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의 책
알베르 코엔 지음, 조광희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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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우리나라 출판사들에게 진심으로 바라는 건, 어느 출판사가 됐든 알베르 코엔의 유대인 4부작 가운데 <솔랄>, <망주클루>, <용감한 형제들>을 번역 출판해주었으면 하는 일이다. 사부작의 세 번째 작품 <주군의 여인>은 창비가 번역해 내놓았다. 그 책을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내 어머니의 책>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이 책을 코엔이 썼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 서슴없이 구입했다. 서재친구들은 다 아시리라. 내가 이미 죽은 부모를 내세워 감성팔이 하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 코엔의 유려하면서도 장황한 문장을 읽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도무지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의 내용과 부록으로 달린 작가 연보를 보면, 코엔은 1895년 그리스 코르푸 섬에서 출생한다. 유럽의 반유대주의 사상은 20세기 초중반 독일의 나치들에 의하여 새로이 개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유구한 전통을 이루던 것이 이 때에 돌이킬 수없이 공고화되어 버린 거다. 하여간 그리스에서도 반유대주의가 점차 고조되자 코엔 가족은 말 그대로 남부여대하여 프랑스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면서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유로 이주하고, 아리안 족 한 명에게 거의 전 재산을 사기당하고 만다. 이런 여파에도 유대인의 전통 가운데 자식 교육 하나는 똑바로 시키라는 항목을 준수하여 부모는 알베르를 수녀원 부속학교에 입학시킨다. 알베르가 점점 자라 스무 살이 되자 쥬네브로 유학을 가고, 거기서 스물네 살이 되던 해에 스위스 국적을 취득한다. 이후 책에서 아버지의 자취는 사라져버리고 오직 어머니 한 명만 남는다. 알베르는 <주군의 여인>에서 주군, 즉 솔랄처럼 스위스에 있는 국제연맹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를 어머니가 보기에 자기 아들이 모든 나라가 참여하고 있는 세계제일의 기관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여름만 되면 몇 주 동안 마르세유에서 쥬네브로 알베르의 거처를 방문하는 엄마. 그러다 세월이 더 지나면 알베르는 런던으로 파견을 가게 되고, 이때 2차 세계대전이 터져 엄마는 마르세유에 남아, 독일군에 의한 마르세유 유대인 가스 박멸작업이 시작되기 두 주 전에 생을 마감한다. 알베르 코엔은 저 멀리서 땅에 묻힌 어머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가슴 위에 무거운 대리석을 올려놓아 절대로 땅을 뚫고 다시 살아날 수 없게 단단하고 찬 땅에 굳어버린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어머니와 함께 지낸 유년시대, 소년시대, 쥬네브 시대를 떠올리며 통한의 마지막 편지를 1943년과 44년에 걸쳐 연재를 한다. 우리는 이럴 때 뭐라고 한다고? 그렇다. 내 신조이기도 하다.
 “있을 때 잘하지.”
 코엔 역시 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가서 세상의 모든 아들들에게 절절한 감정으로 제발 있을 때 잘하라고 호소하지만, 절대로 그들이 진짜 있을 때 잘하리라고 기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정도면 그림이 훤하게 그려지시지, 어떤 책인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이 책의 내용은 결코 기대하지 않고 샀다. 코엔의 유려한 만연체 문장을 읽어보기 위한 목적 하나, 그것이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떻기에 그럴까 궁금하신 분은 이 책을 읽기 전에 <주군의 여인>부터, 길어서 읽어치우기 좀 버거운 작품이지만 <주군의 여인>을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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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이야기
폴린 레아주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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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느 세실 데클로스라는 프랑스 소설가가 있었는데, 주로 ‘도미니크 오리’라는 가명으로 소설을 쓰다가 1954년에 ‘폴린 레아주’라고 다른 가명으로 발표한 작품. 1954년. 프랑스 문학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폴린 에라주라는 여성이 발표한 <O 이야기> 하나로 발칵 뒤집혀진다. 왜냐하면 정말로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여태 살면서 야한 작품 깨나 읽어본 내가 읽어도 쇼킹할 정도의 외설적 표현과 가학과 피학적 성도착 장면을 시종여일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작품으로 폴린 레아주는 젊은 프랑스 작가에게 수여한다는 ‘되 마고 상’을 수상하기까지 이른다. 누가 썼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작품. 세계대전이 끝나고 10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이나 D.H.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 정도는 이 책에 비하면 ‘이도 안 난 수준’이며 억지로 가져다 붙인다면 지저분한 분뇨 이야기를 '뺀' 사드 후작 정도나 가능할 정도의 쇼킹한 성애장면이 여성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의하여 쓰였고, 괜찮은 상까지 받은 것도 모자라, 공전의 히트를 거두는 베스트셀러가 됐던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을 필두로 거의 모든 백인들은 폴린 레아주라는 사람이 이름만 여성이지 사실은 앙드레 말로나 레몽 크노일 거라는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고 한다. 도대체 진짜 필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난 세월이 40년. 87세에 접어든 안느 세실 데클로스, 일반적으로 도미니크 오리라고 알려진 노파가 세상을 접기 불과 4년 전에, <O 이야기>를 쓴 작가가 자신이라고 커밍아웃을 함으로써 오랜 의문이 벗겨진다.
