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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몇 권의 책을 방출할 때가 되어, 조금 걷어 냈습니다. 이 책들이 무슨 품질이 떨어지거나 하여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나하고 궁합이 덜 맞는다거나, 앞으로 다시 들춰볼 것같지도 않고 아이들한테, 이젠 손녀 손자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지도 않을 것 같거나, 별다른 사연 없이 재수없어졌거나, 하는 쓸데없고 잡스런 이유 때문에 내쳐지는 불행한 운명을 안고 제게 온 것들입니다. 20세기에 사 읽은 책도 있으며, 예컨데 오탁번 선생의 <저녁 연기>같은 건 탁월한 문학성도 확보했다고 여깁니다만 인생이 그런 것이지요 뭐. 아래 리스트에 정가가 표시되지 않은 것들은 제가 책들을 데이터 화한 2015년 이전에 구입한 것으로 독후감도 써놓지 않아 이번 이별이 영원한 고별일 겁니다. 세보니 권 수로 92권이더군요. 책 열심히 읽으시는 분께 드리면 한 반 년 실컷 읽으실 텐데, 워낙 무거워서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카트에 담아 끌고 아파트 도서관에 가져다 줘야겠습니다.

 그림 한 번 보실래요?

 

 

 책장 정리 하면서 뽑아 놓은 것인데, 종이 먼지 때문에 하다가 관뒀습니다. 추리면 이것 보다 조금 더 많이 한 번 더 나올 거 같습니다. 궁금하시지 않겠지만 위 사진의 목록을 올려볼까요?

 인생 별 거 없습니다. 어차피 다 버리고 갈 거 보관할 장소도 없으면서 굳이 켜켜이 쌓아 둘 이유가 없습지요. 넘치면 버려야지요. 책도, 인생도, 사랑도.


도서명출판사저 자,  번 역 자 정가 
슈거 푸시작가정신이명랑 지음        8,500
나의 투쟁 1한길사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손화수      14,500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웅진지식하우스옌롄커, 김태성      10,000
뫼비우스의 띠문학동네프랑크 틸리에, 박명숙      16,800
나의 아름다운 마라톤현대문학이채원      12,000
까트린 이야기열린책들파트릭 모디아노, 이세욱        4,500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맑은소리슈테판 츠바이크, 안의정        7,500
한 여자열린책들아니 에르노, 정혜용        9,800
알렉산드로스 대왕열린책들니코스 카잔차키스 | 민승남      10,800
현명한 피IVP플래너리 오코너, 허명수      13,000
고딕 소녀열림원카슨 매컬러스 | 엄용희        9,800
여자를 안다는 것열린책들아모스 오즈 | 최창모        7,800
정열의 열매들문학동네다니엘 페낙, 김운비        8,000
귀머거리 새민음사양귀자
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문학동네다니엘 페낙 / 김운비      13,000
복어문학동네조경란      11,000
너는 모른다문학동네정이현      12,000
하룬과 이야기 바다달리살만 루시디, 김석희        9,000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문학과지성사고종석
반짝반짝 빛나는소담에쿠니 가오리, 김난주      12,000
숲의 가족창비아모스 오즈 | 박미영      11,000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문학동네황정은
산문팔이 소녀문학동네다니엘 페낙, 이충민      15,500
아버지의 쌀알달리민퐁 호, 최재경      12,000
달빛이 있었다창해임영태
도라 브루더문학동네파트릭 모디아노, 김운비        8,800
황금털 사자최승호해냄
달의 궁전열린책들폴 오스터 | 황보석      12,800
누구나의 연인예담플로리앙 젤러 | 박명숙        8,800
나는 오랫동안 그녀를 꿈꾸었다밝은세상티에리 코엔, 박명숙      13,500
나는 알몸으로 춤을 추는 여자였다아르테쥘리 보니, 박명숙      13,000
달팽이가 사랑할 때 1현암사딩모, 남혜선      14,000
달팽이가 사랑할 때 2현암사딩모, 남혜선      15,000
캔터베리 이야기외국어대출판부제프리 초서, 이동일.이동춘      23,000
순수의 숲늘봄장소한, 조유진
광화사 1문학사상사이제하
광화사 2문학사상사이제하
이제 우리들의 잔을 1동아이청준
이제 우리들의 잔을 2동아이청준
걸어서 하늘까지 1창작과비평사문순태
걸어서 하늘까지 2창작과비평사문순태
바라바문예출판사페르 라게르크비스트, 한영환        8,000
말로센 말로센 1책세상다니엘 페나크, 진인혜        8,000
말로센 말로센 2책세상다니엘 페나크, 진인혜        8,000
저녁연기정음사오탁번
진눈깨비 결혼청맥이제하
모차르트가 살아 있다면민음사김미진
경마장은 네거리에서민음사하일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시간과 공간사잉게 숄        7,000
나의 누이와 나홍성사니체, 이덕희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지문사버지니아 울프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창작과비평사은희경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살림양귀자
즐거운 인생 1이레쟈핑와 | 김윤진      11,000
즐거운 인생 2이레쟈핑와 | 김윤진      11,000
겨울나그네 1문예출판사최인호
겨울나그네 2문예출판사최인호
여자의 빛마음산책로맹 가리, 김남주      10,000
티투스의 승부수예담막스 갈로, 이재형        9,800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예담막스 갈로 | 이재형        9,800
네로의 비밀예담막스 갈로, 이재형        9,800
귀스타브 플로베르플로베르알베르 티보데, 박명숙      22,000
맨발의 완 선생웅진지식하우스판샤오칭, 이경민      13,500
정크민음사김혜나 지음      13,000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문학동네박주영 지음      10,000
카페 여주인세계사레몽 장 | 이재룡        6,000
영국 연인한길사홍잉 | 김택규        9,000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문학동네은희경
오늘의 거짓말문학과지성사정이현      10,000
뿌리와 날개현대문학이윤기
재미나는 인생성석재
납장미랜덤하우스마루야마 겐지, 양윤옥
투명인간문예출판사허버트 조지 웰즈, 임종기        8,000
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김애란
39계단문예출판사존 버컨      10,000
공포의 세기문학과지성사백민석 지음      13,000
동경만경은행나무요시다 슈이치, 이영미      12,000
먼 북소리문학사상사무라카미 하루키, 윤성원
오릭맨스티자음과 모음최윤      11,000
비행공포비채에리카 종, 이진      13,800
모뻬루 마을 사람들솔출판사로제 마르탱 뒤 가르, 김현숙        9,800
엘리베이터 타는 여자실천문학사김우남        9,000
달콤한 나의 도시문학과지성사정이현      10,000
속상하고 창피한 마음하늘연못버지니아 울프, 김윤주
타인에게 말걸기문학동네은희경
나비 넥타이민음사이윤기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민음사이응준        9,000
정육점 여인에게민음사윤대녕
키 작은 자유인문학과지성사이청준
인도로 가는 길인화E.M.포스터, 김동욱      15,000
잉얼 1실천문학사꾸청, 김은진
잉얼 2실천문학사꾸청, 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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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0-14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난 주말에 책 정리를 좀 했는데...
덜어 내도 덜어 내도 끝이 없더군요.

사실 앞으로도 다시 읽지 않을 만한
책들은 걷어내야 하는데 -
욕심 때문에 안고 가야 하는 운명인가
봅니다.

Falstaff 2019-10-14 10:23   좋아요 0 | URL
저는 작정을 하기를, 집에 있는 책장을 넘치게 하지 않겠다! ㅎㅎㅎ
그래 정기적으로 정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더라고요. 뭐 책 욕심이야 그래도 건전하잖아요.

