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바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4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지음, 한영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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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라바>도 오래 전 신년 연휴가 3일일 때 거의 한 해도 빼지 않고 흑백 TV를 통해 봤던 영화다. 안소니 퀸이 타이틀 롤을 하고 기억이 가물거리는데 아마 실바나 망가노도 출연하지 않았나 싶다. 난 그때도 유물론자 비슷한 기질로 영화를 하나도 재미없게 봤는데, 작년에 영화는 진짜 지루하게 봤던 <쿠오바디스>를 소설로 대단히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읽은 경험이 있어 이번에도 은근한 기대를 걸고 <바라바>를 골라 읽게 됐던 거디었던 거디다.
 책 뒤에 있는 역자 해설을 읽어보면, 작가 라게르크비스트 자신은 스스로를 “신앙 없는 신자, 종교적 무신론자”라고 칭하면서, 주인공 바라바 역시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하여 이런 시각을 갖고 방황과 회의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아마추어 독자로 드는 의심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라게르크비스트의 <바라바>가 완역인가, 하는 점이다. 본문이 160쪽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는 결정적 작품이 바로 이 <바라바>라는 건, 그가 노벨상을 수여하는 한림원이 자리한 스웨덴 사람이라는 이유 말고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의 길이가 길지 않다고 해서 책을 폄훼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이 책의 미덕은 성경엔 몇 줄 나와 있지 않다고 하는 산적 두목 바라바에 관한 언급을 저 멀리 로마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는 거 말고 또 뭐가 있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러나 바라바가 늙어 로마에 도착할 당시를 다룬 책으로 1905년에 역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위에서 말한 시엔키에비츠의 <쿠오바디스>가 있는데, 이 <바라바>가 1951년의 노벨 문학상을 받기 위해서는 <쿠오바디스>를 능가하거나 대등한 작품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림도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막 읽기를 마치고 혹시 이 책이 라게르크비스트의 역작을 대폭 축소한 요약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는 중이다.
 혹시 모르겠다. 우리나라에 무수하게 많이 분포하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께서 몸소 읽어보시면 하느님의 은총에 감동, 감화 받을 수 있을지는. 하지만 아직도 집 나간 검은 양에 머물고 있는 나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비록 짧기는 하지만 읽기가 매우 곤란한 경험 말고는 느낀 게 없었으니, 이걸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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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 - 세상을 사고 싶은 남자 외 38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1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 지음, 이난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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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 하긴, 터키 작가 가운데 내가 아는 사람이 오르한 파무크 말고 없으니 이이를 몰랐다 한들 어찌 까탈을 잡힐까. 작가는 1909년생. 열네 살 때 터키 그리스 전쟁으로 이스탄불로 이주했다. 이스탄불에서도 중상류 부르주아 생활을 누리면서 돈 잘 버는 아버지 덕에 대학도 다니다 때려치우고 프랑스 말 좀 배워볼까 싶어 프랑스 유학도 하고, 귀국 후 교사로 취직을 하긴 했는데 하고 한 날 지각을 하는 등 심각하게 불성실해 결국 그것도 때려치운 다음 아버지의 동업자와의 사업을 물려받았지만, 제 버릇 개주나, 반년 만에, 아버지 도저히 못 해 먹겠습니다, 두 손 바짝 들고 틈틈이 써 놓은 단편소설을 묶어, 역시 아버지 돈으로 출간했다. 딱 그때를 기다렸다가 터키 병무청에서 입대영장을 발부했으나 신경성 질환이란 묘한 진단서 첨부해 병역 면제 받은 걸로 보아, 우리나라의 숱한 ‘신의 아들’ 사례에서 봤듯이, 여태 자기를 도와준 아버지가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하느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스물여덟 살 때 다시 파리로 날아가 잠깐 놀다 오기도 하는 등 전형적인 오렌지 족 스타일로 지내기도 하다, 스물아홉 살 때 아버지가 명줄을 놓자마자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사방을 둘러봐도 자기 일에 참견하는 사람 한 명 없는 완벽한 자유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뭐든 간에 완전히 좋은 일이란 없는 법이어서 자유라는 것도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법, 자유를 딱 10년 간 누리다가 간경화 판정을 받고 마흔다섯 살 때 뱃속의 복수를 빼 약간만 불룩한 배를 지닌 채 간혼수肝昏睡 상태에서 입으로 피를 쏟으며 저 세상으로 갔다. 그때도 아직 남은 아버지 돈을 다 쓰지 못하고, 자기가 글 써서 번 돈도 있어 유언을 하기를, 이 돈으로 해마다 제일 잘 썼다고 평론가들이 주장하는 단편소설의 작가에게 상금과 상장을 주라고 해 아직도 ‘사이트 파이크 문학상’을 주고 있단다.
