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뫕님의 서재 (뫕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07 Aug 2026 21:10:25 +0900</lastBuildDate><image><title>뫕</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뫕</description></image><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듣기, 지극한 사랑과 환대의 마음에 대하여. - [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37934</link><pubDate>Fri, 07 Aug 2026 19:1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3793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0221&TPaperId=1743793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8/84/coveroff/k10213022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0221&TPaperId=1743793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a><br/>유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8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유지영 #심장듣기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br/><br/><br/> 오래도록 이야기해왔다. 읽는 일은 곧 듣는 일과도 같다고. 잘 읽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하고, 잘 듣기 위해서는 나의 '자리'를 내어줄 필요가 있다고. 듣기는 말하기와 말하는 사람, 이 둘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한다.<br/><br/>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아무도 없는 세계에 덜렁 놓인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고 물을 때조차 그는 듣는 사람을 전제하고 있다고. 듣기와 말하기는 이토록 서로를 필요로 한다. 혼자, 너무도 혼자인 고독, 스스로를 쪼개 바라볼 수조차 없는 외로움 속에서는 아무것도, 스스로의 존재를 전할 수조차 없다는 뜻이다.<br/><br/> p.7 내가 뭔갈 듣기로 결정했다면 그건 내가 그걸 듣고, 느끼고, 변하겠다는 뜻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된다. 우리는 결국 들은 것이 된다. 단지 내가 들은 내용뿐 아니라 듣는 태도를 통해서도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듣기는 그렇게 삶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br/><br/> p.87 "말하기는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주체적인 외향적 행위인 반면, 듣기는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내향적 응대처럼 보인다. 과연 그러한가?" 듣기는 단순히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응대가 아니다. 듣기는 오히려 적극적인 상대에서만 가능하다. 귀는 입과 달리 늘 열려 있는 기관이지만 누군가의 말을 새겨 듣는다는 건 선택적 행위이기 때문이다.<br/><br/><br/> 바꾸어 말하면, 최소한 스스로에게 타자로 인식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시작도 끝도 없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혹은 들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세계와 전능자는 듣기와 말하기 모두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 들을 수 없고, 아무도 듣지 못하니 말하기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적막한 절멸이란 말인가.<br/><br/> 여기서 물을 수 있다. 듣기에는 무엇이 요구되는가. 이는 다시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간다. 듣기 위해서는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단단히 틀어쥐고 올라앉은 나의 자리를 말하는 이에게 내어주어야 한다. 말하는 이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의 초대에 응해야 한다. 그의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br/><br/> p.48 인터뷰를 하다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감각을 만나게 된다. 내가 말하는 이의 말을 아주 정확히 듣고 있다는 느낌이다. 마지막 퍼즐 조각의 모서리가 빈 공간에 딱 들어맞은 것 같은 정확감, 내가 어찌저찌 흘러온 삶이 말하는 이의 삶과 밀착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물론 그것은 순전히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고, 말하는 이의 감정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나는' 그렇게 들었다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br/><br/> p.115 듣는 행위에는 이렇듯 비생산적인 구석이 있다. 귀를 기울여서 잘 듣는, 잘 들으려 애쓰는 일은 생산적일 수도 효율적일 수도 없다. 듣는 것만으로는 그 무엇도 생산해낼 수 없고, 자랑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듣기에 성공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형태일 것이다. 매순간 인간을 이해하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듣는 일이 한 명의 인간을 이해하는 최선의, 그리고 최소한의 행위라는 걸 인정하는 것.<br/><br/><br/> 동시에 '듣는 나'를 그 세계에서 소거하지 않아야 한다. 말하는 이를 이 장에 홀로 남겨두지 않아야만 그의 말을 허공에 던져버리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듣고 말하기란, 누군가의, 나의 말을 잘 듣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제각기 소리높여 '나'의 자리를 다투니 기다리고 바라볼 여유가 없다. 크고, 많고, 사나운 목소리에 작고, 약하고, 느린 말이 설 자리가 없다. 하물며 듣기의 자리란 얼마나 좁고, 얕고, 위태로울까.<br/><br/> 저자가 인용한 판결문을 보며 김진영의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오직 그 한 사람을 위해 힘껏 내뻗는 손이 있다면, 오직 단 한 사람이 또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홀로 남겨두지 않는 세상이, 귀 기울여 듣는 사람 하나만이라도 꼭 있으리란 믿음을 잃지 않는 세상이 그 한 사람을 그대로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br/><br/> p.105 내 안에서 이미 옳고 그름이 정리된 주제라면 어느 한쪽의 편에 서는 게 크게 주저되지 않는다. 가치중립이라는 명제 아래 어떤 목소리는 과대 대표되고 어떤 목소리는 과소 대표된다고 믿어서다. 과소 대표되는 이들의 목소리를 더 정확하게 듣기 위해 그들의 편에 선다. 어떤 목소리는 편파적일 때 더 정확하게 들린다.<br/><br/> p.116 나에게 잘 듣는 일이란 구체적으로는 그런 것이다. 쓸모를 증명할 수 없으나 그 증명할 수 없음으로 인해 무가치해지지는 않는 일. 그것은 잠시나마 '나'를 넓혀가는 일이다. 내가 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아는 일이다.<br/><br/><br/> 부디, 이 사납고 잔인한 세상에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끊이지 않기를 바란다. 듣기 위해 눈을 마주치고, 이해하기 위해 어깨를 기울이고 가슴을 맞대는 사람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연약하고 짧은 삶, 한 명이 외로운 홀로가 아닐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뿐이리라.<br/><br/> p.198 듣는 사람이 없이는 말하는 사람이 없고, 말하는 사람이 없이는 듣는 사람이 없다. 이 문장을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듣는 사람의 곁에 말하는 사람이 있고, 말하는 사 람의 곁에는 듣는 사람이 있다. 두 역할은 어느 한쪽으로 고착될 새도 없이 수시로 바뀐다.<br/><br/> p.199 앞으로도 내내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듣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이고 싶다. 설령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소망일지라도 계속 소망하고 싶다. 이렇게 겁도 없이 쓴 문장이 앞으로의 내 삶을 붙들어줄 족쇄가 되기를 바란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8/84/cover150/k10213022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388400</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비밀의 들판, 언젠가의 당신을 만나 내가 향할 그곳에서. - [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36158</link><pubDate>Thu, 06 Aug 2026 20: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3615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42130423&TPaperId=174361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52/36/coveroff/k74213042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42130423&TPaperId=1743615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a><br/>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08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br/>#비밀의들판 #마거릿주혜리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br/><br/>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자기의 역사를 찾는다는 건 대체 무엇일까. 사람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사람의 몸으로 살아간다. 자기 정의는 역설적으로 타인에게 비춰 보이는 나, 타인과의 관계 어딘가에 위치하는 나, 나를 둘러싼 관계의 이름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나를 이해한다는 것,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 그 삶의 궤적을 좇는다는 것은 그 기원과 현재를 훑고, 감각하고, 음미하는 것과도 같다.<br/><br/> 위, 아래, 좌우(?)까지 고루고루 잃어가며 살아온 결과, 가장 큰 아쉬움은 그의 삶을, 기억을, 언젠가의 시절을 말해줄 사람이 점점 줄어가다 기어코 한 명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OO은 말했다.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알더라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고. 언젠가 너의 어린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도 너뿐인 때가 올테니 지금이라도, 틈 날 때마다 자주 말해주고 싶다고.<br/><br/> p.16 나는 신문 기록, 수감 중 읽은 책 목록, 공산주의자 동지들과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직접 고안했던 암호 등 내 할아버지 이철하의 짧은 생애에 관한 사실들을 밝혀냈지만, 정작 내 존재 자체에 깊이 스며든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야기들은 내 몸을 파고 들어 와, 손녀였고 딸이었으며 마침내 어머니가 된 나라는 사람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내 몸에서 풀어내야 했다.<br/><br/> p.58 나는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 어느 도시에 살면서도 진정으로 내 집에 머무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그 이유가 할아버지의 삶이 잊히고 만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리저리 떠도는 성인기의 내 삶에서 단 하나 변함없는 것은 더 전망 있는, 더 흥미로운, 더 '나은' 어딘가로 이동하려는, 탈출하려는 충동뿐이다. 내 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 자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느낌으로만 채울 수 있었다.<br/><br/><br/> 누군가를 영영 보내고 온 날엔 으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누구가 아닌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뭘 좋아하고, 어떤 꿈을 꾸고, 어느 길을 따라 마침내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왔을까. 그 가슴에 무엇이 싹트고 시들어 묻히고야 말았나. 내도록 아쉽고 궁금했다. 서럽기도 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지키고 쌓아온 것들,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삭이고 숨겨온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br/><br/> 그렇게 그가 따돌려진, 숨이 턱에 차도록 쫓아다니게 한 세월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누가 그의 삶을 들어주었을까. 누가 그 자신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묻힌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고이 닦아 전해주었을까. 그 이야기의 이름을 안다. 상처. 상처. 상처.<br/><br/> p.123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아기 때 자신에게 결핵을 옮긴 이가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아마도 감옥에서 옮았을 것이다. (...) 아버지가 전혀 알지 못했던 부친이 남긴 유산이,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거나 적어도 주요인을 제공한 전염병이었던 것이다. 잠복기를 거친 다음 발병해 조직을 훼손하고, 결코 온전히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 병. 아비 없이 자라난 상처.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처. 내게로 대물림된 그 상처.<br/><br/> p.198 내가 묻는다. "할머니가 지내던 집 사람들은 정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아니면 중국으로 탈출한 가장 민강에 관해서 언급한 적은요?"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한다. “내 주위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강을 언급하는 것도 들은 적 없고. 나는 애초에 왜 일본인들이 한국에 있었는지 조차 몰랐어. 그 시대는 그랬지."<br/><br/><br/> 저자가 추적하는 가족들의 계보는 복원해낸 조부의 삶, 침묵 속에 전달된 조모의 삶, 소외와 포기로 점점이 이어져온 모부의 삶이라는 낱알들의 모음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삶, 자기가 살아오지 않은, 알 수 없었던 시대, 파편화된 기억으로만 존재해온 일화를 한데 모아 가족과 핏줄로 이어져는 더 큰 그림이자 새로운 시작에의 첫 획이다. 여전히 미완이며, 영영 완결될 수 없는 '것'을 위한.<br/><br/> 그리하여 종국에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가 아닌, 무엇이 남는가, 무엇이 끝내 살아남아 귓가로 입속말로 손때 묻은 흔적들로 전해지는가. 저자가 끝내 도달한 '미완'에서 진정 자기 자리를 찾은, 어쩌면 영영 그럴 수 없게 된 과거와 현재의 의의를 묻기를 바란다. 그렇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들어봐, 너의 이전을 말해줄게. 들어봐, 나는 이 몸으로 이어져 왔으니, 우리는 어느 몸에서 갈라져 어느 '곳'을 살아가는 몸인가…<br/><br/> p.380 마침내 집에 온 기분이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베이 에어리어는 아이와 함께 있는데도 여전히 거쳐 가는 곳으로 느껴지고, 한국은 좀 더 익숙하지만 그래도 외국이다. 나에게 집이란 장소가 아니다. 존재의 상태다.<br/><br/> p.387 옛날 옛적에 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전혀 편하지 않은 소녀가 있었어요. 소녀는 혼자만 다르게 생겼고, 먹는 음식도 달랐어요. 사람들은 소녀에게 묻곤 했어요. "넌 어디 출신이야?" 소녀가 "휴스턴"이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다시 물었어요. "아니, 진짜로 어디서 왔냐니까?" (…) 여성은 여전히 두 나라 어디에서도 편하지 않지만, 가족과 함께하면서 비로소 집에 온 기분을 느끼게 되었어요. 