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뫕님의 서재 (뫕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Mon, 21 Sep 2026 04:10:48 +0900</lastBuildDate><image><title>뫕</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뫕</description></image><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우리, 이 유일한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함께가 아니라면 모두가 죽는다. - [닭뼈와 플라스틱 - 범람의 시대에 사라지지 않는 것]</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506320</link><pubDate>Thu, 10 Sep 2026 00: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50632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62130743&TPaperId=1750632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39/52/coveroff/k56213074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62130743&TPaperId=1750632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닭뼈와 플라스틱 - 범람의 시대에 사라지지 않는 것</a><br/>남종영 지음 / 북트리거 / 2026년 08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북트리거<br/><br/> 심심찮게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번쯤은 우스개 반, 자포자기 반으로 내뱉은 적도 있을 것이다. 인류 멸종이 진정한 친환경이다. 인구 과잉 시대다, 인간 개체를 줄여야 한다. 동시에 동시에 지금의 일상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해외여행, 때마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 시장에 나오기도 전에 재고로 처박혀 쓰레기장으로 직행하는 옷이며 '소품'들. 경계를 넘는 사람과 물건, '자본', 대란템, 쟁여템.<br/><br/> '기후위기' 논쟁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 되고도 남은 지금, 위기는 재앙이 되었고, 절멸로의 직통열차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도 몇 남지 않았다. 혹자는 말한다. 기술 개발을 열심히 해서 대응하면 되지 않을까? 또다른 누군가는 말한다. 우리 모두가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니 이 꼴이 났다고, 불편한 삶에 다시 적응해야 한다고.<br/><br/> p.6 우리는 '범람'과 '은폐'의 시대를 산다. 그 어느 시대보다 치킨을 많이 먹지만, 정작 살아 있는 닭은 보이지 않고, 그 역사도 기억하지 않는다. 가장 값싸게 소비되어 변덕과 싫증으로 버림받은 플라스틱은 땅에 묻히고 잘게 쪼개져 바다에 은폐된다. 지구는 닭뼈와 플라스틱이 범람하는 행성이 되었다. 인류 활동은 지구의 물리, 화학, 생물학 시스템을 교란하여, 지금 지구는 1만 1만 1,700년 전부터 지속된 지질시대 '홀로세'의 평형에서 이탈해 새로운 지질시대를 맞고 있다. 인간이 창조한 지질시대, 인류세다.<br/><br/> p.43 지구를 착취하며 이득을 취한 이들은 인류세라는 용어를 통해 과거를 지우고 기술에 기댄 '새로운 시작'을 강조하려 한다. 반면, 선진국과 거대 자본의 욕심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인류세가 이들의 과거 책임을 망각하게 하는 '탈도덕적인 효과'가 있다면서, 지배 계층에 강력하게 경고하는 개념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 "그렇다면, 이 파괴적인 시대는 정확히 언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가?"<br/><br/><br/> 고귀한 야만의 신화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의 환경파괴와 그로 인한 전지구적 붕괴는 현대인이 '자연 생태계'에서 쏙 빠져나와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라 현대의 전세계적 경제와 착취 네트워크가 인간이 감당 가능한 선을 아득히 초월해버렸다는 데에 있다. 싸고 빠르게 찍어내고 재빨리 치우고 묻어버린다. 애써 찾아낸 해결책을 외면하고 시시각각 밀려들어오는 위협을 임시방편으로 틀어막는다. 자본이 눈앞의 멸망을 막아주리라, 자본자본, 주문을 외치며.<br/><br/> 그러므로 뭘 해보기도 전에, 이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문제라고? 작금의 현실은 모두의 책임이라고? 누가 '우리'인가? 내 집 쓰레기를 돈 주고 떠맡긴 집에서 냄새가 난다고 떠맡은 쪽에도 공동책임을 요구할 것인가? 모두의 책임은 역설적으로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게 된다. 본문에서 거듭 등장하는 '인류세'에 대한 비판의 일면에는 이런 지적이 있을 것이다. 모두의 책임인 동시에 모두가 같은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br/><br/> p.61 자연만이 아니다. 에너지, 노동, 식량, 돌봄, 돈, 생명 등 일곱 가지가 '저렴해지는' 매커니즘이 자본세에 있다. (...) 플랜테이션 사업을 확장시킨 신용과 부채 매커니즘 속에서 돈도 흔해졌다. 무한히 팽창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화폐도 싸구려다. 생명도 싸구려가 됐다. (...) 무어는 저렴함이라는 무기가 플랜테이션, 나아가 자본주의가 확장하는 전략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인간과 동식물은 물론,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가능한 적은 비용으로 동원하고 있다.<br/><br/> p.218 인간의 번영은 지구의 번영에 의존한다. 행성적 경계를 침범해 지구 시스템이 망가지면, 인간은 아무리 경제가 성장해도 행복할 수 없다. 반대로 사회적 기초를 충족 못 하는 삶도 불행하긴 마찬가지다. (...) 자원을 개발하고 재화를 생산하지만, 생태적 한계는 넘지 않아야 하고,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기초를 충족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개발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br/><br/><br/> 직면해야 한다. 돌아갈 낙원은 애시당초 존재한 적 없었고 '전환점'은 지나친 지 오래라는 것을. '우리 인간'은 단 한 순간도 무구한 적 없었다는 것을. 그 앞에서 불편과 불행은 달콤한 환상처럼 달성 과제 따위가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죄를 빌고 용서만 받으면 마법처럼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별다른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유일한 세계를 죄 파먹다 이 지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총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br/><br/> 저자의 말처럼 "다섯 번째 멸종의 최대 수혜자"였던 인류는 "지금은 대멸종 사태 최대의 가해자가 되었다(133)". 유례없는 이 재앙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함께 살지 않으면 몽땅 끝장이라는 현실 앞에서 '정해진 답'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쉽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오직 그뿐이다. 창백한 푸른 점에 살아가는 찰나의 생물. 어렵고 낯설어질 수밖에. 우리가 정말 '우리'이기 위하여.<br/><br/> p.273 어떻게 하면 '인류'를 경험할 수 있을까? 사물의 의회를 통해 비인간과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될 때, '나'는 비로소 '인간이라는 종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인류로서 나는 어떻게 지구에 대해 책임지고, 기여할 것인지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인류'는 허공에 뜬 개념에서 벗어나, 비로소 발 디딘 현실의 땅 위로 착륙한다.<br/><br/> p.284 탄소 배출량 장부의 숫자를 '0'으로 맞추더라도, 누군가의 희생을 쥐어짜는 삶이 계속된다면, 그곳은 우리가 원하는 미래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단순한 탄소의 균형을 넘어, 이 행성에 동승한 가난한 사람들과 뭇 생명들과 맺는 '관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39/52/cover150/k56213074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395200</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네가 나를 괴물이라 불렀을 때, 나는 너에게 *** **** **이 되었다 - [셸리 숍앤센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77655</link><pubDate>Fri, 28 Aug 2026 19: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7765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0846&TPaperId=1747765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56/77/coveroff/k71213084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0846&TPaperId=1747765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셸리 숍앤센터</a><br/>설재인 지음 / 나무옆의자 / 2026년 08월<br/></td></tr></table><br/>모름지기 사람이 할 말이 있거든 분명하게 하며 주장할 바가 있다면 눈치에 휘둘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것 또한 미덕이고 자질이라고 오래 주장해왔다. 정론이야 어떻든지 간에. 그런 이유로 시작부터 영 걱정스러웠다. 이 양반 작품을 한두 편 읽은 게 아닌데 과연 그간의 태도와 한계선을 뒤엎고 '바디 호러'의 본령인 피와 살점, 사방으로 흘러나오는 체액에 몰두할 수 있을지. 그렇게 탈규범과 이질성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을지.<br/><br/> 결과적으로 기대 밖이라면 밖이나 퍽 실망스럽지 않은 형태의 밖이다. 그래. 버릴 수 없다면 휘두르는 것도 방법이다.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다면 답이 나올 때까지 부수고 뒤엎어 끄집어내는 것 또한 방법이다. 굳이 따지자면 인간의 본질이란 바이오동력 오물통 내지는 비용 많이 드는 온열가죽주머니 정도 아닌가.<br/><br/> p.18 어차피 대중의 미감은 주입된 대로 형성된다고 염 박사는 결론 내렸다. 만약 웨일홀에 널브러진 인체 기관들로 새 종족을 만들고서는, 아주 귀엽고 고급스러운 모습이라며 오랫동안 세뇌한다면 다음 세대쯤에는 그것들이 보편적인 반려동물이 되지 않을까?<br/><br/> p.235 그건 어쩔 수 없는 사고지, 누군가의 악의가 만들어낸 일이 아니니까. 허튼 짓, 모난 짓, 튀는 짓만 안 하면 편하게 평생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대중은 그렇게 무엇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중인지 모르는 채로 편히 희희낙락했다.<br/><br/><br/> 권력은, 거칠게 말해, 규정하는 힘이다. 내가 누구인지, 상대가 무엇일지를 규정하는 힘이다. 말을 정하는 힘이다. 옳고 그름의 선이 본래부터 그어져있지 않으니, 선을 긋고 지우는 것 또한 권력을 쥔 자의 권한이자 생리이다. '그'의 언어로 '나'를 변호하는 데에는 불가항의 한계가 있다. 착한 노예는 인간이 아니다. 주는 밥을 신나게 처먹은 가축의 끝은 도살이다.<br/><br/> 누군가를 정말이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무치다 못해 죽기를 마다하지 않을 만큼 간절하게 매달리도록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비교다. 나와 같은, 나보다 더한 이가 차고 넘치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언제든 밀려날 수 있다는 것을 코앞에서 나자빠지는 '동류'들로 증명해주는 것. 결코 나의 의지에 달려있지 않은 동시에 모든 것이 노력에 달렸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br/><br/> p.10 센터의 프랑들은 세 평짜리 방에 두셋씩 살았다. 각각의 방은 흙바닥과 철창으로만 되어 있었고, 그래서 옆이나 저 너머의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다 볼 수 있었다. 봉사자가 자신의 방을 지나쳐 다른 프랑의 방으로 향할 때마다 프랑들은 눈을 있는 힘껏 크게 뜨고 두 손을 턱 밑에 댄 채 눈을 깜빡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br/><br/> p.162 "존재는 취급에서 나와. 우리가 취급받는 대로 우리는 존재해. 너도 나도 다 쓰고 태워버릴 것으로 취급받지. 그러니까… 우린 마치 플라스틱 같은 거야. 쓸 땐 신나게 사용해놓고 나중에는 악한 것이라며 손가락질하겠지."<br/><br/><br/> 작중 풍경이 꼭 그렇다. 이 얼마나 여상하고 평화로운지. 흉한 것은 처박아 치우고 사랑스러운 순간만 냅다 쭉 빨아먹고 버리면 그만이니. 없는 것들이야 없는 대로 살면 그만이다. 못 산다고요? 그건 어쩔 수 없지. 실로 인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생겨먹었다. 이 세계는. 오래 전부터, 느리게 반복되며.<br/><br/>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작가는 '있는 힘껏 크게 뜬 눈과 턱 밑에 괸 손'으로 호소하는 대신 묻는다. 아랫도리며 배때지 싹 까놓고 보면 대체 무엇이 인간이냐고. 그는 아름다운, 오래된 순리를 박살낼 작정이다. 독자를 향해 선전포고한다. 끝장나게 으깨 부수고 아주 곤죽을 만들어서라도 과연 어디가 얼마나 다르게 생겨먹었을지, 지금부터 똑똑히 보여주겠다고. "머리가 왕왕 울리고 밑이 쑤시는(298)" 감각을 뇌리 깊숙이 때려박을 참이라고.<br/><br/> p.133 "네가 이 나라를 구할 수 있어. 세상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어.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을 솎아내기만 해도 충분해. 