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과 일연은 왜 - 삼국사기.삼국유사 엮어 읽기
정출헌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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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삼국사기·삼국유사 엮어 읽기

  작가 - 정출헌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작품만 온전히 보는 것이고, 또 다른 것은 그 작품을 쓴 작가와 그가 살던 시대 배경들을 고려하는 것이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읽기 더 어렵다. 특히 동시대가 아닌, 이전 시대의 작품을 접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 두 책이 있다. 삼국이라는 동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접근 방식이나 인용한 얘기가 조금씩 다른 두 가지 역사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우리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일반적으로 하나는 정사, 다른 하나는 야사라고 간단하게 말하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작가는 이 두 책을 어떤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나 말하고 있다. 특히 작가인 김부식과 일연의 가치관과 시대 배경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파악하면서, 똑같이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다르게 서술되는지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고려해야할 시각을 덧붙인다. 바로 현대인의 관점이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의 역사 고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읽을 때 전체적인 맥락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 우리의 문제의식으로 음미해보려는 것이야말로 고전을 고전답게 읽는 법일 수 있다. p12

  -오히려 역사를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기록된 까닭을 깊이 음미해보는 과정 자체일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날카롭게 벼려나가는 것이다. p12

 

  즉, 우리는 김부식과 일연의 시각에 덧붙여서 작가의 관점까지 파악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작가와 우리는 동시대에 살고 있기에, 그의 관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리어 우리가 역사서를 보면서 ‘왜 이러는 걸까?’라고 의아해하거나 ‘이건 좀…….’하고 황당해하는 부분을 적절하게 짚어주면서 풀이해주고 있다. 일종의 해설서였다, 이 책은.

 

  이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두 작가의 전반적인 배경을 설명하면서, 왜 둘의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는지 얘기하고 있다. 출생과 자라온 환경 그리고 성인이 되어 택한 길과 이후 그들이 추구했던 목표까지. 이렇게 보니 그 둘은 확연히 다르면서도,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서 역사서를 기술했다는 점은 비슷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두 사람의 역사서 글 배열에 숨겨진 비밀이었다. 그것을 읽으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그들이 그런 의도로 순서를 정한 것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읽고 있는 것일까? 과거를 기록한 역사서일까 아니면 집권층의 지배와 체제 유지를 위한 선전 글일까?

 

  2부는 일곱 개의 주제를 놓고, 비슷하거나 똑같은 사건을 어떻게 다르게 기술했는지 비교한다. 삼국의 건국신화, 신라의 세 여왕에 얽힌 이야기, 효자와 열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남자들에게 가려져 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부인들의 이야기 등등.

 

  작가는 그들이 왜 그렇게 적을 수밖에 없는지, 현대를 사는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견을 제시한다. 그리고 특히 여성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남자가 적은, 남자들이 득세하는 시대에서 여자들은 어떤 식으로 이름을 남겼는지, 그녀들이 어떤 목적으로 역사서에 기재가 되었는지 차근차근 풀어준다.

 

  책을 다 읽고 고민에 빠졌다.

 

  어린 조카에게 역사에 대해 어떻게 애기해줘야 할까? 어떤 역사서를 골라줘야 할까? 어떻게 역사를 받아들이도록 도와줘야할까? 책을 읽기 전에는 하지 않았던 고민이 늘었다.

 

  하지만 이건 즐거운 고민이다. 동시에 공부를 더 하고, 생각도 많이 하고, 지금보다 더 다양한 사회와 인간에 대해 배워야 풀 수 있는 고민이다. 어느 철학자가 말했다. 생각하기에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역시 내가 죽어있지 않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과거와 지금은 많이 다르지만,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 나같이 고민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비슷한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어떻게 역사를 바라보고 전달해야하는지,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적용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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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와 잃어버린 장미 - 다 빈치 코드의 비밀
마가렛 스타버드 지음, 임경아 옮김 / 루비박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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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 - 마가렛 스타버드

  부제 - 다 빈치 코드의 비밀

 

  언제나 그렇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먼 과거의 일은 추측과 가설로 뒤덮여 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라든지, ‘이렇지 못하다는 증거가 없으니까 이게 맞는 거다.’ 또는 ‘이 모든 것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진실은 지배 세력에 의해 묻히고 왜곡되고 있다’라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나돈다. 특히 마지막에 말한 음모론 같은 것들은 세파에 찌든 일반인들에게 짜릿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추측은 추측일 뿐이다.