잠자냥 2019-10-14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서 요즘엔 중고로 잘 팔릴 가격에(알라딘에서 신간은 6개월 안으로 팔면 값을 잘 쳐주더라고요. 뭐 그것도 중고에서도 잘 팔릴 책에 한해서만이지만요.) 빨리 읽고 빨리 팔아서 빵 사먹습니다. ㅎㅎ

Falstaff 2019-10-14 14:28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
빵 말고 밥이나 고기를 드세요! 아, 고기는 좀 비싸군요. ^^;;

coolcat329 2019-10-2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들이 저렇게 쌓여있으니 무섭기도 하네요 ㅎㅎ 소장은 500권 정도가 적당하다고 어디서 들었습니다.

Falstaff 2019-10-20 16:33   좋아요 1 | URL
책 읽는 방에 한 2,000여 권 있는 거 같습니다. 아이들 방에도 한 1,000권 정도 있을 테고. 확실히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얘기하신 대로 책도 음반도 그저 500권 정도였을 때가 가장 좋았던 거 같습니다. 책은 이제 들어오는 만큼 버리는 지경에 왔는데, 아직 음반은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그저 욕심이지요. 솔직히 얘기하자면 데코레이션 용으로 나쁘지 않고요. ^^;;
 

 

 7월부터 9월까지 세 달 동안 읽은 책이 모두 60권, 55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제 마음에 들어 추천하고 싶은 열다섯 작품을 소개합니다. 언제나와 같이 책을 추천하는 일은 좀 난처합니다. 작가들은 나름대로 진심을 다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겠지만 그것이 독자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전혀 모르는 일일 겁니다. 저도 독자의 한 명인데, 문제는 제 속의 필터가 과연 공정한 것인지 의문이 들어서 생깁니다. 그러니 사실 감히 ‘추천’이란 말 대신에 제가 읽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면서 책을 소개한다 해야 정확합니다. 뭐가 어쨌든 간에 서론이 길면 재미없는 법, 곧바로 추천이건 소개건 일단 시작합니다. 순서는 제가 책을 읽은 날짜순입니다.



1. 천상병, <천상병 시선>

 가난이 직업인 시인. 평생 혼자였으나 결코 외롭지 않았던 이. 보살펴주는 아내가 있고, 술값을 찔러주는 동무들이 있고, 동네 아이들이 함부로 할아버지라 불러주니 어찌 외로울 새가 있었을까. 그러나 행성에서 뚝 떨어진 외계인이 아닌 이상 이이에게도 생활이 있고 삶의 곤고함이 있었을 터. 굳이 그것을 에둘러, 그래도 세상 한 평생, 소풍 나와 잘 먹고 잘 살다 가노라 한 번 히쭉 웃는 시어들이 어찌 사람의 마음을 이리 헤집어 놓는지.



2. 톰 울프, <허영의 불꽃>

 

 진짜 미국소설. 또 하나의 <An American Tragedy>. 연 수입 백만 달러 이상 벌어들이는 와스프 출신의 채권전문 엘리트 셔먼 맥코이. 뉴욕에 거주하는 최상류층 백인과, 변두리 지역의 범죄가 만연한 흑인공동체 사이에 공평하게 나누어가진 것은 오직 하나, 흑백과 관계없이, 빈부와 상관없이 다가오는 지방선거에 한 명이 딱 한 표씩의 투표권밖에 행사할 수 없다는 것. 바람 한 번 잘못 피웠다가 자기 잘못 하나 없이 완전한 몰락으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의 미국식 비극. 민주주의는 결코 최선의 정치체제가 아니다.



3. 잉고 슐츠, <심플 스토리>

 

 그간 많이 다루어 식상한 점은 있으나 작가가 잉고 슐체라면, 동서독으로 나뉘어 다른 삶을 살아야 했던 가족 이야기라도 늘 참신하다. 29개의 단편斷片들이 각기 뒤죽박죽 섞여 있다가 나중에 보면 모든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소통을 하는 구조. 그 사이에 시간은 훌쩍 24년이 지나가버리니 이젠 동서와 세대 간 이격 또는 불통 내지는 소통을 이룬다. 이야기가 하도 다양해 책을 읽다가 잠깐 정신 줄 놓으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니 매사 불여튼튼, 조심해서 읽어보셔야 마땅할 것.



4.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아디치에가 아체베의 21세기의 딸인 것을 증명한 역작. 나이지리아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비아프라 공화국을 건국부터 역사상 유래가 거의 없던 기근을 거쳐 항복할 때까지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의 시선으로 서술한 기록. 아체베도 비아프라 공화국의 외교관으로 활약한 전력이 있었으나, 나이지리아의 거의 모든 국부를 차지하는 유전지대를 깔고 앉은 이보 족의 나라를 다른 부족들은 애초에 인정할 수 없었을 터. 종족간의 권력투쟁에 멍드느니 가난한 인민들뿐이다.



5.정영문, <어떤 작위의 세계>

 

 소설이 꼭 스토리가 있어야 하고 그럴듯한 반전이 있어야 하며 심금을 울리는 문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아니다. 그저 기회가 생겨 일 년 동안 캘리포니아와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할 기회가 생겨 5년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와, 5년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와 같이 살고 있는 현재 남자친구와 함께 사막지대에서 용설란에 총을 쏘아댄 경험,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태평양을 향해 투신하지 못한 일을 건조한 문장으로 써놓아도 소설이 된다. 신랄하게 파헤친 심리상태 하나만 가지고도.



6. 토마스 하디, <캐스터브리지의 시장>

 

 영국의 국가대표 이야기꾼 토마스 하디의 작품이면 일단 재미 하나는 보장한다. 영국 특유의 미풍양속인지 모르나 한 젊은 가장이 술김에 처자식을 5파운드 5실링 받고 낯선 남자에게 팔아넘기고는 술이 깨자 여태 살아온 세월만큼 앞으로 술을 마시지 않을 것을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하고, 진짜 서약대로 성실하게 살아낸 결과 캐스터브리지라는 작은 도시 또는 읍 정도에서 시장/읍장을 지낸다. 이야기가 재미있어지려니까 어느 날 문득 저 먼 과거에 자신이 팔아넘긴 처자식임을 주장하는 모녀가 등장해 우여곡절이 벌어지는데, 하디의 소설은 백 번 이야기를 들어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냥 읽어봐야 안다.



7. 하인리히 뵐, <천사는 침묵했다>

 

 작가 스스로 독일 병정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패전을 경험한 인물. 그의 작품은 전후 완전히 폐허가 된 독일, 특히 자신의 고향인 쾰른 지역을 무대로 할 일도, 먹을거리도, 집도 없는 황폐한 도시, 퀭한 눈의 도시인들을 그려낸다. 생명 종種은 환경이 열악해질수록 자신의 유전자를 많이 남기고 싶어 하는 법이라 번식의 방식으로 사랑을 갈구하기도 한다. 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트라우마가 전후 폐허 시기라 뵐의 사후에 출간을 했다 하는데, 이 책이 더 와 닿는 것은 쓸쓸한 문장들이 서로 얽혀, 말 그대로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8. 레이날도 아레나스, <현란한 세상>

 

 세르바도 테레사 데 미에르라는 멕시코의 18세기 수사의 일생에 관한 소설. 멕시코의 수호성인인 과달루페 성녀 이야기가 말짱 거짓말임을 주장하다 멕시코,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미국, 쿠바 등 세상의 온갖 구석에 있는 감옥 구경은 다 해본 풍운아. 작가의 의도는 세상에 정확한 역사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하는 의문을 데 미에르 수사를 내세워 과장, 풍자, 그로테스크 등 온갖 재미난 장치를 섞어 장난스럽게 써놓은 것. 이런 건 피카레스크 소설이라고 하기에도 좀 그런데, 그까짓 장르 구분이야 해 뭐하나, 재미있으면 장땡이지.