혹시 인간을 공경한다는 죄책감이 든다면 마음을 편히 먹으렴. 그 사람들은 짐승만도 못하니까, 괜찮아."<br/><br/> p.276 그래, 뭐, 아무래도 좋았다. 이왕 받은 거 실컷 써주리라 다짐했다. 이게 정의라고 애써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것은 생존이었다. 약자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br/><br/><br/> 세상이 망한다고 울부짖는 자는 그 세상에서 안주하는 자 뿐이다. 얻어맞는 자는 안다. 나를 짓밟는 저것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 또한 나, 무수한 '나'들이라는 사실을. 큰 불은 불씨를 삼킨다. 화근이 세상을 불살라버리는 꼴을 보여주겠다. 읽는 이가 불길의 어느 편에 서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당신 말은 누구의 혀인가? 누가, 무엇이 '나'이겠는가?<br/><br/> 마지막에 도달한 독자는 분명 살자고, 살아야겠다고 외치는 이들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더럽혀진 얼굴로 시원하게 웃어버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불안하고 불온한 존재의 등을 있는 힘껏 밀어주고 싶어질 것이다. 물론 어디서 어떻게인지가 문제겠지만… <br/><br/> p.164 "씨발, 밑이 뜨겁다고! 좋다고! 살자고!" 노엘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어쩜 이렇게 똑같은 기분을 느끼는 걸까, 그게 우습고 신기해서였다. 비가 아무리 내려도 당겨진 불을 끌 수는 없을 듯했다.<br/><br/> p. 273 프랑이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인간들이 제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가련한 생명들이 어떻게 하면 탄생의 굴레를 벗고 자유로이 생존할 수 있는가? 서로를 구원하는 것이 방법이었다.<br/><br/><br/>*서평도서제공: 나무옆의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56/77/cover150/k71213084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567770</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노래하니, 들으소서. 한 남자의 이야기를. - [오뒷세이아 - 영원한 고전, 철저한 고증,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amp;lt;오디세이&amp;gt;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66146</link><pubDate>Sat, 22 Aug 2026 23: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6614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462&TPaperId=1746614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40/12/coveroff/893247646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476462&TPaperId=1746614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오뒷세이아 - 영원한 고전, 철저한 고증,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lt;오디세이&gt;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a><br/>호메로스 지음, 김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08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을유문화사<br/><br/> 최근의 영화화로 흥행작의 원작! 이라는 황당무계한 타이틀까지 달게 된 이 불멸의 고전을 보라.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떠도는 자들의 슬픔을 노래하게 한, 전율과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여전히 무엇이 남는지 묻고 또 묻게 한 바로 그 작품을, 감춰진 이름, 오래 고통받았으나 끝내 지워질 수 없었던 이름들을, 『오뒷세이아』를.<br/><br/> 『오뒷세이아』의 내용은 오랜 세월 변주되며 잘 알려져왔고, 수많은 영웅들과 괴물에 대해서도, 온갖 비유와 상징, 현실과 신화를 넘나드는 요소들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는, 나 같은 독자가 분명 수두룩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를테면 같은 표현이 어떻게 이 괴물과 저 용사에 같고 또 다르게 붙어지는가?<br/><br/> p.356  제10권 이렇게 말하자, 부서져 내렸소, 그들의 소중한 심장이, 떠올랐던 것이오, 라이스트뤼곤인 안티파테스가 한 짓이, 심장이 큰 퀴클롭스가 남자를 먹어 치우던 폭력이, 그들은 쟁쟁하게 울었소,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러나 어떤 일도 일어나진 않았소, 눈물 흘린다고.<br/><br/> p.357  제10권 밖으로 튀어나온 건 심장이 큰 에우뤼로코스의 제비였소. 걸어서 갔소, 그와 함께 스물 두 명의 동료가 울면서, 뒤에서 애곡하는 우리를 두고 그들은 떠났소. 발견했소, 골짜기에 깎아 다듬은 바윗돌로 지어진 키르케의 집을, 사방이 잘 보이는 곳에서.<br/><br/><br/> 뿐만 아니라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사람 간의, 혹은 신과 인간 사이의 의례에 초점을 맞춰 읽는다면 줄거리나 개별 신격을 중심으로 읽을 때와 어떻게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물을 만하다. 『일리아스』에서 보복과 전투, 장례, 감사제가 반복해 나타난다면 『오뒷세이아』의 경우에는 환대와 이방인-손님, 물리적/개념적 가정 구성의 안팎 그리고 속죄의식과 보속에 대해 반복해서, 점진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br/><br/> 그렇다면 죄의 형태나 속죄의례, 그에 필요한 고난과 해결에 대해서도? 설령 그 죄에 어떠한 의도나 자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부정' 의 '옮겨붙음'이 조선, 중국의 중앙집권형 군주제 국가에서의 연좌죄 개념의 그것과는 퍽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신'과 그의, 저주나 벌에 대한 인식, 속죄-정화를 위한 과업과 절차 등에서 나타나는 인물 간의 해원이나. 세계관을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br/><br/> p.195 제4권 '너에겐 아직 운명이 아니네, 사랑하는 이들을 보는 것도 잘 지은 집과 그대의 조국 땅에 이르는 것도, 아이귑토스의, 곧 제우스로부터 떨어지는 그 강의 물로 다시 가서 신성한 헤카톰베를 바치기 전에는, 불사의 신들에게, 넓은 하늘을 차지하는 그분들께. 바로 그때 그 신들께서 허락하실 거네, 네가 갈망하는 여정을.'<br/><br/> p.349 제10권 나는 말했소, 심란한 심부로. '나를 해쳤소, 못된 동료들이, 그들에 더해 지독한 잠까지. 고쳐 주시오, 친구들, 그대들에겐 능력이 있잖소.' 이렇게 말했고, 부드러운 말로 호소하면서. 그들은 조용해졌소. 아버지는 이야기로 응답했소. '꺼지시요, 섬에서 빨리, 산 자들 가운데 가장 치욕스럽소! 내겐 법도가 아니오, 돌봐주는 것도, 보내 주는 것도 복된 신들에게 미움받은 그런 남자를 말이오. 꺼지시오, 불사신들에게 미움받았기에 이리로 온 것이니.'<br/><br/><br/> 유비에 관해서도 눈여겨 볼 만한 장면들이 많다. 구혼자들의 만행과 귀환한 오뒷세우스의 보복에서 반복되는 제물-포식과, 부자간의 해후에서 반전된 형태로 제시되어 그 비극성을 더하는 새끼 잃은 맹금의 비유라든지. 직접적으로 제시된 이미지 뿐만 아니라 이런 건 어떨까. 페넬로페와의 해후에서 보여지는 나무를 통째로 쓴 침대가 오뒷세우스의 귀환 가능성을 암시 혹은 담보하고 있었다든지.<br/><br/> 같은 수사를 사회적 신분이 다른 이들에게 부여하는 장면들 또한 재미를 더하는 요소 중 하나다. 돼지치기, 장군, 왕비 모두에게 고귀함과 탁월함이 있다. 그들 자신의 성품이 그러하다면. 고난을 이겨내 끝내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면 더더욱!<br/><br/> p.539 제16권 텔레마코스는 부둥켜안았다, 훌륭한 아버지를, 애탄했다, 눈물을 쏟으며. 그 둘 양쪽 모두에게 애곡의 욕망이 솟아 올랐다. 울었다, 쟁쟁하게, 맹금류들보다도 더 요란스럽게, 수염수리나 갈고리발톱의 독수리들보다도, 그놈들 새끼들을 사냥꾼들이 날지도 못하는데 잡아갔을 때보다도. 그렇게 그들은 눈썹 아래로 연민스러운 눈물을 떨구었다.<br/><br/> p.705 제22권  발견했다, 곧이어 오뒷세우스를 죽임당한 시체들 사이에서 피와 선혈로 얼룩진 그를, 마치 사자와 같았으니, 그놈은 들판에 있던 소를 잡아먹은 뒤 떠나가는데, 보라, 그놈의 가슴과 양쪽의 볼때기가 온통 피범벅이었으니, 무서웠다, 얼굴을 쳐다만 봐도. 그렇게 오뒷세우스는 얼룩졌다. 두 발과 위쪽 두 손이.<br/><br/><br/> 『오뒷세이아』는 수천년의 세월과 동서고금을 넘어 마음 깊은 부분을 건드리는 불멸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동시에, 여전히 수많은 질문과 새로움이 솟아나는 샘이기도 하다. 명쾌한 정답과 딱 떨어지는 해결책을 주지 않음에도 수많은 이들이 전율하고, 마음에 새기며 지도로 삼아온 이유는, 어쩌면, 그 이야기의 본질이 인간사, 인생의 기저에도 닿아있기 때문일지 모른다.<br/><br/> 오늘의 독자, 내일의 관객, 또다른 언젠가의 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언제, 어디의 누구든 또다시 낯선 닮음을 보게 되리라 믿는다. 그 길에서 분노하고, 두려워하며, 전율하고, 슬퍼하며,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형상을, 만물에 깃든 신의 그림자를 읽어낼 것이다. 인간이, 여전히, 인간인 한...<br/><br/> p.212 제4권 "자고 있니, 페넬로페, 소중한 심장으로 애통해하면서? 맘 편히 살아가는 신들은너를 그냥 놔두진 않을 거야, 울게도 괴로워하게도, 아직 귀향할 수 있으니까 네 아이는, 신들에게 무슨 죄를 짓지는 않았으니까."<br/><br/> p.569 제17권 그놈을 전엔 젊은 남자들이 데리고 나가 야생 염소와 사슴과 토끼를 쫓게 하곤 했었는데, 주인이 떠나고 없는 그때 버려지다시피 누워 있었다, 똥 더미 속에, (…) 거기에 개가 누워 있었다, 아르고스가 진드기 투성이로. 바로 그때, 그놈이 보았다, 가까이에 있는 오뒷세우스를, 꼬리를 흔들었고, 양쪽 귀를 아래로 내렸지만, 더 가까이 더 이상 그때 주인에게로 다가갈 수는 없었다.<br/><br/>#오뒷세이아 #을유문화사 #을유문화사_서평단]]></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40/12/cover150/893247646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401298</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보라, 두렵고 매혹적인 그것을. 눈동자 속에, 마주치는 시선에. - [괴물의 탄생 - 우리가 찍은 낙인의 역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66129</link><pubDate>Sat, 22 Aug 2026 23: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6612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5073&TPaperId=1746612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24/68/coveroff/893232507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5073&TPaperId=1746612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괴물의 탄생 - 우리가 찍은 낙인의 역사</a><br/>수레카 데이비스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26년 08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현암사 <br/><br/> **괴물, 그들은 왜 두렵고도 매혹적인가. 다르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차이라는 강을, 건널 수 없는 그 강을 사이에 두고 '우리'와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절대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의 다름, 그들의 야만성과 생명력은 언제나 강력하고 신비로우며 '근원적 동물성'으로 간주되기에 인간 아닌 인간들, 괴물들은 그렇게나 아름답고 두렵다.**<br/><br/> **괴물은 침범하는 자다. 규범을 넘어 일탈하고 흘러나가는 존재다. 그들에게는 전염성이 있어 생각만으로도, 존재만으로도 오염의 가능성이 된다. 그들은 고유한 동시에 가변적이어서 위협적이다. '괴물성'은 '우리'의 '복잡하고 질서 잡힌' 아름다움과는 달라 단순한 동시에 무질서므로 정의되고, 표적지어질 수 있다.**<br/><br/> p.11 괴물 만들기는 가치를 판단하는 행위이자 위력적인 매도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공동체는 추상적인 두려움과 관념에 물리적 형태를 부여하고 잠재적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집단과 개인을 규정하며, 그들을 정상적인 육체나 믿음이나 행위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로 취급한다. 사회가 사람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방식의 핵심에는 '표준'과 '괴물'에 대한 가정이 깔려 있다.<br/><br/> p.102 민족과 이민족을 구분하려면, 그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중간자'를 불러내 벽 속에 가두어야 한다. 경계를 흐리는 존재인 괴물을 무력화해야 한다. 공동체는 특정 개인들을 괴물로 규정함으로써 주변부로 몰아내고 어느 정도까지는 지워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가 아무리 그들을 과소평가하거나 문제 삼아도 이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여러 혈통을 이어받고 서로 다른 기대 사이에 끼인 채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br/><br/><br/> **괴물성의 존재는 '우리'에게서 영구히 몰아내져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는 동시에 언제나 종식 불가능한 위험이다. 교활하고 치밀한 동시에 순진하고 야생적이다. 괴물은 자연-성이다. 괴물은 자연의 섭리와 질서를 위배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 규칙과 체계의 일부가 되어 언제고 제거, 아니, '삭제' 가능한 존재이다. 