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뫕님의 서재 (뫕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27 Jun 2026 18:15:28 +0900</lastBuildDate><image><title>뫕</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뫕</description></image><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자 봐, 여기 대체 누가 사람인지. - [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53271</link><pubDate>Wed, 24 Jun 2026 21: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5327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9247&TPaperId=1735327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81/25/coveroff/k692139247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9247&TPaperId=1735327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a><br/>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성해나 #인비인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br/><br/> 공포, 두렵고 무서움. 기담,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기담은 무서운 이야기인가? 이상야릇한 재미와 두렵고 무서운 마음은 무엇에 기인해 합하고 갈라지는가. 수많은 이견이 있겠으나, 일단은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두렵고 무섭고 이상야릇하고 재미난 '것'은 지와 무지의 흔들리는 경계에 있다고, 다르게 말하자면, 믿음과 믿을 수 없음에.<br/><br/> 어떤 경우에 이것들은 말할 수 없음, 정확히는 말해질 수 없음에 기인한다. 알고 있다, 혹은 존재한다, 보았고, 겪었다 혹은 겪도록 했다. 눈을 마주친 인간, 상대의 눈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혹은 바라봐진, 꿰뚫린 인간이 그것을 말할 수 있는가? 떳떳이 공표되어 살아가질 수 있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기서 오래된 생각을 불러오고자 한다. 많은 두려움, 말해질 수 없음은 죄 혹은 '뒤집힘'의 가능성에 있다고<br/><br/> p.22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세월이 지나 내 아들이 성장한 후에도 이 책상이 멀쩡히 보존된다면 아들에게 이것을 물려줄 것이다. (…) 아이가 커 가정을 이룬다면 그 자식에게도 전해지겠지. 역사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테지. 흠은 파내고 구실은 잘 덮으며. 그리고 언제까지고 내게는, 아니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br/><br/> p.43 〈인비인〉 몸을 숨기고, 숨을 죽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두더지가 그러듯 그것은 코끝과 귓바퀴를 움직여 제 체취와 소리를 감지했고, 어디든 따라붙었습니다. 오야지.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저는 점점 죽어갔습니다. (…) 빠가! 저쪽으로 떨어지라고! 그러자 이렇게 답하더군요. 명 받들겠습니다. 오야지!<br/><br/><br/>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두렵고 이상한 것은 바깥에서 전해 들어온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우리' 안이 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기이한 것은 곧 낯선 것을 넘어 낯섦이고, 공포는 익숙해질지언정 절대로 친숙해질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바깥, 그들, 저편에서 이쪽, 안, 우리에게로 침투해올 기회를 노린다. 그 존재를 인식 너머로 밀어내거나, 어떤 믿음, 나의 경우만은 다르리라는 알량하고 공고한 믿음 없이는 일상을 안위할 수 없는  나약한 동물인 탓인지도 모르겠다.<br/><br/>곁가지로 나아가, 인간과 도넛은 위상적으로 같다 하지 않는가? 뒤집어 까도 인간은 인간, 도넛은 도넛. 도넛은 인간, 인간은 도넛. 자, 여기서 문제. 안팎이 뒤집어진 인간은 무엇일까요? 그 순간 우레같은 깨달음이 들려온다면, 축하한다. 당신 또한 뒤집어진 존재입니다.<br/><br/> p.110 〈매일〉 굴곡도 없고 위험 부담도 적으며 노출도가 낮은 삶. 누군가의 일생을 낙찰받으러 온 사람이 원하는 건 그런 삶이라고 34번은 설명한다. (...) 보통은 인생에 곡절이 너무 많아서 오는데, 인생이 너무 지루해서 오는 사람도 있대요.<br/><br/> p.246 〈#유령〉 이제 0에겐 그럴 힘도, 기대도 없었다.뉴로비전 패치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1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며 0은 패치를 뜯었다. 적막한 집 안에 단조로운 파열음이 들렸고, 1이 입을 뗐다.<br/><br/><br/> 내-면을 드러낸. 드러나진 안-속은 마르고 부패해 죽어간다. 박박 닦아 새로운 겉으로 만들지 않는 한. 어째서인가? 이미 부패해있기 때문이다. 주저하고 뭉개는 사이 썩어문드러졌기 때문이다. 어째서인가?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알맹이를 드러낸 겉은 금세 죽습니다. 겉은 알맹이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br/><br/>어떤 경우에, 울음과, 분노, 죄과는 현실을 초월하거나 미끄러져 떨어져나간, 소외된 형태로 다가오지 않나. 향기와 악취가 뒤섞인 벚나무 책상, 형태 잃은 육괴. 목숨보다 중한 것, 명예, 자존심, 나의 존재를 세계에 단단히 결속하는 '연결'에 대한 믿음. 그렇게 죄, 흠, 비밀은 스며드는 음각이다. 절망이 그러하듯이.<br/><br/> p.79 〈소돔의 의로운 혈육들〉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결연했고,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그게 부끄러웠다. 그들의 비슷한 외양이, 깨끗한 두루마기와 수치를 모르는 태도가 견딜 수 없었다.<br/><br/> p.186 〈윤회 (당한) 자들〉 감독님, 감독님은 소속이 어디예요? (...) 모르겠죠? 그런데 사람들은 매번 물어보잖아요. 소속이 어디냐? 학교는 어디 나왔냐? 직장은 다니냐? 소속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근데 속해보니까 그래요. 찐따들이어도요, 모이면 단단해져요. 그리고 되게 웃긴 게 그 안에 있으면요. 나도 조금 쓸모 있어지는 것 같아요.<br/><br/><br/> 단 한 명이라도 인간됨을 지향한다 믿어지는 한 승자의 기록이라느니, 본성이 어떻다느니, 현실이니 실용이니 면피는 어떤 식으로든 두려움의 형태로 돌아와 아가리를 벌려 덤벼들 것을 믿는다. 인간의 가능성은 상상에 있다 믿는다. 타인의 눈에서 나의 삶을 떠올릴 수 있는 존재이므로. 수많은 폭력이 타자를 비인간의 지위에서 몰아내려 그토록 애써온 이유. <br/><br/> 그런 이유로 오늘도 이렇게 곁가지를 넘어 숲으로 나아간 끝에 마주친 얼굴이 몹시도 낯설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를. 이상야릇한 감각이 닫힌 문을 열어젖히기를. 깊숙이 파묻고 통째로 불태운대도, 꺽, 넘어가는 숨에 수치와 죄책의 두려움이 스미기를.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 날이 이어지기를. 슬퍼하기를. 들척지근한 수치와 도피의 냄새에 코를 박고 끝의 끝까지 도망쳐 처음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요. 기다릴게요.<br/><br/> p.229 〈아미고〉 그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기계적으로 장비를 세팅하고 점검한다. 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던 촬영기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오토 모드로 작동하는 카메라로 대체된다. 주위를 둘러보다 나는 생각한다. 이곳엔 인간이 몇이나 될까.<br/><br/> p.301 〈고독〉 먹이 냄새가 밴 자리를 서성이는 짐승처럼 이익도 그것과의 라포르에 순치되어 지난 사나흘간 탕전실 걸쇠를 풀지 말지 몇 번이고 고민했었다. 연기가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익은 머뭇대다 걸쇠가 단단히 걸렸는지 확인한 뒤, 나직이 읊조렸다. 그래도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됐지.<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81/25/cover150/k69213924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812549</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읽기, 자아라는 단단한 세계에 빛이 드는 길을 내는 것. 당신의 언어를 나의 세계에 뻗어주겠습니까. - [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43515</link><pubDate>Fri, 19 Jun 2026 13: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4351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9844&TPaperId=1734351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44/77/coveroff/k90213984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9844&TPaperId=1734351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a><br/>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신유진 #나를균열내기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br/><br/> 줄곧 '읽는 사람'으로 살아오며 수없이 맞닥뜨린(이라기보단 시도때도 없이 처해졌던) 물음 중 독보적인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왜 읽는가', 그리고, '읽기는 나를 무엇으로 만드는가' 일 것이다. 한때는 이 물음에, 완전한 이해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모든 것을 관찰하고, 바닥까지 파헤쳐 내것으로 만들고 싶었기에, 삼켜버리고 싶었으므로 읽었다. 완전해지고 싶어서, 공백과 균열을 메워 완벽에 닿기 위해.<br/><br/> 읽을수록, 채울수록 더 많은 '모름'을 보았다. 그럼에도 탐욕하기를 멈출 수 없었다. 이것은 읽기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문득, 멈춰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본능이 아니었을까. 위험만큼 존재를 선명하게 하는 것은 없으니까(21)."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의 세계를 안전하고 공고히 하는 읽기가 아니라 존재의 밑바닥을 흔들고 높고 깊은 벽을 부숴 그 너머의 타자를, 절대적인 낯섦을, 존재한 적 없는 선-존재를 보게 하는 읽기야말로 나의 존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고.<br/><br/> p.7 〈프롤로그: H로 시작하기〉 책 속에 있는 그들과 책 너머에 잇는 이들과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나는 '우리'라는 주어를 망설임 없이 쓴다. 우리는 진실을 향해 한 칸씩 내려가는 사람들. 끝없이 내려가 저 밑바닥에 닿아 마침내 진실을 둘러싼 막을 마주한 사람들. 자기 안에 가장 날카롭고 매서운 무언가로 그 막을 부수려는 사람들. 우리들, 나는 내가 통과한 책들을 통해서만 나의 '우리'를 만난다. 책 속에 그리고 책 너머의 당신들을.<br/><br/> p.89 〈다니엘 페나크〉 인간은 무엇보다 몸을 가진 존재다. 우리는 마음을 통해 자신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것도 없다. (...) 어쩌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몸의 언어를 해독하는 일이 아닐까.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말했다. 인간은 세계를 생각으로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사는 존재라고.<br/><br/><br/> 어느 정도는, 위험해지려고, 더 모르고, 낯설어지고, 실패하려고 읽는다고. 이상적인 전능은 곧 무능이다. 조금의 모자람도 돌이킬 수 없는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한 완전-세계는 곧 아무것도 태어날 수 없고, 변할 수 없으며, 어디로도 확장되고 이동하고 파고들 수 없는 고립이다. 나를 균열낸다. 쓰기는 나를 배신한다. 말과 글은 필연히 미끄러지고 '본질'에 명중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빗나감이고, 철회-됨이자, 뒤처짐일 것이다. '나의 언어'로부터 완전히 내쳐진 적은 없다 하더라도.<br/><br/> 이 빈 틈, 한계, 균열, 빗나갈 겨냥과 주소 잃은 서신이다. 쓸모랄지, 가치랄지, 문학에 일말의 증명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다면, 이 불완전함이다. 그것은 필연히 인간성의 문제로 직결된다. 한강은 물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야기가 사람을 구할 수 있는가. 사람이 이야기가 된 장소, 사람, 시간을 다시 존재하게 할 수 있는가. 『소년이 온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 있고 배가 고파오는, 허기를 느끼고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그렇게 먹는다는 것엔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고(85).<br/><br/> p.67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를 둘러싸던 맥락이 사라질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구성하는 모든 근거가 사라진 후에도 '나'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 망명자는 그런 확신을 갖지 못한다. 말은 언제나 늦고, 감정은 반토막이 난 채 전달되기 때문이다. 말할 수 있는 만큼만 존재한다면, 말로 하지 못해 사라져버린 일부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br/><br/> p.117 〈밀란 쿤데라〉 "매일 개연성 없는 소설 같은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이 세상에서 소설이 과연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 소설은 그저 모든 판단과 결론을 미뤄둘 수 있는 유예의 장소를 허락할 뿐이다. 그곳에서는 존재에 대한 실험을 감행해도 누구도 다치지 않고, 진실이나 진리의 엄격한 잣대에 주눅 들지 않고 삶의 하찮음을 말할 수 있다. 의미 없는 것들의 의미를 말하는 일. 소설가는 내게 소설의 쓸모는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br/><br/><br/> 이에 세상은 다정스레 말한다. '다 잊고 이젠 공부를 하라'고(97). 그렇다. 읽기는, 쓰기는 언제나 현실에 조금 뒤처지고 벗어나, 적어도 그 당시에 살아 있는 몸과 정신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무너지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면, 그것을 말과 글로 남겨 전할 수 있다면, 적어도 '목격한 일'에 파괴되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몸이고, 정신이고, 이유이다.<br/><br/>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죽은 자가 갖지 못한 존엄과 특권이 아니라 오로지 책무와 우연, 생존 그 자체와 증언일 것이다. 『소년이 온다』에서 말로, 기억으로, 몸짓과 문장으로 전해지는, 깨지기 쉬운 무언가처럼. 무엇이지 않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기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114)".