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문학동네 시인선 37
김충규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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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신 연둣빛 시집을 만났다. 시인 김충규의 유고시집, '라일락과 고래와 내 사람'.

 

 시집과 제목과 같은 시로 처음 그의 언어를 만났다. 전혀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그 시인의 시집을 펼쳐 보았을 때, 정말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허공 중에 끌어올린, 그의 세계 속에 푸욱 빠져 버렸다. 이상하게도 툭, 하고 눈물이 났다. 내가 열망하던 세계가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거기서 헤어나오고 싶지가 않았다. 그의 언어가, 그가 만들어 놓은 세계가 좋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일관성 있게, 생과 사를 오가면서 그는 허공 중에 바람을 그리고, 사람을 그리고, 고래와 구름을, 숲과 물새를 그려내고 있었다.

 

 

허공에게 바치는 시를 쓰고 싶은 밤이다. 비어 있느 듯하나 가득한 허공을 위하여.

허공의 공허와 허공의 아우성과 허공의 피흘림과 허공의 광기와 허공의 침묵을 위하여......

그리하여 언젠가 내가 들어가 쉴 최소한의 공간이나마 허락받기 위하여......

소멸에 대해 생각해보는 밤이다. 소멸 이후에 대해. 그 이후의 이후에 대해......

구름이란 것, 허공이 내지른 한숨...... 그 한숨에 내 한숨을 보태는 밤이다.

 

                                                              2012.1.16. 밤 10시 25분

                                                                                  김충규

               

 내 속에 잠재해 있던 끓어오르는 열망이 그의 언어로 다시 되살아났다. 내 속에 갇혀 있던 언어가, 타인의 언어 속에서 새파랗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바로소 나는 내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으로 부풀어 올랐다.

 

 시인이 발견한 가치와 의미. 그가 그것을 발견하기까지 무수한 어둠을 통과했을 것이고, 막막한 터널 속에서 길을 잃었을 것이고, 치열한 자기 내면과의 싸움, 처절한 고독과 마주했을 것이다. 슬픔, 절망, 외로움, 무의미와 고독, 허무 속에서 자주 괴로워했을 것이다.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그 무언가 때문에 끝나지 않은 밤속을 헤맸을 것이고, 허공 중에 할퀴어진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며 자신의 울음소리로 외로움을 달랬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낸 그의 시가 나를 위로해주었다. 내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 주었다.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었고, 허공 중에 쏟아낸 음악이 나를 웃게 했다.

 

 

울지 마 곧 밤이 와 밤이 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여

저 허공에 성곽을 지으러 올라가야지 허공만이 유일한 안식처

둥둥 허공으로 떠오르는 영혼들을 봐 지상에서 고당했던 영혼일수록 더 가볍게 둥둥

나비같이 투명한 영혼은 제트기같이 빠르게 허공으로 올라가

.

.

빛이 수줍게 내려와 시신들을 수습하는 지극히 한가롭고 평화로운 이 세상에

만약 허공이 없었다면 어찌 생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아, 하공이 없다는 상상만 해도 질식해버릴 것 같아

텅 비어 있어도 허공은 늘 만찬이야 영혼이 맑아 날개를 얻은 생명들이

.

.

허공에 오르기 위하여 행복한 사후(死後)를 위하여

너도 뛰지 않을래? 우리 같이 뛰자

                                                                                      -p.16,17 [허공의 만찬] 중에서

 

 

 그가 만들어 놓은 따뜻한 안식처인 허공에서 나는 따뜻한 숨결을 느낀다. 생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힘을 믿게 되었다. 만찬같은 허공 속에 그려진 그의 언어에 내 영혼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그래, 함께 함께 뛰고 싶다. 그것이 생이든 죽음이든, 그 중간이든 상관없이!

 

 

시간이 정지해 있을 수도 있는 숲으로 가요

어제도 내일도 없는 숲이 우리를 매혹시킬까요

다만 낙오자가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만족합니다

.

.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유일한 길이거든요

말할 수 없이 지겨우니까요 이곳, 우우......