엄마와 달리 아이들은 과거를,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랄 거예요. 여성은 진심으로 바랐어요. 아이들이 그들 자신과, 어디가 되었든 자신이 살기로 선택한 곳에서 편안히 머물기를.]]></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52/36/cover150/k74213042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52366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눈을 감고, 눈을, 감고. 절망하는 피식자의 세계로. - [화 - 재앙의 책]</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22469</link><pubDate>Thu, 30 Jul 2026 22: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2246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937076&TPaperId=1742246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024/91/coveroff/k71293707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937076&TPaperId=1742246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화 - 재앙의 책</a><br/>오다 마사쿠니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3년 12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검은숲(시공사)<br/><br/> **눈을 감고 그려보라. 눈을, 감고, 그려보라. 매일이 무너지는 순간을. 다시, 눈을 감고, 그려보라. 톡,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가 코앞에 들이밀어지는 순간을. 어떤 두려움은 지극히 현실을 닮아 연신 눈을 깜빡이게 하지만, 어떤 공포는 현실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 자리를 꿰차는 꼴을 보고도 손 쓸 길이 없게 한다.**<br/><br/> **문득 들어선 길, 교교하니 다가오는 웃음 앞에 그저 아가리 앞의 짐승처럼 목을 늘어뜨릴 뿐이다. 압도적 공포, 뼈저린 무력감, 새하얗게 끓어오르는 쾌락, 전신의 감각을 터트릴듯 채워오르는 무엇이 두렵게 하는가? 이는 필연히 오래 전 잃어버린 것, 피식자의 감각을 일깨운다. 미쳐버린다. 잡아먹힌다. 집어삼켜진다. …아!**<br/><br/> p.23 〈식서〉 그렇게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세상을 빙 에워싸고 붕괴를 막고 있는 것이다. 책을 먹는 것도, 어쩌면 그러한 행위의 일환이 아닐까. 책장에서 한 권을 빼서 펼치고, 한 장을 찢어 뭉친 뒤 입에 넣는다. 그 순간에 세상의 붕괴가 시작되는 건 아닐까. 아니, 그런 표현이 과장되었다고 느낀다면, 제 일상의 붕괴라고 해도 좋다.<br/><br/> p.351 〈머리카락 재앙〉 미쳤다. 모든 것이 광기에 찬 가운데,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이성마저 갈아버리는 거대한 절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잡아먹을 거면 차라리 빨리 잡아먹어라. 울부짖다 지친 나는 그저 벌레처럼 쪼그라든 마음으로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br/><br/><br/> **화, 재, 앙. 제목의 셋은 퍽 다른 꼴이되 그 뜻에서 이어지는 바가 있다. 화는 문책이자 타박이다. 재앙에는 타오르는 불과 벌 받는 자의 형상이 있다. 화와 재앙에는 주는 이와 받는 자가 있다. 행위의 결과다. 바깥과 안, 이곳과 저곳이 있을 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화란 본질적으로 맞닥뜨리는 것이다. 도래하는 것이며, 입혀지는 것이다. 쏟아부어진다. 집어삼킨다.**<br/><br/>**이 말은 곧, 치미는 '화'와 다르게, 재앙으로서의 '화'는 외부 세계, 타자의 질서를 전제함으로서 가능한 존재라는 뜻이다. 화는 스쳐 보낼 수 없다. 화가 겨냥하는 이는 그 자신의 질서에서 재앙의 힘으로 뽑히고 질서-세계의 어딘가에 처박힐 위험에 처한다. 재앙에는 의도가, 방향이, 질서가 있다. 도취되든, 순응하든, 부지불식간에 흡수당하든. 자연현상의 부작용을 재앙이 아닌 재-해, 해를 입었다고 부르는 것과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br/><br/> p.100 〈미미모구리〉 당신은 자신이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갑갑함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모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데, 100가지, 1000가지 인생을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 적은 없습니까? 70억의 인간이 아니라, 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세상이 이렇게 눈 앞에 통째로 매달려 있는데, 감질나게 혀끝으로 핥아서 맛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부당하다고 울분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br/><br/> p.132 〈상색기〉 그런 멸망의 꿈과 '술렁거림', 이 양 바퀴가 사회에서 낙오하여 비탄의 나날을 보내는 그를 조용히, 그리고 확실히 궁지로 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도망쳐야 할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따라잡히기만을 기다리며 숨을 헐떡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었다.<br/><br/><br/> **일곱 이야기의 인물들은 제각기의 무력에 짓눌려있다. 권태, 부전, 흡수, 동화… 표현은 달리하나 기저에는 모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듯하다. 그들에게는 출구가 없다. 그저 저 멀리서,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이야기의 일부로 밀려오는 것을 맞이할 뿐이다. 시작부터 문을 닫아걸어 등지는 탓이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먹이란 말인가. 그런 이유로 간신히 미끄러져 나온 현실의 틈새 앞에서도 확신하지 못한다. 이 공포는 언제고 또다시 찾아올 것이다. 세계를,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저항할 수 없다. 매혹당한다.**<br/><br/> **긴 악몽의 끝, 어디가 끝이고 현실인지도 모르는 채 눈을 뜬 바로 여기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상의 균열로 침범하는, 권태와 초조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나른하게 되뇌어지는 순종하세요, 눈을 감고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세요... 이 달콤하고 환상적인 속삭임은 과연 누구의 목소리겠느냐고. 자, 눈을 감고 그려봅시다. 좁은 길, 바로 그 문을 열고 깊이 아주 깊이 이끌리노라면…**<br/><br/> p.223 〈부드러운 곳으로 돌아가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낳아줄게. 세상이 끝나면 새로운 세상과 함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낳아줄게. 남자 같은 건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낳을 수 있으니까… (…) 남자는 이미 모든 언어를 잊고, 꾸벅꾸벅 졸면서도 쉼 없이 몸을 꿈틀거리며 부드러운 근원의 어둠을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br/><br/> p.354 〈머리카락 재앙〉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뭔가 원하는 게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도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 마음이 찢겨 나갔다. 떠오른 게 맞나? 추락한 게 아니고? 모르겠다.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저 멀어져가는 의식에 몸을 내맡기고, 영혼 밑바닥으로 떨어지며 중얼거렸다. 인간이 이런 식으로 죽을 수도 있구나…<br/><br/>#화재앙의책]]></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024/91/cover150/k71293707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0249144</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존재의 집, 우리가 서로의 집이, 길이, 곳이 되기 위하여. - [낯선 집 - 재일 이주 여성의 자리를 엮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20058</link><pubDate>Wed, 29 Jul 2026 21: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2005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42130813&TPaperId=1742005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34/79/coveroff/k3421308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42130813&TPaperId=1742005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낯선 집 - 재일 이주 여성의 자리를 엮다</a><br/>조경희 지음 / 사계절 / 2026년 07월<br/></td></tr></table><br/>[본 리뷰는 사계절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br/><br/> '거래되는 부동산-공간'으로서의 의미와 달리, 암묵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집'은 성취로 얻어지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의 승인과 압력으로 주어지는 것에 가깝다. 머물러도,살아가도, 존재해도 된다고,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할' 곳, 마땅히 그 소속이라 불려야 한다고 선언되는 이름. 그것이 바로 '집'일 것이다.<br/><br/> 그렇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해 물어야 한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 집이란 나에게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나의 집이 되고, 무엇이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거주하기'를 가능하게 하는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나, 그들, 당신의 집은 어디인가. 집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이 집은 어째서 이토록 낯설어-지는가. 어떻게 새로운 집을, 여기저기에, '열린 공간'으로 지을 수 있을 것인가.<br/><br/> p.9 〈들어가며〉 디아스포라에게 집은 종종 불안정과 갈등을 내포한 장소이며, 집 만들기는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삶의 기반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실천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집과 사회를 연결하면서 시민권과 소속의 조건을 협상하고, 공동체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친밀성과 공공성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br/><br/> p.289 〈재일여성의 교차성 실천과 반혐오의 정동〉 재일여성들은 각자의 삶의 맥락 속에서 인종주의와 가부장제가 구축한 경계권력과 비판적으로 교섭한다. 이러한 '집 만들기'는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더불어 살아갈 새로운 관계와 삶의 기반을 구축하는 과정이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신체를 구성해가는 하나의 실천이다.<br/><br/><br/> 국경도, 민족도, 통일체로서의 국가의 의미도 예전과 같지 않다. 기실 그것에 실체가 있었던 적이 없던 것은 차치하더라도 실존적 붕괴나 절멸의 위협을 경험해본 적 없는 세대들로만 구성된 '국가'가 코앞에 도래한 때다. 이런 시대에, 혈통-구성적 진정성과 순수에의 회귀를 주창하는 이들은 과연 어디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일까. 그들이 말하는 '집'은 과연 누구의 집인가. 그곳에 머무를 '자격'은 누구에게만, 어떻게 주어진다고 믿어지는가.<br/><br/>모두가 불안정하다고, 외롭고 힘들다고 한다. 모두가 증명의 압박에 시달리고, 고유한 자리에 '돌아가면' 될 일을 괜한 갈등을 초래한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 어떤 '자격'은 특정한 집단에게만, 낙인처럼 달라붙는 정체성의 '소유자'에게만 요구된다. 어떤 폭력은 누군가에게만 감수해야 할 일상으로 취급된다. 어떤 모욕은 누군가의 몸에 부여된 찬사와 단단히 얽히고 덧씌워진다.<br/><br/> p.192 〈헤이트스피치 이후 배외주의의 '정상화'〉 이들이 관리하려는 젊고 건강한 여성의 몸은 외국인이 아닌 자국민에게 한정된다. 즉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본인 인구의 증가이며, 이민이나 다문화 공존은 대안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여성의 재생산 능력이 국민 공동체의 유지와 연결되고, 외국인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외부자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이는 모성주의와 섹슈얼 내셔널리즘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br/><br/> p.284 〈재일여성의 교차성 실천과 반혐오의 정동〉 트라우마가 삶의 생명력을 잠식하는 양상은 마이너리티 여성들에게 더욱 중첩되지만, 그럴수록 경험의 고유성은 비가시화되고 외면된다. 이들은 자신의 취약성을 숨기거나 덮기 위해 더욱 강인한 신체적, 정동적 수행을 요구받는다. 앞에서 본 재일여성의 '씩씩함'에 대한 찬양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혐오발언은 사회적 관계의 기반 자체를 근본적으로 파괴한다.<br/><br/><br/>읽는 내내 맴돌았던 생각이 있다. '사회'가 소수자를 집단의 이름으로 뭉뚱그려 호명함으로써 증오의 분출구로 삼을 때, 조롱이 놀이가 되고 혐오-폭력이 어떻게든 정당화될 때, 그것은 자체만으로 사회가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보다 숙고를 요하고 비폭력적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시민 토론의 장을 '가로막는 가능성'이 되지 않는가. '그들'을 그대로 둔 채로 세상이 나아가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던가.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지 않은가.<br/><br/>저자가 재일/이주/여성이라는 세 축으로 보이는 일본과 한국 사회는 끔찍이라는 말로는 모자랄만큼 참담한 몰골로 곪아가고 있다. 지적에서 그치지 않고, 절망에 주저앉지 않고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의 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서로의 집이 되어, 각자의 이름을 삼켜버리지 않는 채로 뒤섞여 어울릴 수 있을까.<br/><br/> p.189 〈헤이트스피치 이후 배외주의의 '정상화'〉 유해한 것을 제거하려는 사고방식이 개인의 신체와 국가라는 서로 다른 영역을 관통하여 하나의 세계관을 구성한다. 신체가 외부 물질(백신)과 화학 물질(첨가물)을 거부하듯, 국가는 외부자를 공동체의 순수성을 침해하는 존재로 보고 배제한다.<br/><br/> p.227 〈동시대적 정동과 번역 불가능한 신체성〉 사카이 나오키에 따르면, 통일된 언어 사이의 변환이라는 발상은 번역의 '레짐'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며, 번역 없이는 자신의 '민족어'의 통일성을 의식할 수 없다. 즉 애초에 언어와 공동체의 동질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번역이 요청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동질성 자체가 번역을 통해 구성된다는 뜻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34/79/cover150/k3421308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34796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사람을 살리는 일, 생명을 열어 다시 세우는 일. - [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11145</link><pubDate>Sat, 25 Jul 2026 16: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41114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02130502&TPaperId=1741114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00/45/coveroff/k00213050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02130502&TPaperId=1741114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a><br/>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7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br/> 이과냐 문과냐, 요즘은 이런 말 안 쓴다면서요? 