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 프롬 - 개정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4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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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수의 시대>, <기쁨의 집>을 읽고 아이고,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 북동부 와스프라는 인종들의 허위의식에 학을 떼고 다시는 읽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으면서도 기어이 한 번 더 이디스 워튼을 읽은 이유는 바로 전에 독후감을 쓴 프랭크 노리스를 읽은 사연과 같거나 비슷하다. 미치너의 <소설> 속에서 미국 문학의 앞 세대에 우러러 찬미해야 할 작가 네 명 가운데 한 명으로 이디스 워튼을 선택해서.
 <이선 프롬>. 사람 이름이다. Ethan Frome. 이름 뒤에다가 수산기水酸基 OH를 붙이면 ’Ethanol' 즉 화학식으로 C2H5OH, 에탄올, 천국으로 가는 가장 저렴한 액체를 우리는 이렇게 부르고, 나는 순수 에탄올에다가 에탄올의 세 배에 해당하는 설탕물을 섞은 액체, 즉 25도짜리 희석식 진로소주를 대단히 사랑한다. 에탄올이 “혀끝을 스치면, 온 몸이 짜르르르” 이게 1970년대 초 중반까지 흑백 TV를 타고 흘러나왔던 CM 광고노래였다. 아마 “진로 한 잔 하면, 어허 기분이 좋아요, 진로 파라다이스!”하면서 끝났지 싶다.
 아 또 삼천포.
 만일 내가 <이선 프롬>을 첫 이디스 워튼으로 읽었으면 그이를 지금처럼 우습게 알 것 같지는 않다. 워튼이 살던 매사추세츠 주, 소위 뉴잉글랜드 지역의 산골을 배경으로, 한 불운한 부부와 이들의 틈에 끼어든 젊은 여인이 만들어낸 더 큰 불행에 관한 이야기.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가 매사추세츠 주의 스타크필드 지역의 한 발전소에 파견 왔다가 직원들 파업 때문에 겨울 내내 북풍한설 몰아치는 뉴잉글랜드에 발이 묶여, 주워들은 이야기를 적은 형식이다. 역시 스타크필드. 원래부터 스타크 가문이 터를 잡은 동네 윈터펠이 이 스타크필드에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인한 바는 없다.
 그럼 이선 프롬의 집안 얘기를 좀 해보자.
 이선 프롬이 십대 시절, 아버지가 오래 아팠다. 그래 어머니와 이선이 정성을 바쳐 간병을 했지만 아버지는 집안의 재산만 거덜내고, 공과대학 다니던 이선의 대학 공부도 작파시키고 그만 숟가락을 놓아 버리고 만다. 그러자마자 이번엔 또 어머니가 비시시 쓰러져버린다. 이제 이선 혼자 집안일, 목재소, 농장까지 다 도맡아 해야 하는 처지가 되니 도무지 여력이 없어서 어머니의 친척, 이선의 사촌 가운데 ‘지나’라는 이름의 외로운 아이를 골라 집에 데려와 가사일도 시키고 간병도 시키면서 함께 지내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도 그리 오래 견디지 못하고 남편 따라 먼 길을 가버리니 이제 천애고아가 된 이선. 지나마저 떠나려 짐을 싸는데, 갑자기 세상에 자기 혼자 남아버렸다는 황망함과 상실감에 푹 젖어 그리 애정도 깊지 않은 지나와 불쑥 결혼을 해버린다. 그리고 결혼 7년차. 이제 이선의 나이 스물여덟. 아내 지나는 서른다섯. 벌써 몇 년 전부터 지나의 몸에 이상현상이 생겨 시름시름 앓아 집안 꼴이 말도 아닌 처지. 둘 사이에 아이도 없고, 건강을 망친 지나는 이도 몽땅 빠져 밤이면 물을 채운 컵에 틀니를 담근 채로 침상에 올라야 하는데, 이제 나이 스물여덟, 새벽마다 하늘을 향해 불쑥 솟아오르는 정념을 날마다 힘겹게 달래야 했던 이선 입장에서 그게 쉬운 일이겠느냐 이거다.
 그래 1년 전부터 아내 지나 쪽 친척으로 ‘매티’라는 사고무친의 아가씨를 불러 마치 몇 년 전 지나처럼 가사일과 간병을 시킨다. 그것이 화자인 ‘나’, 발전소 엔지니어가 눈의 나라 스타크필드에 머물기 24년 전 벌어진 일이다. 벌써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감이 잡히시리라 믿는다. 아이 없는 가정. 이가 몽땅 빠진 병중의 늙은 아내와, 젊은 남편. 반 간병인, 반 하녀 역으로 들어온 아름답고 젊은 친척 아가씨. 병, 특별히 오랜 병은 환자를 예민하고 공격적으로 만든다. 더구나 자신이 남편의 어머니를 그리 정성들여 병구완을 해주고 살림도 꾸며주었건만, 이제 자신이 병이 들고 늙어버리니 어쩌다가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내 친척 동생에게 한눈을 파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을, 이걸 어찌할꼬. 남편과 매티의 눈에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눈물이 흐르는지 뻔히 알겠건만, 정작 내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을 어찌하여 그들은 알아주지 않을까. 여자 나이 35세면 이제 몸의 감각이 어떤 희열을 선물하는지 알게 되는 시기. 그러나 남편은 몇 년 째 같은 침상에 오르지 않고, 매사에 활기차게 재잘거리는 매티를 바라보는 눈을 통해 애절한 갈증의 모스 부호를 쏘아대고 있으니.
 정말?
 아니, 내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지.
 진짜 이디스 워튼을 다시 보게 된 거냐고? 그렇다. 왜 그런지는 이 독후감에서는 얘기 못하겠다. 왜냐하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홱 돌아버린 것은 이들의 삼각관계의 비극이 무르익어 드디어 사고를 치는 본문이 아니라, 이제 24년이 다 지나 어느덧 이선이 52세, 아내 지나가 59세가 된 지금, 이들의 본질을 알아내고서다. 즉 에필로그가 죽여주기 때문이다. 근데 내가 어떻게 그걸 말해주냐고. 안 그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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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0-07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품이 이디스 워튼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Falstaff 2019-10-07 13:54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앞으로 더 읽어볼 생각이 지금은 없지만요. ^^;;
 