 

                                                   _p.18,19 [말할 수 없이 지겨우니까요]

 

 

 

내일이 오지 말기를, 중얼거리는 밤이다 살아온 날의 흔적을 싹 긁어내었으면 하는 밤이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고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 이 순간만 약간 허락되었으면 하는 밤이다

 

  -p.59, [내일이 오지 말기를, 중얼거리는 밤이다]

 

                    

 그가 만들어 놓은 숲엔 낙오자가 없다. 어제도, 오늘도 없다. 그리고 내일도. 그저 존재하는 곳. 그곳엔 모든 것들이 우리를 매혹시킬 것이다. 가끔 시간의 흐름이 우리를 어떤 곳으로 몰아넣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시간이 멈추는 순간 아니 그렇게 느끼는 순간 우리는 어떤 몰입을 경험하는 것 같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란 그런 것. 시간 따위는 없는, 어떤 구획도 없는. 너와 내가 그저 만나는 시간. 그 시간 속에는 지루함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이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고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 이 순간만 약간 허락되었으면 하는 밤, 이라고.

 

 

 

우리 모두는 자궁 속에서 죽은 태아같이 웅크리고만 있습니다

 

숨결이 간결해지려면 맑은 어둠을 더 많이 들이켜야 합니다

 

                                                          -p.33 ,[우리는 누구인가요?]

 

 

왜 내 곁에 있나요? 정, 말, 당, 신, 누, 구, 예, 요?

 

                                                        -p.57, [당신, 참 이상한 사람]

 

 

나는 누굴까. 당신은 누구지?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일까?

그저 이 밤, 허공 중에 떠도는 당신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다.

내 곁에 있는 당신은, 왜 내 곁에 머물까.

나는 도무지 내 자신이 멀쩡한 것 같지가 않은데....

그런 당신은 나와 같은데....

 

 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내가 되는, 그렇게 잘 버무려진 우리가 되려면 맑은 어둠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빛을 숨겨둔 맑은 어둠. 어둠을 그렇게 들이키고 나면 좀더 깨끗하게 빛이 나겠지.

 

 

 

한번 얻은 육체는 바람도 사람도 어쩌지를 못하는 법

하여 서럽기도 하고 생이 두렵기도 하고

유리창에 미끄러지기도 하는 것

.

.

.

그저 세상이라는 유리벽에 반복적으로 미끄러지다

일생을 훌쩍 허비한 것에 불과할 테지만

앞을 가로막은 유리창을 원망할 필요는 없는 것

                                                       -p.24, [유리창과 바람과 사람]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 있다 지금이 그런 때

.

.

질서 없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영토이므로 먹구름은

몽롱한 동경이다 불안하므로 더 애틋한 불륜이다

.

.

먹구름이 비를 내리지 않아도 나는 이미 흥건히 젖어 있다

 

                                                                 _p.60, [먹구름을 위한]

 

 어떤 밤이었다. 모두가 사라진 것 같은 그런 밤이었다. 어둠이 몰려왔다. 나는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불을 꺼둔 채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대 옆 창문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꺼져갔다. 내 속에 뿌리박힌 어둠이 빛을 몰아내고 있었다. 땅 속으로 꺼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어떤 것도 나를 구원할 수 없고, 깊은 수렁 속으로 빠질 것만 같았다. 허공 중에 가볍게 날리는 먼지는 내 육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는 듯 풀썩 주저 않고 말았다. 그 밤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떤 것도 내 슬픔을 견뎌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침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고, 슬픔이 완전히 나를 지배했다. 그것은 생을 간단히 포기할 수도 있는 무섭고, 거대한 물결처럼 내게 다가왔다.

 

한번 얻은 육체는 바람도 사람도 어쩌지를 못하는 법/ 하여 서럽기도 하고 생이 두렵기도 하고/ 유리창에 미끄러지기도 하는 것/ 이 구절에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아마 그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먹구름처럼 이미 젖어 언제든 무너져 내릴 수 있지만 질서없이 흐트려져도 좋을 그런 밤이다. 그런 그런 밤. 누군가를 느끼는 밤.

 

 

 

느닷없는, 꽃의 붉은 울음

창밖에 수북수북

언어로 무언가를 완성하느라 밤새 끙끙거렸다

가녀린 펜으로

붉은 울음을 듣고도 앉아 있다면 참 아득해지는 일이어서

슬그머니 일어나 창을 열었다

지붕에서 어둠의 유약을 제 몸에 바르던 고양이가 멈칫

내 쪽을 돌아본다 무심히...... 물끄러미......

허공의 유전에서 솟구치는 흐릿한 빛의 원유(原油)

사방으로 튀는 소리

끝없이...... 꽃 없이......