 여태까지 써 놓은 것은 그의 연표를 읽어가며 약간 심술궂게 연표를 각색해본 것이다. 왜 짓궂은 짓을 했느냐 하면, 책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사이트 파이크가 부르주아 출신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첫 작품 <해변의 거울>부터 마지막 <필요 없는 남자>까지 모든 단편들의 주인공은 노동자, 룸펜, 유랑극단의 배우, 시골교회 신부, 집 나온 젊은 가장 등 온갖 ‘찌끄러기’들이어서, 부르주아 출신으로 섣불리 서민 코스프레 했던 오르한 파묵의 보자 장수 이야기 <내 마음의 낯섦>처럼 이야기가 전혀 서먹서먹하지 않아 사이트 파이크는 분명히 적수공권으로 시작해 자수성가해 소설가가 된 인물일 것이란 생각이 저절로 들었던 거다. 그만큼 그의 단편은 등장인물인 하층계급 시민들의 묘사가 친밀하다.
 이이의 단편들은 그가 주로 활동했던 1930~40년대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때론 농촌 마을까지의 모든 서민, 농민, 그 외의 가여운 것들과 부패한 사회 관습에까지 나름대로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있으며, 이것을 역자 이난아는 그때까지 터키 문학이 습관처럼 따르고 있던 주류 유럽문학을 지양하여 ‘새로운 언어로 인간을 노래’하기 시작했다고 표현한다. 책을 읽은 후 여태까지 몰랐던 좋은 작가 한 명을 추가한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같은 시기 우리나라 단편소설 작가들처럼 절절하게 공감하는 건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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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0-22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가 작품 마음에 들더라고요. 처음 듣는 작가라서 확신이 안 서니까, 알라딘에서 미리보기로 단편 한 편 절반쯤 읽다가 마음에 들어서 책까지 샀는데(역시 다 읽지는 못했지만 하하하...-_-) 오르한 파묵보다는 제 취향입니다.

Falstaff 2019-10-22 10:16   좋아요 0 | URL
ㅎㅎㅎ 미리보기 활용하는 거 참 좋아요. 저도 많이 즐깁니다.
사이트 파이크를 굳이 파묵하고 비교하자면, 하층민에 대한 인위적인 관심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거였어요.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는 별개로 하고요.
연표 읽어보면 성격이 장편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아서, 그거 하나 불만이었습니다. ㅋㅋㅋㅋ

CREBBP 2019-10-22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변의 거울은 조금 어려웠지만, 나중에 정말 좋은 작품들 많더라구요. 저도 처음 보는 작가였지만, 이 책 읽으면서 현대문학 단편집에 대해 더욱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모르는 사람을 알려주는 시리즈라고 ㅋ

Falstaff 2019-10-22 13:12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는 한 방에 책을 20~30권 구입하고 초판 출간 순서로 읽는 버릇이 있거든요. 현대문학에서 낸 이 단편집 시리즈를 알고 난 다음엔 책 살 때마다 꼭 한 권 씩 구입하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아무 근거 없이, 역자가 미덥지 못해 망설이는 책도 몇 권 있기도 하고요.