맥티규
프랜크 노리스 지음, 심규세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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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랭크 노리스의 <맥티그>는 미치너의 <소설> 속에서 편집자와 작가인지 평론가인지와의 재미있는 대화에 주제가 되는 작품이다. 지금은 한국외국어대학 출판부에서 <맥티규>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내놓았지만 조만간 다시 번역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작품으로 생각한다. 저자 노리스는 1870년에 시카고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유복한 사업가의 자제로 그림을 잘 그려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는데 엉뚱하게도 ① 세계 회화의 중심지 중에서도 중심지 파리에서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소설 쓰는 것으로 직업을 바꾸었지만, ② 파리에서 무엇을 했는지 어쨌든 그의 대표작인 <맥티그>를 읽어보시면 즉각 아시겠으나 노리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에밀 졸라는 정작 다시 미국으로 귀국해 캘리포니아 대학을 다닐 때 처음 읽었다는 거다. 작가 소개를 읽어보면 흥미로운 구절이 나오니, “Norris는 놀라우리만큼 잘 생겼으며 자신의 뜻이 강했고 조숙한 재능을 타고났었다.” 뜻이 워낙 강해 신문 통신원으로 근무하다 남아프리카로 파견을 나갔다가 영국의 트란스발 침공 때 보어 공화국 정부로부터 추방되기도 했단다. 하여간 소설 <맥티그>와 <문어Octopus>를 쓰고 명성을 얻었지만, 놀라우리만큼 잘 생긴 노리스는 불과 서른두 살 때 복막염에 걸려 갑자기 숟가락을 놓고 만다.
 이 책은 본문이 1 페이지부터 시작해 270 페이지로 끝나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 놀랍게도 크라운판이다. 가로 176mm 세로 248mm. 주문제작한 내 책꽂이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게 다가 아니라 한 줄에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47자, 원고지 두 줄 반이 들어가고, 한 페이지가 무려 33줄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게 편집하기 위해 당연히 글씨체가 보통의 책보다 작아 처음엔 적응이 잘 안 된다. 눈 침침한 세월을 사신 분은 아쉽지만 다른 번역본이 나오기를 기다리시는 편이 만수무강에 도움이 될 듯.
 책의 내용은 완전히 에밀 졸라의 루공-마카르 총서 한 권을 읽는 것 같다. 미치너의 <소설>에서도 언급이 되었듯이 <목로주점>의 몇 컷은 틀림없이 참고를 했고, 여자 주인공 트리나는 <인간짐승>의 파지 고모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쓴 <보바리 부인>의 보바리 여사를 섞어 놓은 것처럼 읽힌다. 즉, 미국식 자연주의 소설의 끝판왕. 기껏 프랑스 유학을 보냈더니 거기선 읽지도 않은 졸라의 스타일로 샌프란시스코 중류 계급의 물신적 생활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주인공 맥티그는 키가 6피트 2인치. 19세기 서양인치고도 대단한 거구이며, 어려서 탄광에서 탄차 미는 일을 해 몸 자체도 무시무시한 완력을 지원해주는 근육질이다. 평생 탄광에서 썩을 것 같아 어머니가 지긋지긋한 탄광촌에서 벗어나라고 어려서 탄광촌에 굴러들어온 돌팔이 “야매 치과의사”의 도제로 보내버린다. 그래 새크라멘토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아무 생각 없이 대를 이은 야매 치과를 개업해 무려 십여 년 동안 치과를 운영해가며 대외적으론 치과의사이자 ‘맥티그 박사’라는 타이틀로 불리고 있는 인물이다. 자신 스스로 단 한 번도 자기가 박사라는 얘기를 해 본 적이 없었건만 어찌어찌하여 환자들과 주민들은 그를 박사라고 공경하고 있으나, 정작 자신은 치과대학은커녕 ‘대학’이라는 게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평소 활발한 활동과 거리가 먼 거구의 매티그에겐 유일한 절친이 한 명 있다. 누군가하면, 생사를 함께할 정도로 밀접한 마커스란 친구, 마커스는 매티그와 달리 활동적이고 눈치가 빤하며 출세 지향적이지만 돈 좀 생기면 남부로 가 목장을 운영하며 카우보이 비슷하게 살 꿈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마커스는 저 위에서 말한 여주인공 ‘트리나’라는 사촌 아가씨를 은근히 연모하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맥티그보다는 넓은 사교범위를 가지고 있는 그는, 그네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이가 부러진 트리나를 치료하며 사랑이 움튼 맥티그에게 기꺼이 트리나 아가씨를 소개해 결혼에까지 이르게 해준다. 딱 여기까지가 해피 스토리.
 위에서 얘기했듯 졸라의 <목로주점>과 <인간짐승>, 그리고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섞어 놓은 듯한 작품이 해피 엔드면 이야기가 되겠어? 그래 불행이 시작되는데, 언제나처럼 불행은 가장 행복할 때 그 씨가 뿌려진다. 약혼을 하고 결혼을 며칠 앞 둔 시점에 트리나가 돈을 그냥 버리는 셈치고 복권을 산 적이 있는데 그게 무려 오천 달러의 거금에 당첨이 되는 거다. 당시가 19세기. 오천 달러가 지금 돈으로 수십억 원대의 꿈같은 돈은 아니더라도 십억 원 가까이는 되는 거 같다. 게다가 당시 금리가 6% p.a. 수준이라니 한 달에 25달러의 연금을 받을 수 있을 정도. 그래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커스 입장에서 말이다, 자기가 트리나를 맥티그에게 넘기지만 않았어도 5천 달러는 결국 자기 것이 됐을 텐데, 괜히 오지랖 넓게 깝친 결과 곰 같은 맥티그 놈만 장땡을 잡은 거 아닌가 말이지. 이런 생각은 한 번만 하고, 술 한 잔 사라, 해서 한 번, 딱 한 번 술주정을 퍼부은 다음에 없는 걸로 해야 정상인데, 아직 세월을 덜 산 마커스는 그걸 평생의 실수를 넘어 심지어 5천 달러는 자기 것이란 이상한 셈법이 머리에 박히게 된다. 이게 점점 향상 발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잡아 맥티그의 앞날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니 이 아니 비극의 씨앗일까.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여쁜 트리나는 또, 나름대로 5천 달러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그걸 사업하는 삼촌에게 맡겨 한 달에 25달러씩 꼬박꼬박 이자를 받는데, 원금을 까먹는 일은 자기 생전에 없어야 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된다. 