참으로 오랫동안

고갈을 모르고 언어를 주물렀지

아니, 정작 내가 원했던 건

꽃의 붉은 울음을 술잔에 모아

고양이와 나란히 지붕에 앉아 나눠 마시고 싶었지

서로 붉게 붉게 취하고 싶었지

내 속은 원유(原油)를 다 생산해버린 텅 빈 유전 같아, 후훗-

이봐, 내 등에도 어둠의 유약을 좀 발라주겠니?

 

                                                         -p.86, [참으로 오랫동안] 전문

 

 제일 마음에 들었던 시다. 이 시를 읽으니 왠지 시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엿보는 기분이었다. 어느 새벽, 붉은 눈으로 창을 열어 바라본 세상. 어둠 속을 가로지르는 고양이 한 마리. 더 맑아지고 싶었던 영혼에 빛으로 가득찬 어둠의 유약을 바르고 싶었던 시인 김충규. 그는 빛으로 만든 어둠이었고, 생과 사를 오가는 허공을 떠도는 영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허공 중에 내지른 한숨, 그 한숨으로 만들어낸 구름, 풍성한 여인과 같은 안개, 바다 위를 날으는 물새이자 어둠 속을 유유히 걸어가는 고양이었다. 살아있는 동안 써내려간 그의 시는 생과 사가 다르지 않은 그 무엇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뿌려놓은 시들에 둘러싸여 그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생은,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빛이 나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라일락 향이 번지면, 바람이 불면 나는 또 그의 시집을 펼쳐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뚜벅뚜벅 세상 속으로 걸어갈 것이다. 벚꽃비가 내리던 어느 날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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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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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트 에코, 라는 작가는 이름만 들어봤지 작품으로 만나본 적이 없다. 여기저기서 에코의 팬을 만난 적은 있다. 잠깐씩 좋은 문장들을 추려 놓은 것들을 봤을 때,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글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움베르토 에코가 내게로 왔다. 역사적 배경 지식이 전혀 없는 나에게 도전장을 건네듯이 내게 온 것이다.
 
처음에 몇 장을 읽고는 몇 번인가를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주인공인 시모네 시모니니가 등장해서는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이래서 싫고 하는데, 진짜 프랑스인이 이런가 싶고(내가 워낙 귀가 얇은 편이다. ) 유대인은 왜이렇게 싫어하는가 싶고, 모든 게 궁금증 투성이었다. 그의 증오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흘러나오는 걸까, 하는 점이 궁금했다. 아무리 가정사를 따지고 들더라도 그 궁금증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현 상황을 재치있게 잘 파악하고,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며 자신에게 유리하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가볍게 여기는 파렴치한 인간으로 나온다. 비리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그럴 듯하게 보여야 하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궁지로 모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음식이다. 음식만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참을 수 있다는 식이다. 과연 그가 먹는 것을 묘사하고, 늘어 놓을 때면 나도 모르게 군침을 삼키고 있다. 멋진 레스토랑에 앉아 그와 함께 고기를 썰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아무리 고약한 인간이라도 사랑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 있어서는 바라보는 이도 나쁘게만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시모네 시모니니는 1830년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그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과거를 하나하나 떠올리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하루하루 지나감에 따라 할아버지의 유산을 가로챘다고 의심되는 공증인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망설이지 않고 실행해 온 추악한 삶이 하나씩 재구성된다. 가리발디의 의용군인 척 시칠리아 원정에 가담하여 공작을 하고, 프랑스로 옮겨 가서는 드레퓌스 사건의 문서를 위조하고, 탁실이란 희대의 사기꾼을 뒤에서 조종하는 등 정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입장을 바꾸며 거짓과 음모들을 날조해 내온 시모니니.그를 보면 날조와 위조의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게 아무리 좋지 못한 재주라하더라도 그의 재주에 감탄을 하게 된다.
 
 
19세기 유럽 역사의 굵은 획을 그은 여러 사건들,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에 시모네 시모니니가 항상 가담하고 있었다. 직, 간접적으로. 단지 이 사람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 빼고는 모든 게 척척 놀랍도록 들어맞는다. 그것은 꼭 이 사람이 아니라도, 어느 시대에나 조작하는 인물이, 중간 인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을 캐내려는 사람 위에, 진실을 조작하는 사람, 진실을 조작하도록 시키는 사람,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보이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득시글거리면 뭐가 뭔지 사람은 알 수 없게 돼버리고, 결국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도대체 진실이라는 게 있긴 있는 건지. 있다면 왜 결국 밝혀지지 않는 것인지. 이미 조작되어, 진실로 믿고 있는 사건들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리 모든 게 혼란스럽기만 하다.
 
