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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
정명섭 지음 / 텍스티(TXTY) / 2025년 2월
평점 :
"이제 너의 운명을 받아들여." p.292
정명섭 작가의 조선판 다크 판타지.
라는 설명에 아주 딱 들어맞는 책이다. 표지가 주는 기묘한 분위기와 '암행'이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 그리고 내지의 색깔의 변화가 책을 읽는 내내 사람의 마음을 참 괴롭게 만든다. 대체로 상상의 역사 속 기이한 일들을 다룬 책들은 그 옛날 '한국식 호러 영화'들이 보여준 것처럼 인류애가 담긴 훈훈한 교훈으로 마무리하여 아무리 내용이 잔혹하였어도 끝은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했는데, 이 책은 '다크 판타지'라는 설명에 어울리게 주인공의 미래가 꾹 닫은 눈꺼풀 속 어둠처럼 까맣고,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어둡다.
주인공 송현우는 장원급제를 이루고 절친의 여동생과 혼례를 올리고 곧 암행어사로 임금의 총애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하룻밤 새에 온 가족이 죽고 친족 살인자라는 누명을 쓴 채 감옥에서 자살하게 된다. 책을 펼치자 마자 벌어지는 참극에, 주인공에 대해 서술되었던 미래의 장밋빛 인생은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이유를 모른 채 되살아난 주인공이 감옥을 탈출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순식간에 몰입해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시작부터 빠르게 이야기가 몰아친다.
대체 송현우의 가족을 몰살한 범인은 누구인가. 왜 덕출과 덕이는 송현우를 배신하는가. 임금은 왜 송현우를 도우면서 뒤를 쫓는가. 송현우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송현우는 어떻게 되살아나게 된 것인가, 등등 시종일관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우게 하는 질문들을 내용과 대조해가며 읽다보니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거기다 물약 한 개로 기이한 힘을 얻게 된 송현우가 선보이는 기이한 힘과 괴기스런 존재들이 벌이는 전투씬도 볼만하다. 매 전투씬이 박력 넘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괴력난신이 난무하는 장면들은 기이/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참새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방앗간 같은 존재니까.
아무튼 송현우는 죽다 살아난 뒤, 죽기 전 약속받았던 암행어사 마패를 들고 가족을 죽인 원수를 찾아 복수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런 송현우를 범인으로 알고서 자기 동생을 죽인 복수를 하기 위해 절친이었던 이명천도 암행어사가 되어 송현우를 쫓게 된다. 이렇게 두 암행어사가 암행을 떠나는 장면을 보며 책의 제목인 <암행>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보게 됐다.
어두울 암에 움직일 행. 작가는 '어둠을 걷는다'라는 의미를 곱씹다가 '어둠의 길을 걷는 어사'를 떠올리고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송현우는 기이한 힘을 얻게 되면서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기이한 존재들을 보게 되고, 그들과 싸우기도 한다. 이 부분에서 송현우는 제목과 어울리는 주인공의 삶을 살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책에서는 암행어사가 한 명 더 존재한다. 바로 송현우를 뒤쫓는 이명천. 이명천은 실제로 송현우가 암행어사 출두를 한 곳 곳마다 뒤쫓으면서 송현우가 벌인 일을 수습하며 고을 곳곳의 탐관오리들을 벌하고 백성들을 구제하며 실제 암행어사로서 착실하게 일한다. 그렇다면 이 <암행>이라는 제목에 이명천도 한 몫을 해야하는 것 아닐까. 어둠을 걷는다는 단어의 뜻 말고도 실제 임금의 명을 받아 지방관의 치적과 비위를 탐문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살펴서 개선하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 벼슬로서의 의미도 있으니까. (물론 뒤에 '어사'라는 단어가 붙어야 하지만.) 그리고 그러한 의미를 기다리던 내게 책의 말미에 약간의 힌트같은 게 보였다.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어. 그들에게는 희망이 필요해. 자네가 그들의 빛이 되어 주게. 나는 어둠 속에서 그들을 돕겠네." p.320.
바로 송현우가 모든 일을 마무리한 뒤 남겨진 미션을 위해 길을 떠나며 이명천에게 남기는 말에서 말이다.
송현우는 어둠 속에서 조선을 보살피는 암행어사로, 이명천은 밝은 빛 속에서 조선을 이끄는 암행어사로. 이 장면은 특히 송현우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어둠 속에서 악적들을 처치하며 그림자로 살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것 같아 매우 눈길이 갔다. 조선 팔도에서 벌어지는 온갖 괴이한 일들과 기이를 부리는 존재들을 참하는 송현우, 그리고 밝은 빛 아래 드러난 어둠의 실체들을 판결하여 조선에 드리운 암운을 거둬 갈 이명천. 거기다 둘이 친우였고, 하룻밤 만에 원수가 되어버렸다는 점도 둘의 관계성이 반전을 이루게 하는 요소가 되어서 앞으로의 일들을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책 말미가 꼭 거대한 전설의 서두가 되는 듯이 끝나는 이야기를 꽤 좋아하는데, 본 책이 다크 히어로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 송현우의 시작을 다루는 것이라면 나중에 나올 책은 정체성의 혼란이나 각성 등을 다룰 것 같아 이 책이 시리즈로 계속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들도 있으니 꼭 하나하나 찬찬히 풀어서 독자들의 배를 부르게 만들어줬으면 하니까.
언제나 히어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얄궂은 운명을 거부하며 자신만의 운명을 개척해나가곤 하는데, 우리의 주인공 송현우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길을 걸어나갈 것인지 매우 기대가 된다. 어둠 속을 활보하는 조선 선비의 기담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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