진짜로? 아무튼, 문이과를 묻는다면 의학은 분명히 이과, 좁은 의미로서의 과학의 영역에 속해있다. 그럼에도 의학은 과학의 한 분과 이상으로 여겨져왔다. 기존 의학사가 위업과 발견의 역사를 말함에 있어 어떤 독보적인 지위 비슷한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하기 어렵다.<br/><br/> 오래전부터 의학과 의학자, 의료 현장 관계자는 사회 필수 '자원'으로 여겨져왔다. 의학의 발전은 인류 전체의 진보와 동일시되기 마련이다. 현대에 이르러 지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의 첨단이자 일종의 증명으로까지 이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도제식 전승이라는 닫힌 관계를 넘어 탐구함에 있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의문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br/><br/> p.71 측정 도구는 늘어났지만, 그것이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객관성은 높아졌지만, 환자가 경험하는 질병의 의미는 숫자 너머에 있었다. (…) 맥박계는 박동의 리듬을 숫자로 환원하지만, 환자가 견디는 밤의 길이까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의학은 그 이후로도 이 침상 곁을 떠나지 못한 채, 숫자로 읽는 몸과 돌봄으로 이해되는 인간 사이를 오가고 있다.<br/><br/> p.244 외과의 역사는 기술의 진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환경이 어떻게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감염이 개념화되고, 통증이 통제되었을 때, 외과의 실력은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었다. 칼이 더 날카로워진 것이 아니라, 칼을 쓸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 외과는 결코 혼자 발전하지 않았다. 언제나 축적된 지식들, 그리고 조건을 만들어낸 사람들과 함께 성장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외과는 의학 가운데 가장 대담하면서도 가장 절제된 학문이 되었다.<br/><br/><br/> 머리나 머리털이나 자르기는 매한가지였던, 의술과 주술이 뒤섞여 있던 먼 옛날부터 현대의 도전들에 이르기까지, 의학의 역사는 혁명과 전환, 이념 다툼과 집념이 뒤섞인 난장이었다. 체액설부터 이종간 세포배양까지 모든 순간에 당연하게 한발씩 나아간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 역사의 성원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분투하고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 애써왔는지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다.<br/><br/>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생명은 어느날 덜렁, 등장한 신비가 아닌 복잡한 구조와 체계로 맞물린 유기체이자 가능성의 덩어리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 색색의 도판과 바짝 붙어야 겨우 알아볼 복잡한 구조의 그림들, 이어지고 전도되기를 반복하는 이름들에서 발견한 것은 대단한 지식의 자랑이 아닌 열의와 경의의 기록이었다.<br/><br/> p.67 체액설이 여전히 의학의 중심에 있던 시대에, 몸무게의 미세한 변화와 보이지 않는 증발을 논하는 그의 연구는 기이하고 실용성이 떨어지는 집착처럼 보였을 것이다. (…) 환자를 치료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 앞에서, 숫자는 아직 설득력이 부족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연구는 시대를 앞서 있었다. 측정은 곧 치료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측정 없이는 이후의 의학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br/><br/> p.354 비타민은 단순히 새로운 약의 발견이 아니었다. 19세기에는 질병을 세균이나 독 같은 나쁜 것의 침입으로 이해했다면,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질병은 무언가 필요한 것이 부족할 때도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br/><br/><br/> 어쩌면 진작 이렇게 물었어야 했는지 모른다. 의학은 어떻게 발전해왔는가, 를 묻기에 앞서, 의학의 역사는 누구의 이름과 시선으로, 무엇에 도전하고 응전하며 이어져 왔는지 그것을 말하고, 가르쳐야 했던 게 아니냐고. 동시에, 여전히 물어져야 하듯, 의사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의학은 무엇을 위해 발전하고 존속되어야 하는지 또한.<br/><br/>사회가 갈라져 반목한 시간이 길다. 서로를 몽매한 대중과 이기적인 이익집단 따위로 묶어 이해할 수 없게 된 지 오래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책의 독자일 '일반 대중'과 미래의 의학-집단이 스스로에게 물을 때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어디쯤을 써내리고 있는가, 이 길은 대체 무엇을 위함인가. 그 끝에서 여전히 서로를 사람으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br/><br/> p.280 초음파가 청진기를 완전히 밀어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쩌면 둘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며 공존하게 될 것이다. 환자 곁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는 도구, 판단과 행위가 시작되는 지점, 그 자리는 언제나 의학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기술의 발전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만드느냐, 그것이 더 본질적인 질문일지도 모른다.<br/><br/> p.432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옳다고 믿었던 것을 끝까지 밀어붙인 사람,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 한 사람,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처음으로 본 사람. (…)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현미경 앞에 앉아 있고, 누군가는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찾고 있으며, 누군가는 오랫동안 붙들어 온 질문의 답에 막 손이 닿으려 하고 있다. 의학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그 역사의 중간 어딘가일 뿐이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00/45/cover150/k00213050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004532</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알기에, 알기 때문에, 그러므로, 달려가는. - [시간의 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99321</link><pubDate>Sun, 19 Jul 2026 00: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9932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92130109&TPaperId=173993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69/32/coveroff/k09213010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92130109&TPaperId=1739932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시간의 끝</a><br/>김성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br/> 종말론이 미지의 미래가 아닌 세계, 종말이 말 그대로 살갗으로 느껴지는 세계에서 사람다울 수 있다는 것은, 정해진 파멸을 사람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과연 누가 무엇을 인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스승의 제자들은 말했다. 여시아문! 종말로 떠밀려가는 세계에서, 스승과 제자와 어중이와 떠중이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아, 아무것도!<br/><br/> 읽는 동안, 딱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내도록 반야심경 독송을 들었고, 잠시 생각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다. 새삼 우리 존재는 선형으로 지각되는 시간과 단일한 우주에 얼마나 단단히 붙들려 있는지 생각한다.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이곳과 저곳이 같은 동시에 같아질 수 없으며,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으나 이것이 저것을 불러올 것이며…<br/><br/> p.8 "수영아, 세상이 너무 이상해졌어." (...) 정보의 보도 지침에서는 엄금하는 내용이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이 끝나고 말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한다. 그 압박감 때문에 삶을 바꾸면 사교도, 무시하고 살던 대로 살아가면 보통 사람, 오직 그 차이밖에 없는지도 모른다.<br/><br/> p.94 "누가 달을 파괴했는지 형사님은 아나?"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달은 파괴되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제 맑은 날 밤하늘에, 달은 떨어뜨린 과자처럼 부스러져 떠 있다. 당장 오늘 밤에도 보일 것이다. 그런데 왜 수영은 달이 수억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온전하게 하늘에 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가? "아는 사람이 세상에 있기는 한가?"<br/><br/><br/>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이것이고 저것이며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가 무너져 질서도 혼돈도 매끄러운 수식의 일부로 자리하는 완벽한 세계, 그러므로 끝없이 균열하고 붕괴되는 세계. 그 안의 작고 작은 존재들, 이해를 얻지 못한 미물들, 시간에 휩쓸려 미래도 과거도 끄집어내지 못하는 채로 그저 휘둘리기만 하는 초라한 순간적 존재들. 그리고, 그들과 다르다 자부하는 '힘'을 지닌 자들.<br/><br/> 그 모두가 세계와 '법칙'의 한계를 가늠할 수 없고, 더불어 누구도 그 의미를 진정히 이해하지 못하므로, 무한하고 광대한 매혹은 기실 얼마나 초라하고 얼마나 허망한가. 자유의지! 인간의 본성이자 본령이라 할 그것은 진정 존재하는가? 거대한 시공의 차원 어딘가에 붙들려 주어진 배역에 충실히 놀아나고 있을 뿐이 아닌가?<br/><br/> p.134 나는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뚫고 내려갈 수도 있다. 피바다가 되겠지. 하지만 그것은 통쾌한 피바다일 것이다. 제자들을 타이를 때 스스로 한 말을 떠올린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손을 더럽힐 수 없다는 말을. (...) 하지만 제자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제물로 바쳐 제 잇속을 챙기는 데 조금의 주저도 없는 말종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그렇다면 나 하나쯤 죄를 뒤집어써도 괜찮지 않을까?<br/><br/> p.147 "시간이 두 개건 세 개건 백 개건, 태양이 지구를 돌건 지구가 태양을 돌건 둘이 엉켜서 탱고를 추건 간에, 우리는 사람이야. 거기에는 변함이 없어.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인 한 지켜야 할 게 있단 말이야." (...) "우주 그 자체를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고요.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을 어떻게 기존의 미력하고 시시한 사람하고 같다고 할 수 있어요?"<br/><br/><br/> 혹자는 이 이야기에서 시작점과 끝점을, 희미한 마디마디, 불변하는 무언가를 찾으려 눈을 질끈 감고 안간힘을 쓰겠으나, 그저, 조금 울고 싶어지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는 모두가 단단한 믿음과 매끄러운 환희 대신 설움과 공포, 절망과 혼돈 속에 주저앉기를 바란다. 아아, 초라하고도 미력하구나. 이를 악물고 일어서는구나. 끝없이 다시, 또 다시를 꿈꾸는구나. 부질없이 버둥대는구나. 달은 산산조각 나고 시간은 끝날 것이므로. 동시에, 영원히 유예될 것이므로.<br/><br/> 각자의 신을 찾아대기를, 소리 높여 부르짖기를 바란다. 꿈 속의 꿈, 영영 깨지 못한 채 중얼거리기를 바란다. 아, 드디어 끝인가봐. 와야만 할 끝. 모든 이야기가 소멸할 곳. 네가 태어나고 죽어 사라지고 세계가 부서지고 피어나는 그 곳으로 허덕이며 달려가기를. 도래할 종말을 있는 힘껏 붙든 채 길을 잃기를. 무너지는 세계에, 그렇게 홀로 남겨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몇 번이고, 언제까지나. 영원히.<br/><br/> p.166 이 길을 걷기로 했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났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많은 것을 잊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옛집으로 가고 있다. '옛집'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도 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하나니까. 그것을 아직도 머리로만 알기 때문에, 나는 여기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br/><br/> p.353 나는 시간이 끝나면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이제야 깨닫는다. 나의 시공간에서 시간은 결코 앞으로 나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멈추지도 않는다. 되돌아가고 끼어들고 겹친다. 스노글로브를 흔들 때마다 눈송이들의 궤적은 다르다. 하지만 홍콩에 눈이 내리다가 끝내 그친다는 사실은 같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69/32/cover150/k09213010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69325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우리의 사이와 차이 -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91800</link><pubDate>Tue, 14 Jul 2026 20: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918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0200&TPaperId=173918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81/77/coveroff/k10213020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0200&TPaperId=173918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a><br/>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07월<br/></td></tr></table><br/>왜 같은 가정에서 함께 살림을 꾸려나가는데, 한쪽은 매사에 안달복달하고 '관리자' 역할에 노상 진이 쭉 빠진 것처럼 느낄까? '가사'라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영역을 담당하는 사람은 왜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말을 달고 사는 걸까? 왜 양육자 모두가 육아에 참여한대도 한쪽이 더 큰 부담을 지는 형국이 될까. 가정경제와 가족관계의 전반적 관리를 포함하는 가사 부담의 불평등에 으레 따라 나오는 반응은 '엄마/아내가 가장 큰 결정권자'거나 '각자 잘하는 일을 한다'는 식이다.<br/><br/> 그러므로 우리 관계는 평등하고 공평하다고. 과연 그럴까? 가정 경제 규모 관리, 가족 성원의 일상 전반, 하다못해 빨래와 식사에 필요한 순서와 준비물, 가족 행사 챙기기는 누가 맡는가? '같이' 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의 '실패'는 누구의 탓으로 돌려지는가? 자녀에게, 연로한 부모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연락을 받고 누가 부양하며, 매일 입고 쓰는 물건과 각종 공과금 등은 누가 책임지는가?<br/><br/> p.8 (추천사) 이 책은 가사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을 기존의 기계적 분담 논리에서, '가사와 육아가 누구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시킨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대개 가사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이들 남성들은 가사노동을 평생 '머리에 이고' 살지는 않는다. (...) 