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베스트셀러 미니북 20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소담출판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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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레스코프의 단편집 《왼손잡이》를 읽고 이이가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의 원작을 썼다는 걸 알았다. 물론 레스코프가 아니더라도 작품의 원작이라면 냉큼 사 읽었겠지만 정작 눈에 띄지 않다가 소담출판사의 옛 버전, 새 책 같은 헌 책을 발견해 얼른 읽었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과 <쌈닭> 두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문고판 포켓북.
 오페라 좋아하는 사람들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이 워낙 쇼킹해서 CD나 영상물을 듣거나 봤다하면 딱 한 번으로도 스토리를 잊기 힘들 것이라 믿는다. 내 경우엔 CD와 DVD, (유령장면과 경찰서 장면을 생략한)영화 버전 VHS 필름을 갖고 있는데, 아이고 남우세스럽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대담하게 연출한 영화 버전이 제일 좋았다. 이 오페라에 관해서는 줄리언 반스가 쓴 <시대의 소음>에 잘 언급이 되어 있다. 작곡해놓고 쇼스타코비치가 얼마나 큰 공포 속에서 움츠러든 채 살았는지, 비밀경찰이 정치범을 주로 새벽에 체포해간다는 걸 아는 작곡가가 잠옷 바람으로 연행되는 것이 싫어 밤마다 옷을 다 입고 잤다는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그 만큼 작품 자체가 소비에트 시절엔 쇼킹했다는 건데, 정작 원작을 발표한 때가 1865년, 1934년에 발표해 열광적인 찬사를 받은 오페라에 난데없이 벼락이 떨어진 것이 우습기도 하다. 평론가들은 ① 작품의 인기가 위대한 스탈린을 능가해서, ② 스탈린이 보기에 작품이 불량해서 그랬다고 주장한다. 참나, 스탈린 새끼가 알기는 쥐뿔을 알았겠는가 말이지.
 책에서는 므첸스크 출신의 여자 두 명이 각기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은 당연히 카테리나 리보브나. 시골출신 아가씨로 망아지 같이 자유롭게 살다가 근처 큰 상인, 므첸스크에서 큰 상인이라 하더라도 러시아 상인 전체 계급으로 보면 최하인 3등급 규모의 상인에 불과하지만 하여간 지역의 큰 상인의 홀아비 장남 지노비 보리스이치 이즈마일로프의 두 번째 아내로 들어가 6년차가 되던 해에 제분소를 둘러싼 둑이 무너지면서 사건이 터진다. 자유롭게 자란 카챠 입장에서 결혼을 해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잘 입으면 만사가 장땡인줄 알았는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하는 것 없이 날마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아침 먹고 낮잠 자고, 점심 먹고 또 자고, 글도 모르니 책을 읽을 수도 없고, 안다 해도 책도 없는 시골, 바람소리와 새소리, 일꾼들 일하는 소리 말고는 적막밖에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아이라도 있으면 애 키우는 재미로 세상 일 잊으며 산다지만 전처 몸에서도 아이 구경을 못했던 남편 지노비의 씨 주머니엔 쭉정이밖에 없을뿐더러 이젠 어느새 나이 오십이 넘어, 아 미치겠다, 별을 따려 해도 하늘을 봐야 따지!
 쇼스타코비치 버전에서는 제방 공사 감독하러 간 남편 때문에 젊은 며느리가 밤이면 밤마다 독수공방하는 것이 안 되어 자기라도 빈 방에 들어 며느리를 달래줄까, 흑심을 품기도 했던 시아버지 보리스 치모페이치 이스마일로프, 원작에서는 벌써 아흔 살이 넘은 완전 늙은이로 등장해 그딴 흑심 같은 건 품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쇼스타코비치가 너무 하긴 너무 했다. 아무리 사내가 짚단 한 단 들 힘만 있으면 그거 할 생각한다고 해도 아흔 살 넘어 가당키나 하겠어? 그리고 문제의 일꾼 세르게이도 딱 그 시점에 맞춰 보리스가 채용한 것이 아니라 벌써 일을 하고 있었으며, 시녀 아크시나는 초장에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사생아 한 명을 낳고 시작한다. 이런 사소한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와 거의 같으므로 이하 생략.
 다른 한 명의 므첸스크 여인은 이름을 돔나 플라토노브나. 이름이 돔나이며, 나이는 사십대 중반 가량. 한 번 결혼했지만 남편이 갑자기 숟가락 놓는 바람에 대처인 페테르부르크에 터를 잡고 방물장수 겸, 중매쟁이 겸, 뚜쟁이 즉 포주 까지 기회가 닿는 대로 악착같이 돈을 벌려 하지만, 페테르부르크가 어디 만만한 도신가, 돈을 좀 모았다 싶으면 사기 당해 쫄딱 망하고, 모았다 싶으면 또 망해버리기를 여러 차례. 그리하여 이젠 살아있는 부처, 또는 도사의 경지에 오른 여인이다.

 

돔나 플로토노브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부칭이 플라토노브나. 즉 철학자 플라톤의 따님이다. 맞지? 제아무리 플라톤의 따님이라도 청상과부로 한 생을 살려니 고생이 오죽이야 하겠나. 물론 처녀 시절부터도 므첸스크에선 나름대로 껌 좀 씹은 전력이 있었으나, 자기 한 몸 먹고 살기 위해 페테르부르크로 거처를 옮긴 후에 본격적인 ‘쌈닭’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이 쌈닭 여사가 하는 짓을 잘 보면, 비록 자기는 시골 촌년 출신의 가난뱅이라도 계급을 불문하고 세상의 불쌍한 것들을 나름대로 보살펴주려 하고, 어린 것들을 사랑하는 무뚝뚝한 친절을 자기 입장으로 보면 활수하게 베푸는 것처럼 보인다. 돔나 플라토노브나의 철학은 상대가 누가 됐던 간에, ‘일단 살고 보자.’로 귀착된다. 사는 것, 생존하기 위해 기꺼이 돈 많고 늙은 장군에게 자기 몸을 팔 수도 있다는 것이 여사님의 생존철학. 이 쉬운 밥벌이에 눈이 멀어 기어이 구렁텅이로 빠져 헤쳐 나오지 못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일단 살고 보자는데 뭐, 어떻게 더 당연한 말이 있을 수 있나. 단편 소설을 더 자세하게 소개하는 짓은 정말 싸가지 없는 일. 이쯤에서 오늘 독후감은 끄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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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11-19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서평가 이현우씨 책 <아주 사적인 독서>에 보봐리 부인 소개하면서 러시아 사실주의 소설인 이 작품도 같이 언급해서 알게 되었어요. 꼭 읽어봐야지 했는데 이렇게 폴스타프님 글 읽으니 꼭! 읽어야겠네요. 무서운 여자같은데ㅋ 그림은 귀엽네요 ㅎ