 
어쨌든 내겐 꽤나 어려운 소설이었지만 큰 맥락을 잡는 데는 성공한 듯 싶다. 에코가 역사적 사실을 이렇게 공을 들여 조합을 하고 배치를 하며 사건들을 짚어나가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분명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어서 일거다. 그건 바로 역사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내면을 꿰뚫어 보는 힘을 기르라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누군가는 뭔가를 위조하거나 조작하기 위해 우리를 다른 곳으로 관심 쏠리게 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모든 정치적 조작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큰 사건을 다른 큰 사건으로 막는 형식. 눈에 보이는 진실 안에 팔딱거리고 있는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를 한 번쯤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그의 책을 통해. 어렵지만 도전의식이 불끈 솟는 그런 소설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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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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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에 책을 받았을 때, 표지에 있는 덥수룩한 수염에 강한 눈빛의 남자가 뭔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봤을 때 조금 섬뜩했고, 두꺼운 두께에 놀랐다. 하지만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흡인력 있는 소설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어지는 사건들은 마치 내 숨통을 조여오는 것처럼 긴박하고 처절하다. 주인공을 따라 허덕이며 마지막까지 왔을 때는, 정말 이젠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입력이 대단한 소설이었다.  

 

 

토비라는 한물 간 연극배우가 등장한다. 그에겐 사랑하는 아내 제니가 있다. 아니 지금은 옆에 없지만 아직 이혼 수속이 끝나지 않은 제니가 다른 곳에 살고 있다. 그들에겐 피터라는 아이가 있었지만 세상의 빛을 본지 4년 6개월 만에 하늘 나라로 가버렸다. 그때부터 그들은 서로를 탓하며 결국엔 함께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가끔은 모든 일이 그렇게 꼬여 풀 수 없는 매듭이 되어 버리고 만다. 제니에겐 이미 로저라는 남자가 있고, 그들은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토비는 그저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 하며 퇴물이 된 자신의 배우 인생을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사건의 발생은 토비가 아내가 살고 있는 '브라이턴'에 순회 공연을 가면서 시작된다. 그저 아내가 사는 곳이라 반가웠을 뿐인데, 아내가 의논할 일이 있어 그를 불러내고, 아내의 주위를 맴도는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내도 돕고, 아내도 보고, 아내의 마음도 돌리고! 일석삼조라 생각한 그는 적극 아내를 돕기로 한다. 하지만 그 사내와 로저와 얽힌 사연들이 토니의 삶까지 파고 들어와 그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공연에 빠지게 되고,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빠져 나올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들게 되는 토비. 끊임없이 나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선택'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이별을 선택할 것인가. 죽음인가, 삶인가 하는 거창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물건들까지도 무수히 많은 선택들을 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들이 쌓여가면서 우리들의 일부를 만들어 나간다. 그 선택들이 자신의 가치이고, 자신의 존재로 증명되는 것이다. 토비는 아내를 사랑한 순간부터 자신이 궁지에 몰린 막바지까지 단 한 순간도 하나의 가치를 놓지 않았다. 바로 '사랑'이라는 자신이 가진 가치였다. 그래서 모든 선택은 그 사랑이 중심이 되어 돌아갔다.

 

 