 

  이 ‘소설’도 그런 맥락에서 읽어보았다. 남이 고생해서 연구하고 모은 자료들을 소설이라 치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지 모르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다음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그건 댁의 생각이지.’

 

  이 ‘소설’의 중심 가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결혼 여부였다.

 

  동정으로 죽었다는 남자를 왜 그리도 유부남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 못하겠지만, 어쨌든 그것이었다.

 

  솔직히 예수의 결혼설은 꽤나 매력적인 가십거리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삼국지’처럼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꽤나 많은 사람들의 밥줄이 될 것이다.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도 다루었었고, 몇몇 책에서도 다루었었다. 신격을 낮추는 대신 인격을 부가시켜 예수를 유대인 레지스탕스 지도자로 묘사하거나, 실패한 정치인으로 그리기도 했다.

 

  마가렛 스타버드 역시 그런 것들의 영향을 받아,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증거들을 제시한다. 커플 룩을 언급한다던지, 자리에 앉아 있는 위치나 그림 구석에 있는 작은 기호들을 문제 삼아 예수와 그의 연인 커플을 공식적으로 인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냥 읽으면 ‘아, 그렇구나.’라고 넘어갈 정도로 말이다. 솔직히 나는 그 성당엘 가보지 않았고, 그 그림을 직접 보지도 못했으며 그 구절이 적힌 원본은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다.

 

  물론 스타버드 여사는 말한다. "현 교계에서는 이런 사실을 알고서도, 진실을 은폐시키고자 공표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누가 맞는지 내가 알겠는가? 난 그냥 평범함이 뚝뚝 떨어지는 대한민국의 소시민일 뿐인데. 어느 날 갑자기 외국 사람이 나타나서, 그냥 ‘내가 쓴 게 맞아요, 믿으세요.’라면 믿을 수 있을까?

 

  이건 마치, 외국에서 들여온 수입품을 놓고 ‘외국에서는 다 이 제품을 써요. 영국 왕실에서 입증한…….’라고 목청껏 떠드는 홈 쇼핑 안내문 같은 것이다. 내가 외국을 안 가봤으니 쓰는지 안 쓰는지 어찌 알겠는가.

 

  비판적이고 회의적이라고도 하겠지만, 무조건 ‘맞아, 기존의 것은 다 거짓이야’라고 추종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스타버드 여사는 현재 세계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은 다 예수의 부인을 매장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남녀가 만나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때에야 비로소 완전해지는데, 지금 교계에는 불완전한 상태의 신인 예수만이 존재하다. 따라서 그의 반쪽을 찾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고대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부인이 있는데, 왜 유독 예수만 솔로인가라며 의문을 제기한다.

 

  아니, 그냥 예수가 솔로 부대의 수호신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커플의 수호신이 있으면, 솔로의 수호신도 있어야 공평하지 않을까?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난, 기존의 교육에 뼛속까지 찌들어 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제, '그리스 로마 신화', '삼국지', 그리고 '예수의 결혼설'이 3대 사골이 될 것인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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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와 성녀 - 마성과 성성을 키워드로 한 중근세 유럽 여성사
아케가미 슈운이치 지음, 김성기 옮김 / 창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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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이케가미 슌이치

 

  부제 - 마성과 성성을 키워드로 한 중근세 유럽 여성사

 

 

  표지에 책에 대한 모든 설명이 압축되어 나타나 있다. 마성(魔性)과 성성(聖性)을 키워드로 한 중근세 유럽 여성사. 중근세에 왜 마녀 사냥과 성녀 숭배 사상이 동시에 나타났는지 예를 들어 보여주는 책이었다.

 

  찬찬히 다 읽어보고 내가 내린 결론은 유전무죄 무전유죄였다.