 벗겨진다? 그렇다. 벗겨졌다. 이 책에서도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가운데 하나도 ‘벗기다’와 ‘벗다’다. 내가 이 책을 사서 읽은 건, 설마 이 정도로 야한 책이란 건 상상도 못한 상태에서, 어느 책 속의 등장인물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O 이야기>를 찔끔찔끔 읽는 장면이 재미있어서였다. 오호, 그렇게 재미있어? 서슴지 않고 책을 검색했더니 ‘19세 인증’이 뜬다. 확 구미가 당겼다는 걸 고백한다. 얼른 휴대폰 인증하고 독자서평, 출판사 책 소개, 이런 것들 함부로 읽는 것이 책을 진짜로 재미있게 읽는데 방해가 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그냥 구입했다. 야하다. 21세기도 벌써 20% 정도 지나간 시점에 읽어도 그렇다. 총 4부로 되어 있는데, 3부에서는 비위가 좀 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사드의 책처럼 장면이 하도 더러워 그런 것이 아니라, 약간의 신체 훼손 장면이 나오는데 내가 원래 그런 종류를 견디지 못해서 그랬다.
 한 여자가 있다. 이름이 알파벳 ‘O'.
 어떤 여자인지, 원래 어떤 여자였는지 책의 134쪽에 설명이 되어 있다.
 “예전에 그녀는 늘 쿨하고 활기찼으며, 자기한테 반하는 사내들 마음을 말 한마디 제스처 하나로 후리는 데 재미를 느끼는 아가씨였다. 절대 자기를 완전히 내어주는 법이 없었고, 그저 극진한 정성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장난삼아 한 번씩 몸을 허락하는, 그러면서도 상대의 달뜬 열정에는 더욱 불을 지펴 가혹한 희생자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타입의 여자였던 것이다.”
 책의 줄거리는 이렇게 오만하고 자신감에 차있고 지배성향까지 있는 여인이 말 그대로 성노예가 되는 과정이다. O는 자신에게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채찍질하고, 성적으로 학대하고, 그가 있는 장소에서 낯선 사내(들)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을 그를 향한 ‘사랑’이라고 오해한다.
 “르네,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을 사랑해…… 나를 가지고 얼마든지 당신 원하는 대로 해도 좋아…… 다만, 나를 버리진 말아줘, 제발 부탁이야, 나를 버리지마……” (133쪽)
 심지어 사랑하는 르네가 피가 섞이지 않은 이복형제 스티븐 경에게 자신의 소유권을 넘겨 상당한 수준의 성적 학대를 당하게 하는 것도 처음엔 르네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렇도록 사랑했던 르네를 그리 쉽게, 짧은 시기에 잊고 새로이 스티븐 경을 사랑하게 됐기 때문인 줄 안다. O가 바보냐고? 아니다. 작가에 의하면 그리도 오만하고 매사에 자신감에 차있고 남자를 지배할 줄도 아는 여성 O가 ‘루아시’라는 장소에서 지독한 마조히즘적 단련을 받아 그렇게 변했다는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 같다. 그러나 책의 첫 장면, 르네와 함께 택시를 타고 루아시까지 갈 때부터 마지막 장면, 두 명의 남자가 번갈아 O를 차지하는 장면까지 한 번도 독자는 O의 원래 모습이 똑 부러지고, 독립적인 여자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수시로 채찍질을 당하는 루아시에서의 성적 단련 장면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와타나베 준이치의 소설 <샤토 루즈>가 떠올랐다. 결혼을 했지만 부부간 성적 접촉은 서너 번에 불과한 부부. 섹스는커녕 깊은 애무도 거부하는 아내를 견디지 못하고 프랑스에 있는 성城 샤토 루즈Château Rouge에 있다는 성性 능력 개발센터에 보내는 소설. 그 책에서는 아내에게 성적 흥분이 어떤 것이며 그것을 최대한으로 느낄 수 있는 잠재능력을 극대화하는 훈련 장면이 등장한다. 와타나베의 (이 책에 비하면) 조금밖에 외설적이지 않은 책 속에서는 가학, 피학 같은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간질간질한 섬세한 자극이 꽉 차 있어서, 야하지만 흥미있게 읽을 수 있었는데 <O 이야기>는 내 수준에 과했다.
