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뫕님의 서재 (뫕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10 Apr 2026 16:11:17 +0900</lastBuildDate><image><title>뫕</title><url>http://image.alad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뫕</description></image><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별 수 없이, 불가해의 거리를 껑충 넘어 맞대는 어깨. 우린 이제 한패를 먹은거야. - [너의 나쁜 무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05054</link><pubDate>Wed, 08 Apr 2026 21: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050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509&TPaperId=172050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3/21/coveroff/k85213750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509&TPaperId=172050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너의 나쁜 무리</a><br/>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쓰는 사람은 많은데 읽는 사람은 없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듣는 사람은 없다. 하루종일 넘겨본 인터넷 게시물이며 동영상이 몇 갠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묻는다면, 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고, 하루종일 쏟아진 말과 글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되묻고 싶다. 언택트니 비대면이니 하지만, 발문처럼 차고 넘치는 연결들은 정작 한없이 낮은 밀도 탓에 세계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다.<br/><br/> 뒤탈없고 가벼운 관계만 범람한다. 부스러기 차 버리듯 툭 털어내면 그만일 말과 '우리 사이'들. 이해하려 애쓸 수록 벌어지는 모호와 오해의 간극. 그런 이유로 사는 내내 이질감을 존재의 무게추로 삼아왔다. 사람을 연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연한 살을 몽땅 안으로 말아넣고 그저 둘둘 굴러다니고나 싶었다. 그래서 이따금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걸까. 북적대는 번화가에서, 볕 좋은 강가에서 우뚝 멈춰서버리고 싶었던 걸까.<br/><br/> p.157 자신의 아픔을 부정하는 사람만큼 아픈 사람이 없다는 걸 모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제야 모아는 시내와 수자, 자신 모두 마음 깊숙이 어디 한군데가 단단히 틀어진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서로를 감지했던 것일지도 몰랐다.<br/><br/> p.206 하지만 내가 느끼는 이 이상한 기분, 모멸감 같은 것들은 도대체 어떤 회로를 거쳐야 다스릴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모든 일에 진심을 다했지만 그럼으로써 깎이는 마음을 도로 채우는 법은 도무지 몰랐다.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취약한 부분을 너무도 쉽게 들키고야 말았다.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건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는데.<br/><br/><br/> 사는 일 너무 재미 없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지겨워했다. 뻔해서 지겹고, 알만해서 지루하고,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알지 않을 방도가 없어 초라하고 비참했다. 부끄러웠다. 사건도 사고도 없이 다사다난한 일상을 맴돌다 작가가 그려내는 이들을 맞닥뜨렸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른 순간 나는 그에게로 가…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흐릿한 바닥에 색이 차오르고서야 발붙일 마음이 들었다.<br/><br/> 일곱 편의 이야기, 그 안의 사람들에서 나는 낯설고 난감하고 익숙한 얼굴을 본다. 만원버스에서 한껏 움츠려 자리를 내주는 사람, 일하는 사람을 함부로 부르는 사람, 괜히 미안하고 멋쩍은 마음에 슬그머니 손을 내밀고 엉거주춤 문을 잡아주는 사람. 누구에게 보일지도 모르면서 꼭 요만큼의 벽을 세워두고 영영 지켜보이려 애쓰는 사람.<br/><br/> p.146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폐를 끼치고 누군가는 극도로 폐를 끼치지 않게 노력하고. 그건 어쩐지 좀 이상했다. 공평의 문제라기보다 경계의 문제에 가까운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이 아주 별일이라고 생각하는 무엇이 누군가에게는 그다지 별일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라는 게 발생하는 것이다.<br/><br/> p.207 문득 내가 지키고자 했던 그 최소한의 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오롯이 그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br/><br/><br/> 그 얼굴을 외면할 방도가 없어 두 손을 세워 입가에 갖다 대는 이에게 "아뿔싸, 이러면 별도리 없지, 하며 고개를 숙인 채 집중하여"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이유를 잃어버리고 슬픔만 남"은 사람, "슬픔은 잃어버리고 이유만 남"아, "이유들만 머리에 남아서 악에 받쳐" 팔팔 뛰는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하찮고 사소하게 거듭되는 실패, 좌절, 미끄러지는 의도와 떨칠 길 없는 슬픔 따위는 그렇게 곁을 내주는 마음이 된다.<br/><br/> 보풀 일고 습기 먹은 이야기들을 걸쳐입은 지금, 차마 버리지도 바꾸지도 못하는 누추한 나와 구질한 실패 따위를 박박 닦아 서랍 구석에 모셔두고야 마는 그런 마음을 아느냐 묻고 싶다. 살아봐야지, 입속말로 우물대고 싶다. 별것 아닌 친절을 건네고 요상하고 찌질한 미련을 내비치곤 "인간의 쓰임은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지점에 다다르려 애쓰는 일" 같다는 작가의 말을 한구석에 대롱, 매달아두며.<br/><br/> p.20 "그런 건 누가 죽고 나서야 알게 되더라. 인사 잘 하는 법 같은 거 말이야." 기문은 작별 인사를 아주 오랫동안 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상대가 먼 길을 갈 때는 배웅도 오래 걸리는 법이라고.<br/><br/> p.72 새들이 낮게 나는 모양을 한참 보고 있자니 무언가에 완전히 굴복되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뒤늦게 추위가 엄습했다. 이대로 죽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헛웃음을 지으며 스스로 되뇌었다. 이중일은 죽지 않는다. 그들로부터 영원히 죽지 말라는 지령을 받게 되었으므로. 그것은 활력 있는 형벌과도 같았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3/21/cover150/k85213750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832113</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그 많던 신은 다 누가 죽였을까? 그 많던 신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94968</link><pubDate>Fri, 03 Apr 2026 20: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9496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62137206&TPaperId=1719496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9/67/coveroff/k46213720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62137206&TPaperId=1719496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a><br/>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3월<br/></td></tr></table><br/>우리는 언제부터 신과 다른 세계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전지전능의 일신론이 의식체계와 기반 세계를 재편하기 전, 인간의 욕망과 충동, 명과 암의 양면성은 인간사회의 곳곳에 스며 있었다. 그것들은 신의 광휘를 입고 그 자체로 자연스레, 혹은 영광스럽게 받아들여졌다. <br/><br/> 그러나 지고의 창조주와 순종의 물결을 타고 인간 안의 감정과 욕망 생리와 사회적 본능이 피조물의 속성으로 전락해, 신성을 인간과 별개의 존재로 떼내어 숭앙하기 시작한지 기천년, 또 백여년 사이 급기야 제거 대상의 물목에 오른 지금 현대인은 수용되고 합일되지 못하는 야만과 내면세계와의 갈등을 겪고 있다.<br/><br/> p.49 편향된 신화는 우리를 현실성 없는 이상에 매달리게 하며 거듭 좌절하게 만든다. 자녀가 자기 아버지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아버지가 성숙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도 온전한 아버지 이미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융 분석가인 매리언 우드먼은 어머니의 어두운 측면을 통합하는 것이 현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진화사적 과업이라 했는데, 아버지의 어두운 면을 통합하는일 또한 이에 버금가는 중요한 숙제로 보인다.<br/><br/> p.208 심리적 위기의 정점인 '영혼의 어두운 밤'은 마치 태양빛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식과도 같다. 그런데 깜깜할 때야말로 영혼이 잠에서 깨어나며 비가식적 존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성인기에는 책임이나 성공 같은 '바깥의 빛'을 향해 매진하는 것이 주 과업이라면, 삶의 후반부에는 눈을 안으로 돌려 내면 작업에 매진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br/><br/><br/> 사라진 신들은 어디로 갔는가? 야만과 죄를 뒤집어쓴 채 영영 타르타로스의 밑바닥에 봉인되었는가? 여기서 기억해내야 한다. 신탁과 운명을 부정하던 이들의 말로를. 그들은 잠재된 위협으로 남아 시시때때로 봉인을 강하기에 억눌리는 것이 아니라 억눌렸기에 위험하고 강한 존재가 된다. 현대인에 있어 뜯겨나간 신성의 또다른 이름은 폭력, 중독, 우울과 채워질 길 없는 절망이다.<br/><br/> 그리스신화는 명백한 다신론적 세계관이다. 아니, 모든 것이 신이자 신성이다. 갈등도, 모순도, 통제할 수 없는 감정들도.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다채롭게 존재하는 세계야말로 가득한 신성의 증거이자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사잇길이다. 무턱대고 누를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을 회복하는 길이요 그 안의 자유를 찾는 방법이라 저자는 말한다.<br/><br/> p.112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즉 성과 공격성 혹은 사랑과 전쟁의 구도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몰아내길 원한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찾으려 했다. 하르모니아의 탄생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가장 감당하기 어렵고 또 가장 매혹적인 원초적 에너지들이 결합해 두 에너지 사이 균형이 이루어지자, 비로소 진정한 '조화'가 탄생했다.<br/><br/> p.241 이 신은 위협적이다. 그리고 정통의 위협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증상에는 영혼의 호소가 들어 있다. 그림자가 난무하는 지금, 억압과 배제가 아니라 디오니소스 힘을 이해하려는 열린 자세가 절실하다. 이 강력한 신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야만에서 벗어나 인류가 도약할 수 있는 지혜로운 길일 것이다. 신의 선물인 풍요의 뿔은 모두를 비옥하게 할, 결코 망각할 수 없는 힘이다.<br/><br/><br/> 신화는 분명 오래된 이야기이다. 보편에 기대어 설명하는 데에도 분명 한계가 있다. 이성과 논리의 세계의 현시대의 '남성성'에는 남신들의 속성과 그들의 이미지를 통해 참조할 모델을 잃어버린 채 안팎으로 터져나오는 폭력만이 남아있다. 모호함과 감정의 오염을 거부하는 명료한 이성과 논리의 세계는 들끓는 감정과 카타르시스, 부드러움과 유기적 자연의 이미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br/><br/> 이는 비단 물리적 '남성'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인간에 내재된 남성성의 문제다. 신화가 유비하는 인간사, 신들의 세계로 전해지는 인간 내면의 추동과 갈등을 통해 엿보는 억눌린 무의식과 원형 이미지는 다시금 차가운 이성의 세계에 무엇을 돌려줄 수 있을까. 아주 오래된 이야기, 본질에 가장 가까운 서사의 세계가 그 해답으로 가는 문을 살그머니 열어주기를 기대할 뿐이다.<br/><br/> p.91 취약함과 수치심을 수술하듯 제거하거나 깊숙이 묻어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노력은 상처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장애물을 항구적으로 만들 뿐이다. (...) 상처도 결점도 추함도 열등감도 없어 보이는 삶을 원한다는 것, 이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창조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참자기가 되는 길은 있어도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길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br/><br/> p.252 디오니소스를 몸의 영성이라 했다. 의례를 통해 몸의 감각을 일깨워 신적인 합일에 이르는 것은 신을 경배하기 시작하던 선사시대부터 있어 온 한결같은 인간의 염원이었다. 이를 상실한 우리는 두려움과 열망, 충동과 금기의 반목과 갈등을 각자 내면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경험한다. 신화는 디오니소스 신을 위한 자리를 우리 안에 마련할수록 벌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선물을 받게 된다고 분명히 이야기해 준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9/67/cover150/k46213720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796737</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존경과 환멸이, 이기와 경이가 함께할 수 있다는 건. - [모든 새를 보았다고 믿은 남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70646</link><pubDate>Tue, 24 Mar 2026 19: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7064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22137163&TPaperId=1717064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88/55/coveroff/k62213716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22137163&TPaperId=1717064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모든 새를 보았다고 믿은 남자</a><br/>켄 코프먼 지음, 조주희 옮김 / 일레븐 / 2026년 03월<br/></td></tr></table><br/>바람을 타고, 땅을 박차며 새를 본 적이 있는가? 미련도 불평도 없이 수천 킬로미터를 수십일에 걸쳐 날아가는 새를 본 적이 있는가. 