하여간 무척 기대하고 있는 시리즈입니다. 계속 출간되기 바라는데, 그렇게 되겠지요 뭐. ㅋㅋ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현대지성 클래식 16
싱클레어 루이스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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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작품은 미국 중서부의 백인 중산층 부동산소개업자 배빗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속물성을 풍자한 <배빗Babbit> 딱 한 권 읽었다. 작품이 나름대로 재미있고 생각이 발칙해 귀여운 작가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글쎄 이이가 미국문학에서 과대평가되어 있는 소설가라서 지금이라도 당장 평가절하를 해야 한다고, 미치너의 <소설>에서 평론가와 편집자가 진지하게 대화하는 장면을 읽었지 뭔가. 그래 다른 소설의 경우는 어떤가 싶어서 사 보게 되었다. 물론 이런 평을 알게 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책방 보관함에 꿍쳐두었던 소설책이지만 하여간 결정적으로 집어 들게 된 건 그런 이유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1776년 7월, 독립전쟁에 승리함으로서 독립선언을 하게 되는데, 이후 15년이지나 1789년에 미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조지 워싱턴이 3대 대통령 추대 거절 이후 유일하게 3선을 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1945년 졸)를 빼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선한 관습법으로 또는 1947년에 개정한 미국 수정헌법 22조에 의거하여 누구도 2선을 초과하여 대통령의 직을 수행한 사람이 없다. 한정된 권력만을 사용하게 허락함으로써 미국은 어느 대통령도 독재 정치를 행할 기반을 제거해버렸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미덕인데, 이 책은 수정헌법 22조를 공포하기 전인 1936년부터 1939년까지 3년 조금 미치지 못한 시기동안, 미국에서도 독일, 이탈리아, 일본, 터키, 소련과 유사하게 독재자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라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책의 초간이 나온 시기가 1935년. 그러니 디스토피아에 입각한 미래소설, 또는 가상 역사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인터넷 책방에서만 읽을 수 있는 출판사 책 소개를 보면, 1980년대 중반에 장안의 화제가 됐던 미국 드라마 <V>가 이 소설을 바탕으로, 또는 이 작품이 모멘트가 되어 만들었다는데, 뭐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 듯하고, 달리 생각하면 참 잘도 가져다 붙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1930년대 초중반에 미국에서도 독재자가 발호한다는 싱클레어 루이스의 생각은, 당시 키 작은 독일의 독재자나 검은 유니폼을 입은 이탈리아의 두체, 그리고 동토의 땅에 자리한 스탈린이라는 이름의 북극곰을 관찰해서, 각개의 악마적 특징을 미국 땅에서 그대로 적용시키면 소설로 작업하기가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참 독특한 아이디어이긴 했을 터이다. 1936년 겨울. 미합중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민주당 차기 대통령 지명대회에서 전 국민에게 연 5천 달러의 수입을 공약한 버질리어스 윈드립 상원의원에게 민주당 대통령 후보자리를 넘겨주고 만다. 윈드립은 기세를 몰아 대선에서도 공화당 후보를 단방에 넉 다운 시키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는데, 오랜 세월 동안 다락방 구석에 처박혀 먼지만 켜켜이 쌓아왔던 단어 ‘각하’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불러주기를 바란다. 놀랄 만큼 명석한 참모 리 새러슨은 곧바로 대통령의 사병조직 미니트맨, 언제라도 대통령을 위한 출동을 대기하고 있어서 명령만 내리면 곧바로 행동한다는 의미로 Minute Man들을 전국적으로 구성해 단숨에 경찰력을 장악해서 조직을 급속히 거대화하고, 국가의 행정구역을 새로 재편해 각 단위의 우두머리로 전국적 양아치들을 수집해서 한 자리씩 주고는 이름을 ‘코르포스’ 즉 'Corporate'의 약칭이자 복수형인 'Corpos'라고 칭한다. 이어서 당연한 수순으로 야당과 공산당, 유대인, 학자, 언론인, 기타 체제에 반감을 가질 소지가 높은 지식인들을 중점으로 숙청을 하고 전국에 대형 수형소를 건설해 잔인한 고문과 총살형을 재판도 거치지 않고 집행해버린다.
 이 책의 주인공은 책이 시작할 때 60세로 출발하는 언론인 도리머스 재섭. 언론인이라고 해도 뉴욕이나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있는 굴지의 언론사 대표라는 말은 아니고, 지역 신문을 운영하면서 주필도 겸하고 있는 나이든 신사 정도로 생각하면 될 터. 지역사회에서 신망을 얻고 있고, 기본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취하고 있는 지식인이지만 공산주의에, 정확하게 말해 모스크바에 터를 잡고 있는 독재자 집단에게는 묘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데, 싱클레어 루이스 자신이 공산주의와 어울리기엔 너무 고상하거나 속물적인 사람이었을 듯하다. 재섭 씨는 윈드립 정권이 하는 일마다 마음에 들지 않고, 해도 너무 한다고 숱하게 불평을 하지만 성향 자체가 내놓고 웅변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냥 그렇게 소나기를 피하는 심정으로 나날을 견디고 있는 상태. 자기 집 하인 비슷하던 덩치 크고 게으르기만 한 섀드 레듀가 하도 버릇이 없어 견디다 못해 해고하자마자, 레듀는 미니트맨에 들어가고 급기야 지역 군수 정도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사사건건 재섭을 물 먹이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재섭의 머릿속에 벼락같이 떨어지던 자각. 이것이 책의 주제인데, 지금의 독재 상태에서 온 국민이 겁박을 당하며, 미국이 벌일 다음 전쟁으로 수많은 미국 청년을 죽음으로 행진하게 만드는 이 모든 일이 바로 자기, 도리머스 재섭과 같은 이들, 숱한 재섭들의 책임이라는 것. 생각 속에는 있지만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들의 책임. 이를 통감한 도리머스 재섭은 곧바로 반정부 투쟁에 들어가 지하 신문과 유인물, 소책자들을 인쇄, 배포하기 시작한다. 내용은 이하 생략.