그걸 넘어 원금을 불리려는 집착까지 생겨 마치 보바리 부인이 재미있는 것, 예쁜 것에 광적으로 몰두하듯이 5센트, 쿼터를 저축하기 위해 곰 같은 남편 맥티그를 계속해서 잡도리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데, 이래서 과연 행복하겠어? 플로베르와 졸라가 동시에 잘 하는 것이 사건을 자연스럽게 극한으로 몰아가는 일. 행복의 순간으로 결혼식 만찬 장면이 나온다. <목로주점>에선 제르베즈 아줌마가 거위를 잡아 한 식구가 게걸스럽게 포식하는 유명한 광경을 묘사하는 거 기억하시지? <맥티규>에서도 통거위, 삶은 송아지 대가리, 구운 자도(자두) 같은 음식을 거덜내는 열광의 장면이 압권이다. 마찬가지로 불행과 비참의 순간 역시 기어이 끝장까지 다 묘사를 한다. 물론 19세기 식 끝장이니 지금 수준으로 보면 보는 사람에 따라 귀여운 수준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을 터.
 그럼 내용은 짐작하시겠지?
 다만 심규세 선생이 이 책을 번역한 다음에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래 낡은 표현과 단어들이 많이 눈에 띄어 별점 하나를 뺐다. 미국 문학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이런 훌륭한 책은 이제쯤 새로운 역자에 의해 새롭게 번역되어 나오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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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알 이야기 을유세계문학전집 26
크레티앵 드 트루아 지음, 최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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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많고 많은 아서왕 이야기 가운데 이 책을 콕 집어 선택한 이유는, <그라알 이야기>가 제목만 봐도 그랄, 그레일 즉 인디아나 존스 선생이 죽을 고생을 해가며 찾아 헤매던 성배 또는 그 비슷한 성물을 뜻하는 것이고, 주인공 페르스발은 영어로 퍼시벌, 독일어로 파르지팔, 바그너가 자신의 오페라 <파르지팔>의 대본을 쓸 때 이 책에서 한 포인트를 건져 창작했을 거란 짐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그너는 스스로가 문학적 소양이 상당히 깊었던 인물로 비단 <그라알 이야기> 뿐만 아니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방랑하는 네덜란드인>, <니벨룽겐의 반지> 기타 등등도 기존에 있던 신화, 옛 이야기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각색해 대본작업을 한 인물이라 그이의 작품과 동일한 내용은 처음부터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 페르스발과 아서왕의 조카 고뱅 경의 행적을 보면 바그너와 트웨인(아서왕 궁전과 코네티컷 양키)의 상상력이 어떻게 펼쳐졌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아참. 책이 아서 왕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아서 왕의 전설, 엑스칼리버의 발견, 란슬롯, 귀네비어, 아서 왕의 시신을 싣고 가는 뗏목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아예 란슬롯과 귀네비어는 등장도 하지 않는 걸로 봐서, 귀네비어가 아서 왕의 재혼 신부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둘 사이에 나이 차이가 심하지 아마? 굳이 내용을 이야기하자면 란슬롯-귀네비어의 불륜에 이은 내전 중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의 절멸 같은 게 아니라 바그너의 <파르지팔>에 상당히 가깝다. 외곬수, 사실은 외곬수라기보다 유로지비에 가까운 페르스발이 어느 날 지나가는 기사의 멋진 모습을 보고 자신도 기사가 되기 위해 과부 엄마에게 이별을 고하고 아서 왕을 찾아가 나도 기사 할래, 졸랐더니 옆에 있던 왕의 집사 ‘쾨’가 순전 농담으로 왕궁에 오다가 네가 만난 불손한 기사를 죽이고 그의 무기와 갑옷을 취해 대신 네가 기사를 해라, 했던 걸 그대로 믿어 냅다 왕궁을 벗어나 붉은 갑옷의 불손한 기사를 불러 세워 냅다 창을 던져 죽이고 자신이 기사가 된다. 이후 웨일스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성질 더러운 기사들과 대결에 굴복을 시키고 아서 왕에게 보내 항복하라고 하는, 라만차의 좀 덜 떨어진 늙은 영감이라면 감동해서 읽을 만한 내용이다.
 책 후반으로 가면 페르스발은 기사 오를란도와 견줄 만한 치매 증상이 도져 자신이 누구인지,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청맹과니 상태로 접어드는데, 이게 다 어부왕漁夫王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의 성에 초대받아 끝부분에 맑은 피가 흐르는 창(성창聖槍으로 읽히는), 그라알(편의상 성배聖杯라고 생각하자)을 보고도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암포르타스 왕과 비유할 수 있는)어부왕에게 묻지 않은 업보라는 설명이다. 이것 말고도 쿤드리와 비교할 수 있는 여인도 등장해 페르스발이 겪는 모든 곤경의 근본은 페르스발의 어머니가 졸도해 넘어지는 것을 보고도 집을 떠나 결국 어머니를 죽게 만든 죄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그래 청맹과니로 떨어진 다음엔, 마크 트웨인의 <아서 왕 궁전과 코네티컷 양키>에서 많이 등장하는 성창과 성배를 찾아 나서는 기사들 가운데 한 명인 고뱅 경의 영웅적 행적을 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21세기 도시인에게 기사들의 모험담과 여성 숭배에 관해 더 이상 흥미를 못 느낀다는 점. 이 책이 나온 시점이 1181년. 840년 전에 작가 크레티앵 드 트루아도 이 점을 알았는지, 독자가 이제 심하게 하품을 하면서 다음 내용이 더 이상 궁금해지지 않을 즈음해서, 작품을 중도에서 뚝 마쳐버린다. 물론 유실됐겠지만, 독자는 다행으로 여기며 한숨을 한 번 쉬었는데, 그게 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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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큰 2019-10-02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이야기는 역시 재미있네요^^;