9. 아시아 제바르, <사랑, 판타지아>

 

 1830년 프랑스의 알제 침공으로 시작해 1962년 독립을 이룰 때까지 130여 년간 대 프랑스 해방투쟁을 기록한 책. 알제리는 부족 대표 대여섯 명이 모든 국권을 이양한다는 문서에 서명을 함으로서 유럽의 작위를 얻는 대신 나라를 통째로 들어 바치지 않았다. 한 도시, 한 도시 처절하게 함락당해 마지막 한 성城이 무너질 때까지 여자들조차 손톱으로 침략자의 심장을 후벼 파 꺼내들며 투쟁했으며, 극강의 전력을 가진 세계대전 승전국을 상대로 보잘 것 없이 무장한 채 무수한 사상자를 낸 전투를 통해 해방이란 열매를 따 냈던 것. 이런 알제리의 근대사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러면서도 작가 제바르는 바로 그 적의 언어로 문학을 해야 하는 진퇴유곡의 상황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10. 제임스 미치너, <소설>

 

 미치너가 84세 때 쓴 작품.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의 입장에서 각 일인칭 시점으로 한 편의 소설이 탄생해 그것을 평가하고 읽는 행위 또는 의미에 관해 썼는데, 기본적으로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소설을 생산하고 평가하고 읽는 방식의 변화 또는 진화에 관한 숙고라고 읽을 수 있으리라. 이리 써 놓으면 딱딱한 설명조 같지만, 천만의 말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타당한 방식으로, 그러나 당연히 모두 조금씩의 오류를 포함하면서 소설을 쓰고, 평가하고 읽는 행위가 이리도 다양할 줄이야. 정말 재미있다.



11. 이사벨 아옌데, <세피아 빛 초상>

 

 아옌데의 삼부작 가운데 시기적으로는 가장 마지막에 쓴 작품이지만, 내용으로 보면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야기. 라틴 아메리카의 대표적 이야기꾼이 전작 <운명의 딸>의 후일담을 풀어 놓았다. 무대는 샌프란시스코의 대저택과 차이나타운. 전작에서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현명한 중국인 차오 티안의 손녀 아우로라, 중국식 이름으로 리밍黎明이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실로 파란만장한 이주민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어차피 아옌데를 읽으려면 그녀의 삼부작을 모두 읽어야 마땅하니 <운명의 딸>, <세피아 빛 초상>, <영혼의 집>을 사 읽는데 인색하지 마시라.



12. 프랜크 노리스, <맥티규>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미국 판 에밀 졸라가 프랭크 노리스다. 겨우 32세에 복막염으로 짧은 생을 마감해서 아쉬운 바 작지 않다. 미국 특유의 빈부, 흑백, 지역 갈등 문제의 사실주의적 탐구는 노리스로부터 새로운 장을 맞을 뻔했다. 소위 야매 치과의사로 중산층 정도의 삶을 살기 시작한 거구의 맥티그 앞에 아름다운 아가씨와 결혼하는 행운과, 그것도 모자라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는데, 그러면 행복할 거 같지? 행운 뒤에 폭주하는 한 인간의 야성이 돌출되고, 비열한이 끔찍한 질투를 시작하여 끝내 커다란 비극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이라니. 노리스의 명이 짧았던 것이 아쉬울 지경. 다만, 하루 빨리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13. 이디스 워튼, <이선 프롬>

 

 다시는 이디스 워튼을 읽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가, 미국 문학사상 높이 평가받아야 할 네 명 가운데 하나로 꼽는 바람에 딱 한 권만 더 읽겠다고 작정해 골랐다가, 심봤다. 엄마의 오랜 병구완 끝에 집에 오게 된 먼 친척, 일곱 살 많은 지나 누나와, 어머니가 죽자마자 결혼한 후엔 덜커덕 이번엔 아내 지나가 병에 걸려, 그녀의 병구완을 위해 아내 쪽의 또 다른 사고무친의 친척, 젊은 아가씨 매티가 오게 되는데, 이런 구조에 벌써 심각한, 그러나 누구 하나 내놓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관계의 얽힘을 포함하고 있는 건 말 안 해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리 간단하게 끝나지 않으니 결국 마지막 페이지, 에필로그까지 읽어야 이 작품을 상찬하는 이유가 드러나니, 그걸 가르쳐드릴 수는 없지, 암.



14. 루쥔 작, 왕레이 정리, <여름의 기억>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 희곡이라고 하고 싶은데, 내가 워낙 아는 것이 짧아서 그게 좀 그렇다. 광저우에 돈 벌러 농장을 떠난 남편은 거기서 돈은 왕창 벌지만 젊고 예쁜 아가씨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바람에 이혼을 하고 싶다. 그러나 아내는 요령부득, 절대로 도장 못 찍어준다니 머리를 굴리기를, 젊은 사내를 농장 일꾼으로 들여서 아내와 관계를 맺는 순간 들이닥쳐 이혼을 강요하려는 꾀는 낸다. 세상 일이 자기 마음대로 돼? 그럼 그게 인생살이야? 설마 현대 연극, 희곡을 이런 내용으로만 이해하려는 건 아니겠지. 극 중 최대 전환점이 되는 검정말의 출산 장면과 이에 이어지는 인간들의 맺음이라니.



15. 디어도어 드라이저, <미국의 비극>

 

 미국이라는 나라의 비극이 아니라, 빈부와 계급의 차이가 인간의 차이로 대변되던 1910년대  미주리, 일리노어, 뉴욕 주에서 벌어진 미국 식 비극.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최고급 호텔의 보이로 취직하면서 자신도 고급 호텔을 드나드는 상류계급에 진입하겠다는 청운의 꿈을 꾸는, 몽상적이고 생각이 깊지 않고, 참을성 없고, 이기적인 잘 생긴 미남 청년이 커다란 부자가 된 큰아버지의 초대로 공장의 작은 부서장이 되면서 사건은 벌어진다. 독일인의 후예답게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마치 벽돌 탑을 올리듯 단단한 구조를 만들어 장황한 설명에 현대의 독자를 질리게 만들었을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비극>은 명작이다. 내용은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영화 <젊은이의 양지>를 참조하시면 될 듯. 이 작품 역시 새롭게 번역한 책이 어서 나왔으면 하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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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9-30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 한 권 읽은 건 없지만 저의 빈약한 독서에 큰 동기부여가 되네요. 이디스 워튼을 읽는다면 <이선 프롬>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19-09-30 12:40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주변에 대학에서 영어 선생하는 분들이 꽤 있는데, 공통점이 워튼을 상찬하더라고요. 전 <이선 프롬> 말고는 도무지 아니던데요. 아마 뭔가 있는 작가인 모양입니다. ^^;;

설해목 2019-09-30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놔~~~ 읽은 게 단 한권도 없어 혼자 퇴근길에 좌절했습니다. ㅜㅜ
그래도 한 권은 겹칠 줄 알았는데...
우선 추천해주신 책은 모두 장바구니로 고고 ^^

Falstaff 2019-09-30 22:04   좋아요 1 | URL
에휴, 설해목 님은 워낙 책을 다양하게 읽으시잖아요.
저야말로 잡독 itself 인 것을요. ^^;;
<맥티규>가 인상깊었는데요, 번역이 참 좋지 않아요.
아, 번역이 아니라 번역한 우리 말의 품질이 안 좋습니다.
다른 출판사가 다시 번역할 때까지 <미국의 비극>과 더불어 좀 기다리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slobe00 2019-09-30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치너, 아옌데, 워튼 빼고는 전부 안 읽은 책들이라 주섬주섬 담아봅니다~~~~잉고 슐체부터 읽어보고 싶네요^^
도서관 가서 책 고를 때 폴스타프 님의 추천 페이퍼 많이 참고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저는 워튼은 거의 다 재미있었고 하디가 살짝 지루했는데
캐스터브리지의 시장은 땡기네요~~^^

Falstaff 2019-09-30 22:05   좋아요 1 | URL
저도 워튼은 무지 안 좋아했어요. 근데 미치너 <소설> 속에서 아주 상찬을 하더라고요. 그래 뭔가 있겠지 싶어서 딱 한 권만 더 읽고 이 이상은 안 속는다, 셈치고 읽었더니 <이선 프롬>은 괜찮더라고요. ㅋㅋㅋㅋ
 

 

 

 4월부터 6월까지 읽은 책 가운데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던 책을 소개합니다. 책을 추천하는 일은 사실 좀 부담스럽습니다. 무슨 글을 공부해본 것도 아니고 그저 살며 인생을 즐길 거리 가운데 하나, 즉 취미로 독서를 하고 있는 형편에 무슨 책 추천씩이나. 그리하여 3개월마다 한 번씩 올리는 ‘이 책을 추천합니다.’ 글은 한 아마추어가 자기 식으로 좋은 책을 선정해 잊지 않기 위해 자국을 낸 것이라 여기시면 될 듯합니다. 책들을 추천한다고 해서 덜커덕 이를 믿고 구입해 읽으셨다가 취향에 맞지 않아도 저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점을 꼭 밝혀야 하겠네요. 순서는 제가 읽은 날짜순입니다.