 싱클레어 루이스는 독재정권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다. 따라서 책 속에 등장하는 장면들의 전부가 자신의 뇌 속에서 재구성한 그림들일 것이며, 그것들은 1935년 이전에 독일, 이탈리아, 터키, 러시아 등에서 벌어진 일을 신문이나 책에서 읽고 자기가 살을 더 붙여 만든 것이리라. 책 속의 독재 체제에 신음하는 미국 사회를 읽어보면, 멀리 갈 것까지도 없이 1980년대 중반까지의 대한민국과 현재 시점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겪어본 사람은 단박에 공감을 할 것이다. 지독한 수준의 경찰국가. 그리고 우습게도 ‘아주 조금’은 2019년의 대한민국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아직도 완벽한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런 책이 하필 독재 체제를 경험하지 못한 미국에서 나와서 그랬을까. 한껏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설명하고 있는데, 숱한 죽음과 고문 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어째 공감이 가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수십 년 전에 읽은 <안네의 일기>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이유는 혹시 작가가 반독재 투쟁에 절실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투쟁의 경험이 없어서 그랬을까? 정작 당대에 파시즘 또는 지독한 독재에 시달리던 독일, 이탈리아, 터키, 러시아에서는 이 비슷한 글은 쓸 엄두도 내지 못했으리라. 이건 언제나 벌어지고 있는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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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0-2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앞에만 읽다가 재미가 없어서 그냥 미뤄뒀는데, 이 글 보니까 더 영영 미뤄버릴 거 같네요. 하핳하하하하 ^^;;

Falstaff 2019-10-21 10:30   좋아요 1 | URL
그냥 한 번 훑어보세요. 읽지도 않고 중고책으로 팔기는 좀 그렇잖아요. ㅋㅋㅋㅋ
 
낙타 상자 중국전통희곡총서 5
라오서 지음, 오수경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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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읽은 <생사장>처럼 원작인 소설을 희곡으로 만들어 공연한 작품이다. 라오서(老舍)의 원작 <낙타 샹즈>를 중원눙(鍾文農)이 희곡으로 각색을 해 1998년에 현대 경극으로 공연했다고 한다. 만주족인 라오서는 어려서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전사하는 바람에 좋은 머리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중도 작파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중에 시험을 봐 북경사범을 마치고, 놀라지 마시라, 당년 19세에 소학교 교장, 23세에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다음 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25세부터 5년간 영국의 런던대학에서 강사로 체류하고 30세에 귀국해 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며 창작에 힘을 쏟는다. 그래 그의 작품 <마씨 부자>의 무대가 영국이구나, 이제야 알았네.
 그러나 중국 현대사는 라오서처럼 머리 좋은 인텔리겐치아 계급에게 마음이나마 편하게 지내며 창작에 몰두할 엄두를 주지 않아서 그간 중국 현대소설에서 숱하게 보아온 문화혁명 당시 거지같은 홍위병의 깡패 짓을 견뎌내지 못하고 1966년, 그의 나이 67세 때 북경 태평호에 빠져 스스로 늙은 생명을 거두게 된다. 다이허우잉의 일련의 작품에 등장하는 늙은 지식인의 모습과 겹쳐 떠오르는 건 나 한 명이 아닐 듯하다.