제목이 '끝까지 연기하라'라는 점도 있었고, 주인공이 토비가 연극배우라는 점에서 나는 몇 장 읽지 않았을 때, 이 책의 내용이 어떠한 순간에도 연극배우임을 잊지 않는, 연기에 대한 애착이 강한 한 남자가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연극을 하여 성공을 거두는 이야기가 아닐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몇 장 지나지 않아, 그는 이상한 예감에 휩싸여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 약속 때문에 공연에 막무가내로 빠진다. 연극 공연에 대한 어떤 사명감은 없어보여서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제목이 말하는 '연기'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것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기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기를 의미했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끝까지 연기하는 것. 비단 토비의 이야기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오가며, 비리와 배반이 오가면서도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다른 캐릭터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삶의 무대에서 자신이 가진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때론 긴박하게, 때론 전전긍긍하며 우리를 따라오라고 손짓했던 이 소설의 메시지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그 마지막은 어떤 긍정의 흔적을 남기고 끝이 나서 기분좋은 여운으로 기억될 것 같다. 나 또한 내게 주어진 삶의 무대에서 끝까지 연기하는 존재가 되리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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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가게 - 제13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53
이나영 지음, 윤정주 그림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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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학창시절 딱히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우러러 볼 정도로, 도무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공부를 잘 하는 아이는 어떤 시간 속에서는 나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부모 대부분이 바라듯 내 친한 친구들은 꽤나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다. 생각해보면 도무지 어떤 부분에서도 털끝만큼 따라갈 수 없는 아이와 교제를 한다는 건 나의 열등감을 더 키우는 일인지도 몰랐다. 공부 세계에서 늘 우등이었던 내 친구는 공부 외에 우정과 친구에 대해서는 늘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고, 사소한 감정 다툼에는 아예 감정을 배제했다. 휴일이나 주말에도 시간이 나면 교과서나 문제집을 꺼내 공부를 했고,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게 연필로 밑줄을 그었다가 마치 자신이 천재라도 되는 듯 그 연필자국들을 지우개로 깨끗이 지웠다.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이 친구는 내가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먼저 어떤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면 심장을 쿵쿵대며 더 열을 내어 공부를 했다. 시험기간에 밥을 먹을 땐 늘 시간을 재어 가며 먹은 뒤, 자리를 떠야했고, 수면시간을 줄이기 위해 링거 투혼은 일상이었다. 나는 그들의 세계에 속하고 싶으면서도 늘 숨막히는 그들 세계를 막연히 바라보며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며 깜깜한 운동장에 홀로 앉아 수없이 박힌 별들을 바라보는 조금은 현실 밖에 머물렀던 학생이었다.

 

 인생에 있어서 공부라는 것이, 점수나 등수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아마 어른들에게 물어본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네 미래를 결정하는 거라고 빙그레 웃으며 말하겠지. 그러는 부모들은 얼마나 공부를 잘 했을까. 그저 아이를 자신의 방패수단이나 대리만족- 자신이 이루지 못한 혹은 가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 은 아니었을까.

 

 여기 등수에 목을 매는 윤아라는 아이가 있다. 학교 마치면 학원, 학원 마치면 과외, 과외 마치면 예습과 복습, 시험공부까지. 그녀에게 휴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집에서 밥 먹는 시간에는 엄마가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책을 읽어 주거나 영어 청취 교재를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엄마는 더욱 열을 내어 윤아의 성적에 목을 맸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돌아왔다. (생계를 자신이 책임져야 했으므로) 그런 엄마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를 그저 잘 하는 일이 아닌, 1등을 하는 일이었다. 또한 공부 잘 하는 아이를 사귀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윤아에겐 그 모든 게 내키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어느 날, 윤아는 학원 가는 길 시간에 쫓겨가며 달려가는데 학원이 보이지 않았고, 곧 지각할 것만 같았다. 엄마의 잔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아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시간 가게'를 만난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시간이 부족한 분께 시간을 드립니다.

-시간가게

p.10

 

당장 시간이 필요했던 -학원을 지각하지 않기 위한 - 윤아는 시간을 사기로 했다. 시간은 하루에 한 번 10분을 살 수 있었다.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의 버튼을 누르고,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시간을 떠올리기만 하면 오묘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시간이 멈추었다. - 지나가는 자동차, 움직이는 사람들과 시계 모든 것이.

 

 

나의 가장 행복한 시간과 당장 내게 주어진 현재의 10분을 맞바꾸는 일. 내가 보기엔 너무도 손해보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윤아에겐 지나간 과거보다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 어쩌면 엄마가 정해놓은  - 1등을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보였기에 그 거래는 성사될 수 있었다.

 

 윤아는 시간 가게를 만난 이후, 자신에게만 주어진 10분이 있었기에 멈춘 시간동은 컨닝을 할 수 있었고, 책을 펼쳐 시험을 볼 수 있었고, 학원에 늦지 않을 수 있었다. 대신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듯 지금까지 윤아를 만들어 온 행복한 기억들이 소리없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좋아했던 할머니와의 추억,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 가장 좋아하는 친구와의 추억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나오는 한스 또한 윤아와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알고, 왜 알아야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바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성적이었고,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도 모른 채 공부를 했다. 휴식시간들이 조금씩 줄어져 가고,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 산책 등의 취미생활은 어느새 그와 멀어져 갔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은 이미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굳어져 갔고, 공부만이 유일하게 그의 벗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마 그는 아는 것이 두 배나 많은 2등보다는 차라리 절반을 아는 1등이 되고 싶었으리라.

