은 희한한 습성을 가지고 있으니, 사타구니에 들끓는 조그만 뱀들에 특별한 혐오를 느끼며, 거기에다 독을 내뿜기 때문이다. 놈은 작은 뱀들을 싫어하는 커다란 뱀이다. 당신의 이마 한가운데 총알을 박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 당신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상관없이 당신의 무게 중심에다 총알 두 발을 쏘는 진짜배기인 것이다.<br/><br/><br/> 63세, 과부, 예술 및 문학 기사 훈장 서훈,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훈장 서훈…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평범, 아니, 모범에 가까운 그의 안락한 일상에 가장 큰 걸림돌은 비밀스러운 이면도, 고독도 아니다. 의뢰는 처리하면 그만, 대단한 의미조차 필요치 않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깜빡이는 기억력이다. 바늘틈 하나 없는 냉철함에 균열을 내는… 아이구, 참. 나이도!<br/><br/> 그 자신조차도 의심없이 뒤바꾸고 흘려버리는 기억 탓에 이야기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이 내달린다. 확신은 누구의 것인가. 평생의 동지도, 죄 없는 목격자도 필요하다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제거'해버리는 그들? 기름진 부스러기를 털어대며 거드럭대는 경찰? 모순적이게도 그들 자신은 의문하지 않는다. 당혹에 빠지는 건 독자 뿐이다. 어느순간 정의와 명분 따위는 내던지고 사악한 공모의 웃음을 짓는 스스로를 발견하리라.<br/><br/> p.114 내 상황이 되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거야. 아냐, 기억력이 없어진 것은 아니야… 저녁이 되고, 밤이 된다. 그녀는 잠이 들었다가, 파리의 기념물들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잠에서 깨어난다. 전화 부스들의 리스트를 옆에다 적어 놓았지만,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br/><br/> p.338 떠나기 전에 그를 찾아가서 분명히 따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아무것도 요구한 일이 없는 뤼도 같은 불쌍한 개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지낸다는 것은 그녀의 정의감과 너무나 어긋난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떠오르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일이면 생각나리라.<br/><br/><br/> 마틸드의 후련한 은퇴를 목전에 둔 우리 '목격자들'은 기대와 함께 부풀어오르는 의구심을 감추지 못할것이다. 과연 누가 그를 '단죄'할까? 허물어지는 기억, 느슨해지는 연결고리에도 흔들림 없는 솜씨를 지닌 이 총잡이의 끝은 과연 어떻게 될까? 여기서 작가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나 한치 없을 예상할 수 없는 전개로 다시금 허를 찌른다.<br/><br/> 이 이야기는 무언가를 '위해' 쓰이지 않았다. 잔인한 쾌감과 지독히도 기능적인 폭력만이 있을 뿐. 몹시도 사악하다. 대문자 뱀처럼, 매혹적인 냉소. 의심하라, 모든 것을. 경계하라, 흔들리는 눈을. 두려워하라. 어둠속에 형형히 도사린 대문자 뱀. 도망칠 수 없다, 소리 없이 다가와 삼켜버릴 심연에서. 그리고, 탕.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br/><br/> p.230 선생은 멍하니 반장을 바라보지만, 자신은 다른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느낀다. 강렬한 감정, 분노, 혹은 다른 것을 표현해야 하지, 이렇게 초점 없는 눈으로 상대방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앉아 있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땅콩 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이 뚱뚱한 반장은 똑같은 질문을 끈질기게 반복한다. 마치 고장 난 레코드판 같다. 만일 내가 좋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곧 사회 복지사들이 들이닥칠 거야…<br/><br/> p.329 그날 여기에 왔던 사람이 바로 이 여자다. 이 여자가 테비와 르네를 죽였다. 경찰에 전화해서 그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로부터 한 15분이나 지났을까, 선생은 그 종이를 발견 하지만, 그게 무엇에 관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진다.<br/><br/><br/>*서평도서제공: 열린책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05/1/cover150/893292558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050177</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사랑합니다, 호갱님! - [인스타그램은 왜 공짜일까? - 마음을 사로잡고 경제를 움직이는 마케팅의 비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44607</link><pubDate>Wed, 11 Mar 2026 21: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4460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32136675&TPaperId=1714460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08/68/coveroff/k93213667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32136675&TPaperId=1714460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스타그램은 왜 공짜일까? - 마음을 사로잡고 경제를 움직이는 마케팅의 비밀</a><br/>이완배 지음 / 북트리거 / 2026년 02월<br/></td></tr></table><br/>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의 책장을 살펴보라고. 