Falstaff 2019-10-02 12:37   좋아요 1 | URL
재미있다는 데 백퍼 동감합니다. ^^
근데 문제는, 하도 오래전에 쓴 책이라 기사가 하는 일의 종류가 다양하지 못하다는데 있는 거 같았습니다. 그래 책 뒤편으로 가면 좀 지루해지더라고요.
 
선비와 과부 중국전통희곡총서 4
왕런제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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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중국전통희곡총서를 읽고 있는데 네 번째 책이 왕런제의 <선비와 과부 董生與李氏>다. 해설을 보면 극작가 왕런제가 푸젠성 취안저우 출신이며 그곳이 비록 (상대적으로)작은 도시이기는 하지만 중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예술적으로 뛰어나고 미적 감화력이 충만한 이원희梨園戱라는 지방 극종이 있다고 하며, 작중 각주를 통해 혼인 장면을 들어 무대가 이원희가 있는 취안저우의 풍습을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이 작품도 예전 이름으로 하면 회계에서 남해까지(쉽게 얘기하자면 상하이 아래서 홍콩까지)를 중심으로 하는 천극川劇, 월극越劇, 곤극崑劇 등 남송 시절 남희南戱의 전통을 이은 창작 희곡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정도까지면 아마추어 독자, 관객 입장에서는 충분하리라 믿는다. 우리가 흔히 베이징 오페라라고 하는 경극京劇만 있는 것이 아니고 중국에선 경극 등 예전 금나라, 원나라 시절의 곡曲에 더불어 남송의 남희南戱 역시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었다는 정도.
 극작가 왕런제가 1942년 생. 1942년 생이면, 불행한 중국의 현대사 속에서 낳고 자라고 인생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청년기까지 모두 바친 중국판 따라지 세대인데 놀랍게도 전통 희곡을 계승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판소리 네 마당 말고 후대의 극작가가 있어서 계속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다. 지난번 <반금련>을 쓴 웨이밍룬도 마찬가지로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존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실제로 공연도 하고 심지어 세계 각지로 활발하게 소개, 공연을 계속하기도 하니 정말 부럽다.
 <선비와 과부>는 원래 제목을 보자면 <동 선생과 (과부)이씨> 정도로 할 수 있는데, 내용 면에서는 정말로 팔구백 년 전 남송 시절에 공연했던 작품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좋은 의미에서 촌스럽고, 재미있다. 무대는 타이완을 마주보는 취안저우 지역. 중국에서 썩 높지는 않은 관직으로 원외員外라고 있었나보다. 이 관직을 하고 있던 팽씨 성을 가진 인물이 있어 팽원외彭員外라고 불렀다. 이이가 나이가 들어 귀밑머리 푼 조강지처가 숟가락을 놓자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새장가를 들었는데 상대가 젊디젊은 이씨 부인이었다. 팽 선생 본인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를, 그건 두 여인과의 사이에 아무 씨도 퍼뜨리지 못했다는 것. 자손만 없는 것도 아니고 부모는 벌써 장사를 지냈고, 형제자매도 없어서 세상에 피붙이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팽 선생도 드디어 염라대왕의 명부에 정한 날짜가 도래해버렸다. 그래 드디어 저승에서 사자가 둘이나 도착해 소매를 잡고 올라가자고 조르는 터. 팽 선생 생각하기를, 자기가 저승 가는 건 나이 든 필멸의 존재라 당연하지만 새파란 이씨 혼자 두고 명을 다하면 틀림없이 이씨가 개가할 것이라는 걱정이 대단한 거다. 그래 다 죽어가는 팽 선생의 머리에 떠오른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하나 있었으니 그 인간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자, 동네 서당의 훈장이자, 천명, 대인, 성인의 말씀을 경외하는 것도 모자라 여인마저도 경외(공경하여 두려워)하여 사외四畏라고 칭하는 동 선생, 이름하여 동사외董四畏였다.
 그래 저승사자에게 은 백 냥을 뇌물로 주고 십 분의 시간을 벌어 동사외를 불러 당부하기를, 생전에 자네가 내게 빈 은 열 냥, 이자까지 합해서 스무 냥을 없는 것으로 하고, 대신 자기가 죽으면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할 이씨가 외간남자와 연애를 하는지 잘 감시하고, 만일 그럴 경우 꼭 둘 사이를 파투를 내야하며, 조사 결과를 매달 한 번씩 자기 묘에 와서 보고를 해달라고 한 다음에야 영혼이 몸을 떠난다. 그리하여 드디어 우리의 동 훈장이 이씨가 나설 때마다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하는데, 아이고,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여기까지 쓰고, 양해해주시라, 오늘이 한가위 날이다. 따뜻하게 데운 백화수복 700cc 마시고 와서 좀 알딸딸....)