그런가하면 날개는 그저 장식이거나 숫제 달리지도 않은 녀석을 본 적이 있는가. 세상은 이 기묘한 생물을 뭉뚱그려 새라고 부른다. 철마다 노래하고 창공을 가로지르며 깃과 부리를 지닌 그들을. 얼음땅에서 적도의 사막까지, 밀림에서 바다까지, 전 지구의 목록을 모두 찾아낼 수 있다면.<br/><br/> 언젠가 이 세상의 모든 새를 보았다고 믿어진 이가 있었다. 그 자신도 방대한 경험과 하늘을 찌르는 명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학계는 경탄했다. 그의 이름은 곧 권위와 신뢰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얼마나 진실이었을까.<br/><br/> p.40 '내게 새로운 것'과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것' 사이에는 큰 도약이 있다. 전자는 배우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후자는 자존심과 경쟁, 심지어 갈등을 불러오기도 한다. 발견의 동기는 순수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런 동기가 없다면 이 책의 이야깃거리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새가 '과학계에 알려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 우리는 '누구의'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br/><br/> p.317 세상 곳곳으로 탐사를 나서본 자연주의자들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의 시선에서 이동이란 얼마나 더디고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그 아름다운 비행도 물론이거니와, 이들이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도 땅으로 내려앉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저 신비로울 뿐이다. 수년간의 연구로 밝혀진 새들의 이동에 대한 지식은 이런 마법 같은 느낌을 지우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경탄하게 만든다.<br/><br/><br/> 이 순간에도 산과 물은 죽어가고 있다. 불과 수십년 사이 수많은 종에 인간의 손에 의해 '절멸' 딱지가 붙었다. '생태 복원'은 헛된 희망으로 불릴 뿐이다. 이것은 정해진 미래인가. 되돌릴 수 없는 좌절의 길인가. 저자의 말을 조금 바꾸어 돌려주고자 한다. 우리는 이미 그 잔을 깨지기 직전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니 손을 모아 그 경이를 감싸안고 지켜내야 한다고,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내야만 한다고.<br/><br/> 우리 자신의 관찰 대상으로서 '그곳에 놓여있는' 동시에 우리 자신 또한 그것의 일부인 자연을 탐구하는 일의 본질적 어려움은 우리가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과 그를 부정할 수 없음에도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데에 기인한다. 더이상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지식과 추정과 '발견'이 쏟아져나오는 지금 오듀본의 일화는 우리에게 오래된 물음을 던진다. 무엇을 볼 것인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br/><br/> p.199 눈에 띄는 점은 바로 부유한 (잠재적) 후원자나 영향력 있는 자연주의자, 또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는 사실이다. 마치 누군가에게 아첨하기 위해, 기존의 솔새를 새롭게 그려내고 이름 붙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처음에는 이런 해석이 너무 냉소적이고 부당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오듀본의 생애를 깊이 탐구하고 난 지금은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br/><br/> p.364 뉴저지 습지를 떠돌던 수천 마리의 클래퍼뜸부기는 사라졌고, 펜실베이니 아의 모든 나무 위에 떼 지어 앉아 있던 붉은머리딱따구리도 더는 볼 수 없다. 아무리 바람이 좋다 한들 뉴올리언스를 지나가는 수만 마리의 검은 가슴물떼새 비행 행렬도 다시 오지 않는다. 잔은 벌써 절반이나 비어버렸다. 하지만 우리의 잔에 남은 것은 여전히 경이롭다.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다양한 조류라는 보물이 남아 있다.<br/><br/><br/> 인간 오듀본은 물론 결함투성이었다. 사기꾼이자 인종주의자였다. 그의 순진한 자의식은 사죄와 성찰이라는 양심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와 문명세계의 잘려나간 시야에 자연은 발견되고 발명되었다. 완벽한 과거의 그림자는 여전히 드리워져있다. 여기서 다시 물어야 한다. 끝이겠습니까? 무엇을, 누구의 이름으로 끝이라 부르겠습니까.<br/><br/> 이를 마음 깊이 받아들일 때, 과거의 유산과 완전히 다른 세계의 지혜를 나의 세계에 포섭하는 폭력을 멈추어야 함을 깨달을 때, 사람이 아니라 업적을, 동시에 위대한 업적이 짓밟고 선 자리를 마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저자가 말하는 발견의 기쁨, 새가 온몸으로 가로지르고 누비는 세계의 아름다움, '그를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 두는' 길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자. 고요한 외침. 아, 새다.<br/><br/> p.420 오듀본은 노예제 찬성론자, 백인 우월주의자, 과학 사기꾼 등 여러모로 끔찍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더 다양한 종류의 새를 그려 경쟁자들을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와중에도, 진정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운 면이 존재했다. (…) 오듀본은 나에게 영웅도, 롤모델도 아니다. 그렇다고 나는 그의 작품까지 버리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br/><br/> p.456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과학적으로 새로운 생물을 발견한 사람들일지 모르지만, 각자의 기억에 남는 마법 같은 순간은 자기에게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바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러한 발견의 가능성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기적은 곳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br/><br/><br/>*서평도서제공: 일레븐<br/>#모든새를보았다고믿은남자 #자연사 #탐조 #신간추천]]></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88/55/cover150/k62213716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885540</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두려워하라. 아, 이것은 포식자의 아가리구나. - [대문자 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58280</link><pubDate>Wed, 18 Mar 2026 20: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5828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585&TPaperId=1715828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05/1/coveroff/893292558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585&TPaperId=1715828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대문자 뱀</a><br/>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02월<br/></td></tr></table><br/>전대미문의 살인자. 그가 지나간 자리엔 피와 죽음의 현장 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단서도, 동기도, 하다못해 꼬리를 감추려는 최소한의 노력까지도! 뒤늦은 경찰과 평범한 이들의 몫은 고작 분통을 터트리고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다.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아무도 모르게 찾아와 탕, 탕. 그리고는, 끝. 동정도 대의도 필요치 않다.<br/><br/> 그는 뭐랄까, 그래, 사람이라기보단 뱀이다. 어둠 속에 도사린 뱀, 소리 없이 다가와 아가리를 쩍 벌려 집어삼키는 포식자. 잠시 눈을 돌려보자. 한 여자가 지나간다. 늙고, 뚱뚱하고, 썩 온순하다고 볼 수는 없는, 대단한 재산도 없이 그저 개 하나 끌어안고 그저그런 나날을 반복하는. 조심하라. 눈 깜빡할 사이에 사타구니에 그야말로 주먹만한 구멍을 내줄테니. 깔끔하게 한 발 더. 그것만이 유일한 자비일 뿐.<br/><br/> p.37 마틸드가 작업을 하면, 한 발도 총알이 빗나가는 법이 없고, 아무 문제 없이 깨끗하게 일이 처리된다. 그러나 이날 저녁은 예외였다.<br/><br/> p.151 이 살인자 뱀은 필요성이 있을 때에만 움직일 것이다. 놈은 교활하고도 강력한 파충류이다. (...) 이 대문자 뱀은 희한한 습성을 가지고 있으니, 사타구니에 들끓는 조그만 뱀들에 특별한 혐오를 느끼며, 거기에다 독을 내뿜기 때문이다. 놈은 작은 뱀들을 싫어하는 커다란 뱀이다. 당신의 이마 한가운데 총알을 박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 당신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상관없이 당신의 무게 중심에다 총알 두 발을 쏘는 진짜배기인 것이다.<br/><br/><br/> 63세, 과부, 예술 및 문학 기사 훈장 서훈,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훈장 서훈…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평범, 아니, 모범에 가까운 그의 안락한 일상에 가장 큰 걸림돌은 비밀스러운 이면도, 고독도 아니다. 의뢰는 처리하면 그만, 대단한 의미조차 필요치 않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깜빡이는 기억력이다. 바늘틈 하나 없는 냉철함에 균열을 내는… 아이구, 참. 나이도!<br/><br/> 그 자신조차도 의심없이 뒤바꾸고 흘려버리는 기억 탓에 이야기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이 내달린다. 확신은 누구의 것인가. 평생의 동지도, 죄 없는 목격자도 필요하다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제거'해버리는 그들? 기름진 부스러기를 털어대며 거드럭대는 경찰? 모순적이게도 그들 자신은 의문하지 않는다. 당혹에 빠지는 건 독자 뿐이다. 어느순간 정의와 명분 따위는 내던지고 사악한 공모의 웃음을 짓는 스스로를 발견하리라.<br/><br/> p.114 내 상황이 되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거야. 아냐, 기억력이 없어진 것은 아니야… 저녁이 되고, 밤이 된다. 그녀는 잠이 들었다가, 파리의 기념물들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잠에서 깨어난다. 전화 부스들의 리스트를 옆에다 적어 놓았지만,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br/><br/> p.338 떠나기 전에 그를 찾아가서 분명히 따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아무것도 요구한 일이 없는 뤼도 같은 불쌍한 개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지낸다는 것은 그녀의 정의감과 너무나 어긋난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떠오르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일이면 생각나리라.<br/><br/><br/> 마틸드의 후련한 은퇴를 목전에 둔 우리 '목격자들'은 기대와 함께 부풀어오르는 의구심을 감추지 못할것이다. 과연 누가 그를 '단죄'할까? 허물어지는 기억, 느슨해지는 연결고리에도 흔들림 없는 솜씨를 지닌 이 총잡이의 끝은 과연 어떻게 될까? 여기서 작가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나 한치 없을 예상할 수 없는 전개로 다시금 허를 찌른다.<br/><br/> 이 이야기는 무언가를 '위해' 쓰이지 않았다. 잔인한 쾌감과 지독히도 기능적인 폭력만이 있을 뿐. 몹시도 사악하다. 대문자 뱀처럼, 매혹적인 냉소. 의심하라, 모든 것을. 경계하라, 흔들리는 눈을. 두려워하라. 어둠속에 형형히 도사린 대문자 뱀. 도망칠 수 없다, 소리 없이 다가와 삼켜버릴 심연에서. 그리고, 탕.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br/><br/> p.230 선생은 멍하니 반장을 바라보지만, 자신은 다른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느낀다. 강렬한 감정, 분노, 혹은 다른 것을 표현해야 하지, 이렇게 초점 없는 눈으로 상대방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앉아 있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땅콩 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이 뚱뚱한 반장은 똑같은 질문을 끈질기게 반복한다. 마치 고장 난 레코드판 같다. 만일 내가 좋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곧 사회 복지사들이 들이닥칠 거야…<br/><br/> p.329 그날 여기에 왔던 사람이 바로 이 여자다. 이 여자가 테비와 르네를 죽였다. 경찰에 전화해서 그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로부터 한 15분이나 지났을까, 선생은 그 종이를 발견 하지만, 그게 무엇에 관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던진다.<br/><br/><br/>*서평도서제공: 열린책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05/1/cover150/893292558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050177</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사랑합니다, 호갱님! - [인스타그램은 왜 공짜일까? - 마음을 사로잡고 경제를 움직이는 마케팅의 비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44607</link><pubDate>Wed, 11 Mar 2026 21: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4460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32136675&TPaperId=1714460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08/68/coveroff/k93213667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32136675&TPaperId=1714460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스타그램은 왜 공짜일까? - 마음을 사로잡고 경제를 움직이는 마케팅의 비밀</a><br/>이완배 지음 / 북트리거 / 2026년 02월<br/></td></tr></table><br/>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을 알고 싶다면 그의 책장을 살펴보라고. 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사는 곳이 곧 그 사람의 품격을 보여준다고. 후자는 광고였다. 그렇지만 전자는 아니라고 할 이유가 있는가? 무언가가 나를 보여준다. 광고는 더 이상 상품을 팔지 않는다. 마케팅의 홍수 시대를 지나 모든 것이 (상업적) 광고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시대에, 광고가 파는 것은 바로 감정이고 이미지다.<br/><br/> 되고 싶은 미래, 내 것이 아닌 현재를 판다고 해도 좋으리라. 