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김상혁 시인이, 어린 날 마음껏 읽고 마음껏 웃었으며 그러다가 마음껏 잠들며 함께한 만화책으로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초여름을 추억하지 말라'


도련님의 시대2권의 소제목은 무희. 이 책은 모리 오가이의 소설 무희(1890)의 탄생 배경을 다룬다. 오가이는 메이지시대 국비유학생으로 독일에 머물며 엘리스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지만, 귀국과 체류의 갈림길에서 사랑을 버리고 국가를 선택한다. 나중에 엘리스는 그를 따라 바다를 건너 일본까지 도착하였으나 그녀를 기다리는 건 오가이의 냉정한 태도뿐이다. 만화는 일본을 찾은 엘리스에게 마음을 빼앗긴 또 다른 소설가 후타바테이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오가이는 친구 후타바테이의 묘비 앞에서 한때 엘리스를 사랑했던 젊은 자신을 떠올리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누가 알겠는가. 그 사람에게도 가슴이 뛰던 초여름이 있었음을.” 그럼에도 오가이가 예전의 선택 자체를 후회하는 건 아니다. 시간을 되돌린대도 그는 그녀가 아닌 국가를 택했을 것이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 무희를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만화가 그리는 모리 오가이의 캐릭터는 자기 선택을 후회하는 자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애도하는 사람이다. 맞다. 애도라고 말해야 옳다. 열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집안과 국가마저 버리려 했던 젊은 오가이는 오래전에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다시 들여다보아도 나는 모리 오가이가 싫다. 도련님의 시대도 굳이 그를 미화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만화의 애정 어린 시선이 머무는 곳도 노인이 된 오가이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엘리스를 떠올리며 숨을 거둔 후타바테이와 어리석어 보일 만큼 사랑의 약속을 믿는 엘리스라는 인물이다. 일본을 찾은 엘리스와 겨우 마주 앉은 자리에서 오가이가 당신의 사랑은 고집일 뿐이라며 그녀를 내치는 장면에서, 그의 머리에 번개라도 떨어지길 바란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화를 식히는 동안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나라면 가족도, 나라도 버리고 엘리스와 함께 독일에 남았을까? 일본까지 찾아온 엘리스를 따라 나라면 독일로 떠날 수 있었을까? 대답은, 당연히.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사랑의 감정이 영원하지도 않고, 심지어 조변석개한다는 건 나도 잘 안다. 그러니까 엘리스를 따라 독일로 건너갔으나, 몇 년이 채 되지 않아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상황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이건 그나마 나은 상황이고. 나는 엘리스가 지겨워졌는데, 그녀 말고는 나 같은 동양인 남자와 사랑에 빠질 여성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럼 모든 걸 버린 사랑의 도피에 대체 무슨 의미가 남나.




모리 오가이의 유학 생활 동안 그와 엘리스는 동거하였다. 좀 나쁜 생각도 든다. 오가이는 그 기간 동안 정열을 다 소진한 게 아니었나 하는. 나는 사랑이든 마음이든 그걸 계절에 비유하는 작자는 믿지 않는다. 물론 계절도 사람의 마음도 신경 쓰지 않고 가만히 두면 겨울로 변하기는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계절이 겨울로 향하는 건 막을 수 없어도 마음의 여름은 붙잡아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결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사랑에 관하여 그것을 지킨다고 말한다. 이때 사랑을 지키는 방식이 한때의 감정을 그래도 유지하겠다는 식이라면 곤란하다. 자기감정에 관하여 인간은 전혀 전능하지 않다. 가령, 독일과 엘리스를 향한 가슴 뛰는 초여름의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오가이의 사랑은 끝없이 발명되어야 했다. 진정한 사랑은 인생의 다른 길을 열어준다느니, 사랑이란 서로의 가능성을 죽이지 않는 법이라느니 하는 관념은 어쩌면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엘리스라는 존재는 오가이가 일본에서 펼치려는 꿈과 그가 전 생애를 통하여 이루려는 소망을 무너뜨리려고 다가온 천재지변이었다. 그리고 그녀라는 재앙이 바다를 건너 모리 오가이의 눈앞에 거듭 닥쳐온 것이다.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천재지변이고 재앙이고 그게 다 뭐란 말이냐. 사랑의 결심이란 이렇게 고백하며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가장 시끄러운 눈 안에 자기를 스스로 가두는 것이다. 당신이라는 초여름을 붙잡아두기 위하여 무엇이든 다 해보겠다는 고백과 함께.


<<한 줄도 좋다, 만화책-만화는 사랑하고 만화는 정의롭고>>는 다양한 예술이 전하는 한 줄의 의미를 마음에 새겨보는 에세이 시리즈, '한줄도좋다'의 2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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