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날개 달린 것

영혼의 횃대에 걸터앉아,

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하네

결코 그칠 줄 모르고,

 

모진 바람이 불 때 더욱 감미롭고,

참으로 매서운 폭풍만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따뜻이 감싸 주었던

그 작은 새를 당황하게 할 수 있을 뿐.

 

나는 아주 추운 땅에서도,

아주 낯선 바다에서도 그 노래를 들었네,

허나, 아무리 절박해도, 희망은 결코,

내게 빵 한 조각 청하지 않았네.

 

- 에밀리 엘리자베스 디킨슨의 희망은 날개 달린 것 -

 

나무를 버팀목 삼아 살아 가던 나뭇잎들이 땅 위에 떨어져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늘에서 눈으로 내려오더니 막상 세상에 떨어질 때 모양새는 비가 되었다.

계절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곳에 집이 있다는 것은 도시에 살면서 우연히 얻어지는 축복이다. 삭막한 아파트 단지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산이 있다는 것에 언제부터인가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면서 세월과 나이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산으로 떨어진 눈은 비가 되지 않고 본디 모습대로 눈이 되어 산에 쌓인다. 산은 무엇이든지 본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지켜주는 넓은 아량을 지녔다. 하루종일 동양화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진 산을 바라보며 아련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낮은 곳에 서서 그 산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봄 날....어느 새벽녁

불면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 시간, 창문을 열면 온 세상에 아카시아 향이 춤을 춘다. 벚꽃이 꽃비를 뿌리며 지나간 자리에는 아카시아 향이 너울거리며 퍼져 나간다.

그리고 봄이 지나 여름이 오면 산은 누구보다 열정적인 모습으로 마음껏 자기를 내세워 보인다. 마치 이제 대학에 입학한 재기발랄한 신입생을 보는 듯하다.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무언가에 몰입한 20대의 모습을 나는 여름 산에서 만난다. 

그 열정이 지나간 자리에는 허무와 깊은 성찰이 남는다. 하지만 가을 산은 쓸쓸하면서도 포근하며 성숙의 단계를 거치면서 깊어지고 아름다워진다. 가을산이 그러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겨울 산 앞에 마주섰다.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틈히 꺼내 읽었다.

"언어를 바꾸면서 나는 내 인생의 한 시절과 결별했다" 모국어인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사유한 모든 것을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옮겨놓은 샤르트르 이후 프랑스 최고의 지성이라는 작가 소개가 눈에 띈다. 가을에 이 책을 몇 장 뒤적거리다가 그대로 책꽂이 버려두었는데 오늘 이 책이 갑자기 내 눈에 들어왔다.

특히 목차와 상관없이 마음에 와 닿는 제목을 찾아 읽으면 된다.

순서를 정해 읽어야 하는 것보다는 자유로움이 느껴져서 좋다.

 

 고통을 자제하면서 억지로 좋은 인상을 남기려 하는 사람들은 혐오스럽다. 눈물이 뜨거운 것은 고독 속에서 뿐이다. 죽는 순간 친구들에게 둘러싸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마지막 순간을 과감히 맞이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눈물이 뜨거운 것은)

-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13쪽에서 -

 

고통이란 외부의 어떤 것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정신적 고독의 상태이므로 비교는 아무런 의마가 없다. 그러나 고통을 혼자 겪는다는 사실에는 큰 장점이 있다. 만약 인간의 정신적 고통이 얼굴에 충실하게 나타난다면, 즉 내부의 괴로움이 외부로 옮겨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 그래도 대화를 나눌 수 있겠는가 ?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고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가 ? 만일 감정의 강도가 표정에서 그대로 읽힌다면,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고통의 척도)

-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20쪽에서 -

 

 

최근 나로 인해 가까운 사람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에밀 시오랑은 책에서  고통의 크고 작음을 나누는 일은 불가능하며, 인간은 각자가 절대적이고 끝없다고 믿는 자신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각자가 느끼는 고통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짐작할 뿐이다.

 

아주 작은 상처가 돌이킬 수 없이 벌어져 우리 존재 전체를 피투성이로 만들 때, 그때서야 고통이란 혼자 겪는 것이기 때문에 밖으로 들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 쌓여 있는 고통의 독성이 화산처럼 분출한다면 온 세상을 중독시킬 만큼 충분하지 않겠는가 ?