Falstaff 2019-11-19 20:19   좋아요 1 | URL
이현우 씨는 아마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을 이야기한 거 같네요. 그럼요. 러시아의 흙냄새가 물씬 풍기는 좋은 단편입니다. 줄리언 반스에 의하면(시대의 소음), 스탈린이 자기보다 인기가 더 많은 오페라로 작곡한 쇼스타코비치한테 열을 받았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당시엔 대단했을 거 같습니다.
ㅎㅎㅎ 그림은 같이 커플링된 <쌈닭>의 주인공이고요.

coolcat329 2019-11-19 2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 맞아요.^^ 그림은 <쌈닭>이군요.🤤
 
미들마치 - 완역본
조지 엘리엇 지음, 이가형 옮김 / 주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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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조지 엘리엇. 역자 이가형. 이이로 말할 거 같으면 1921년 목포 출신으로 일본 동경제국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당대’의 인재라고 해도 마땅할 것이다. 이후 목포고등학교, 전남대, 중앙대, 국민대 교수를 거친 후 2001년에 천국의 기쁨을 찾아갔다. 책 <미들마치>는 1990년 금성출판사에서 두 권짜리로 나온 것을 저작권자인 유족들의 허락 하에 주영사가 2019년 출판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 완역본이 출간되기를 말 그대로 ‘목이 빠지게’ 기다렸기 때문에 완역본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은 바로 그 순간, 생각을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냉큼 사서 읽게 되었다. 역자가 고인이 된 후 18년이 흘렀고, 번역을 해 출간을 한 것은 벌써 30년 가까이 지나, 이번이 사실상 첫 중판일 텐데, 그간의 세월을 벌충하느라 출판사 주영사 편집부에서 각고의 노력을 보태 옛 표현이나 단어 같은 것을 요즘 방식으로 바꾸었으리라고 쉽게 짐작이 간다.
 그런데, 가격이 58,000원. 10% 할인가가 52,200원.
 나처럼 조지 엘리엇에 환장을 한 독자가 아니면 선뜻 접근할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겠다. 나도 떨리는 손가락으로 구매 버튼을 클릭했음을 고백한다. 좋다. 그럴 수 있다. 이거 한 권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조지 엘리엇의 작품 가운데뿐만 아니라 영국이 유사 이래 생산해낸 최고의 '소설'작품으로 선정된 <미들마치>를 읽고 싶으면 비싸더라도 5만원이 넘는 돈을 내고, 싫으면 안 읽으면 된다. 하지만 확실한 건, 52,200원을 주고 산 독자, 더 일반적으로 이야기해서 상품의 구매자는 당.연.히, 가격에 어울리는 품질을 기대한다. 책이 아무리 1,416쪽에 이르고 무게가 돼지고기 세 근 반이 넘는 2,124그램에 달해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읽으려면 손모가지 결딴날 정도의 두께, 즉 하드웨어를 자랑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나도 출퇴근 시간에 차량 안에서 읽으려다가 하루 만에 포기했다. 손모가지는 두 번째고 팔뚝 근육이 뭉쳐 며칠 동안 불편하게 지내야 했으니. 어쨌건, 품질, 내가 말하는 품질은 책의 두께와 무게와 장정과 디자인과 글자체와 글자 크기 및 자간, 행간 간격 같은 것이 아니라 정확한, 물론 가격에 합당할 만큼의 정확한 문장으로 만들어진 우리말 <미들마치>다. 이번에 새로 완역한 것이 아니라 무려 30년 전에 번역한 작품을 ‘재벌구이’ 해 52,200원 받고 팔아먹기 위해서라면 주영사 사장과 편집부장과 편집부 직원들은 더 세밀한 작업을 했어야 한다. 특히 동음이의어로 읽을까 걱정스러워 한글 뒤에 괄호를 치고 한문으로 보충 설명을 하는 작업은 쉽게 하면 안 된다. 굳이 괄호 속 한문으로 보충하지 않아도 흐름 상 뜻을 충분이 알 수 있는 경우에, 바로 그 한문 보충, 잘못 쓴 한자 때문에 오히려 뜻을 잘못 알아들어 쓸데없이 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등 진도가 막히는 일도 있고, 아예 음가가 다른 한자를 괄호 속에 넣어 읽는 사람을 실소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원소주기율표 원자번호 15번인 인(P:燐)의 한자어가 燒냐? 燒 는 불탈 ‘소’자다. 내가 다른 한자는 몰라도 천국에 이르는 액체 ‘소주’ 할 때의 소자가 이 燒자인 건 확실하게 안다. 적절하지 않은 교정, 교열도 다른 출판사의 (비싸지만 이 책과 비교해)상대적으로 저렴한 책보다 나은 점이 없다. 1,416쪽. 본문은 1,413쪽에서 끝난다. 책 뒤에 흔한 역자 해설도 없고(역자가 죽었으니 당연한 건가?) 작품론 같은 것도 달려있지 않다. 52,200원짜리, 30년 전 번역의 ‘재벌구이’가 말이지.
 슬프다. 우리나라의 잘난 척하는 그 많은 출판사들 가운데 <미들마치>를 30년 동안 다시 완역해보겠다는 회사가 어찌 한 군데도 없었을까. 어떻게 독자로 하여금 몇 년을 목을 늘이며 기다리다 이런 책을 읽게 만들었을까.