남성들은 자신이 가사노동에 서투른 모습을 반복적으로 증명함으로써, 가사 책임을 회피한다. 그리고 여성들은 보통 자기 남편의 '무능력'을 남편의 비겁함보다는 그의 천성 탓으로 돌리곤 한다.<br/><br/> p.86 한번의 인지노동은 약간 성가신 소소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작은' 행동 혹은 찰나의 생각들이 쌓이면 그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br/><br/><br/> 왜 누구는 혼자서도 잘 살고 멀쩡히 사회생활을 하다가도 가사 문제엔 얼이 빠져서 '상세한 지시와 칭찬'을 요구하고, 누구는 장단기 계획을 도맡고도 '큰 일'엔 서투르다 여겨지는가? 왜 동등한 주체가 만나 독립된 가정을 꾸리고서도 한쪽은 퇴근 없는 직장을 오가고, 누군가는 휴식과 출근을 분리할 수 있는가? 물어야 한다. 이것은 정말 진정 그가 그 일에 적합한 성격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의도된 나태함일까? '적성에 맞는 일'의 결과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br/><br/> 설령 '잘 하는 일'을 맡아 나눈다 하더라도, 부담은 편중되어 있다. 누군가 준비부터 뒷처리에 실행을 맡고, 누군가는 결정만 내리면 된다면, 또한 그 결과의 책임이 한쪽에 편중되고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를 평등이라 할 수 없다. 수직-업무적 위계 관계가 아니고서야 더더욱. 저자가 말하는 인지노동의 단계적 분담이 진실로 '분담'이 아닌 이유다. 개인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편만 급작스레 무능력자가 될 일이 없으니.<br/><br/> p.117 커플들의 합동 결정은, 결정 단계에 이르는 데 필요한 동이한 수준의 준비 작업에 남성이 참여하지도 않고, 혹은 옳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동일한 중압감을 남성이 경험하지도 않으면서 가정생활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점수'를 따는 경우가 많았다. (…) 결정하기는 상대적으로 이득이 높은 인지노동이다. 예상하기나 지켜보기보다 눈에 잘 띄고, 많은 경우에 커플이 제한된 자원을 사용하거나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br/><br/> p.280 인지노동은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도 여성에게 크게 편중된 가사노동의 한 차원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는 우리가 통상 가사노동을 연구할 때 사용하는 시간 기반 지표로는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 이성 커플 다수에서 여성들은 더 무거운 인지적 부하를 떠안고 있었고, 그것도 상대적으로 부담은 크지만 보상은 적은 활동들에 불균형하게 집중되어 있었다.<br/><br/><br/>  다만 그것이 과연 개인만의 전략이고 의도겠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사회가 어떻게 오래된 방기를 조장하고, 어떤 면에선 누군가를 집 안으로 '묶어 치워버릴' 수밖에 없게 하는지. 어떻게 이 차별이 성격과 현실의 이름으로 '합리적 선택'으로 탈바꿈되는지. 모든 노동이 얼마나 젠더-수행에 밀착되어 있는지, '정상 사회'가 얼마나 많은 비가시노동을 전제하는지를 생각해보라.<br/><br/> 저자의 말처럼 "문화적인 힘들이 어떻게 여성을 몰아가서 가정이란 맥락에서 그러한 기술을 습득하고 활용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하는지(19)"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돌아보라, 그것은 정말 무능과 재능의 문제였는지. 가정이 관리자와 이용자로 나누어진 공간은 아니었는지. 질문에 답할 때쯤엔 이전과 같을 수 없으리라 믿는다. '같이 살아가는' 일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듯이.<br/><br/> p.282 이러한 서사가 호소력이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지나 반세기 동안의 '젠더 혁명'이 불균형적으로 행위에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복해서 여성들에게 그들 또한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해왔으면, 여기서 '무엇이든'은 주로 직업적 성취의 맥락에서 이야기되어왔다. 이는 중요한 진전인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젠더를 '한다'는 것에는 행동뿐 아니라 사고방식과 정신적 습관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br/><br/> p.293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인과 커플에게 변화의 주체로서의 힘을 되돌려주는 것과, 인지노동 문제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자기계발서에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커플을 향한 권고로 가득하다. (…) 즉, 문제의 핵심을 남성과 여성 개인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혹은 무엇을 하고 있지 않은지에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진정으로 문제적인 것은 개인들의 선택지를 제한하고 그들의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힘들을 간과하는 데 있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81/77/cover150/k1021302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817710</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요람에서 무덤까지, 기적에서 절망까지. 불안하고 불온한 속삭임이여. - [존재의 대연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86008</link><pubDate>Sat, 11 Jul 2026 16: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8600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0190&TPaperId=1738600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56/79/coveroff/k67213019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0190&TPaperId=1738600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존재의 대연쇄</a><br/>단요 지음 / 사계절 / 2026년 06월<br/></td></tr></table><br/>언젠가는 이 작가를 진심으로 우려했더랜다. 굳이 따지자면 우려 반, 경악 반, 해방감 반으로 이루어진 도합 150%쯤의 침묵이었는데, 정말이지, 솔직한 마음으로는 언제고 '모 소설가, 신흥종교 교주가 되었다고 선언해… 누리꾼들, 그럴 줄 알았다' 따위의 속보가 뜨더라도 그다지 놀랍지는 않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br/><br/> 어떤 거대한 구조, 어쩌면 세계 자체가 나의 의지나 능력과는 무관히 돌아가는 감각을 아는가? 무엇이 인간인지 물은 적이 있는가? 진종일 얼굴 흉내를 내다 돌아와 지친 몸을 누인 적이 있는가? 신의 의지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또 존재의 바닥까지 싹 뜯어 관찰하고 싶었던 적이 없는가? 당연한 '안돼'는 왜 안 되어야 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결국 포기해버린 적이 있는가?<br/><br/> p.15 〈사랑하는 신의 생일〉  이토록 복잡다단한 고통 바깥에는 나 같은 사람이 있다. 힘든 것도 싫어하는 것도 소중한 것도 많지 않아서, 가끔은 몸이 가볍게 한 발짝 떠오른 느낌이 드는 사람. 이대로 허공을 한 계단씩 밟아나가면 나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깨끗이 지워질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나는 땅으로 짓눌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내 몸이 계속 하늘로 향하려는 게 문제인 사람이고, 그게 유일한 고민이다.<br/><br/> p.91 〈사랑하는 신의 생일〉 그러나 믿음은 실체가 없으므로 공허했고, 공허를 메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믿음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무한히 소급되어 불어나지만 결코 완전해지지 않는 갈망들. 가이우스는 그 공백이 기적처럼 채워지기를, 자신을 굽어살피는 신이 있기를 바랐다. 그럴 수 없다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다…<br/><br/><br/> 언젠가의 물음을 되새겨보자. "만약 네가 세상을 끝장낼 수 있으면, 그러고 싶으냐?(『피와 기름』, 래빗홀)" '평범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안정과 순응에 대한 믿음 위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물론 여기서의 '평범'이란 내 평생 쟁취하지 못한 어떤 보편성 내지는 요구되는 인간-꼴 같은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위장과 학습이라는 양대산맥 작전, 가히 용을 썼다고 해도 좋을 만큼의 버둥버둥 끝에 장렬히 실패한 그것.<br/><br/> 이제 와서는 '이레귤러' 정도로 둘러댈 수 있게 된, 언젠가는 실패, 또 언젠가는 덜-됨이었던 기억을 이 작가가 주야장천 질리지도 않고 까발려대고 있으니 수치스럽지 않을리가, 또, 정확히 같은 이유로 부적격자이자 부적응자로서의 삶을 마주하는 쾌감을 느끼지 않을리가. 다시 말해보자. 나는 반쯤 실패했다. 빛이 있으라, 하면 예, 하고 눈 뜨고 밥 먹고 살아가는 '자연스러움'을 획득하지 못하고 사방팔방 짜깁기로 흉내나 내는 선에 그쳤다는 말이다.<br/><br/> p.114 〈세상의 이름은 기린〉 그 만남의 결론이란 최선의 배려는 충분할 수 없으며 여분의 고통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라서,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것들이 어쩔 수 없이 당연해서 나는 괴로워졌다. 다행히도 그런 괴로움의 끝에는 홀가분함이 있는 것 같다. 있어야만 한다. 홀가분하지 않으면 미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홀가분함은 용서가 아니며 용서일 수도 없는 것이다.<br/><br/> p.172 〈빛 속에〉 노트복과 월패드의 희미한 표시등이, 창 밖으로 겹겹이 쌓인 건물의 조명들이, 거기에 웅크려 있을 누군가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은주에게로 몰려들었다. 그녀는 어떤 것도 놓치지 않도록 눈을 감았다. 밝고 환한 빛줄기가, 소름 끼치도록 선득한 빛이 묵시록의 첫 장면처럼 그녀의 안에 펼쳐졌다. 은주는 잠시 빛으로 충만했다.<br/><br/><br/> 그래서일까. 여섯 편의 이야기들에서 전작들에 비해 어떤 '인간성'에 한발짝 가까워진 면모가 언뜻 내비칠 때마다 말 못할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 이 구덩이에서 영원히 아늑하기로 했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만년고시반에서 혼자만 합격한 N수생을 보는 게 이런 느낌일까. 동시에 찬란하고 신기해 눈을 뗄 수 없었다. 낯선 빛에 오글오글 모여드는 생물들처럼. 너무 좋아 첫 수록작부터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다.<br/><br/> 이쯤해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이 작가가 불현듯 인간 너머의 차원을 깨우쳤다고 벌떡 외쳐버릴까 진심으로 우려했다. 그러면서도 많은 이들이 믿어 의심치 않듯 세계를 창조하고 법칙을 틀어쥔 신이 있다면, 그 신의 변덕과 권태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영영 이해 불가능한 전능에 순종한다는 마음이 대체 무엇일지 두려워졌고, 이내 황홀경이 이런 걸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 있다면, 말도 못하게 변덕스럽고 또 파탄난 자이기를.<br/><br/> p.147 〈어떤 구원도 충분하지 않다〉 기적은 이 시대에 너무나도 흔하고, 우리는 너무 많은 빛을 알고 있으며, 열화상 카메라조차 특별하지 않다. 따라서 어떤 구원도 충분하지 않다. 나는 그 사실에 새삼스러운 지겨움을 느꼈다.<br/><br/> p.249 〈존재의 대연쇄〉 내 문제의식은 이거였다: (…)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의 일을 인간이 전적으로 도맡는 것과 하느님께서 의도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중에서 어떤 쪽의 죄가 더 큰가? 우리의 권한은 아닐지라도 하느님 께서 의도한 바를 온전히 행하는 게 나은가, 아니면 기존의 의도를 어겨서라도 월권의 영역을 축소하는 게 나은가? 또한 적극적인 월권으로 인해 발생한 고통과 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br/><br/><br/> 오랜 시간 고민해왔다. 우리는 무엇인가. 세계는 어떻게 부스러지고 무너질 것인가. 어느 시인이 말했듯 쿵 소리가 아닌 조용한 흐느낌일 것인가, 아비규환의 적응형일 것인가, 천천히 삶기는 개구리마냥 어리둥절한 물음표와 말줄임표의 연속일 것인가. 그 세계에 아주 잠시나마 찬란한 순간이 있다면, 과연 무엇이겠는가. 이 작가 또한 여전히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br/><br/> 어떤 의미로든 답인지 아닌지 긴가민가 싶은 무언가에 슬쩍 발을 들여놓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또한. 한계 없이 확장하는 절망에서 따끔한 아픔, 처절한 고통을 본다. 존재의 감각, 최초에 한없이 가까운 증거를. 그렇게 여섯 절망 앞에 선 채 나름의 균열을 더듬는다. 뼈와 사고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람에 묻어나는 희미한 징조를 붙든다. 무지 있으라. 시원이자 종말이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모든 엇-나감이 현실에 있으라. 물음, 있으라.<br/><br/> p.73 〈사랑하는 신의 생일〉  그 아픔이란, 윤리도 원칙도 없이 의무가 되는 것. 어쩌지 못할 상황을 어떻게든 현실로 이끄는 것. 역할과 상황과 거리를 뛰어넘어 누군가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는 것. 그 누군가가 나의 삶을 뒤집어놓도록 허락하는 것. 그럼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산산이 잃어버리고 다시 만드는 것. 그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므로 철저히 저렴하고 이기적인 것. <br/><br/> p.170 〈빛 속에〉 하지만 3에서 1을 빼면 2가 되고, 거기에서 또다시 1을 빼면 남는 건 다시 1뿐이라는 사실은 너무 당연해서 되풀이하는 것부터가 낭비처럼 느껴졌다. "아니야, 그건 낭비가 아니야. 그건 해야 하는 이야기인 거야. 당연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이야기인 거야." (…) 은주는 답할 말을 끝내 찾을 수 없었고, 경욱이 계단의 어둠 속에서 흔들리다가 사라질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56/79/cover150/k67213019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656793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자 봐, 여기 대체 누가 사람인지. - [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53271</link><pubDate>Wed, 24 Jun 2026 21: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5327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9247&TPaperId=1735327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81/25/coveroff/k692139247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9247&TPaperId=1735327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a><br/>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성해나 #인비인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br/><br/> 공포, 두렵고 무서움. 기담,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기담은 무서운 이야기인가? 이상야릇한 재미와 두렵고 무서운 마음은 무엇에 기인해 합하고 갈라지는가. 수많은 이견이 있겠으나, 일단은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두렵고 무섭고 이상야릇하고 재미난 '것'은 지와 무지의 흔들리는 경계에 있다고, 다르게 말하자면, 믿음과 믿을 수 없음에.<br/><br/> 어떤 경우에 이것들은 말할 수 없음, 정확히는 말해질 수 없음에 기인한다. 알고 있다, 혹은 존재한다, 보았고, 겪었다 혹은 겪도록 했다. 눈을 마주친 인간, 상대의 눈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혹은 바라봐진, 꿰뚫린 인간이 그것을 말할 수 있는가? 떳떳이 공표되어 살아가질 수 있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기서 오래된 생각을 불러오고자 한다. 많은 두려움, 말해질 수 없음은 죄 혹은 '뒤집힘'의 가능성에 있다고<br/><br/> p.22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세월이 지나 내 아들이 성장한 후에도 이 책상이 멀쩡히 보존된다면 아들에게 이것을 물려줄 것이다. (…) 아이가 커 가정을 이룬다면 그 자식에게도 전해지겠지. 