 

  여자가 두 명이 있다. 한쪽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과부가 되었고, 다른 쪽은 힘없고 가난한 집에서 과부가 되었다. 똑같이 살기 위해 일을 했다. 부유한 집은 재산을 헌납하고 수녀원으로 가거나 동네 아가씨들을 데려다가 일을 가르쳤다. 중세 여성들이 배워야할 교과목에는 약초를 써서 간단한 집안 상비약 만들기도 있었다. 가난한 집은 남을 가르치기보다는, 약초를 조제해서 내다 팔았다.

 

  그렇지만 결과는 달랐다. 부유한 집안의 여자가 환상을 보고 기도문, 특히 그것을 방언으로 읊으면서, 몸에 성흔이 나타나거나 성체 빵만 먹는 몸이 된다면, 그녀는 성녀로 추앙받았다. 물론 요즘으로 따지면 식욕 부진 증상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거식증이나.

 

  하지만 가난한 집의 여자가 그러면 그 즉시 사탄과 내통한 마녀라 의심받았다. 물론 부유한 집안이라고 해도 지방 영주나 교회와 대립이 있으면 그 즉시 넌 마녀라고 불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 결국 마녀와 성녀는 사람들, 특히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인 영주와 교회가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일이었다. 그들이 여자에 대해 어떤 편견과 불안과 의심과 두려움을 갖고 있느냐의 결과물이 바로 마녀 사냥과 성녀 숭배였다.

 

  마리아는 성스럽다. 처녀이면서 예수를 잉태했으니.

  그녀 이외의 여자는 불결하고 추악하며 음탕하고 간악하다.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여자의 몸을 빌려 태어난 주제에, 그 구멍은 남자를 후리는 것이라 경멸하니 말이다. 그럼 중세 시대의 마녀 사냥꾼이나 신부 내지는 교황의 어머니들은 거의 다 문란한 사생활을 가졌다고 봐야하나?

 

  그렇기에 마녀들의 섹스 상대를 사탄으로 몰아붙여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그녀들의 문란한 성생활의 대상이 일반 남자들, 그들이 추앙해 마지않는 아버지들이라고 하면 남자의 우월의식에 금이 갈 테니 말이다.

 

  재미있다.

 

  요즘 세상을 보면 그런 시각으로 여자를 보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녀’라든지 ‘김여사’라고 모든 여자들을 싸잡아 부르는 것이 그런 경향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슈가 났을 때 여자 비하하는 댓글 달린 거 보면, 어쩐지 화가 난다. ‘~~남’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녀’만이 온통 기사를 도배하고 있다.

 

  어쩌면 중근세 남자들의 그런 사고방식이 아직도 DNA에 남아서 흐르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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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지문 -상 신의 지문 1
그레이엄 핸콕 / 까치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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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그레이엄 헨콕.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에 아주 조금 읽어봤다. 그 때는 무슨 뜻인지,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냥 글자만 읽었다.

 

  이제 조금은 더 나이를 먹어 그 때보다 아주 조금 들은 것도 많아지고, 생각도 많이 하게 되어 다시 한 번 시도를 해본 책이다.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이제는 글자를 읽는 것은 물론이고 문장과 문단을 읽을 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뭐 이 정도의 발전이 좀 불만스럽긴 하지만 차차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이 말하고 싶은 것은, ‘과연 성궤는 어디로 가버렸을까?’였다.

 

  성궤는 바로 하나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준 십계명을 새긴 돌을 담은 성스러운 궤짝을 말한다. 언약궤라고도 불린다.

 

  대개 사람들은 당연히 그것이 예루살렘에 있을 것이라 여기지만, 그것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언제 누가 왜 가져갔는지 모르는 그 성궤의 행방을 찾아 저자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오가며 많은 문헌들을 뒤져보고, 유적들을 탐험한다.