 역자 성귀수는 후기에서
 “일개 에로틱한 내용의 소설이라는 것만으로는 정의가 턱없이 부족하다. 예컨대, 이 책속에 난무하는 사도-마조히즘적 담론들은 단순히 성적 쾌락의 수행으로 읽히기보다는 어떤 극한의 추구, 절대를 향한 자아의 완전한 헌정(獻呈) 의지로 해석된다. 마치 노예처럼, 용해되는 원소처럼 연인이라는 존재에, 사랑 자체에 완전히 속해 버리고자 하는 작가의, 아니 O의 연애편지……”
 라고 주장한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이 책은 엄연히 남자들의 권력으로 특정한 여자들을 성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견고한 시스템을 만들고 그 안에서 여성 노예를 통해 오직 성적 쾌락만을 최대한으로 뽑아내는 비인간적 유희를 미화해버렸다. 작가가 의도했건 아니건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여성에 의하여 쓰인 가장 극명한 안티-페미니즘 소설이며, 반인륜적 작품이다. 남자가 읽기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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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침묵했다 창비세계문학 69
하인리히 뵐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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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하인리히 뵐 자신이 1917년 독일의 쾰른에서 태어났다. 1차 세계대전 중에 태어난 독일과 오스트리아 남자 아이들의 숙명은 2차 세계대전에 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에 뵐의 나이 스물두 살. 그는 꼬박 6년 동안 독일 병사로 전쟁에 종군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 잠깐 얻은 휴가를 이용해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았으나 장남 크리스토프는 낳자마자 세상을 뜨고 만다.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4년에 수차례 탈영을 감행한 전력이 있는 뵐은, <천사는 침묵했다>에서 하필이면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한 날을 골라 탈영을 했다가 체포되어 5월 9일 새벽에 즉결처분, 즉 총살형을 선고받는 한스 슈니츨러라는 이름의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다. 참고로, 실제의 뵐은 종전 당시 현역 군인으로 미국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9월에 석방, 자유의 몸으로 풀려난다.
 작중에서 한스 슈니츨러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밤을 지새우고 있을 당시 같은 부대의 군법무관 서기였던 빌리 곰페르츠라는 인물이 한스에게 접근해 서로 군복을 바꿔 입고 도망하라고 종용을 한다. 이런 이해하기 힘든 과정을 통해 탈영병 한스는 빌리 곰페르츠의 군복을 입고 자신의 고향이기도 하고 곰페르츠 부인이 살고 있는 쾰른에 도착해 부인에게 군복을 전해주게 된다. 이에 대한 대가는 빌리 곰페르츠의 죽음. 그리고 폐허가 된 쾰른,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질긴 목숨을 이어가야 하는 생존법. 쾰른에 도착한 한스는 제일 먼저 곰페르츠 부인을 찾기 위해 그녀가 입원했다고 알고 있는 병원에 찾아가 식사를 담당하는 수녀에게 빵을 얻어야 했고, 부인이 퇴원했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그녀의 집을 방문해 곰페르츠의 당부대로 그의 옷을 전해준다. 부인은 한스가 보는 앞에서 옷의 아래 단을 뜯어내 단 속에 든 곰페르츠의 공증 받은 유언장을 발견한다. 자신의 모든 유산을 아내에게 유증한다는 내용. 이 장면에서는 내용을 그냥 넘어가겠지만, 조금이라도 자기 재산이 부친에게 주어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유언이었던 거는 나중에, 아주 나중에 밝혀진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장면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한 무기로 인해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폐허로 변한 쾰른. 어쩔 수 없는 굶주림과 추위. 남아 있는 산업, 상업의 기반이 완벽하게 없는 상태에서 독일인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물물교환 또는 도둑질 말고는 거의 없다. 환경이 생존을 위협할수록 생명 종에게 더 강한 충동으로 닥치는 것은 어김없이 후세를 남기기 위한 욕구, 즉 번식으로써의 사랑에 대한 갈증이다. 그래 비록 춥고 배고프기 한이 없지만 쾰른에서도 사랑이 싹터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스와 레기나는 새롭게 가정을 이루기도 한다.