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사는 곳이 곧 그 사람의 품격을 보여준다고. 후자는 광고였다. 그렇지만 전자는 아니라고 할 이유가 있는가? 무언가가 나를 보여준다. 광고는 더 이상 상품을 팔지 않는다. 마케팅의 홍수 시대를 지나 모든 것이 (상업적) 광고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시대에, 광고가 파는 것은 바로 감정이고 이미지다.<br/><br/> 되고 싶은 미래, 내 것이 아닌 현재를 판다고 해도 좋으리라. 이런 시대에 일상을 가득 메운 광고들의 속내와 기전을 들여다보는 일은 곧 무의식 중에 스쳐보내는 현혹과 희망, 좌절과 결핍을 이해하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br/><br/> p.9 사람의 행동을 바꾸고 시장에서 가치를 만들어 내는 기업의 전략을 파악하는 일은 곧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이해하는 일과 같다. 인간 심리의 작동 방식을 탐구하다 보면 일상 속 광고와 소비자의 선택이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br/><br/> p.74 네거티브 마케팅은 이목을 끌기 쉽다. 그 러나 모든 시도가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별, 마케팅의 역사를 살펴보면 남의 단점을 저격하는 전략은 오히려 성공하기보다 실패한 경우가 더 많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마케팅에 정답은 없다. 네거티브든 포지티브든, 마케팅의 성패는 형식이 아니라 소비자의 감성을 얼마나 제대로 찌르느냐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br/><br/><br/> 책에서 다루는 마케팅 전략들을 차근히 뜯어 보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아주 작은 부분, 그러나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을 건드린다. 다름 아닌 우리 안의 본능, 사회적 존재, 그 이전에 생물로서 가지는 깊고 연약한 부분이다. 혼자이고 싶지 않다. 이전의 결정으로 형성된 사고 방식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속고 싶지 않다.<br/><br/> 이를 이해한다면 마케팅 전략을 더 이상 단순한 판매 방식이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계산이자 심리 싸움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우리는 흔히 기업이미지에 일종의 선악을 덧씌우고 소비자로서의 선택을 더없이 합리적인 판단으로 믿고 싶어한다. 이를 짧게 말하면 '가치'라 할 수 있겠다. 소비자는 기업과 '가치'를 주고받고, 나아가 공유하고 싶어한다. 바로 여기에서 물어야 하지 않을까.<br/><br/> p.117 미끼 효과와 앵커링 효과는 소비자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 당신은 현명한 소비자가 아니라, 미끼에 보기 좋게 낚인 호갱님이다. 호갱이 되지 않으려면 대니얼 카너먼이 이야기한 '깊이 숙고하기' 시스템을 잘 가동해야 한다. 마케팅은 '대충 생각하기' 시스템의 빈틈을 늘 노리기 때문이다.<br/><br/> p.155 냉정하게 말하면 명품 소비는 합리적인 소비가 전혀 아니다. 하지만 지위재가 주는 행복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사람이 세상에는 꽤 많다.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명품 브랜드는 상품의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리는가 하면, 멀쩡한 상태의 재고를 남김없이 불태우기까지 한다. (…) 한쪽에선 명품 하나 사겠다고 새벽부터 줄을 서서 오픈런을 하는데, 다른 한쪽에선 남은 제품을 불태운다. 이게 정말 효율적인가?<br/><br/><br/> 제목처럼, 인스타그램은 왜 공짜인가? 무슨 이득이 있어 그 많은 비용을 투자해가며 유저를 불러모으고, 끊임없는 '컨텐츠' 생성과 서로 간의 노출에 안달하는가? 왜 차고 넘치는 자본 권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에 납죽 엎드리는가? 우리는 소비자인 동시에 광고산업의 일부이다. 선택하지도 의문하지도 않는 순진한 소비자는 산업의 충실한 공짜 부품이 된다.<br/><br/> 그러지 않기 위해, 별 수 없기에 혹은 당연히 사야 하기에 소비하고 이용하는 얌전한 돈줄이 아닌 시장의 한 축, 경제법칙이 말하는 합리적이고 능동적인 소비 주체가 되기 위해 이 책을 읽고 권하는 우리가 살아온 세계들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br/><br/> p.245 전통적 시장과 달리 양면 시장에서 고객은 두 부류(양면)로 나뉜다. 하나는 돈을 내는 진짜 고객이고, 다른 하나는 그 돈을 내는 고객을 붙잡아 둘 전략적 무기 역할을 하는 고객이다. 구글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인터넷 플랫폼 사업자가 대부분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양면 시장에서 일반 이용자는 돈을 내는 진짜 고객이 아니라, 돈 내는 고객을 붙잡아 둘 전략적 무기다.<br/><br/> p.246 티롤은 이 연구를 통해 '단면 시장과 달리 양면 시장에는 약탈 가격 금지 조항이나 독과점 방지 정책을 함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 전략적 무기가 되는 고객에게 공짜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경쟁 기업을 죽이기 위한 술책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양면 시장 특유의 사업 모델이기 때문이다.