역사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테지. 흠은 파내고 구실은 잘 덮으며. 그리고 언제까지고 내게는, 아니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br/><br/> p.43 〈인비인〉 몸을 숨기고, 숨을 죽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두더지가 그러듯 그것은 코끝과 귓바퀴를 움직여 제 체취와 소리를 감지했고, 어디든 따라붙었습니다. 오야지.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저는 점점 죽어갔습니다. (…) 빠가! 저쪽으로 떨어지라고! 그러자 이렇게 답하더군요. 명 받들겠습니다. 오야지!<br/><br/><br/>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두렵고 이상한 것은 바깥에서 전해 들어온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우리' 안이 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기이한 것은 곧 낯선 것을 넘어 낯섦이고, 공포는 익숙해질지언정 절대로 친숙해질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바깥, 그들, 저편에서 이쪽, 안, 우리에게로 침투해올 기회를 노린다. 그 존재를 인식 너머로 밀어내거나, 어떤 믿음, 나의 경우만은 다르리라는 알량하고 공고한 믿음 없이는 일상을 안위할 수 없는  나약한 동물인 탓인지도 모르겠다.<br/><br/>곁가지로 나아가, 인간과 도넛은 위상적으로 같다 하지 않는가? 뒤집어 까도 인간은 인간, 도넛은 도넛. 도넛은 인간, 인간은 도넛. 자, 여기서 문제. 안팎이 뒤집어진 인간은 무엇일까요? 그 순간 우레같은 깨달음이 들려온다면, 축하한다. 당신 또한 뒤집어진 존재입니다.<br/><br/> p.110 〈매일〉 굴곡도 없고 위험 부담도 적으며 노출도가 낮은 삶. 누군가의 일생을 낙찰받으러 온 사람이 원하는 건 그런 삶이라고 34번은 설명한다. (...) 보통은 인생에 곡절이 너무 많아서 오는데, 인생이 너무 지루해서 오는 사람도 있대요.<br/><br/> p.246 〈#유령〉 이제 0에겐 그럴 힘도, 기대도 없었다.뉴로비전 패치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1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며 0은 패치를 뜯었다. 적막한 집 안에 단조로운 파열음이 들렸고, 1이 입을 뗐다.<br/><br/><br/> 내-면을 드러낸. 드러나진 안-속은 마르고 부패해 죽어간다. 박박 닦아 새로운 겉으로 만들지 않는 한. 어째서인가? 이미 부패해있기 때문이다. 주저하고 뭉개는 사이 썩어문드러졌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알맹이를 드러낸 겉은 금세 죽습니다. 겉은 알맹이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br/><br/>어떤 경우에, 울음과, 분노, 죄과는 현실을 초월하거나 미끄러져 떨어져나간, 소외된 형태로 다가오지 않나. 향기와 악취가 뒤섞인 벚나무 책상, 형태 잃은 육괴. 목숨보다 중한 것, 명예, 자존심, 나의 존재를 세계에 단단히 결속하는 '연결'에 대한 믿음. 그렇게 죄, 흠, 비밀은 스며드는 음각이다. 절망이 그러하듯이.<br/><br/> p.79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결연했고,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그게 부끄러웠다. 그들의 비슷한 외양이, 깨끗한 두루마기와 수치를 모르는 태도가 견딜 수 없었다.<br/><br/> p.186 〈윤회 (당한) 자들〉 감독님, 감독님은 소속이 어디예요? (...) 모르겠죠? 그런데 사람들은 매번 물어보잖아요. 소속이 어디냐? 학교는 어디 나왔냐? 직장은 다니냐? 소속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근데 속해보니까 그래요. 찐따들이어도요, 모이면 단단해져요. 그리고 되게 웃긴 게 그 안에 있으면요. 나도 조금 쓸모 있어지는 것 같아요.<br/><br/><br/> 단 한 명이라도 인간됨을 지향한다 믿어지는 한 승자의 기록이라느니, 본성이 어떻다느니, 현실이니 실용이니 면피는 어떤 식으로든 두려움의 형태로 돌아와 아가리를 벌려 덤벼들 것을 믿는다. 인간의 가능성은 상상에 있다 믿는다. 타인의 눈에서 나의 삶을 떠올릴 수 있는 존재이므로. 수많은 폭력이 타자를 비인간의 지위에서 몰아내려 그토록 애써온 이유. <br/><br/> 그런 이유로 오늘도 이렇게 곁가지를 넘어 숲으로 나아간 끝에 마주친 얼굴이 몹시도 낯설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를. 이상야릇한 감각이 닫힌 문을 열어젖히기를. 깊숙이 파묻고 통째로 불태운대도, 꺽, 넘어가는 숨에 수치와 죄책의 두려움이 스미기를.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 날이 이어지기를. 슬퍼하기를. 들척지근한 수치와 도피의 냄새에 코를 박고 끝의 끝까지 도망쳐 처음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요. 기다릴게요.<br/><br/> p.229 〈아미고〉 그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기계적으로 장비를 세팅하고 점검한다.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던 촬영기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오토 모드로 작동하는 카메라로 대체된다. 주위를 둘러보다 나는 생각한다. 이곳엔 인간이 몇이나 될까.<br/><br/> p.301 〈고독〉 먹이 냄새가 밴 자리를 서성이는 짐승처럼 이익도 그것과의 라포르에 순치되어 지난 사나흘간 탕전실 걸쇠를 풀지 말지 몇 번이고 고민했었다. 연기가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익은 머뭇대다 걸쇠가 단단히 걸렸는지 확인한 뒤, 나직이 읊조렸다. 그래도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됐지.<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81/25/cover150/k69213924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812549</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읽기, 자아라는 단단한 세계에 빛이 드는 길을 내는 것. 당신의 언어를 나의 세계에 뻗어주겠습니까. - [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43515</link><pubDate>Fri, 19 Jun 2026 13: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4351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9844&TPaperId=1734351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44/77/coveroff/k90213984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9844&TPaperId=1734351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a><br/>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신유진 #나를균열내기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br/><br/> 줄곧 '읽는 사람'으로 살아오며 수없이 맞닥뜨린(이라기보단 시도때도 없이 처해졌던) 물음 중 독보적인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왜 읽는가', 그리고, '읽기는 나를 무엇으로 만드는가' 일 것이다. 한때는 이 물음에, 완전한 이해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모든 것을 관찰하고, 바닥까지 파헤쳐 내것으로 만들고 싶었기에, 삼켜버리고 싶었으므로 읽었다. 완전해지고 싶어서, 공백과 균열을 메워 완벽에 닿기 위해.<br/><br/> 읽을수록, 채울수록 더 많은 '모름'을 보았다. 그럼에도 탐욕하기를 멈출 수 없었다. 이것은 읽기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문득, 멈춰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본능이 아니었을까. 위험만큼 존재를 선명하게 하는 것은 없으니까(21)."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의 세계를 안전하고 공고히 하는 읽기가 아니라 존재의 밑바닥을 흔들고 높고 깊은 벽을 부숴 그 너머의 타자를, 절대적인 낯섦을, 존재한 적 없는 선-존재를 보게 하는 읽기야말로 나의 존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고.<br/><br/> p.7 〈프롤로그: H로 시작하기〉 책 속에 있는 그들과 책 너머에 잇는 이들과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나는 '우리'라는 주어를 망설임 없이 쓴다. 우리는 진실을 향해 한 칸씩 내려가는 사람들. 끝없이 내려가 저 밑바닥에 닿아 마침내 진실을 둘러싼 막을 마주한 사람들. 자기 안에 가장 날카롭고 매서운 무언가로 그 막을 부수려는 사람들. 우리들, 나는 내가 통과한 책들을 통해서만 나의 '우리'를 만난다. 책 속에 그리고 책 너머의 당신들을.<br/><br/> p.89 〈다니엘 페나크〉 인간은 무엇보다 몸을 가진 존재다. 우리는 마음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것도 없다. (...) 어쩌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몸의 언어를 해독하는 일이 아닐까.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말했다. 인간은 세계를 생각으로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사는 존재라고.<br/><br/><br/> 어느 정도는, 위험해지려고, 더 모르고, 낯설어지고, 실패하려고 읽는다고. 이상적인 전능은 곧 무능이다. 조금의 모자람도 돌이킬 수 없는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한 완전-세계는 곧 아무것도 태어날 수 없고, 변할 수 없으며, 어디로도 확장되고 이동하고 파고들 수 없는 고립이다. 나를 균열낸다. 쓰기는 나를 배신한다. 말과 글은 필연히 미끄러지고 '본질'에 명중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빗나감이고, 철회-됨이자, 뒤처짐일 것이다. '나의 언어'로부터 완전히 내쳐진 적은 없다 하더라도.<br/><br/> 이 빈 틈, 한계, 균열, 빗나갈 겨냥과 주소 잃은 서신이다. 쓸모랄지, 가치랄지, 문학에 일말의 증명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면, 이 불완전함이다. 그것은 필연히 인간성의 문제로 직결된다. 한강은 물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야기가 사람을 구할 수 있는가. 사람이 이야기가 된 장소, 사람, 시간을 다시 존재하게 할 수 있는가. 『소년이 온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 있고 배가 고파오는, 허기를 느끼고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그렇게 먹는다는 것엔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고(85).<br/><br/> p.67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를 둘러싸던 맥락이 사라질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구성하는 모든 근거가 사라진 후에도 '나'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 망명자는 그런 확신을 갖지 못한다. 말은 언제나 늦고, 감정은 반토막이 난 채 전달되기 때문이다. 말할 수 있는 만큼만 존재한다면, 말로 하지 못해 사라져버린 일부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br/><br/> p.117 〈밀란 쿤데라〉 "매일 개연성 없는 소설 같은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이 세상에서 소설이 과연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 소설은 그저 모든 판단과 결론을 미뤄둘 수 있는 유예의 장소를 허락할 뿐이다. 그곳에서는 존재에 대한 실험을 감행해도 누구도 다치지 않고, 진실이나 진리의 엄격한 잣대에 주눅 들지 않고 삶의 하찮음을 말할 수 있다. 의미 없는 것들의 의미를 말하는 일. 소설가는 내게 소설의 쓸모는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br/><br/><br/> 이에 세상은 다정스레 말한다.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하라'고(97). 그렇다. 읽기는, 쓰기는 언제나 현실에 조금 뒤처지고 벗어나, 적어도 그 당시에 살아 있는 몸과 정신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무너지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면, 그것을 말과 글로 남겨 전할 수 있다면, 적어도 '목격한 일'에 파괴되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몸이고, 정신이고, 이유이다.<br/><br/>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죽은 자가 갖지 못한 존엄과 특권이 아니라 오로지 책무와 우연, 생존 그 자체와 증언일 것이다. 『소년이 온다』에서 말로, 기억으로, 몸짓과 문장으로 전해지는, 깨지기 쉬운 무언가처럼. 무엇이지 않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기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114)".<br/><br/> p.100 〈가엘 파유〉 "소설을 쓴다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가엘 파유의 말이다. 소설이 사라진 장소, 사라진 사람, 사라진 시간을 다시 존재하게 할 수 있을까.<br/><br/> p.151 〈카멜 다우드〉 어떤 죽음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고, 이야기는 고통을 대신 설명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애초에 문학의 몫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은 질문할 뿐이다. 설명되지 않은 고통과 폭력, 이해되지 않는 죽음이 너무 쉽게 사라지지 않도록, 신과 예술, 그 무엇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를 오롯이 인간이 해결할 몫으로 남겨두기 위해서.<br/><br/><br/> 어쩌면 그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살아가기 위해 다시-쓰고 토해내어야만 하는 글이,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학이, 쓰기가, 읽기가 고발과 목격의 반복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문학을 도구에 한정짓는 것만큼 문학-하는 존재의 본성에 대한 오독-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읽기와 쓰기 모두 지금 여기의 나에서 조금 떨어진 혹은 떨어져 보려는 태도다. 듣기와 다르지 않다.<br/><br/> 한 인간이 세상에 머무는 방식이 곧 문학이라면, 읽기와 쓰기는 그를 바라보려는 시도이자 방식이 아니겠는가. 읽기와 쓰기, 듣기와 말하기의 혼란한 뒤섞임은 결국 이 말을 하기위함이었다. 읽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라고, 그것이 곧 삶이자 이유라고. 해석될 수 없는 고통과흔적을 켜켜이 쌓아 파괴하고 또 공존하기 위함이라고. 이제는 물을 수 있다. 무엇이 당신을 균열-하겠습니까. 당신의 언어를 나의 세계에 뻗어주겠습니까.<br/><br/> p.166 〈조르주 페렉〉 '산다는 것은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삶은 임시적 정착과 이동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동하는 모든 걸음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누군가의 기억이고, 그 기억이 저장된 공간은 존재의 시간이 쌓이는 장소가 된다. 시간이 삶의 다른 이름이라면, 문학은 한 인간이 세상 속에 머무는 방식, 즉 거주의 예술인 셈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44/77/cover150/k90213984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447729</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보바리즘, 관능과 광기, 통속과 본성 사이에서. - [마담 보바리 - 지방 풍속]</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37021</link><pubDate>Mon, 15 Jun 2026 22: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3702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2998&TPaperId=173370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69/31/coveroff/893291299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2998&TPaperId=1733702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마담 보바리 - 지방 풍속</a><br/>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용은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05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열린책들<br/><br/> 이 작품이 이토록 막막하고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연코, 이들의 절망에 대단한 비극적 지점이랄 것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숨막히게, 끝을 알 수 없이, 어쩌면 영영 변하지 않은 채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평범하고 초라해빠진 매일들이 늘어서있다. 