그래야만 한다.**<br/><br/> **저자가 제시하는 사료들에서 볼 수 있듯, 권력과 체제를 흔드는 존재로서의 괴물은 '우리'라는 '참된-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달라 절대로 '우리'의 일부로 편입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언제나 괴물-됨의 위협을 안고 있는 존재다. 체제에 충실하지 않거나 규범에서 벗어나는 존재는 언제든 인간 '이외'로 미끄러질 수 있고, 그곳에서 돌아오는 일은 '본래적으로' 인간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br/><br/> p.87 '인종'이든 '민족'이든 둘 다 개인과 공동체가 만들어내는 개념이다. 몸, 행동, 혈통, 시민권에 관한 생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선택된 역사인 것이다. (…) 자기네와 '다른' 집단 사이의 경계에 걸터앉은 개인을 불법적이거나 별스러운 존재로 식별하고 낙인찍어야 비로소 별개의 종족이나 인종 같은 것이 성립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이런 개인들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 경계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임이 드러날 것이다.<br/><br/> p.227 개인이나 집단을 어느 한 범주에 들어맞지 않는 골칫거리로 낙인찍는 사람들은 (...) 인간의 범주가 유연하다는 사실을, 인간의 몸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쉽게 변한다는 사실을,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단순한 경계가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어쩌면 미래의 어느 시점, 또 다른 삶, 평행 우주에서는 자신들 역시 골칫거리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외면하고 있다.<br/><br/><br/> **공고하고 엄밀한, 확신과 질서의 세계에서 괴물은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질서를 지탱하는 힘이자 질서의 존재 그 자체이기도 하다. 대조적으로, '변신'에 덜 적대적이고 존재의 경계는 더 모호한 사회에서는 퍽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 필사적으로 진보해온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에 역행하는 국제적 흐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법과 학문의 언어를 탐욕스레 두른, 괴물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을.**<br/><br/> **이 책이 괴물의 역사가 아니라 괴물의 탄생, 괴물 만들기의 역사인 이유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괴물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괴물을 만들어내고, 규정지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괴물들'에 경의를 보낸다. 범람하고, 더럽히며, 파괴하고 매혹할 우리, 절대 우리일 수 없는 근원적 다름들에게. 또한, 무엇보다도 '무엇'인 이들에게, 비인간으로 밀려나는 세상에서 손을 잡고 함께 '무엇'이 되는 이들에게.**<br/><br/> p.146 당신은 누구에게 공감하는가? 얼마나 깊이 공감하는가? 공감은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지, 따라서 가장 인간다운 사람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지도, 즉 사적인 지형도와 같다. 갈등 없이 서로에게 공감하는 다문화적인 정치체, 범주의 자유로운 혼합과 초월을 찬미하는 정치체를 만들 수 있을까?<br/><br/> p.351 우리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곳'에도 희망을 걸 수 있다. (...) 우리가 아는 유일한 세계, 달아나거나 버리기보다는 지키기 위해 노력할 가치가 있는 우리의 터전이다. 괴물은 서로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문이다. 괴물은 곧 우리 자신이다. 자, 이제 우리가 할 일을 시작하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40024/68/cover150/893232507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246807</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나-쓰기-긋기-그리기-직조하기-창조하기-고백하기-풀어-내-놓기 - [자화상]</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49138</link><pubDate>Thu, 13 Aug 2026 20: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4913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130626&TPaperId=1744913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78/64/coveroff/k022130626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130626&TPaperId=1744913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자화상</a><br/>에두아르 르베 지음, 정영문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08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은행나무<br/>#은행잎4기 #은행잎서재 #에두아르르베 #자화상<br/><br/><br/> 자서전이 아닌 자화상인 이유를 알겠다. 극도로 촘촘하게 쌓아올리는, 덧대고 선을 긋고 겹치고 덮어씌우는, 집요하고 치밀한, 어느 순간 탁 풀리는 공백이 정교한 형상으로 나타났다 사라져버린다. 몇 문장을 따라해보다 포기했다.<br/><br/> 샅샅이 훑어내는 추격? 아니, 묘사, 그래, 묘사. 그것에 기묘한 쾌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낀다. 선 하나, 점 하나, 장면 하나가 모여 쉴새없는 반추와 회상을 소묘한다. 영사기 도는 소리가 착착착, 들려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br/><br/> p.8 내 삶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다.<br/><br/> p.94 나는 가끔 특별한 이유 없이 전화번호부를 뒤적인다. 나는 영화를 볼 의도 없이 지면에 실린 영화 시놉시스를 읽는다. 나는 편성표를 읽지 않고, 채널을 돌려 무작위로 TV를 본다.<br/><br/><br/> 읽는 내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렇게까지 오래, 적어도 이 생각을 완전히 회상불가능한 정도로 잊기 전에 누구도 내게 말해줄 수 없게 될 과거의 일화를 말하고 싶었다.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을 꺼내보이고 싶었다.<br/><br/> 자랑스러운 일화에 온갖 장식을 덕지덕지 붙여 번쩍 들어올리고 싶었다. 언젠가 베푼 보잘것없는 친절을 죽기 직전까지 떠벌리고 싶었다. 보물처럼 모아둔 칭찬을 싹싹 닦아 늘어놓고 싶었다.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br/><br/> p.7 10대 때, 나는 《인생 사용법》이 사는 법을, 《자살 사용법》이 죽는 법을 가르쳐줄 거라고 생각했다.<br/><br/> p.50 소름이 돋을 때면 수 세대 전 내가 짐승이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나는 시력을 잃지 않을 것이고, 청력을 잃지 않을 것이며, 팬티에 오줌을 싸지 않을 것이고, 내가 누군지 잊지 않을 것이며, 그 전에 죽을 것이다.<br/><br/><br/> 다시 없을 행복한 순간을 말하며 웃고 싶었다. 돌이킬 수 없는, 아직 잃지 않은 기회에의 그리움에 엉엉 울고 싶어졌다.<br/><br/> 이 모든 것을 빼곡히 적은 노트를 탁, 소리나게 덮어버리고 서랍 가장 깊은 곳에 숨기고 싶었다. 얼마 안 가 꺼내보고 뒤져보다 언젠가 여는 방법을 잊어 골머리를 싸맬만한 방법으로. 언젠가 정말, 꼭 필요한 때에 딱 한 번만 꺼내보겠다는 마음으로.<br/><br/> p.69 나는 내 내부 장기를 전혀 본 적이 없다. 단지 거울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몸의 어떤 부분들을 보았지만, 어떤 부분들은 거울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도 결코 본 적이 없고 뭔지도 전혀 알 수 없다.<br/><br/> p.143 내가 언제 죽든 열다섯 살은 내 인생의 중간이다. 나는 삶 후의 삶은 있지만 죽음 후의 죽음은 없다고 믿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지 묻지 않는다. 내가 거짓 없이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번뿐이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이미 지나갔을 수도 있다.<br/><br/><br/> 한 사람의 생을 덧그리고 덧덧칠하고 덧덧덧그으면, 그 끝은 무엇이 될까. 쉴새없이 생동하는 동시에 모든 순간을 한데 모은 기묘한 상이 되리라는 생각을 한다. 생의 종장을 끌어다 꽝, 찍어버린 이가 집요하고 난잡하게, 파괴적이고 사랑스럽게 그러모은 삶을 보며.<br/><br/> 예감한다. 언젠가 삶에서 나를, 나에게서 세계를 소거하려는 결단 앞에서 이 책을 반드시 떠올리고야 말리라는.<br/><br/> p.142 내가 나눈 가장 아름다운 대화는 청소년기에 친구의 집에서 나눈 것이었다. 우리는 친구 어머니의 술을 무작위로 섞어 만든 칵테일을 마시며 말라르메가 자주 드나들었다는 그 큰 집의 거실에서 해가 뜰 때까지 얘기하곤 했는데, 밤새 나는 사랑과 정치와 신과 죽음에 관한 담론을 풀어냈고, 때로는 바닥을 굴러다니며 생각해낸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중 단 한마디도 철회하고 싶지 않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78/64/cover150/k022130626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786493</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듣기, 지극한 사랑과 환대의 마음에 대하여. - [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37934</link><pubDate>Fri, 07 Aug 2026 19:1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3793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0221&TPaperId=1743793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8/84/coveroff/k10213022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0221&TPaperId=1743793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a><br/>유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8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유지영 #심장듣기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br/><br/><br/> 오래도록 이야기해왔다. 읽는 일은 곧 듣는 일과도 같다고. 잘 읽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하고, 잘 듣기 위해서는 나의 '자리'를 내어줄 필요가 있다고. 듣기는 말하기와 말하는 사람, 이 둘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한다.<br/><br/>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아무도 없는 세계에 덜렁 놓인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고 물을 때조차 그는 듣는 사람을 전제하고 있다고. 듣기와 말하기는 이토록 서로를 필요로 한다. 혼자, 너무도 혼자인 고독, 스스로를 쪼개 바라볼 수조차 없는 외로움 속에서는 아무것도, 스스로의 존재를 전할 수조차 없다는 뜻이다.<br/><br/> p.7 내가 뭔갈 듣기로 결정했다면 그건 내가 그걸 듣고, 느끼고, 변하겠다는 뜻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된다. 우리는 결국 들은 것이 된다. 단지 내가 들은 내용뿐 아니라 듣는 태도를 통해서도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듣기는 그렇게 삶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br/><br/> p.87 "말하기는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주체적인 외향적 행위인 반면, 듣기는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내향적 응대처럼 보인다. 과연 그러한가?" 듣기는 단순히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응대가 아니다. 듣기는 오히려 적극적인 상대에서만 가능하다. 귀는 입과 달리 늘 열려 있는 기관이지만 누군가의 말을 새겨 듣는다는 건 선택적 행위이기 때문이다.<br/><br/><br/> 바꾸어 말하면, 최소한 스스로에게 타자로 인식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시작도 끝도 없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혹은 들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세계와 전능자는 듣기와 말하기 모두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 들을 수 없고, 아무도 듣지 못하니 말하기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적막한 절멸이란 말인가.<br/><br/> 여기서 물을 수 있다. 듣기에는 무엇이 요구되는가. 이는 다시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간다. 듣기 위해서는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단단히 틀어쥐고 올라앉은 나의 자리를 말하는 이에게 내어주어야 한다. 말하는 이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의 초대에 응해야 한다. 그의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br/><br/> p.48 인터뷰를 하다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감각을 만나게 된다. 