<br/><br/><br/>*도서제공: 북트리거]]></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08/68/cover150/k93213667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6086882</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이기의 이기마저 떠받들어주어야 간신히 인간됨을 '허락'하리라는 연약하고 나약한 '됨'들에 고함. - [차별을 훔치는 남자들 - 피해자의 자리와 억울함이라는 무기에 관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42553</link><pubDate>Tue, 10 Mar 2026 21: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4255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6745&TPaperId=171425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23/39/coveroff/k67213674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6745&TPaperId=1714255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차별을 훔치는 남자들 - 피해자의 자리와 억울함이라는 무기에 관해</a><br/>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3월<br/></td></tr></table><br/>언젠가 SNS에서 본 적이 있다. 월경과 관련된 불편에 공감하는 내용의 영상 게시자가 남성이었더란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일도 아니나 댓글에서 난리가 났다. 입에 담기도 어려운 모욕과 욕설이 불붙듯이 달리는 와중에 '여자가 불편하다는 얘길 하는 너도 페미 아니냐'는 억지떼가 숱하게 보였다.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거나 혐오발언을 멈추라는 댓글은 순식간에 파묻혀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주체 되는 문제는 으레 이런 식으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어렵다.<br/><br/> 숙의와 치열한 논쟁이 필요한 존엄투쟁이 감정싸움에 휘말려 소진되기 일쑤다. 한국 사회 내 젊은 남성 집단의 이런 '깽판치기'는 사실상 하루이틀 사이의 일이 아니다. 차별과 공정의 호소는 강탈된지 오래다. 제목처럼 한국 사회의 남성들은 차별을 훔쳐가는가. 그렇다. 쥐면 꺼질세라 불면 터질세라 유사 이래 노상 사경을 헤매는 남성의 '기가 죽을까'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개개인의 '감정' 문제만으로 치부할 만큼 단순하지 않다.<br/><br/> p.38 남성 청소년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여성을 배제하거나 도구화한 '주류적인 남성문화'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다. 남성 청소년들이 온라인에서 나타내는 공격성과 혐오의 표출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기존에 존재했던 우리 사회의 일면을 반영하거나 모사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br/><br/> p.46 판관은 결국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에 심판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성향을 지닌 이들이 우리 사회에 많아진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그만큼 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한계 역시 명백하다. 대체로 '사후적 징벌'에만 관심 있을 뿐, 범죄 등의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데는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br/><br/><br/> 그들이 그렇게 '번성'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엄을 훔쳐다 쥐어주는 사회권력이 존재한다. '알아서' 생존하도록 내몰리는 성원들과 동등한 주체가 아닌, 더 우대받고 더 보호받을 존재로 추켜올림으로써 영원히 어떤 영역에서의 무지를 보장받도록, 문제의 근원을 직면할 이유를 감각하지 않도록 천진한 무능에 고착시킨다. 더 크게, 더 많이 말하라. 전부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br/><br/> 바로 그 이유로 '능력으로 쟁취한 공정하고 마땅한 권력'으로의 진입은 필연히 실패로 귀결되는 환상이다. 진짜 자격, 진짜 성원, 마땅히 존귀한 '우리'의 범위를 점점 더 좁게 설정하며 생득적 존엄을 마치 능력으로 쟁취하고 침탈할 수 있는 자원으로 착각하기에 자기가 놓인 자리와 사회 전체의 역동 모두를 무시하고 기득권이 곧 정의라 믿으며 '중립기어'를 박는다.<br/><br/> p.79 여성들로부터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기분', 기 성세대들이 청년들의 몫까지 독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분노와 박탈감을 키운다. 또래 청년 여성이든, 중년 남성이든 모두 자신의 앞길을 막는 적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br/><br/> p.122 여성의 사회 진출이 증가하면서, 남성들이 자신의 기존 권력을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면서 남성이 차별받는다는 일종의 '착시 현상'을 경험하는 (…) 상황을 정치적 땔감으로 삼아 혐오를 조장한다. 문제의 원인은 청년 남성들의 인식에 있다. 그런데 자꾸 '과도한 페미니즘'이나 우리 사회가 남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br/><br/><br/> 선망하는 권력에 가까이 끌어올려주기를 바라며, '열등한 자들'이 사라진 자리에 넉넉한 우월의 여유가 보장되리라 믿으며. 그러나 익히 알고 있듯이 기울어진 땅의 중립은 필연히 권력에 힘입어 낮은 쪽으로 구른다. 이것은 진정 '자연스러운'가? 존엄과 평등이 사라진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에 과연 '공정'과 '성공'이 자리할 틈이 있기나 할까.<br/><br/> 이 책이 제목에서부터 남성권력의 문제와 기만을 지적하고 있으나 이는 물리적 생김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라서 악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 규범이, 그를 공고히 하는 기득권자들이, 눈앞의 이득과 기대가 '남자니까'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를 부수고 더 넓은 평등,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남성 존재들이 '남자니까'의 역학을 뒤집고 그 틀을 벗어나려 애쓰는 지점에서 시작된다.