-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21쪽에서 -

 

결국 상처 받을 수 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더 큰 아픔과 상처는 막을 수 있었을텐데...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실수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깨닫게 된다.

 

슬픔은 넘쳐 흐르는 상태가 아니라, 서서히 가라앉아 사그라지는 상태이다. 대개 슬픔 한숨이라고 말하지 슬픈 고함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열정을 지나치게 소비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깊은 허탈감이 각인된 체념과 상실감만이 남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성취하고 나면 우리는 슬퍼진다. 얻었다기보다는 잃었다는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슬픔은 삶이 탕진될 때마다 생긴다. 잃는 것이 클수록 슬픔의 정도가 심하다.

-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72쪽에서 -

 

깊은 심연 속에 갇혔다가 다시 나온 기분이랄까 ?

시간 속에서 모든 일들이 과거의 기억이 된다면 지금 받은 상처의 빛깔은 좀 더 옅어지게 될까 ?

차분하게 읽으며 생각을 정리하기 좋은 책이다. 하지만 죽음, 우울, 슬픔, 절망, 좌절 등 대체적으로 어두운 감정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라서 읽고나면 좀 더 슬퍼진다.

하긴 슬플 때 차라리 슬픈 영화를 보며 한바탕 울고나면 속이 후련해지듯이...오히려 이런 책들이 마음의 평화를 주는데는 더 도움이 된다.

 

 

미셸 우엘벡의 국내 번역 책을 구입하는 중이다.

소립자, 공공의 적들, 어느 섬의 가능성, 투쟁 영역의 확장, 지도와 영토... 분량상 가장 가벼워 보이는 투쟁 영역의 확장에 먼저 도전해 본다.

마음은 소립자를 먼저 읽고 싶으나, 우엘벡의 첫 번째 소설이라고 하니 먼저 투쟁 영역의 확장을 읽어 보기로 했다.  소립자를 읽기 전에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늘 생각하지만 작가들은 계속 책을 쓰고, 출판사들은 계속 책을 만들어 내고...독자들은 끝없이 쏟아져나오는 책들 중에 좋은 책을 찾아서 읽어야 하는 즐거운 고통에 빠져 산다.

 

당분간은 조용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

고통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책에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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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나스 2013-12-12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지만....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곧 찬란한 태양이 우리의 마음을 비춘다는
희망과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힘들지만...
그러한 기회는 우리의 상처난 영혼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지 않을까해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착한시경 2013-12-12 22:43   좋아요 0 | URL
해뜨기 전 새벽은 시련인 동시에 희망이기도 한 것 같아요^^
최근에 고난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생각하게 되네요... 좀 힘든 시간이지만 분명 더 멋진 행복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어봐요~ 감사하고 편안한 밤 되세요~

미스코리아 뚱 2013-12-12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뜨기전이 가장 어둡다,,좋은글,,잘 읽고 갑니다,,감사요^^

착한시경 2013-12-12 22:43   좋아요 0 | URL
기회가 되신다면... 한번 읽어보세요^^ 아름다운 문장들의 너무 많아서 귀한 책이랍니다.

마녀고양이 2013-12-12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라는 제목이 퍽 마음에 들어서 저도 구입을 망설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입했는지, 안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방바닥에 책이 엄청나게 쌓여있는데, 요즘 기억이 너무 오락가락합니다. ㅠㅠ. 그저... 착한시경님의 페이퍼에서 좋은 글을 읽고 가네요.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책을 읽으시나봐요...

철도의 1113일째 열애 중이라고 누가 적었군요.. 참 예쁘네요.
여행 가고 싶어지는군요.^^

착한시경 2013-12-12 22:45   좋아요 0 | URL
군산...철길마을에서 찍은 사진들이랍니다.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아, 그냥 관광지가 되었지만 나름대로 운치있고 좋았어요~ 저두 기찻길에 새겨놓은 글이 참 예뻐서 사진으로 찍어왔어요... 113일이었다면 사진으로 안 찍었을텐데 1113일을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했을 그들의 사랑이 너무 예뻐서...사진으로 담아왔죠^^

키재기 2013-12-12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 저의 경험으론 그 어둠이 자신을 잘 드러내 주더라구요.자신과 마주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착한시경 2013-12-12 22:48   좋아요 0 | URL
이육사의 시처럼 서릿발 칼날진 위에 서서,,, 한발 재겨 디딜틈 없는 상황에서도 눈을 감고 생각하면 희망의 무지개가 있는 것 같아요...물론 이육사는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그 시를 썼겠지만...시는 독자 입장에서 다양하게 해석하는거니까요~
눈을 감고 봄을 그리고 희망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숲노래 2013-12-15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때문에 힘들 사람도,
또 다른 사람 때문에 힘들 나도 없구나 하고
날마다 새롭게 느껴요.