별처럼 빛나고 우아하게 흩날리는 이상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한데 도무지 닿을 수 없다.<br/><br/> 아등바등할 것도 없고, 달라질 것도 없다. 누군가 차라리 연극적으로라도 나쁘면 나을 일이다. 밍밍하고 쿰쿰한, 낡아빠지고 칙칙한, 눅눅하게 사방을 감싼 일상. 어떤 순간에는 제법 즐거웠다. 또 어떤 날에는 나름 애도 썼고, 빛나는 기억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일상의 냄새에 묻혀 빛바랜 과거,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의 실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절망이 되었을 뿐.<br/><br/> p.43 그렇게 그는 순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욕망의 대담함이 자신이 선택한 처신의 비굴함에 저항했고, 그녀를 만나는 것을 금지당한 대신 그녀를 사랑할 권리를 얻은 것이라는 일종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위선을 당당하게 받아들였다.<br/><br/> p.129 이런 비참함이 계속되려는 것인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인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다른 어느 여자들보다 못한 것이 없었다! (…) 그녀는 하느님의 불공평함을 원망하며, 벽에 머리를 기대고 울었다. 떠들썩한 생활, 가면무도회의 밤들,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그러나 그것이 틀림없이 가져다줄 방자한 쾌락과 온갖 격정을 선망했다.<br/><br/><br/> 기실 '허영 넘치는 여성의 파멸'과 그 곁의 성실한 남성(으레 수수한 남편이기 마련인!)의 슬픔이라는 주제는 딱히 낯설 것이 없다. 그럼에도, 물론 '보바리즘'이라는 진부한 해괴를 탄생시키긴 했지만, 이 작품이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개인으로서의 정체성, 욕망과 현실이 충돌하고 괴리되는 데서 자라나는 절망감을 지독히도 사실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리라. 누구라도 '이것은 절대로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단언할 수 없을 만큼.<br/><br/> 엠마를 보라. 그의 '자기파괴'가 이토록 서럽고 막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도덕적으로는 얼마든지, 쉽게 단죄할 수 있겠으나 내도록 그 심경을 들여다보고 그려본 독자로 하여금 그렇게 하기를 주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가 선망한 화려한 생활과 격정 넘치는 사랑은, 어쩌면, 온갖 예술과 근대의 환상이 모두의 것, 자연스럽고 당연한 권리이자 인생의 꽃인 양 그려온 것이 아니던가. 그를 동경하고 갖지 못해 좌절하는 인간에게, 그 마음이, 대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br/><br/> p.71 결혼 전에는, 그녀는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사랑에 응당 따라야 할 행복이 오지 않으니, 잘못 생각한 것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엠마는, 책에서는 그렇게도 아름답게 보였던, 희열, 정열, 도취 같은 말들이 실제 삶에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br/><br/> p.233 그녀는 남편에 대한 혐오를 연인을 향한 갈망으로, 활활 타오르는 증오를 새롭게 뜨거워지는 애정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폭풍은 휘몰아쳤고, 정념은 재가 되도록 타버렸기에, 그리고 아무런 구원도 오지 않고, 해는 조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온 사방이 캄캄한 밤이었고, 그녀는 온몸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무서운 한기 속에서 길을 잃은 채 떨고 있었다.<br/><br/><br/> 이 현재-아님에 대한 갈망은 비단 엠마 보바리만의 고통이 아니다. 이 작품을 가득 메우는 것은 권태와 무력, 충동과 분노인 동시에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욕망과 구역감이다. 경련이고, 죽음이고, 충돌이다. 독자는 묻게 된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지. 그리곤 깨닫는 것이다. 당시 처벌과 검열의 이유를. 당대 '도덕적 판단'에 따라 검열된 문장들이 복원된 완전판의 모습은 그간의 '걸작 고전'에 걸맞게 다듬어 선보여졌던 내용과는 퍽 차이가 있었다.<br/><br/>한층 관능적이었고, 소용돌이치는 갈망의 매혹이 생생하게 그려진, 놀랍도록 섬세하고 정교한 비극, 광기, 좌절. 지독히도 아름답고 허무한 순간마다 독자는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단정하고 비극적인 기존의 『보바리 부인』을 엄중히 꾸짖던 이들은 언젠가의 고매한 의식 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풍속과 교양의 꺼풀을 벗겨낸 곳에서 마주하는 통속과 모순을. 그렇게 보바리-즘을 새로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br/><br/> p.584 달빛처럼 하얀 새틴 로브 위로 물결무늬가 어른거리며 떨렸다. 엠마는 그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샤를르에게 그녀는, 몸 밖으로 퍼져 나와, 주위 사물들 사이로, 침묵 속으로, 밤 속으로, 지나가는 바람 속으로, 피어오르는 습기 찬 향내 속으로 힙쓸리며 형체 없이 뒤섞여 스러져 가는 것 같았다.<br/><br/> p.610 ｢그래요, 이제 당신을 더는 원망하지 않아요!｣ 심지어 그는 엄청난 말, 단 한 번도 입에 담아 본 적 없는, 한마디를 덧붙이기까지 했다. ｢이게 운명 탓이지요!｣ 이 운명을 이끈 장본인 로돌프는, 그가 이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치고 어지간히도 너그럽고,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좀 비루하다고 생각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69/31/cover150/893291299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69319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초현실과 초-현실의 틈새에서, 응답하라 게이머여. - [게임으로 철학하기 - 재미, 예술성, 장르 등 비디오 게임을 둘러싼 수많은 질문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25614</link><pubDate>Tue, 09 Jun 2026 18: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2561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4913&TPaperId=1732561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7/40/coveroff/89323249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4913&TPaperId=1732561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게임으로 철학하기 - 재미, 예술성, 장르 등 비디오 게임을 둘러싼 수많은 질문들</a><br/>주자안 지음, 정세경 옮김 / 현암사 / 2026년 05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현암사<br/><br/><br/> 돌이켜보면, '게임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썩 적절한 응답자였던 적이 없는 듯하다. 게임, 개중에서도 주로 화면으로 송출되는 비디오 게임은 내 세대에게 퍽 다양한 의미값을 갖지 않던가. 방종의 상징과도 같은 '전자 오락'에서 평범한 취미로 인정받기까지 과장 조금 보태 격동의 시기를 거쳤으니 말이다. 오늘날 게임은 아동부터 성인까지, 후기 중장년층에서까지도 낯설지 않은 취미가 되었고, 그만큼 커뮤니티도 전세계적으로 탄탄하게 형성되어 있다.<br/><br/> 게임 커뮤니티는 전세계적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유저 피드백이 극도로 활발한 분야이다. 이에 따라, 당연하게도, 현실과 잦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그 중 하나가 다양성과 평등에 대한 분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에 저자가 제시하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명백한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는 요소와 관건들을 짚어나가는 독자는 필연히 경제, 체제, 커뮤니티, 인간 존재를 다루는 현실의 최전선에 서게 될 것이다. 다시 돌아와, 커뮤니티 말이다.<br/><br/> p.22 가짜 사물의 나쁜 점은 매우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를 선택할 수 있음에도 가짜를 원하는 이유는 뭘까? 그 답은 때로 가짜가 진짜를 경험할 수 있게 하며, 또 때로는 가짜가 진짜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 데일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조종한 캐릭터는 당연히 가짜였다. 하지만 그는 게임 속에서 '여성으로 여겨지는' 경험을 했다. 이는 진짜이고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br/><br/> p.112 가장 좋은 옵션만 눈에 띄고 다른 옵션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경우, 플레이어가 내릴 결정의 다양성에 문제가 생겨 위협적인 수준으로 게임의 재미가 떨어질 수도 있다. 이럴 때 플레이어들은 이 게임의 '밸런스에 문제가 있다'며 불평을 한다.<br/><br/><br/> 많은 분야에서 그러하듯 게임 유저 커뮤니티 또한 남성, 특히 백인 유성애-헤테로 남성을 기본 타겟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크며, 이들의 '재미'가 '기본값이 아닌 존재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추방하려는 경향은 낯설지 않다. 또한 유저들이 으레 내세우곤 하는 '재미와 휴식의 자유 확보'가 과연 그들과 게임이 놓인 현실, 유저와 제작자가 살아가야 하는 세계와 진정으로 '분리'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연구자들이 수차례 지적해온 바 있다.<br/><br/> 게임이 종합 예술이자 존중될 수 있는 취미의 영역으로 인정받기 위해 탈정치를 주장해온 움직임이, 역설적으로 가장 개인적이고 탈정치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공적 영역과 정치적 주제에 속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나게 한 셈이다. 혹자는 이에 또다시 반발할지 모른다. 앞서 말한 역설처럼 왜 '사적인 재미'까지도 '눈치를 봐야'하는지 일면 억울함을 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묻지 않고는 게임 산업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 또한 논해질 수 없다.<br/><br/> p.161 '시간 낭비를 하면 안 된다' 라는 관념이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실패의 일환이며,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무의미하게 헛돌고 있는 사회에 일조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좀 더 객관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비디오 게임도 이런 헛된 공전의 일부가 될 잠재력이 있음을 이해한다면 자신이 무엇을 위해 게임을 하는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br/><br/> p.356 다만 '동등한 토론 공간을 만드는 일'에 대해 말하자면 현재의 게이머 커뮤니티는 수렁에 빠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 (…) 차별적이고 성적 대상화를 하는 비디오 게임을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 공간에서 차별과 혐오 발언에 대해 강제력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그곳이 회사든 학교든 아니면 인터넷 커뮤니티든 동등한 토론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br/><br/><br/> 그러나 결국 그 누구도 의문과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게임-체계의 일원이 그저 '보통'의 일부라는 주장의 가장 든든한 뒷받침일지도 모른다. 게임이 숙고와 철학적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게임의 내용과 구성에 다양한 의문이 제기하고 그것이 현실의 구조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따지고 탐색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게임 향유자와 생산 및 운영자, 그에 관계되는 이들의 정체성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서 목소리를 낼 근거가 되는지에 맞닿는 가능성일 것이다.<br/><br/> 요구할 수 있음, 묻고 답할 수 있음. 이 허구가 현실과 완전히 별개로서의 완전무결한 존재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목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주체적인 향유자로서의 핵심이므로.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주장은 기실 '재미' 바깥으로 밀어내는 적극적인 선택과 외면의 결과일테니 말이다. 그렇게 게임은 철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언젠가 게임철학이라는 분야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묻고, 맞서고, 응전하고, 나아가라, 게이머들이여.<br/><br/> p.392 우리는 평소 'PC를 탓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이해하기 쉬우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평가하기 십상이다. 그 때문에 어떤 작품에서 아주 작은 PC의 단서만 발견해도 '또 PC네'라고 댓글을 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평가 방식은 당신에게 좋을 것이 없다. (…) 오히려 당신은 작품을 감상할 줄 아는 행복한 사람이나 작품을 제대로 리뷰할 줄 아는 소통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닌, PC 냄새만 맡으면 재채기를 하며 분노를 쏟아 내는 사람이 될 뿐이다.<br/><br/> p.400 만약 스스로 정치로부터 방해를 받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현재 정치 환경의 기득권자라는 뜻일 것이다. (…) 예술 장르의 하나로서 비디오 게임도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 같은 주류 계층이 비디오 게임 속 다양성 요소에 위화감과 익숙하게 않음을 느낄 때 비디오 게임은 오히려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7/40/cover150/89323249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674082</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이름의 빈 자리에, 불릴 수 없는, 불리기를 거부한, 나를 부르라 요청하는 자리에 깃드는 응답 - [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20949</link><pubDate>Sun, 07 Jun 2026 00: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2094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9096&TPaperId=1732094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11/12/coveroff/k67213909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9096&TPaperId=1732094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a><br/>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br/> 이름은 의미를 담는다. 이름은 인간이 무언가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의미로 가득한 말이다. 이름은 대상 없이는 붙여지지 않는다. 불러질 대상이 없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이든, 부재로 떠나갔든, 무엇으로 빗대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상대에게, 그리고 호명하는 이 스스로에게 존재의 존재-함을 확인시키는 일이다. 그의 세계에 '이름'의 존재를 명확히 자리하게 만드는 일이다.<br/><br/> 그렇다면 만일, 이름이 그 주인에게서 뜯겨나갔다면, 불릴 사람이 이름을 두고 떠나버렸다면, 갈 곳 잃은 부름만이 여기저기 정처없이 나돌아다닌다면, 존재하되 이름으로 불릴 일이 없다면, 눈 앞에 멀쩡히 있는데도 이름이 없으므로 부를 수도, 지칭할 수도 없다면. 이름의 빈자리에 무엇이 놓이는가. 