<br/><br/> p.100 흔히 '한국은 안전한 나라'라고 말하지만 그 말은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공권력의 작동 범위나, 치안의 수준만이 '안전함'의 척도일까. '안전한 공간'이라는 외피를 둘러썼지만 실은 체제에 저항하는 이들에 대한 조롱과 탄압이 일상화되고, 능력주의 논리가 약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 곳이 지금의 한국이다.<br/><br/> p.167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거나, 이것부터 하고 저것은 나중에 하자는 말은 더 이상 시민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민주 정부에서도 그렇게 누군가의 삶이, 인권이 뒷전이 된 케이스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지킨 시민들의 존재를 하나하나 기억하고, 그들의 뜻을 한국 사회에 반영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이전부터 소수자·약자들이 외쳤던 구호에 정답이 있다. <br/><br/><br/> 저자의 전작을 빌어 말하고 싶다.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는 없다. 우리의 궁극적 방향은 남자니까 이 정도면, 남성에게도 이득이 되기 때문에… 가 아닌 어떤 성원도 불평등한 각자도생의 '우리들의 사회'에서 행복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 애써야 한다.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누구도 홀로 버려두지 않아야 한다.<br/><br/> 내가 너를, 우리가 그들을, 서로가 서로의 진정성과 무결을, '진짜 사람'을 검증하려는 시도를 멈추어야 한다. 잘 사는 우리를 위해 타인을 소모해도 좋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가 약육강식의 '야생'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더이상 무마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모두가 말해야 한다. 남성이여, 정의로운 성원이 되어라. 남자다운 남자가 아닌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라.<br/><br/> p.267 '불편하다'라는 말은 여전히 매우 주관적이고 감정인 표현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사실 '불편하다'는 매우 맥락적이고 관계에 기반해 있는 말이기도 하다. (…) '불편하다'는 말은 언제나 쉽게 기각된다. 누군가의 '불편하다'는 목소리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온갖 농담과 장난과 성희롱에 왁자지껄 웃는 것이 '도리'처럼 여겨진다면, 그런 세상에선 누가 더 살기 좋은지는 명백하다.<br/><br/> p.276 소수자들 입장에서 기존의 주류-기득권, 차별을 숨쉬듯 하는 이들이 편할 리가 없다. 하지만 이들은 광장에서 누군가를 쫓아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 문제는 다수자들은 소수자들을 쫓아내라고 너무나 쉽게 말한다는 점이다. 나는 그것이 '권력 차이'라고 생각한다. 연대를 유지할지 안 할지의 권한은 자신들이 갖고 있다는 생각, '우리 집단'이 '너희 집단'을 쫓아낼 힘이 있다고 믿지 않으면 그런 말은 할 수가 없다.<br/><br/><br/>*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23/39/cover150/k67213674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233917</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우리의 탐욕이 안으로만 향할 때, 황폐화되는 사회와 무력해지는 사랑에 대하여. - [탐욕스러운 돌봄 - 잘 키우려 할수록 나빠지는 불행에 대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28205</link><pubDate>Tue, 03 Mar 2026 18: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2820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136826&TPaperId=1712820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04/29/coveroff/k76213682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136826&TPaperId=1712820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탐욕스러운 돌봄 - 잘 키우려 할수록 나빠지는 불행에 대하여</a><br/>신성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3월<br/></td></tr></table><br/>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사회는 살만한 곳인가? 이 시대에는 희망이 있는가? 누구에게 물어도 썩 긍정적인 답이 돌아오지 않을 테다. 언젠가 지인에게 들은 적이 있다. 집 근처 학교에 아이들의 맛있는 급식을 원한다는 의미불명의 현수막이 걸렸기에 찾아보니 급식노동자 근무처우 개선 투쟁에 항의하는 내용이었다고.<br/><br/> 참담했다. 이런 세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며 사탕발림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된다. 어른들의 목소리로 표상되는 사회가 이 꼴인 것은, 지금 자라나는 세대를 어떻게 망치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에 다름아니다.<br/><br/> p.27 우리 아이의 자존감을 길러주겠다는 노력은 시민적 자존감을 지켜줄 수 없는 사회 없이는 무효하다. 아무리 자식이어도 그는 내가 아닌지라 그가 어떤 선택을 하고 무엇을 좇을지 부모는 알지 못한다. 