서로 다른 빛으로 거듭나는 길에서 만나
서로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흐름이네
하고 느끼곤 해요.

군산 기찻길에는 저렇게 낙서도 하네요.
하기는, 저것도 재미난 놀이일 테니까요~
 

 

 

 

 

 

 

 

 

 

 

 

 

 

 

 

(탄방동 카페 '엘리먼트 랩'에서 마신 핸드드립커피 케냐 AA)

 

저녁을 먹고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 입지않고 김치냄새가 좀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불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자식하고만 사랑을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 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여도 좋고 남성이여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생길 필요도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을 그 많은 구경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 두곳, 한 두가지만 제대로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되새겨질 자신이 돼 있을껄...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자라서 탄로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바랄 뿐이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테고, 내가 더 예뻐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 눈속 침대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데에 더 매력을 느끼려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베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 듯,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그도 그럴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시킬때는 여왕처럼 품위있게, 
군밤은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때는 백작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위해 하기싫은 일을 하지않을 것이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않고 살고자 애쓰며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 사람을 사랑한다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의 꽃을 사서 그에게 들려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게다. 

나 또한 더러 그의 눈에 눈꼽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추가루가 끼었다고 해도 
그의 숙녀됨이나 신사다움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여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 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주리라. 

그러다가, 어느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

 

(친구가 준 수제 크리스마스 쿠키...)

 

지초와 난초의 교제라는 뜻으로, 벗 사이의 맑고도 고귀한 사귐을 일컫는 말...지란지교를 떠올리는 하루였다. 연이어 계속되던 추위가 주춤하고 오늘 낮은 제법 따스한 기온을 느낄 수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까지 비추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들이었겠지만, 이제 초겨울이니 포근한 기온에도 만족해야 한다.

한동안 환한 햇빛을 본 적이 없어 우울하다는 친구의 말을 떠올려 보니, 화창한 하늘을 본 기억에 아득하기만 하다.

높고 맑은 하늘, 따뜻한 기운을 몰고 오는 바람 그리고 마음까지 비춰줄 것 같은 투명한 햇살이 좋은 가을은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복잡한 생각 속에 우왕 좌왕하며 혼란스러워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다시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내가 오늘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오래된 수필을 떠올린 것은 사랑하는 두명의 친구들때문이다. 나이가 같거나 비슷한 사람을 친구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친구의 범주 안에는 들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한명은 나와 다섯 살 차이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여섯 살 차이가 난다.

하지만 나와 가깝고 오래 사귄 사람을 친구라고 일컫는다면 그들은 가장 귀한 벗들이다.

흔히들 나이를 먹을수록 좋은 친구를 만들기 힘들다고 하지만, 이 두명은 친구들은 모두 30대에 만나 긴 시간을 함께 하고 있으니 특별한 인연임에는 틀림이 없다.

 

친구 사이에 진정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일은 쉽지 않다. 많은 시간 속에 신뢰가 쌓여야 하고, 치졸한 이기심과 시기, 욕심을 버려야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법인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조건없는 사랑과 우정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우정을 이야기하는 글이나 노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깊은 우정을 나누는 일이 쉽지 않음을 뜻하고. 모든 인간은 그런 우정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에게 내면의 소통이 가능한 친구들은 내 삶의 가장 큰 축복이며 자랑이다.

신은 나에게 큰 고민과 시련을 주셨지만 동시에 그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도 허락하셨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괴로워했을까 ? 홀로 극복할 수 있었을까 ? 

나를 염려하고 위로 했던 목소리들...한 순간도 나를 외롭게 만들지 않았던 그들의 배려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고마운 일이다.

   

(카페에 장식되어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사람을 알기보다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또한 나의 인간관계가 풍요속의 빈곤이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을 함께 나누는 소박한 관계를 꿈꾼다.  