 


1. 마리오 베네데띠, <휴전>

 
 우루과이 출신의 베네데티는 라틴 아메리카의 붐 문학적 소재를 쓰는 대신 전형적인 리얼리즘 방식으로 이제 정년퇴직 몇 주 남긴 늙은 회사원 마르틴 산또메 씨의 ‘황혼에 핀 꽃’을 그려놓았다. 스물다섯 살 젊은 신입사원 라우라를 사랑하게 되고, 라우라 역시 그것이 사랑인지 벌써 눈치를 챘는데, 반듯하지만 우울하고 염세적인 세계관을 가진 남자에게 젊은 라우라는 인생의 한 변곡점으로 작용을 할 수 있을까.

 


2. 커트 보니것, <고양이 요람>

 ‘고양이 요람’은 진짜 고양이더러 잠자라고 만든 요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선 흔히 두 명이, 유럽과 아메리카에선 보통 혼자 하는 실뜨기 놀이를 얘기한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필릭스 호니커 박사는 1945년 8월 6일 B29 폭격기에서 두 발의 원자폭탄 뚱보와 꼬마가 투하되던 시간에 난쟁이 막내아들 뉴트와 바로 이 고양이 요람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 호니커 박사는 한 장군의 독촉으로 지구상 모든 생명체를 절멸시킬 가공의 물질을 만들어내는데, 근본적으로 비딱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보니것의 우주적 유토피아?

 


3. 베시 헤드, <권력의 문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백 혼혈로 태어나 보츠와나에서 교사로 일하던 작가가 마치 자신의 일을 기록한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픽션이다. 세상에 왜 불공평, 그리고 이에 따른 차별이 그리도 많이 존재하는가. 그건 제목처럼 기본적으로 권력이 있고 없음에서 시작한다. 모든 차별과, 억압과 핍박은 권력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말로 써놓으니 쉽다. 그러나 신경증 증세가 심한 사람의 시선으로 씌어 있으면 점점 곤란해지기 시작한다. 그걸 한 번 경험해보시라.

 


4. 찰스 부코우스키, <팩토텀>

 제목대로 ‘잡역부’ 또는 ‘막일꾼’에 관한 소설. 또다시 우리의 행크 치나스키 형이 등장해서 끊임없이 사고치고, 해고당하고, 술 마시고, 싸움하고, 연애하고, 헤어지고, 다시 취직하고, 애먼 도시로 흘러들어가 다시 사고치고, 해고당하고, 술 마시고, 싸움하고, 연애하고, 헤어지고, 중고 타자기 하나 사서 글을 좀 써볼까, 끼적이기 시작하는 이야기. 부코스키, 아니, 치나스키의 팬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근본주의적 비트 소설.

 


5. W.G. 제발트, <현기증. 감정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무거운 대포를 끌고 무려 알프스를 넘었다는 거 아냐. 이때 숱한 사병들 가운데, 그때까지는 아니고, 나중에 위대한 작가가 될 앙리 벨이라는 소년이 있었으니, 우리는 그를 ‘스탕달’이라고 부르게 된다. 프랑스 군은 밀라노 근처 마렝고 전투에서 이탈리아 군에게 극적인 막판 뒤집기 역전승을 따내는데, 제발트는 전매특허인 특별한 미적 감각과 관찰력으로 스탕달의 일생,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 관한 글을 보태고 있다. 제발트가 제발트 한 책.

 


6. 엔리케 빌라-마따스, <바틀비와 바틀비들>

 

 숱하게 많은 작가들과 작가지망생들이 오늘도 붓을 꺾는다. 특정한 사람에겐 글을 쓰는 것이 영광의 길이지만, 다른 특정한 사람들은 글을 더 이상 쓰지 않는 것이 영광의 길이란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많은 작가들. 그들은 왜 글쓰기를 멈췄을까.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극소수 작가들을 추적하는 일보다, 자의건 타의에 의하건 도중에 붓을 꺾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작가들을 추적하는 일이 어쩌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에 관한 기록이 하나는 있어야 하겠지.

 


7. 아시아 제바르, <프랑스어의 실종>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의 식민지 알제리. 알제리는 종전 후에도 무려 17년 동안이나 더 독립투쟁을 해야 했고, 그 후유증으로 1990년대까지 독재정권 치하에서 북아프리카의 잠재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만다. 식민모국인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프랑스 여자와 살던 작가 베르칸은, 알제리에서가 아니라면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강박을 안고 귀국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때 알제리는 혁명(또는 쿠데타)의 와중에서 반 프랑스 정서가 전 국토를 뒤덮고 있던 것. 과거와 현재, 비극의 역사와 에로티시즘 사이를 오가는 엑스터시.

 


8. 이스마일 카다레,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

 1981년 12월에 알바니아에서 있었던 후계자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쓴 작품. 대내외적으로는 자살로 발표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완벽하게 폐쇄되어 불안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독재사회 속에서 사는 개인, 집단, 사회의 병리적 모습을 놀랄 만큼 섬세하게 그려놓았다. 독재체제가 전 인민을 집단 공황장애에 빠뜨리는 프로세스가 독할 정도로 잘 묘사되어 있다. 독재시절을 경험한 분들은 거의 완벽하게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듯.

 


9. 에이브러햄 버기즈, <눈물의 아이들>

 인도 출신 에티오피아 의사 가족 이야기. 엄마는 일란성 아들 쌍둥이 시바와 메리언이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리고, 아빠는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두 인도인이 이들을 키우는 소설. 시바는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타고난 천재성으로 산부인과 학에 놀라운 수준으로 올라서고, 메리언은 미국에서 고생해가며 의사가 되는데, 거기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과의가 된 아버지와 조우한다. 여기에 에티오피아의 현대사까지 겹쳐 흥미진진한 소설책이 만들어지니, 잠 안 오는 여름밤을 위해서 최고의 피서 책이 될 듯.

 


1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저항의 멜랑콜리>

 주의를 요함. 책 권쯤 읽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강추. 몇 십 년 만에 강한 추위가 몰려온 한 시골마을에 여태까지 멈춰서 있던 시계탑에서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서커스단이 들어오긴 했는데, 무엇을 가져왔느냐 하면,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 한 마리. 추위와 시계, 그리고 고래가 무엇을 우화한 것일까. 혹시 그것들이 트로이 목마처럼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가져올까? 우연히도 책을 쓴 시기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넘, 어, 간, 다.

 


11. 캐서린 앤 포터, <캐서린 앤 포터 - 오랜 죽음의 운명 외 19편>

 ‘외 19편’이면 모두 스무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는 뜻. 야, 어쩌면 그러냐. 어떻게 하나도 빼지 않고 스무 편의 작품이 다 좋을 수 있느냐는 말이지. 내가 중단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정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고루한 지역을 꼽으라면, 그곳이 유럽이라기보다, 미국 남부지방에 한 표 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곳 출신으로 불행한 과거를 지닌 캐서린 앤 포터는 소외당하고 약하고 피해입는 가엾은 것들을 따뜻하게 품고 있다. 어떻게 이제야 이 작가를 알게 됐느냐는 말이다.