내가 말하는 이의 말을 아주 정확히 듣고 있다는 느낌이다. 마지막 퍼즐 조각의 모서리가 빈 공간에 딱 들어맞은 것 같은 정확감, 내가 어찌저찌 흘러온 삶이 말하는 이의 삶과 밀착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물론 그것은 순전히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고, 말하는 이의 감정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나는' 그렇게 들었다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br/><br/> p.115 듣는 행위에는 이렇듯 비생산적인 구석이 있다. 귀를 기울여서 잘 듣는, 잘 들으려 애쓰는 일은 생산적일 수도 효율적일 수도 없다. 듣는 것만으로는 그 무엇도 생산해낼 수 없고, 자랑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듣기에 성공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형태일 것이다. 매순간 인간을 이해하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듣는 일이 한 명의 인간을 이해하는 최선의, 그리고 최소한의 행위라는 걸 인정하는 것.<br/><br/><br/> 동시에 '듣는 나'를 그 세계에서 소거하지 않아야 한다. 말하는 이를 이 장에 홀로 남겨두지 않아야만 그의 말을 허공에 던져버리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듣고 말하기란, 누군가의, 나의 말을 잘 듣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제각기 소리높여 '나'의 자리를 다투니 기다리고 바라볼 여유가 없다. 크고, 많고, 사나운 목소리에 작고, 약하고, 느린 말이 설 자리가 없다. 하물며 듣기의 자리란 얼마나 좁고, 얕고, 위태로울까.<br/><br/> 저자가 인용한 판결문을 보며 김진영의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오직 그 한 사람을 위해 힘껏 내뻗는 손이 있다면, 오직 단 한 사람이 또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홀로 남겨두지 않는 세상이, 귀 기울여 듣는 사람 하나만이라도 꼭 있으리란 믿음을 잃지 않는 세상이 그 한 사람을 그대로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br/><br/> p.105 내 안에서 이미 옳고 그름이 정리된 주제라면 어느 한쪽의 편에 서는 게 크게 주저되지 않는다. 가치중립이라는 명제 아래 어떤 목소리는 과대 대표되고 어떤 목소리는 과소 대표된다고 믿어서다. 과소 대표되는 이들의 목소리를 더 정확하게 듣기 위해 그들의 편에 선다. 어떤 목소리는 편파적일 때 더 정확하게 들린다.<br/><br/> p.116 나에게 잘 듣는 일이란 구체적으로는 그런 것이다. 쓸모를 증명할 수 없으나 그 증명할 수 없음으로 인해 무가치해지지는 않는 일. 그것은 잠시나마 '나'를 넓혀가는 일이다. 내가 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아는 일이다.<br/><br/><br/> 부디, 이 사납고 잔인한 세상에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끊이지 않기를 바란다. 듣기 위해 눈을 마주치고, 이해하기 위해 어깨를 기울이고 가슴을 맞대는 사람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연약하고 짧은 삶, 한 명이 외로운 홀로가 아닐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뿐이리라.<br/><br/> p.198 듣는 사람이 없이는 말하는 사람이 없고, 말하는 사람이 없이는 듣는 사람이 없다. 이 문장을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듣는 사람의 곁에 말하는 사람이 있고, 말하는 사 람의 곁에는 듣는 사람이 있다. 두 역할은 어느 한쪽으로 고착될 새도 없이 수시로 바뀐다.<br/><br/> p.199 앞으로도 내내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듣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이고 싶다. 설령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소망일지라도 계속 소망하고 싶다. 이렇게 겁도 없이 쓴 문장이 앞으로의 내 삶을 붙들어줄 족쇄가 되기를 바란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8/84/cover150/k10213022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388400</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비밀의 들판, 언젠가의 당신을 만나 내가 향할 그곳에서. - [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36158</link><pubDate>Thu, 06 Aug 2026 20: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3615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42130423&TPaperId=174361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52/36/coveroff/k74213042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42130423&TPaperId=1743615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a><br/>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08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br/>#비밀의들판 #마거릿주혜리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br/><br/>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자기의 역사를 찾는다는 건 대체 무엇일까. 사람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사람의 몸으로 살아간다. 자기 정의는 역설적으로 타인에게 비춰 보이는 나, 타인과의 관계 어딘가에 위치하는 나, 나를 둘러싼 관계의 이름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나를 이해한다는 것,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 그 삶의 궤적을 좇는다는 것은 그 기원과 현재를 훑고, 감각하고, 음미하는 것과도 같다.<br/><br/> 위, 아래, 좌우(?)까지 고루고루 잃어가며 살아온 결과, 가장 큰 아쉬움은 그의 삶을, 기억을, 언젠가의 시절을 말해줄 사람이 점점 줄어가다 기어코 한 명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OO은 말했다.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알더라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고. 언젠가 너의 어린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도 너뿐인 때가 올테니 지금이라도, 틈 날 때마다 자주 말해주고 싶다고.<br/><br/> p.16 나는 신문 기록, 수감 중 읽은 책 목록, 공산주의자 동지들과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직접 고안했던 암호 등 내 할아버지 이철하의 짧은 생애에 관한 사실들을 밝혀냈지만, 정작 내 존재 자체에 깊이 스며든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야기들은 내 몸을 파고 들어 와, 손녀였고 딸이었으며 마침내 어머니가 된 나라는 사람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내 몸에서 풀어내야 했다.<br/><br/> p.58 나는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 어느 도시에 살면서도 진정으로 내 집에 머무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그 이유가 할아버지의 삶이 잊히고 만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리저리 떠도는 성인기의 내 삶에서 단 하나 변함없는 것은 더 전망 있는, 더 흥미로운, 더 '나은' 어딘가로 이동하려는, 탈출하려는 충동뿐이다. 내 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 자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느낌으로만 채울 수 있었다.<br/><br/><br/> 누군가를 영영 보내고 온 날엔 으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누구가 아닌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뭘 좋아하고, 어떤 꿈을 꾸고, 어느 길을 따라 마침내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왔을까. 그 가슴에 무엇이 싹트고 시들어 묻히고야 말았나. 내도록 아쉽고 궁금했다. 서럽기도 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지키고 쌓아온 것들,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삭이고 숨겨온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br/><br/> 그렇게 그가 따돌려진, 숨이 턱에 차도록 쫓아다니게 한 세월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누가 그의 삶을 들어주었을까. 누가 그 자신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묻힌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고이 닦아 전해주었을까. 그 이야기의 이름을 안다. 상처. 상처. 상처.<br/><br/> p.123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아기 때 자신에게 결핵을 옮긴 이가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아마도 감옥에서 옮았을 것이다. (...) 아버지가 전혀 알지 못했던 부친이 남긴 유산이,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거나 적어도 주요인을 제공한 전염병이었던 것이다. 잠복기를 거친 다음 발병해 조직을 훼손하고, 결코 온전히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 병. 아비 없이 자라난 상처.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처. 내게로 대물림된 그 상처.<br/><br/> p.198 내가 묻는다. "할머니가 지내던 집 사람들은 정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아니면 중국으로 탈출한 가장 민강에 관해서 언급한 적은요?"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한다. “내 주위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강을 언급하는 것도 들은 적 없고. 나는 애초에 왜 일본인들이 한국에 있었는지 조차 몰랐어. 그 시대는 그랬지."<br/><br/><br/> 저자가 추적하는 가족들의 계보는 복원해낸 조부의 삶, 침묵 속에 전달된 조모의 삶, 소외와 포기로 점점이 이어져온 모부의 삶이라는 낱알들의 모음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삶, 자기가 살아오지 않은, 알 수 없었던 시대, 파편화된 기억으로만 존재해온 일화를 한데 모아 가족과 핏줄로 이어져는 더 큰 그림이자 새로운 시작에의 첫 획이다. 여전히 미완이며, 영영 완결될 수 없는 '것'을 위한.<br/><br/> 그리하여 종국에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가 아닌, 무엇이 남는가, 무엇이 끝내 살아남아 귓가로 입속말로 손때 묻은 흔적들로 전해지는가. 저자가 끝내 도달한 '미완'에서 진정 자기 자리를 찾은, 어쩌면 영영 그럴 수 없게 된 과거와 현재의 의의를 묻기를 바란다. 그렇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들어봐, 너의 이전을 말해줄게. 들어봐, 나는 이 몸으로 이어져 왔으니, 우리는 어느 몸에서 갈라져 어느 '곳'을 살아가는 몸인가…<br/><br/> p.380 마침내 집에 온 기분이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베이 에어리어는 아이와 함께 있는데도 여전히 거쳐 가는 곳으로 느껴지고, 한국은 좀 더 익숙하지만 그래도 외국이다. 나에게 집이란 장소가 아니다. 존재의 상태다.<br/><br/> p.387 옛날 옛적에 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전혀 편하지 않은 소녀가 있었어요. 소녀는 혼자만 다르게 생겼고, 먹는 음식도 달랐어요. 사람들은 소녀에게 묻곤 했어요. "넌 어디 출신이야?" 소녀가 "휴스턴"이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다시 물었어요. "아니, 진짜로 어디서 왔냐니까?" (…) 여성은 여전히 두 나라 어디에서도 편하지 않지만, 가족과 함께하면서 비로소 집에 온 기분을 느끼게 되었어요. 엄마와 달리 아이들은 과거를,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랄 거예요. 여성은 진심으로 바랐어요. 아이들이 그들 자신과, 어디가 되었든 자신이 살기로 선택한 곳에서 편안히 머물기를.]]></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52/36/cover150/k74213042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52366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눈을 감고, 눈을, 감고. 절망하는 피식자의 세계로. - [화 - 재앙의 책]</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22469</link><pubDate>Thu, 30 Jul 2026 22: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2246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937076&TPaperId=1742246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024/91/coveroff/k71293707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937076&TPaperId=1742246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화 - 재앙의 책</a><br/>오다 마사쿠니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3년 12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검은숲(시공사)<br/><br/> **눈을 감고 그려보라. 