 공통의 현상이 벌어지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견물생심見物生心. 눈으로 보면 마음이 생긴다는 뜻. 노총각 동 훈장은 자기도 모르는 새 이씨 부인에 대해 은근한 집착이 생기고, 이씨 부인 역시 동 훈장의 글 읽는 소리만 듣고도 예전 진로소주 CF 가사처럼 ‘온 몸이 짜르르르....’의 경지에 다가서니 어찌 인간의 힘으로 교통사고를 막으리오. 근데 이게 사대부 동씨 집안에선 가비얍게 볼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이미 구천의 귀신이 됐다한들 어찌 한 순간이라도 매끈매끈하고 포동포동한 이씨의 살결을 잊을 수 있을까, 팽 원외 두 양반들의 뜻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어떻게 하나, 그놈의 육체가 원하는 걸. 그렇지? 아시지?
 어떻게 되는지는 중국의 전통희곡을 읽어보신 분은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 터, 굳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들 이해하실 듯. “안 알려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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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19-10-01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자람 소리꾼이 브레히트 희곡을 판소리로 개작한 ‘억척가’, ‘사천가’, 김애란 소설 ‘노크하지 않는 집’을 판소리로 만든 ‘여보세요’가 있어 참고하십사 말씀드립니다.
http://m.hankookilbo.com/News/ReadAMP/201108171146250395?did=GS
http://m.kyeongin.com/view.php?key=20171106010001536#rs

Falstaff 2019-10-01 15:03   좋아요 1 | URL
아, 그렇습니까.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자주 공연해주기 바랍니다.
 