 어디서 읽어본 듯하지? 하인리히 뵐이 소위 폐허문학, 즉 2차 대전 직후 완전히 폐허가 된 독일의 참상을 그린 대표적인 작가로 이 작품을 쓰고 4년 후에 비슷한 내용으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발표한다. <그리고 ……>는 발표 후 곧바로 출간을 했으나 <천사는 침묵했다>는 1949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일 사람들이 전쟁 장면에 극도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어 결국 뵐이 죽은 다음인 1992년에 출간을 했다고 한다.
 작품의 내용도 좋고, 의미하는 바도 좋지만 내가 정작 이 책을 읽으면서 참 좋다고 생각이 든 것은, 뵐이 한스를 따라가며 행적을 묘사하는 문장들의 조합. 아름다우면서도 참으로 쓸쓸한 관찰이 마음을 텅 비게 만들었다. 어려운 시기에 사람들은 대개 만인에 대한 이리(狼wolf) 상태로 변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뵐의 이 책에서는 그나마 가진 것을 서로 나누려 하고, 그래서 사랑하게 되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하인리히 뵐의 작품으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이어 네 번째 읽은 작품인데, 어느 것 하나 빼지 않고 다 마음에 든다. 믿음이 가는 작가. 다른 책은 또 없나, 검색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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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뻬루 마을 사람들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지음, 김현숙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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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제 마르탱 뒤 가르가 인류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티보 가의 사람들>이다. 스스로 개전부터 종전까지 참여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바로 다음 해부터 무려 20년 동안 집필을 해 1940년에 발표한 대하소설. 이 작품 말고는 열두 해 동안 써왔으나 결국 미완성 유작으로 남은 <모모르 대령에 대한 추억>이 있다고 한다. 뒤 가르가 당시 56세, 최연소 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해가 1937년. 그러면 아직 <티보 가의 사람들>을 완성하기 전이라, 사실 내용과 관계없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상을 수상하기엔 아직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었다고는 할 수 없다고도 할 터이다. 하긴 탁월한 대하소설 <티보 가의 사람들>이 7부와 에필로그로 되어 있으니 그 작품을 연재했다면 상을 탈 수도 있었을 듯하다. 뒤 가르가 필생의 역작 <티보 가의 사람들>에 몰두하던 1931년에 단편소설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를 발표하고 다음 해에도 짧은 소설 <모뻬루 마을 사람들 Vieille France>도 발표한다. <티보 가의 사람들>을 쓰면서 좀 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많은 작가들이 장편소설을 쓰는 틈틈이 단편소설을 발표하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니까. 이 책은 뒤 가르가 1931년과 32년에 발표한 두 중·단편을 한 권에 담았다. 솔 출판사가 2003년에 찍은 책으로 지금은 절판이다.
 우리나라 출판업계의 불만 가운데 하나가 중역의 의심을 받고 있는 동서문화사를 제외하면 <티보 가의 사람들>이 절판이며 오직 이 책의 1부이자 작품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회색노트>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을 제외하고 읽을 수 있는 뒤 가르의 다른 저작들은 아예 구경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비록 헌책이라고 할지언정 어찌 이 책이 눈에 띠자마자 얼른 주워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티보네 집안을 읽어보신 분은 이 심정 동감하면서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솔 출판사의 <모뻬루 마을 사람들>의 원 제목 "Vielle France"는 네이버 불한사전을 보면 우리말로 “오래된 프랑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단다. ‘오래된 프랑스’ 말고 더 어울리는 번역은 없을까? 뒤 가르의 관찰의 대상이 되는 모뻬루 마을은 우리나라 읍 정도의 행정단위로 열차 정거장을 중심으로 우체국, 시청(또는 읍사무소), 성당, 빵집, 야채가게, 대장간, 작은 책방, 기타 등등이 있는 작은 시가지와 농사와 목축업을 하는 시골지역을 모두 합친 곳이다. 비록 마을 사람들은 부르주아 적인 사고방식으로 오랜 전통이었던 가톨릭에 입각한 세계관을 벌써 버렸거나 아주 약한 유대밖에 가지고 있지 않으며, 투표를 하면 주민 가운데 90%가 좌파 정당에 표를 던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루한 프랑스 농촌사람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을 “모뻬루 마을 사람들” 말고 “고루한 프랑스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다른 표현으로 하는 것이 책을 읽으며 빨리 책의 정체를 눈치 채는데 도움이 될 거 같은데, 뭐 그건 편집자와 역자가 알아서 했겠지.