눈을, 감고, 그려보라. 매일이 무너지는 순간을. 다시, 눈을 감고, 그려보라. 톡,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가 코앞에 들이밀어지는 순간을. 어떤 두려움은 지극히 현실을 닮아 연신 눈을 깜빡이게 하지만, 어떤 공포는 현실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 자리를 꿰차는 꼴을 보고도 손 쓸 길이 없게 한다.**<br/><br/> **문득 들어선 길, 교교하니 다가오는 웃음 앞에 그저 아가리 앞의 짐승처럼 목을 늘어뜨릴 뿐이다. 압도적 공포, 뼈저린 무력감, 새하얗게 끓어오르는 쾌락, 전신의 감각을 터트릴듯 채워오르는 무엇이 두렵게 하는가? 이는 필연히 오래 전 잃어버린 것, 피식자의 감각을 일깨운다. 미쳐버린다. 잡아먹힌다. 집어삼켜진다. …아!**<br/><br/> p.23 〈식서〉 그렇게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세상을 빙 에워싸고 붕괴를 막고 있는 것이다. 책을 먹는 것도, 어쩌면 그러한 행위의 일환이 아닐까. 책장에서 한 권을 빼서 펼치고, 한 장을 찢어 뭉친 뒤 입에 넣는다. 그 순간에 세상의 붕괴가 시작되는 건 아닐까. 아니, 그런 표현이 과장되었다고 느낀다면, 제 일상의 붕괴라고 해도 좋다.<br/><br/> p.351 〈머리카락 재앙〉 미쳤다. 모든 것이 광기에 찬 가운데,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이성마저 갈아버리는 거대한 절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잡아먹을 거면 차라리 빨리 잡아먹어라. 울부짖다 지친 나는 그저 벌레처럼 쪼그라든 마음으로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br/><br/><br/> **화, 재, 앙. 제목의 셋은 퍽 다른 꼴이되 그 뜻에서 이어지는 바가 있다. 화는 문책이자 타박이다. 재앙에는 타오르는 불과 벌 받는 자의 형상이 있다. 화와 재앙에는 주는 이와 받는 자가 있다. 행위의 결과다. 바깥과 안, 이곳과 저곳이 있을 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화란 본질적으로 맞닥뜨리는 것이다. 도래하는 것이며, 입혀지는 것이다. 쏟아부어진다. 집어삼킨다.**<br/><br/>**이 말은 곧, 치미는 '화'와 다르게, 재앙으로서의 '화'는 외부 세계, 타자의 질서를 전제함으로서 가능한 존재라는 뜻이다. 화는 스쳐 보낼 수 없다. 화가 겨냥하는 이는 그 자신의 질서에서 재앙의 힘으로 뽑히고 질서-세계의 어딘가에 처박힐 위험에 처한다. 재앙에는 의도가, 방향이, 질서가 있다. 도취되든, 순응하든, 부지불식간에 흡수당하든. 자연현상의 부작용을 재앙이 아닌 재-해, 해를 입었다고 부르는 것과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br/><br/> p.100 〈미미모구리〉 당신은 자신이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갑갑함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모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데, 100가지, 1000가지 인생을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 적은 없습니까? 70억의 인간이 아니라, 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세상이 이렇게 눈 앞에 통째로 매달려 있는데, 감질나게 혀끝으로 핥아서 맛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부당하다고 울분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br/><br/> p.132 〈상색기〉 그런 멸망의 꿈과 '술렁거림', 이 양 바퀴가 사회에서 낙오하여 비탄의 나날을 보내는 그를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궁지로 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도망쳐야 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따라잡히기만을 기다리며 숨을 헐떡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었다.<br/><br/><br/> **일곱 이야기의 인물들은 제각기의 무력에 짓눌려있다. 권태, 부전, 흡수, 동화… 표현은 달리하나 기저에는 모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듯하다. 그들에게는 출구가 없다. 그저 저 멀리서,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이야기의 일부로 밀려오는 것을 맞이할 뿐이다. 시작부터 문을 닫아걸어 등지는 탓이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먹이란 말인가. 그런 이유로 간신히 미끄러져 나온 현실의 틈새 앞에서도 확신하지 못한다. 이 공포는 언제고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세계를,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저항할 수 없다. 매혹당한다.**<br/><br/> **긴 악몽의 끝, 어디가 끝이고 현실인지도 모르는 채 눈을 뜬 바로 여기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상의 균열로 침범하는, 권태와 초조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나른하게 되뇌어지는 순종하세요, 눈을 감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세요... 이 달콤하고 환상적인 속삭임은 과연 누구의 목소리겠느냐고. 자, 눈을 감고 그려봅시다. 좁은 길, 바로 그 문을 열고 깊이 아주 깊이 이끌리노라면…**<br/><br/> p.223 〈부드러운 곳으로 돌아가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낳아줄게. 세상이 끝나면 새로운 세상과 함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낳아줄게. 남자 같은 건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낳을 수 있으니까… (…) 남자는 이미 모든 언어를 잊고, 꾸벅꾸벅 졸면서도 쉼 없이 몸을 꿈틀거리며 부드러운 근원의 어둠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br/><br/> p.354 〈머리카락 재앙〉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뭔가 원하는 게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도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 마음이 찢겨 나갔다. 떠오른 게 맞나? 추락한 게 아니고? 모르겠다.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저 멀어져가는 의식에 몸을 내맡기고, 영혼 밑바닥으로 떨어지며 중얼거렸다. 인간이 이런 식으로 죽을 수도 있구나…<br/><br/>#화재앙의책]]></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024/91/cover150/k71293707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0249144</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존재의 집, 우리가 서로의 집이, 길이, 곳이 되기 위하여. - [낯선 집 - 재일 이주 여성의 자리를 엮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20058</link><pubDate>Wed, 29 Jul 2026 21: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2005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42130813&TPaperId=174200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34/79/coveroff/k3421308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42130813&TPaperId=1742005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낯선 집 - 재일 이주 여성의 자리를 엮다</a><br/>조경희 지음 / 사계절 / 2026년 07월<br/></td></tr></table><br/>[본 리뷰는 사계절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br/><br/> '거래되는 부동산-공간'으로서의 의미와 달리, 암묵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집'은 성취로 얻어지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의 승인과 압력으로 주어지는 것에 가깝다. 머물러도,살아가도, 존재해도 된다고,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할' 곳, 마땅히 그 소속이라 불려야 한다고 선언되는 이름. 그것이 바로 '집'일 것이다.<br/><br/> 그렇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 물어야 한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 집이란 나에게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나의 집이 되고, 무엇이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거주하기'를 가능하게 하는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나, 그들, 당신의 집은 어디인가. 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이 집은 어째서 이토록 낯설어-지는가. 어떻게 새로운 집을, 여기저기에, '열린 공간'으로 지을 수 있을 것인가.<br/><br/> p.9 〈들어가며〉 디아스포라에게 집은 종종 불안정과 갈등을 내포한 장소이며, 집 만들기는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삶의 기반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실천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집과 사회를 연결하면서 시민권과 소속의 조건을 협상하고, 공동체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친밀성과 공공성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br/><br/> p.289 〈재일여성의 교차성 실천과 반혐오의 정동〉 재일여성들은 각자의 삶의 맥락 속에서 인종주의와 가부장제가 구축한 경계권력과 비판적으로 교섭한다. 이러한 '집 만들기'는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더불어 살아갈 새로운 관계와 삶의 기반을 구축하는 과정이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신체를 구성해가는 하나의 실천이다.<br/><br/><br/> 국경도, 민족도, 통일체로서의 국가의 의미도 예전과 같지 않다. 기실 그것에 실체가 있었던 적이 없던 것은 차치하더라도 실존적 붕괴나 절멸의 위협을 경험해본 적 없는 세대들로만 구성된 '국가'가 코앞에 도래한 때다. 이런 시대에, 혈통-구성적 진정성과 순수에의 회귀를 주창하는 이들은 과연 어디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일까. 그들이 말하는 '집'은 과연 누구의 집인가. 그곳에 머무를 '자격'은 누구에게만, 어떻게 주어진다고 믿어지는가.<br/><br/>모두가 불안정하다고, 외롭고 힘들다고 한다. 모두가 증명의 압박에 시달리고, 고유한 자리에 '돌아가면' 될 일을 괜한 갈등을 초래한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 어떤 '자격'은 특정한 집단에게만, 낙인처럼 달라붙는 정체성의 '소유자'에게만 요구된다. 어떤 폭력은 누군가에게만 감수해야 할 일상으로 취급된다. 어떤 모욕은 누군가의 몸에 부여된 찬사와 단단히 얽히고 덧씌워진다.<br/><br/> p.192 〈헤이트스피치 이후 배외주의의 '정상화'〉 이들이 관리하려는 젊고 건강한 여성의 몸은 외국인이 아닌 자국민에게 한정된다. 즉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본인 인구의 증가이며, 이민이나 다문화 공존은 대안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여성의 재생산 능력이 국민 공동체의 유지와 연결되고, 외국인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외부자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이는 모성주의와 섹슈얼 내셔널리즘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br/><br/> p.284 〈재일여성의 교차성 실천과 반혐오의 정동〉 트라우마가 삶의 생명력을 잠식하는 양상은 마이너리티 여성들에게 더욱 중첩되지만, 그럴수록 경험의 고유성은 비가시화되고 외면된다. 이들은 자신의 취약성을 숨기거나 덮기 위해 더욱 강인한 신체적, 정동적 수행을 요구받는다. 앞에서 본 재일여성의 '씩씩함'에 대한 찬양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혐오발언은 사회적 관계의 기반 자체를 근본적으로 파괴한다.<br/><br/><br/>읽는 내내 맴돌았던 생각이 있다. '사회'가 소수자를 집단의 이름으로 뭉뚱그려 호명함으로써 증오의 분출구로 삼을 때, 조롱이 놀이가 되고 혐오-폭력이 어떻게든 정당화될 때, 그것은 자체만으로 사회가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보다 숙고를 요하고 비폭력적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시민 토론의 장을 '가로막는 가능성'이 되지 않는가. '그들'을 그대로 둔 채로 세상이 나아가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던가.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지 않은가.<br/><br/>저자가 재일/이주/여성이라는 세 축으로 보이는 일본과 한국 사회는 끔찍이라는 말로는 모자랄만큼 참담한 몰골로 곪아가고 있다. 지적에서 그치지 않고, 절망에 주저앉지 않고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의 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서로의 집이 되어, 각자의 이름을 삼켜버리지 않는 채로 뒤섞여 어울릴 수 있을까.<br/><br/> p.189 〈헤이트스피치 이후 배외주의의 '정상화'〉 유해한 것을 제거하려는 사고방식이 개인의 신체와 국가라는 서로 다른 영역을 관통하여 하나의 세계관을 구성한다. 신체가 외부 물질(백신)과 화학 물질(첨가물)을 거부하듯, 국가는 외부자를 공동체의 순수성을 침해하는 존재로 보고 배제한다.