<br/><br/> p.100 〈가엘 파유〉 "소설을 쓴다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가엘 파유의 말이다. 소설이 사라진 장소, 사라진 사람, 사라진 시간을 다시 존재하게 할 수 있을까.<br/><br/> p.151 〈카멜 다우드〉 어떤 죽음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고, 이야기는 고통을 대신 설명해주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애초에 문학의 몫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은 질문할 뿐이다. 설명되지 않은 고통과 폭력, 이해되지 않는 죽음이 너무 쉽게 사라지지 않도록, 신과 예술, 그 무엇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를 오롯이 인간이 해결할 몫으로 남겨두기 위해서.<br/><br/><br/> 어쩌면 그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살아가기 위해 다시-쓰고 토해내어야만 하는 글이,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학이, 쓰기가, 읽기가 고발과 목격의 반복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문학을 도구에 한정짓는 것만큼 문학-하는 존재의 본성에 대한 오독-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읽기와 쓰기 모두 지금 여기의 나에서 조금 떨어진 혹은 떨어져 보려는 태도다. 듣기와 다르지 않다.<br/><br/> 한 인간이 세상에 머무는 방식이 곧 문학이라면, 읽기와 쓰기는 그를 바라보려는 시도이자 방식이 아니겠는가. 읽기와 쓰기, 듣기와 말하기의 혼란한 뒤섞임은 결국 이 말을 하기위함이었다. 읽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라고, 그것이 곧 삶이자 이유라고. 해석될 수 없는 고통과흔적을 켜켜이 쌓아 파괴하고 또 공존하기 위함이라고. 이제는 물을 수 있다. 무엇이 당신을 균열-하겠습니까. 당신의 언어를 나의 세계에 뻗어주겠습니까.<br/><br/> p.166 〈조르주 페렉〉 '산다는 것은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삶은 임시적 정착과 이동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동하는 모든 걸음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누군가의 기억이고, 그 기억이 저장된 공간은 존재의 시간이 쌓이는 장소가 된다. 시간이 삶의 다른 이름이라면, 문학은 한 인간이 세상 속에 머무는 방식, 즉 거주의 예술인 셈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44/77/cover150/k90213984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447729</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보바리즘, 관능과 광기, 통속과 본성 사이에서. - [마담 보바리 - 지방 풍속]</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37021</link><pubDate>Mon, 15 Jun 2026 22: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3702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2998&TPaperId=173370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69/31/coveroff/893291299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912998&TPaperId=1733702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마담 보바리 - 지방 풍속</a><br/>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용은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05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열린책들<br/><br/> 이 작품이 이토록 막막하고 두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연코, 이들의 절망에 대단한 비극적 지점이랄 것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숨막히게, 끝을 알 수 없이, 어쩌면 영영 변하지 않은 채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평범하고 초라해빠진 매일들이 늘어서있다. 별처럼 빛나고 우아하게 흩날리는 이상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한데 도무지 닿을 수 없다.<br/><br/> 아등바등할 것도 없고, 달라질 것도 없다. 누군가 차라리 연극적으로라도 나쁘면 나을 일이다. 밍밍하고 쿰쿰한, 낡아빠지고 칙칙한, 눅눅하게 사방을 감싼 일상. 어떤 순간에는 제법 즐거웠다. 또 어떤 날에는 나름 애도 썼고, 빛나는 기억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일상의 냄새에 묻혀 빛바랜 과거,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의 실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절망이 되었을 뿐.<br/><br/> p.43 그렇게 그는 순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욕망의 대담함이 자신이 선택한 처신의 비굴함에 저항했고, 그녀를 만나는 것을 금지당한 대신 그녀를 사랑할 권리를 얻은 것이라는 일종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위선을 당당하게 받아들였다.<br/><br/> p.129 이런 비참함이 계속되려는 것인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인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다른 어느 여자들보다 못한 것이 없었다! (…) 그녀는 하느님의 불공평함을 원망하며, 벽에 머리를 기대고 울었다. 떠들썩한 생활, 가면무도회의 밤들,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그러나 그것이 틀림없이 가져다줄 방자한 쾌락과 온갖 격정을 선망했다.<br/><br/><br/> 기실 '허영 넘치는 여성의 파멸'과 그 곁의 성실한 남성(으레 수수한 남편이기 마련인!)의 슬픔이라는 주제는 딱히 낯설 것이 없다. 그럼에도, 물론 '보바리즘'이라는 진부한 해괴를 탄생시키긴 했지만, 이 작품이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개인으로서의 정체성, 욕망과 현실이 충돌하고 괴리되는 데서 자라나는 절망감을 지독히도 사실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리라. 누구라도 '이것은 절대로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단언할 수 없을 만큼.<br/><br/> 엠마를 보라. 그의 '자기파괴'가 이토록 서럽고 막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도덕적으로는 얼마든지, 쉽게 단죄할 수 있겠으나 내도록 그 심경을 들여다보고 그려본 독자로 하여금 그렇게 하기를 주저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가 선망한 화려한 생활과 격정 넘치는 사랑은, 어쩌면, 온갖 예술과 근대의 환상이 모두의 것, 자연스럽고 당연한 권리이자 인생의 꽃인 양 그려온 것이 아니던가. 그를 동경하고 갖지 못해 좌절하는 인간에게, 그 마음이, 대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br/><br/> p.71 결혼 전에는, 그녀는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사랑에 응당 따라야 할 행복이 오지 않으니, 잘못 생각한 것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엠마는, 책에서는 그렇게도 아름답게 보였던, 희열, 정열, 도취 같은 말들이 실제 삶에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br/><br/> p.233 그녀는 남편에 대한 혐오를 연인을 향한 갈망으로, 활활 타오르는 증오를 새롭게 뜨거워지는 애정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폭풍은 휘몰아쳤고, 정념은 재가 되도록 타버렸기에, 그리고 아무런 구원도 오지 않고, 해는 조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온 사방이 캄캄한 밤이었고, 그녀는 온몸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무서운 한기 속에서 길을 잃은 채 떨고 있었다.<br/><br/><br/> 이 현재-아님에 대한 갈망은 비단 엠마 보바리만의 고통이 아니다. 이 작품을 가득 메우는 것은 권태와 무력, 충동과 분노인 동시에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욕망과 구역감이다. 경련이고, 죽음이고, 충돌이다. 독자는 묻게 된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지. 그리곤 깨닫는 것이다. 당시 처벌과 검열의 이유를. 당대 '도덕적 판단'에 따라 검열된 문장들이 복원된 완전판의 모습은 그간의 '걸작 고전'에 걸맞게 다듬어 선보여졌던 내용과는 퍽 차이가 있었다.<br/><br/>한층 관능적이었고, 소용돌이치는 갈망의 매혹이 생생하게 그려진, 놀랍도록 섬세하고 정교한 비극, 광기, 좌절. 지독히도 아름답고 허무한 순간마다 독자는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단정하고 비극적인 기존의 『보바리 부인』을 엄중히 꾸짖던 이들은 언젠가의 고매한 의식 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풍속과 교양의 꺼풀을 벗겨낸 곳에서 마주하는 통속과 모순을. 그렇게 보바리-즘을 새로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br/><br/> p.584 달빛처럼 하얀 새틴 로브 위로 물결무늬가 어른거리며 떨렸다. 엠마는 그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샤를르에게 그녀는, 몸 밖으로 퍼져 나와, 주위 사물들 사이로, 침묵 속으로, 밤 속으로, 지나가는 바람 속으로, 피어오르는 습기 찬 향내 속으로 힙쓸리며 형체 없이 뒤섞여 스러져 가는 것 같았다.<br/><br/> p.610 ｢그래요, 이제 당신을 더는 원망하지 않아요!｣ 심지어 그는 엄청난 말, 단 한 번도 입에 담아 본 적 없는, 한마디를 덧붙이기까지 했다. ｢이게 운명 탓이지요!｣ 이 운명을 이끈 장본인 로돌프는, 그가 이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치고 어지간히도 너그럽고,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좀 비루하다고 생각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69/31/cover150/893291299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69319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초현실과 초-현실의 틈새에서, 응답하라 게이머여. - [게임으로 철학하기 - 재미, 예술성, 장르 등 비디오 게임을 둘러싼 수많은 질문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25614</link><pubDate>Tue, 09 Jun 2026 18:1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2561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4913&TPaperId=1732561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7/40/coveroff/89323249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4913&TPaperId=1732561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게임으로 철학하기 - 재미, 예술성, 장르 등 비디오 게임을 둘러싼 수많은 질문들</a><br/>주자안 지음, 정세경 옮김 / 현암사 / 2026년 05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현암사<br/><br/><br/> 돌이켜보면, '게임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썩 적절한 응답자였던 적이 없는 듯하다. 게임, 개중에서도 주로 화면으로 송출되는 비디오 게임은 내 세대에게 퍽 다양한 의미값을 갖지 않던가. 방종의 상징과도 같은 '전자 오락'에서 평범한 취미로 인정받기까지 과장 조금 보태 격동의 시기를 거쳤으니 말이다. 오늘날 게임은 아동부터 성인까지, 후기 중장년층에서까지도 낯설지 않은 취미가 되었고, 그만큼 커뮤니티도 전세계적으로 탄탄하게 형성되어 있다.<br/><br/> 게임 커뮤니티는 전세계적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유저 피드백이 극도로 활발한 분야이다. 이에 따라, 당연하게도, 현실과 잦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그 중 하나가 다양성과 평등에 대한 분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에 저자가 제시하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명백한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는 요소와 관건들을 짚어나가는 독자는 필연히 경제, 체제, 커뮤니티, 인간 존재를 다루는 현실의 최전선에 서게 될 것이다. 다시 돌아와, 커뮤니티 말이다.<br/><br/> p.22 가짜 사물의 나쁜 점은 매우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를 선택할 수 있음에도 가짜를 원하는 이유는 뭘까? 그 답은 때로 가짜가 진짜를 경험할 수 있게 하며, 또 때로는 가짜가 진짜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 데일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조종한 캐릭터는 당연히 가짜였다. 하지만 그는 게임 속에서 '여성으로 여겨지는' 경험을 했다. 이는 진짜이고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br/><br/> p.112 가장 좋은 옵션만 눈에 띄고 다른 옵션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경우, 플레이어가 내릴 결정의 다양성에 문제가 생겨 위협적인 수준으로 게임의 재미가 떨어질 수도 있다. 이럴 때 플레이어들은 이 게임의 '밸런스에 문제가 있다'며 불평을 한다.<br/><br/><br/> 많은 분야에서 그러하듯 게임 유저 커뮤니티 또한 남성, 특히 백인 유성애-헤테로 남성을 기본 타겟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크며, 이들의 '재미'가 '기본값이 아닌 존재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추방하려는 경향은 낯설지 않다. 또한 유저들이 으레 내세우곤 하는 '재미와 휴식의 자유 확보'가 과연 그들과 게임이 놓인 현실, 유저와 제작자가 살아가야 하는 세계와 진정으로 '분리'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연구자들이 수차례 지적해온 바 있다.<br/><br/> 게임이 종합 예술이자 존중될 수 있는 취미의 영역으로 인정받기 위해 탈정치를 주장해온 움직임이, 역설적으로 가장 개인적이고 탈정치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공적 영역과 정치적 주제에 속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나게 한 셈이다. 혹자는 이에 또다시 반발할지 모른다. 앞서 말한 역설처럼 왜 '사적인 재미'까지도 '눈치를 봐야'하는지 일면 억울함을 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묻지 않고는 게임 산업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 또한 논해질 수 없다.