자식의 미래를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부모, 결국 모든 부모가 지금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바로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br/><br/> p.40 사랑이 경제로 환원되면서 발생한 돌봄의 양극화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원망하게 만들고, 삶을 스스로 평가절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잔인하다. 사실상 반돌봄이다. (...) 우리의 탐욕은 안이 아닌 밖을 향해야 한다.<br/><br/><br/> 내 아이가 대단한 부도 명예도 아닌 그저 안정적인 삶과 쪼들리지는 않는 생계를 누리기를, 상처받고 불편하지 않기를 바라는 '소박한' 욕망은 우리만 살아남는 좁은 세계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사랑이 탐욕이 되면 그저 무언가를 향한 갈망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를 더 좁고 작게 분열시킨다. 사회를 황폐화한다.<br/><br/> 황폐화된 사회에서 현재는 미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직업에는 귀천이 있는, 어쩔 수 없는 세상 순리가 원칙이 되고 정의가 되는 사회에서 시간과 주권은 착취와 기만의 협주 속에 불균등한 재화로 전락한다. 공동의 자원은 고갈되어 사유재산의 제로섬 쟁투만이 대두된다. 결국 무한경쟁의 잔인함에 던져진 개인만이 남는다.<br/><br/> p.47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아름답다고 소리 내 말하지 못하는 환경은 사막이다.아는 단어를 죄다 글로만 배운 사람이라면 그 또한 사막을 지나는 이다. 더구나 이 고행은 가난과 함께 대물림되기 마련이다. 이 불모의 토지에서는 씨를 뿌려도 초목이 자라지 않고, 희망을 품어봤자 신기루에 그치고 만다. 같은 세계를 사는 시민이자 어른으로서 우리에게는 사막화를 막을 책임이 있다.<br/><br/> p.91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인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정치란 오직 선거뿐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결과밖에 없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정당과 정치인들은 우리의 요구를 받아안아 정책으로 실행하고 법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그 앞에서만 우리는 공동의 선한 의도를 가진 성숙하고 단합된 국민이 된다. 전 세계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포풀리즘은 바로 이렇게 시작됐다.<br/><br/><br/> 비단 유형의 자원뿐만 아니라 여유, 배려, 관용 등의 필수 가치조차 파이 싸움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이 쟁투의 원인이자 목적일 사랑까지도 탐욕 앞에 무력해진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설 수밖에 없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으며, 국가는 성원의 존엄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br/><br/> 공존, 함께 살아가기, 동료 성원 따위는 먼 꿈이다. 우리, 더 진짜인 우리와 적뿐이다. 안으로, 더 좁고 작은 우리에게로만 향하는 탐욕이 모든 정의에 선행하는 사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만은 잘 사는' 사회는 역설적으로 누구도 살 수 없는 곳이다.<br/><br/> 저자는 성장해가는 아이와 변화된 사회적 요구에 분투하며 깨달은 바를 바깥에서 안으로, 다시 안과 바깥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사유로 펼쳐보인다. 육아와 교육, 나와 너와 수많은 타자들을 오가는 네 챕터의 글은 나와 아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 이대로여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요청에 가깝다. 그는 "돌봄의 어려움은 나 혼자 애쓴다고 덜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br/><br/> p.68 이종건은 《연대의 밥상》에서 연대는 "서로의 삶에 참견을 하는 일"이라고 했다. "당신의 고통이 나와 맞닿아 있기에" 도저히 방관할 수 없어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억울하면 의대 오라는 태도로는 연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 연대는 "결국 자기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br/><br/><br/> 홀로 태어나 살 수 없는 이상, 우리에게는 인간다운 인간일 책임이 있다. 나와 타자가 서로의 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타자의 생애 전체에 책임 있는 존재일 책무를 진다. 혼자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우리, 연약한 종으로서의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공동체를 이루는 것뿐이다. 더 취약하고, 느리게 따라오고, 이질적인 존재와 함께하는 것. <br/><br/> 수없이 직면하는 실패와 다름을 개인의 희생으로 무마하지 않는 것, 사회 전체가 상처를 기억하고 절망을 반복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 사회 전체의 하한선을 높이고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 결국, 지긋지긋하게도, 이 완전수동식 사회는 사람으로 이루어진다고 반복해야만 하겠다. 그것도, 타자 곁에 서는 사람,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하는 탐욕에 힘입어서만, 비로소.<br/><br/> p.111 앞서 우리가 배웠어야 할 것은 불신이 아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저 먼 타자의 죽음이 실은 나와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공동체적 감각이다. 모든 공동체는 그 안에서 "죽어가고 태어나는 개인들의 생각들과 업적을 흡수하면서 유지"된다. 공동체가 유기체인 이유다. (...) 