이런 시대에 일상을 가득 메운 광고들의 속내와 기전을 들여다보는 일은 곧 무의식 중에 스쳐보내는 현혹과 희망, 좌절과 결핍을 이해하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br/><br/> p.9 사람의 행동을 바꾸고 시장에서 가치를 만들어 내는 기업의 전략을 파악하는 일은 곧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이해하는 일과 같다. 인간 심리의 작동 방식을 탐구하다 보면 일상 속 광고와 소비자의 선택이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br/><br/> p.74 네거티브 마케팅은 이목을 끌기 쉽다. 그 러나 모든 시도가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별, 마케팅의 역사를 살펴보면 남의 단점을 저격하는 전략은 오히려 성공하기보다 실패한 경우가 더 많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마케팅에 정답은 없다. 네거티브든 포지티브든, 마케팅의 성패는 형식이 아니라 소비자의 감성을 얼마나 제대로 찌르느냐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br/><br/><br/> 책에서 다루는 마케팅 전략들을 차근히 뜯어 보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아주 작은 부분, 그러나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을 건드린다. 다름 아닌 우리 안의 본능, 사회적 존재, 그 이전에 생물로서 가지는 깊고 연약한 부분이다. 혼자이고 싶지 않다. 이전의 결정으로 형성된 사고 방식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속고 싶지 않다.<br/><br/> 이를 이해한다면 마케팅 전략을 더 이상 단순한 판매 방식이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계산이자 심리 싸움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우리는 흔히 기업이미지에 일종의 선악을 덧씌우고 소비자로서의 선택을 더없이 합리적인 판단으로 믿고 싶어한다. 이를 짧게 말하면 '가치'라 할 수 있겠다. 소비자는 기업과 '가치'를 주고받고, 나아가 공유하고 싶어한다. 바로 여기에서 물어야 하지 않을까.<br/><br/> p.117 미끼 효과와 앵커링 효과는 소비자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 당신은 현명한 소비자가 아니라, 미끼에 보기 좋게 낚인 호갱님이다. 호갱이 되지 않으려면 대니얼 카너먼이 이야기한 '깊이 숙고하기' 시스템을 잘 가동해야 한다. 마케팅은 '대충 생각하기' 시스템의 빈틈을 늘 노리기 때문이다.<br/><br/> p.155 냉정하게 말하면 명품 소비는 합리적인 소비가 전혀 아니다. 하지만 지위재가 주는 행복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사람이 세상에는 꽤 많다.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명품 브랜드는 상품의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리는가 하면, 멀쩡한 상태의 재고를 남김없이 불태우기까지 한다. (…) 한쪽에선 명품 하나 사겠다고 새벽부터 줄을 서서 오픈런을 하는데, 다른 한쪽에선 남은 제품을 불태운다. 이게 정말 효율적인가?<br/><br/><br/> 제목처럼, 인스타그램은 왜 공짜인가? 무슨 이득이 있어 그 많은 비용을 투자해가며 유저를 불러모으고, 끊임없는 '컨텐츠' 생성과 서로 간의 노출에 안달하는가? 왜 차고 넘치는 자본 권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에 납죽 엎드리는가? 우리는 소비자인 동시에 광고산업의 일부이다. 선택하지도 의문하지도 않는 순진한 소비자는 산업의 충실한 공짜 부품이 된다.<br/><br/> 그러지 않기 위해, 별 수 없기에 혹은 당연히 사야 하기에 소비하고 이용하는 얌전한 돈줄이 아닌 시장의 한 축, 경제법칙이 말하는 합리적이고 능동적인 소비 주체가 되기 위해 이 책을 읽고 권하는 우리가 살아온 세계들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br/><br/> p.245 전통적 시장과 달리 양면 시장에서 고객은 두 부류(양면)로 나뉜다. 하나는 돈을 내는 진짜 고객이고, 다른 하나는 그 돈을 내는 고객을 붙잡아 둘 전략적 무기 역할을 하는 고객이다. 구글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인터넷 플랫폼 사업자가 대부분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양면 시장에서 일반 이용자는 돈을 내는 진짜 고객이 아니라, 돈 내는 고객을 붙잡아 둘 전략적 무기다.<br/><br/> p.246 티롤은 이 연구를 통해 '단면 시장과 달리 양면 시장에는 약탈 가격 금지 조항이나 독과점 방지 정책을 함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 전략적 무기가 되는 고객에게 공짜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경쟁 기업을 죽이기 위한 술책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양면 시장 특유의 사업 모델이기 때문이다.<br/><br/><br/>*도서제공: 북트리거]]></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08/68/cover150/k93213667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6086882</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이기의 이기마저 떠받들어주어야 간신히 인간됨을 '허락'하리라는 연약하고 나약한 '됨'들에 고함. - [차별을 훔치는 남자들 - 피해자의 자리와 억울함이라는 무기에 관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42553</link><pubDate>Tue, 10 Mar 2026 21:3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4255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6745&TPaperId=171425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23/39/coveroff/k67213674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6745&TPaperId=1714255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차별을 훔치는 남자들 - 피해자의 자리와 억울함이라는 무기에 관해</a><br/>박정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3월<br/></td></tr></table><br/>언젠가 SNS에서 본 적이 있다. 월경과 관련된 불편에 공감하는 내용의 영상 게시자가 남성이었더란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일도 아니나 댓글에서 난리가 났다. 입에 담기도 어려운 모욕과 욕설이 불붙듯이 달리는 와중에 '여자가 불편하다는 얘길 하는 너도 페미 아니냐'는 억지떼가 숱하게 보였다.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거나 혐오발언을 멈추라는 댓글은 순식간에 파묻혀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주체 되는 문제는 으레 이런 식으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어렵다.<br/><br/> 숙의와 치열한 논쟁이 필요한 존엄투쟁이 감정싸움에 휘말려 소진되기 일쑤다. 한국 사회 내 젊은 남성 집단의 이런 '깽판치기'는 사실상 하루이틀 사이의 일이 아니다. 차별과 공정의 호소는 강탈된지 오래다. 제목처럼 한국 사회의 남성들은 차별을 훔쳐가는가. 그렇다. 쥐면 꺼질세라 불면 터질세라 유사 이래 노상 사경을 헤매는 남성의 '기가 죽을까'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개개인의 '감정' 문제만으로 치부할 만큼 단순하지 않다.<br/><br/> p.38 남성 청소년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여성을 배제하거나 도구화한 '주류적인 남성문화'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다. 남성 청소년들이 온라인에서 나타내는 공격성과 혐오의 표출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기존에 존재했던 우리 사회의 일면을 반영하거나 모사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br/><br/> p.46 판관은 결국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에 심판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성향을 지닌 이들이 우리 사회에 많아진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그만큼 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한계 역시 명백하다. 대체로 '사후적 징벌'에만 관심 있을 뿐, 범죄 등의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데는 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br/><br/><br/> 그들이 그렇게 '번성'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엄을 훔쳐다 쥐어주는 사회권력이 존재한다. '알아서' 생존하도록 내몰리는 성원들과 동등한 주체가 아닌, 더 우대받고 더 보호받을 존재로 추켜올림으로써 영원히 어떤 영역에서의 무지를 보장받도록, 문제의 근원을 직면할 이유를 감각하지 않도록 천진한 무능에 고착시킨다. 더 크게, 더 많이 말하라. 전부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br/><br/> 바로 그 이유로 '능력으로 쟁취한 공정하고 마땅한 권력'으로의 진입은 필연히 실패로 귀결되는 환상이다. 진짜 자격, 진짜 성원, 마땅히 존귀한 '우리'의 범위를 점점 더 좁게 설정하며 생득적 존엄을 마치 능력으로 쟁취하고 침탈할 수 있는 자원으로 착각하기에 자기가 놓인 자리와 사회 전체의 역동 모두를 무시하고 기득권이 곧 정의라 믿으며 '중립기어'를 박는다.<br/><br/> p.79 여성들로부터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기분', 기 성세대들이 청년들의 몫까지 독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분노와 박탈감을 키운다. 또래 청년 여성이든, 중년 남성이든 모두 자신의 앞길을 막는 적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br/><br/> p.122 여성의 사회 진출이 증가하면서, 남성들이 자신의 기존 권력을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면서 남성이 차별받는다는 일종의 '착시 현상'을 경험하는 (…) 상황을 정치적 땔감으로 삼아 혐오를 조장한다. 문제의 원인은 청년 남성들의 인식에 있다. 그런데 자꾸 '과도한 페미니즘'이나 우리 사회가 남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br/><br/><br/> 선망하는 권력에 가까이 끌어올려주기를 바라며, '열등한 자들'이 사라진 자리에 넉넉한 우월의 여유가 보장되리라 믿으며. 그러나 익히 알고 있듯이 기울어진 땅의 중립은 필연히 권력에 힘입어 낮은 쪽으로 구른다. 이것은 진정 '자연스러운'가? 존엄과 평등이 사라진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에 과연 '공정'과 '성공'이 자리할 틈이 있기나 할까.<br/><br/> 이 책이 제목에서부터 남성권력의 문제와 기만을 지적하고 있으나 이는 물리적 생김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라서 악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 규범이, 그를 공고히 하는 기득권자들이, 눈앞의 이득과 기대가 '남자니까'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를 부수고 더 넓은 평등,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남성 존재들이 '남자니까'의 역학을 뒤집고 그 틀을 벗어나려 애쓰는 지점에서 시작된다.<br/><br/> p.100 흔히 '한국은 안전한 나라'라고 말하지만 그 말은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공권력의 작동 범위나, 치안의 수준만이 '안전함'의 척도일까. '안전한 공간'이라는 외피를 둘러썼지만 실은 체제에 저항하는 이들에 대한 조롱과 탄압이 일상화되고, 능력주의 논리가 약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 곳이 지금의 한국이다.<br/><br/> p.167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거나, 이것부터 하고 저것은 나중에 하자는 말은 더 이상 시민들에게 통하지 않는다. 민주 정부에서도 그렇게 누군가의 삶이, 인권이 뒷전이 된 케이스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지킨 시민들의 존재를 하나하나 기억하고, 그들의 뜻을 한국 사회에 반영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이전부터 소수자·약자들이 외쳤던 구호에 정답이 있다. <br/><br/><br/> 저자의 전작을 빌어 말하고 싶다.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는 없다. 우리의 궁극적 방향은 남자니까 이 정도면, 남성에게도 이득이 되기 때문에… 가 아닌 어떤 성원도 불평등한 각자도생의 '우리들의 사회'에서 행복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 애써야 한다.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누구도 홀로 버려두지 않아야 한다.<br/><br/> 내가 너를, 우리가 그들을, 서로가 서로의 진정성과 무결을, '진짜 사람'을 검증하려는 시도를 멈추어야 한다. 잘 사는 우리를 위해 타인을 소모해도 좋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가 약육강식의 '야생'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더이상 무마할 수 없는 위기 앞에서 모두가 말해야 한다. 남성이여, 정의로운 성원이 되어라. 남자다운 남자가 아닌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라.<br/><br/> p.267 '불편하다'라는 말은 여전히 매우 주관적이고 감정인 표현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사실 '불편하다'는 매우 맥락적이고 관계에 기반해 있는 말이기도 하다. (…) '불편하다'는 말은 언제나 쉽게 기각된다. 누군가의 '불편하다'는 목소리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온갖 농담과 장난과 성희롱에 왁자지껄 웃는 것이 '도리'처럼 여겨진다면, 그런 세상에선 누가 더 살기 좋은지는 명백하다.<br/><br/> p.276 소수자들 입장에서 기존의 주류-기득권, 차별을 숨쉬듯 하는 이들이 편할 리가 없다. 하지만 이들은 광장에서 누군가를 쫓아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 문제는 다수자들은 소수자들을 쫓아내라고 너무나 쉽게 말한다는 점이다. 나는 그것이 '권력 차이'라고 생각한다. 연대를 유지할지 안 할지의 권한은 자신들이 갖고 있다는 생각, '우리 집단'이 '너희 집단'을 쫓아낼 힘이 있다고 믿지 않으면 그런 말은 할 수가 없다.<br/><br/><br/>*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23/39/cover150/k67213674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233917</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우리의 탐욕이 안으로만 향할 때, 황폐화되는 사회와 무력해지는 사랑에 대하여. - [탐욕스러운 돌봄 - 잘 키우려 할수록 나빠지는 불행에 대하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28205</link><pubDate>Tue, 03 Mar 2026 18: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2820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136826&TPaperId=1712820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04/29/coveroff/k76213682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62136826&TPaperId=1712820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탐욕스러운 돌봄 - 잘 키우려 할수록 나빠지는 불행에 대하여</a><br/>신성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3월<br/></td></tr></table><br/>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사회는 살만한 곳인가? 