<br/><br/> p.161 '시간 낭비를 하면 안 된다' 라는 관념이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실패의 일환이며,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무의미하게 헛돌고 있는 사회에 일조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좀 더 객관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비디오 게임도 이런 헛된 공전의 일부가 될 잠재력이 있음을 이해한다면 자신이 무엇을 위해 게임을 하는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br/><br/> p.356 다만 '동등한 토론 공간을 만드는 일'에 대해 말하자면 현재의 게이머 커뮤니티는 수렁에 빠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 (…) 차별적이고 성적 대상화를 하는 비디오 게임을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 공간에서 차별과 혐오 발언에 대해 강제력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그곳이 회사든 학교든 아니면 인터넷 커뮤니티든 동등한 토론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br/><br/><br/> 그러나 결국 그 누구도 의문과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게임-체계의 일원이 그저 '보통'의 일부라는 주장의 가장 든든한 뒷받침일지도 모른다. 게임이 숙고와 철학적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게임의 내용과 구성에 다양한 의문이 제기하고 그것이 현실의 구조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따지고 탐색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게임 향유자와 생산 및 운영자, 그에 관계되는 이들의 정체성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서 목소리를 낼 근거가 되는지에 맞닿는 가능성일 것이다.<br/><br/> 요구할 수 있음, 묻고 답할 수 있음. 이 허구가 현실과 완전히 별개로서의 완전무결한 존재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목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주체적인 향유자로서의 핵심이므로.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주장은 기실 '재미' 바깥으로 밀어내는 적극적인 선택과 외면의 결과일테니 말이다. 그렇게 게임은 철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언젠가 게임철학이라는 분야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묻고, 맞서고, 응전하고, 나아가라, 게이머들이여.<br/><br/> p.392 우리는 평소 'PC를 탓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이해하기 쉬우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평가하기 십상이다. 그 때문에 어떤 작품에서 아주 작은 PC의 단서만 발견해도 '또 PC네'라고 댓글을 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평가 방식은 당신에게 좋을 것이 없다. (…) 오히려 당신은 작품을 감상할 줄 아는 행복한 사람이나 작품을 제대로 리뷰할 줄 아는 소통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닌, PC 냄새만 맡으면 재채기를 하며 분노를 쏟아 내는 사람이 될 뿐이다.<br/><br/> p.400 만약 스스로 정치로부터 방해를 받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현재 정치 환경의 기득권자라는 뜻일 것이다. (…) 예술 장르의 하나로서 비디오 게임도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 같은 주류 계층이 비디오 게임 속 다양성 요소에 위화감과 익숙하게 않음을 느낄 때 비디오 게임은 오히려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67/40/cover150/89323249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674082</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이름의 빈 자리에, 불릴 수 없는, 불리기를 거부한, 나를 부르라 요청하는 자리에 깃드는 응답 - [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20949</link><pubDate>Sun, 07 Jun 2026 00: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2094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9096&TPaperId=1732094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11/12/coveroff/k67213909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9096&TPaperId=1732094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a><br/>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br/> 이름은 의미를 담는다. 이름은 인간이 무언가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의미로 가득한 말이다. 이름은 대상 없이는 붙여지지 않는다. 불러질 대상이 없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이든, 부재로 떠나갔든, 무엇으로 빗대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상대에게, 그리고 호명하는 이 스스로에게 존재의 존재-함을 확인시키는 일이다. 그의 세계에 '이름'의 존재를 명확히 자리하게 만드는 일이다.<br/><br/> 그렇다면 만일, 이름이 그 주인에게서 뜯겨나갔다면, 불릴 사람이 이름을 두고 떠나버렸다면, 갈 곳 잃은 부름만이 여기저기 정처없이 나돌아다닌다면, 존재하되 이름으로 불릴 일이 없다면, 눈 앞에 멀쩡히 있는데도 이름이 없으므로 부를 수도, 지칭할 수도 없다면. 이름의 빈자리에 무엇이 놓이는가. 이름과 존재의 틈 사이에는 무엇이 깃드는가. 또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이름이되 이름이 아닌 것, 그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오롯한 자기이기를 부정당하는 사람들에게 이름이란 무엇인가.<br/><br/> p.40 〈프랑켄슈타인〉 그는 창조주라면 주어야 할 애정, 관심과 사랑부터 먹을 것과 보호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해줘야 하는 첫 번째 일, 가장 기본이 되는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크리처가 괴물이 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잖은가.<br/><br/> p.54 〈시녀이야기〉 세상 만물에 이름을 짓고 이름을 붙여주고 부르고 불러주는 행위란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의미 부여이자 애정 표현이다. 이름을 지어 호명하고 지칭하면서 관계가 결속된다. 마음의 밀도를 보여줄 수 있는 고도의 정성이 깃든 의례이기도 하다.<br/><br/><br/> 그들이 진짜 이름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그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빈 자리에는 무엇이 고이고, 흐르며, 스쳐지나갈까. 저자는 영화와 소설, 드라마를 오가며 창작물 속 이름 없는 존재의 형상을 불러낸다. 그 빈 자리, 이름을 뺏겼고 이름의 기회를 박탈당했기에 부재로 취급되는 존재들과 이름에서 벗어나고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이들에게서 내가 비춰본 것은 이름 대신 '무언가'로 붙박여버린 이들의 모습이었다. 그 이름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br/><br/> 다시금 이름의 의미를 고민한다. 불리지 못할 이름을, 답할 이 없는 이름을 떠올리며 곱씹는 그 의미는 필경 한 존재를 세상에 자리하게 하는 힘이자 존재하도록 마련된 자리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이름,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이… 그것들은 모두 한 존재를 그의 세계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것과 같지 않은가. 이 무슨 처참이란 말인가.<br/><br/> p.168 〈그 여자는 화가 난다〉 그녀가 어렵사리 친부모를 이해할 수는 있겠으나 '춘복'이나 '마야 리'가 엄마를 아빠를 언니를 마침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리운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거라 생각한다. (…) 책장을 덮으며 그녀에게 들릴 리 없는 한마디를 포옹처럼 보냈다. 춘복이를 버려요. 한국 이름을 기억하지 말아요. 그래야 당신이 살 수 있어요.<br/><br/> p.247 〈허공에의 질주〉 아서도 '나의 인생'을 찾고 싶은 것이다. 자꾸만 변하고 바뀌는 이름과 정체성에서 지쳐버린 것이다. 결국 살려고, 살아가려고 여러 번이나 죽은 남의 이름을 주워 달아 붙이고 살았지만, 원래의 자기 이름을 잊지 않은 것이다. 부르고 싶은 것이다. 대성통곡을 하면서, 주정처럼 난장을 치면서도 진짜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것이다.<br/><br/><br/> 이는 곧 진짜 이름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나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감각, 이름이 곧 족쇄가 되는 삶이 있다. 모멸을, 맞지 않음을 이름이라 여기기를 강요받는 이들이 있다. 같은 세상에서 제각기의 투쟁에 존재 자체를 걸고 맞서는 이들을 생각한다. 빼앗길 수 없는 이름, 호명-됨의 의의를 생각한다.<br/><br/> 온당한 이름-됨을 고민하는 지금, 몹시도 사랑해 마지않는 구절의 의미를 깨닫는다. 선언이자 정의인 그 말을. 내가 여기, '이 자'로 있노라, 나를 이렇게 부르라. 당신의 세계에 이로써 거하겠다는 말, 무엇으로도 부서질 수 없는 '것'의 상징일지 모른다. 이 무겁고 찬란하며 뜨거운 의미를 누군가는이렇게 말했다. Call me Ismael. 세계는 여기서 시작된다.<br/><br/> p.67 〈비바리움〉 마틴은 마틴을 죽이고 마틴이 되어 똑같은 삶을 살아 영생을 누리지만 젬마와 톰은 미로에 같혀 살았어도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떠나는 길을 눈물로 배웅했다. 검은 봉투에 이름 없이 담겨졌어도 젬마와 톰이라는 이름은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았다.<br/><br/> p.250 〈허공에의 질주〉 "내 이름은 대니, 피아노에 목숨 건 녀석이지." (...) 처음으로 제대로, 잘 버려진 것이다. 자신의 진짜 이름과 그 이름을 불러줄 사랑하는 사람과 진짜 피아노와 함께. 대니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인생과 함께.<br/><br/><br/>#권혁란 #이름의빈자리에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11/12/cover150/k67213909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111242</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 어떤 성원도 표밭이 아니며, 우리 모두는 주권자로 행위할 자격과 의무가 있다. - [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10375</link><pubDate>Mon, 01 Jun 2026 00: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1037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92139879&TPaperId=1731037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80/45/coveroff/k9921398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92139879&TPaperId=1731037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a><br/>이창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br/> 어김없이 돌아온 선거철, 곳곳에 익숙한 수사와 깊숙이 숙이는 미소들이 지겹게도 보인다. 이 구태의 정점이자 꽃이라 할만한 것은 이번에도 벽보와 현수막에 큼지막한 글씨로 박힌 각종 선언과 치적행사일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시민의 발이 되겠습니다. 시민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공약 이행이 어떻고, 저떻고… 이에 시민들은 말한다. 뻥 치시네!<br/><br/> 진작 물었어야 했다. 숱하게 물어온 말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왜 정치인들의 것이 되었는가?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 어째서 만년 탁상공론에 허울대잔치가 되는가? 선거는 정말 주권행사의 장이 되고 있는가? 청장님, 시장님, 의원님, 각종 '님'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의탁하거나 넘겨주는가? 철마다 내세우는 각종 정책은 시민의 삶과 어떻게 유리되고, 그 결과 정책은 어떻게, 언제, 왜 실패하는가?<br/><br/> p.54 정책 의제는 단순히 '선택된 사회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주체, 곧 결정자가 우월적 힘을 바탕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구성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들이 특정 사안을 공식 의제로 설정하고 해결 과제로 선언할 때, 사회 문제는 비로소 정책 의제로서의 생명력을 얻는다. 반대로 말하면, 아무리 뜨거운 여론과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어도 정책 주체가 이를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현상'으로 남을 뿐이다.<br/><br/> p.79 오늘날 국민은 정책의 결과만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는지 알고 싶어 하며,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정책의 시대는 저물었다. 국민과 함께 설계하고 검증하는 정책만이 살아남는 시대, '열린 정책 생태계'는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의 전략이다.<br/><br/><br/>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가장 중요하고 기본되는 자리에 국민이 주권자이자 권력의 원천임을 명시하고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상 양당제로 이분된 국가, 실제 삶과의 괴리가 커져만 가는 각종 정책들, 허울뿐인 성과발표와 바닥을 치는 정치 신뢰도까지. 저자가 말하듯 정책은 선택된 아젠다인 동시에 결정권자가 문제를 정의하고 구성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정책의 대상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 동시에 '결정권자'의 주의와 실천 의지가 개입된 결과라는 뜻이다.<br/><br/> 위기상황마다 발등에 불 떨어진듯 잠시 모였다 이내 심드렁한 냉소주의자로 흩어지는 상황이 반복되는 데에는 정당, 정치구조, 의사결정체와 시민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분야에 걸친 뿌리깊은 문제가 있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되찾았다 말할 수 없다. 설령 누군가 진짜 국민, 진짜 성원이라는 교묘한 호도로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전용한들 반박조차 쉽지 않을 뿐이다.<br/><br/> p.155 정당이 정책에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배경에 대해 장훈 중앙대 교수는 세 가지 구조적 원인을 짚는다. (…) 정당이 시민의 일상적인 요구와 삶의 현장에서 유리된 채 엘리트 중심의 정치 게임에 함몰되면서, 정책을 매개로 한 시민과의 접점을 잃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대통령과 관료 중심의 폐쇄적 정책 결정 구조'가 정당의 입지를 좁혔다. 