 

셋이 함께 만나 점심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빨간색 코트와 책 그리고 늙어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최근 함께 구입한 김운하의릴케의 침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진지한 책의 내용을 자기 식으로 재미있게 풀어 내거나  혹은 자신의 경험대로 각색해 버리는 한 친구 때문에 정신없이 웃었다

 

특히, 나는 이런 특별한 재능을 지닌 친구를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꾸밈없는 웃음때문이다. 어떤 고민도 그녀와 나누면 웃음이 되어 버리는데 난 그 가벼움을 사랑한다. 울면서 찾아가도, 헤어질 때는 꼭 나를 웃게 만드니...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그리고 11년을 늘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나를 바라봐주는 또 한명의 친구...

나는 그녀의 변함없는 마음과 이성적인 판단에 늘 감탄하고 놀란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그녀는 언제나 내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해 준다. 그 판단의 밑바탕에는 나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음을 잘 알고 있으니 그 마음이 고맙다.

 

 

함께 점심을 먹고, 한끼 밥 값만큼 하는 핸드드립 커피를 마셨다.

사투리에 웃고, 빨간 매니큐어에 웃고, 곰보다 못한 모성애를 운운하며 웃었다.

파 다듬는 일과 다듬은 파를 사는 일 중 나는 다듬은 파를 사는게 어울린다며 웃었고,

고난 4종 세트에 대해 이야기 하며 웃었다.

그리고 내 독특하고 대책없는 가치관에 다들 이제 익숙해져 그냥 웃어 버렸다.

시간이 흐르며 모든 것들이 즐거운 웃음의 소재가 되니 이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다.

 

헤어지며...다음 만남에는 속이 쓰릴 만큼 매운 칼국수를 먹고, 커피를 마시자는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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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많이 하면 반드시 필요 없는 말이 섞여 나온다.
원래 귀는 닫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입은 언제나 닫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돈이 생기면 우선 책을 사라.
옷은 해지고, 가구는 부서지지만
책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위대한 것을 품고 있다.

행상의 물건을 살 때는 값을 깍지 마라.
그 물건 다 팔아도 수익금이 너무 적으니
가능하면 부르는 그대로 주라.

대머리가 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라.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보다
머리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에 더 관심 있다.

광고를 다 믿지 마라.
울적하고 무기력한 사람이
광고에 나오는 맥주 한 잔으로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면
세상은 이미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잘 웃는 것을 연습하라.
세상에는 정답을 말하거나,
답변하기 어려운 일이 많다.
그때에는 허허 웃어보라.
뜻밖에 문제가 풀리는 것을 보게 된다.

텔레비전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지 마라.
그것을 켜기는 쉬운데,
끌 때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여유가 있어도 낭비는 나쁘다.
돈을 많이 쓰는 것과
낭비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불필요한 것에 인색하고
꼭 써야 할 것에 손이 큰 사람이 되라.

화내는 사람이 꼭 손해 본다.
급하게 열을 내고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
싸움에서 지며, 좌절에 빠지기 쉽다.

주먹을 불끈 쥐기보다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가 더 강하다.
주먹은 상대방을 상처 주고 자신도 아픔을 겪지만
기도는 모든 사람을 살리기 때문이다.

-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들 -

 

 

 

대전 구도심...대흥동 문화의 거리

프랜차이즈 카페가 대세가 되어버린 요즘, 대흥동에 가면 아기 자기한 인테리어와 컨셉을 가진 개인 카페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둔산동처럼 세련된 분위기는 아니지만, 정형화된 카페에서 찾아볼 수 없는 소소한 재미들이 가득하다. 특히 카페 주인이 긴 시간동안 공들여 수집했을 법한 그림이나 작은 소품들을 구경하는 것은 덤으로 얻어지는 즐거움이다.

모모제인, 쌍리, 느린나무, 햇비, 청청현... 친구들과 가볍게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 좋은 카페들이 많은 곳, 그곳이 대흥동 문화의 거리이다.

아직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예쁜 카페들이 많으니 당분간 커피와 친구를 만나기 위해 그곳에 자주 가게 될 것 같다.

평일 오전, 친구와 대흥동에서 점심 약속을 하면 나는 언제나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을 떤다.

친구를 만나기 전에 잠깐 은행동 알라딘에 들려 책을 구경해야 하기 때문이다.