이름과 존재의 틈 사이에는 무엇이 깃드는가. 또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이름이되 이름이 아닌 것, 그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오롯한 자기이기를 부정당하는 사람들에게 이름이란 무엇인가.<br/><br/> p.40 〈프랑켄슈타인〉 그는 창조주라면 주어야 할 애정, 관심과 사랑부터 먹을 것과 보호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해줘야 하는 첫 번째 일, 가장 기본이 되는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크리처가 괴물이 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잖은가.<br/><br/> p.54 〈시녀이야기〉 세상 만물에 이름을 짓고 이름을 붙여주고 부르고 불러주는 행위란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의미 부여이자 애정 표현이다. 이름을 지어 호명하고 지칭하면서 관계가 결속된다. 마음의 밀도를 보여줄 수 있는 고도의 정성이 깃든 의례이기도 하다.<br/><br/><br/> 그들이 진짜 이름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그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빈 자리에는 무엇이 고이고, 흐르며, 스쳐지나갈까. 저자는 영화와 소설, 드라마를 오가며 창작물 속 이름 없는 존재의 형상을 불러낸다. 그 빈 자리, 이름을 뺏겼고 이름의 기회를 박탈당했기에 부재로 취급되는 존재들과 이름에서 벗어나고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이들에게서 내가 비춰본 것은 이름 대신 '무언가'로 붙박여버린 이들의 모습이었다. 그 이름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br/><br/> 다시금 이름의 의미를 고민한다. 불리지 못할 이름을, 답할 이 없는 이름을 떠올리며 곱씹는 그 의미는 필경 한 존재를 세상에 자리하게 하는 힘이자 존재하도록 마련된 자리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이름,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이… 그것들은 모두 한 존재를 그의 세계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것과 같지 않은가. 이 무슨 처참이란 말인가.<br/><br/> p.168 〈그 여자는 화가 난다〉 그녀가 어렵사리 친부모를 이해할 수는 있겠으나 '춘복'이나 '마야 리'가 엄마를 아빠를 언니를 마침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리운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거라 생각한다. (…) 책장을 덮으며 그녀에게 들릴 리 없는 한마디를 포옹처럼 보냈다. 춘복이를 버려요. 한국 이름을 기억하지 말아요. 그래야 당신이 살 수 있어요.<br/><br/> p.247 〈허공에의 질주〉 아서도 '나의 인생'을 찾고 싶은 것이다. 자꾸만 변하고 바뀌는 이름과 정체성에서 지쳐버린 것이다. 결국 살려고, 살아가려고 여러 번이나 죽은 남의 이름을 주워 달아 붙이고 살았지만, 원래의 자기 이름을 잊지 않은 것이다. 부르고 싶은 것이다. 대성통곡을 하면서, 주정처럼 난장을 치면서도 진짜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것이다.<br/><br/><br/> 이는 곧 진짜 이름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나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감각, 이름이 곧 족쇄가 되는 삶이 있다. 모멸을, 맞지 않음을 이름이라 여기기를 강요받는 이들이 있다. 같은 세상에서 제각기의 투쟁에 존재 자체를 걸고 맞서는 이들을 생각한다. 빼앗길 수 없는 이름, 호명-됨의 의의를 생각한다.<br/><br/> 온당한 이름-됨을 고민하는 지금, 몹시도 사랑해 마지않는 구절의 의미를 깨닫는다. 선언이자 정의인 그 말을. 내가 여기, '이 자'로 있노라, 나를 이렇게 부르라. 당신의 세계에 이로써 거하겠다는 말, 무엇으로도 부서질 수 없는 '것'의 상징일지 모른다. 이 무겁고 찬란하며 뜨거운 의미를 누군가는이렇게 말했다. Call me Ismael. 세계는 여기서 시작된다.<br/><br/> p.67 〈비바리움〉 마틴은 마틴을 죽이고 마틴이 되어 똑같은 삶을 살아 영생을 누리지만 젬마와 톰은 미로에 같혀 살았어도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떠나는 길을 눈물로 배웅했다. 검은 봉투에 이름 없이 담겨졌어도 젬마와 톰이라는 이름은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았다.<br/><br/> p.250 〈허공에의 질주〉 "내 이름은 대니, 피아노에 목숨 건 녀석이지." (...) 처음으로 제대로, 잘 버려진 것이다. 자신의 진짜 이름과 그 이름을 불러줄 사랑하는 사람과 진짜 피아노와 함께. 대니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인생과 함께.<br/><br/><br/>#권혁란 #이름의빈자리에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11/12/cover150/k67213909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111242</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 어떤 성원도 표밭이 아니며, 우리 모두는 주권자로 행위할 자격과 의무가 있다. - [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10375</link><pubDate>Mon, 01 Jun 2026 00: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1037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92139879&TPaperId=1731037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80/45/coveroff/k9921398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92139879&TPaperId=1731037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a><br/>이창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br/> 어김없이 돌아온 선거철, 곳곳에 익숙한 수사와 깊숙이 숙이는 미소들이 지겹게도 보인다. 이 구태의 정점이자 꽃이라 할만한 것은 이번에도 벽보와 현수막에 큼지막한 글씨로 박힌 각종 선언과 치적행사일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시민의 발이 되겠습니다. 시민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공약 이행이 어떻고, 저떻고… 이에 시민들은 말한다. 뻥 치시네!<br/><br/> 진작 물었어야 했다. 숱하게 물어온 말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왜 정치인들의 것이 되었는가?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 어째서 만년 탁상공론에 허울대잔치가 되는가? 선거는 정말 주권행사의 장이 되고 있는가? 청장님, 시장님, 의원님, 각종 '님'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의탁하거나 넘겨주는가? 철마다 내세우는 각종 정책은 시민의 삶과 어떻게 유리되고, 그 결과 정책은 어떻게, 언제, 왜 실패하는가?<br/><br/> p.54 정책 의제는 단순히 '선택된 사회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주체, 곧 결정자가 우월적 힘을 바탕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구성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들이 특정 사안을 공식 의제로 설정하고 해결 과제로 선언할 때, 사회 문제는 비로소 정책 의제로서의 생명력을 얻는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리 뜨거운 여론과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어도 정책 주체가 이를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현상'으로 남을 뿐이다.<br/><br/> p.79 오늘날 국민은 정책의 결과만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는지 알고 싶어 하며,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정책의 시대는 저물었다. 국민과 함께 설계하고 검증하는 정책만이 살아남는 시대, '열린 정책 생태계'는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의 전략이다.<br/><br/><br/>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가장 중요하고 기본되는 자리에 국민이 주권자이자 권력의 원천임을 명시하고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상 양당제로 이분된 국가, 실제 삶과의 괴리가 커져만 가는 각종 정책들, 허울뿐인 성과발표와 바닥을 치는 정치 신뢰도까지. 저자가 말하듯 정책은 선택된 아젠다인 동시에 결정권자가 문제를 정의하고 구성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정책의 대상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 동시에 '결정권자'의 주의와 실천 의지가 개입된 결과라는 뜻이다.<br/><br/> 위기상황마다 발등에 불 떨어진듯 잠시 모였다 이내 심드렁한 냉소주의자로 흩어지는 상황이 반복되는 데에는 정당, 정치구조, 의사결정체와 시민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분야에 걸친 뿌리깊은 문제가 있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되찾았다 말할 수 없다. 설령 누군가 진짜 국민, 진짜 성원이라는 교묘한 호도로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전용한들 반박조차 쉽지 않을 뿐이다.<br/><br/> p.155 정당이 정책에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배경에 대해 장훈 중앙대 교수는 세 가지 구조적 원인을 짚는다. (…) 정당이 시민의 일상적인 요구와 삶의 현장에서 유리된 채 엘리트 중심의 정치 게임에 함몰되면서, 정책을 매개로 한 시민과의 접점을 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대통령과 관료 중심의 폐쇄적 정책 결정 구조'가 정당의 입지를 좁혔다. 국가의 주요 의사결정이 청와대와 경제 관료의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구조 속에서, 정당은 정책의 주도자가 아닌 사후 추인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br/><br/> p.201 과연 우리 사회의 싱크탱크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권력의 입맛에 맞춘 '답정너' 식 보고서를 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하지는 않았는가? 싱크탱크는 모름지기 당대의 모순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이념의 벽을 넘어 대안과 해법을 치열하게 논쟁하는 '사상의 용광로'이자 '정책의 산실'이어야 한다.<br/><br/><br/> 긴 겨울을 지난 이후, '권력의 추가 기운' 것이 확실해지자 거대양당과 선출직 출마자들 모두가 저마다 '빛의 혁명'을 찬사하고 포섭하려 안간힘이다. 정치권력이 인기몰이로 결정된 지 오래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저자가 반복해 말하듯 오늘날 정책이 현실성도, 정의도 잃은 채 이권놀음이 된 것은 결국 제도권의 정치와 정치의 언어, 그리고 그 필요성과 실질적 권력이 시민과 유리되었기 때문이다.<br/><br/> 이 말은 곧 정책결정권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권력을 독점코자 하는 자들이 시민에게서 거세하고 싶어하는 것 또한 시민의 정치참여와 정책관심도라는 뜻이기도 하다. 선거철이다. 우리는 지지를 호소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진정으로 정치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제야말로 정치를 주권자의 것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그 지난한 과정은 여전히 시급한 일로 우리 앞에 남아있다. 선거가 시작되었다. 정치는 끝나지 않는다. 서둘러야 할 때다.<br/><br/> p.24 정책 오작동의 핵심은 시민과의 '단절'에 있다. 투표를 마친 시민은 정작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그 빈자리를 특정 이익 집단의 논리나 관성적인 행정이 채우면서 정책은 생명력을 잃는다. 이러한 제도적 결함과 불통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투표함 너머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한다. 시민의 일상이 정책에 끊임없이 반영될 수 있는 열린 공론장을 마련하고, 단순한 다수결을 넘어 깊은 토론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숙의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이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br/><br/> p.357 시민이 스스로 학습하고 의견을 나누며 공동체의 미래를 직접 설계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넥스트 민주주의' 의 모습이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 결정해주는 시혜적 정치는 이제 끝났다. 이제 정치는 시민이 이끌고, 권력은 그 길을 닦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는 비로소 수사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의 것'이 될 수 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80/45/cover150/k99213987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804597</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케이팝 좋아하세요? 에궁 그렇다고 울지는 마시구… - [펑펑 - 나를 울리고 너를 배반하며 이룩되는 케이팝 이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04346</link><pubDate>Fri, 29 May 2026 18: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0434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12139973&TPaperId=1730434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01/89/coveroff/k91213997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12139973&TPaperId=1730434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펑펑 - 나를 울리고 너를 배반하며 이룩되는 케이팝 이야기</a><br/>복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5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br/> 아이돌 좋아하세요? 케이팝 좋아하세요? 소녀문화, 빠순이, 오빠부대… 내 가히 여자됨의 구렁텅이를 지나온 평생토록 시도했으나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케이팝, 개중에서도 아이돌 팬 흉내다. 왜 팬-되기가 아닌가, 하면, 말 그대로 흉내, 정상성 위장을 기도한 가장마저도 처참한 실패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케이팝(과 그 요소들)에 대한 사랑은 내 마음 한구석에서 내도록 이해 불가한 열정과 한데 뭉뚱그려진 선망 반 실패 반의 흔적으로 남아왔다<br/><br/>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지 않은가? 이러게나 소비자와 그 대상을 주권과 착취의 어드메로 뒤섞어놓는 산업이 없다. 개인의 존재 자체를 이미지화해 모든 요소를 상품으로 내거는 일 또한 역사상 유례 없는 일이 아니던가. 전제왕권기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놀라운 일이다. 분석과 조롱, 상징화와 납작 눌린 일반화의 양면을 오가는 케이팝, 그리고 그 팬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br/><br/>p.54 케이팝 팬들은 아이돌을 향해 사랑과 영원을 맹세하고 그 충만함을 즐기며 커뮤니티를 이룬다. 동시에 그들은 그 맹세 속에 애정, 질투, 집착, 광기에 이르는 갖가지 감정을 쏟아부은 뒤 그것을 멋대로 배합해 오직 자신만 이해하는 사랑의 법칙을 만든다. 최애가 혐오 발언을 일삼을 땐 적당히 타일러서 훈방 조치를 했다가도 연애 정황이 포착되는 순간 즉시 사형선고를 내려 버리는 독재자의 율법이다. 욕망을 억압하며 만든 환상이 가장 기괴한 형태의 사랑으로 변해버린 것이다.<br/><br/> p.57 케이팝은 사랑과 집착, 믿음과 맹신 사이를 줄타기하는 음악이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허공이니 우리는 늘 날카롭고 예민하다 (…) 상대를 소유하거나 파괴하는 탐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환상 뒤에 숨긴 내 질척이는 갈망과 웅크린 결핍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나 인간을 욕망한다면 그것을 더욱 세심히 돌봐야 한다. 거창한 말들로 관계를 정의하지 말고 우리가 모두 인간이라는 걸 자각해야 한다는 말이다.