국가의 주요 의사결정이 청와대와 경제 관료의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구조 속에서, 정당은 정책의 주도자가 아닌 사후 추인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br/><br/> p.201 과연 우리 사회의 싱크탱크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권력의 입맛에 맞춘 '답정너' 식 보고서를 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하지는 않았는가? 싱크탱크는 모름지기 당대의 모순을 날카롭게 해부하고, 이념의 벽을 넘어 대안과 해법을 치열하게 논쟁하는 '사상의 용광로'이자 '정책의 산실'이어야 한다.<br/><br/><br/> 긴 겨울을 지난 이후, '권력의 추가 기운' 것이 확실해지자 거대양당과 선출직 출마자들 모두가 저마다 '빛의 혁명'을 찬사하고 포섭하려 안간힘이다. 정치권력이 인기몰이로 결정된 지 오래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저자가 반복해 말하듯 오늘날 정책이 현실성도, 정의도 잃은 채 이권놀음이 된 것은 결국 제도권의 정치와 정치의 언어, 그리고 그 필요성과 실질적 권력이 시민과 유리되었기 때문이다.<br/><br/> 이 말은 곧 정책결정권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권력을 독점코자 하는 자들이 시민에게서 거세하고 싶어하는 것 또한 시민의 정치참여와 정책관심도라는 뜻이기도 하다. 선거철이다. 우리는 지지를 호소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진정으로 정치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제야말로 정치를 주권자의 것으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그 지난한 과정은 여전히 시급한 일로 우리 앞에 남아있다. 선거가 시작되었다. 정치는 끝나지 않는다. 서둘러야 할 때다.<br/><br/> p.24 정책 오작동의 핵심은 시민과의 '단절'에 있다. 투표를 마친 시민은 정작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그 빈자리를 특정 이익 집단의 논리나 관성적인 행정이 채우면서 정책은 생명력을 잃는다. 이러한 제도적 결함과 불통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투표함 너머의 민주주의를 고민해야 한다. 시민의 일상이 정책에 끊임없이 반영될 수 있는 열린 공론장을 마련하고, 단순한 다수결을 넘어 깊은 토론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숙의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일이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br/><br/> p.357 시민이 스스로 학습하고 의견을 나누며 공동체의 미래를 직접 설계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넥스트 민주주의' 의 모습이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 결정해주는 시혜적 정치는 이제 끝났다. 이제 정치는 시민이 이끌고, 권력은 그 길을 닦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는 비로소 수사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의 것'이 될 수 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80/45/cover150/k99213987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804597</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케이팝 좋아하세요? 에궁 그렇다고 울지는 마시구… - [펑펑 - 나를 울리고 너를 배반하며 이룩되는 케이팝 이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04346</link><pubDate>Fri, 29 May 2026 18: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30434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12139973&TPaperId=1730434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01/89/coveroff/k91213997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12139973&TPaperId=1730434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펑펑 - 나를 울리고 너를 배반하며 이룩되는 케이팝 이야기</a><br/>복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5월<br/></td></tr></table><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br/> 아이돌 좋아하세요? 케이팝 좋아하세요? 소녀문화, 빠순이, 오빠부대… 내 가히 여자됨의 구렁텅이를 지나온 평생토록 시도했으나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대상이 있었으니. 바로 케이팝, 개중에서도 아이돌 팬 흉내다. 왜 팬-되기가 아닌가, 하면, 말 그대로 흉내, 정상성 위장을 기도한 가장마저도 처참한 실패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케이팝(과 그 요소들)에 대한 사랑은 내 마음 한구석에서 내도록 이해 불가한 열정과 한데 뭉뚱그려진 선망 반 실패 반의 흔적으로 남아왔다<br/><br/>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지 않은가? 이러게나 소비자와 그 대상을 주권과 착취의 어드메로 뒤섞어놓는 산업이 없다. 개인의 존재 자체를 이미지화해 모든 요소를 상품으로 내거는 일 또한 역사상 유례 없는 일이 아니던가. 전제왕권기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놀라운 일이다. 분석과 조롱, 상징화와 납작 눌린 일반화의 양면을 오가는 케이팝, 그리고 그 팬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br/><br/>p.54 케이팝 팬들은 아이돌을 향해 사랑과 영원을 맹세하고 그 충만함을 즐기며 커뮤니티를 이룬다. 동시에 그들은 그 맹세 속에 애정, 질투, 집착, 광기에 이르는 갖가지 감정을 쏟아부은 뒤 그것을 멋대로 배합해 오직 자신만 이해하는 사랑의 법칙을 만든다. 최애가 혐오 발언을 일삼을 땐 적당히 타일러서 훈방 조치를 했다가도 연애 정황이 포착되는 순간 즉시 사형선고를 내려 버리는 독재자의 율법이다. 욕망을 억압하며 만든 환상이 가장 기괴한 형태의 사랑으로 변해버린 것이다.<br/><br/> p.57 케이팝은 사랑과 집착, 믿음과 맹신 사이를 줄타기하는 음악이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허공이니 우리는 늘 날카롭고 예민하다 (…) 상대를 소유하거나 파괴하는 탐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환상 뒤에 숨긴 내 질척이는 갈망과 웅크린 결핍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나 인간을 욕망한다면 그것을 더욱 세심히 돌봐야 한다. 거창한 말들로 관계를 정의하지 말고 우리가 모두 인간이라는 걸 자각해야 한다는 말이다.<br/><br/><br/> 수치심과 죄책감, 그럼에도 일상 전반에 뿌리내리는 사랑, 내 입장에서는 생판 모르는 남에 대한 그 피같고 살같은 사랑은 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는 앞서 말한 그 여자됨의 구렁텅이를 지나오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어느정도 나의 일면을 지배하는 물음이다. 어느 정도냐면, 마음 같아선 붙잡아 가둬놓고 더 이상 나올 것도 없을 때까지 쥐어짜가며 물어보고 싶을 만큼.<br/><br/> 이 물음은 필연히 케이팝 산업이 무엇을 셀링하는지, 무엇에 기반하는지, 같은 이유로 어떤 이유로 사랑받고 확산되는지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여자아이 집단'에 온전히 소속된 적 없던 나의 두려움은 세계적 인기를 끄는 가사와 퀴어니스의 차용을 교묘히 파고드는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지지 기반으로 역전되지 않았는가? 그때의, 지금의 사람들은 누구를, 무엇을, 왜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 가히 사랑의 불나방.<br/><br/> p.110 여자임에도 여자를 흉내 내야 했던 순간들, 여자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틀린 여자'가 되었던 순간들이 자신이 '여자'임을 설명해야 하는 여자를 통해 해방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수치심과 나의 수치심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여장 여자'로서 그와 같은 수치심을 공유한다고 주장하며 그를 통해 정상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계책을 세운다. 세상 모든 걸 저 좋은 대로 끌어다 쓰는 '진짜 여자'만의 얄밉고 오만한 특성대로.<br/><br/> p.166 자두의 무대에서 엽기적인 것은 오직 하나. 그 거추장스러운 콘셉트를 두르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그의 엄청난 성량뿐이었다. (…) 맙소사. 자두는 엽기가 맞았다. 세상이 그를 엽기라 부른 것은 형광색 천 쪼가리를 두른 외형이 아닌 이 기운 때문이었겠구나. '상식적이지 않고' '거부감이 들고' '받아들이기 힘든' 그 모든 요건을 충족한 엽기, 아니 여자로서의 기운.<br/><br/><br/> 오해를 무릅쓰고 단언하자면, 케이팝 팬들은 어떤 식으로든 미친 자들이다. 광인이 아니고서야 그런 걸 그렇게 좋아할 리가 없다… 견고하게 합의된 비-정상에서 안착한 자들만이 그를 향유할 자격을 갖는다. 개중 경계가 흐려지는 자와 '일코' 얼굴을 완벽히 갈아끼우는 자로 나뉠 뿐… 이라고 하면 이제 나는 전방위 공격에 두들겨맞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무언가를 사랑하는 마음 치고 광적이지 않은 게 어디 있단 말인지.<br/><br/> 게다가 그 '판'이 온전히 관심과 열정에 뿌리에 둔 자본(혹은 그 역)이라면 더더욱. 사랑해서 미치고, 미친 사랑을 한다. 모욕과 수치를 열광과 자기이해로 역전하는 희한한 세계야말로 케이팝과 그 팬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고백하자면, 첫 페이지부터 기가 쫙 빨려서 전심전력으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만일 내가 좋아하는 것, 예를 들면 책을 주제로 하는 이런 책이 나오면 절대 읽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공감성 수치와 고통을 직면할 재간이 없으므로.<br/><br/> p.78 혹은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아 다시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 사랑이 만든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곧 사랑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철저히 설계된 사랑의 볼모가 되어 자책과 회피를 반복하다 몇 번이고 무너지는 사람들. 그러나 광적이고, 자멸적이며, 폭력적일지라도 결코 가짜이지 않은 그들의 사랑.<br/><br/> p.217 수치심을 알고 품위를 지키는 건 반론의 여지 없이 그냥 좋은 일이다. 부끄러움을 알고 행동을 제어하는 건 인간다운 일이니까.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기에 수치심을 알고도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머물게 된다. 많은 사람이 '길티 플레저'라 이름 붙인 그 불쾌한 낮잠 같은 상황 말이다. 케이팝을 듣고, 케이팝을 좋아하는 건 바로 그런 상황 속에 제 발로 갇히는 일이다.<br/><br/><br/> 그리고 이 책을 덮으며 깨달은 두 가지가 있다. 책으로는 이만한 도파민을 뽑아내기가 책 팔아 부자되기만큼 어려울 것이며 만약 나온다면 안 읽을 재간 또한 없어 필연히 '길티'에 몸부림치며 슬픔의 OO파티를 벌이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뒤죽박죽 감상의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이 시대의 사랑과 수치, 폭력은 분리되지 않는 축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다.<br/><br/> 나 또한 어느 면에선가는 이 해괴망측하고 질척질척한 사랑에 허우적대고 있다는 말이다. 평생을 궁금해했던 어떤 '사랑'은 이런 형태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언젠가 보았던 말처럼, 사랑을 쪽팔리게 하는 OO들을 다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쩌겠는가. 사랑하는 자여, 두려워 말고 힘차게 전진하시라. 티켓값은 비싸고 영통은 짧습니다. 우는 건 끝나고 트위터에 움짤주접까지 다 올리고 하세요...<br/><br/> p.26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의 좌절을 살피는 그의 태도는 얼마나 성숙한가? 대상이 남기고 간 분노를 어루만지는 것까지가 사랑이라니. 케이팝이 무엇인지 묻는 말에 좆같지만 사랑한다는 말로 얼버무리곤 했던 나는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책임지기 위해 수치심, 죄책감, 두려움과 마주한 한 사람의 용기 앞에서 눈부신 모멸감을 느꼈다.<br/><br/> p.257 실제로 케이팝은 흑독한 아카데미 시스템을 제외하면 지금 한국 사회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으며, 이미 해외 시장이 조성된 산업이 한국을 닮아야 할 이유도 없다. (…) 지금 우리에게 케이팝은 '자원'이 아니라 우리가 묵인한 사회의 병폐와 우리도 몰랐던 사회의 매력을 다양한 각도로 투영해 볼 수 있는 프리즘이다. 이 프리즘 앞에 서서 다같이 머쓱하게 웃어보자. 그것은 '가짜'가 '진짜'가 되어버린 웃지 못할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제스처일 것이다.<br/><br/><br/><br/>#펑펑 #복길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01/89/cover150/k91213997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018971</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나이 묻는 사회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기 위해. - [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65418</link><pubDate>Fri, 08 May 2026 22: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6541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8162&TPaperId=1726541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9/84/coveroff/k69213816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8162&TPaperId=1726541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a><br/>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5월<br/></td></tr></table><br/>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듣고 말해본 적이 있을 말들이 있다. 싸가지 없는 놈, 나이도 어린 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노친네… 너무 쉽게 말해져 혐오라고 불리지도 않는 이 말들에는 나이라는 공통점이 도사리고 있다. '애새끼'도 모자라 '유충'에서부터 잼민이, 급식충, MZ, 아줌마, 영포티, 틀딱, 노친네까지, 우리 사회에서 멸시 어린 연령 집단으로 묶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br/><br/> 툭하면, 주로 저 마음 불편한 소리에 '갈라치기 하지 말라'며 예의 '준엄한 꾸짖음'이 횡행하는 시대에 누구보다도 서로를 촘촘하게 규정짓고 혐오한다. 나이보다는 개인적 속성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청년세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고하게 사회 전반을 구성하는 연령주의적 제도 및 인식은 필연히 개인과 사회 수준 모두에서 충돌하고 갈등한다.