친구를 만나면, 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스마일 칼국수에서 들깨 가루 담뿍한 칼국수와 달착지근한 유부를 넣은 김밥으로 점심을 먹은 후, 한적한 카페에서 여유롭게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아들은 기말고사를 핑계로 친구와 독서실에 가고, 남편과 함께 시내로 외출을 했다.

며칠 동안 갈등이 있어 서운했던 마음을 뒤로 하고, 다시 일상의 잔잔한 평화의 시간이 찾아 왔다. 

먼저 알라딘에 새로 들어온 책들을 구경했다. 일주일에 몇 번씩 서점 나들이를 하지만 놀라운 것은 늘 새롭게 구비되는 많은 중고책들이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가족끼리, 친구끼리, 연인끼리...정말 끼리끼리 많은 사람들이 알라딘에 모였다.

사라진 책들의 도서관, 장미의 이름, 옥탑방으로 올라간 칸트, 차마 그사랑을, 아주 철학적인 오후 그리고 그림과 함께 읽는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가 내 서재로 왔다.

특히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를 아름다운 명화와 함께 읽어볼 수 있게 구성된 이 책을 보는 순간,,, 내가 이 책을 사기 위해 오늘 알라딘에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만큼 반가웠다.

홍차와 마들렌드 과자 그리고 기억속에 이끌려 찾아간 어린 시절....나에게 아직 만남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는 내가 죽기 전에 꼭 한번 완독하고 싶은 작품 중 하나이다.

언제쯤...푸르스트는 나를 만나줄까 ?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으니 잠잠히 기다릴 뿐...

  

 

 

 

성모초등학교 바로 앞쪽 큰 길가에 위치한 카페 블러쉬....

도로변 2층 주택을 개조해 카페를 만들었다는 이 곳은 1층과 2층으로 공간이 나뉘어 있었다. 은은한 조명과 세련된 그림 그리고 포근한 무릎 담요가 준비되어 있는 1층 세미나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있는 로스팅 기계, 작고 앙증맞은 도자기 인형들, 2층으로 올라는 나무 계단과 벽에 장식된 독특한 강아지 그림들도 눈길을 끌었다. 창가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블라인드 사이로 보이는 마당을 보니 왠지 모를 쓸쓸함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오늘 구입한 책들과 가방 속에 넣어온 강신주의 '감정수업',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1'까지 꺼내 놓고 두서없이 책을 넘겨 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뭔가 계획하는 책읽기보다는 그냥 마음가는대로 느낌이 오는대로 책을 보게 된다.

특히, 이렇게 서점에 다녀온 날은 더욱 그렇다.

특정 책에게 내 마음을 다 주고 싶지 않아서... 고르게 한번씩 넘겨 보는 것으로 내 마음을 대신한다.

 

 

 

 

아메리카노와 브레드...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책

무엇보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유...나의 가족

 

남편과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책과 삶 그리고 오래된 기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 못할 일들을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들이 가끔 있다"는 어느 시인의 말에 우리는 공감했다.

 

"해결하려 서두르기 보다는 한걸음 물러서라"

시간의 여유가 무엇보다 필요한 때... 한적한 카페에 마주 앉아 잠잠하게 책을 읽었다.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기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기쁨의 감정은 "인간이 더욱 작은 완전성에서 더욱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결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욱 충만해진다는 감정이 바로 기쁨이다 

 - 강신주의 감정수업 중에서 -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 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뜨지 않는다.  

-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에서 -

 

 

 

 

 

 

 

책을 읽다 발견한 아름다운 문장들, 특히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문장들을 나는 사랑한다.

강신주의 책은 언제나 화통하고 직설적이라 시원스럽고 그 안에 철학적 깊이까지 있어 좋다. 느긋하게 보낸 일요일 오후... 며칠만에 찾아온 평화는 따뜻하고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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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3-12-09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카페에 가 있고 싶어지네요..^^ 비도 오는데..