그 어느 때보다 타인의 마음과 죽음을 더 많이, 더 깊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재난을 대하는 자세다.<br/><br/> p.220 결국 "인간이 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고 "자기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비참함과 직면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 이다. (...)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다 같이 쌓아 올려야 할 신뢰와 권위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 세계는 그렇게 인간에 의해 완성되어간다. 미추를 결정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br/><br/>*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04/29/cover150/k76213682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042953</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양조위, 우리들의 사랑의 기한은 만 년으로도 부족하지요 - [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 - 말보다 깊은 눈빛, 양조위의 삶·사랑·작품]</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15916</link><pubDate>Thu, 26 Feb 2026 19: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1591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72135255&TPaperId=1711591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83/66/coveroff/k27213525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72135255&TPaperId=1711591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 - 말보다 깊은 눈빛, 양조위의 삶·사랑·작품</a><br/>주성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2월<br/></td></tr></table><br/>스스로를 어째 평생을 가도 취향이라고 할만한 내용이 하나같이 애매한 방향으로 희한하게 생겨먹은 탓에 영화도, 배우도 메이저한 선에서 스몰토크라고 꺼내기 애매한 사람... 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뭐랄까, 세월의 향수 같은 이름들이 있기 마련이다.<br/><br/>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마음 한켠에 차오르는 슬픔, 그래, 차라리 애수라고 해도 좋을 그런 이름들. 알음알음 돌려 보던 비디오 속 영화는 불룩한 화면에 스치는 얼룩지고 흐릿한 조명들, 음울과 권태로 꽉 눌린 청춘과 불온하고 위태한 장면들로 기억된다. 클리셰임을 부정할 수 없는 판에 박힌 줄거리와 끈덕지게 따라붙던 뒷맛들과 함께.<br/><br/> p.10 그 감정을 자신의 절대적인 눈빛 속에 가둔다.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가장 큰 미덕은, 연기에서 과잉의 그림자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맡은 작품 속 인물과 관객이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큰 소리로 불러서 돌아보게 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먼저 다가오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느긋하게 지켜보고 기다린다.<br/><br/> p.139 "넌 꿈이 뭐야?"라는 질문에 그는 "24시간 해가 지지 않는 아이슬란드에 가고 싶다. 춥더라도 적어도 빛은 볼 수 있으니까"라고 답한다. 이처럼 〈첩혈속집〉의 양조위는 1997년 반환을 앞둔 불안한 미래 앞에서, 희망 없이 떠도는 홍콩 그 자체를 대변하고 있었다.<br/><br/><br/> 그 편린들 사이에 낯익은 얼굴이 있다.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몰라. 그저 양조위였을 뿐. 곧은 눈썹 아래 무구하고 순한 눈매가 꼭 어린 강아지같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누구도 상처입힐 수 없는 눈동자라고 생각했다. 배역을 떠나 사람이 그럴 거라고. 어리고, 순한, 둥그런 반복. 홍안의 양조위를,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br/><br/> 뭐랄까, 그에게는 꼭, 더럽혀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그런 얼굴에 이유 없는 악함을 부여한다는 건 어쩐지 모욕처럼 느껴질 만큼. 어느 세계에서든 그 얼굴을 믿어버리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처럼. 수줍고 깊고 외로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남자... 라는 생각에 몇 번을 속아넘어갔던가. 젠장. 가만 되짚어보면 그 손은 결코 희고 보드라운 적이 없었을텐데!<br/><br/> p.204 "유덕화는 배역과 끝없이 경쟁하고, 양조위는 배역과 쉽게 사랑에 빠지고, 장국영은 배역을 유혹한다." 경쟁하는 유덕화에게는 불가능한 장면이고, 유혹하는 장국영에게는 비누와 수건이 먼저 말을 걸어올 것이기에 역시 불가능하다. 오직 양조위만이 관객을 야윈 비누의 자리에 두는 마법을 발휘하며 우리를 편안하게 해준다. 양조위에게는 고독마저 자랑이 된다.<br/><br/> p.226 비교해볼수록 장국영과 유덕화처럼 세상 투명한 배우가 또 어디 있나 싶다. 그런데 유독 양조위만은 다르게 읽힌다. 현실과 픽션을 넘나들며, 단순히 '사려 깊고 착해 보인다'는 표현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배우는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매번 알면서도 양조위라는 인간에게 속고 마는 것일까.<br/><br/><br/> 밉지 않은 배신감은 접어두기로 하고, 그의 이름과 거의 언제나 붙어다니던 감독들의 이름을 꼽아본다. 