<br/><br/> p.9 연령차별주의는 가장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차별이면서 가장 잔혹한 거부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는 달리 연령차별주의 피해 당사자들은 차별에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이는 누구나 다 평등한 속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연령차별주의가 너무나 우리 의식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제도화된 관행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br/><br/> p.65 기존의 나이 멸칭이 지겨워지면 새로운 나이 멸칭을 만들어 특정 세대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행태, 계속해서 낙인찍을 나이대를 찾는 행태, 이제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나이대는 다 제각각의 멸칭을 갖게 되었다. 멸칭이 없는 나이대가 없을 지경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이 멸칭으로 조롱하는 사회, 지독한 연령주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br/><br/><br/> 언젠가 SNS 댓글에서 본 적이 있다. 임산부 우선석에 노인이 앉아 비켜주지 않았다는 토로에 달린 내용 중 "10년만 지나면 그런 노인네들이 다 없어져서 깨끗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나름의 '위로'가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나. 황당하고 참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혐오에 있어 개인의 문제와 사회구조의 문제가 이렇게나 뒤섞여 있구나, 하는 생각에 댓글창을 떠나지 못했다. 우리 시대의 초상은 배제와 구분에 다름아니다.<br/><br/> 어쩌면, 아니, 확실히, 한국사회의 키워드 중 하나는 조롱과 혐오일 것이다. 이 둘은 극단적인 타자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익히 알려져있듯 구분짓기는 혐오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혐오할 수 없다. 혐오 대상으로서의 용납할 수 없는 속성은 타집단, 그것도, 지금 현재의 기준으로서는 절대 내가 아닌 이들에게 전가되어야 하므로.<br/><br/> p.88 나이에 따른 혐오스러운 멸칭들이 각종 언론과 일상 대화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이는 '일상성'을 넘어서 '사회성'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 (...) 이제는 우리 사회가 언어를 통한 탈인간화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인식하고, 이를 줄이기 위한 대안적 표현을 학습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는 데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br/><br/> p.144 늘어난 평균수명으로 인해 현대사회에서 노년을 살아간다는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삶을 산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전의 어떤 세대도 지금의 노년 세대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오랫동안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의 고령층은 문화적 전위 의 역할을 떠맡아 새로운 노년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적 전위의 역할을 하거나 새로운 노년의 의미를 받아들이기에 우리 사회의 연령주의는 너무 막강하다.<br/><br/><br/> 우리 사회에서 나이는 단순히 살아온 햇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대되는 역할과 태도에서 벗어나기를 금지하는 강력한 규범이자 위계로 기능한다. 이것은 탈-규범적 전위를 요구하는 동시에 '감히' 전형을 벗어나는 이레귤러를 가혹하게 조롱하고 탄압하는 모순적 사회에서 이중구속으로 기능한다. 연령주의의 폐단은 개인의 삶에 그치지 않는다. 아젠다 선정에서 실질적 참정권까지, 정치-제도의 곳곳에 연령주의의 뿌리는 깊고도 촘촘하다.<br/><br/> 예의 청년정치를 표방하는 모 정치인을 떠올려보자. 무능과 도덕성은 차치하고라도, 청년유권자에 '우리'로 묶이려 시도하며 그 자신이 마치 아이콘인 것처럼 행세하는 전략이 왜 무시 못할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가 청년이라고 불릴 만큼, 사회초년생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정치기득권이 고령화 되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br/><br/> p.64 나이 멸칭은 특정한 개인들의 행태를 전체 나이대의 공통적인 특성처럼 확대 재생산한다. 우리 사회는 특정 나이대에 대한 틀에 박힌 이미지와 이들에게 기대하는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자꾸 특정 나이대 사람들에게 뭘 해야 한다고 규정을 내린다. 그 규정에 어긋나면 멸칭이 만들어지고, (...) 유행이 되어 빠르게 번지고 오프라인까지 선을 넘어 퍼져 나간다.<br/><br/> p.321 연령대마다 따라붙는 편견과 차별은 언제나 부정적인 모습만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맞이하게 될 인생의 여러 단계를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행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국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에 꼽히는 것도 이런 나이에 대한 차별이 한 측면을 담당하고 있다. 나이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전제가 해소될 때 우리는 생애주기별로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있다.<br/><br/><br/> '유권자의 목소리'는 평등하게 대표되지 않는다. 소구와 '표밭'이 따로 노니 아젠다는 자연히 과시행정에 급급해진다. 고령화와 동시에 경제-기득권화 된 정치권이 호소하는 부양 부담의 증가는 과연 누구의 '억울함'인가. 그놈의 '갈라치기', 과대표와 청년 호도 정치인의 부상은 이런 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 끊임없이 나 아닌 집단을 배격하는 인식은 과거와 미래, 사회와 개인 모두를 옭아맨다.<br/><br/> 삶은 분절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어리게 태어나 늙어 죽는다. 어느 순간도 삶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어려서, 젊어서, '적당한 나이'를 지났기 때문에 '임시'로 밀려나기를 요구받는 사회에서는 모든 순간이 불행하고 불안하다. 결국 나이는 수로 계산될 수 없는 삶을 욱여넣지 않는, 그저 '중요한 숫자'일 뿐이어야 할 것이다. 생의 모든 시기가 그 때만의 가치를 갖는, 제각기 어떤 사람의 바로 그 순간이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라 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br/><br/> p.204 대통령이 될 나이를 높게 잡은 것은 2030 청년세대의 정치적 역량 약화와 기회의 제한으로 이어진다. 고령화로 인해 선거에서 노인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게 되고, 정치인들은 고령층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공약 경쟁을 함으로써 청년을 위한 정책은 감소할 가능성이 있는데 피선거권 제한까지 더해지니 문제는 한층 심각하다.<br/><br/> p.243 한국 사회에서 노인은 기본적으로 계급적 개념이라는 주장이 있다. 정치인이나 재벌 등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노인이라 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서민'에게만 노인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노인이 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된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9/84/cover150/k69213816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698413</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노동을 말함은 곧 삶을 대함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의 삶이 아닌가. - [생업(生業) - 그 징하고도 찡한 노동의 표정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52846</link><pubDate>Fri, 01 May 2026 21: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5284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52138163&TPaperId=1725284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70/11/coveroff/k55213816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52138163&TPaperId=1725284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생업(生業) - 그 징하고도 찡한 노동의 표정들</a><br/>은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5월<br/></td></tr></table><br/>생업.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 생계를 위해 하는 일. 먹고 사는 일. 밥벌이. 그 징하고 찡한 이야기들. 비단 먹고 숨쉬며 살아가듯이 자연스러운, 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기꺼이 나서는 일, 이렇게 해야만 살 수 있기에 떨쳐일어나는 일. 그 모든 일들이 생업,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이다. 생업이란 사람을 살리고, 살게 하는,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이다.<br/><br/>  이 책은 저자가 말 그대로 밥을 짓고 먹이는 사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 함께 사는 삶으로 나아가자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 듣고, 묻고, 나눈 시간의 기록이다. 그래서일까, 곳곳에 먹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매일같이 상 차려 먹이는 사람, 그 사람 밥 먹이던 이야기, 낯 모르는 사람들 끼니를 따라다니며 챙기는 사람…<br/><br/> p.12 밥과 일에 대한 가치 정립. 우리는 이 절대적인 삶의 필수 조건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 투자로 얻은 금융 소득이 근로 소득을 앞서는 사회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은 갈수록 초라해진다. 좋은 직업의 '좋음'은 연봉만 우선시 된다. 그러나 돈이 없어도 살기 어렵지만 또 돈만으로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다.<br/><br/> p.32 "밥 하는 엄마보다는 혁명가 엄마가 좋아요." 하지만 매일 1700인 분의 밥을 짓는 사람이 혁명가다. 밥은 타인에 대한 사랑의 실행이며, 밥은 흩어진 존재들을 모으는 점성 강한 연결의 수단이다. 인간은 밥 주위로 모여든다.<br/><br/><br/> 그가 만난 사람들은 덤덤하게, 그러나 뿌듯하게 말한다. 뼈빠지게 일하고, 때로는 일신의 안락함마저 내던지고 달려들었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일은 하지 않았다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노동의 고귀함을, 스스로와 세계를 떠받치는 자의 자부심이란 것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눈물은 아래로 떨어져도 밥숟가락은 위로 올라간다고 했던가, 하루하루를 먹고 살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br/><br/> 어느 작가는 먹는 일에는 구차한 데가 있다, 고 말했다. 그 말은 그 밥 한 술 떠넣지 못하는 입을 아는 자의 치욕이다. 먹을 때가 아닌데, 들어갈 속이 아닌데도 꾸역꾸역 밀어넣어야 하는 자의 수치심이다. 정의에 가장 가까운 감정은 수치심이다. 긍지에 가장 가까운 말이 슬픔이듯이.<br/><br/> p.92 "환대란 내가 뭘 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있던 자리에서 내려오고 그가 주가 될 때, 주객이 뒤집어질 때 가능하죠. 그래서 내 자리를 뺏길 각오가 돼 있어야 해요. 저는 그게 나쁘지 않았어요. 한 번이라도 관계가 전복되는 건 달라요."<br/><br/> p.278 화살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화살이 제대로 사람을 찌르지 못할까 걱정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갑옷이 사람을 보호하지 못할까를 걱정한다. 국어 교사 박민영은 갑옷을 만드는 사람이다. 아이들에게 입힐 언어의 씨줄과 경험의 날줄로 짠, 세상에서 제일 튼튼한 갑옷을 짜는 예술가다.<br/><br/><br/> 이 글을 쓰는 오늘은 노동절이다. 새삼스레 주변을 둘러본다. 도처에 일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채널 자막에는 일하다 죽고 다친 사람들이 줄지어 흘러갔다. 하루도 빠지는 날 없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으로 밀려갔다.  앞서 생업은 살아가기 위해 하는 일이라 했다. 그러니 일하다 죽는 사람, 일 때문에 죽는 사람, 그 일이 아니었다면 견디지 않았어도 될 일에 죽어버린 사람이, 그 죽음이 얼마나 처참하고 참담한 일이란 말인가.<br/><br/> 누구도 일하는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사람이 사는 모든 일에 노동이 있다. 그러므로 노동을 말하는 것은 곧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과도 같다. 노동이 천함과 그악스러움의 대명사로 읽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수고와 감사를 자주 잊는다. 무심히 지나치는 얼굴들, 말끔한 공간의 곳곳을 보며 묻는다. 나의 오늘에는 어떤 노동이, 몇 명의 일하는 사람이 있었을까.<br/><br/> p.100 한국 사회에서 유가족이 된다는 건 바다 같은 슬픔에 잠기고 하늘 같은 분노에 휩싸이는 일이다. 사망 원인을 죽은 사람의 과실로 돌아가는 사용자 측과 질긴 싸움이 시작되고 사람이 일하다가 죽었는데도 기업은 벌금만 내면 그만인 잔인한 현실을 맞닥뜨려야 하니 가슴에 불길이 잦아들 날이 없다.<br/><br/> p.227 그가 싸우는 건 과격해서가 아니라 절실해서다. 자식을 낳은 엄마이자 자식이 죽는 걸 본 사람이라서다. 사랑을 줄 때조차 사랑을 받은 한 존재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커서다. 모르는 이들을 향한 이타심,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사명감 같은 인간 보편의 감정에 따르는 것이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br/><br/>#은유 #생업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70/11/cover150/k55213816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701106</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철학은 말이야, 우리가 단지 우리이기만 하지 않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사유의 문을 열어젖힐 힘이 있다는 걸, 알게 해주는지도 몰라. - [소피의 세계 (30주년 특별판) - 소설로 읽는 철학]</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44085</link><pubDate>Tue, 28 Apr 2026 18: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4408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4492&TPaperId=1724408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281/51/coveroff/893232449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4492&TPaperId=1724408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소피의 세계 (30주년 특별판) - 소설로 읽는 철학</a><br/>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2025년 12월<br/></td></tr></table><br/>철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처음 읽은 철학책을 기억하시나요? 