 

 “그녀는 그를 향해, 과연 당신은 나에게 적합할 만큼 가치가 있는지 어떤지 스스로 가슴에 대고 물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당돌한 지시를 하는 게 아니라, 나야말로 커소번 씨의 아내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일까 하고 불안스레 스스로 가슴에 묻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소설의 주인공 도로시아 브룩, ‘그’는 도로시아와 앞으로 6주가 지나면 결혼하게 될 16세 연상의 약혼자이자, 국교회 신부이자, 거대한 자산을 유증 받은 부르주아, 신화학神話學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준비 중인 학자인 에드워드 커소번이다. 작품의 시간적 무대는 1829년이며,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글을 쓰는 시기는 40년 후이니까 1869년경. 19세기 초반, 아직 빅토리아 시대가 시작하기도 전이라, 여성의 큰 의무는 남자에게 복종하여 나서지 않고, 가정에서 안온한 삶을 유지할 수 있게 관리하는 일에 국한했다. 따라서 결혼을 앞두고도 위에 인용한 것처럼 여자가 남자에게 ‘당신이 내게 적합한가요?’라고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내가 저이의 아내가 될 자격이 있을까?’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 예의바르고, 종교적이고, 명예를 존중하고, 양심적이고, 이런 것을 다 합하여 (여성으로서) 시대의 정의에 충실한 도로시아 브룩 양의 태도였다.
 위의 인용문을 읽을 때까지는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했던 여류 소설가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나갔는데, 여자는 남자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말이 몇 번 더 나오니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어라, 혹시 이거 반어법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엘리엇 자신이 남자 이름인 ‘조지’라는 필명을 사용하며 당시 여성 작가들의 의식수준을 조롱한 것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고 많은 이름 가운데 여자 이름으로 ‘조지’가 뭐니, ‘조지’가?) 그러면서 이 책, 아니, 조지 엘리엇의 작품들, 그래봐야 읽어본 것이라고는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과 <다니엘 데론다> 말고는 없지만 하여간, 그 속에 초기 페미니즘, 페미니즘이랄 것까지는 없어도 젠더 차이에 관한 우열에 대해 상당할 정도의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처럼 읽혔다.
 이 책은 도로시아와 커소번 커플 외에도, 점점 쇠락해가는 기업가의 딸 로저먼드와 새로운 의술로 무장한 의사 리드게이트, 로저먼드의 남동생이자 낭비벽이 심한 프레드와 가난한 집안의 장녀 메리, 도로시아의 여동생 실리아와 미들마치의 유일한 준귀족 제임스 체텀 경, 이렇게 네 커플과 이들이 터를 잡고 사는 미들마치 시 주변의 조연들이 만들어간다. 주요 조연으로 괴팍한 성격으로 오늘 내일을 기다리며 죽음의 침상 위에서도 심술을 그치지 않는 큰 영지와 저택과 막대한 현금의 소유자 피터 페더스톤, 신실하지만 생계를 위해서 자그마한 카드 판에서 안면몰수하고 돈을 따내 생활에 보태는 따뜻한 마음씨의 페어브라더 신부, 부유한 은행가이자 작품의 큰 변곡점을 마련하는 불운한 과거의 소유자 벌스트로드 씨, 그리고 처음엔 초라했으나 나중엔 창대해지는 레이디슬로 씨가 등장해 도로시아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거의 모든 작품 속에서는, 특히 그것이 19세기 것이라면, 결혼과 동시에 ‘이들은 여생을 함께 행복하게 살았대요.’로 끝나겠지만, 조지 엘리엇은 이 의견에 관해 얄짤없이 냉소를 보낸다. 스스로 유부남과 사실혼 관계를 수십 년간 이어와서 그런지 몰라도 <미들마치>는 초장에 주인공인 도로시아가 두 명의 훌륭한 남편감으로부터 청혼을 받고 그중 하나를 골라 결혼해버리게 만들고, 조금 있다가 미들마치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가운데 한 명인 로저먼드와 유능한 의사 리드게이트도 충동적인 결혼에 골인 시킨 다음, 조지 엘리엇은 음흉한 미소를 입가에 띈 채 수백 페이지에 걸쳐 결혼이란 것이 얼마나 지독한 고통과 속박과 투쟁인지 리얼하게 묘사하기에 이른다. 엘리엇이 여성이라고 해서 이런 묘사들이 여성 위주로 되어 있지는 않다. 악당 역은 항상 타인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학자이자 신부인 커소번 씨와 미모에 관한 한 이견이 있을 수 없는 로저먼드, 이들의 이면에 감추어진 위선과 악의와 증오(커소번), 허위와 허례와 철없음(로저먼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상대 배우자들의 심적 갈등이 점차 악화되는 것까지. 조지 엘리엇의 소설 속에서 삶은 삶 그대로다. 사랑은? 사랑도 삶이다. 사랑을 위해서는 무엇인가 하나 이상을 반대급부로 희생시켜야 하는 것. 만일 지금이 19세기였다면 나는 <미들마치>를 지금보다는 훨씬 더 열광하면서 읽었을 것이 분명하다.
 워낙 긴 작품이고, 번역문이 30년 넘은 오래된 문장이라 읽어나가는데 속도가 붙지 않는다. 이틀 읽어 400 페이지 좀 넘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시나? 아하, 아직도 천 페이지가 남았네. 힘들여 800 페이지 까지 읽고는? 아직도 600 페이지 남았어. 원래 내가 두꺼운 책을 좋아하지만, 이 책은 해도 너무했다. 꼬박 엿새 걸렸다. 근데 스토리가 재미있어 번역문에 익숙하게 되는 시점부터는 훌훌 잘 넘어가기는 한다. 읽어보시든지 마시든지 알아서 하시라. 10% 할인 가격이 52,200원임을 감안하셔서.

 

(표지의 붉은 부분은, 놀랍게도, 아니 아니, 일반적이지 않게도 광고용 '띠지'가 아니라 표지가 원래 그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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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1-1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책값은 많이 들어간 종이 때문인지
어쩐지 ㅇㅇㅇ 비싸네요.