 


12. 유진 오닐, <느릅나무 아래 욕망>

 격렬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해, 다 읽고 나면 후달린다.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듯. 미국 서부 판 <페드르와 이폴리트>. ‘격렬하다’와 ‘후달린다’는 단어를 쓰고는 한 마디도 보탤 수 없는 책.

 


13. 포드 매독스 포드, <퍼레이즈 엔드>

 포드 매독스 포드의 작품은 근본적으로 (좋은 소설이 다 그렇듯) 심리소설이다. 비록 1차 세계대전이 시작하기 전과, 전쟁 중, 전쟁이 끝난 후까지 아우르는 작품이지만, 스토리를 끌고 가는 건 거의 완벽한 신사 한 명과 그의 행실이 방정하지 않은 경국지색의 아내.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양도하는 남편과, 쉼 없이 남편을 괴롭히지만 괴롭힘 역시 사랑의 한 표시인 아내. 사주팔자가 상극인 커플. 급한 사람은 이 책 읽다 성질 버릴 수 있으니 조심하실 것.

 


14. 위앤커, <중국신화전설>

 아무리 취미생활로 독서를 한다고 해도, 기초가 잘 되어 있으면 암만해도 더 즐거운 책읽기가 되지 않겠는가. 이 책은 동양, 특히 동아시아 작가들의 책을 읽을 기초체력 단련이란 목표로 읽어도 좋다. 중국의 창세기부터 서주시대까지 각종 신화와 전설을 수집해 놓았다. 이색적인 동물과 식물, 반인 반수, 인종들까지 망라했는데, 나는 <서유기>를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더 재미있는 <서유기>가 될 뻔했기 때문에.

 


15.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천사, 바빌론에 오다>

 뒤렌마트가 쓴 희곡이면 일단 믿고 사서 읽는다. 뭐 그렇다고 이이의 희곡에 정답까지 다 들어 있는 건 아니다. 여기서도 하느님이 처녀를 하나 만들어 천사를 시켜 지상에서 가장 가엾은 인간에게 이 처녀를 주고 오라는 심부름을 보냈는데, 천사가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공정한 방법으로 누가 가장 불쌍한 인간인가 최종 전형을 마친 끝에 바빌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가 선정이 된다. 왕이 가장 찌질한 남자? 뭔가 은유가 있겠지. 그게 뭔지는 직접 알아보시라.

 


16. V.S. 나이폴, <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

 세상에 하는 일마다 어째 이 남자 비스와스 씨는 뭐 하나 되는 게 없을까. 이게 다 불길한 시간인 자정에, 머리가 아니라 다리부터 나온 육손이라서 그런 거라고, 트리니나드 사주 책에 적혀 있단다. 아빠가 죽고 시골 땅을 팔았는데, 그 땅에서 유전이 터지고 자기네 집은 날이 갈수록 거지 신세가 되는 거부터 시작해, 나이 들어 장가를 갔더니 처가살이를 하며 구박만 오지게 얻어먹는다. 그러면서도 천부적 독설가인 비스와스 씨가 어떻게 자기 집을 마련하게 되는지 궁상스럽지 않게 재미있다.

 


17.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리스본의 밤>

 이것도 기본적으로 사랑 이야기. 비자도 못 받았고, 체류기한은 다 끝나가고, 그랬다한들 뱃삯으로 300달러나 모자라 의기소침해진 ‘나’는 조금이라도 벌어볼까 싶어 도박장에 가서 그나마도 거덜이 나버린다. 이때 은혜처럼 등장한 슈바르츠 씨. 그는 기꺼이 비자 스탬프가 찍힌 여권과, 배표 두 장과 수중에 있는 돈을 건네주는 대가로 이 밤이 새도록 자기가 망명객으로 겪은 생애를 들어달라고 요구한다. 보통 망명객이 겪어야 했던 좌절과 불안과 공포가 잘 표현되어 있다.

 


18. 방영웅, <분례기>

 석서방댁이 똥독 위에 앉아 뭐가 쏟아지는 느낌이 들어 픽 옆으로 쓰러지는 순간 글쎄 아이가 쑥 나오지 않았겠어? 원래 변소에서 낳은 아이 이름엔 똥 분자가 들어가야 오래, 건강하게, 부자로 산다기에 이름을 똥례로, 한문으로는 분례로 지은 거 아냐. 근데 옛 말대로 됐냐고? 에이, 그럼 그게 인생인가. 나이 열여덟을 먹도록 중매 하나 들어오는 게 없어. 아비가 노름꾼에다 다 찌그러진 가난뱅이거든. 어떻게 나중에 진짜 상 노름꾼 애꾸에다 부잣집아들의 후처로 들어가게 돼. 재미있어. 욕 한 마디를 하더라도 이제 다 잊은 줄 알았던 어릴 적 욕이 나오더라니까. 나 참.

 


19. J.M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흠. 정색을 하고 말씀드리면, 이 책은 내 취향이 아니다. 나와 비슷한 성질, 성품, 기타 등등을 가진 분에겐 비추. 그러나 책이 주장하는 바에 관해서는 적극 동의하지 않을 수 없어 이 목록에 올린다. 특정하지 않은 가상의 제국, 파시스트 국가, 독재국의 식민지 또는 멀고 먼 변경에서 벌어지는 대 야만인과의 전쟁 이야기. 진정한 야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지만, 표현 방법이 나하고는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당신의 독서까진 방해하고 싶지 않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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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생책

 인터넷 친구가 어느 날, 내게 있어 어떤 것이 인생책이며, 어떤 문장이 인생문장이냐고 물었다. 흠. 인생책. 인생책이란 것이 머리 속에 도사리고 있다가 단박에 나오지 않더라. LDT, 레르몬토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로 이어지는 러시아 작가들, 이에 못지 않는 영어, 프랑스어, 독어권 거장들. 세르반테스를 필두로 라틴 아메리카까지 아우르는 스페인, 포르투갈 언어권 작품들. 게다가 인생책, 자신이 여태까지 살면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이란 뜻 비슷하리라 생각하는데, 그건 때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변하기도 하리라. 철조망 있지? 그걸 왼쪽 관자놀이로 집어넣어 오른쪽 관자놀이로 뺀 다음 누군가가 양쪽을 두 손으로 잡고 뱅뱅 돌리는 것 같은 기분. 철조망? 철조망, 하면 생각나는 작품이 있으신가? 철조망에 눈알이 걸린 채로 죽어간 인간, 누혜. 그를 만들어낸 작가 장용학. 아주 예전에 신구문화사라는 출판사가 있어(검색해보니까 지금도 있다!), <현대한국문학전집>을 내놓았고 그 가운데 네 번째 책이 "장용학"이다. 1965년 출간. 모두 스물 몇 권의 책으로 되어 있으며 소설과 시를 망라했다. 이 책을 생각하면 슬프다. 집안이 거덜이 나 가족 해체를 당하는 와중에 친척집 지하 창고에 맡겨둔 정음사 세계문학전집과 이 신구문화사 전집은 10년이 넘는 세월을 당해 심하게 손상되어 기어이 버려야 하는 상황에 처했는데, 이 가운데 "최인훈"과 "장용학" 두 권만큼은 절대 버릴 수 없었다. 쥐똥을 까맣게 뒤집어 쓴 지하실에서 발견한 장용학. 바싹 말라 순식간에 바스스 헤질 것 같은 책을, 스카치 테이프로 붙혀가며, 그 후 네 번을 더 읽었다. <원형의 전설>. 인생책을 찾는 일. 그건 내 가슴 속에 묻어버려 이젠 더 이상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거의 아문 상처를 다시 내보이는 일이었다는 걸 미쳐 몰랐다.

