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건 과정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데 이의는 없지만

또 어떤 일이건 더 중요한 과정이 있다는 데도 이의가 없다.

책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뭘까?

질문을 바꿔서 내가 해야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이라고 물어보면

답은 바로 나오는데,

그건 바로

책 제목을 정하는 일이다.

가장 중요한데 가장 어렵다.

                            

물론 국내 저자인 경우는 편하다. 제목 정하기의 99%는 저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 물론 마케팅과 관련해서 1% 정도 출판사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번역서의 경우는 좀 다르다.

원서 제목의 직역이 바로 제목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전혀 새로운 경우도 많고, 저작권자 편에서도 용인된다.

아마도 이렇게 관례가 형성된 건 "현지화" 때문일 것이다.

신간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시인 장의사가 마주한 열두 가지 죽음과 삶>>의 원제는

The Undertaking: Life Studies from the Dismal Trade 이다.

직역하자면

장의:장의업에서 배운 인생

정도 되겠다.

기획하면서 책을 훑어본 상태에서 하마평에 올랐던 것들은 다음과 같다.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

"세상과 헤어지는 일"

'장의'나 '죽음' 등등을 독자들이 꺼려 할 거라는 생각에 최대한 우회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일단 만들어 본다.

착안점은

전자는 장의라는 게 망자를 보내는 일이라는 거고

후자는 망자는 세상과 헤어진다는 건데

부제로 보완한다고 해도 밋밋, 평범, 임팩트 없음이라는 자평이 금세 된다.

후자의 경우는 장의사가 주체가 아니라 망자가 주체가 된다는 점도 책에 부합하지 않는다.

만들자 딜리트하고

원제를 직역하면서 좀 푸는 방법을 고려한다.

저자가 장의사이면서 시인이라는 점이 키워드의 하나라

"장의사 시인이 깨달은 삶( 내지 인생)"

"장의사 시인의 인생 수업"

이런 걸 생각해본다.

웬 교과서 제목, 이것도 아니다.

번역 원고를 기다린다.

원고를 받고 교열을 보면서 책 속 문장 중 제목 삼을 것을 찾는다.

인상 깊은 책 속 한줄에

저자가 자신의 장례식을 예기하면서 쓴

"내가 있었다고 말해 줄"이라는 구절,

자신이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죽었다고 말해줄 증인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에 감동받는다.

"내가 있었다 말해주렴"을 후보에 놓는다.

무슨 책인지를 알릴 정보가 너무나 부족한 제목이다.

독자들이 제목을 보고 이게 뭔 내용의 책일지 짐작이 요원하다.

탈락.

장의라는 영어 단어 undertaking이 뭔가를 '떠맡는다'라는 의미라는 점과

(저자가 이걸로 말장난pun도 좀 한다)

시인 장의사라는 점에 착안하여

"시인이 맡은 일, 장의"라 해보다가

영어 말장난이 한국어에 가당치도 않고

알아차리기도 힘들고, 등 접는다.

교열을 보고 또 보면서 책을 외울 지경이 되는 어느 날

문득, 죽은 자를 "묻는" 장의 행위(이 책에서 다루는 장의는 거의 매장이다)와

질문한다는 "묻다"를 한국어에서 중의적으로 쓸 수 있다는 영감이 떠오른다.

(저자만 말장난하냐 나도 한다)

그저 떠오른 것이라는 의미에서 '영감'이라 명명해본다.

그래서 나온 것이

"죽음을 묻다, 삶을 묻다"이다가,

검색해 보니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묻는 류의 제목이 허다하고

역시 이 책은 저자가 장의사이면서 시인이라는 점이 중요하니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가 되고

아무튼 '작가'라는 걸 먼저 내세우는 게 중요하니까

부제는 '장의사 시인'이 아니라 '시인 장의사'가 된다.

결국, 죽음이니 장의니를 회피하려던 얄팍한 상술은 폐기되고

살펴보면 원제에 "묻다" 정도 추가된 제목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영감의 소산, 이 중의적 "묻다" 한 단어가

원제를 능가할 어떤 울림을 "현지 독자"들에게 주어서

판매에 반영되기를 고대하고 기대하고 희망하고 소망하고 염원하고 등등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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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16: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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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0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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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1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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