 

 7월부터 9월까지 세 달 동안 읽은 책이 모두 60권, 55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제 마음에 들어 추천하고 싶은 열다섯 작품을 소개합니다. 언제나와 같이 책을 추천하는 일은 좀 난처합니다. 작가들은 나름대로 진심을 다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겠지만 그것이 독자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전혀 모르는 일일 겁니다. 저도 독자의 한 명인데, 문제는 제 속의 필터가 과연 공정한 것인지 의문이 들어서 생깁니다. 그러니 사실 감히 ‘추천’이란 말 대신에 제가 읽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면서 책을 소개한다 해야 정확합니다. 뭐가 어쨌든 간에 서론이 길면 재미없는 법, 곧바로 추천이건 소개건 일단 시작합니다. 순서는 제가 책을 읽은 날짜순입니다.



1. 천상병, <천상병 시선>

 가난이 직업인 시인. 평생 혼자였으나 결코 외롭지 않았던 이. 보살펴주는 아내가 있고, 술값을 찔러주는 동무들이 있고, 동네 아이들이 함부로 할아버지라 불러주니 어찌 외로울 새가 있었을까. 그러나 행성에서 뚝 떨어진 외계인이 아닌 이상 이이에게도 생활이 있고 삶의 곤고함이 있었을 터. 굳이 그것을 에둘러, 그래도 세상 한 평생, 소풍 나와 잘 먹고 잘 살다 가노라 한 번 히쭉 웃는 시어들이 어찌 사람의 마음을 이리 헤집어 놓는지.



2. 톰 울프, <허영의 불꽃>

 

 진짜 미국소설. 또 하나의 <An American Tragedy>. 연 수입 백만 달러 이상 벌어들이는 와스프 출신의 채권전문 엘리트 셔먼 맥코이. 뉴욕에 거주하는 최상류층 백인과, 변두리 지역의 범죄가 만연한 흑인공동체 사이에 공평하게 나누어가진 것은 오직 하나, 흑백과 관계없이, 빈부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지방선거에 한 명이 딱 한 표씩의 투표권밖에 행사할 수 없다는 것. 바람 한 번 잘못 피웠다가 자기 잘못 하나 없이 완전한 몰락으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의 미국식 비극. 민주주의는 결코 최선의 정치체제가 아니다.



3. 잉고 슐츠, <심플 스토리>

 

 그간 많이 다루어 식상한 점은 있으나 작가가 잉고 슐체라면, 동서독으로 나뉘어 다른 삶을 살아야 했던 가족 이야기라도 늘 참신하다. 29개의 단편斷片들이 각기 뒤죽박죽 섞여 있다가 나중에 보면 모든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소통을 하는 구조. 그 사이에 시간은 훌쩍 24년이 지나가버리니 이젠 동서와 세대 간 이격 또는 불통 내지는 소통을 이룬다. 이야기가 하도 다양해 책을 읽다가 잠깐 정신 줄 놓으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니 매사 불여튼튼, 조심해서 읽어보셔야 마땅할 것.



4.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아디치에가 아체베의 21세기의 딸인 것을 증명한 역작. 나이지리아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비아프라 공화국을 건국부터 역사상 유래가 거의 없던 기근을 거쳐 항복할 때까지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의 시선으로 서술한 기록. 아체베도 비아프라 공화국의 외교관으로 활약한 전력이 있었으나, 나이지리아의 거의 모든 국부를 차지하는 유전지대를 깔고 앉은 이보 족의 나라를 다른 부족들은 애초에 인정할 수 없었을 터. 종족간의 권력투쟁에 멍드느니 가난한 인민들뿐이다.



5.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소설이 꼭 스토리가 있어야 하고 그럴듯한 반전이 있어야 하며 심금을 울리는 문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아니다. 그저 기회가 생겨 일 년 동안 캘리포니아와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할 기회가 생겨 5년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와, 5년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와 같이 살고 있는 현재 남자친구와 함께 사막지대에서 용설란에 총을 쏘아댄 경험,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태평양을 향해 투신하지 못한 일을 건조한 문장으로 써놓아도 소설이 된다. 신랄하게 파헤친 심리상태 하나만 가지고도.



6. 토마스 하디, <캐스터브리지의 시장>

 

 영국의 국가대표 이야기꾼 토마스 하디의 작품이면 일단 재미 하나는 보장한다. 영국 특유의 미풍양속인지 모르나 한 젊은 가장이 술김에 처자식을 5파운드 5실링 받고 낯선 남자에게 팔아넘기고는 술이 깨자 여태 살아온 세월만큼 앞으로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을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하고, 진짜 서약대로 성실하게 살아낸 결과 캐스터브리지라는 작은 도시 또는 읍 정도에서 시장/읍장을 지낸다. 이야기가 재미있어지려니까 어느 날 문득 저 먼 과거에 자신이 팔아넘긴 처자식임을 주장하는 모녀가 등장해 우여곡절이 벌어지는데, 하디의 소설은 백 번 이야기를 들어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냥 읽어봐야 안다.