 

  이 사건이 기원전에 일어난 것이라 뚜렷한 증거도 없고, 명확한 자료조차 없는 상황에서 저자는 여러 사실들을 이리저리 꿰어 맞추면서 수수께끼를 풀어간다. 그래서 어떨 때는 비약이 심하다고 여겨지는 경우도 있고, ‘그건 당신 생각이지’ 라고 주절거린 대목도 있었다. 그렇지만 저자의 몸을 아끼지 않는 노력과 다양한 수많은 문헌을 뒤진 조수들의 도움 덕분에 ‘어쩌면…….’이라는 일말의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저자는 논픽션, 그러니까 실제로 있었던 일의 기록이라 우기지만 책의 뒷면에 있는 외국 언론지의 추천문을 보면 ‘지적 추리물이라는 새로운 장르.’, ‘환상적인 역사 추리…….’ 라는 말이 나와 있어 한참을 웃었다. 그렇다. 저자가 펼치는 이론은 현 학계에서는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이러하다. 구약에 나오는 솔로몬은 시바의 여왕과 정말로 스캔들이 났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은 안타깝게 헤어지고, 여왕은 자신의 나라에서 홀로 아기를 낳아 키운다. 그 아들의 이름이 바로 메넬라크.

 

  그는 성장하여 아버지를 찾아가고, 장자 상속법에 의해 성궤와 이스라엘 각 지파의 맏아들들을 이끌고 돌아온다. 그가 바로 이디오피아의 초대 국왕 메넬라크 1세였고,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기독교 왕국인 악숨을 건국한다. 그리고 성궤는 그 이후로 이디오피아의 비밀스런 곳에 보관되어 있다.

 

  그 진상을 알아차린 단체가 바로 그 유명한 템플 기사단이다. 그들은 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에서 많은 것들을 알아내고, 그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다. 기사단이 사라진 다음 그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바로 프리메이슨이다.

 

  그런데 성궤는 과연 무엇일까?

 

  저자는 놀랍게도, 그것이 이제는 사라진 이집트 문명의 모든 학문의 집대성이 만들어낸 무기라고 말한다. 더구나 모세가 이집트의 신관이자 위대한 마법사의 후예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성배와 성궤가 동일한 것이며, 성배는 성궤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하도록 만들어 낸, 일종의 연막이라고 넌지시 내비친다.

 

  재미있지 않은가?

 

  헨콕의 모든 이론은 단 한가지로 귀결된다. 우리가 모르는 엄청나게 발전한 초 고대 문명이 있었다. 그들은 현재의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앞선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남용하다가 멸망해버렸다.

 

  그것을 ‘일부’ 전수 받은 것이 이집트나 다른 고대 문명인 것이다. 이것을 파헤친 것이 ‘신의 지문’, ‘신의 거울’, ‘신의 봉인’ 시리즈이다.

 

  한참 읽다보면 ‘진짜 그렇겠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모든 증거들과 문헌들의 흐름이 그렇게 딱딱 맞아떨어질까. 그렇지만 책을 덮고 생각해보면 ‘개뿔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다. 같은 말을 들어도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양하고, 같은 영화를 봐도 사람마다 결말에 대해서는 각양각색의 의견이 나온다. 전에 영화 '장화 홍련'을 보고나서 그 해석에 대해서 친구 3명과 이야기 했는데, 그 해석이 다 틀렸었다.

 

  그러니 같은 유물을 봐도 헨콕의 해석과 다른 고고학자들의 해석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그 유물들이 엄청나게 오래된, 기록도 제대로 없는 시대의 것이라면 말이다.

 

  뭐랄까, 이미 모든 조서를 꾸며놓고, 거기에 맞춰서 증거를 찾는 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 평소엔 그냥 무심히 지나치던 담배꽁초 하나도 증거가 되고, 전 국민이 부르던 노래 가사도 뭔가 의미가 내포된 암호로 보이는 것이다.

 

  헨콕의 문제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연결 고리가 없는 일련의 증거들을 무리하게 맞추다보니, 어떤 것은 타당하고 어떤 것은 코미디 대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이론은 앞서 말했지만, 엄청나게 발달했던 초 고대문명의 존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 무너지면 끝장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 초 고대 문명의 존재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과연 그의 주장대로 있었는지 아니면 그의 놀라운 상상력의 산물인지.

 

  역사에 100% 진실은 없다고 본다. 흔히 말하지 않는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그래서 사람들이 호기심을 느끼고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모양이다.

 

  지적 추리물. 이 말이 맞았다. 어쩌면 나도 이미 기존의 고고학계에 세뇌를 당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그 이상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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