그리고 번역은 새로 하지 않고 예전에
번역을 우리다니... 한국 출판계의 고질
적인 병폐라고 생각합니다.

후덜덜한 분량 때문에 도전할 생각조차
못하겠네요.

Falstaff 2019-11-18 12:06   좋아요 0 | URL
하긴 조지 엘리엇의 다른 번역물인 <다니엘 데론다>는 무려 네 권으로 분리해놓아서 10% 할인가가 84,000원에 달하기도 합니다만, 그건 새 번역이기라도 하지요.

slobe00 2019-11-19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벽돌책 좋아하지만 이 책은 절대로 누워서는 못 볼 두께였어요. 뚜벅이가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힘든 거대사이즈라 장바구니 담아뒀는데.. 에공 언젠가 새로운 번역 완역본이 나오기는 할까요?
서양 독서에세이류에 엄청 자주 등장해서 오랫동안 궁금했던 책인데(이 책과 픽윅 페이퍼스요..) 뭔가 참 아쉽기 그지없네요..

Falstaff 2019-11-19 09:00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 배낭 매고 가세요. ^^;;
제가 알던 유명 역자가 우리나라 유수의 출판사에 이 책의 번역을 제안했답니다. 근데 거절당했다네요. 시장성이 없다고 보는 모양입니다. 제가 읽기로는 심지어 제인 오스틴보다 좋고, 브론테 자매들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시야를 펼치는 책이고 작가인데, 암만해도 길이 때문에 출판을 망설이는 모양입니다.

coolcat329 2019-11-1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제목만 들어봤는데 정말 엄청난 양의 책이네요. 저도 영국인지 미국인지 어떤 서평가가 이 작품 호평하는 글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제대로 된 새 번역이 나오면 좋겠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19-11-19 20:18   좋아요 1 | URL
당분간은 번역 출판이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이런 책은 역시 도서관 이용이 아주 딱입니다.
엘리엇의 다른 역작 <다니엘 데론다> 역시 도서관 이용을 추천합니다. ^^

slobe00 2019-11-23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신 애덤 비드를 샀어요. 언젠가는 좋은 번역으로 미들마치 읽고프네요~

Falstaff 2019-11-24 10:40   좋아요 0 | URL
아, 그 책 사셨군요. 현대문화하고 나남 가운데 어느 책인지 궁금합니다.
미리보기를 하면 두 역자의 우리말 표현 방식이 재미있게 달라서 말입니다.
서평 기다리겠습니다. ^^
 
시집보내다
오탁번 지음 / 문학수첩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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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절 문학의 천재를 자랑하던 청년이 이제 노인이 됐다. 재학 중 동화를 써서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로 중앙일보 신춘문예, 졸업한 다음 해에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함으로써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당대 고려대 문과대학의 자랑이었다고 한다. 이이가 모교 국어교육과 교수를 할 때, 시험 바로 전 강의시간에, 시험문제에 (어느 시에 구절이 있다고 들었는데 잊었다.) 은사시나무 잎을 첨부하시오, 라는 것을 낼 테니 가로수로 천지에 널려있는 은사시나무 잎 한 장하고 셀로판테이프를 가지고 오라고 지시를 했단다. 그리고 정말로 시험문제로 냈단다. 딱 두 문제 가운데 하나. 나머지 하나는, 오늘 아침 등굣길의 한 장면을 세밀 묘사하시오, 라던가 아니던가. 문과대가 아니라 사범대 시험문제로. 이이가 1978년부터 장장 30년 동안 모교 교수를 해자시고 은퇴해 몽땅 빠져버린 이 대신에 달그락거리는 틀니를 낀 채로 고향인 충청북도 제천시 소재 천등산 박달재 인근 초등학교 폐교를 하나 사 이름을 ‘원서헌’이라 짓고 촌스럽게 오탁번 문학관 비슷하게 만들었단다. 이이의 수업을 듣기 위해 다른 과 학생들은 물론이고 다른 학교 학생들까지 청강생이 넘쳐흘렀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횡행하기도 했으며, 특히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무지 좋았다. 이건 사실이다.
 젊었을 때 이이의 시를 읽어봤다. 무수하게 널린 시 가운데 그냥 한 무더기를 이룬 정도의 감흥. 역시 신춘문예 당선의 영광은 달에서 내려온 (사람크기의)거대한 몸집의 토끼 아홉 마리가 지하의 회의실에서, 토의를 거치는 대신 제비뽑기로 결정한다는 김희선의 선언(단편 <18인의 노인들>을 참조하시라)이 맞는 것도 같다, 는 정도의 감흥. 그 후로 이이의 시는 젖혀두고 소설, 주로 단편소설을 읽었는데 소설집 <새와 십자가>, <저녁연기>는 그의 시(물론 그가 쓴 시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겠지만)와 달리 간결하고 차분하며 정갈한 감정이 참 좋았다. 그 후 단편집 <겨울의 꿈을 날줄 모른다>를 읽었고 벌써 삼십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정말 세월 빠르다. 하여간 오탁번의 시집 《시집보내다》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그저 옛 추억의 자국을 떠올리며 선택해 읽었다. 그리고 대박.
 나이를 들어 이제 “맘대로 해도 / 법을 안 어기는 / 뉘엿뉘엿 어스름”이 되면 그동안 시간의 마모 속에서 많은 노 시인들은 주변의 작은 것을 돌보며 젊은 시절엔 차마 알아채지 못한 자질구레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같다. 오탁번도 마찬가지다. 시집의 처음을 여는 시로 <비백飛白>을 택해 그는,


 간밤에 잣눈 내리고
 아침 수은주가 영하 25도까지 내려갔다
 만년필 촉의 비유를 쓴
 젊은 날의 내가
 나 같지 않다


 맘대로 해도
 법을 안 어기는
 뉘엿뉘엿 어스름에
 지팡이 그림자만
 산 넘어간다


 이냥저냥
 희끗희끗
 비백체飛白体로 몸을 떠는 소나무가
 춥다     (부분)


 고 노래한다. 정확한 뜻을 모르고 읽어도 독자는 시인의 마음과 눈 내리는 날의 정경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잣눈”이 뭐야? “한 자 깊이가 될 정도로 많이 쌓인 눈”이란 뜻으로 한자어로 척설尺雪이라고 한단다. 그럼 비백체는? 한문의 서체다. 서체라는 건 아는데, 어떤 글씨가 비백체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네이버 이미지 검색을 해 글씨 하나를 건졌다. 소나무가 어떻게 몸을 떠는지 글씨를 보고 한 번 상상해보자.