이 시대에는 희망이 있는가? 누구에게 물어도 썩 긍정적인 답이 돌아오지 않을 테다. 언젠가 지인에게 들은 적이 있다. 집 근처 학교에 아이들의 맛있는 급식을 원한다는 의미불명의 현수막이 걸렸기에 찾아보니 급식노동자 근무처우 개선 투쟁에 항의하는 내용이었다고.<br/><br/> 참담했다. 이런 세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며 사탕발림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된다. 어른들의 목소리로 표상되는 사회가 이 꼴인 것은, 지금 자라나는 세대를 어떻게 망치고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에 다름아니다.<br/><br/> p.27 우리 아이의 자존감을 길러주겠다는 노력은 시민적 자존감을 지켜줄 수 없는 사회 없이는 무효하다. 아무리 자식이어도 그는 내가 아닌지라 그가 어떤 선택을 하고 무엇을 좇을지 부모는 알지 못한다. 자식의 미래를 통제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부모, 결국 모든 부모가 지금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바로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br/><br/> p.40 사랑이 경제로 환원되면서 발생한 돌봄의 양극화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원망하게 만들고, 삶을 스스로 평가절하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잔인하다. 사실상 반돌봄이다. (...) 우리의 탐욕은 안이 아닌 밖을 향해야 한다.<br/><br/><br/> 내 아이가 대단한 부도 명예도 아닌 그저 안정적인 삶과 쪼들리지는 않는 생계를 누리기를, 상처받고 불편하지 않기를 바라는 '소박한' 욕망은 우리만 살아남는 좁은 세계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사랑이 탐욕이 되면 그저 무언가를 향한 갈망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를 더 좁고 작게 분열시킨다. 사회를 황폐화한다.<br/><br/> 황폐화된 사회에서 현재는 미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직업에는 귀천이 있는, 어쩔 수 없는 세상 순리가 원칙이 되고 정의가 되는 사회에서 시간과 주권은 착취와 기만의 협주 속에 불균등한 재화로 전락한다. 공동의 자원은 고갈되어 사유재산의 제로섬 쟁투만이 대두된다. 결국 무한경쟁의 잔인함에 던져진 개인만이 남는다.<br/><br/> p.47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아름답다고 소리 내 말하지 못하는 환경은 사막이다.아는 단어를 죄다 글로만 배운 사람이라면 그 또한 사막을 지나는 이다. 더구나 이 고행은 가난과 함께 대물림되기 마련이다. 이 불모의 토지에서는 씨를 뿌려도 초목이 자라지 않고, 희망을 품어봤자 신기루에 그치고 만다. 같은 세계를 사는 시민이자 어른으로서 우리에게는 사막화를 막을 책임이 있다.<br/><br/> p.91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인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정치란 오직 선거뿐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결과밖에 없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정당과 정치인들은 우리의 요구를 받아안아 정책으로 실행하고 법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그 앞에서만 우리는 공동의 선한 의도를 가진 성숙하고 단합된 국민이 된다. 전 세계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포풀리즘은 바로 이렇게 시작됐다.<br/><br/><br/> 비단 유형의 자원뿐만 아니라 여유, 배려, 관용 등의 필수 가치조차 파이 싸움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이 쟁투의 원인이자 목적일 사랑까지도 탐욕 앞에 무력해진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설 수밖에 없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으며, 국가는 성원의 존엄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br/><br/> 공존, 함께 살아가기, 동료 성원 따위는 먼 꿈이다. 우리, 더 진짜인 우리와 적뿐이다. 안으로, 더 좁고 작은 우리에게로만 향하는 탐욕이 모든 정의에 선행하는 사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만은 잘 사는' 사회는 역설적으로 누구도 살 수 없는 곳이다.<br/><br/> 저자는 성장해가는 아이와 변화된 사회적 요구에 분투하며 깨달은 바를 바깥에서 안으로, 다시 안과 바깥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사유로 펼쳐보인다. 육아와 교육, 나와 너와 수많은 타자들을 오가는 네 챕터의 글은 나와 아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 이대로여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요청에 가깝다. 그는 "돌봄의 어려움은 나 혼자 애쓴다고 덜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br/><br/> p.68 이종건은 《연대의 밥상》에서 연대는 "서로의 삶에 참견을 하는 일"이라고 했다. "당신의 고통이 나와 맞닿아 있기에" 도저히 방관할 수 없어 나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억울하면 의대 오라는 태도로는 연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 연대는 "결국 자기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br/><br/><br/> 홀로 태어나 살 수 없는 이상, 우리에게는 인간다운 인간일 책임이 있다. 나와 타자가 서로의 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타자의 생애 전체에 책임 있는 존재일 책무를 진다. 혼자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우리, 연약한 종으로서의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공동체를 이루는 것뿐이다. 더 취약하고, 느리게 따라오고, 이질적인 존재와 함께하는 것. <br/><br/> 수없이 직면하는 실패와 다름을 개인의 희생으로 무마하지 않는 것, 사회 전체가 상처를 기억하고 절망을 반복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 사회 전체의 하한선을 높이고 안전망을 강화하는 것. 결국, 지긋지긋하게도, 이 완전수동식 사회는 사람으로 이루어진다고 반복해야만 하겠다. 그것도, 타자 곁에 서는 사람, 안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하는 탐욕에 힘입어서만, 비로소.<br/><br/> p.111 앞서 우리가 배웠어야 할 것은 불신이 아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저 먼 타자의 죽음이 실은 나와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공동체적 감각이다. 모든 공동체는 그 안에서 "죽어가고 태어나는 개인들의 생각들과 업적을 흡수하면서 유지"된다. 공동체가 유기체인 이유다. (...) 그 어느 때보다 타인의 마음과 죽음을 더 많이, 더 깊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재난을 대하는 자세다.<br/><br/> p.220 결국 "인간이 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고 "자기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비참함과 직면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 이다. (...)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다 같이 쌓아 올려야 할 신뢰와 권위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 세계는 그렇게 인간에 의해 완성되어간다. 미추를 결정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br/><br/>*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04/29/cover150/k76213682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042953</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양조위, 우리들의 사랑의 기한은 만 년으로도 부족하지요 - [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 - 말보다 깊은 눈빛, 양조위의 삶·사랑·작품]</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15916</link><pubDate>Thu, 26 Feb 2026 19: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1591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72135255&TPaperId=1711591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83/66/coveroff/k27213525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72135255&TPaperId=1711591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 - 말보다 깊은 눈빛, 양조위의 삶·사랑·작품</a><br/>주성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2월<br/></td></tr></table><br/>스스로를 어째 평생을 가도 취향이라고 할만한 내용이 하나같이 애매한 방향으로 희한하게 생겨먹은 탓에 영화도, 배우도 메이저한 선에서 스몰토크라고 꺼내기 애매한 사람... 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뭐랄까, 세월의 향수 같은 이름들이 있기 마련이다.<br/><br/>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마음 한켠에 차오르는 슬픔, 그래, 차라리 애수라고 해도 좋을 그런 이름들. 알음알음 돌려 보던 비디오 속 영화는 불룩한 화면에 스치는 얼룩지고 흐릿한 조명들, 음울과 권태로 꽉 눌린 청춘과 불온하고 위태한 장면들로 기억된다. 클리셰임을 부정할 수 없는 판에 박힌 줄거리와 끈덕지게 따라붙던 뒷맛들과 함께.<br/><br/> p.10 그 감정을 자신의 절대적인 눈빛 속에 가둔다.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가장 큰 미덕은, 연기에서 과잉의 그림자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맡은 작품 속 인물과 관객이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큰 소리로 불러서 돌아보게 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먼저 다가오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느긋하게 지켜보고 기다린다.<br/><br/> p.139 "넌 꿈이 뭐야?"라는 질문에 그는 "24시간 해가 지지 않는 아이슬란드에 가고 싶다. 춥더라도 적어도 빛은 볼 수 있으니까"라고 답한다. 이처럼 〈첩혈속집〉의 양조위는 1997년 반환을 앞둔 불안한 미래 앞에서, 희망 없이 떠도는 홍콩 그 자체를 대변하고 있었다.<br/><br/><br/> 그 편린들 사이에 낯익은 얼굴이 있다.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몰라. 그저 양조위였을 뿐. 곧은 눈썹 아래 무구하고 순한 눈매가 꼭 어린 강아지같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누구도 상처입힐 수 없는 눈동자라고 생각했다. 배역을 떠나 사람이 그럴 거라고. 어리고, 순한, 둥그런 반복. 홍안의 양조위를,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br/><br/> 뭐랄까, 그에게는 꼭, 더럽혀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그런 얼굴에 이유 없는 악함을 부여한다는 건 어쩐지 모욕처럼 느껴질 만큼. 어느 세계에서든 그 얼굴을 믿어버리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처럼. 수줍고 깊고 외로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남자... 라는 생각에 몇 번을 속아넘어갔던가. 젠장. 가만 되짚어보면 그 손은 결코 희고 보드라운 적이 없었을텐데!<br/><br/> p.204 "유덕화는 배역과 끝없이 경쟁하고, 양조위는 배역과 쉽게 사랑에 빠지고, 장국영은 배역을 유혹한다." 경쟁하는 유덕화에게는 불가능한 장면이고, 유혹하는 장국영에게는 비누와 수건이 먼저 말을 걸어올 것이기에 역시 불가능하다. 오직 양조위만이 관객을 야윈 비누의 자리에 두는 마법을 발휘하며 우리를 편안하게 해준다. 양조위에게는 고독마저 자랑이 된다.<br/><br/> p.226 비교해볼수록 장국영과 유덕화처럼 세상 투명한 배우가 또 어디 있나 싶다. 그런데 유독 양조위만은 다르게 읽힌다. 현실과 픽션을 넘나들며, 단순히 '사려 깊고 착해 보인다'는 표현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배우는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왜 매번 알면서도 양조위라는 인간에게 속고 마는 것일까.<br/><br/><br/> 밉지 않은 배신감은 접어두기로 하고, 그의 이름과 거의 언제나 붙어다니던 감독들의 이름을 꼽아본다. 예를 들면, 이쯤 되면 거의 세트 수준이라고 봐도 좋을 왕가위랄지. 어렵잖게 그릴 수 있는 양조위의 필모그래피는 곧 그가 해석한 세계를 그려낸 아들이 바라본 사회와도 촘촘히 엮여 있다. 그것이 곧 역사가 아닌가.<br/><br/> 저자는 신통기... 홍통기? 를 도열하는 대신 생애부터 작품세계까지, 배우이기 전에 인간, 양조위라는 사람을 통해 말한다. 배우의 존재의의와 그 무게를. 비련과 허무로 뭉뚱그릴 수 없는 그때, 그 사람, 그 곳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를.<br/><br/> p.284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뜻하는 '화양연화'라는 제목은 과거 형처럼 들리지만, 공식 영어 제목은 앞서 말한 것처럼 '화양연화'를 고스란히 영어로 옮긴 'The Most Beautiful Day in Life'가 아니라, 지극히 현재적 느낌의 〈In the Mood for Love〉다.<br/><br/> p.285 말하자면 왕가위는 그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미 1997년 이후일지도 모를 미래의 시간을 보여준 것이다. 주 선생의 평행우주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처럼 양조위는 '왕가위의 시간'에서 모든 시간대를 산 유일한 배우라는 것을 넘어, 왕가위도 경험하지 못한 미래에서 살아가는 배우가 되었다.<br/><br/><br/> 배우로서 '시대를 풍미했다'는 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2027년을 코앞에 둔 지금,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날 배우 양조위와 그의 세계는 그리움일까, 절망일까. 아니면, 연약한 향수에 그치게 될까. 어쩌면 그의 세대가 제목 그대로 마지막 홍콩배우일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었을지도.<br/><br/> 사랑이 아닌지라, 만 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내년부로 끝맺어질 홍콩의 그 때를 기억하는지, 더는 묻지 못하게 될 날도 머지 않았겠지. 그저 한가지 확실한 건, 이 수줍고 과묵한 남자에의 애정에 불이 붙어버렸다는 것이다. 스크린 안팎, 배우 양조위와 인간 양조위 모두 응원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러니 애수와 찬탄을 담아 오래도록 말해주기를. 아, 양조위, 그야말로 진짜배기였지.<br/><br/> p.387 다큐멘터리가 보여준 '인간 양조위'는 '배우 양조위'와 다르지 않다. 이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포착한 이가 왕가위 감독이다. 