착한시경 2013-12-09 14:41   좋아요 0 | URL
네,,,대전도 하루종일 우울하게 비가 내려요~ 이런 날은 따뜻한 카페에 앉아 커피 마시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면 딱 좋을 것 같네요... 즐거운 오후되세요^^

프레이야 2013-12-10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한시경님, 대전에도 어젠 비가 내렸군요. 일요일에 따스한 카페에서 독서와 대화를 즐기시다니 참 여유롭고 행복해 보여요. 시간이 해결해주는 게 있다고 예전엔 몰랐는데 요즘 그 진리에 공감하며 삽니다. 책탑 중 장미의 이름도 보이네요. 다시 읽고싶어지는 책들 중 하나죠. 오늘도 좋은하루~~~

착한시경 2013-12-10 10:01   좋아요 0 | URL
어제 하루종일 비가 내렸어요... 대부분의 일들은 시간이 해결해준다는데,,상황에 따라 긴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 짧은 시간에 해결되기도 하는것 같아요..
그냥 책을 보면서 견디는 중... 장미의 이름은 영화를 더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나요^^ 프레이야님도 행복한 하루되세요~
 

 

 

홍차가게 소정에 다녀와서... 쉼을 얻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의 향수 중에서 -

 

작년 이 맘때 나는 무엇을 했을까 ? 불과 일년 전 일이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일상의 반복 속에서 조금은 지루해하며, 30대의 마지막을 우울하게 보냈다. 피아노를 치는 아들의 진로 문제, 사춘기로 인한 갈등과  타성에 젖어 버린 일이 주는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 거렸다.

아쉬움 속에 한 해를 보냈지만, 다시 선물처럼 1년의 시간은 나에게 왔다.

그리고 네 번의 계절 변화를 겪으며 2013년 12월 앞에 다시 서 있다.

이 한 해를 정리하며, 내가 겪은 일을 글로 쓰기 위해서는 좀 더 나를 성숙시키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꼭 글로 남겨보고 싶다는 마음도 든다.

파도가 아무리 거세게  몰아친다 해도 다시 잠잠해 지는 때가 오는 것처럼,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 역시 시간과 일상에 묻혀 과거형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일요일 오후... 기말고사 공부를 하는 아들을 집에 두고, 오랫만에 남편과 근교로 외출을 했다.

정지용의 시 "향수"의 배경이 되며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는 옥천....

나는 시를 잘 알지 못하지만, 정지용과 백석 그리고 김수영과 기형도의 시를 사랑한다.

소박하고 아담하게 가꾼 정지용 생가는 이미 여러 번 다녀왔기에 간단히 둘러 본 후,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착한 식당으로 선정된 구읍할매묵집을 향했다.

 

 

 

겨울에는 메밀묵이 제 맛이라는 말에 메밀묵밥과 도토리묵밥을 시켰다.

도토리는 따끈한 육수를 부어 먹어야 하고, 메밀묵은 신김치와 듬성듬성 부숴 놓은 김, 고소한 참기름을 넣고 살살 비벼 먹는게 더 맛난다고 한다. 함께 따라 오는 반찬 역시 깔끔하고 정갈한 맛이었다.

특히 총각 무우와 갓을 넣어 시원하게 담은 동치미와 시골 간장에 푹 삭힌 고추 절임이 개운하고 맛깔스러웠다. 그럴 듯한 외식이 어느 순간부터 싫어졌다. 슴슴하게 무쳐 낸 나물 반찬이나 소박한 찌개 한 그릇이면 족하다.

무엇을 먹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먹느냐가 더 중요한데, 좋아하는 음식을 가족과 나눌 수 있으니 즐겁고 행복한 시간임에 틀림없다.

 

 

점심을 먹고,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홍차가게 소정에 다녀왔다.

옥천군 군북면 소정리에 위치한 홍차가게 소정... 입구의 빨간 간판이 매우 인상적이다.

멋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 부부가 추천하는 홍차 맛에 우리 부부는 완전 반해 버렸다. 도시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 길가에 자리 잡은 '소정'은 대청호 끝자락과 나지막한 산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차 한잔을 마셔볼 수 있는 아담한 카페이다.

20여년 간 다양한 차를 공부하면서 홍차의 매력에 빠졌다는 주인 부부는 차와 문화를 즐기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이 곳을 열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 추천해 주신 홍차와 아이리쉬 위스키 크림 바닐라라는 긴 이름의 홍차를 마셨다. 그리고 차와 함께 나오는 갓 구운 스콘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따끈하게 덥힌 찻잔에 향긋한 홍차와 스콘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책 한권...

무엇보다 이런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족이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커다란 테라스로 옅은 햇빛은 비추고, 느긋하게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즐겼다. 색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오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 해가 가기 전, 눈이 오는 어느 날... 꼭 한번 다시 오자는 기약없는 약속을 했다.