예를 들면, 이쯤 되면 거의 세트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왕가위랄지. 어렵잖게 그릴 수 있는 양조위의 필모그래피는 곧 그가 해석한 세계를 그려낸 아들이 바라본 사회와도 촘촘히 엮여 있다. 그것이 곧 역사가 아닌가.<br/><br/> 저자는 신통기... 홍통기? 를 도열하는 대신 생애부터 작품세계까지, 배우이기 전에 인간, 양조위라는 사람을 통해 말한다. 배우의 존재의의와 그 무게를. 비련과 허무로 뭉뚱그릴 수 없는 그때, 그 사람, 그 곳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를.<br/><br/> p.284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뜻하는 '화양연화'라는 제목은 과거 형처럼 들리지만, 공식 영어 제목은 앞서 말한 것처럼 '화양연화'를 고스란히 영어로 옮긴 'The Most Beautiful Day in Life'가 아니라, 지극히 현재적 느낌의 〈In the Mood for Love〉다.<br/><br/> p.285 말하자면 왕가위는 그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미 1997년 이후일지도 모를 미래의 시간을 보여준 것이다. 주 선생의 평행우주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처럼 양조위는 '왕가위의 시간'에서 모든 시간대를 산 유일한 배우라는 것을 넘어, 왕가위도 경험하지 못한 미래에서 살아가는 배우가 되었다.<br/><br/><br/> 배우로서 '시대를 풍미했다'는 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2027년을 코앞에 둔 지금,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날 배우 양조위와 그의 세계는 그리움일까, 절망일까. 아니면, 연약한 향수에 그치게 될까. 어쩌면 그의 세대가 제목 그대로 마지막 홍콩배우일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었을지도.<br/><br/> 사랑이 아닌지라, 만 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내년부로 끝맺어질 홍콩의 그 때를 기억하는지, 더는 묻지 못하게 될 날도 머지 않았겠지. 그저 한가지 확실한 건, 이 수줍고 과묵한 남자에의 애정에 불이 붙어버렸다는 것이다. 스크린 안팎, 배우 양조위와 인간 양조위 모두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러니 애수와 찬탄을 담아 오래도록 말해주기를. 아, 양조위, 그야말로 진짜배기였지.<br/><br/> p.387 다큐멘터리가 보여준 '인간 양조위'는 '배우 양조위'와 다르지 않다. 이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포착한 이가 왕가위 감독이다. 말하려다 멈추고, 다가가려다 돌아서며, 사랑한다 외치는 대신 끝내 침묵하는 영화 속 양조위는 실제 그의 내면을 스크린에 투영한 결과다. <br/><br/>  p.398 〈동사서독〉에서 일거리를 찾아 매일 자신을 찾아 오는 맹무살수를 두고, 사막의 인력사무소장 구양봉이 했던 흥미로운 묘사가 떠오른다. "한물간 검객이지만 생활은 규칙적이다. 술 한 잔에 밥 두 그릇. 해질녘에 떠난다." 그처럼 맹무살수, 아니 일거리를 구하지 못했어도 성실하게 다음날을 준비하는 양조위의 규칙적인 일상과 함께라면, 홍콩영화는 결코 저물지 않을 것이다.<br/><br/><br/>*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83/66/cover150/k27213525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83664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믿음은 숫제 끝장이 났다. 완전 수동 민주주의의 시간이 다시금 도래하였느니. - [야만 시대의 귀환 -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무한 각축의 시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91174</link><pubDate>Sat, 14 Feb 2026 02: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9117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82135857&TPaperId=1709117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57/93/coveroff/k08213585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82135857&TPaperId=1709117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야만 시대의 귀환 -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무한 각축의 시작</a><br/>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2월<br/></td></tr></table><br/>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노래를 부르며 하나가 되는 지구촌, 자유와 진보의 상징인 '서방'과 단연 빛나는 선봉인 미국의 시대는 저물었다. 나날이 쇠락하고 있다. 실각하는 권력과 그 추종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 누가 이 권좌를 훔쳐갔지? 누가 감히 앞지르려 하지?<br/><br/> 그러나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을 때야말로 이렇게 물을 때다. 누가 그 종말을 앞당기고 있는가? 적들에 의해, 그들을 물리치고 '정상'을 회복하기 위해, 야만으로부터 문명을 지켜내기 위해. 혹은, 야만이야말로 우리의 본성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으므로. 전세계적으로 목도되는 상식의 붕괴, 폭력과 적대의 일상화.<br/><br/> p.5 자본 축적 과정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는 전 지구적 축적 과정을 총체적으로 조절하고, 가장 뛰어난 생산력과 기술력, 생산 능력 등을 가지고, 세계 금융 시장을 주도하고 세계 시장에서의 '규칙'을 정하면서 동시에 그 담론들을 세계인들의 상식으로 만들 수 있는 국가야말로 '패권 국가'입니다.<br/><br/> p.6 역사적으로 최초의 패권 국가는 17세기의 네덜란드였으며, 그 뒤를 이은 것은 바로 영국, 즉 19세기의 대영제국이었습니다. 