수레바퀴 아래서, p.79,80

 

 

  시간을 사고 난 뒤의 윤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했고,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던 친구와의 약속도 잊게 되고, 할머니의 애정어린 표현조차 불쾌하게 여겨졌다. 신학교에 가게 된 한스는 자주 두통이 찾아왔고, 조금이라도 산책을 할라치면 다리가 아파왔다. 시간낭비란 생각에 친구 사귀는 것도 거리를 두게 되었고, 어떻게든 공부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잃어 버린다는 것은 곧 자신을 잃는 것과 같다. 윤아와 한스는 결국 '공부'라는 틀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 없는 공부는 결국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건강한 삶은 모두 나름의 내용과 목표를 갖고 있지만 한스 기벤라트는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p.162 

 

 자신을 되찾기 위해, 행복한 기억을 돌려받기 위해 다시 시간가게로 향하는 윤아. 하일너라는 친구를 통해 공부보다 더 소중한 것들, 더 아름다운 것들을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한스. 윤아는 행복한 기억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자신의 시간 10분을 내어주는 거래를 하고 다시 돌아온다. 그에 반해 한스는 점차 공부와는 멀어지고 시와 몽상과 하일너에게 빠져든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문득 돌아보면 사라지고 없는 10분 동안 윤아의 기억 속엔 끊임없이 어떤 기억들이 쳐들어온다. 그것은 윤아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행복한 기억이었다. 우리가 선망하는 것들이 내 속으로 들어올 때, 내가 온전히 누리지 못한 것들이 결과적으로만 내게 침투했을 때 그것이 과연 진짜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혼란, 방황, 어지러움, 두통. 이것은 마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주어진 고문 같다. 약을 달고 사는 윤아와 두통에 시달리는 한스. 누가 그들을 책임질 수 있을까?

 


 한스는 모두에게 버림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기분으로 작은 정원 양지바른 곳에 앉아 있거나 숲속에 누워 꿈을 꾸거나 괴로운 생각에 잠겼다. 독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곧 머리와 눈이 아파왔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펴도 바로 수도원 시절과 그곳에서 느꼈던 두려움의 유령이 되살아났고, 그것은 숨막히는 불안한 꿈의 한구석으로 한스를 몰고 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그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수레바퀴 아래서, p.147

 

윤아의 마지막은 희망적이었으나 -앞으로의 삶이 어찌될 수 없고, 어쩌면 어린이들이 봐야하는 책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 한스의 마지막은 비극이었다.

 

 

같은 시각, 아버지가 그토록 혼을 내려고 별렸던 한스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시커먼 강물을 따라 조용히 골짜기 아래로 천천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구역질도 수치심도 괴로움도 모두 그를 떠났다.

 -수레바퀴 아래서, p.213

 

  요즘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두세살의 아이들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채 느끼기도 전에 영어조기교육에 열을 올린다. 몇 개월부터 영어를 노출시키느냐가 그 아이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듯 전전긍긍하는 엄마들의 모습을 본다.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성과만을 원하는 부모들을 위해 매일 같은 문장을 하루종일 강제 주시, 강제 투입 시키고 있다. 그것만을 반복했기에 아이들의 입에서 그 문장이 나올 때면 엄마들은 만족한다. 내 아이가 누구보다 잘 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또한 누구보다도 잘 하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주는 스티커에 목을 매고,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칠판 뒤로 가서 자신에게 스티커를 몰래 붙여 놓는다. 도대체 여섯 살짜리 아이가 무엇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은 뒤틀린 사회가, 엉망인 교육이, 일그러진 욕망이 만들어낸 이 시대의 부모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도대체 아이들의 인생은 누가 책임져 줄 것인가. 죽은 뒤에 후회해 봤자 소용없다. 공부보다도, 등수보다도, 눈에 보여지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아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한스의 비극이 우스꽝스러운 일처럼 여겨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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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밤. 매일 밤이 찾아온다. 똑같은 밤인 것처럼 보이지만 매일 다른 빛깔로,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밤은 찾아온다. 밤에 이어 찾아오는 새벽, 그리고 새벽이 사라지는 시각 고개를 내미는 아침. 그 사이 사이 우리가 잠드는 시각, 어쩌면 그 시간들 속엔 우리들이 모르는 신비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어느 시간과 공간을 비집고 불쑥 내게 다가올 것만 같은 예감도 든다. 어쩌면 밤과 새벽 사이의 시간은 우리를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세계로 불현 데려갈지도 모른다.