말하려다 멈추고, 다가가려다 돌아서며, 사랑한다 외치는 대신 끝내 침묵하는 영화 속 양조위는 실제 그의 내면을 스크린에 투영한 결과다. <br/><br/>  p.398 〈동사서독〉에서 일거리를 찾아 매일 자신을 찾아 오는 맹무살수를 두고, 사막의 인력사무소장 구양봉이 했던 흥미로운 묘사가 떠오른다. "한물간 검객이지만 생활은 규칙적이다. 술 한 잔에 밥 두 그릇. 해질녘에 떠난다." 그처럼 맹무살수, 아니 일거리를 구하지 못했어도 성실하게 다음날을 준비하는 양조위의 규칙적인 일상과 함께라면, 홍콩영화는 결코 저물지 않을 것이다.<br/><br/><br/>*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83/66/cover150/k27213525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83664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믿음은 숫제 끝장이 났다. 완전 수동 민주주의의 시간이 다시금 도래하였느니. - [야만 시대의 귀환 -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무한 각축의 시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91174</link><pubDate>Sat, 14 Feb 2026 02: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9117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82135857&TPaperId=1709117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57/93/coveroff/k08213585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82135857&TPaperId=1709117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야만 시대의 귀환 -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과 무한 각축의 시작</a><br/>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2월<br/></td></tr></table><br/>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노래를 부르며 하나가 되는 지구촌, 자유와 진보의 상징인 '서방'과 단연 빛나는 선봉인 미국의 시대는 저물었다. 나날이 쇠락하고 있다. 실각하는 권력과 그 추종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 누가 이 권좌를 훔쳐갔지? 누가 감히 앞지르려 하지?<br/><br/> 그러나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을 때야말로 이렇게 물을 때다. 누가 그 종말을 앞당기고 있는가? 적들에 의해, 그들을 물리치고 '정상'을 회복하기 위해, 야만으로부터 문명을 지켜내기 위해. 혹은, 야만이야말로 우리의 본성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으므로. 전세계적으로 목도되는 상식의 붕괴, 폭력과 적대의 일상화.<br/><br/> p.5 자본 축적 과정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는 전 지구적 축적 과정을 총체적으로 조절하고, 가장 뛰어난 생산력과 기술력, 생산 능력 등을 가지고, 세계 금융 시장을 주도하고 세계 시장에서의 '규칙'을 정하면서 동시에 그 담론들을 세계인들의 상식으로 만들 수 있는 국가야말로 '패권 국가'입니다.<br/><br/> p.6 역사적으로 최초의 패권 국가는 17세기의 네덜란드였으며, 그 뒤를 이은 것은 바로 영국, 즉 19세기의 대영제국이었습니다. 1945년 이후에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바로 지금 쇠락해가고 있는 패권 국가 미국입니다.<br/><br/><br/> 전세계가 휘말린 전쟁, '서구 문명'의 발전과 대안 모색의 끊임없는 시도로 쌓아올려진 인간성이라는 허위가 그저 허구였음을, 지성과 문명의 대실패적 현장을 뼈저리게 까발려버린 전쟁 이후, 우리는 얄팍한 평화를 너무도 깊이, 절실하게 믿어버렸는지 모른다. 마치 이것이 정상이었다는 듯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끔찍한 과거의 지평선 너머로 안녕히, 영원히.<br/><br/> 그런데, 정말 이 야만으로의 회귀는 전례 없는 파멸의 서막일까? 아니면 신-미국이라는 새로운 과두체제의 창발일까? 설사 누군가의 경악어린 외침이 울려퍼진대도 꿈쩍이나 할까싶다. 이 파시스트들! 이만큼 무력한 외침이 없다. 저자는 말한다. 미국 주도의 서방 일극 체제가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특별하고 또 이례적인 순간이었다고.<br/><br/> p.164 파시즘이란 자본주의 국가의 원점, 일종의 출발점입니다.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 국가는 위기 타개책으로 종종 각종 형태의 파시즘을 선택합니다. (...) 한데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공격적 정책의 남발은, 비록 파시스트적 색채는 분명해도 아마도 히틀러 시대 독일과 같은 '질서 정연한 나라'를 만드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못 할 것입니다. 트럼프의 파시스트적 정책들이 궁극적으로 정책 난맥을 가중해 오히려 역으로 미국의 위기를 더 악화시키며 그 패권을 무너뜨릴 가능성도 큽니다.<br/><br/> p.210 민주-공화 양당 사이에 대립의 강도나 진행 방식 등에 대해 차이가 있으나 중국을 전략적인 경쟁자로 보는 데 미국의 주류 정계에서는 거의 이견이 없습니다. (...) 단, 미국의 패권 쇠락이 심화되고 트럼프의 콘크리트 지지층의 요구가 극단적인 만큼, 기존 정책들도 눈에 띄게 극단화됩니다.<br/><br/><br/> 미국의 중국 혐오와 '구역'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 태도를 남한 정치권이 어떻게 흡수하고 답습하고 있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한반도 요참 사태를 전후해 남한 정치사회의 주된 기조는 미국을 우방이자 우상으로 섬기는 태도였다. 기십년 사이에 급부상한 일부 집단의 미국에 대한 태도는 우방을 넘어 우국충정에 가까울 지경이기까지 하니 걱정스럽지 않을 수가.<br/><br/> 신패권질서의 주도국 지위를 꿰차려는 미국과 그 하위-우방들의 시도는 과연 '질서'의 공고함, 절대적 격차를 공고히 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을까?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좌파 운동 진영에서 미제 세력에의 대항 논리는 과연 얼마나 발전했는가? 과거의 영광이라는 허상에 매달려 현재를 등한시하고 있는 '그들'에 방심까지나 할 여유가 있는가?<br/><br/> p.154 이런 극우적 쇼 정치로는 이미 쇠락해 가고 있는 초강대국이 다시 위대하게 될 리가 없습니다. 단, 이런 쇼의 일환으로 한국까지 한미 동맹이라는 틀에 갇혀 한국 경제에 불리하기 짝이 없는 대중국 탈동조화 등의 정책 강압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그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트럼프주의 시대 미국에 대응할 수 있는 주체적인 외교 전략은 정말 중요합니다.<br/><br/> p.325 문제는, 이런 접근 방법이 여러 제국들이 미 제국이 쇠락하는 틈을 타서 서로 경쟁하고 주변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현 상황의 특색, 즉 제국 간의 모순들의 심화와 경쟁의 첨예화, 미국 이외 제국들의 상대적 영향력 강화 등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 여러 제국들의 대내외 정책과 이데올로기, 야망, 이해관계의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파악이야말로 진보적인 대응을 마련할 수 있는 첫 단계입니다.<br/><br/><br/> 혁신이든 실리든, 그 명목이 무엇이든 간에 현 세계가 문턱에 선 '야만 시대'는 그저 오랜 역사의 반복일지 모른다. 저자의 말처럼 이 패악 또한 반복이라면 그를 가능케 한 시민사회의 책임 또한 부정할 수 없을 테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하는 성원 모두의 숙명적 책임이라 할 수도 있겠다.<br/><br/> 유난히 길었던 지난 겨울, 민주주의는 완전히 수동이라는 말이 우스개처럼 돌았다. 끊임없이 신경써야 겨우 굴러간다고. 폭력만이 유일한 진리가 되려는 세계에서 그 말을 새삼스레 되새기는 것도 우연은 아닐 테다. 민주주의의 '민'으로 묻는다. 좋든 싫든 요동치는 세계에 놓인 지금, 무엇이 이 연쇄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의 것이 되기 위한 나와 당신의 책무란.<br/><br/> p.323 민주주의가 국가 정체성의 핵심인 구미권에서, 신분 하락과 상대적 빈곤화에 분노한 대중은 주류 정치에 대한 신뢰를 접고 트럼프와 같은 극우들에게 권력을 내주었고, 그 순간 민주주의도 무너졌습니다. (...) 구미권의 전반적 쇠락을 초래한 신자유주의는, 구미권의 최고 장점인 민주주의도 형해화시키고 말았습니다.<br/><br/> p.350 복지 국가도 그렇지만, 민주화는 일종의 조건부 사회계약입니다. 민의 자발적인 동원 능력과 투쟁 능력이 유지되는 이상 엘리트들은 싫든 좋든 민의 정치 참여를 보장합니다. 폭동이나 혁명을 통한 민의 표현보다 투표를 통한 민의 표현이 '통치성' 차원에서 훨씬 낫기 때문이죠. 한데 민의 동원 능력과 투쟁 능력이 떨어지는 그 순간, 민주주의라는 사회계약은 자동 해약됩니다.<br/><br/><br/>*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57/93/cover150/k08213585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579319</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Hic sunt 'THE SEA' - [흑해 - 세상의 중심이 된 바다의 역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80693</link><pubDate>Mon, 09 Feb 2026 02: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8069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52135911&TPaperId=1708069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66/89/coveroff/k05213591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52135911&TPaperId=1708069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흑해 - 세상의 중심이 된 바다의 역사</a><br/>찰스 킹 지음, 고광열 옮김 / 사계절 / 2026년 01월<br/></td></tr></table><br/>전국이 사실상 섬인 국가의 성원, 개중에서도 본토라고 할만한 반도 거주민으로 평생을 살아온 탓에 바다는 언제나 망망대해, 열린 공간이었다. 그렇잖아도 국토라고 해봤자 손바닥만한 당일 생활권이 태반이라 더더욱. 해외가 곧 자국 바깥, 외국-집단의 동의어로 쓰이는 것만 봐도 알만하지 않은가.<br/><br/> 땅으로 둘러싸인 바다라는 건 뭘까. 바다 너머에 이 땅과 '이어진 대륙'이 있어 딱 잘라 이것으로 나와 그들의 경계를 그을 수 없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흑해를 그 희한한 지리의 대표 사례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br/><br/> p.25 역사와 사회 연구에는 육지 중심의 편견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우리는 역사와 사회생활이 땅 위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 예컨대 바다를 항해하거나 강을 타고 내려가는 여정은 단지 배우들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펼칠 진짜 연기를 위한 무대 장치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대양과 바다, 강들은 단순히 통로나 경계가 아니라 인간의 상호작용과 교류라는 독특한 이야기들의 핵심 주역으로서 자기만의 역사가 있다.<br/><br/> p.75 다른 변경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폰토스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마주친 종족들의 문화에 적응하고 심지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들만의 방식을 찾아냈다. (...)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고전기 아테네의 시인과 극작가가 상상했던 '그리스인'과 '야만인' 사이의 명확한 문화적 경계선은 실로 매우 흐릿해졌다.<br/><br/><br/> 한때는 거친 바다, 또 언젠가는 간절한 기원을 담아 환대의 바다, 이제는 검은 바다로 불리는 그것은 '동서양'의 중간지대, 야만과 문명 사이의 공백. 언젠가는 대재앙의 현장이었다가, 미개인과 '도시' 바깥의 험지였던 때를 지나, 무역의 중심지이자 갓 움트던 유럽의 개념적 연장이 되었고, 이제는 범세계적 이권다툼의 요소로 여겨진다.<br/><br/> 야망과 생업, 죽음과 침탈의 가능성 그 자체였던 검은 바다는 세계의 끝이자 지정학적 요충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로 들끓고 있다. 여전히. 땅의 바다, 대륙의 확장. 흑해는 언제나 신과 인간, 문화와 종족의 교차로였다. 언젠가는 미지의 땅에 용을 그렸다지. 'Hic sunt dracones'. 이 바다 너머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용이 있다. 침탈과 교잡, 낯선 이름이라는 피가 흐르는 존재.<br/><br/> p.155 복원된 비잔티움은 해협의 제국에 불과했고, 발칸과 카프카즈의 다른 기독교 왕국과 아나톨리아의 투르코만 에미르국에 둘러싸인 비교적 작은 세력이었다. 경제와 대외 무역은 대부분 이탈리아인들 손에 남았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조금만 올라가면 닿는 흑해는 이제 사실상 제국 통제권의 지평선 너머에 있었다. <br/><br/> p.241 흑해는 더 이상 내해, 즉 제국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는 땅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물길이 아니었다. 이제 변경이 된 것이다. 1600년대 후반까지 북쪽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러시아는 이처럼 변화된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br/><br/><br/> 고대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역사를 톺아보는 작업에 어떤 도덕적 잣대로 첨언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일이다. 다만 언젠가 세계의 끝이었던 이곳에서 다채로운 문명이 꽃피고 뒤섞였음을, 수많은 역사의 시발점이자 종착이였음을 되새겨본다.<br/><br/> 소련 붕괴 이후 그나마 오락가락하던 짧은 '평화'의 환상마저 숨통이 끊긴 지금, 전장으로 재구성되는 이 바다, 한때 변경이자 경계였던 '이 장소'를 묻는다. 죽음의 바다는 결코 자연만을 의미하지 않았으리라. 이곳은 누구의 바다인가, 혹은, '영토'인가. 공백을 공-존으로 두지 못하는 인간의 자리가 저 깊은 곳에 있겠거니, 희망과 절망의 뒤섞임을 저 아래 가라앉히며.<br/><br/> p.377 바다와 해안의 진정한 소유권에 관한 논쟁이 학술지와 책들의 지면에서 벌어졌다. (...) 이런 논쟁은 실제 정치적 결과로 이어졌다. 역사가의 연구가 특정 영토 합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됐고, 영토에 대한 역사적 권리 주장은 평시 실지회복 운동의 기반이었으며 종종 또 다른 전쟁의 출발점이었다.<br/><br/> p.435 (역자 후기) 21세기 흑해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와 20세기 냉전 시대의 지정학이 중첩되는 복잡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흑해가 앞으로도 국제 정치의 주요 갈등 지점이자 협력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역동적 공간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br/><br/><br/>*도서제공: 사계절]]></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66/89/cover150/k05213591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4668977</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제발... 제발이라는 감정. 