 

 

 책에는 <원형의 전설>과 중편 <비인탄생>, <역성서설>, 단편 <요한시집>, <현대의 야>, <상립신화>가 실려있으며, 여태까지 발표한 모든 장용학 평론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김현의 해설 <에피메니드의 역설>이 들어있다. 한자를 배우지 않으신 분들은 이 책을 읽을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조사를 뺀 나머지 거의 모든 단어가 한자로 되어 있어서. 이후 두산출판에서 같은 목차로 완전히 한글로 바꿔 출간한 적이 있는데, 희한도 하지, 난 도무지 읽지 못하겠어서 술친구 줘버렸다. 몇 번 이야기한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 그이는 무지하게 재미있게 잘 읽었단다.
 장용학은 환자였다. 무학여고 국어교사로 정년퇴직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97년이던가, 문학잡지에 마지막 인터뷰가 실렸다. 자신이 아직도 작가, 소설가로 불리는 걸 싫어했다. 이제 글을 쓰지 못하는데 무슨 작가며 소설가인가.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2. 인생문장
 숱한 문장 가운데 하나를 고른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불행하고 희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더 불행하다." 젊은 시절의 정호승이 쓴 시에 나온다. 이젠 비록 시 쓰는 기계에서 고치에서 실 뽑듯 비슷한 시를 가공 생산하는 업자지만, 젊은 시절 괜찮은 서정시인이었다. 이거? 아니. "이미 죽어버린 내 몸뚱이 위로 누군가 유유히 오줌을 갈기고 떠나갔어." 최승자의 처녀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서 나온 문장인데 꽤 근사하다. 이거? 이것도 아니다.
 대학에 입학했다. 당연하게 서클, 요즘엔 동아리라고 불리는 서클에 가입을 했다. 내가 활동하던 서클 바로 옆에 "철학연구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아 개방공간을 캐비닛으로 분리를 하고 지내던 시절이었다.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다. 요새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철학연구회 캐비닛에, 이후 몇 십 년이 지나 이젠 내 카톡 소개말에도 적혀 있게되는 인생문장이, 멋진 그림과 함께 쓰여 있었다.
 "진로眞露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정말이라니까. 보실랴?

 


3. 꼴값하는 영숙이
 영숙아, 어쩌려고.... 얘가 드디어 미쳤다. 그제 아침 변기 위에서 알았다. 염병할 계간지 '창피'가 영숙이의 중편소설을 실었단다. 창피도 미쳤다. 정말 개잡종들이다. 영숙이는 누차 얘기했듯이 데뷔작부터 플롯 표절로 시작해 오랜 세월 꾸준하게, 도전정신에 충만해 글 도둑질을 해 온 도둑년이다. 내 말이 비약이나 아마추어의 선입견이라고 생각하면 나무위키에서 검색해보시라. 어마어마하다. 근데 워낙 책이 잘 팔리는, 당연히 문학성 여부는 제쳐두자, 나는 영숙이가 쓴 <기차는 일곱시 반에 떠나네>이후 돈 아까워 절대 얘를 위해 돈을 쓰지 않았으니까, 하여튼 책이 잘 팔리니 백낙천, 글씨 잘 보세요, 낙청이가 아니고 낙천입니다, 낙천, 백낙천이 의붓딸을 삼았는지 어땠는지, 늙은 몸을 이끌고 맨발로 뛰어나와서, 세상 사람들아, 내 위대한 허명을 걸고 말하노니, 영숙이가 어떤 영숙인데 글도둑질을 하겠느냐, 절대 아니다, 라고 했으며, 애초에 그가 발행인이었던 출판사 창피 역시 그게 '문자적 유사성'이지 어떻게 표절이냐고 대한민국 국민과 독자를 정말로 우습게 본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언젠가 영숙이가 다시 나팔을 불며 "푸르스름한 말 한 필"(요한묵시록 6장 8절에서 인용) 위에 타고 등장할 것이다, 라며 걱정 비슷하게 했었는데, 이것 봐라, 이것 봐. 얘가 사람이야? 창피가 당대 지식인들이 모인 출판사야? 이 상녀러 연놈들이 지금 뭐 하는 짓인지, 뭐 애초에 이럴 줄 알았지만, 막상 당하니까 정말 우습고 가소롭다. 이러니 내가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문학작품에 정이 가겠어, 안 가겠어? 영숙이 얘도 이젠 나이도 먹고 했는데, 나이는 항문으로 먹었는지 아직도 철없고, 얌전하지만 버르장머리라곤 아예 없는 열두 살짜리 털도 안 난 아이 같으면 어쩌겠느냔 말이지. 이게 투정 아냐? 뭐라? 작가더러 글 쓰지 말라면 죽으란 얘기냐고? 아니다. 쓰던 말던 관심이 없지만 죽지는 말아라. 써. 안 쓰면 죽을 거 같다며? 그럼 써. 그리고 자비 출판해서 아는 사람끼리 돌려봐. 무대에는 나오지 말라는 얘기다. 어려운 말로 이런 걸 뭐라 그러는 줄 알아? 자숙自肅이란 거다. 죽을 때까지 자숙하라고. 영숙아, 넌 애초에 작가가 아니었어.

 근데 영숙이가 정말 영숙이는 아닌 거 같다고요? 맞습니다. 영숙이 아닙니다. 본래 이름이 있었습죠. 얘가 몹씨 좋지 않은 일을 했거든요. 우리말 문법에 이런 경우에 적용되는 기가 막힌 현상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데요,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초성자음 부끄럼 탈락'이라고. 그래서 이름이 '영숙'이로 바뀐 겁니다.

 

 

4, <분례기>에 관한 슬픈 이야기

 

 <분례기>에, 읽은 다음에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정신지체 부부가 등장한다. 정신지체자도 자신이 약간 모자르지만 비장애인과 똑같이 희로애락을 느끼며 인생을 산다. 그래 부부 사이에 아이가 하나 생기는데 산통이 너무 커서 엄마가 아이를 보기만 하면 눌러 죽이려고 하는 거다. 그래 시어머니가 아이를 키우기에 이르는데, 문제는 퉁퉁 붓는 젖.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않으면 젖이 딱딱해지면서 고통스러운 유방통을 겪는다고 한다. 그래 이걸 짜주어야 하건만 어떻게? 이때 같은 정신지체 장애인인 남편이 아이 대신 젖을 쭉쭉 빨아먹는다. 근데 암만해도 밍밍하고 좀 느끼할 거 같지? 남편도 딱 그렇다. 그래 젖을 다 빨아먹은 다음에 충청도 예산 사투리로 아내에게 한 마디 한다.
 "짐치."
 표준어로 하면 '김치'. 이게 구개음화되어 '짐치'로 발음하는 것. 젖을 먹어 느끼한 입을 김치 한 조각 먹어 말끔하게 입가심 하는 장면. 이 얼마나 재미있는가. 그래 이 이야기를 마누라쟁이한테 해주었겠다! 이게 사달. 내 마누라, 가는 곳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문제의 이 남편이라는 듯이 마구 해댄 거다. 어쩐지 마누라하고 친한 여자들 나 보면 싱글싱글 쪼개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이런 일이. 하이고 나 참. 쪽팔려 내가 사는 작은 도시에 함부로 나다니지 못한다.
 여기까지면 뭐 그러려니 할 수도 (없지만 굳이 이야기 하자면) 있지만, 작은 아이도 그게 나 젊은 시절 내가 저질렀던 만행인줄로 확신하고, 엄마 말씀이니까 분명히 사실일 거야, 자기 애인한테, 지금은 물론 엑스 걸프렌드지만, 고스란히 다 말해줬단다. 밥 먹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밥알을 튀어가며 길길이 뛰었다. 아니라고, 그건 방영웅이란 소설가가 쓴 <분례기>에서 나오는 일화라고. 네 엄마한테 물어보라고. 아이가 엄마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니까, 염병할 마누라가 배시시 웃으며, 그게 사실은, 이러더라.
 <분례기> 초판본도 역시 친척 지하실에서 전사해버리고 만다. 그래 새 책을 한 권 구하려 오래 알아봤다가 이제 한 권 발견했다. 6월이나 7월에 읽을 거 같다. 아 썅. 이 책 찍은 데가 출판사 '창피'다. 이 출판사가 환장하겠는 건, 맘에 들지 않으면 안 읽으면 그만인데, 도무지 읽지 않을 수도 없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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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5-30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전 장용학 책은 ‘책세상‘에서 나온 <요한시집> 밖에 없는데, 저 한자투성이 장용학 책은 정말 탐나네요. 탐난다고 그 한자를 읽을 자신은 없습니다만. ㅋㅋㅋ