 나는 이 경극을 위한 희곡의 원작인 <낙타 샹즈>는 읽어보지 못했다. 그저 희곡을 읽으면서 원작도 중국 근대사의 비극을 참 절절하게 써 놓았겠거니 하고 짐작만 할 수 있었을 뿐. 다분히 자연주의적, 혹은 사실주의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 놀라운 건, 이런 현대적 서사도 경극, 베이징 오페라로 공연을 할 수 있고, 실제로도 했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경극京劇’을 영어로 번역한대로 ‘베이징 오페라’라고 그대로 믿는다면, 이 희곡은 한 현대 경극을 위한 대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중원눙이 각색한 이 책 <낙타 상자>는 대본이라는 얘긴데, 그건 또 악보가 빠졌다는 의미다. 경극을 경험해보지 못한 나는 비록 이 대본이 1920~30년대 중국의 도시빈민을 실감나게 그렸을지언정 음악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전달력, 자연을 모방하지 않은 언어외적connotation인 정서의 전달을 어떻게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수밖에. 암만해도 조만간 경극을 한 번 봐야겠다. 진짜로 보면 정말 좋다고 하는데 여태 너무 게을렀다.
 ‘상자’라는 이름의 잘 생기고 건장하고 부지런한 사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시기는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베이징을 함락하고 북경 대신 ‘북평北平’이란 이름을 붙인 시기니까 1920년대로 보아야겠다. 북평, 즉 베이펑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한 후 다시 베이징으로 이름이 바뀐다. 상자의 직업은 인력거꾼. 동료 인력거꾼으로 이강, 딸보(키 작은 뚱보), (빼빼마른)갈비 등이 있다. 이중에서 알코올 중독 증세가 심한 늙은 이강의 딸 복자와 서로 사랑하지만 이강이 술도 좀 더 퍼마시고, 새 인력거를 살 요량으로 나이 많은 백군의 소대장이자 밀정에게 그만 딸을 팔아버린다. 상자는 3년간 진짜 개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 끝에 새 인력거를 사게 되지만, 나중에 복자를 첩이자 하녀도 둘 예정인 백군 소대장 손가 놈에게 징발을 당하고 다시 적수공권으로 떨어진다. 이때 너덧 살 더 먹은 인력거 운송회사의 딸 호뉴가 상자에게 술을 잔뜩 먹여 덜컥 임신을 하게 되고, 둘은 신분차이 때문에 결사반대하는 호뉴의 아버지와 인연을 끊은 채 둘이서 호젓하고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려고 했는데, 사는 게 마음대로 되면 그게 인생이야? 호뉴는 아들을 낳았지만 출산 후 곧바로 아들과 함께 죽고 만다. 때를 맞춰 백군 소대장 손가 놈은 북쪽으로 쫓겨 가면서 복자를 내쳐 둘은 다시 만나게 되는데, 더 이상은 안 알려줌.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라오서의 소설도, 중원눙의 희곡도 재미있을 것이란 생각이 드실 듯하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중국판 자연주의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고.
 그런데 이걸 경극으로 공연을 한다? 일반적으로 경극이라고 하면 화려한 분장과 기예, 창과 대사 등으로 되어 있는 바, 중국판 삼팔따라지들의 인생살이를 공연하면서 어떻게 화려한 분장을 하며 무술을 포함한 기예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책의 앞부분엔 공연장면을 몇 컷 소개하고 있는 바, 배우들의 화장 같은 건 볼 수 없다. 그럼 대체로 대사와 창으로, 서양식으로 하자면 징슈필 적인 공연이었을 거 같다. 지금 확실한 건, 내가 눈 감고 코끼리를 만지고 있다는 사실. 뭐 궁금해서 그런 거다, 궁금해서.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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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2
에리히 케스트너 지음, 전혜린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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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에 출간한 작품이니 케스트너가 쓴 시기는 30년대 초반의 독일로 보면 무난하겠다. 당시 서서히 살아나고 있던 독일 경제는 1929년 검은 목요일이라 불리는 대공황으로 난데없이 불벼락을 맞아 무수한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업률이 천정을 찌를 때였다. 소위 뮌헨 봉기를 기점으로 국가사회주의의 기틀을 확립하고 정권을 잡으려 했던 히틀러는 봉기의 실패로 6개월간의 옥중생활을 마감하고 권토중래를 꿈꾸어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대공황을 기회로 드디어 나치즘을 기치로 내걸고 생물학적으로 우월한 게르만 민족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는 극단의 전체주의를 웅변하던 시기였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은 하지 않았지만 나치즘의 이상과 괴리가 있는 예술형태, 초기엔 다다이즘을 위시한 미술에서 시작해 나중엔 문학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번진 일련의 예술의 표현방식을 통틀어 퇴폐예술로 규정하고 엄정하게 타도해가기 바로 전에, 에리히 케스트너는 <파비안>을 쓰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수상과 대통령 자리를 독식하면서 독일의 전권을 틀어쥐게 되었을 때, 무수한 화가, 작곡가와 더불어 케스트너의 작품들 역시 ‘금서’의 목록에 오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서도 베를린의 한 행사장에서 무수한 책들을 불사르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기억하실 터. 이때 불타는 책들 속에 케스트너의 <파비안>도 섞여 있었던 것이 분명하리라.