끝에, 반짝이는 눈가, 그것은. -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77247</link><pubDate>Sat, 07 Feb 2026 16: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7724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82135013&TPaperId=1707724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73/37/coveroff/k2821350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82135013&TPaperId=1707724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a><br/>요아힘 마이어호프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26년 01월<br/></td></tr></table><br/>언젠가는 광인, 부랑자, 사회의 온갖 문제적 존재를 한 데 쑤셔넣는 곳이었다가, 또 언젠가는 치료를 빙자해 죽을 때까지 가둬놓는 격리소였다가, 시간이 흘러 이제는 주립 어린이청소년 정신병원. 환자 수 천오백 이상, 한가운데엔 원장 관사. 그곳이 바로 밤이면 환자들의 울음소리에 잠이 들고 아침이면 실랑이와 발작 가운데 씩씩하게 등교하는 주인공의 집이다.<br/><br/> 박식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 시시때때로 속을 긁어놓는 두 형... 에 지지 않는 환장과 황당의 결정체같은 막내, 요세. 그가 풀어주는, 엉뚱발랄 따위의 깜찍한 수사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은, 뭐랄까. 얘야 제발. 요세, 막내야, 대체 뭐가 문제니. 진정하고 제발 말로 좀 해라. 안돼 하지마! 뭐든간에 멈춰!!!<br/><br/> p.131 나는 말을 떼기도 전에 그들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기 때부터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 한다. 이상할 게 없다. 주변에서 밤마다 수천 명의 사람이 그렇게 비명을 질러대는데 나까지 울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새들이 아침의 특정 시간대에 노래하기 시작하듯 저녁 울음소리에도 일정한 논리가 있는 듯했다.<br/><br/> p.482 나는 그들의 무절제함, 끊임없는 소란, 그리고 내게는 너무나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던 그들의 일상적 광기가 그리웠다. 또한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의 분명함을 그리워했다. 수많은 환자들이 운명처럼 갇혀 있던 존재의 숨김없는 명료함을. 그리고 무엇보다 밤마다 울려 퍼지던 환자들의 무수한 절규를 그리워했다. 나를 그토록 기분 좋게 잠들게 했던 그 절규와 비명을.<br/><br/><br/> 꼬마에서 청년이 되기까지 자잘한 에피소드는 이따금 황당하고, 당황스럽거나 또 사랑스럽다. 어린이의 눈으로 보는 환상적이고 치열했고, 불가해한 갈등과 미처 알지 못했던 어른의 사정들, 짜릿한 비밀 사이사이를 채우는 것은 반짝이는 순간들이다. 사랑이거나, 두려움이거나... 슬픔 같은. 자연히 묻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br/><br/> 어쩌면 의심할 바 없이 당연하고 단단했던 불확실성의 집합으로 빨려들어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유년의 영웅이 그저 인간에 불과했음을, 때로는 어리석고 추잡하고 두려워하는, 언젠가 늙고 병들어 죽는 한 명의 사람. 정상과 광기, 어른과 아이, 안과 밖의 다름과 동시에 인간 존재의 근원적 동일성을 납득하게 되는, 아릿한 통증.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br/><br/> p.248 슐라이 요트 클럽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이 우리를 맞았다. 이때부터 아들을 배 밖으로 내동댕이치고 바람 강도 0 상태에서 조난당해 구조된 교수의 이야기가 슐레스비히 회원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그것도 모두 면허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br/><br/> p.457 "참, 이상하지. 나는 내가 왜 소위 정상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보다 소위 정상적이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서 항상 더 편안함을 느끼는지 자주 생각했어. (...) 다른 의사들한테 부끄러워. 병든 의사라는 건 왠지 어울리지 않으니까. 이 작은 도시의 모두가 그걸 알아. 누가 병든 의사한테 자기 자식을 맡기겠니?"<br/><br/><br/> 종장에 다다라 그가 마주친 장면에 어떤, 아릿한 통증을 감각한다. 크으으으으게. 크게, 말고, 돌아 유리창 너머 소년의 눈동자, 흐려졌다 떠오르기를 반복하는, 단지 그뿐인 순간에 비로소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동시에 묻고 싶어진다. 너무 긴 포옹과 통제 불능한 존재들과 바깥의 삶은 무엇이 달랐겠느냐고.<br/><br/> 그리고, 어째서, 이렇게나 그리운걸까. 이 정신사납고 사랑스럽고 난감한 일화들로 낱낱이 꿰인 삶을 따라가노라면 존재를 이루는 기억과 세계의 토대란 과연 이런 의미겠거니, 싶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슬픔은 단단하고 작은 조각이 된다.<br/><br/> 어떤 순간은 잊혀질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기이하고 곤란한 존재들의 형태로 마음에 남아 삶이 되고 그또한 누군가의 마음에 남아 이어지고. 그렇게 한때 이해할 수 없는 분노에 발작적으로 휩싸이던 소년은 유년의 일상이었던 불가해와 기나긴 포옹으로 하나가 된다. 찬란과 고통의 혼잡 한가운데서 독자는 그와 함께 조금 더 어른이 된다. 아침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br/><br/> p.479 내가 기억의 꾸러미를 다시 하나하나 풀어 꺼내놓을 때, 겉으로 확실해 보이는 과거에 대한 믿음을 접고 과거를 혼돈으로 받아들이고 형상화하고 꾸미고 기념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나의 죽은 이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 친숙하면서도 내가 지금껏 인정한 것보다 더 낯설고 자율적인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나는 현재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미래는 그 영원한 약속을 이행하고 불확실해지고, 하나의 선이 하나의 면으로 넓어질 것이다.<br/><br/>*도서제공: 사계절]]></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73/37/cover150/k2821350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4733734</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허영이라는 오욕, 생존이라는 혁신 그 사이 어딘가에서 - [얼굴 만들기 - 성형외과의의 탄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77077</link><pubDate>Sat, 07 Feb 2026 14: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7707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542&TPaperId=1707707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91/41/coveroff/893292554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542&TPaperId=1707707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얼굴 만들기 - 성형외과의의 탄생</a><br/>린지 피츠해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01월<br/></td></tr></table><br/>'성형수술'이라는 말에 거리며 웹사이트를 도배하는 '이상적인 외형'의 모델들을 떠올리지 않는 이가 드물 것이다. 돈만 주면 티도 안 나게 딴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며 이리저리 긋는 절개선이며 보형물을 늘어놓는 광고를 질리도록 보고 또 보는 일상에도 익숙할 것이다.<br/><br/> 과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가끔가다 섬뜩하게까지 느껴질 지경인, 거의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성형외과에 대한 시선은 비대칭적으로 양분되어 있다. 한쪽은 다분히 미용의 영역으로서 가히 자연의 수준을 벗어난 경지를 추구하는 '사치', 반대편은 생성과 재건, 조립과 해체 등 지극히 첨예한 기술의 장으로.<br/><br/> p.157 그가 고향에 도착했을 때는 환영 행진도, 악단도 없었고 예전 약혼자뿐 아니라 많은 주민이 그의 달라진 얼굴에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예전 직장을 찾아갔을 때 사장은 손님들이 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랄 수 있으니 뒤쪽 구석에서 잡일이나 하라고 했다. 이런 푸대접에 분개한 그는 사직서를 내고 나왔다. 상처는 전쟁터에서만 입는 것이 아니었다.<br/><br/> p.328 미용 시술에 대한 관심이 역사상 가장 높아지긴 했지만 선천적 이상, 외상, 질병으로 달라진 몸을 복원하고 기능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재건 수술은 여전히 이 분야의 주류로 남아 있다. (...) 추진력이 무엇이든 안면 이식이 일부 환자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고형 음식물을 먹고, 자력으로 호흡을 하며, 더 나아가 평생 처음으로 냄새를 맡을 수 있게 해줌으로써다.<br/><br/><br/> 개중 후자가 압도적으로 궁핍과 과로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일단 제쳐두기로 하자. 저자는 대량살상무기 급진보의 실험대였던 세계대전에 활약한 의사들을 중심으로 성형이 왜 외과에 속하는지, 어쩌다 학문의 영역에까지 확장되었는지, 무엇보다도 그 필요성이 대두된 기원이 무엇이었는지를 병원 안팎의 생생한 사례를 중심으로 풀어놓는다.<br/><br/> 그 가운데 어떤 '미용'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 앞서 제쳐둔 후자.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와 타인 모두에게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그를 위한 시도들은 말 그대로 생존의 영역에 닿아있었다. 사람의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폭력에 맞닥뜨린 이를 '인간'으로 되돌리는 힘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서의 삶을 위한 토대였다.<br/><br/> p.168 가면의 목표가 병사의 존엄성을 회복시키고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긴 하지만, 가면 자체는 그 궁극적인 목적을 상기시키는 역할도 했다. 바로 가리는 것이다. 관람객을 위해 쓸 때가 그렇다. <br/><br/> p.324 길리스는 얼굴을 재건하는 일 외에도 제2차 세계 대전 때와 그 뒤에 부상병의 생식기 재건 수술도 했다. (...) 길리스는 새 환자에게 급성 요도밑 열림증이라는 허위 진단서를 써주었다. 요도 구멍이 잘못된 곳에 생기는 선천성 결함이었다. 진료실에 오는 딜런이 성전환자임을 숨겨서 보호하려는 조치였다. 길리스는 몇 년에 걸쳐 딜런에게 13차례 수술을 했다.<br/><br/><br/>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에서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매달리는 마음은 뭔지. 그리고, 그렇게 살려낸 사람을 도로 끌어가 기어코 죽여버리는 높으신 분들과 명분이란 게 대체 무엇이었을지. 수없이 죽어나간 다음에야 하나둘씩 살릴 방도를 찾아낸다는 게 과연 인류사의 진리일지.<br/><br/> 수술대 위의 존재가 더 아름다운 '용모'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 또한 여상해진 지금, 과연 누가 그 언젠가의 수술실 안팎에서 벌어지던 사투를 기억할까. 누가 '무엇'을, 어떻게,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왔는지를. 역사의 끝, 현재에서 그 기원을 다시 묻는다.<br/><br/> p.102 의사들은 서둘러 부상병들을 깁고 꿰매면서도, 의도치 않게 그들이 회복되면 더 강력해질 전쟁 기계에 인력을 공급하고 있었 다. (...) 〈이 통탄할 결과 에서 그나마 긍정적인 점이 하나 있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전시에 의사들이 획득한 지식으로부터 인류가 혜택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격렬해질 시기에는 오로지 한 가지에만 초점이 맞추어졌다. 가능한 한 빨리 치료하여 최대한 많은 병사를 전선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br/><br/> p.256 제1차 세계 대전 때 이루어진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결정과 마찬가지로, 그 명령도 상부의 보이지 않는 손들을 통해 전달되었다. 클레어가 받은 명령은 새 환자들을 위해 침대를 비워 주고 전쟁 기계에 인간이라는 연료를 계속 공급하라는 것이었다. (...) 그리하여 클레어는 치료받다가 만, 멍들고 부은 상태로 다시 싸우러 갔다.<br/><br/><br/>*도서제공: 열린책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91/41/cover150/893292554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4914168</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앎과 삶, 동떨어진 간극에서 가능성을 찾자. 자리하자. 손을 내밀고, 우리가 우리임을 마주하자. - [앎과 삶 사이에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64265</link><pubDate>Sun, 01 Feb 2026 15: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6426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32135313&TPaperId=1706426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96/38/coveroff/k7321353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32135313&TPaperId=1706426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앎과 삶 사이에서</a><br/>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2월<br/></td></tr></table><br/>이 사람의 글은 양심을 정면으로 찔러들어오는 경향이 있다. 언젠가 처음 읽었던 그의 책 제목은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였더란다. 그때는 어느정도 심상히 넘긴 감이 없지 않았다. 생각을 글로 써내는 일이 업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br/><br/> 당시, 대선 후로 반년쯤 지난 때에, 나는 그간의 삶이 부끄러웠다. 아는 줄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알지 못하고 흘려버린 것들, 눈 감고 귀 막아 등돌린 이들에 속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로부터 해가 네 번 바뀐 지금, 말할 때도 아니고 글로만 정의롭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사람도 아니다.<br/><br/> 텍스트 뒤로 숨어서만 입바른 소리를 떠들곤 이내 흘려버린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적기엔 해묵은 악수들이 극단적 형태로 얽혀버린 경우에 불과하다. 어떤 일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거나 잊혔으며, 심지어 더 나빠졌다. 어떤 일상은 여전히 회복되지도, 상상되지도 않는다. 앎과 삶 사이는 여전히 멀찍이 데면데면하다.<br/><br/> p.29 동정도 숭배도 불평등한 관계를 기반으로 한 감정이다. 그래서 자칫 모욕이 된다. 차별 없는 평등이 답이다. (...) 서로 다른 정체성들은 교차해야 하고, 쟁점들은 자신만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 다중화되어야 한다. 