그나저나 영숙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백낙천ㅋㅋㅋ 창피 ㅋㅋㅋㅋㅋㅋㅋ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하셨군요. ㅋㅋㅋㅋ

Falstaff 2019-05-30 15:20   좋아요 0 | URL
ㅋㅋㅋ 웃으면서 읽으셨다니 저도 좋습니다.
저 한자투성이 신구문화사 전집의 ˝최인훈˝ 편에 실린 <광장>도 디테일이 문지에서 나온 것하고 좀 다릅니다. 이래저래 굉장히 귀한 전집으로 변신해서 신구문화사의 대표적 과거 업적으로 승격했더군요. 최악의 보관상태라서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생각날 때마다 아주 절통입니다.

syo 2019-05-30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세로쓰기다..... 사진에서 굉장한 위엄이 느껴집니다.

요며칠 영숙이 사건에 관한 많은 글들을 읽었지만, 그 글들은 이제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초성자음 부끄럼 탈락‘이라니. 으아아아아아아아(‘으하하하하하하‘의 초성자음 포복절도 탈락)

Falstaff 2019-05-31 09:33   좋아요 0 | URL
게다가 두 줄 세로쓰기랍니다. 그래 두껍지 않은 책에 많은 분량을 실을 수 있던 것이지요. 글씨가 너무 작아 이젠 읽지 못해요. ㅠㅠ

ㅎㅎㅎ 재미있으셨나봅니다. 고맙습니다.
 

 

 

 3개월에 한 번 씩 이런 추천 비슷한 글을 올리는데, 올해 첫 3개월은, 허허허, 경사로 좀 바빴습니다. 정초부터 아이 이름 하나를 지어 주었고, 이달 말에는 큰애 잔치를 무사히 치뤘습니다. 그래 이래저래 바쁜 관계로 아무래도 읽은 책이 많지 않습니다. 권 수로 55권, 편 수로 51편을 읽었군요. 이 가운데 서재 친구와 하필이면 제 알라딘 서재에서 걸음을 쉬어가시는 분들께 추천할 만한 책을 골라봤습니다. 순서는 제가 읽은 날짜 순입니다. 조금이나마 읽는 분들의 독서생활에 도움이 되면 보람이겠습니다.



1. 윌리엄 스타이런, <소피의 선택>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여인 소피와 광기어린 천재를 지닌 유대인 남자 네이선. 둘의 광적인 사랑은 깊숙한 비밀을 은폐하는 '필연적 거짓'의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랑조차 절망. 그만큼 절대적인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욱 깊은 우울과 체념과, 이젠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은폐해온 진실을 짊어져야 하는데, 결국 이들 사랑의 종착점은 어디일까.



2. 조르주 페렉,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동네 양아치 형의 외모를 가진 유대인 작가 조르주 페렉이 입심을 다 해서 만든 한 편의 큰 구라. 70명의 부자가 가진 것보다 더 큰 부를 소유한 독일 출신 미국 이민자 헤르만 라프케. 그가 미국의 독일 주간German Week을 위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배경을 빼곡 채운 자신의 콜렉션을 보란 듯이 과시하기에 이른다. 위대한 컬렉션들은 관객들에게 은밀한 합창을 들려주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3. 세르게이 도브라토프, <여행 가방>

 

소비에트에서 쫓기듯 망명길에 오를 당시 세관에서는 세 개의 여행 가방만 허락할 뿐이었음에도, 작가는 겨우 하나의 가방밖엔 챙길 것이 없었다. 하여간 미국에 도착해 어언 20년 가까이 흘러 새로 생긴 말썽쟁이 아들이 벌을 받느라 벽장 속 가방 위에 앉아 있는 바람에, 드디어 처음 열어보게 된 것. 속에는 소련 시절에 애지중지 했던 몇 가지 물건들이 들어 있고 이들마다 독특한 풍자와 허풍과 객기가 반짝거리는데.



4. 치누아 아체베, <사바나의 개미 언덕>

 

영국이 물러가 해방이 됐다고 해도 진정한 피식민은 끝나지 않은 것. 대책없이 주어진 해방을 맞은 아프리카 가상국에서 벌어지는 해방의 후유증과 반half식민의 상징적 체제인 독재 정권의 등장. 지식인들은 독재에 저항하거나 빌붙어야 하고, 인민들은 누백년 이어온 자신들의 정서와 독재 정권의 이해에 따라 갈등을 맞아야 하는데, 이걸 신생국가의 성장통이라고 가비얍게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아체베의 팬이라면 놓치지 않아야 할 책.



5.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이 책이 아동들을 위한 동화라고? 천만의 말씀. 이 여행기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실체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 소인국과 대인국, 도덕적인 말horse들의 나라 등 네 번의 행해를 하면서 걸리버는 두 페이지에 한 번씩 영국과 유럽의 문화와 정치체제와 귀족들의 이면을 날카롭게 헤쳐가며 비틀어버린다. 다만 18세기 소설이라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조금 지루할 수도 있을 터.



6. 쥘리앵 그린, <잔해>

 

소심한 인간의 저 깊숙한 형질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키가 크고 건장하며 잘생긴 필리프. 결혼 첫날 밤의 침상에서 갑자기 높은 소리로 홍소를 쏟아내더니 딸꾹질을 시작하는 아내. 이후 아들을 낳고 부터는 전혀 한 자리에 든 적이 없는 건조한 부부. 이들 사이에 끼어든 한 명의 여인이 있으니 처형.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부유한 남자의 찌질함도 때론 소설의 매력적인 소재가 되기도 한다.



7.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드디어 출간한 그리스어 직역. 세 번째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 주인공 조르바가 60대 노인이어서 그런가, 이 책은 나이가 들어 읽으면 더욱 좋다는 결론. 스스로 조르바의 팬이었던 고 이윤기 선생도 결국 못보고 갔지만 직역한 유재원 번역본이 나왔다는데 만족하리라 믿는다. 여태까지는 읽어보지 못한 프롤로그가 붙어 있는 것도 신기했다. 앞으로 그리스어-불어-영어-한국어 번역의 이윤기 본 <그리스인 조르바>는 잊으시라.



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이 책 역시 조주호에 의한 스페인어 직역이 나왔다. 만연체 문장을 될 수 있는대로 문장 본래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번역한 것이, 나는 진짜 좋던데, 일부 독자들에겐 해독상 어려움을 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나는 이 책으로 <백년의 고독>이 정말로 빼어난 명작이란 확실한 동감을 표할 수 있었다. 마르케스가 만든 필생의 고향 마꼰도에서 벌어지는 부엔디아 일가 이야기, 정말 재미있다.