벚꽃이 만발한 봄, 녹음이 짙은 여름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산한 가을에도 어울리는 홍차가 준비된 곳이 홍차가게 소정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잠시 시간도 멈춰 버린 듯한 쉼과 여유가 있어 좋다.

지친 몸과 마음도 홍차와 함께 쉼을 얻은 듯...평화롭고 고요하다.

우리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얻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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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 동안 내린 눈이 아파트 뒤...계족산을 하얗게 덮었다. 오후의 옅은 햇살은 도로 위의 눈을 녹게 했지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섭기만 하다.

늦가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눈이 반갑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가을을 보내야 하는 아쉬움과 속절없이 보낸 시간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다짐했던 수많은 계획과 각오들....

특히 100권의 책을 읽겠다는 무모한 계획은 정말로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마흔이라는 생의 전환점에서 100권의 책을 한꺼번에 구입하는 대책없는(?) 일을 저질렀고, 그 무모함 속에는 책 속에서 길을 찾아 보리라... 그래서 후회없는 40대를 보내리라는 간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올해 가장 많은 책을 구입했고, 가장 적게 읽었다.

 

한 달 남짓한 시간동안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을까 ?

밀린 숙제 앞에서 시계를 보며 쩔쩔매는 아이처럼 마음이 조급해 진다.

수전 손택의 일기는 25살에 머물러 있고, 읽고 싶은 마음에 미리 다 구입해 버린 파스칼 키냐르의 책은 책상에 쌓여있다. 이런 중에 나는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의 책을 뒤적이던 중 갑자기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 잡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 손에 있는 책은 시집 두 권이다.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마음은 생기 넘치는 은방울꽃들로 가득 차 있다.

저녁이 나의 길 위해서

푸른 촛불처럼 별에 불을 붙였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빛인지 어둠인지 ?

무성한 숲 속에서 노래하는 것이 바람인지 수탉인지 ?

어쩌면 들판 위에 겨울 대신

백조들이 풀밭에 내려앉는 것이리라.

 

아름답다 너, 오 흰 설원이여 !

가벼운 추위가 내 피를 덥힌다 !

내 몸으로 꼭 끌어안고 싶다.

자작나무의 벌거벗은 가슴을.

 

오, 숲의 울창한 아련함이여 !

오, 눈 덮인 밭의 활기참이여 !

못 견디게 두 손을 모으고 싶다.

버드나무의 허벅지 위에서.

 

-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의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

 

랭보와 견주어지는 천재 시인 예세닌... 미국 여자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과의 사랑, 결혼 그리고 이어지는 이혼으로 결국 자살을 선택하며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안녕, 나의 친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다정한 친구, 그대는 내 가슴 속에 살고 있네.

우리의 예정된 이별은

이 다음의 만남을 약속해 주는 거지.

 

안녕, 나의 친구, 악수도 하지 말고,

작별의 말도 하지 말자.

슬퍼할 것도, 눈썹을 찌푸릴 것도 없어

삶에서 죽음은 새로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삶 또한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지.

 

-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의  이별의 시 -

 

잉크가 없어 칼로 자신의 팔목을 그어 피로 쓴 마지막 시....

두서없이 읽다가 발견한 시 한편에 눈길이 갔다. 사실 시인보다는 시인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던 연상의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의 이야기가 먼저 눈에 띄였다.

자동차 뒷 바퀴에 스카프가 걸리면서 목 골절로 죽음을 당한 비운의 무용수 던컨과 불같은 사랑에빠졌던 젊은 시인 예세닌...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시들 속에서 자연에 대한 경외, 사물에 대한 깊은애정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오래 전... 첫 눈을 간절히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눈이 오면 만나자는 유치한 약속을 하기도 했고... 우연히 첫 눈을 함께 보게 되는 날이면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기도 했다.

늙는다는 건... 경험해야 하는 것보다 기억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는 날... 나는 혼자 커피를 마셨고, 하릴없이 많은 책들을 뒤적였다.

 

 

이 해가 가기 전... 수전손택의 책을 마무리 해야 하고, 은밀한 생을 통해서 키냐르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지금은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를 읽다가 잠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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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1-29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상당히 재미있어요.

착한시경 2013-11-29 19:46   좋아요 0 | URL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있어요^^ 즐거운 금요일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