<br/><br/> p.227 〈동시대적 정동과 번역 불가능한 신체성〉 사카이 나오키에 따르면, 통일된 언어 사이의 변환이라는 발상은 번역의 '레짐'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며, 번역 없이는 자신의 '민족어'의 통일성을 의식할 수 없다. 즉 애초에 언어와 공동체의 동질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번역이 요청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질성 자체가 번역을 통해 구성된다는 뜻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34/79/cover150/k3421308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34796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사람을 살리는 일, 생명을 열어 다시 세우는 일. - [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11145</link><pubDate>Sat, 25 Jul 2026 16: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1114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02130502&TPaperId=174111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00/45/coveroff/k00213050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02130502&TPaperId=1741114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a><br/>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7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br/> 이과냐 문과냐, 요즘은 이런 말 안 쓴다면서요? 진짜로? 아무튼, 문이과를 묻는다면 의학은 분명히 이과, 좁은 의미로서의 과학의 영역에 속해있다. 그럼에도 의학은 과학의 한 분과 이상으로 여겨져왔다. 기존 의학사가 위업과 발견의 역사를 말함에 있어 어떤 독보적인 지위 비슷한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하기 어렵다.<br/><br/> 오래전부터 의학과 의학자, 의료 현장 관계자는 사회 필수 '자원'으로 여겨져왔다. 의학의 발전은 인류 전체의 진보와 동일시되기 마련이다. 현대에 이르러 지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의 첨단이자 일종의 증명으로까지 이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도제식 전승이라는 닫힌 관계를 넘어 탐구함에 있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의문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br/><br/> p.71 측정 도구는 늘어났지만, 그것이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객관성은 높아졌지만, 환자가 경험하는 질병의 의미는 숫자 너머에 있었다. (…) 맥박계는 박동의 리듬을 숫자로 환원하지만, 환자가 견디는 밤의 길이까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의학은 그 이후로도 이 침상 곁을 떠나지 못한 채, 숫자로 읽는 몸과 돌봄으로 이해되는 인간 사이를 오가고 있다.<br/><br/> p.244 외과의 역사는 기술의 진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환경이 어떻게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감염이 개념화되고, 통증이 통제되었을 때, 외과의 실력은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었다. 칼이 더 날카로워진 것이 아니라, 칼을 쓸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 외과는 결코 혼자 발전하지 않았다. 언제나 축적된 지식들, 그리고 조건을 만들어낸 사람들과 함께 성장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외과는 의학 가운데 가장 대담하면서도 가장 절제된 학문이 되었다.<br/><br/><br/> 머리나 머리털이나 자르기는 매한가지였던, 의술과 주술이 뒤섞여 있던 먼 옛날부터 현대의 도전들에 이르기까지, 의학의 역사는 혁명과 전환, 이념 다툼과 집념이 뒤섞인 난장이었다. 체액설부터 이종간 세포배양까지 모든 순간에 당연하게 한발씩 나아간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 역사의 성원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분투하고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 애써왔는지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다.<br/><br/>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생명은 어느날 덜렁, 등장한 신비가 아닌 복잡한 구조와 체계로 맞물린 유기체이자 가능성의 덩어리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 색색의 도판과 바짝 붙어야 겨우 알아볼 복잡한 구조의 그림들, 이어지고 전도되기를 반복하는 이름들에서 발견한 것은 대단한 지식의 자랑이 아닌 열의와 경의의 기록이었다.<br/><br/> p.67 체액설이 여전히 의학의 중심에 있던 시대에, 몸무게의 미세한 변화와 보이지 않는 증발을 논하는 그의 연구는 기이하고 실용성이 떨어지는 집착처럼 보였을 것이다. (…) 환자를 치료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 앞에서, 숫자는 아직 설득력이 부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연구는 시대를 앞서 있었다. 측정은 곧 치료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측정 없이는 이후의 의학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br/><br/> p.354 비타민은 단순히 새로운 약의 발견이 아니었다. 19세기에는 질병을 세균이나 독 같은 나쁜 것의 침입으로 이해했다면,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질병은 무언가 필요한 것이 부족할 때도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br/><br/><br/> 어쩌면 진작 이렇게 물었어야 했는지 모른다. 의학은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를 묻기에 앞서, 의학의 역사는 누구의 이름과 시선으로, 무엇에 도전하고 응전하며 이어져 왔는지 그것을 말하고, 가르쳐야 했던 게 아니냐고. 동시에, 여전히 물어져야 하듯, 의사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의학은 무엇을 위해 발전하고 존속되어야 하는지 또한.<br/><br/>사회가 갈라져 반목한 시간이 길다. 서로를 몽매한 대중과 이기적인 이익집단 따위로 묶어 이해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책의 독자일 '일반 대중'과 미래의 의학-집단이 스스로에게 물을 때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어디쯤을 써내리고 있는가, 이 길은 대체 무엇을 위함인가. 그 끝에서 여전히 서로를 사람으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br/><br/> p.280 초음파가 청진기를 완전히 밀어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쩌면 둘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며 공존하게 될 것이다. 환자 곁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는 도구, 판단과 행위가 시작되는 지점, 그 자리는 언제나 의학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기술의 발전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만드느냐, 그것이 더 본질적인 질문일지도 모른다.<br/><br/> p.432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옳다고 믿었던 것을 끝까지 밀어붙인 사람,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 한 사람,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처음으로 본 사람. (…)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현미경 앞에 앉아 있고, 누군가는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찾고 있으며, 누군가는 오랫동안 붙들어 온 질문의 답에 막 손이 닿으려 하고 있다. 의학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그 역사의 중간 어딘가일 뿐이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00/45/cover150/k00213050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004532</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알기에, 알기 때문에, 그러므로, 달려가는. - [시간의 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99321</link><pubDate>Sun, 19 Jul 2026 00: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9932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92130109&TPaperId=173993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69/32/coveroff/k09213010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92130109&TPaperId=1739932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시간의 끝</a><br/>김성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br/> 종말론이 미지의 미래가 아닌 세계, 종말이 말 그대로 살갗으로 느껴지는 세계에서 사람다울 수 있다는 것은, 정해진 파멸을 사람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과연 누가 무엇을 인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스승의 제자들은 말했다. 여시아문! 종말로 떠밀려가는 세계에서, 스승과 제자와 어중이와 떠중이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아, 아무것도!<br/><br/> 읽는 동안, 딱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내도록 반야심경 독송을 들었고, 잠시 생각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다. 새삼 우리 존재는 선형으로 지각되는 시간과 단일한 우주에 얼마나 단단히 붙들려 있는지 생각한다.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이곳과 저곳이 같은 동시에 같아질 수 없으며,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으나 이것이 저것을 불러올 것이며…<br/><br/> p.8 "수영아, 세상이 너무 이상해졌어." (...) 정보의 보도 지침에서는 엄금하는 내용이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이 끝나고 말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한다. 그 압박감 때문에 삶을 바꾸면 사교도, 무시하고 살던 대로 살아가면 보통 사람, 오직 그 차이밖에 없는지도 모른다.<br/><br/> p.94 "누가 달을 파괴했는지 형사님은 아나?"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달은 파괴되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제 맑은 날 밤하늘에, 달은 떨어뜨린 과자처럼 부스러져 떠 있다. 당장 오늘 밤에도 보일 것이다. 그런데 왜 수영은 달이 수억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온전하게 하늘에 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가? "아는 사람이 세상에 있기는 한가?"<br/><br/><br/>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이것이고 저것이며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가 무너져 질서도 혼돈도 매끄러운 수식의 일부로 자리하는 완벽한 세계, 그러므로 끝없이 균열하고 붕괴되는 세계. 그 안의 작고 작은 존재들, 이해를 얻지 못한 미물들, 시간에 휩쓸려 미래도 과거도 끄집어내지 못하는 채로 그저 휘둘리기만 하는 초라한 순간적 존재들. 그리고, 그들과 다르다 자부하는 '힘'을 지닌 자들.<br/><br/> 그 모두가 세계와 '법칙'의 한계를 가늠할 수 없고, 더불어 누구도 그 의미를 진정히 이해하지 못하므로, 무한하고 광대한 매혹은 기실 얼마나 초라하고 얼마나 허망한가. 자유의지! 인간의 본성이자 본령이라 할 그것은 진정 존재하는가? 거대한 시공의 차원 어딘가에 붙들려 주어진 배역에 충실히 놀아나고 있을 뿐이 아닌가?<br/><br/> p.134 나는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뚫고 내려갈 수도 있다. 피바다가 되겠지. 하지만 그것은 통쾌한 피바다일 것이다. 제자들을 타이를 때 스스로 한 말을 떠올린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손을 더럽힐 수 없다는 말을. (...) 하지만 제자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제물로 바쳐 제 잇속을 챙기는 데 조금의 주저도 없는 말종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그렇다면 나 하나쯤 죄를 뒤집어써도 괜찮지 않을까?<br/><br/> p.147 "시간이 두 개건 세 개건 백 개건, 태양이 지구를 돌건 지구가 태양을 돌건 둘이 엉켜서 탱고를 추건 간에, 우리는 사람이야. 거기에는 변함이 없어.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인 한 지켜야 할 게 있단 말이야." (...) "우주 그 자체를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고요.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을 어떻게 기존의 미력하고 시시한 사람하고 같다고 할 수 있어요?"