<br/><br/><br/> 수치심과 죄책감, 그럼에도 일상 전반에 뿌리내리는 사랑, 내 입장에서는 생판 모르는 남에 대한 그 피같고 살같은 사랑은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는 앞서 말한 그 여자됨의 구렁텅이를 지나오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어느정도 나의 일면을 지배하는 물음이다. 어느 정도냐면, 마음 같아선 붙잡아 가둬놓고 더 이상 나올 것도 없을 때까지 쥐어짜가며 물어보고 싶을 만큼.<br/><br/> 이 물음은 필연히 케이팝 산업이 무엇을 셀링하는지, 무엇에 기반하는지, 같은 이유로 어떤 이유로 사랑받고 확산되는지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여자아이 집단'에 온전히 소속된 적 없던 나의 두려움은 세계적 인기를 끄는 가사와 퀴어니스의 차용을 교묘히 파고드는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지지 기반으로 역전되지 않았는가? 그때의, 지금의 사람들은 누구를, 무엇을, 왜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 가히 사랑의 불나방.<br/><br/> p.110 여자임에도 여자를 흉내 내야 했던 순간들, 여자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틀린 여자'가 되었던 순간들이 자신이 '여자'임을 설명해야 하는 여자를 통해 해방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수치심과 나의 수치심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여장 여자'로서 그와 같은 수치심을 공유한다고 주장하며 그를 통해 정상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계책을 세운다. 세상 모든 걸 저 좋은 대로 끌어다 쓰는 '진짜 여자'만의 얄밉고 오만한 특성대로.<br/><br/> p.166 자두의 무대에서 엽기적인 것은 오직 하나. 그 거추장스러운 콘셉트를 두르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그의 엄청난 성량뿐이었다. (…) 맙소사. 자두는 엽기가 맞았다. 세상이 그를 엽기라 부른 것은 형광색 천 쪼가리를 두른 외형이 아닌 이 기운 때문이었겠구나. '상식적이지 않고' '거부감이 들고' '받아들이기 힘든' 그 모든 요건을 충족한 엽기, 아니 여자로서의 기운.<br/><br/><br/> 오해를 무릅쓰고 단언하자면, 케이팝 팬들은 어떤 식으로든 미친 자들이다. 광인이 아니고서야 그런 걸 그렇게 좋아할 리가 없다… 견고하게 합의된 비-정상에서 안착한 자들만이 그를 향유할 자격을 갖는다. 개중 경계가 흐려지는 자와 '일코' 얼굴을 완벽히 갈아끼우는 자로 나뉠 뿐… 이라고 하면 이제 나는 전방위 공격에 두들겨맞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무언가를 사랑하는 마음 치고 광적이지 않은 게 어디 있단 말인지.<br/><br/> 게다가 그 '판'이 온전히 관심과 열정에 뿌리에 둔 자본(혹은 그 역)이라면 더더욱. 사랑해서 미치고, 미친 사랑을 한다. 모욕과 수치를 열광과 자기이해로 역전하는 희한한 세계야말로 케이팝과 그 팬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백하자면, 첫 페이지부터 기가 쫙 빨려서 전심전력으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만일 내가 좋아하는 것, 예를 들면 책을 주제로 하는 이런 책이 나오면 절대 읽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공감성 수치와 고통을 직면할 재간이 없으므로.<br/><br/> p.78 혹은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아 다시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 사랑이 만든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곧 사랑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철저히 설계된 사랑의 볼모가 되어 자책과 회피를 반복하다 몇 번이고 무너지는 사람들. 그러나 광적이고, 자멸적이며, 폭력적일지라도 결코 가짜이지 않은 그들의 사랑.<br/><br/> p.217 수치심을 알고 품위를 지키는 건 반론의 여지 없이 그냥 좋은 일이다. 부끄러움을 알고 행동을 제어하는 건 인간다운 일이니까.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기에 수치심을 알고도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머물게 된다. 많은 사람이 '길티 플레저'라 이름 붙인 그 불쾌한 낮잠 같은 상황 말이다. 케이팝을 듣고, 케이팝을 좋아하는 건 바로 그런 상황 속에 제 발로 갇히는 일이다.<br/><br/><br/> 그리고 이 책을 덮으며 깨달은 두 가지가 있다. 책으로는 이만한 도파민을 뽑아내기가 책 팔아 부자되기만큼 어려울 것이며 만약 나온다면 안 읽을 재간 또한 없어 필연히 '길티'에 몸부림치며 슬픔의 OO파티를 벌이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뒤죽박죽 감상의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이 시대의 사랑과 수치, 폭력은 분리되지 않는 축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다.<br/><br/> 나 또한 어느 면에선가는 이 해괴망측하고 질척질척한 사랑에 허우적대고 있다는 말이다. 평생을 궁금해했던 어떤 '사랑'은 이런 형태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언젠가 보았던 말처럼, 사랑을 쪽팔리게 하는 OO들을 다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쩌겠는가. 사랑하는 자여, 두려워 말고 힘차게 전진하시라. 티켓값은 비싸고 영통은 짧습니다. 우는 건 끝나고 트위터에 움짤주접까지 다 올리고 하세요...<br/><br/> p.26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의 좌절을 살피는 그의 태도는 얼마나 성숙한가? 대상이 남기고 간 분노를 어루만지는 것까지가 사랑이라니. 케이팝이 무엇인지 묻는 말에 좆같지만 사랑한다는 말로 얼버무리곤 했던 나는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수치심, 죄책감, 두려움과 마주한 한 사람의 용기 앞에서 눈부신 모멸감을 느꼈다.<br/><br/> p.257 실제로 케이팝은 흑독한 아카데미 시스템을 제외하면 지금 한국 사회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으며, 이미 해외 시장이 조성된 산업이 한국을 닮아야 할 이유도 없다. (…) 지금 우리에게 케이팝은 '자원'이 아니라 우리가 묵인한 사회의 병폐와 우리도 몰랐던 사회의 매력을 다양한 각도로 투영해 볼 수 있는 프리즘이다. 이 프리즘 앞에 서서 다같이 머쓱하게 웃어보자. 그것은 '가짜'가 '진짜'가 되어버린 웃지 못할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제스처일 것이다.<br/><br/><br/><br/>#펑펑 #복길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01/89/cover150/k91213997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018971</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나이 묻는 사회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기 위해. - [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65418</link><pubDate>Fri, 08 May 2026 22: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6541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8162&TPaperId=1726541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9/84/coveroff/k69213816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8162&TPaperId=1726541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a><br/>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5월<br/></td></tr></table><br/>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듣고 말해본 적이 있을 말들이 있다. 싸가지 없는 놈, 나이도 어린 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노친네… 너무 쉽게 말해져 혐오라고 불리지도 않는 이 말들에는 나이라는 공통점이 도사리고 있다. '애새끼'도 모자라 '유충'에서부터 잼민이, 급식충, MZ, 아줌마, 영포티, 틀딱, 노친네까지, 우리 사회에서 멸시 어린 연령 집단으로 묶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br/><br/> 툭하면, 주로 저 마음 불편한 소리에 '갈라치기 하지 말라'며 예의 '준엄한 꾸짖음'이 횡행하는 시대에 누구보다도 서로를 촘촘하게 규정짓고 혐오한다. 나이보다는 개인적 속성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청년세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고하게 사회 전반을 구성하는 연령주의적 제도 및 인식은 필연히 개인과 사회 수준 모두에서 충돌하고 갈등한다.<br/><br/> p.9 연령차별주의는 가장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차별이면서 가장 잔혹한 거부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는 달리 연령차별주의 피해 당사자들은 차별에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이는 누구나 다 평등한 속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연령차별주의가 너무나 우리 의식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제도화된 관행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br/><br/> p.65 기존의 나이 멸칭이 지겨워지면 새로운 나이 멸칭을 만들어 특정 세대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행태, 계속해서 낙인찍을 나이대를 찾는 행태, 이제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나이대는 다 제각각의 멸칭을 갖게 되었다. 멸칭이 없는 나이대가 없을 지경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이 멸칭으로 조롱하는 사회, 지독한 연령주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br/><br/><br/> 언젠가 SNS 댓글에서 본 적이 있다. 임산부 우선석에 노인이 앉아 비켜주지 않았다는 토로에 달린 내용 중 "10년만 지나면 그런 노인네들이 다 없어져서 깨끗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나름의 '위로'가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나. 황당하고 참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혐오에 있어 개인의 문제와 사회구조의 문제가 이렇게나 뒤섞여 있구나, 하는 생각에 댓글창을 떠나지 못했다. 우리 시대의 초상은 배제와 구분에 다름아니다.<br/><br/> 어쩌면, 아니, 확실히, 한국사회의 키워드 중 하나는 조롱과 혐오일 것이다. 이 둘은 극단적인 타자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익히 알려져있듯 구분짓기는 혐오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혐오할 수 없다. 혐오 대상으로서의 용납할 수 없는 속성은 타집단, 그것도, 지금 현재의 기준으로서는 절대 내가 아닌 이들에게 전가되어야 하므로.<br/><br/> p.88 나이에 따른 혐오스러운 멸칭들이 각종 언론과 일상 대화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이는 '일상성'을 넘어서 '사회성'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 (...) 이제는 우리 사회가 언어를 통한 탈인간화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인식하고, 이를 줄이기 위한 대안적 표현을 학습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는 데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br/><br/> p.144 늘어난 평균수명으로 인해 현대사회에서 노년을 살아간다는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삶을 산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전의 어떤 세대도 지금의 노년 세대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오랫동안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의 고령층은 문화적 전위 의 역할을 떠맡아 새로운 노년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적 전위의 역할을 하거나 새로운 노년의 의미를 받아들이기에 우리 사회의 연령주의는 너무 막강하다.<br/><br/><br/> 우리 사회에서 나이는 단순히 살아온 햇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대되는 역할과 태도에서 벗어나기를 금지하는 강력한 규범이자 위계로 기능한다. 이것은 탈-규범적 전위를 요구하는 동시에 '감히' 전형을 벗어나는 이레귤러를 가혹하게 조롱하고 탄압하는 모순적 사회에서 이중구속으로 기능한다. 연령주의의 폐단은 개인의 삶에 그치지 않는다. 아젠다 선정에서 실질적 참정권까지, 정치-제도의 곳곳에 연령주의의 뿌리는 깊고도 촘촘하다.<br/><br/> 예의 청년정치를 표방하는 모 정치인을 떠올려보자. 무능과 도덕성은 차치하고라도, 청년유권자에 '우리'로 묶이려 시도하며 그 자신이 마치 아이콘인 것처럼 행세하는 전략이 왜 무시 못할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가 청년이라고 불릴 만큼, 사회초년생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정치기득권이 고령화 되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br/><br/> p.64 나이 멸칭은 특정한 개인들의 행태를 전체 나이대의 공통적인 특성처럼 확대 재생산한다. 우리 사회는 특정 나이대에 대한 틀에 박힌 이미지와 이들에게 기대하는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자꾸 특정 나이대 사람들에게 뭘 해야 한다고 규정을 내린다. 그 규정에 어긋나면 멸칭이 만들어지고, (...) 유행이 되어 빠르게 번지고 오프라인까지 선을 넘어 퍼져 나간다.<br/><br/> p.321 연령대마다 따라붙는 편견과 차별은 언제나 부정적인 모습만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맞이하게 될 인생의 여러 단계를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행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국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에 꼽히는 것도 이런 나이에 대한 차별이 한 측면을 담당하고 있다. 나이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전제가 해소될 때 우리는 생애주기별로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있다.<br/><br/><br/> '유권자의 목소리'는 평등하게 대표되지 않는다. 소구와 '표밭'이 따로 노니 아젠다는 자연히 과시행정에 급급해진다. 고령화와 동시에 경제-기득권화 된 정치권이 호소하는 부양 부담의 증가는 과연 누구의 '억울함'인가. 그놈의 '갈라치기', 과대표와 청년 호도 정치인의 부상은 이런 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 끊임없이 나 아닌 집단을 배격하는 인식은 과거와 미래, 사회와 개인 모두를 옭아맨다.<br/><br/> 삶은 분절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어리게 태어나 늙어 죽는다. 어느 순간도 삶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어려서, 젊어서, '적당한 나이'를 지났기 때문에 '임시'로 밀려나기를 요구받는 사회에서는 모든 순간이 불행하고 불안하다. 결국 나이는 수로 계산될 수 없는 삶을 욱여넣지 않는, 그저 '중요한 숫자'일 뿐이어야 할 것이다. 생의 모든 시기가 그 때만의 가치를 갖는, 제각기 어떤 사람의 바로 그 순간이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라 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br/><br/> p.204 대통령이 될 나이를 높게 잡은 것은 2030 청년세대의 정치적 역량 약화와 기회의 제한으로 이어진다. 고령화로 인해 선거에서 노인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게 되고, 정치인들은 고령층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공약 경쟁을 함으로써 청년을 위한 정책은 감소할 가능성이 있는데 피선거권 제한까지 더해지니 문제는 한층 심각하다.<br/><br/> p.243 한국 사회에서 노인은 기본적으로 계급적 개념이라는 주장이 있다. 정치인이나 재벌 등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노인이라 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서민'에게만 노인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노인이 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된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9/84/cover150/k69213816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698413</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