서로 혐오해서는 존엄해질 수 없다.<br/><br/> p.209 사실 더 많은 사람이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위태롭고 불안정한 생계에 묶여 싸우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싸울 이유가 가장 절실한 이들은 바로 그 이유 탓에 싸우지 못한다.<br/><br/><br/> 사회 곳곳의 걷잡을 수 없는 균열에 '새로운 정의'가 들어섰다. 굴러떨어지는 이들은 대강 공백인 셈 치고 어떻게든 패를 갈라 그 간극을 벌리려 애쓴다. 이건 정치도 뭣도 아니다. 패싸움이고 땅따먹기지. 사람이 살기 위해 모인 사회가 누군가를 사람 바깥으로 밀어내야만 동력을 얻는다.<br/><br/> 소수의 권력을 탓하기엔 당장의 삶에 급급한 평범한 이들이 절대 다수다. 침묵과 외면은 적극적인 동조가 된다. '나도 힘들다'는 말의 모순에 눈 막고 귀 감아 자리를 뜬다. 수사와 편가르기를 떠나 '무결하고 죄 없는 시민'은 어디에도 없다. 등돌려진 책임만이 덩그러니 남아 던져질 돌이 된다. 죄인 찾아라. 일단 우리는 아니겠지만.<br/><br/> p.141 시험도 안 거친 비정규직이 내가 노력해서 성취한 정규직과 같은 처우를 받는 건 못 보겠다는 '민주 시민'도 드물지 않다. 연대를 외치던 입으로 차별을 옹호한다. 그렇게 함께 지옥을 만든다.<br/><br/> p.264 지금은 내란 막기에 힘을 모아야 하니 '탄핵 이후의 세상' 같은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들 한다. (...) 내란을 막자면서 왜 부자가 더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지 모르겠다. 내란을 막자면서 왜 당신들이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윤석열은 나쁘지만, 세상의 고통이 모두 그의 탓은 아니다. 어떤 슬픔들은 당신들에게서 나온다. 지지하거나 묵인하는 우리의 응원을 받으며.<br/><br/><br/> 저자의 첫 책에 "부끄러웠던 자만이 스스로의 정의에 의문을 품는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사는 세상을, 편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이라면, 적어도 스스로의 자리와 관점에 대해 숙고해볼 수 있는 이라면 일독을 권한"다고 남겼었다. 지금의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다. 오래도록 그래왔듯이.<br/><br/> 앞서 말했듯, 앎과 삶 사이는 허허벌판마냥 황량히 동떨어져있다. 그 사이에 놓인 건 '어쩌면'이나 '예외들'이 아닌 실재하는 이들이다. 우리들이다. 일상이어서는 안 될 평범들이다. 손을 뻗는다. 모래와 먼지와 바람과 풀로 뒤덮인, '최초의 악수'를 위해. 하지 않음보다 늦는 것은 없다는 말을 되새기며.<br/><br/> p.68 사실의 해상도를 높이고 복잡한 콘트라스트를 인식하려는 노력은 지식인 사회에서도 종종 실패한다. 물론 국가는 힘도, 실체도 뚜렷하다. 다만 죽어가는 것, 고통받는 존재는 국가가 아니라 사람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br/><br/> p.333 약하고 사소한 존재들은 각자의 모양대로 세상에 '구멍'을 남긴다. 구멍은 그들의 죽음 후에도 뚫린 채 남아 세상에 균열을 내고 무언가를 남긴다. 그 구멍 속에 '작은 것들의 신'이 있다. 작가는 '세상의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의 연관성을 밝히고, 그 연관성이 어떻게 인간 삶을 형성하며 인간관계를 결정짓는지를 보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밝힌다.<br/><br/><br/>*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96/38/cover150/k7321353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496381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주님, 한 말씀만 하소서. 대강 주물러져 남으리이다. - [성경 왜곡의 역사 - 증보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63538</link><pubDate>Sun, 01 Feb 2026 01: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6353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5014&TPaperId=1706353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73/74/coveroff/k12213501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5014&TPaperId=1706353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성경 왜곡의 역사 - 증보판</a><br/>바트 어만 지음, 민경식 옮김 / 갈라파고스 / 2026년 01월<br/></td></tr></table><br/>역사상 가장 많이 '팔렸다'는 책, 성경. 통독이야 교인도 쉽지 않다 쳐도 존재 자체나 그것이 신자들에게 갖는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만들어진' 이래, 때마다 철마다 진리처럼 불려나오는 이 오래된 텍스트는 과연 교리처럼 완벽불변하는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는 걸까?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br/><br/> 익히 알려진 성서무오설이니 축자영감설이니, 거창한 수사를 빌지 않더라도 전능한 유일신의 '말씀'이 시대에 따라 다르고 사람에 따라 달리 말해진다고, 쉽사리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외로 눙치기엔 너무 많다.<br/><br/> p.91 어떤 필사자가 실수로든 의도적으로든 한번 본문을 바꾸면 그 이문은 사본 속에 영원히 남게 된다. 다른 필사자가 수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이문을 담고 있는 사본을 바탕으로 또 다른 사본을 만드는 필사자는, 그 이문들도 저자가 말하고자 한 바라고 믿으며 그대로 베낀다. 그런데 그뿐일까? 이 필사자 역시 새로운 이문들을 만들기 마련이다. 또 이 사본을 베끼는 후대의 필사자는 앞선 두 필사자가 만들어낸 실수에 자신만의 실수를 더한다. 이문에 이문이 덧붙는 셈이다.<br/><br/> p.117 중세 필사자들은 그렇게 전문적인 방식으로 베껴 쓴 사본을 어디서 구했을까? 이들은 분명히 이전 단계의 사본을 필사했으며, 그 사본들 역시 그 이전 단계의 사본을 필사했다. 물론 그것은 또 그 이전 단계의 사본을 필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형태상 원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이라고 한다면,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후기의 표준화된 전문 필사본이 아니라 초기의 조잡하고 다양한 형태의 사본들일 것이다.<br/><br/><br/> 신앙의 세계에서 자란 저자가 실제로 마주한, 빈번하다고 하기에도 민망할만큼 무수한 자기모순과 충돌의 역사에 퍽 당황할만도 하다. 무류한 말씀입네 성령으로 받아적었네 해놓고선 이렇게까지 막 주먹구구로 뜯어고쳐도 되는 건가, 싶을 지경이었으니, 읽고 쓴다는 것, 이해한 내용을 전달하고 정리한다는 것, 무엇보다도 '변개'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br/><br/> 종장에서 독자는 어떤 이해에 가닿게 된다. 필사에 '연루'된 이들 모두가 사람이라는 것. 믿음의 세계, 교단의 세력 확장에 결부되는 분열을 통제하기 위한 시도가 필연히 그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 그리하여 가장 탈속적이어야 한다고 믿어지는 영역이야말로 지극히 세속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br/><br/> p.148 어떤 경우에는 필사자들이 본문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독자의 오해를 막기 위해 본문을 변개하기도 했다. (...) 때때로 필사자들은 보다 신학적인 이유로 변개하기도 했다. '이단들'이 본문을 자의적으로 이용할 수 없게 하거나, 필사자가 이해한 의미를 더 분명하게 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br/><br/> p.230 2세기와 3세기만 해도 이렇듯 일치된 견해가 없었다. 합의된 정경과 교리가 없었으며, 매우 다양한 모습의 신학적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예수의 사도들이 썼다고 주장되는 다양한 문서를 기반으로 다양한 분파가, 다양한 신학을 주장했다.<br/><br/><br/> 다시, 현재, 신이 죽고도 남은 이 시대에 왜 수천년 묵은 텍스트의 변천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가, 하면, 이 성스러운 '말씀'이 기천년을 이어져온 종교의 뿌리인 동시에 지극히 인간적인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신의 실재와 전능에의 믿음과는 별개로, 그 이름을 빌어 말하고 행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br/><br/> 시작이야 산꼭대기든 동산이었든 간에,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해져온 말. 필연히 오류와 의지의 산물일 믿음으로 이어지는 섭리에 대해 물을 책임은 인간에게 있었다. 언제나. 신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인간의 폭력이 또다시 세계를 좀먹는 지금, 묻고 싶다. 무엇을 믿겠습니까.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어떤 세계에서 대화할 책임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br/><br/> p.278 요약하자면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는 여성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으며, 간혹 이런 논쟁은 신약성서의 전승 과정에서 본문에 유입되었다. 필사자들은 때때로 성서 본문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교회 내 여성의 (제한된) 역할에 더 부합하도록 본문을 변개하곤 했다.<br/> <br/> p.324 본문을 읽으려면 그것을 마음속에서 다른 말로 표현하는 수밖에 없고, 그러려면 표현하기 위한 다른 말을 이미 가지고 있어야 하고 (...) 살아있다는 것은 곧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온갖 요소들 즉 욕구, 갈망, 필요, 바람, 신념, 관점, 세계관, 의견, 기호, 혐오 등으로 채워져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을 읽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본문을 변개하는 행위이다.<br/><br/><br/>*도서제공: 갈라파고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73/74/cover150/k12213501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4737449</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삶은 그렇게, 만은, 끝나지 않는다. - [바움가트너 (애나 일러스트 리커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42801</link><pubDate>Sat, 24 Jan 2026 16: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4280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550&TPaperId=1704280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36/30/coveroff/893292555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550&TPaperId=1704280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바움가트너 (애나 일러스트 리커버)</a><br/>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01월<br/></td></tr></table><br/>지난 봄께 처음 읽었던 이야기를 봄을 앞둔 추위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읽는다.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겨울의 끝자락, 이번만 지나면, 약속처럼 떨치는 위세에 묻는다. 삶의 의미가 뜯겨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을 떠나보낸 자리에, 찰나에 끝나버리지 않는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br/><br/> 무구하고 천진한 계절에서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한 풍경을 지나, 침묵 속에 다시 덮는 순간. 사람 키만큼 온다는 눈에 파묻히고 싶어졌다. 무작정 걷고 싶었다. 숲에 들어가 나오지 않은, 옛날 일이 되고 싶었다. 문득 돌아본 길에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기를 바라다가, 쓸려가다 만 흔적을 도로 밟아 새기고 싶었다.<br/><br/> p.14 어쩌면 자신, 바움가트너가 냄비에 손을 덴 바로 그 순간 플로렌스 씨도 손가락이 잘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찾아온다. 불행의 원인은 각자 자기 자신이고, 한 사람의 불행이 다른 사람의 불행보다 훨씬 크다 해도, 그래도, 각각의 경우-<br/><br/> p.36 그날 오후 신들은 아직 젊은 자아가 왕성한 힘을 내뿜고 있던 아내를 그에게서 탈취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그의 팔다리가 몸에서 뜯겨 나갔다. 네 개 전부, 팔 둘과 다리 두 개가 모두 동시에. (...) 그는 이제 인간 그루터기,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던 반쪽을 잃어버리고 반쪽만 남은 사람인데, 그래, 사라진 팔다리는 아직 그대로이고, 아직 아프다. 너무 아파서 가끔 몸에 당장이라도 불이 붙어 그 자리에서 그를 완전히 태워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br/><br/><br/><br/> 이전의 기록을 읽어보았다. "삶은 통증이었다. 환상임에도 더욱 생생하고 고통스럽게 달라붙는 환지통과 같은 그리움. 이대로 안고 살겠거니, 얼마쯤 고여있는 마음을 출렁이며 꼭 하루씩을 느리게 이어가는 삶. 그에게 과거가, 아니, 여전히 현재인 기억이 숨막히게 피어나는 순간, 새로운 이야기들이 더해진다".<br/><br/> 그 아래 작게, 언제고 떼버릴 요량으로 얹어둔 메모에는 이렇게 썼더랜다. 어떤 상실은 도난-당함이다, 뜯겨나감이다. 그 바로 다음 줄에는, 환상통은 마취 없는 절단에 발병한다, 라고. 옳은지 아닌지는 몰라도. 으레 환지통으로 불리는 그것은 phantom이다. 유령처럼. 닿을 수도 헤집을 수도 없는 것. <br/><br/> p.77 애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더니 그가 전화기를 든 이후 처음으로 질문을 한다. 지금 내가 한 말들 알아듣겠어? 바움가트너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애나의 숨이 멈추고, 말이 멈추고, 전화선이 죽어버린다.<br/><br/> p.228 엉뚱한 곳으로 들어가지 마라, 도로에 어수선하게 깔린 파인 곳이나 떨어진 물체를 피해 방향을 틀어라, 어떤 경우에도 다른 차와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충동적인 모험은 절대 하지 마라. 충돌은 사실 치명적일 수 있고, 일단 죽으면 영영 죽은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br/><br/><br/> 그렇다고 사이 바움가트너, 이 외로운 남자의 날들을 고립과 고사 언저리에 매어두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이런 삶도 있다고, 볼 장 다 보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바닥났다 해도 다음 장이란 게 남아 있다고, '가만한' 위안을 남겨두고 싶어졌다. 지나간 자리에, 오래도록 머무른 흔적에.<br/><br/> 그러니까, 여전히 두서없는 마음에 물음표가 되다 만 호선 비슷한 것을 슬쩍 두어도 좋겠다면, 묻고 싶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게 끝없는 해변을 걷는 일과 같다면,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란 간간이 밀려드는 그리움에 발을 적시면서도 나아갈 수 있는, 그냥 그렇게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렇게.