 

 

세 명의 좀도둑이 오늘도 빈집 털기에 한창이다. 고아원 출신의 그들은 근근이 먹고 사는 백수들이다. 각기 사정이 있어 빈집 털기에 혈안이다. 그러다 오래 전 문 닫힌 '나미야 잡화점'이란 곳에 흘러 들어간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기묘한 체험을 한다. 그곳의 시간은 바깥 쪽의 시간과 달리 흘러갔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그곳. 신비하고도 묘한 그곳.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도착한 편지. 그 속엔 한때 고민상담소로 불렸던 나미야 잡화점에 보내는 편지였다. 올림픽 국가 대표 선수로의 길을 가야할지, 죽을 병에 걸린 사랑하는 사람 옆을 지켜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찬 편지를 시작으로, 그들 세 명은 편지 흠뻑 빠져든다. 물론 처음부터 빠져든 것은 아니었지만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자신들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반갑고 기뻐서 그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들 세 명이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쓰는 방식으로 글이 이어지다가 점차 각기 다른 주인공들의 시점으로 바뀌어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잠시도 손에 놓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미야 잡화점이 어디선가 버젓이 자리하고 있어 오늘밤에도 누군가를 위해 우유상자에 답장을 넣어둘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가수가 되고자 달려온 꿈과 생선가게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운명에의 갈등, 자신의 존재가 엄마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믿었던 한 소녀의 아픔, 얼른 경제력을 갖추어야만 하는 사무직 여성이 호스티스의 길로 가는 데에 있어서의 갈등, 비틀스 음악을 사랑했던 한 녀석이 부모의 야반도주로부터 벗어난 자신만의 삶 이야기까지... 그속엔 내가 겪어보지 못한 삶의 이야기들이 그득했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한 번쯤은 해봤던 고민들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어 더욱더 몰입할 수 있었다.

 

어떤 농담에도 진지한 답장을 해주었던 나미야 잡화점 주인 할아버지. 미치도록 사랑했던 여인과 도주에 실패하며 자신을 돌아본 젊은 시절의 그때. 어떤 선택을 함에 있어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고민과 갈등, 그것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리라. 그래서 그는 결국 나오지 않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선택이 잘한 일이었다고, 또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편지를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는 평생 그 편지를 간직하며 독신으로 살아갔고, 이 할아버지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혼자가 아니라는 걸,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진심어린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어쩌면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치유하는 방식이었으리라.

 

 

 ○월 ○일(여기에는 제사 날짜를 기입하도록 해라) 오전 0시부터 새벽까지 나미야 잡화점의 상담 창구가 부활합니다. 예전에 나미야 잡화점에서 상담 편지를 받으셨던 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그 편지는 당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도움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을까요. 기탄없는 의견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때처럼 가게의 셔터 우편함에 편지를 넣어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니다. P.188  

 

 

나미야 잡화점의 부활. 그것은 죽어서도 나미야 잡화점에 고민을 상담하러 편지를 넣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실어주기 위한 할아버지의 영혼이 깃든 날이 아니었나 싶다. 잠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순간 그들에게 기적이 찾아왔으니 말이다.  

 

사랑이 사랑했던 여인, 그 여인이 운영했던 환광원이라는 고아원. 그곳 출신인 좀도둑 세 명. 그리고 나미화 잡화점을 찾는 환광원 출신의 사람들. 그리고 환광원을 위험에 빠뜨리고 없애버리려고 수작을 벌이는 이들. 그들 사이에서 할아버지는 죽어서도 '사랑'을, '사람'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연결을 알아보기 위해 보냈던 좀도둑들의 백지 편지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의 현재에 답장으로 찾아온다. 진심어린 할아버지의 편지. 그 편지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리고 그들이 했던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의심했던 사람을 믿게 되고, 어쩌면 그들 인생을 바꿀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기적을 믿는다.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아주 단순한 관심임을. 지극한 정성임을 기억하려고 한다. 세상에 하찮은 존재란 없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들의 기적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빛이 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는 나미화 잡화점에 홀딱 반해버렸고, 당장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어떤 고민이라도 들어줄 할아버지의 영혼을 가슴 벅차게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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