 

 

 이런 시인의 작품들을 감상할 때,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즉시 사전을 찾아보는 것도 시를 읽는 자잘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이런 시도 재미있다.



 우탄치



 애련2리愛蓮2里의 본디이름은 한치다 봉양면 공전리로 넘어가는 큰 고개 자구니재, 대치大峙가 있는 동네이다 한치 윗동네는 윗 한치인데 다들 우탄치라고 한다 우탄치, 우탄치, 혀를 굴리다보면 아득한 몽골 초원으로 쑥 들어서는 것 같다


 자구니재로 넘어가던 옛길이 이젠 우탄치에서 끊겼다 따비밭 감자 농사는 아예 멧돼지 고라니가 반나마 먼저 잡수신다 산속 명당에서 주무시던 조상님들도 멧돼지 등쌀에 한길 쪽으로 나앉아 자손들 성묫길 기다린다


 겨울밤 화투를 치다가 동치미에 국수 말아먹고 바라보는 우탄치의 밤하늘은 캄캄한 몽골의 초원 같다 송아지 낳는 암소의 울음이 꼭 마두금 소리처럼 애처롭다 산 너머 들리는 기적 소리도 우탄치 우탄치 목이 쉰다


 이게 전문인데 잠깐 드는 의문은 도대체 2연은 왜 넣었을까, 하는 점. ‘윗 한치’가 ‘우탄치’가 되고, 다시 아득한 몽골 초원으로 확장이 되다가 2연으로 넘어가면 갑자기 멧돼지 고라니가 거덜을 낸 감자밭과 조상님 산소가 등장한다. 그건 옛길이 끊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3연에 다시 옛 먼먼 시간을 되돌려 밤새 화투를 치고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더니 다시 마두금 소리가 애처로이 들리는 몽골 벌판의 목소리로 우탄치, 우탄치 기적 소리로 울고 있단다.
 시를 읽다가 눈물이 질금질금 나게 웃는 일은 정말 오랜만의 경험이다. 이정록의 시집 《정말》을 읽은 후 처음이다. 시집의 2부 첫 작품 <시인과 소설가>에 나오는 장면인데, 같이 한 번 읽어보자.



 어느 날 거나하게 취한 김동리가
 서정주를 찾아가서
 시를 한 편 썼다고 했다
 시인은 뱁새눈을 뜨고 쳐다봤다
 ― 어디 한번 보세나
 김동리는 적어오진 않았다면서
 한번 읊어보겠다고 했다
 시인은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
 다 읊기도 전에
 시인은 무릎을 탁 쳤다
 ― 기가 막힌다! 절창이네그랴!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운단 말이제?
 소설가가 헛기침을 했다
 ―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이라네!
 시인은 마늘쫑처럼 꼬부장하니 웃었다
 ― 꼬집히면 벙어리도 운다고?
   예끼! 이 사람! 소설이나 쓰소
 대추알처럼 취한 소설가가
 상고머리를 갸우뚱했다
 ― 와? 시가 안 됐노?  (부분)



 오탁번이 김동리를 모셨던 바가 각별했던 모양이다. 시집엔 김동리에 관한 일화가 하나 더 있다. 김동리가 상처하고 소설가 서영은과 재혼을 했는데 이를 두고 시중잡배들 사이에 말이 많았다.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신기하게 나도 이번에 서영은의 작품을 읽으려고 한 권 골라놓은 참이라 읽기 바로 전에 이런 시를 읊게 됐다. 이런 우연이라니. 김동리와 서영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같이 읽어보자.



 할까?


 뜰에 활짝 핀 목백일홍이
 닭벼슬처럼 빛나는 오후
 낮달보다 더 하얀 화선지에
 귀거래사歸去來辭가 휘날렸다
 혼자서 큰 집 보는 아이처럼
 심심해진 서영은이
 동리의 허리를 안으며 속삭였다
 ― 서방님
 그는 벼루에 붓을 놓았다
 ― 하고 싶나? 할까?
 그 순간 서영은은
 이 세상 하나뿐인
 절세絶世의 시인이 되었다


 웃기지? 서른 살 차이나 나는 부부의 광경을 생각하면 김동리와 서영은이 만드는 귀여운 정경이 떠올라 내 입 꼬리도 잔잔하게 올라간다. 저절로.
 시인이 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에 조지훈이 교수로 있었다. 이때 영문과에 다니던 오탁번도 국문과 교실에 들어가 조지훈 강의 깨나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지훈유감>이란 시에서 조지훈의 색다른 면모를 소개하기도 한다.


 한 학기에 잘해야
 예닐곱 번 강의실에 들어오는 지훈이
 어느 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 내가 왜 조지훈인지 알아?
 학생들이 암말도 안 하면
 그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 조지 훈훈해서 조지훈이야!  (부분)