7. 하인리히 뵐, <천사는 침묵했다>

 

 작가 스스로 독일 병정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패전을 경험한 인물. 그의 작품은 전후 완전히 폐허가 된 독일, 특히 자신의 고향인 쾰른 지역을 무대로 할 일도, 먹을거리도, 집도 없는 황폐한 도시, 퀭한 눈의 도시인들을 그려낸다. 생명 종種은 환경이 열악해질수록 자신의 유전자를 많이 남기고 싶어 하는 법이라 번식의 방식으로 사랑을 갈구하기도 한다. 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트라우마가 전후 폐허 시기라 뵐의 사후에 출간을 했다 하는데, 이 책이 더 와 닿는 것은 쓸쓸한 문장들이 서로 얽혀, 말 그대로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8. 레이날도 아레나스, <현란한 세상>

 

 세르바도 테레사 데 미에르라는 멕시코의 18세기 수사의 일생에 관한 소설. 멕시코의 수호성인인 과달루페 성녀 이야기가 말짱 거짓말임을 주장하다 멕시코,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미국, 쿠바 등 세상의 온갖 구석에 있는 감옥 구경은 다 해본 풍운아. 작가의 의도는 세상에 정확한 역사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하는 의문을 데 미에르 수사를 내세워 과장, 풍자, 그로테스크 등 온갖 재미난 장치를 섞어 장난스럽게 써놓은 것. 이런 건 피카레스크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좀 그런데, 그까짓 장르 구분이야 해 뭐하나, 재미있으면 장땡이지.



9. 아시아 제바르, <사랑, 판타지아>

 

 1830년 프랑스의 알제 침공으로 시작해 1962년 독립을 이룰 때까지 130여 년간 대 프랑스 해방투쟁을 기록한 책. 알제리는 부족 대표 대여섯 명이 모든 국권을 이양한다는 문서에 서명을 함으로서 유럽의 작위를 얻는 대신 나라를 통째로 들어 바치지 않았다. 한 도시, 한 도시 처절하게 함락당해 마지막 한 성城이 무너질 때까지 여자들조차 손톱으로 침략자의 심장을 후벼 파 꺼내들며 투쟁했으며, 극강의 전력을 가진 세계대전 승전국을 상대로 보잘 것 없이 무장한 채 무수한 사상자를 낸 전투를 통해 해방이란 열매를 따 냈던 것. 이런 알제리의 근대사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러면서도 작가 제바르는 바로 그 적의 언어로 문학을 해야 하는 진퇴유곡의 상황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10. 제임스 미치너, <소설>

 

 미치너가 84세 때 쓴 작품.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의 입장에서 각 일인칭 시점으로 한 편의 소설이 탄생해 그것을 평가하고 읽는 행위 또는 의미에 관해 썼는데, 기본적으로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소설을 생산하고 평가하고 읽는 방식의 변화 또는 진화에 관한 숙고라고 읽을 수 있으리라. 이리 써 놓으면 딱딱한 설명조 같지만, 천만의 말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타당한 방식으로, 그러나 당연히 모두 조금씩의 오류를 포함하면서 소설을 쓰고, 평가하고 읽는 행위가 이리도 다양할 줄이야. 정말 재미있다.



11. 이사벨 아옌데, <세피아 빛 초상>

 

 아옌데의 삼부작 가운데 시기적으로는 가장 마지막에 쓴 작품이지만, 내용으로 보면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야기. 라틴 아메리카의 대표적 이야기꾼이 전작 <운명의 딸>의 후일담을 풀어 놓았다. 무대는 샌프란시스코의 대저택과 차이나타운. 전작에서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현명한 중국인 차오 티안의 손녀 아우로라, 중국식 이름으로 리밍黎明이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실로 파란만장한 이주민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어차피 아옌데를 읽으려면 그녀의 삼부작을 모두 읽어야 마땅하니 <운명의 딸>, <세피아 빛 초상>, <영혼의 집>을 사 읽는데 인색하지 마시라.



12. 프랜크 노리스, <맥티규>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미국 판 에밀 졸라가 프랭크 노리스다. 겨우 32세에 복막염으로 짧은 생을 마감해서 아쉬운 바 작지 않다. 미국 특유의 빈부, 흑백, 지역 갈등 문제의 사실주의적 탐구는 노리스로부터 새로운 장을 맞을 뻔했다. 소위 야매 치과의사로 중산층 정도의 삶을 살기 시작한 거구의 맥티그 앞에 아름다운 아가씨와 결혼하는 행운과, 그것도 모자라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는데, 그러면 행복할 거 같지? 행운 뒤에 폭주하는 한 인간의 야성이 돌출되고, 비열한이 끔찍한 질투를 시작하여 끝내 커다란 비극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이라니. 노리스의 명이 짧았던 것이 아쉬울 지경. 다만, 하루 빨리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13. 이디스 워튼, <이선 프롬>

 