 모뻬루 마을 우체국, 그래봐야 콧구멍만 한 우체국이겠지만, 거기 역시 우체국장이자 배달원이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이 ‘주아노’라고 했다. 이야기는 이 주아노가 하루 온종일 모뻬루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가상의 시골마을 사람들의 ‘인간적’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떤 것이 ‘인간적’인 거냐고? 알려드리지. 먼저 우리의 주인공 주아노에 관해 말해보자. 주아노는 젊어서부터 모뻬루 마을의 우체국, 아냐, 아냐, 자꾸 우체국이라고 하니까 너무 거창해보이니 이런 단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체국을 조금 작게 보이게 하기 위해 앞으로는 ‘우편소’라고 부르기로 하자, 우편소에 직업을 얻은 사내로 도로道路 인부 페주를 제외하고는 아직 모뻬루 마을 주민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새벽에 일어나 곧 도착할 우편기차를 기다리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정거장을 향해 가는 인물. 당연히 결혼을 했다. 오래 전에. 근데, 문제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혼자 우편소를 독식하려면 자기가 우체부를 할 동안 우편소 내부를 관리해야 할 터. 그러다가 여차하면 자기 밥벌이를 잃을 수도 있을까 싶어 어떤 조치를 했느냐 하면, 아내에게 우편소 관리 일을 시키는 것. 하지만 또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일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육아, 수유, 가사에다가 또 우편소 관리까지는 도무지 할 수 없을 거 같아서 어떤 결론을 내렸느냐 하면, 결혼과 동시에 출산의 희망에 부푼 아내에게 자기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고 땅, 땅, 땅, 나무망치를 세 번 내려쳤다. 설마 우리의 주인공 주아노를 진짜 직업정신이 투철한 우체부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 이 인간의 주된 여흥이 무엇인가 하면, 몇 십 년 눈썰미로 척 보면 어떤 것이 중요한 편지인지 알아채, 주전자 증기를 뿜어 쥐도 새도 모르게, 아무 흔적도 없이 편지를 개봉해 은밀한 내용을 미리 읽어보고 자기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위해 최선의 사기를 치는 것도 있는데, 이때 눈부시게 발휘되는 것은 바로 윤활유가 듬뿍 묻은 혀. 이익을 위해서는 온갖 감언이설이 청산유수. 그러나 마누라 앞에만 앉으면 밥 먹을 때, 물 마실 때 말고는 절대 입조차 열리지 않는 인간이다.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로제 마르탱 뒤 가르가 그리는 고루한 프랑스 시골마을의 사람들이 도시 사람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순박하고 정직하고 정이 넘치지 않는다는 점. 하나같이 구두쇠에다가 자기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체면 차리려 다른 이를 무시하며, 작은 이익을 위해 험담하는 건 기본이며, 종교적 자비심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으려야 찾을 수도 없다. 프랑스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도시 사람들이 시골 사람들에 기대하는 소위 ‘시골인심’이란 건 애초에 없다는 진실을 뒤 가르는 매정하게 가르쳐 주고야 만다. 시골이나 도시나, 프랑스나 한국이나, 인간의 모습은 다 그게 그거. 대강 그림이 그려지실 듯. 그러면 여기까지.