 요새 시인도 시는 이렇게 썼으면 좋겠다. 쉽고 그림이 그려지며, 간결하게. 간결하다는 건 짧다는 뜻이 아니라 시의 길이도 포함해 내용도 간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이제 시가 더 이상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그래도 이제 아프고, 피를 토하고, 외롭고, 울고, 벽에 막히고, 자해하는 시들을 읽기에, 나는 피곤하다. 오탁번의 시들을 읽어보시라. 세상에는 여전히 작고, 예쁘고, 자붓자붓하고, 되똥거리는 무수한 것들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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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 이야기 을유세계문학전집 66
스노리 스툴루손 지음, 이민용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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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0년대에 아이슬란드의 시인이 쓴 북유럽 신화. 13세기, 지금부터 무려 800백 년 전이면 벌써 209대 교황이 다스리던 유럽이라서 이 <에다 이야기>의 프롤로그엔 엉뚱하게도 기독교, 이슬람교를 비롯한 서아시아 종교의 원형이 먼저 등장한다. 즉 전지전능한 신이 있어서 하늘과 땅, 기타 등등을 ‘창조’했고 맨 나중에 두 인간, 아담과 이브를 만들어 후손들이 세상에 퍼졌다고 서두를 깔아둔다. 이어 대홍수, 주정뱅이 노아가 만든 방주 등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 왜냐하면, 교황이 두 눈 부릅뜨고 있는 환경에서 아무리 유럽의 변두리 아이슬란드라 하더라도 함부로 새로운 천지창조 이야기를 거론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것이 진리이지만, 북쪽 저 미개한 종족들이 사는 곳엔 한 시절에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라고 기름칠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겠다.
 실제로 처음엔 ‘오딘’이란 인물을 트로이의 마지막 임금 프리아모스의 딸이 낳은 후손으로 트로이가 멸망한 다음에 세상 곳곳을 떠돌다가 저 세상의 끝, 지금의 스웨덴 지역에 터를 잡고 왕을 해먹은 작자이며, 심지어 ‘토르’의 후손으로 설정을 해놓았다. 이렇게 밑밥을 깔아놓은 다음에야 기독교 대륙 유럽에서 <에다 이야기>의 본문을 써내려갈 수 있었으니, 역시 인간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뭐라고? 그렇다. 이데올로기. 그중에서? 맞다. 종교 이데올로기. 수천만의 인간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몰살할 수 있는 힘을 종교 이데올로기가 쥐고 있다. 기독교뿐만 아니다. 이슬람, 힌두, 불교(인도의 아소카 왕을 보시라), 수많은 사화士禍를 만들어낸 철학으로서의 유교까지 다 마찬가지다. 그러니 맞지? 종교는 명백하게 인류의 아편인 것이.
 본문은 스웨덴 지역을 다스리는 현명하고 마술에 능통한 귈피 왕이 ‘강글레리’라는 이름으로 여행을 다니다가 모종의 숙박지에서 지혜로운 세 명의 임금, 하르(높으신 분), 야픈하르(똑같이 높으신 분), 트리디(셋째 분)을 만나, 강글레리가 묻고, 세 명의 임금이 답을 하는 식으로 1부 “궐피의 홀림”을 구성했고, 2부는 궁정시인 또는 음유시인과 같은 말인 ‘스칼드’인, 역시 마법에 능통한 ‘에기르’가 여행을 떠나 ‘브라기’라는 남자를 만나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정리한 것으로 만들었다. 왜? 자기 이야기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천지창조와 잡신들에 관한 전설임을 신정사회에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 천지창조 이야기는 세상 어디서나 비슷할 거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고, 공통점이 하나 있으니 허황하다는 거.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각각 맡은 일(선동자, 통치자, 많은 것을 아는 자, 색칠한 방패를 든 자, 상의 신 혹은 보호자, 날씨의 신, 거세한 말 등등)이 있었던 열두 신이 있었다고 한다. 세상이 본격적으로 생기기도 전에 니플헤임이란 도시가 생겼고 니플헤임, 이름이 ‘젖꼭지 도시’라서 그런지 도시의 가운데에 샘이 있어서 거기서 여러 강이 발원을 했다고 하는데 항상 불꽃이 너울거려 아무나 살 수 없었다고 하니 그냥 특별한 정령이 살고 있었다고 감안을 하자. 여기서 발원한 강에서 독을 품은 거품이 흐르고 불꽃 속에서 타르 찌꺼기 등이 엉겨 단단하게 굳었었는데, 날씨가 추운 북국이라 독성을 띤 이슬비가 내리더니 얼어 서리로 변해 세상을 하얗게 뒤덮어 버렸단다. 여기에 멀리서 불꽃과 불덩이가 날아왔다고 하니 화산폭발이라도 했는지 모르겠는데, 덕분에 뜨거운 바람이 불었고 서리가 이슬이 되고, 물방울이 되고, 물방울이 모인 거품 속에서 남자의 몸을 한 거대한 생명체가 하나 나와 거인의 이름을 ‘위미르’라고 했단다. 위미르의 왼쪽 팔에서 남녀가 하나씩 태어나고, 한쪽 발이 다른 쪽 발과 어울려 또 아들을 하나 낳았다는데, 발이 교차한 것으로 봐서 생식행위의 은유가 아닌가 싶다. 여기에 서리가 녹아 이슬이 되고 여기서 또 한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 태초의 암소 ‘아우둠라’이고, 아우둠라가 서리 낀 얼음덩어리를 핥아 먹고는 삼일 만에 ‘부리’라는 남자가 탄생해 ‘보르’라는 아들을 두었고, 보르는 거인족 베스틀라를 아내로 맞아 아들 셋을 낳아 첫째가 오딘, 둘째는 빌리, 셋째가 베였단다. 이렇게 신족은 거인족의 돌연변이로 태어난 것이란다. 저 위에 서두에서 말한 거하고 또 다르다. 이런 거 자꾸 따지면 신화는 못 읽는다. 그런가보다 하자.
 이 보르의 아들들이 최초의 거인 위미르를 죽였다. 세 아들들은 암소가 소금기 있는 얼음을 핥아 생긴 부리의 자손이니 자기의 직계 조상을 죽인 건 아니고, 하여튼 그렇게 됐는데, 이때 위미르가 흘린 피가 바다와 호수, 강이 됐고, 살은 대지, 뼈는 산맥을 만들었다. 이빨과 어금니 부서진 잡뼈들은 바위와 자갈로 되었다니 진짜 거인은 거인인가 보다. 볼테르가 쓴 <미크로메가스>에서 나오는 거인 아니었는지 몰라?
 이런 거 말고도 여러 전설, 신화, 주로 오딘(보탄)을 비롯한 신들, 착한 신뿐만 아니라 ‘로키’라는 이름의 중상모략, 음모, 모든 신과 인간의 치욕을 대표하는 신과 기어이 신들의 몰락을 가져오는 로키가 낳은 세 명의 괴물 이야기까지 재미있게 얘기하느라 고생은 하는데, 13세기 초, 지금부터 800년 전이면 넋을 잃고 읽었겠지만 세월이 흘러도 너무 흘러 흥미로웠다는 뻔한 거짓말은 도무지 하지 못하겠다. 