<br/><br/><br/> 혹자는 이 이야기에서 시작점과 끝점을, 희미한 마디마디, 불변하는 무언가를 찾으려 눈을 질끈 감고 안간힘을 쓰겠으나, 그저, 조금 울고 싶어지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는 모두가 단단한 믿음과 매끄러운 환희 대신 설움과 공포, 절망과 혼돈 속에 주저앉기를 바란다. 아아, 초라하고도 미력하구나. 이를 악물고 일어서는구나. 끝없이 다시, 또 다시를 꿈꾸는구나. 부질없이 버둥대는구나. 달은 산산조각 나고 시간은 끝날 것이므로. 동시에, 영원히 유예될 것이므로.<br/><br/> 각자의 신을 찾아대기를, 소리 높여 부르짖기를 바란다. 꿈 속의 꿈, 영영 깨지 못한 채 중얼거리기를 바란다. 아, 드디어 끝인가봐. 와야만 할 끝. 모든 이야기가 소멸할 곳. 네가 태어나고 죽어 사라지고 세계가 부서지고 피어나는 그 곳으로 허덕이며 달려가기를. 도래할 종말을 있는 힘껏 붙든 채 길을 잃기를. 무너지는 세계에, 그렇게 홀로 남겨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몇 번이고, 언제까지나. 영원히.<br/><br/> p.166 이 길을 걷기로 했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났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많은 것을 잊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옛집으로 가고 있다. '옛집'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도 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하나니까. 그것을 아직도 머리로만 알기 때문에, 나는 여기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br/><br/> p.353 나는 시간이 끝나면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이제야 깨닫는다. 나의 시공간에서 시간은 결코 앞으로 나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멈추지도 않는다. 되돌아가고 끼어들고 겹친다. 스노글로브를 흔들 때마다 눈송이들의 궤적은 다르다. 하지만 홍콩에 눈이 내리다가 끝내 그친다는 사실은 같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69/32/cover150/k09213010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69325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우리의 사이와 차이 -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91800</link><pubDate>Tue, 14 Jul 2026 20: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918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0200&TPaperId=173918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81/77/coveroff/k10213020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0200&TPaperId=173918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a><br/>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07월<br/></td></tr></table><br/>왜 같은 가정에서 함께 살림을 꾸려나가는데, 한쪽은 매사에 안달복달하고 '관리자' 역할에 노상 진이 쭉 빠진 것처럼 느낄까? '가사'라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영역을 담당하는 사람은 왜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사는 걸까? 왜 양육자 모두가 육아에 참여한대도 한쪽이 더 큰 부담을 지는 형국이 될까. 가정경제와 가족관계의 전반적 관리를 포함하는 가사 부담의 불평등에 으레 따라 나오는 반응은 '엄마/아내가 가장 큰 결정권자'거나 '각자 잘하는 일을 한다'는 식이다.<br/><br/> 그러므로 우리 관계는 평등하고 공평하다고. 과연 그럴까? 가정 경제 규모 관리, 가족 성원의 일상 전반, 하다못해 빨래와 식사에 필요한 순서와 준비물, 가족 행사 챙기기는 누가 맡는가? '같이' 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의 '실패'는 누구의 탓으로 돌려지는가? 자녀에게, 연로한 부모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연락을 받고 누가 부양하며, 매일 입고 쓰는 물건과 각종 공과금 등은 누가 책임지는가?<br/><br/> p.8 (추천사) 이 책은 가사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을 기존의 기계적 분담 논리에서, '가사와 육아가 누구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시킨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대개 가사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이들 남성들은 가사노동을 평생 '머리에 이고' 살지는 않는다. (...) 남성들은 자신이 가사노동에 서투른 모습을 반복적으로 증명함으로써, 가사 책임을 회피한다. 그리고 여성들은 보통 자기 남편의 '무능력'을 남편의 비겁함보다는 그의 천성 탓으로 돌리곤 한다.<br/><br/> p.86 한번의 인지노동은 약간 성가신 소소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작은' 행동 혹은 찰나의 생각들이 쌓이면 그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br/><br/><br/> 왜 누구는 혼자서도 잘 살고 멀쩡히 사회생활을 하다가도 가사 문제엔 얼이 빠져서 '상세한 지시와 칭찬'을 요구하고, 누구는 장단기 계획을 도맡고도 '큰 일'엔 서투르다 여겨지는가? 왜 동등한 주체가 만나 독립된 가정을 꾸리고서도 한쪽은 퇴근 없는 직장을 오가고, 누군가는 휴식과 출근을 분리할 수 있는가? 물어야 한다. 이것은 정말 진정 그가 그 일에 적합한 성격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의도된 나태함일까? '적성에 맞는 일'의 결과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br/><br/> 설령 '잘 하는 일'을 맡아 나눈다 하더라도, 부담은 편중되어 있다. 누군가 준비부터 뒷처리에 실행을 맡고, 누군가는 결정만 내리면 된다면, 또한 그 결과의 책임이 한쪽에 편중되고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를 평등이라 할 수 없다. 수직-업무적 위계 관계가 아니고서야 더더욱. 저자가 말하는 인지노동의 단계적 분담이 진실로 '분담'이 아닌 이유다. 개인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편만 급작스레 무능력자가 될 일이 없으니.<br/><br/> p.117 커플들의 합동 결정은, 결정 단계에 이르는 데 필요한 동이한 수준의 준비 작업에 남성이 참여하지도 않고, 혹은 옳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동일한 중압감을 남성이 경험하지도 않으면서 가정생활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점수'를 따는 경우가 많았다. (…) 결정하기는 상대적으로 이득이 높은 인지노동이다. 예상하기나 지켜보기보다 눈에 잘 띄고, 많은 경우에 커플이 제한된 자원을 사용하거나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br/><br/> p.280 인지노동은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도 여성에게 크게 편중된 가사노동의 한 차원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는 우리가 통상 가사노동을 연구할 때 사용하는 시간 기반 지표로는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 이성 커플 다수에서 여성들은 더 무거운 인지적 부하를 떠안고 있었고, 그것도 상대적으로 부담은 크지만 보상은 적은 활동들에 불균형하게 집중되어 있었다.<br/><br/><br/>  다만 그것이 과연 개인만의 전략이고 의도겠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사회가 어떻게 오래된 방기를 조장하고, 어떤 면에선 누군가를 집 안으로 '묶어 치워버릴' 수밖에 없게 하는지. 어떻게 이 차별이 성격과 현실의 이름으로 '합리적 선택'으로 탈바꿈되는지. 모든 노동이 얼마나 젠더-수행에 밀착되어 있는지, '정상 사회'가 얼마나 많은 비가시노동을 전제하는지를 생각해보라.<br/><br/> 저자의 말처럼 "문화적인 힘들이 어떻게 여성을 몰아가서 가정이란 맥락에서 그러한 기술을 습득하고 활용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하는지(19)"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돌아보라, 그것은 정말 무능과 재능의 문제였는지. 가정이 관리자와 이용자로 나누어진 공간은 아니었는지. 질문에 답할 때쯤엔 이전과 같을 수 없으리라 믿는다. '같이 살아가는' 일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듯이.<br/><br/> p.282 이러한 서사가 호소력이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지나 반세기 동안의 '젠더 혁명'이 불균형적으로 행위에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복해서 여성들에게 그들 또한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해왔으면, 여기서 '무엇이든'은 주로 직업적 성취의 맥락에서 이야기되어왔다. 이는 중요한 진전인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젠더를 '한다'는 것에는 행동뿐 아니라 사고방식과 정신적 습관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br/><br/> p.293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인과 커플에게 변화의 주체로서의 힘을 되돌려주는 것과, 인지노동 문제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자기계발서에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커플을 향한 권고로 가득하다. (…) 즉, 문제의 핵심을 남성과 여성 개인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혹은 무엇을 하고 있지 않은지에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진정으로 문제적인 것은 개인들의 선택지를 제한하고 그들의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힘들을 간과하는 데 있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81/77/cover150/k1021302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817710</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요람에서 무덤까지, 기적에서 절망까지. 불안하고 불온한 속삭임이여. - [존재의 대연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86008</link><pubDate>Sat, 11 Jul 2026 16: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8600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0190&TPaperId=1738600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56/79/coveroff/k67213019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0190&TPaperId=1738600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존재의 대연쇄</a><br/>단요 지음 / 사계절 / 2026년 06월<br/></td></tr></table><br/>언젠가는 이 작가를 진심으로 우려했더랜다. 굳이 따지자면 우려 반, 경악 반, 해방감 반으로 이루어진 도합 150%쯤의 침묵이었는데, 정말이지, 솔직한 마음으로는 언제고 '모 소설가, 신흥종교 교주가 되었다고 선언해… 누리꾼들, 그럴 줄 알았다' 따위의 속보가 뜨더라도 그다지 놀랍지는 않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br/><br/> 어떤 거대한 구조, 어쩌면 세계 자체가 나의 의지나 능력과는 무관히 돌아가는 감각을 아는가? 무엇이 인간인지 물은 적이 있는가? 진종일 얼굴 흉내를 내다 돌아와 지친 몸을 누인 적이 있는가? 신의 의지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또 존재의 바닥까지 싹 뜯어 관찰하고 싶었던 적이 없는가? 당연한 '안돼'는 왜 안 되어야 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결국 포기해버린 적이 있는가?<br/><br/> p.15 〈사랑하는 신의 생일〉  이토록 복잡다단한 고통 바깥에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다. 힘든 것도 싫어하는 것도 소중한 것도 많지 않아서, 가끔은 몸이 가볍게 한 발짝 떠오른 느낌이 드는 사람. 이대로 허공을 한 계단씩 밟아나가면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깨끗이 지워질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나는 땅으로 짓눌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내 몸이 계속 하늘로 향하려는 게 문제인 사람이고, 그게 유일한 고민이다.<br/><br/> p.91 〈사랑하는 신의 생일〉 그러나 믿음은 실체가 없으므로 공허했고, 공허를 메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믿음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무한히 소급되어 불어나지만 결코 완전해지지 않는 갈망들. 가이우스는 그 공백이 기적처럼 채워지기를, 자신을 굽어살피는 신이 있기를 바랐다. 그럴 수 없다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다…<br/><br/><br/> 언젠가의 물음을 되새겨보자. "만약 네가 세상을 끝장낼 수 있으면, 그러고 싶으냐?(『피와 기름』, 래빗홀)" '평범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안정과 순응에 대한 믿음 위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물론 여기서의 '평범'이란 내 평생 쟁취하지 못한 어떤 보편성 내지는 요구되는 인간-꼴 같은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위장과 학습이라는 양대산맥 작전, 가히 용을 썼다고 해도 좋을 만큼의 버둥버둥 끝에 장렬히 실패한 그것.