처음으로 좌절케한 개념은? 또, 처음으로 이해의 빛을 마주하고 전율했던 때의 그 기쁨을 기억하시는지. 수많은 이들의 처음과 최고를 차지하고 있는 그 이름, 『소피의 세계』를 다시 만났다. 여전히 불친절의 구덩이에 상냥하게 내던져지는 느낌이라니. 나도 모르게 '그렇지, 이거지!'를 외쳤다고 하면, 알 사람은 알겠지요.<br/><br/> 유사 이래 철학과 철학자는 사회의 주류 관심사, 쉽게 말해 메이저였던 적이 없었다. 대체로 골치 아프고 포도청 저리가라 하는 목구멍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소리로 여겨져왔다는 뜻이자, 일상 바깥의 문제로 치부된 탓에 남는 게 시간이거나 아예 존재의 고통을 선명히 느껴본 적 있는 사람이나 사색에 잠긴다는 게 거지반 통설이었다는 뜻이다.<br/><br/> p.151 소피는 플라톤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자신의 영혼이 육체에 자리 잡기 전 이데아의 세계에서 영원한 '다람쥐'를 소피가 보았을지도 모른다. 소피가 이미 한 번 산 적이 있다는 생각이 맞을까? 지금의 육체 를 얻기 이전에 정말 소피의 영혼이 실재했을까? 시간이 지나도 소멸하지 않는 작은 금괴, 바로 소피의 육체가 늙어 죽어도 계속 살아 있는 보석과도 같은 영혼이 소피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걸까?<br/><br/> p.626 우리는 살아 있는 행성이야. 소피야! 우주 안에서 불타는 태양 주위를 항해하는 커다란 배지. 하지만 우리 각자는 유전자라는 짐을 싣고 인생을 항해하는 배이기도 해. 우리가 이 짐을 다음 항구로 실어 나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헛된 것은 아니겠지…<br/><br/><br/> 느닷없이 시작된 소피와 크눅스 선생의 철학 여정은 서양철학사의 기원에서 지금 여기의 인간 정신과 물질성까지 총망라하며 종잡을 수 없이 이어지는 중에 때때로 갈등에, 벽과 '낯섦'에 맞부딪힌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야말로 '순식간에' 박차를 가하며 독자에게 달려들다 급기야 종국에는 아주, 낯설고 고난스러운 시작을 예고하며 독자에게 다음을 넘긴다.<br/><br/> 실존과 현실, 존재와 관념이 마주치는, 힐데와 소피 그리고 크눅스 선생과 이 이야기의 '동인' 그리고 독자가 만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반전하고 합의 길로 솟구치게 되는 걸까? 읽는 내내 '천천히'를 되뇌어야 했던 이야기의 끝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철학적 사고에 발을 들여놓는 책들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각을 다시 맛보는 기쁨과 동시에 충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br/><br/> p.408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이성을 통해 논증할 수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어. 책임 있는 행동은 이성을 예민하게 갈고닦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고통과 행복을 같이 느낄 수 있도록 감정을 예민하게 갈고닦아야 가능해지는 거야. (…) 전쟁이 끝난 뒤에 많은 나치가 처벌을 받았지만 그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비이성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잔인했기 때문이야."<br/><br/> p.451 "소령은 우리의 작은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게 그가 전능하다는 뜻은 아니야. 어떤 경우든 우리는 그가 전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해. (…) 문제는 우리가 존재 하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이며 누구냐는 거야. 우리가 단지 소령의 분열된 의식 속의 자극, 그의 의식 속의 관념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쩌지는 못할거야."<br/><br/><br/> 이 길고 사뭇 공격적이기까지 한 이야기에는 이성의 어떤 면에 초월적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이전의 '당연한' 도식에 꼭 들어맞지 않는, 그 안에 구겨넣을 수 없는 어떤 신비한 체험과 같은 사건들이 드러내는 철학의 속성이 있다. 세계를 묻는 일은 나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것, 근원을 뒤흔들 수밖에 없다는 것. 철학의 개념과 명제들은 안도와 순종을 위해 밝혀지고 선언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영혼을 지져놓는(전기가오리!) 충격에 가깝다.<br/><br/> 철학의, 사유의 죽음이 공언되는 이 시대에 누군가 내게 철학이란 무엇인가, 묻는다면 바로 이렇게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학문이라 하겠다. 깊이 생각하는 것, 발견하는 것, 나의 자리를 기꺼이 떠나고 뒤집어 엎는 용기. 지혜를 사랑하고, 깊이 사유하여 밝히는(哲) 것은 그렇게 세계와 존재를 잇는다고,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도 또다시 물을 수 있게 한다고. 그러니 함께 철학-함으로 나아가자고, 기꺼이 묻고 또 사유함으로 나아가자고.<br/><br/> p.10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은,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 우리에게는 서로를 이어주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함께 책을 읽는 경험은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br/><br/> p.679 "문제는 역사가 종말로 향해 가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인가 하는 거야. 우린 더 이상 한 도시나 한 국가의 시민이 아니야. 우리는 전 지구적인 문명 속에 살고 있는 거란다. (...) 어쩌면 지금 우리가 체험하는 현상은 아직 시작 단계일 뿐일지도 몰라…"<br/><br/><br/>*서평도서제공: 현암사]]></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281/51/cover150/893232449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2815192</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미일동맹이라는 거울에 비치는 우리 사회 - [미일동맹이라는 거울 - 한미일 안보 체제의 한계와 가능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36423</link><pubDate>Fri, 24 Apr 2026 17: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364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741&TPaperId=172364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28/15/coveroff/k85213774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741&TPaperId=172364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미일동맹이라는 거울 - 한미일 안보 체제의 한계와 가능성</a><br/>지지와 야스아키 지음, 길윤형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미일동맹이라는거울 #지지와야스아키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br/><br/> 시작하기에 앞서, '국경'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이른바 '자국과 타국' 사이에는 경계가 있다고 간주된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고 저기까지는 그들, 이라는 식으로. 책임과 권리, 방어와 침입의 구분선으로 기능하는 '국경'은 어떻게 정해져야 할까? 내륙 국가라면 차라리 해결이 쉽다. 문제는 남한과 같은 '실질적 섬'이나 일본처럼 아예 전국이 섬으로 구성된 경우이다. 그것도 인접국이 명목상으로나마 전쟁태세를 늦추지 않는 경우 말이다.<br/><br/> 수백년간의 침략과 분쟁으로 단단히 얽힌 나라, 한국과 일본. 이 두 극동국가가 얼치기 펴와라는 현상유지에 도달한 것은 아무리 좋게 쳐줘도 양국 간 합의의 결과라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주축에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진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물음이 발생한다. 이 다글다글 붙어 있는 체제적, 정치적 '접경과밀지'에서 미국의 군사력이라는 '퍽 이질적인 세력'의 주둔이 발휘하는 힘은 어떻게 해석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극동의 군사안보적 미래는 어떻게 그려지고 또 받아들여지는가?<br/><br/> p.7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1945년 일본 제국이 붕괴한 뒤에도 '극동 1905년 체제'는 지속됐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패전 이후] 이 체제를 힘으로 뒷받침하게 된 것은 '한미·미일 양 동맹'이라는 안전보장 시스템이었다.<br/><br/> p.70 미일동맹은 아시아·태평양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허브 앤 스포크형 동맹망의 일부이다. 또 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통해 한미동맹과 특히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 '일본적 시점'에서 파악한다면, 미일 두 나라 사이의 '양자' 동맹일 뿐이고 미국의 다른 동맹망과 독립된 존재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제3자적 시점'에 서면, 실제로 이 동맹은 '극동 1905년 체제'를 떠받치는 '한미·미일 양 동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안전보장 체제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기능임을 알 수 있다.<br/><br/><br/>  현재 일본의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미군 주둔과 핵무기를 이용한 위력-전략을 어떻게 이해하고 유지 혹은 개선하려 하는가? 이는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극동의 3국, 아니 실질적으로는 6개국(남한, 북한, 읿본, 대만, 중국, 러시아)이 일종의 최전선인 동시에 잠재적 위협으로 여겨지는 형국에서 각국의 정치군사적 태도는 즉각 다른 국가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br/><br/> 이런 상황에서 '핵'의 소지 여부나, 사실상 군대인 일본 자위대 조직의 타당성에 대한 갈등이 거듭 터져나오는 것 또한 좌시할 수만은 없는 문제이다. 본문에서 거듭 거론되는 일국평화주의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에 대한 안일한 태도에 연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각종 밀약과 협정은 대중시민사회와 유리되어 맺어지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독자 또한 정치적 주체로서 거듭 물어야 한다.<br/><br/> p.150 한 발 더 나아가 말하면, 미국과 적대하는 국가는 극동유사사태가 발생할 경우 미일이 사전협의에서 어떤 결과를 내놓든, 즉 일본이 '사용 불허'를 결정한다 해도 주일미군이 [일본 내 기지를 활용한] 직접전투작전행동에 나설 수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수십 년 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기시 총리에게 말한 "일본의 의사에 반해 행동할 의도가 없다"는 약속은 당연히 미국의 적대국의 인식을 바꿀 만한 요인이 되지 못한다.<br/><br/> p.160 중요영향사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자위대가 "현재 전투행위를 행하고 있는 지역이 아닌 장소"에서 미군을 후방지원 하고 있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이 활동은 미군의 무력행사와 '일체화'되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자위대는 상대방의 공격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이런 주장은 극동유사사태와 사전협의 사이의 관계처럼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국내법적 논리이자, 자국의 의회·국민을 향해 내놓는 헌법 해석이나 사고방식에 불과하다.<br/><br/><br/> 과연 그 '나쁜 짓에 연루되지 않기'로 충분한 것인가? 나에게 어떤 '공격적 의도'가 없다고 주장하기만 하면, '어떤 분쟁에도 휘말리지 않는다'며 물러서는 태도가 과연, 윤리적 책무를 떠나, 얼마나 실효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실질적으로 한 패로 묶이는 와중에 '결정권 없음'을 주장한대도 상대가 '결정권자끼리만 공격하겠습니다' 따위의 '친절한' 선택을 하리라 기대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br/><br/> 저자는 일본의 입장에서 미일동맹과 '극동유사사태'에서 일본의 안전을 중심으로 논하나, 다시금, 한국의 입장, 나아가 우리 사회의 정치적 태도와 별개로 생각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격변하는 정세와 날로 더해가는 분쟁의 위협에서 우리는 진정 '안전하기' 위해, '자주국방'을 주장하기 위해 어떻게 중심을 잡을 것인가. 어떻게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평화라는 아슬아슬한 희망의 균형을 지켜낼 수 있을까. 제국주의와 국제패권이라는 암울한 그림자 앞에서 오직 그를 물을 뿐이다.<br/><br/> p.215 성단을 통해 종전을 결정했다는 것은 [당시 일본이] 천황의 판단 없이는 [국가의 운명과 관련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일본 정부 내에] 거버넌스(통치 기능)가 결여돼 있었음을 드러내 보여 주는 예가 아닐까 한다. 만약 [일본이] '다음' 위기를 겪게 된다면, 전쟁 종결이라는 어려운 결단을 내리는 주체는 민의를 체현한 정부여야 한다. (…) 출구전략을 염두에 둔 일본의 시각을 평소에 동맹국이나 관계국·지역과 공유해 두는 것도 필요하다.<br/><br/> p.288 안보 정책은 국가 간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 이상 일국평화주의나 필요최소한론에 기초한 '일본적 시점'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결국 '나만 옳다는 독선'으로 이어져 현실과 괴리가 생겨난다. 