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해주신대로 앞으로 80세까지 9918권을 더 읽게 된다면 그때 저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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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지성사 시인 시리즈 가장 좋아합니다. 백은선 시인의 가능세계를 읽을 때면 옥상에서 바람 맞으며 긴긴 대화를 나누는 연인이 생각나고, 심보선 시인의 오늘은 잘 모르겠어, 를 읽으면 사회학자이자 시인인 심보선 시인이 바라보는 날카로움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행복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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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우는 것 같다 시요일
신용목.안희연 지음 / 미디어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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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울지 않는 나에게

_당신은 우는 것 같다를 읽고

    

  내겐 가족사진이 딱 한 장 남아 있다. 오래 살던 집에서 이사하기 전, 결국 사진첩을 챙기지 않은 까닭에 어린 시절 사진조차 남아있지 않다. 어느 날, 책 속에서 이 가족사진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 살이나 두 살 쯤 되어 보이는 나는 아빠의 오른팔에 자그맣게 안겨 있었다. 언니들은 앞에 졸졸 서있고, 엄마는 볼이 발그레한 채로 아빠의 왼쪽에서 웃음을 띠고 있다. 저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득한 시간들. 사진은 그렇게 시간과 기억을 기묘하게 바꾸어 놓는다.

   

 

   모든 일들은 지난 일이 된다. 시간은 세상의 전부였던 일들을 기억의 일부로 돌려놓는 재주가 있다. 85

 

 

  책 당신은 우는 것 같다를 읽었다. 부제가 그날의 아버지에게이었기에 내 안에 딱딱하게 굳어있는 아빠라는 존재에 대해 털어내고 싶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신용목 시인과 안희연 시인은 아버지와 관련된 시 소개를 하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 책의 절반을 각각 채우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부터 아빠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재하는 있는 기분으로 살았다. 늘 그 자리에서 있는 나무가 내겐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밑동이 잘려져 나간 나무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환영을 만들 듯이 내가 원하는 아빠의 형상을 그려 넣고, 좋은 부녀 사이처럼 보이는 모든 이들을 질투했다.(심지어 드라마 속 애정으로 인해 격하게 싸우는 부녀 사이들까지도.) 그 마음은 나를 무수히 갉아먹었고, 상처를 냈고, 딱딱한 딱지를 만들었다.

  신용목 시인의 글들은 지독히 아름다워서, 처절한 순간들을 들입다 털어놓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거기엔 아련함이 묻어났다. 아버지가 바라던 것과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이 달랐기에 크게 틀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서로의 마음은 질투 날 정도로 진득하고 끈끈했다. 결국 모든 가족관계는 너무 가까워서 메워지지 않는, 살짝 깨진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었다. 완전히 부러지진 않았지만 갈라진 틈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아플 수밖에 없는.

    

 

   아버지 속에 나의 미래도 함께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27

    

 

  대학 다닐 때, 언니들과 나는 서둘러 집밖을 나가려고 했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 아빠의 식사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늦잠을 자다가 시간을 놓쳐 아빠와 둘이서 밥을 먹게 되는 날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은 밥알을 삼킬 때마다 목구멍엔 무거운 공기도 함께 넘어왔다. 시간이 쏜살 같이 흘러간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이 영원 같은 시간을 서슴없이 넘겨주고 싶었다. 심장처럼 쿵쿵대던 시계초침과 베란다 창을 예의없이 두드리는 바람과 혀를 낼름거리는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함께.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우리 사이의 침묵을 새삼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79

 

 

  아빠의 기분이 엉망인 날에는 아빠가 정한 시간과 장소에 무조건 집합이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언니들과 나는 공포에 벌벌 떨며 아빠의 고함소리를 감당해야 했다. 아빠의 집요한 물음은 무기 없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아빠를 괴롭혔던 걸까. 그때는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던 일들이 섬뜩하게도 내 자신에게서 아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면,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아빠의 어린시절을 상상해보게 된다. 작고. 소심하고 무구했던 작은 꼬마 아이 시절의 아빠를.

    

 

   정작은, 아버지도 당신의 아버지를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미치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아버지를 반복해 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부모가 되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은 내가 여전히 아버지를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지긋지긋하고 미우며 원망스럽다. 그렇게 그립다. 97

    

 

  안희연 시인은 아홉 살 때 눈 오던 날 산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렸다. 남은 가족들은 금기어처럼 죽음에 대한 말을 하지 않음으로서 견디고 애도하며 아버지란 존재를 지켜냈다. 그러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고름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마음들. 말하고 나면 사라질까봐 무서운, 말하지 않으면 잊힐까봐 두려운 마음들이 절절하게 담겨져 있었다.

    

 

   아빠의 스물일곱, 아빠의 회색 양복과 금테 안경, 아빠의 졸업식과 첫 출근, 생각할수록 사라져가는, 사라져 없는 그 시간이 블루베리 알갱이처럼 와르르 눈앞으로 쏟아져 온통 얼룩이 되는 날이 있다. 124

 

  제사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자정이 가까워져오면 조상님들께 예의를 다 하기 위해 완벽한 암전을 시행했다. 조용히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언니들과 나는 어둠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더듬거리다 말문이 터지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빠는 현관문을 살짝 열어놓고 주문을 외웠다. 제사 의식이 끝나면 가족 모두 큰 양푼이에 나물과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가득 비벼 나눠먹곤 했다. 가족, 친척들이 다 같이 둘러 앉아 먹는 자정의 비빔밥. 어쩐지 무서웠던 향 냄새, 불이 꺼지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연기, 달큰하고 쿰쿰한 정종이 찰랑이며 술잔에 담겨있던 모습. 그때 문득 아빠가 무슨 말을 던졌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맞받아쳤다.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말 하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묵묵했다. 마치 내가 아빠의 무언가를 앗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 많은 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아빠는 다 듣고 있었을까? 175

    

 

  마지막 장을 덮고 나자 엄마가 생각났다. 어린 시절, 제대로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채로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어버린 아버지 사진을 아직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엄마. 처음엔 작은 사진에서 나중에는 사이즈를 확대했고, 지금은 그 사진을 액자에 넣어 서랍 속에 잘 보관해둔 이십대에 전사하신 할아버지의 사진. 엄마는 그때의 할아버지의 나이보다 세 배 이상을 더 살아 그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엄마가 그 사진을 보며 어떤 감정을 가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너무 일찍 잃어버린 아빠라는 존재를 자식들에겐 오래 지니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십 대였던 무렵, 엄마가 아빠와 헤어지려고 결심한 순간, 어쩌면 우리에게 아버지란 존재를 끝까지 남겨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아빠와 헤어진다고 해서 내게 아빠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개의 평행선처럼, 따로 또 같이. 146

 

 

  질기게 살아남아 때로 부재하는 듯한 아빠가 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하는 것과 좋은 기억을 가졌지만 너무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더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아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무엇을 택할까. 누구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쪽에 손을 들게 마련이겠지. 가족은 선택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것이기에 때로 무력하고, 때로 안간힘을 쓰기도 하는 것 같다. 이해하기 위해 혹은 벗어나기 위해.

    

 

   가족은 뜨겁고도 차갑고, 성기면서도 질긴 이름. 199

 

   지나고 나면 모두 환한 풍경이 되어 있다는 거. 삶의 모든 불순물들이 고요히 가라앉고 나면 한없이 맑은 물만 남는다는 거. 그것이 우리 생의 한여름이자 찬란이라는 거.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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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의 그림 한 장 한 장에 무한한 이야기들을 실어 날으는 이야기들에, 마치 그림 속을 걷는 것처럼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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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으로부터 -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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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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