 이 정도면 책의 성격을 이해하실 수 있을 듯하다. 시기는 대공황, 기업들의 도산, 최고의 실업률로 인해 박사학위 소지자가 신문사 광고부에서 일하다 해고당하고, 율사 출신의 미녀가 프로모터에게 몸을 바쳐 여배우로 변신해야 했던 시절. 여기서 박사학위 소지자가 책의 주인공 파비안이며, 율사 출신의 미녀는 파비안에게 100마르크를 빌고 곁을 떠나는 그의 애인이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시절이 있었다. 아마 이 사진 기억하실 터. 한국전쟁이 끝난 부산의 1953년, 사진작가 임응식은 길가에 섰는 한 구직자의 모습을 담았다.

 

 

 

 책에서 묘사하는 독일은 아직까지 국가사회주의가 완전히 집권하지는 못했으나 나치와 히틀러가 권세를 가진 집단으로 등장해 있던 시기로, 서서히 유럽의 죽음이 예고되고 공황에서 시작한 불운의 그림자가 사회 전체를 무겁게 내리누르던 시기다. 마치 자본주의의 말로를 보는 것 같은 시대의 쇠퇴는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혁명의 시기를 저울질하게 만들고, 하필이면 지역이 베를린이라 그들은 필연적으로 사소한 일로도 건마다 나치당원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주인공 파비안과 그의 가장 친한 (부자)친구 슈테판 라부데는 정치에는 그리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일종의 정치적 상식주의자로서 기본적으로 염세적 세계관을 가진 인물들이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우리나라 60년대 작가들이 사용하고는 하던 냉소적, 풍자적 대화와 행위가 눈에 띄면서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로 시작하는데, 기본적으로 매우 도덕적인 이들의 이야기는 불행으로 끝낼 수밖에 없다. 패전 후 패배의식 속에 대공황까지 겹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일반 시민들은 누구나 빠짐없이 자본주의적 급전직하에 당면할 수밖에 없었으며, 하루의 먹을거리를 위하여 절도를 하거나 구걸을 하거나 심지어 강도, 밀수행위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실상을 위해서는 명작,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일독하시면 훨씬 이해가 빠르리라. 그러나 이 책의 작가 케스트너는 소설가 말고도 아름다운 동화작가로 세계적으로 이름이 난 인물이라고 하니 어찌 되블린과 분위기가 비슷할 수 있을까. 케스트너의 <파비안>은 참 쓸쓸하다.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애인은 힘 센 놈에게 몸을 팔러 가고, 이제 베를린이란 거대도시에 자신의 고개를 뉠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도 발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그가 선택하는 것은, 이제 하나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고향. 더 이상의 스토리는 발설할 수 없다.
 참 괜찮은 소설이다.
 단 하나 아쉬운 것은 역자가 전혜린이라는 사실. 전혜린이 누군가. 40여 년 전, 그이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얼마나 시린 가슴으로 읽었는지. 그이의 번역이 나쁘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전혜린이 세상을 접은 때가 1965년. 벌써 54년 하고도 아홉 달이 지났다. 번역은 1964년에 했다고 쳐도, 사후 7년, 번역 후 8년이 지난 시점에 초판본이 나오고 사후 34년이 지난 후에 중판을 낸다. 그리고 또 20년이 흘렀다. 그걸 아직도 읽고 있다. 그동안 맞춤법도 바뀌고 단어 자체도 바뀌고, 무엇보다 표현의 방식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막힘없이 읽히기는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전혜린의 문장이 아니라 출판사 편집부의 문장이란 뜻. 그리하여 별점 하나 깠다. 지금쯤 새로운 역자가 새롭게 번역한 책이 책방의 서가에 꽂힐 때가 됐다. 그럴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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