그로 인해 미일동맹이 기능할 수 없게 돼 거꾸로 일본의 안전에 위험을 불러오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본말전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28/15/cover150/k85213774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281562</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이렇게 태어나 이렇게 살아가는 몸의, 이토록 다양한 기원이라니 - [최초의 이브들 - 인류의 진화를 이끈 첫 번째 여성들을 찾아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21738</link><pubDate>Fri, 17 Apr 2026 01: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2173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32137767&TPaperId=1722173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60/54/coveroff/k63213776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32137767&TPaperId=1722173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최초의 이브들 - 인류의 진화를 이끈 첫 번째 여성들을 찾아서</a><br/>캣 보해넌 지음, 안은미 옮김 / 시공사 / 2026년 03월<br/></td></tr></table><br/>#최초의이브들<br/><br/> 태초에 낙원이 있었으매 나약한 여자가 간악한 꼬임에 남자를 꾀어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났더라. 여자란 본래 남자의 몸에서 난 탓에 열등하고, 약하며, 감정적이고 불안정하다… 정말로? 고래로부터 여성의 존재는 몸으로 한없이 수렴되고, 모성의 신화와 열등한 짐승이라는 비난에 쉴 새 없이 시달려왔다. 과학기술로 무장한 지금, 학계는 달라졌을까?<br/><br/> 퍽이나. '비과학'의 시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저자는 남성을 인간의 기본형으로 삼아온 '통념'에 맞서 여성의 몸을 중심으로 우리 몸 곳곳의 조상, 저 구석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동굴의 현모양처가 아닌 생존을 위해 분투하던 곳곳의 시원들을 불러낸다. 젖을 먹이고 새끼를 낳고 무리를 이루며 나무에서 내려와 땅을 박차고 뛰기 시작한, 말하고 생각하고 오래, 때때로 너무 오래 살기 시작한 최초의 이브들.<br/><br/> p.13 암컷의 몸은 그저 수컷의 몸에 지방, 유방, 자궁 같은 '여분의 부위'가 달린 몸이 아니다. 고환과 난소는 바꿔 끼울 수 있는 부위가 아니다. 성별 구분은 포유류 몸에 온갖 주요 특징과 그 안에서 사는 우리 삶에 배어 있으며, 이는 생쥐에게도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과학자들이 수컷을 기준으로만 연구하면 우리는 복잡한 그림을 절반도 이해할 수 업다. 우리는 성별에 따른 차이에 대해 질문하지 않기에, 이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무엇을 놓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너무 많다.<br/><br/> p.233 여성은 근본적으로 운동 직후 근육 강도가 더 떨어지는 듯했지만 훨씬 더 빨리 회복했다. 이것은 강한지 약한지의 문제가 아니라 대사와 조직 복구의 문제다. 단기적으로 남성은 근육을 가지고 '힘 쓰는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손상도 더 입는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일찍 쉬어야 할지 모르지만, 일단 한숨 돌리고 나면 비슷한 상황의 남성보다 일찍 그 일을 다시 할 수 있다. 태초에 낙원이 있었으매 나약한 여자가 간악한 꼬임에 남자를 꾀어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났더라. 여자란 본래 남자의 몸에서 난 탓에 열등하고, 약하며, 감정적이고 불안정하다… 정말로? 고래로부터 여성의 존재는 몸으로 한없이 수렴되고, 모성의 신화와 열등한 짐승이라는 비난에 쉴 새 없이 시달려왔다. 과학기술로 무장한 지금, 학계는 달라졌을까?<br/><br/><br/> 진화가 일방향적, 선형적이라는 착각과 이분법이라는 문화적 관념 모두에 도전하며 '몸 바깥의 문제들'이 어떻게 몸-존재들에게, 몸의 유무형적 차이가 어떻게 지배 담론에 이용되어 왔는지를 보인다. 그의 예시들에서 알아볼 수 있듯 생물학은 사회학과 별개가 아니다. 우리는 몸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압력이 어떻게 생물적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지, 생물적 다양성이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영향을 미치는지 샅샅이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br/><br/> 청력의 성차에 대해서도, 예를 들면, 구형 전자기기에 쓰이던 부품에서는 특정 주파수 소음이 방출되었다. 그러나 이 소리는 남성보다 여성이 예민하게 감지하기 때문에,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을 개발하는 남성들에게는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였기 때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여성들은 기기를 이용할 때마다 불쾌한 느낌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를 토로하는 이들이 여자라서 예민하다는 식의 반응에 맞닥뜨렸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성을 포함한 '비남성'들은 '규격'에 들어맞지 않는 일상과 '항상적이지 않은' 불편에 순응하도록 요구받는다. 마치 '인간'과 별도의 종인 것처럼. <br/><br/>p.158 남성은 고음을 듣는 능력이 먼저 사라지는 유형의 난청을 여성보다 훨씬 많이 겪는다. (…) 남성이 나이 들면 고음인 여성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없지만, 남성의 목소리나 그 외 덜컹거리는 낮은 소리는 여전히 들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성은 전형적으로 나이가 들며서 사회적 권력을 얻으므로, 권력을 가진 남성은 말 그대로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br/><br/> p.354 트랜스 여성이 여성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의 뇌는 자신의 방식대로 연결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발달 변화를 겪으면서 성 정체성을 만든다. 대부분의 인간 뇌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성별이 있는 존재라고 이해하는 듯이 보인다. (...) 뇌에 기반한 성 정체성이 그 신체가 속한 사회가 기대하는 바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들의 것보다 덜 실제적인 정체성이 되지는 않는다. <br/><br/><br/> 앞서 말했듯 진화는 우열과 의도의 문제가 아니다. '균일해보이는 정상 시스젠더 남성'은 인간종의 다양성을 대표할 수 없다. 성차별의 과학적 근거는 결국 전체적 손실로 이어진다. 성차는 결국 우열의 문제로 수렴되지 않는다. 이에 부득불 반대하고 싶다면, 축하한다. 그야말로 인간 가능성의 실패작이다. 책머리로 돌아가시오. 우리 인간 모두는 이브의 몸으로부터 태어난 다양한 실험실이자 가능성이다.<br/><br/> 저자가 강조하듯 인간의 가능성은 확장된 무리짓기와 돌봄의 연장에 있다. 혹자는 이 다양과 공존의 가능성을 '사회적 발명품' 따위로 취급하고 싶을지 모르나, 저자 말마따나, "우리가 바로 이런 몸이다. 고통스럽든 행복하든, 장애가 있든 없든, 병에 걸렸든 죽어 사라질 때까지 건강하든, 우리 몸과 그 안에 든 뇌가 그냥 우리다".  글쎄, 우리는 그저 이런 존재일 뿐이다. 그뿐이다. 부딪히고 고민하고 끊임없이 가능성을 탐색하며 함께 살 방도를 찾아나가는 이브의 아이들이다. 생긴대로 살자. 그래, 역시 좋은 말이다.<br/><br/> p.510 역설적이게도, 현대의 성차별은 산부인과학의 발전을 직접적으로 저해한다. 성차별적 문화는 여성에게 더 잦은 임신을 기대하는 것 같지만, 임신한 여성에게 제공되는 건강관리 기회도 줄인다. (…) 모성 사망률이 높아지도록 놔둔다? 진화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 이런 결과는 건강한 아기를 최대한 많이 낳을 수 있도록 최적화하는 것과 반대되는 일이다. 생물학적으로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다.<br/><br/> p.534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우리의 고유한 인간적 형질들을 총동원해야 하는, 다시 말해 확장된 친족 행동, 내러티브 구축, 문제 해결이 모두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하는 최고의 일은 이토록 깨지기 쉬운 확장된 유대를 지지하고 보호하는 제도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좋든 싫든, 이런 제도들은 영역성, 성차별, 우위 경쟁과 같은 우리의 덜 바람직한 행동을 극복하게 해 준다. 이 제도들은 우리 몸의 진화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이다. 우리를 진정 자유롭게 하는 수단이다.<br/><br/><br/>*서평도서제공: 시공사]]></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60/54/cover150/k63213776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605439</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언어라는 집, 공동체의 집을 가장 가까이 살피고 안내하는 이들의 일상에 대하여. 네, 국립국어원입니다. - [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국립국어원 상담실 연구원의 365일 노동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08644</link><pubDate>Fri, 10 Apr 2026 16: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0864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02137215&TPaperId=1720864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54/42/coveroff/k6021372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02137215&TPaperId=1720864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국립국어원 상담실 연구원의 365일 노동기</a><br/>이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감상에 앞서, 국립국어원에 대한 개인적인 심정으로 시작해야겠다. 아니, 원한 내지는 앙금 비슷한 것이라 해도 좋겠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그 일로 서비스는 이용하되 그 기관의 '태도'는 곱게 보지 않으리라 다짐한 세월이 꼭 그만큼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흥! 정도라 할 수 있을 마음으로 펼쳤고, 그제야 볼 수 있었다. 기관이라는 이름과 채팅창 너머의 사람을, '요즘 누가 그걸 신경쓰냐'는 핀잔의 '누구'들의 치열한 일상을.<br/><br/> 초중고 도합 장장 12년의 교육도 해낼 수 없는 문제, 맞춤법. 오죽하면 온갖 '맞춤법 검사기'가 등장하는 판 아닌가. 그 근간에 국립국어원이, 그 안에서도 이용자와 가장 가까운 곳인 상담실이 있다. 이 책은 가장 가깝고, 그 이유로 당황과 황당 사이를 끊임없이 ('끝없이'가 더 적절한 표현일지 잠시 고민했다) 오가는 상담실 연구원의 나날을 살짝 내보인다. 이걸 다 사람이 답하나? 네, 사람이 합니다.<br/><br/> p.4(추천사) 가시처럼 알쏭달쏭한 한 글자 한 칸 앞에서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답을 구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마지막으로 국립국어원의 온라인가나다 게시판을 찾는 수밖에 없다. (…) 오늘날은 인터넷을 통해 거의 누구나 뭔가를 쓸 수 있는 시대이고, 뭔가를 써서 보이기 전에 누군가의 검사를 맡아야 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런 때에 스스로 서로 정확해지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선생이고 해방이다. 물론 그것은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br/><br/> p.182 인공지능이 빛의 속도로 많은 데이터를 길어 올리면, 우리 상담 연구원들은 그 답변이 '규범' 이라는 단단한 땅 위에 서 있는지, 그리고 '맥락' 이라는 결과 맞닿아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언어의 온기를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주체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절차는 조금 달라지더라도 국어 연구원은 인공지능이 내놓은 문장들이 국어 생활자의 삶에 올바르게 닿을 수 있도록 책임지는 '최종 검토자'로서 품을 들일 것이다.<br/><br/><br/> 이쯤(이 쯤인가?)해서 물을 테다. 맞춤법 검사기 돌리면 금방인데 굳이 사람이 답해야 하느냐고. 단언할 수 있다. 해야 한다고. 문제는 옳고 그름의 정답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말은 소통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동시에 매 순간 갈라지고 다듬어지며 새로 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말이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고스란히 담아내기 때문에, 동시에 사회의 인식적 틀에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 떄문이다. 예를 들어, 잊을 만하면 한번씩 불려나오는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를 향한 조롱이라든지.<br/><br/> 그 이면에는 '감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있다. 억지 땜질로 바짝 기어주지 않으면 손쉽게 갈아치워질 처지들이 있는 것이다. 말은 사람 간의 약속이다. 그 약속이 누군가를 깔아뭉개고 핍박하는 구실이 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조롱이 아니라 새로운 약속의 장을 열고 다양한 가능성을 들고 오는 일이다. 언어규정은 사람을 단죄하고 옳고 그름의 선으로 찍어누르기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된다.<br/><br/> p.192 문장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며, 우리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어떤 길로 뜻을 전하느냐에 따라 그 움직임의 방향도 완전히 달라진다. '더 잘 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더 분명하게 전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작은 원리를 익혀 글을 쓰는 데에 사소한 도움을 얻기를 바란다.<br/><br/> p.200 왜 우리에게 '높임' 표현이 이렇게나 중요하게 되었을까? 언어는 그 사회의 정신을 반영한다는데, 이 기형적인 과잉 존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어쩌면 우리는 일상에서 채워지지 않는 존중과 인정의 욕구를 모르는 타인에게서, 특히 서비스업 종사자에게서 채우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극진한 대접을 받아야만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사회적 결핍이 '사물 존칭' 이나 '높임 어미의 과도한 중첩 사용'이라는 촌극을 빚어낸 것은 아닐까.<br/><br/><br/> 앞서 말한 10여 년 전의 '사랑' 논쟁 또한 그러하다. 저자가 거듭해 말하듯 규정은 사용자를 재단하고 혼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편협한 정의가 어떤 사랑을 '사랑' 바깥으로 밀어낸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벽을 세우고 엄격한 경계를 긋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범주를 넓히는 일이다. 슬프게도, 우리 사회의 모두는 말이 채찍이 되고 편가름의 도구가 되는 경우를 잘 알고 있다.<br/><br/> 매일같이 쏟아지는 질문 너머의 일상을 읽으며,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철학자의 말을 떠올린다. 이 말을 멋대로 읽자. 