1945년 이후에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바로 지금 쇠락해가고 있는 패권 국가 미국입니다.<br/><br/><br/> 전세계가 휘말린 전쟁, '서구 문명'의 발전과 대안 모색의 끊임없는 시도로 쌓아올려진 인간성이라는 허위가 그저 허구였음을, 지성과 문명의 대실패적 현장을 뼈저리게 까발려버린 전쟁 이후, 우리는 얄팍한 평화를 너무도 깊이, 절실하게 믿어버렸는지 모른다. 마치 이것이 정상이었다는 듯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끔찍한 과거의 지평선 너머로 안녕히, 영원히.<br/><br/> 그런데, 정말 이 야만으로의 회귀는 전례 없는 파멸의 서막일까? 아니면 신-미국이라는 새로운 과두체제의 창발일까? 설사 누군가의 경악어린 외침이 울려퍼진대도 꿈쩍이나 할까싶다. 이 파시스트들! 이만큼 무력한 외침이 없다. 저자는 말한다. 미국 주도의 서방 일극 체제가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특별하고 또 이례적인 순간이었다고.<br/><br/> p.164 파시즘이란 자본주의 국가의 원점, 일종의 출발점입니다.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국가는 위기 타개책으로 종종 각종 형태의 파시즘을 선택합니다. (...) 한데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공격적 정책의 남발은, 비록 파시스트적 색채는 분명해도 아마도 히틀러 시대 독일과 같은 '질서 정연한 나라'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못 할 것입니다. 트럼프의 파시스트적 정책들이 궁극적으로 정책 난맥을 가중해 오히려 역으로 미국의 위기를 더 악화시키며 그 패권을 무너뜨릴 가능성도 큽니다.<br/><br/> p.210 민주-공화 양당 사이에 대립의 강도나 진행 방식 등에 대해 차이가 있으나 중국을 전략적인 경쟁자로 보는 데 미국의 주류 정계에서는 거의 이견이 없습니다. (...) 단, 미국의 패권 쇠락이 심화되고 트럼프의 콘크리트 지지층의 요구가 극단적인 만큼, 기존 정책들도 눈에 띄게 극단화됩니다.<br/><br/><br/> 미국의 중국 혐오와 '구역'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 태도를 남한 정치권이 어떻게 흡수하고 답습하고 있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한반도 요참 사태를 전후해 남한 정치사회의 주된 기조는 미국을 우방이자 우상으로 섬기는 태도였다. 기십년 사이에 급부상한 일부 집단의 미국에 대한 태도는 우방을 넘어 우국충정에 가까울 지경이기까지 하니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br/><br/> 신패권질서의 주도국 지위를 꿰차려는 미국과 그 하위-우방들의 시도는 과연 '질서'의 공고함, 절대적 격차를 공고히 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을까?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좌파 운동 진영에서 미제 세력에의 대항 논리는 과연 얼마나 발전했는가? 과거의 영광이라는 허상에 매달려 현재를 등한시하고 있는 '그들'에 방심까지나 할 여유가 있는가?<br/><br/> p.154 이런 극우적 쇼 정치로는 이미 쇠락해 가고 있는 초강대국이 다시 위대하게 될 리가 없습니다. 단, 이런 쇼의 일환으로 한국까지 한미 동맹이라는 틀에 갇혀 한국 경제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대중국 탈동조화 등의 정책 강압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그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트럼프주의 시대 미국에 대응할 수 있는 주체적인 외교 전략은 정말 중요합니다.<br/><br/> p.325 문제는, 이런 접근 방법이 여러 제국들이 미 제국이 쇠락하는 틈을 타서 서로 경쟁하고 주변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현 상황의 특색, 즉 제국 간의 모순들의 심화와 경쟁의 첨예화, 미국 이외 제국들의 상대적 영향력 강화 등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 여러 제국들의 대내외 정책과 이데올로기, 야망, 이해관계의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파악이야말로 진보적인 대응을 마련할 수 있는 첫 단계입니다.<br/><br/><br/> 혁신이든 실리든, 그 명목이 무엇이든 간에 현 세계가 문턱에 선 '야만 시대'는 그저 오랜 역사의 반복일지 모른다. 저자의 말처럼 이 패악 또한 반복이라면 그를 가능케 한 시민사회의 책임 또한 부정할 수 없을 테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하는 성원 모두의 숙명적 책임이라 할 수도 있겠다.<br/><br/> 유난히 길었던 지난 겨울, 민주주의는 완전히 수동이라는 말이 우스개처럼 돌았다. 끊임없이 신경써야 겨우 굴러간다고. 폭력만이 유일한 진리가 되려는 세계에서 그 말을 새삼스레 되새기는 것도 우연은 아닐 테다. 민주주의의 '민'으로 묻는다. 좋든 싫든 요동치는 세계에 놓인 지금, 무엇이 이 연쇄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의 것이 되기 위한 나와 당신의 책무란.<br/><br/> p.323 민주주의가 국가 정체성의 핵심인 구미권에서, 신분 하락과 상대적 빈곤화에 분노한 대중은 주류 정치에 대한 신뢰를 접고 트럼프와 같은 극우들에게 권력을 내주었고, 그 순간 민주주의도 무너졌습니다. (...) 구미권의 전반적 쇠락을 초래한 신자유주의는, 구미권의 최고 장점인 민주주의도 형해화시키고 말았습니다.<br/><br/> p.350 복지 국가도 그렇지만, 민주화는 일종의 조건부 사회계약입니다. 민의 자발적인 동원 능력과 투쟁 능력이 유지되는 이상 엘리트들은 싫든 좋든 민의 정치 참여를 보장합니다. 폭동이나 혁명을 통한 민의 표현보다 투표를 통한 민의 표현이 '통치성' 차원에서 훨씬 낫기 때문이죠. 한데 민의 동원 능력과 투쟁 능력이 떨어지는 그 순간, 민주주의라는 사회계약은 자동 해약됩니다.<br/><br/><br/>*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57/93/cover150/k08213585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579319</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