 다시는 이디스 워튼을 읽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가, 미국 문학사상 높이 평가받아야 할 네 명 가운데 하나로 꼽는 바람에 딱 한 권만 더 읽겠다고 작정해 골랐다가, 심봤다. 엄마의 오랜 병구완 끝에 집에 오게 된 먼 친척, 일곱 살 많은 지나 누나와, 어머니가 죽자마자 결혼한 후엔 덜커덕 이번엔 아내 지나가 병에 걸려, 그녀의 병구완을 위해 아내 쪽의 또 다른 사고무친의 친척, 젊은 아가씨 매티가 오게 되는데, 이런 구조에 벌써 심각한, 그러나 누구 하나 내놓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관계의 얽힘을 포함하고 있는 건 말 안 해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리 간단하게 끝나지 않으니 결국 마지막 페이지, 에필로그까지 읽어야 이 작품을 상찬하는 이유가 드러나니, 그걸 가르쳐드릴 수는 없지, 암.



14. 루쥔 작, 왕레이 정리, <여름의 기억>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 희곡이라고 하고 싶은데, 내가 워낙 아는 것이 짧아서 그게 좀 그렇다. 광저우에 돈 벌러 농장을 떠난 남편은 거기서 돈은 왕창 벌지만 젊고 예쁜 아가씨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바람에 이혼을 하고 싶다. 그러나 아내는 요령부득, 절대로 도장 못 찍어준다니 머리를 굴리기를, 젊은 사내를 농장 일꾼으로 들여서 아내와 관계를 맺는 순간 들이닥쳐 이혼을 강요하려는 꾀는 낸다. 세상 일이 자기 마음대로 돼? 그럼 그게 인생살이야? 설마 현대 연극, 희곡을 이런 내용으로만 이해하려는 건 아니겠지. 극 중 최대 전환점이 되는 검정말의 출산 장면과 이에 이어지는 인간들의 맺음이라니.



15. 디어도어 드라이저, <미국의 비극>

 

 미국이라는 나라의 비극이 아니라, 빈부와 계급의 차이가 인간의 차이로 대변되던 1910년대  미주리, 일리노어, 뉴욕 주에서 벌어진 미국 식 비극.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최고급 호텔의 보이로 취직하면서 자신도 고급 호텔을 드나드는 상류계급에 진입하겠다는 청운의 꿈을 꾸는, 몽상적이고 생각이 깊지 않고, 참을성 없고, 이기적인 잘 생긴 미남 청년이 커다란 부자가 된 큰아버지의 초대로 공장의 작은 부서장이 되면서 사건은 벌어진다. 독일인의 후예답게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마치 벽돌 탑을 올리듯 단단한 구조를 만들어 장황한 설명에 현대의 독자를 질리게 만들었을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비극>은 명작이다. 내용은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영화 <젊은이의 양지>를 참조하시면 될 듯. 이 작품 역시 새롭게 번역한 책이 어서 나왔으면 하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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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9-30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 한 권 읽은 건 없지만 저의 빈약한 독서에 큰 동기부여가 되네요. 이디스 워튼을 읽는다면 <이선 프롬>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19-09-30 12:40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주변에 대학에서 영어 선생하는 분들이 꽤 있는데, 공통점이 워튼을 상찬하더라고요. 전 <이선 프롬> 말고는 도무지 아니던데요. 아마 뭔가 있는 작가인 모양입니다. ^^;;

설해목 2019-09-30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놔~~~ 읽은 게 단 한권도 없어 혼자 퇴근길에 좌절했습니다. ㅜㅜ
그래도 한 권은 겹칠 줄 알았는데...
우선 추천해주신 책은 모두 장바구니로 고고 ^^

Falstaff 2019-09-30 22:04   좋아요 1 | URL
에휴, 설해목 님은 워낙 책을 다양하게 읽으시잖아요.
저야말로 잡독 itself 인 것을요. ^^;;
<맥티규>가 인상깊었는데요, 번역이 참 좋지 않아요.
아, 번역이 아니라 번역한 우리 말의 품질이 안 좋습니다.
다른 출판사가 다시 번역할 때까지 <미국의 비극>과 더불어 좀 기다리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slobe00 2019-09-30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치너, 아옌데, 워튼 빼고는 전부 안 읽은 책들이라 주섬주섬 담아봅니다~~~~잉고 슐체부터 읽어보고 싶네요^^
도서관 가서 책 고를 때 폴스타프 님의 추천 페이퍼 많이 참고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저는 워튼은 거의 다 재미있었고 하디가 살짝 지루했는데
캐스터브리지의 시장은 땡기네요~~^^

Falstaff 2019-09-30 22:05   좋아요 1 | URL
저도 워튼은 무지 안 좋아했어요. 근데 미치너 <소설> 속에서 아주 상찬을 하더라고요. 그래 뭔가 있겠지 싶어서 딱 한 권만 더 읽고 이 이상은 안 속는다, 셈치고 읽었더니 <이선 프롬>은 괜찮더라고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