누군가는 벽을 세우고, 누군가는 먼 곳의 낯선 이를 환영하고, 또 누군가는 갈라지고 좁아진 틈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공동체의 집으로. 더 큰 집을 짓자. 넓고 다정한, 모두가 오가는 집을 짓자. 누군가를 내몰지 않는, 자유로이 열린 집을. 그 집에 함께 거할, 잘 있기 위해 매 순간 이해하고 안내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 응원을 보내며.<br/><br/> p.110 언어는 쓰임에서 의미를 얻고, 규범은 언어가 그 쓰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돕는다. (…) 그 안에는 언어가 변화하는 속도와 방향을 수용하는 우리의 자세가 담겨 있다. 변하는 언어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일은 때로는 낯설고, 때로는 재미있다. 상담으로 만나는 질문 하나에도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말을 바꾸고 있는지, 어떤 마음 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br/><br/> p.133 표기법이란 사람들을 가르치고 통제하는 교단 위의 회초리가 아니다. 우리들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맺은 약속이다. (…) 낡은 규범에 갇혀 말의 맛을 포기하기보다, 가끔은 대중의 말맛을 믿어 보는 것. 상담실에서 배운 규범 언어의 또 다른 모습이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54/42/cover150/k6021372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544217</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별 수 없이, 불가해의 거리를 껑충 넘어 맞대는 어깨. 우린 이제 한패를 먹은거야. - [너의 나쁜 무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05054</link><pubDate>Wed, 08 Apr 2026 21: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2050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509&TPaperId=172050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3/21/coveroff/k85213750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509&TPaperId=172050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너의 나쁜 무리</a><br/>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쓰는 사람은 많은데 읽는 사람은 없고, 말하는 사람은 많은데 듣는 사람은 없다. 하루종일 넘겨본 인터넷 게시물이며 동영상이 몇 갠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묻는다면, 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고, 하루종일 쏟아진 말과 글을 얼마나 기억하는지 되묻고 싶다. 언택트니 비대면이니 하지만, 발문처럼 차고 넘치는 연결들은 정작 한없이 낮은 밀도 탓에 세계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다.<br/><br/> 뒤탈없고 가벼운 관계만 범람한다. 부스러기 차 버리듯 툭 털어내면 그만일 말과 '우리 사이'들. 이해하려 애쓸 수록 벌어지는 모호와 오해의 간극. 그런 이유로 사는 내내 이질감을 존재의 무게추로 삼아왔다. 사람을 연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연한 살을 몽땅 안으로 말아넣고 그저 둘둘 굴러다니고나 싶었다. 그래서 이따금 소리를 지르고 싶었던 걸까. 북적대는 번화가에서, 볕 좋은 강가에서 우뚝 멈춰서버리고 싶었던 걸까.<br/><br/> p.157 자신의 아픔을 부정하는 사람만큼 아픈 사람이 없다는 걸 모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제야 모아는 시내와 수자, 자신 모두 마음 깊숙이 어디 한군데가 단단히 틀어진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서로를 감지했던 것일지도 몰랐다.<br/><br/> p.206 하지만 내가 느끼는 이 이상한 기분, 모멸감 같은 것들은 도대체 어떤 회로를 거쳐야 다스릴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모든 일에 진심을 다했지만 그럼으로써 깎이는 마음을 도로 채우는 법은 도무지 몰랐다.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취약한 부분을 너무도 쉽게 들키고야 말았다.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건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는데.<br/><br/><br/> 사는 일 너무 재미 없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지겨워했다. 뻔해서 지겹고, 알만해서 지루하고,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알지 않을 방도가 없어 초라하고 비참했다. 부끄러웠다. 사건도 사고도 없이 다사다난한 일상을 맴돌다 작가가 그려내는 이들을 맞닥뜨렸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른 순간 나는 그에게로 가…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흐릿한 바닥에 색이 차오르고서야 발붙일 마음이 들었다.<br/><br/> 일곱 편의 이야기, 그 안의 사람들에서 나는 낯설고 난감하고 익숙한 얼굴을 본다. 만원버스에서 한껏 움츠려 자리를 내주는 사람, 일하는 사람을 함부로 부르는 사람, 괜히 미안하고 멋쩍은 마음에 슬그머니 손을 내밀고 엉거주춤 문을 잡아주는 사람. 누구에게 보일지도 모르면서 꼭 요만큼의 벽을 세워두고 영영 지켜보이려 애쓰는 사람.<br/><br/> p.146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폐를 끼치고 누군가는 극도로 폐를 끼치지 않게 노력하고. 그건 어쩐지 좀 이상했다. 공평의 문제라기보다 경계의 문제에 가까운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이 아주 별일이라고 생각하는 무엇이 누군가에게는 그다지 별일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라는 게 발생하는 것이다.<br/><br/> p.207 문득 내가 지키고자 했던 그 최소한의 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최소한의 것을 지키기 위해, 오롯이 그러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br/><br/><br/> 그 얼굴을 외면할 방도가 없어 두 손을 세워 입가에 갖다 대는 이에게 "아뿔싸, 이러면 별도리 없지, 하며 고개를 숙인 채 집중하여"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이유를 잃어버리고 슬픔만 남"은 사람, "슬픔은 잃어버리고 이유만 남"아, "이유들만 머리에 남아서 악에 받쳐" 팔팔 뛰는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하찮고 사소하게 거듭되는 실패, 좌절, 미끄러지는 의도와 떨칠 길 없는 슬픔 따위는 그렇게 곁을 내주는 마음이 된다.<br/><br/> 보풀 일고 습기 먹은 이야기들을 걸쳐입은 지금, 차마 버리지도 바꾸지도 못하는 누추한 나와 구질한 실패 따위를 박박 닦아 서랍 구석에 모셔두고야 마는 그런 마음을 아느냐 묻고 싶다. 살아봐야지, 입속말로 우물대고 싶다. 별것 아닌 친절을 건네고 요상하고 찌질한 미련을 내비치곤 "인간의 쓰임은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지점에 다다르려 애쓰는 일" 같다는 작가의 말을 한구석에 대롱, 매달아두며.<br/><br/> p.20 "그런 건 누가 죽고 나서야 알게 되더라. 인사 잘 하는 법 같은 거 말이야." 기문은 작별 인사를 아주 오랫동안 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상대가 먼 길을 갈 때는 배웅도 오래 걸리는 법이라고.<br/><br/> p.72 새들이 낮게 나는 모양을 한참 보고 있자니 무언가에 완전히 굴복되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뒤늦게 추위가 엄습했다. 이대로 죽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헛웃음을 지으며 스스로 되뇌었다. 이중일은 죽지 않는다. 그들로부터 영원히 죽지 말라는 지령을 받게 되었으므로. 그것은 활력 있는 형벌과도 같았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3/21/cover150/k85213750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832113</link></image></item><item><author>뫕</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그 많던 신은 다 누가 죽였을까? 그 많던 신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94968</link><pubDate>Fri, 03 Apr 2026 20: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9466181/1719496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62137206&TPaperId=1719496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9/67/coveroff/k46213720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62137206&TPaperId=1719496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a><br/>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3월<br/></td></tr></table><br/>우리는 언제부터 신과 다른 세계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전지전능의 일신론이 의식체계와 기반 세계를 재편하기 전, 인간의 욕망과 충동, 명과 암의 양면성은 인간사회의 곳곳에 스며 있었다. 그것들은 신의 광휘를 입고 그 자체로 자연스레, 혹은 영광스럽게 받아들여졌다. <br/><br/> 그러나 지고의 창조주와 순종의 물결을 타고 인간 안의 감정과 욕망 생리와 사회적 본능이 피조물의 속성으로 전락해, 신성을 인간과 별개의 존재로 떼내어 숭앙하기 시작한지 기천년, 또 백여년 사이 급기야 제거 대상의 물목에 오른 지금 현대인은 수용되고 합일되지 못하는 야만과 내면세계와의 갈등을 겪고 있다.<br/><br/> p.49 편향된 신화는 우리를 현실성 없는 이상에 매달리게 하며 거듭 좌절하게 만든다. 자녀가 자기 아버지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아버지가 성숙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도 온전한 아버지 이미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융 분석가인 매리언 우드먼은 어머니의 어두운 측면을 통합하는 것이 현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진화사적 과업이라 했는데, 아버지의 어두운 면을 통합하는일 또한 이에 버금가는 중요한 숙제로 보인다.<br/><br/> p.208 심리적 위기의 정점인 '영혼의 어두운 밤'은 마치 태양빛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식과도 같다. 그런데 깜깜할 때야말로 영혼이 잠에서 깨어나며 비가식적 존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성인기에는 책임이나 성공 같은 '바깥의 빛'을 향해 매진하는 것이 주 과업이라면, 삶의 후반부에는 눈을 안으로 돌려 내면 작업에 매진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br/><br/><br/> 사라진 신들은 어디로 갔는가? 야만과 죄를 뒤집어쓴 채 영영 타르타로스의 밑바닥에 봉인되었는가? 여기서 기억해내야 한다. 신탁과 운명을 부정하던 이들의 말로를. 그들은 잠재된 위협으로 남아 시시때때로 봉인을 강하기에 억눌리는 것이 아니라 억눌렸기에 위험하고 강한 존재가 된다. 현대인에 있어 뜯겨나간 신성의 또다른 이름은 폭력, 중독, 우울과 채워질 길 없는 절망이다.<br/><br/> 그리스신화는 명백한 다신론적 세계관이다. 아니, 모든 것이 신이자 신성이다. 갈등도, 모순도, 통제할 수 없는 감정들도.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다채롭게 존재하는 세계야말로 가득한 신성의 증거이자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사잇길이다. 무턱대고 누를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삶을 회복하는 길이요 그 안의 자유를 찾는 방법이라 저자는 말한다.<br/><br/> p.112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즉 성과 공격성 혹은 사랑과 전쟁의 구도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몰아내길 원한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찾으려 했다. 하르모니아의 탄생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가장 감당하기 어렵고 또 가장 매혹적인 원초적 에너지들이 결합해 두 에너지 사이 균형이 이루어지자, 비로소 진정한 '조화'가 탄생했다.<br/><br/> p.241 이 신은 위협적이다. 그리고 정통의 위협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증상에는 영혼의 호소가 들어 있다. 그림자가 난무하는 지금, 억압과 배제가 아니라 디오니소스 힘을 이해하려는 열린 자세가 절실하다. 이 강력한 신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야만에서 벗어나 인류가 도약할 수 있는 지혜로운 길일 것이다. 신의 선물인 풍요의 뿔은 모두를 비옥하게 할, 결코 망각할 수 없는 힘이다.<br/><br/><br/> 신화는 분명 오래된 이야기이다. 보편에 기대어 설명하는 데에도 분명 한계가 있다. 이성과 논리의 세계의 현시대의 '남성성'에는 남신들의 속성과 그들의 이미지를 통해 참조할 모델을 잃어버린 채 안팎으로 터져나오는 폭력만이 남아있다. 모호함과 감정의 오염을 거부하는 명료한 이성과 논리의 세계는 들끓는 감정과 카타르시스, 부드러움과 유기적 자연의 이미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br/><br/> 이는 비단 물리적 '남성'에 국한되지 않는, 모든 인간에 내재된 남성성의 문제다. 신화가 유비하는 인간사, 신들의 세계로 전해지는 인간 내면의 추동과 갈등을 통해 엿보는 억눌린 무의식과 원형 이미지는 다시금 차가운 이성의 세계에 무엇을 돌려줄 수 있을까. 아주 오래된 이야기, 본질에 가장 가까운 서사의 세계가 그 해답으로 가는 문을 살그머니 열어주기를 기대할 뿐이다.<br/><br/> p.91 취약함과 수치심을 수술하듯 제거하거나 깊숙이 묻어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노력은 상처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장애물을 항구적으로 만들 뿐이다. (...) 상처도 결점도 추함도 열등감도 없어 보이는 삶을 원한다는 것, 이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창조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참자기가 되는 길은 있어도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길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br/><br/> p.252 디오니소스를 몸의 영성이라 했다. 의례를 통해 몸의 감각을 일깨워 신적인 합일에 이르는 것은 신을 경배하기 시작하던 선사시대부터 있어 온 한결같은 인간의 염원이었다. 이를 상실한 우리는 두려움과 열망, 충동과 금기의 반목과 갈등을 각자 내면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경험한다. 신화는 디오니소스 신을 위한 자리를 우리 안에 마련할수록 벌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선물을 받게 된다고 분명히 이야기해 준다.<br/><br/><br/>*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9/67/cover150/k46213720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796737</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