<br/><br/> 이제 와서는 '이레귤러' 정도로 둘러댈 수 있게 된, 언젠가는 실패, 또 언젠가는 덜-됨이었던 기억을 이 작가가 주야장천 질리지도 않고 까발려대고 있으니 수치스럽지 않을리가, 또, 정확히 같은 이유로 부적격자이자 부적응자로서의 삶을 마주하는 쾌감을 느끼지 않을리가. 다시 말해보자. 나는 반쯤 실패했다. 빛이 있으라, 하면 예, 하고 눈 뜨고 밥 먹고 살아가는 '자연스러움'을 획득하지 못하고 사방팔방 짜깁기로 흉내나 내는 선에 그쳤다는 말이다.<br/><br/> p.114 〈세상의 이름은 기린〉 그 만남의 결론이란 최선의 배려는 충분할 수 없으며 여분의 고통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라서,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것들이 어쩔 수 없이 당연해서 나는 괴로워졌다. 다행히도 그런 괴로움의 끝에는 홀가분함이 있는 것 같다. 있어야만 한다. 홀가분하지 않으면 미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가분함은 용서가 아니며 용서일 수도 없는 것이다.<br/><br/> p.172 〈빛 속에〉 노트복과 월패드의 희미한 표시등이, 창 밖으로 겹겹이 쌓인 건물의 조명들이, 거기에 웅크려 있을 누군가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은주에게로 몰려들었다. 그녀는 어떤 것도 놓치지 않도록 눈을 감았다. 밝고 환한 빛줄기가, 소름 끼치도록 선득한 빛이 묵시록의 첫 장면처럼 그녀의 안에 펼쳐졌다. 은주는 잠시 빛으로 충만했다.<br/><br/><br/> 그래서일까. 여섯 편의 이야기들에서 전작들에 비해 어떤 '인간성'에 한발짝 가까워진 면모가 언뜻 내비칠 때마다 말 못할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 이 구덩이에서 영원히 아늑하기로 했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만년고시반에서 혼자만 합격한 N수생을 보는 게 이런 느낌일까. 동시에 찬란하고 신기해 눈을 뗄 수 없었다. 낯선 빛에 오글오글 모여드는 생물들처럼. 너무 좋아 첫 수록작부터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다.<br/><br/> 이쯤해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이 작가가 불현듯 인간 너머의 차원을 깨우쳤다고 벌떡 외쳐버릴까 진심으로 우려했다. 그러면서도 많은 이들이 믿어 의심치 않듯 세계를 창조하고 법칙을 틀어쥔 신이 있다면, 그 신의 변덕과 권태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영영 이해 불가능한 전능에 순종한다는 마음이 대체 무엇일지 두려워졌고, 이내 황홀경이 이런 걸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 있다면, 말도 못하게 변덕스럽고 또 파탄난 자이기를.<br/><br/> p.147 〈어떤 구원도 충분하지 않다〉 기적은 이 시대에 너무나도 흔하고, 우리는 너무 많은 빛을 알고 있으며, 열화상 카메라조차 특별하지 않다. 따라서 어떤 구원도 충분하지 않다. 나는 그 사실에 새삼스러운 지겨움을 느꼈다.<br/><br/> p.249 〈존재의 대연쇄〉 내 문제의식은 이거였다: (…)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의 일을 인간이 전적으로 도맡는 것과 하느님께서 의도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중에서 어떤 쪽의 죄가 더 큰가? 우리의 권한은 아닐지라도 하느님 께서 의도한 바를 온전히 행하는 게 나은가, 아니면 기존의 의도를 어겨서라도 월권의 영역을 축소하는 게 나은가? 또한 적극적인 월권으로 인해 발생한 고통과 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br/><br/><br/> 오랜 시간 고민해왔다. 우리는 무엇인가. 세계는 어떻게 부스러지고 무너질 것인가. 어느 시인이 말했듯 쿵 소리가 아닌 조용한 흐느낌일 것인가, 아비규환의 적응형일 것인가, 천천히 삶기는 개구리마냥 어리둥절한 물음표와 말줄임표의 연속일 것인가. 그 세계에 아주 잠시나마 찬란한 순간이 있다면, 과연 무엇이겠는가. 이 작가 또한 여전히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br/><br/> 어떤 의미로든 답인지 아닌지 긴가민가 싶은 무언가에 슬쩍 발을 들여놓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또한. 한계 없이 확장하는 절망에서 따끔한 아픔, 처절한 고통을 본다. 존재의 감각, 최초에 한없이 가까운 증거를. 그렇게 여섯 절망 앞에 선 채 나름의 균열을 더듬는다. 뼈와 사고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람에 묻어나는 희미한 징조를 붙든다. 무지 있으라. 시원이자 종말이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모든 엇-나감이 현실에 있으라. 물음, 있으라.<br/><br/> p.73 〈사랑하는 신의 생일〉  그 아픔이란, 윤리도 원칙도 없이 의무가 되는 것. 어쩌지 못할 상황을 어떻게든 현실로 이끄는 것. 역할과 상황과 거리를 뛰어넘어 누군가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 그 누군가가 나의 삶을 뒤집어놓도록 허락하는 것. 그럼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산산이 잃어버리고 다시 만드는 것. 그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므로 철저히 저렴하고 이기적인 것. <br/><br/> p.170 〈빛 속에〉 하지만 3에서 1을 빼면 2가 되고, 거기에서 또다시 1을 빼면 남는 건 다시 1뿐이라는 사실은 너무 당연해서 되풀이하는 것부터가 낭비처럼 느껴졌다. "아니야, 그건 낭비가 아니야. 그건 해야 하는 이야기인 거야. 당연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이야기인 거야." (…) 은주는 답할 말을 끝내 찾을 수 없었고, 경욱이 계단의 어둠 속에서 흔들리다가 사라질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56/79/cover150/k67213019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656793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자 봐, 여기 대체 누가 사람인지. - [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53271</link><pubDate>Wed, 24 Jun 2026 21: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5327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9247&TPaperId=1735327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81/25/coveroff/k692139247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9247&TPaperId=1735327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a><br/>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성해나 #인비인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br/><br/> 공포, 두렵고 무서움. 기담,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기담은 무서운 이야기인가? 이상야릇한 재미와 두렵고 무서운 마음은 무엇에 기인해 합하고 갈라지는가. 수많은 이견이 있겠으나, 일단은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두렵고 무섭고 이상야릇하고 재미난 '것'은 지와 무지의 흔들리는 경계에 있다고, 다르게 말하자면, 믿음과 믿을 수 없음에.<br/><br/> 어떤 경우에 이것들은 말할 수 없음, 정확히는 말해질 수 없음에 기인한다. 알고 있다, 혹은 존재한다, 보았고, 겪었다 혹은 겪도록 했다. 눈을 마주친 인간, 상대의 눈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혹은 바라봐진, 꿰뚫린 인간이 그것을 말할 수 있는가? 떳떳이 공표되어 살아가질 수 있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기서 오래된 생각을 불러오고자 한다. 많은 두려움, 말해질 수 없음은 죄 혹은 '뒤집힘'의 가능성에 있다고<br/><br/> p.22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세월이 지나 내 아들이 성장한 후에도 이 책상이 멀쩡히 보존된다면 아들에게 이것을 물려줄 것이다. (…) 아이가 커 가정을 이룬다면 그 자식에게도 전해지겠지. 역사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테지. 흠은 파내고 구실은 잘 덮으며. 그리고 언제까지고 내게는, 아니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br/><br/> p.43 〈인비인〉 몸을 숨기고, 숨을 죽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두더지가 그러듯 그것은 코끝과 귓바퀴를 움직여 제 체취와 소리를 감지했고, 어디든 따라붙었습니다. 오야지.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저는 점점 죽어갔습니다. (…) 빠가! 저쪽으로 떨어지라고! 그러자 이렇게 답하더군요. 명 받들겠습니다. 오야지!<br/><br/><br/>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두렵고 이상한 것은 바깥에서 전해 들어온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우리' 안이 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기이한 것은 곧 낯선 것을 넘어 낯섦이고, 공포는 익숙해질지언정 절대로 친숙해질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바깥, 그들, 저편에서 이쪽, 안, 우리에게로 침투해올 기회를 노린다. 그 존재를 인식 너머로 밀어내거나, 어떤 믿음, 나의 경우만은 다르리라는 알량하고 공고한 믿음 없이는 일상을 안위할 수 없는  나약한 동물인 탓인지도 모르겠다.<br/><br/>곁가지로 나아가, 인간과 도넛은 위상적으로 같다 하지 않는가? 뒤집어 까도 인간은 인간, 도넛은 도넛. 도넛은 인간, 인간은 도넛. 자, 여기서 문제. 안팎이 뒤집어진 인간은 무엇일까요? 그 순간 우레같은 깨달음이 들려온다면, 축하한다. 당신 또한 뒤집어진 존재입니다.<br/><br/> p.110 〈매일〉 굴곡도 없고 위험 부담도 적으며 노출도가 낮은 삶. 누군가의 일생을 낙찰받으러 온 사람이 원하는 건 그런 삶이라고 34번은 설명한다. (...) 보통은 인생에 곡절이 너무 많아서 오는데, 인생이 너무 지루해서 오는 사람도 있대요.<br/><br/> p.246 〈#유령〉 이제 0에겐 그럴 힘도, 기대도 없었다.뉴로비전 패치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1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며 0은 패치를 뜯었다. 적막한 집 안에 단조로운 파열음이 들렸고, 1이 입을 뗐다.<br/><br/><br/> 내-면을 드러낸. 드러나진 안-속은 마르고 부패해 죽어간다. 박박 닦아 새로운 겉으로 만들지 않는 한. 어째서인가? 이미 부패해있기 때문이다. 주저하고 뭉개는 사이 썩어문드러졌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알맹이를 드러낸 겉은 금세 죽습니다. 겉은 알맹이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br/><br/>어떤 경우에, 울음과, 분노, 죄과는 현실을 초월하거나 미끄러져 떨어져나간, 소외된 형태로 다가오지 않나. 향기와 악취가 뒤섞인 벚나무 책상, 형태 잃은 육괴. 목숨보다 중한 것, 명예, 자존심, 나의 존재를 세계에 단단히 결속하는 '연결'에 대한 믿음. 그렇게 죄, 흠, 비밀은 스며드는 음각이다. 절망이 그러하듯이.<br/><br/> p.79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결연했고,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그게 부끄러웠다. 그들의 비슷한 외양이, 깨끗한 두루마기와 수치를 모르는 태도가 견딜 수 없었다.<br/><br/> p.186 〈윤회 (당한) 자들〉 감독님, 감독님은 소속이 어디예요? (...) 모르겠죠? 그런데 사람들은 매번 물어보잖아요. 소속이 어디냐? 학교는 어디 나왔냐? 직장은 다니냐? 소속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근데 속해보니까 그래요. 찐따들이어도요, 모이면 단단해져요. 그리고 되게 웃긴 게 그 안에 있으면요. 나도 조금 쓸모 있어지는 것 같아요.<br/><br/><br/> 단 한 명이라도 인간됨을 지향한다 믿어지는 한 승자의 기록이라느니, 본성이 어떻다느니, 현실이니 실용이니 면피는 어떤 식으로든 두려움의 형태로 돌아와 아가리를 벌려 덤벼들 것을 믿는다. 인간의 가능성은 상상에 있다 믿는다. 타인의 눈에서 나의 삶을 떠올릴 수 있는 존재이므로. 수많은 폭력이 타자를 비인간의 지위에서 몰아내려 그토록 애써온 이유. <br/><br/> 그런 이유로 오늘도 이렇게 곁가지를 넘어 숲으로 나아간 끝에 마주친 얼굴이 몹시도 낯설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를. 이상야릇한 감각이 닫힌 문을 열어젖히기를. 깊숙이 파묻고 통째로 불태운대도, 꺽, 넘어가는 숨에 수치와 죄책의 두려움이 스미기를.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 날이 이어지기를. 슬퍼하기를. 들척지근한 수치와 도피의 냄새에 코를 박고 끝의 끝까지 도망쳐 처음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요. 기다릴게요.<br/><br/> p.229 〈아미고〉 그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기계적으로 장비를 세팅하고 점검한다.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던 촬영기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오토 모드로 작동하는 카메라로 대체된다. 주위를 둘러보다 나는 생각한다. 이곳엔 인간이 몇이나 될까.<br/><br/> p.301 〈고독〉 먹이 냄새가 밴 자리를 서성이는 짐승처럼 이익도 그것과의 라포르에 순치되어 지난 사나흘간 탕전실 걸쇠를 풀지 말지 몇 번이고 고민했었다. 연기가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익은 머뭇대다 걸쇠가 단단히 걸렸는지 확인한 뒤, 나직이 읊조렸다. 그래도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됐지.<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81/25/cover150/k69213924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812549</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