 다만 하나 관심을 끄는 것은, 십 수 년 전에 읽었던 <니벨룽겐의 노래>가 지극히 인간들 중심으로 되어 있어서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와 비슷하지만 연결고리가 약한 것이 의아했었는데, 이 책의 2부 뒤편에 나오는 ‘금gold - 수달의 배상금, 안드바리의 보물’부터 전개되는 이야기가 <니벨룽겐의 반지>와 거의 유사하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오딘, 로키, 회니르가 세상 탐방을 가 강가에 이르렀을 때 수달 한 마리가 연어를 잡아 막 먹으려고 하는 것을 로키가 돌을 던져 수달을 죽이고 연어까지 몽땅 차지했던 것. 그것들을 들고 한 농가에 들러 구워 먹으려 했더니, 흑마법에 능통한 집주인이 말하기를 수달이 자기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래 수달 가죽 속을 완전히 금으로 메우고 겉가죽도 보이지 않게 금으로 싸 돌려주면 죄를 용서해주겠다고 한다. 그래서 오딘은 물 속 바위틈에 살던 난쟁이에게 가 마지막 남은 조그만 금반지 하나까지 몽땅 내놓으라고 명령을 했고, 딱 하나 남은 반지까지 빼앗긴 난쟁이는 반지를 소유하는 이는 반드시 죽게 될 거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이렇게 시작해 저 뒤에 브륀힐트와 그룬힐트의 알력, 벨제와 지그문트, 지그프리트까지 이름만 조금 다르고 이하 거의 내용이 같으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말이지. 그러나 이야기가 아주 요약되어 있어 아무리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좋아한다 해도 추천은 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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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열전 동서문화사 월드북 177
김영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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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세다 대학 중문과를 수학하고 홍익대, 충남대 교수를 역임했다고 하는 김영수가 역해를 했다. 역해譯解. 번역하여 쉽게 풀이함. 독자는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 적어도 역자가 어떤 책을 번역했는지 원본 텍스트는 알아야 한다. 나는 김영수가 역해했다고 하고, 동서문화사가 저작권법 부칙 4조에 의하여 적법하게 자신들의 저작권을 주장하는 이 책을 읽었는데도 이게 김영수가 여러 책을 읽고 춘추전국시대의 영웅들에 관하여 정리를 한 것인지, 어느 한 텍스트를 말 그대로 번역해서 쉽게 풀이한 책인지, 모르겠다. 실제로 <죽서기년>, <사기열전>, <춘추좌씨전>에서 각 등장인물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비교하며 이들의 차이점을 통해 출생이나 가문 등을 추리한 내용이 여러 번 나오기도 하는데, 이런 사서들의 비교를 자칫하면 역해자인 김영수가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역해자를 폄훼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지만, 와세다 대학의 역사과가 아닌 중문과를, 졸업도 아니고 수료한 정도의 가방끈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일본어 실력이 출중한 역해자가 중국인이 쓴 중국어 책 대신, 일본인이 쓴 일본 책을 번역했을 수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왜 원본을 밝히지 않았는지 안타깝다. (난 도대체 어떤 책을 읽은 거야?) 말 그대로 열전. 사마천에서 시작한 기전체 역사서의 열전. 열전의 공통점은 재미있다는 거. 춘추전국시대에 맹활약을 했던 마흔여섯 명의 영웅들이 자신의 천재를 발휘한 요약집summary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옛날 주나라에서는 하늘을 나는 용의 침을 궤에 넣어 보관해 (은나라도 아니고 하나라 시절부터 수백 년 간)전해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 판도라의 상자처럼 궤가 열리더니 배리배리한 냄새가 나는 용의 침이 오물오물거리다가 용과 같은 종류의 파충류, 즉 검정 도마뱀 비슷한 조그마한 운동체로 변해 쪼르르 달려가서 한 열 살 먹었을까 하는 궁녀의 치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거였다. 그때부터 아직 초경도 하지 않은 어린 소녀가 난데없이 임신의 기미가 보이기를 무려 사십 년. 그러다 기어이 어느 날 진통 끝에 경국지색, 한 번 보기만 해도 온몸이 뻣뻣해질 정도의 계집아이를 생산했다. 기원전 790년경에도 이미 하늘의 용으로부터 수태고지를 받고 동정녀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온 인간이 있었다는 말씀. 하여간 이제 다 늙어 아이 엄마가 된 예전의 궁녀는 살기 힘들어 그랬는지, 다 늙은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게 쪽팔려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이 아이를 내다 버렸고, 그걸 포褒나라 사람이 거두어 키우다가, 죽은 다음에 유왕幽王이라고 불릴 주나라 임금에게 갖다 바쳐 대가로 받은 돈으로 팔자를 고쳤다고 하는데, 그 돈으로 정말 팔자를 고쳤는지 자식들 간의 유산 싸움으로 다 거덜이 났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이리하여 유왕의 애첩이 된 포나라 여인 포사가 너무, 진짜로 너무 아름다운지라 바라만 보고 있어도 해 저무는지 몰랐던 유왕이 참으로 통탄할만했던 일은, 이 아이가 도대체 웃지를 않는다는 거. 