 함께 실린 <아프리카에서 온 편지>는 단편소설이라 재미는 있지만 어떤 내용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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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개구리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9
궈스싱 지음, 오수경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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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궈스싱은 몇 년 전에 대표작 <물고기 인간 魚人>을 읽은 적 있다. <물고기 인간>은 초기 궈스싱의 희곡에서 <새 인간 鳥人>, <바둑 인간 棋人>과 합해 소위 한량 삼부작이라고 칭한단다. 눈치를 보니 궈스싱이 현대 중국 극작가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거 같은데, <청개구리>가 올해 봄에 한국에서 낭독공연을 했고, <물고기 인간> 역시 작년에 낭독공연의 형식으로 초연을 했다고 역자 해설에 쓰여 있다. <물고기 인간>도 그렇고 <청개구리>도 그런데, 이런 형식의 작품을 부조리극이라고 한단다. 부조리극, 이라고 해서 괜히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냥 현대극이라고 이해해도 별 탈이 없을 듯. 이미 고전이 된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앨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 등을 이제 부조리극이라고 하면서 괜히 어렵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희곡을 읽거나 공연을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그냥 기존의 연극적 (또는 통틀어 문학적)방법인 발단-전개-갈등-절정-결말의 단계를 차곡차곡 밟는 대신 그냥 하고 싶은 행위를 순서에 입각하지 않고 펼쳐 보이는 형식쯤이라 설명하면 된다. 나 같은 일반 독자가 드라마를 공부하는 사람처럼 장르의 기원과 내용, 형식 등을 굳이 시간을 내 찾아보고 읽을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시도 반시가 있고, 소설도 반소설이 있듯이 연극에서도 어찌 반연극反演劇이 없을까. 반연극을 통째로 부조리극이라고 생각해도, 이미 부조리극이 등장한지 80년이 넘어가는 지금에 와서는 시비를 따질 사람이 별로 없지 않을까 싶다.
 <청개구리>에서 청개구리가 진짜로 등장하느냐고? 그렇다. 작품의 맨 끝부분에 청개구리가 팔딱 거리는 장면이 나오고 당연히 울음소리도 들리는데 어떤 방식으로 청개구리를 뛰게 만들지는 전적으로 연출가 마음이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청개구리를 잡아와서 무대에 풀어놓지는 않겠지? 내 생각도 그렇다.
 등장인물은 네 명. 이발사, 손님, 나그네, 여자. 이발사와 손님은 1막부터 3막까지 쉼 없이 한 명은 이발의자에 앉아 있고 이발사는 가위를 손에 걸고 있다. 내용만 퉁 쳐서 이야기하면, 말 많은 손님과 이발사가 끊이지 않는 수다를 떨고 있는 와중에 나그네가 도착해 이발이 끝나기를 기다리지만 그들의 수다도, 이발 행위도 절대 끝나지 않는다. 그래 면도를 하고 싶어 하는 나그네는 이들과 말을 섞다가 여자한테 1막에 한 번, 2막과 3막에서는 두 번씩 귀싸대기를 얻어맞고 결국 그냥 발길을 돌린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연극에서 대사를 떼어내면 별 거 없는 드라마이지만, 여기에 현대와 인류의 문명을 위협하는 무수한 사건과 자연현상이 첨가된다. 현대의 여자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하고, 자기 복제는 앞으로 남성을 더욱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큰 나라의 큰 도시에선 비행기 두 대가 똑같이 생긴 큰 건물 두 동을 무너뜨리고, 인도네시아에서 강도 9.1의 강진의 여파로 쓰나미가 발생해 인도네시아는 물론이고 인도, 말레이시아, 베트남을 거쳐 동아프리카의 소말리아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북극의 빙하가 녹아 북극곰이 인간의 쓰레기통을 뒤진다는 등의 말잔치가 벌어지는 와중에, 무대가 되는 중국의 평야지대 역시 점점 물이 들어차 이발사와 손님의 다리에 굴과 조개가 번식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대강의 줄거리인데 극작가가 독자, 관객에게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묻지 않는 것이 에티켓. 사실이 또 그렇다. 어찌 모든 예술 장르에 스토리나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하나. 만일 고도가 무대에 쓱 등장해서, 만장하신 신사 숙녀 여러분, 그동안 미천한 저를 기다리시느라 수고 겁나게 하셨습니다, 라고 인사하면 그게 베케트의 문제작이 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청개구리>엔 메시지가 있다. 아니, 적어도 메시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근데 극작가 궈스싱은 그것이 사실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썼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독자(또는 관객) 역시 그것이 똑 부러지게 무슨 메시지인지 굳이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 어차피 소통은 불확실한 것. 코러스가 무대에 등장해 집단으로 노래하고 사연을 전하던 시절이나, 투명 플라스틱이 프롬프터를 대신하는 시대나 마찬가지로 연출가와 관객, 극작가와 독자 사이에 한 번도 정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그러니 문학에 반대할 수밖에. 그 일환으로 나온 것이 소위 반연극, 즉 부조리극 아니겠는가. 독자 또는 관객인 당신이 이 책을 읽거나 연극을 보면서 느낀 것, 그것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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