<br/><br/> p.245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주인공은 이마의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 채로 얼굴에 바람을 맞으며 도움을 찾아 길을 떠나고, 첫 번째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릴 때 S. T. 바움가트너 모험담의 마지막 장이 시작된다.<br/><br/> p.254 (김연수 에세이) 인생의 후회는 대개 이런 식이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소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내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선택과 행동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를 들어 한밤에 잘못 걸려 온 전화를 받고는 자신이 그 사람이 맞다고 말한다면? 그때도 인생은 바뀔 테지만, 번개를 맞는 일과는 미묘하게 다를 것이다. 내가 겪지 않은 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한 일에 의해서 인생은 바뀌는 것이니까.<br/><br/><br/>*도서제공: 열린책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36/30/cover150/893292555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436308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삶은 그렇게, 만은, 끝나지 않는다. - [바움가트너 (애나 일러스트 리커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42800</link><pubDate>Sat, 24 Jan 2026 16: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428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550&TPaperId=170428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36/30/coveroff/893292555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550&TPaperId=170428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바움가트너 (애나 일러스트 리커버)</a><br/>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01월<br/></td></tr></table><br/>지난 봄께 처음 읽었던 이야기를 봄을 앞둔 추위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읽는다.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겨울의 끝자락, 이번만 지나면, 약속처럼 떨치는 위세에 묻는다. 삶의 의미가 뜯겨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을 떠나보낸 자리에, 찰나에 끝나버리지 않는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br/><br/> 무구하고 천진한 계절에서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한 풍경을 지나, 침묵 속에 다시 덮는 순간. 사람 키만큼 온다는 눈에 파묻히고 싶어졌다. 무작정 걷고 싶었다. 숲에 들어가 나오지 않은, 옛날 일이 되고 싶었다. 문득 돌아본 길에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기를 바라다가, 쓸려가다 만 흔적을 도로 밟아 새기고 싶었다.<br/><br/> p.14 어쩌면 자신, 바움가트너가 냄비에 손을 덴 바로 그 순간 플로렌스 씨도 손가락이 잘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찾아온다. 불행의 원인은 각자 자기 자신이고, 한 사람의 불행이 다른 사람의 불행보다 훨씬 크다 해도, 그래도, 각각의 경우-<br/><br/> p.36 그날 오후 신들은 아직 젊은 자아가 왕성한 힘을 내뿜고 있던 아내를 그에게서 탈취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그의 팔다리가 몸에서 뜯겨 나갔다. 네 개 전부, 팔 둘과 다리 두 개가 모두 동시에. (...) 그는 이제 인간 그루터기,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던 반쪽을 잃어버리고 반쪽만 남은 사람인데, 그래, 사라진 팔다리는 아직 그대로이고, 아직 아프다. 너무 아파서 가끔 몸에 당장이라도 불이 붙어 그 자리에서 그를 완전히 태워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br/><br/><br/><br/> 이전의 기록을 읽어보았다. "삶은 통증이었다. 환상임에도 더욱 생생하고 고통스럽게 달라붙는 환지통과 같은 그리움. 이대로 안고 살겠거니, 얼마쯤 고여있는 마음을 출렁이며 꼭 하루씩을 느리게 이어가는 삶. 그에게 과거가, 아니, 여전히 현재인 기억이 숨막히게 피어나는 순간, 새로운 이야기들이 더해진다".<br/><br/> 그 아래 작게, 언제고 떼버릴 요량으로 얹어둔 메모에는 이렇게 썼더랜다. 어떤 상실은 도난-당함이다, 뜯겨나감이다. 그 바로 다음 줄에는, 환상통은 마취 없는 절단에 발병한다, 라고. 옳은지 아닌지는 몰라도. 으레 환지통으로 불리는 그것은 phantom이다. 유령처럼. 닿을 수도 헤집을 수도 없는 것. <br/><br/> p.77 애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더니 그가 전화기를 든 이후 처음으로 질문을 한다. 지금 내가 한 말들 알아듣겠어? 바움가트너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애나의 숨이 멈추고, 말이 멈추고, 전화선이 죽어버린다.<br/><br/> p.228 엉뚱한 곳으로 들어가지 마라, 도로에 어수선하게 깔린 파인 곳이나 떨어진 물체를 피해 방향을 틀어라, 어떤 경우에도 다른 차와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충동적인 모험은 절대 하지 마라. 충돌은 사실 치명적일 수 있고, 일단 죽으면 영영 죽은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br/><br/><br/> 그렇다고 사이 바움가트너, 이 외로운 남자의 날들을 고립과 고사 언저리에 매어두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이런 삶도 있다고, 볼 장 다 보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바닥났다 해도 다음 장이란 게 남아 있다고, '가만한' 위안을 남겨두고 싶어졌다. 지나간 자리에, 오래도록 머무른 흔적에.<br/><br/> 그러니까, 여전히 두서없는 마음에 물음표가 되다 만 호선 비슷한 것을 슬쩍 두어도 좋겠다면, 묻고 싶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게 끝없는 해변을 걷는 일과 같다면,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란 간간이 밀려드는 그리움에 발을 적시면서도 나아갈 수 있는, 그냥 그렇게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렇게.<br/><br/> p.245 그렇게 해서, 우리의 주인공은 이마의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 채로 얼굴에 바람을 맞으며 도움을 찾아 길을 떠나고, 첫 번째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릴 때 S. T. 바움가트너 모험담의 마지막 장이 시작된다.<br/><br/> p.254 (김연수 에세이) 인생의 후회는 대개 이런 식이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소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내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선택과 행동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를 들어 한밤에 잘못 걸려 온 전화를 받고는 자신이 그 사람이 맞다고 말한다면? 그때도 인생은 바뀔 테지만, 번개를 맞는 일과는 미묘하게 다를 것이다. 내가 겪지 않은 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한 일에 의해서 인생은 바뀌는 것이니까.<br/><br/><br/>*도서제공: 열린책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436/30/cover150/893292555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436308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나는 그대의 책이다. 독자여, 응답의 책무에 뛰어들라. - [나는 그대의 책이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36409</link><pubDate>Wed, 21 Jan 2026 22: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03640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534&TPaperId=1703640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85/12/coveroff/893292553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25534&TPaperId=1703640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는 그대의 책이다</a><br/>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01월<br/></td></tr></table><br/>책은 죽은 나무로 만들어진다. 지면 위에 붙박인 활자는 수 년이고 수백 년이고 정지한 채 침묵한다. 그것은 누군가의 손에 들리기 전까지 그 안의 말을 품어안고 그저 가만히, 가만히 잠들어있다. 얼마나 크고 깊은 세계를 보여줄지, 그 경이를 알아봐줄 이를 기다리며.<br/><br/> 이제 당신은 손을 뻗어 한 권의 책을 꺼내든다. 손바닥으로 등을 받치고 손가락으로 표지를 열어 제목을 지나 한 장, 한 장 넘긴다. 글이 시작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쉰 후 첫 문장을 따라간다. 오, 잿빛 종이에 바늘땀처럼 놓인 문장은 당신에게 산만한 배경소음이 아닌 완전하고도 애쓰는 관심을 요구한다.<br/><br/> 나를 보라고, 흘러가는 '자극'이 아니라 오직 나만을 마주하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라고. 당신은 그 상냥한 명령에 기꺼이 복종해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선다. 그래, 내가 여기 있다고, 가만히 숨을 죽이며 한 줄, 또 한 줄...<br/><br/> p.13 미안한 얘기지만, 그대는 나를 읽는 동안, 스스로를 어떤 다른 인물이 아니라 그대 자신으로밖에 여길 수 없을것이다. 좋은 책이란 그대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거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br/><br/><br/> 이윽고, 어딘가의 한 줄에 도달한 당신에게 불쑥, 책이 말을 건다. 안녕? 아 잠깐만 잠깐잠깐!!! 던지지 마세요!!! 책이 말 좀 할 수도 있지!!!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br/><br/> 농담이 아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책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집이 아니었지...  그 순간에 비명 안 지른걸 아무래도 인생 업적에 넣어야 할 것 같다는, 아무래도 작가가 독자에게 원한을 품은 게 분명하다는 의심이 첨가된 생각을 하다 이내 궁금해졌다. <br/><br/> p.15 나는 그대가 동화나 옛 이야기를 읽는 기분으로 나를 읽어 주었으면 한다. 그러면 나는 그대의 눈을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는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물론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그렇다고 나를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때로는 사물이 의식을 지닌 존재를 도와줄 수도 있다. 때로는 사물이 살아 움직일 수도 있다. 나는 그대의 책이다. 게다가 나는 살아 있다.<br/><br/> p.16 그대가 원한다면, 나는 어떤 대단한 것, 언제 어디에서든 그대의 생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그대를 홀로 있게 하지 않고 늘 그대 곁에 머물면서 위급할 때는 비상구를 마련해 줄 존재, 한마디로 말해, 종이로 된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는 그대의 선택에 달려 있다.<br/><br/><br/> 앞서 말했듯 책은 정지한 채 침묵하는, 극도로 수동적인 매체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책이라는 시공을 사이에 둔 채, 독자와 세상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나서며, '말'을 걸 수 있을까? 책과 독서, 쓰는 자와 읽는 자는 유사 이래 주류였던 적이 없다. 가장 치열한 외톨이이자 수다스러운 은둔자들이면 모를까.<br/><br/> 이 책은 에세이다. 작가가 독자에 직접 말을 걸고자 한다. 동시에 거대한 상상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현실을 뚫고 관념의 세계에 잠겨들 것을 요구한다. 지금 여기에 발 묶인 이들에게 무언의 명령을 쏟아붓는다. 입을 크게 벌리고, 노래하라. 소리치듯이. 꿈을 꾸라. 헤엄쳐라. 날아오르라.<br/><br/> p.109 스스로가 낡았다는 사실을 체제는 알고 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누군가가 그대처럼 용기를 내어 새로운 것을 제안해 주기를 기다려 온 것이다. 사슬에 묶인 이들도 자기들끼리 모론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들도 그대처럼 할 수 있다고 의견을 모은다. 그들을 지원하라. 창안과 발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남은 체제는 스스로의 특권을 자꾸자꾸 포기하게 될 것이다.<br/><br/> p.126 돌고래들이 그대에게 장난을 치면서 함께 놀자고 한다. 그대는 그토록 즐겁게 사는 비결이 무어냐고 묻는다. 그들은 항상 꿈을 꾸며 사는 것이 그 비결이라고 대답한다. 그들의 설명이 이어진다. 돌고래 뇌의 반쪽이 활동하는 동안 나머지 반쪽은 잠을 잔다. 그러니까 그대와 놀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들은 꿈을 꾸고 있는 셈이다.<br/><br/><br/> 책에는 지면을 넘어서는 세계가 담겨있다. 한 인간은 하나의 세계다. 이 책은 작가가 책과 에세이라는 형식을 걸고 독자에게 내건 도박이다. 단지 한 권의 얇은 책, 짧은 문장의 나열에 불과한 동시에 읽는 내내 물음표의 호선을 긋게 한다.<br/><br/> 이쯤 되면 그의 작품들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사유와 그 접근 방식이 몹시 도전적이라는 평은 구태연한 사실기술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말할 수밖에 없다. 다른 무엇도 아닌, 책이라는 물성-장벽을 뛰어넘어 독자에게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 책이 인식적 한계를 돌파하고 읽는 이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지, 부딪히고 들이받으며 재차 묻고 있다고.<br/><br/> 당신은 읽는다. 빠져든다. 지금 이 순간, 한 권의 책이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 이제 당신의 차례다. 안녕? 안녕. 당신은 이 솟아나는 물음에 무엇으로 응답하겠습니까?<br/><br/> p.163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그대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한 권의 책인 내가 그대로 하여금 경이로운 일을 하게 했다고. 그러나 진정 경이로운 것은 그것을 수행한 그대, 오직 그대뿐이다. 안녕.<br/><br/><br/>*도서제공: 열린책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85/12/cover150/893292553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3851293</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