궁정광대를 불러도, 음유시인을 초빙해 와도 결코 웃는 법이 없던 용의 딸이 어느 날 하루 유왕하고 같이 앉아 있었는데 심부름을 하던 한 궁녀가 지나가면서 자기의 비단 치마가 의자 모서리에 걸려 찍, 찢어졌고, 이 비단 찢는 소리를 들은 포사가 그만, 배시시, 웃었으며, 경국지색의 포사가 배시시 웃는 것을 보고 유왕은 너무 좋아 속옷에 찔끔, 미량의 전립선액을 사정해버렸다는 거 아닌가. 이때 나온 말이 “자지러지다.” 뭐 아니면 말고. 이때부터 유왕은 시도 때도 없이 비단을 대령시켜 포사가 보는 앞에서 찌직, 그 비싼 옷감을 찢어대고 이때마다 포사가 배시시 웃는 걸 보고, 그때마다 또 찌직, 미량의 사정을 해대는 바람에, 주나라 왕실의 비단이 나마나지를 않았는데, 당시엔 비단이 돈과 유사한 거래의 수단으로 포사의 배시시한 웃음 때문에 국고가 거덜이 나고 있던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북쪽의 오랑캐가 침략해온다는 봉화가 울려 각 제후국에서 군마를 이끌고 도성으로 몰려오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이 가득 몰려왔다가 봉화 지키는 병사들 몇이 라면 끓여먹다가 불이 옮겨 붙은 실화失火사건에 불과한 것을 알고는 김이 새서 한숨을 푹 쉬는 장면을 누각에서 내려다보던 포사가 이번엔 단순호치丹脣皓齒, 즉 붉은 입술과 진주같은 흰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으며, 어느 때보다 활짝 웃는 포사가 또 얼마나 어여쁜지 이번에 유왕은 그냥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래 포사의 활짝 핀 웃음꽃을 위해 시시때때로 거짓 봉화를 올리기를 몇 차례. 이제 제후국에선 봉화가 아무리 올라도 그저 콧방귀만 픽, 뀌고는 말게 되고, 바로 이때를 도모해 진짜 북방 오랑캐가 쳐들어와 기원전 771년에 유왕을 붙잡아 몸에서 힘줄을 빼버리고 죽을 때까지 남문에 걸어두었으며(이 사형 문화가 서쪽으로 넘어가 십자가 형刑이 됐다지 아마?), 포사는 믿거나 말거나, 백여우로 변신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여태까지 쓴 건 이 책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구라도 아니고, <사기>를 포함한 여러 책에서 나온 걸 참고로 내가 각색한 어지간한 진실이다.) 이건 몇 백 년에 걸친 전설이다. 사실은 유왕이 왕세자를 폐하고 포사가 낳은 아들을 새로이 세자로 봉하려 하는데다가, 주위를 아첨에 능숙한 신하로 채우는 동시에 국정에 관심을 쏟지 않아 불만을 품은 제후국 몇몇이 떼로 몰려와 나라를 뒤엎어버렸다는 것이 <춘추전국열전>의 기반이다. 그리하여 나라가 멸망했으나 그대로 둘 수 없어 뜻있는 자들이 낙읍으로 수도를 옮겨 다시 주나라를 세워, 이 전 시대를 서주, 이때부터를 동주로 나누었으며, 동주시대부터는 말로만 봉건 주나라시절이지 진나라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는 그저 대륙의 바지사장 구실에 그칠 뿐이었다. 주나라의 바지사장 시절. 이때를 사학자들은 춘추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춘추시대가 열림으로 해서 이제 대륙은 수십 개의 작은 나라로 분할이 된 상태. 이 가운데 가장 힘이 센 몇을 고르라면, 당연히 두 개의 진나라. 하나는 결국에 중국을 통일하는 진秦나라요, 다른 하나는 위魏, 조趙, 한韓, 이렇게 세 개의 작은 나라로 쪼개질 운명의 진晉나라, 장왕莊王 시절에 전국의 패권을 지배했던 초楚나라 정도이며, 진晉이 위, 초, 한. 세 개의 나라로 찢어져 물론 아주 작은 몇 개의 나라를 제외하고 연燕, 조趙, 제齊, 초楚, 위魏, 한韓, 진秦, 이렇게 일곱 나라가 합종과 연횡으로 이합집산을 하던 때를 전국시대로 구분한다.
 이 시절이 역설적으로 중국 문화가 탄생하고 가장 활발하게 발전한 시기였다는 건 다들 아는 상식이고, 그에 못지않게 재미있는 일화와 사자성어가 숱하게 쏟아지던 때라서 꼭 역사책을 읽는다는 생각이 아니더라도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책을 보는 기분으로 읽어도 참 괜찮은데, 여기에 더불어 진짜 실존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인지라 실감나는 교훈까지 얻을 수 있다. 다만 조금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춘추시대는 그렇다 치고, 적어도 전국시대 일곱 나라 연燕, 조趙, 제齊, 초楚, 위魏, 한韓, 진秦이 당시에 어떤 지역에 있었는지는 알고 읽는 것이 좋다. 일곱 나라를 저런 순서로 쓴 건 전국의 합종연횡과 관련한 이유가 있어서이며, 나도 이 순서로 외우고 있다. 여기다 춘추시대 진晉나라가 조, 위, 한 이렇게 세 나라였다는 걸 알고 읽으면, 가장 잘 팔리는 사마천, 민음사에서 나온 김원중 역의 <사기 세가>의 오류까지 쉽게 발견할 수도 있으니 그냥 참고나 하시라는 뜻에서.
 나는 언제나 전국시대 조나라의 젊은 인상여와 노장 염파 사이의 알력과 화해에 이은 문경지교刎頸之交, 목숨을 걸고 지켜나가는 우정에 대단히 감동을 받는다. 국가에 충성? 나는 그건 모르겠고, 두 훌륭한 인격이 만드는 아름다운 그림 때문에. 어떤 영웅들인지는 직접 확인하시라. 근데 이 책을 읽느니, 사기열전이 더 낫지 않을까? 그건 적어도 누가 쓴 어떤 책을 번역했는지는 아니까 말이지. 그냥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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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9-11-12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사 이야기 참 오랜만입니다. 동주 열국지 제일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쑥대 전통과 뽕나무 화살 이야기로, 그 파란만장 백화만발 춘추전국 열국의 이야기의 시초가 바로 경국지색 포사아닙니까ㅎㅎㅎㅎ

Falstaff 2019-11-12 20:15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전 동주열국지는 읽어보지 못했습니다만 그 책도 재미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