9. 존 파울즈, <만티사>

 

재미있다가 한 순간의 변주로 철학적 사변으로 넘어가는 소설. 주인공 마일스 씨는 자기가 마일스 그린인지 마일스 데이비스인지도 모를 기억상실증에 빠져 있는 환자. 놀랍게도 기억을 관장하는 뇌기관이 생식을 담당하는 중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구라를 침으로 해서 소설의 전반부는 여간한 강심장이 아니라면 내놓고 읽기 힘들게 만드는데, 후반으로 가면? 상황 역전. 쉽게 읽히지도 않아 자신의 무지몽매를 한탄할 수도 있으니 주의할 일.



10. V.S 나이폴, <도착의 수수께끼>

나이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 작품. 그저 서인도 제도의 작은 섬 출신으로 별 재미없는 성장소설 쓰다가 운좋게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물인줄 알았다가, 화들짝 놀랐다. <미겔 스트리트>를 떠나 이제 코스모폴리탄 영국의 런던에 도착해 학교를 다니고, 글을 쓰고, 필명을 얻어 이제 스톤 헨지가 바라다보이는 시골에 정처를 정할 때까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는데, 자연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것을 감상하는 일이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을까.



11. 다니엘 페낙, <산문팔이 소녀>

 

솔직히 다른 작품에 비해 좀 떨어지는 품질이다. 당연 내 생각으로. 하지만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한 건 재미있다는 면. 일찍이 <몸의 일기>를 통해 청소년 시절부터 늙어 명이 다할 때까지 자신의 몸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일기형식으로 쓴 전작을 생각하고 읽었다가 갑자기 프랑스판 누아르 소설을 읽게 되어 당황스러웠는데, 아이고, 당연히 억지와 무리가 뒤따르지만 정말 재미있어 그런 거 다 용서가 되는 거, 이거 이해하시겠지?



12. 호르헤 볼피, <클링조르를 찾아서>

 

가상의 수학자 구스타프 링스를 등장시켜 20세기 중반의 유럽에서 벌어진 과학과 수학의 발전,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진행되던 핵폭탄 제조 과정을 둘러싼 미스테리를 설명하게 구성된 첩보 소설. 링스 박사가 나치에 의하여 반역죄를 적용받아 분명히 사형 선고를 받을 찰나, 연합군의 폭격으로 건물 지붕이 무너지며 벽돌이 떨어지면서 판사의 해골을 쪼개는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인물. 이제 원자탄 기술이 소련 연방으로 전해지려는 위험천만의 시절에 진짜 스파이는 누구일까. 궁리하지 마시라. 읽기 전엔 절대 알 수 없을 터이니.



13. 리처드 포드, <독립 기념일>

 

지난 삼 개월 동안 제일 재미있게 읽은 책. 전처와 전처의 남편이 자기 아이들 둘과 살고, 자신은 일정 기간에 한 번의 만남만 허락되는 이혼남 프랭크 배스컴. 이이가 독립기념일 연휴를 맞아 문제아 맏아들 폴과 함께 농구, 야구 명예의 전당을 찾아 길을 떠나는데, 당연히 우여곡절이 있어 재미있는 장편소설 한 편을 쓸만한 이야기 거리가 생긴다. 아들 폴로 말하자면 부적응증이 심해 매사 삐딱한 전형적 반항기 청소년.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 아들의 험난한 연휴 보내기란?



14. 아리엘 도르프만, <블레이크 씨의 특별한 심리치료법>

 

친환경 기업정신과 윤리경영을 모토로 한 거대기업의 회장 블레이크 씨. 이이한테 난데없이 닥친 불면증. 이를 다스리기 위해 심리치료를 선택하는데, 있는 게 돈이니, 한 가정에 온갖 소형 CCTV를 설치해 가족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관찰할 수 있는 관음과, 돈을 매개로 해서 해당 가족의 행운과 불행을 조절할 수 있는 가히 신적 인간으로 등극하는 블레이크 씨. 무엇보다 역자 김영미가 번역한 한국어 문장에 대한 기억이 특별했던 책.



15. 미셸 오스트, <밤의 노예>

 

책 읽기를 마칠 때까지 절대 뒷표지에 쓰인 출판사 책소개를 읽지 마시라. 그것만 피해가면 당신은 참 좋은 소설 한 편을 감상할 수 있으리니. 내가 간직했던 우상, 책의 주인공 필립에게는 자신의 아버지인데, 우상이라 함은 그냥 내버려두고 마음 속에서만 자꾸 확장을 하게 해주어야지, 정말로 우상을 찾아 실체를 발견하면 누구든지 일정량의 우러름이 깎일 수밖에 없을 것. 이런 것이 재미있는 일화와 함께 등장해 재미를 더욱 배가시킨다.



16.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보이노비치, <병사 이반 촌킨의 삶과 이상한 모험>

 

붉은 군대의 제대 말년, 그러나 지독한 고문관 이반 촌킨. 그가 시골 한 구석에 불시착한 1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하던 고물 복엽 비행기를 지키라는 보초의 명령을 받고 도착한 자리 바로 옆에는 숫처녀 뉴라 벨라쇼바가 혼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으니, 이미 배경부터 교통사고가 예약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붉은 군대와 농민들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는가 하는 촌철살인적 농담과 재담들. 후회하지 않으리.



17. 너대니얼 호손, <일곱 박공의 집>

 

욕심많은 유력가가 원래부터 터를 잡고 살던 목수를 마법사로 몰아 종교재판 끝에 목매달아 죽이고 집터와 샘을 빼앗아 그 자리에 박공이 일곱 개에 달하는 지역의 랜드 마크 저택을 지으니 바로 일곱 박공의 집. 목수는 죽어가며 신은 저자에게 피를 마시게 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고, 유력가는 의자에 앉은 채로 넓은 넥타이에 많을 피를 쏟은 채 죽어 있는 상태로 발견된다. 두 집안에 오랜 세월을 걸쳐 내려온 저주와 복수. 이것은 어떻게 해소가 될지.



18. 허먼 멜빌, <허먼 맬빌 : 선원, 빌리 버드 외 6편>

 

양심적인 단편선. 다른 출판사에서 찍었으면 족히 세 권의 얇은 단행본으로 만들었을 듯. 총 일곱 편의 중단편이 들어 있다. <바틀비>와 <선원, 빌리 버드>를 읽기 위해 샀다가, 그것들은 물론이고 <꼬끼오, 혹은 고귀한 수탉 베네벤티노>도 재미있게 읽었다. 인류 문화유산으로 남을 <모비딕>을 쓴 작가가 중단편에서도 이리 흥미로운 시도를 했었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19. 주나 반스, <나이트 우드>

 

여성 퀴어 소설. 아마 레드클리프 홀의 <고독한 우물> 이후 8년만에 발간한 두 번째 여성 퀴어일 듯.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간 동성애도 이제 새로운 소재가 되지 못하니 새삼스레 그런 방면에 관심을 둘 필요 없고, 딱 하나, 예스럽고 화려한 문장에 방점을 두어 감상하는 것도 매우 좋은 독서법이 될 것. 독자는 이 작품 역시 젊은 역자 이예원의 노고에 감탄하게 되리라.



20.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개선문>

 

40년이 넘어 재독한 인생책.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1년을 파리를 무대로 독일 출신 의사 라비크와 삼류 여배우 조앙 마두의 사랑과 복수를 그린 작품. 작가 스스로 나치의 등장과 더불어 망명길에 올라야 해서 라비크의 묘사가 더욱 충실해질 수 있었을 터. 역시 반전문학 하면 레마르크. 이제 그의 또다른 망명소설 하나를 보관함에 두고 있으니 늦어도 6월엔 읽을 거 같다. 안개낀 11월의 새벽, 파리 센 강의 우울.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개선문>을 읽을 이유가 되리라.



21. 트루먼 커포티, <풀잎 하프>

 

반나절이면 계산 다 될 짧은 장편. 그럼에도 성장소설이 품고 있는 아스라함을 어찌 이리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어린 나이에 천애 고아가 된 '나'와 두 명의 당숙아주머니들. 이들과 함께 사는 늙은 흑인 하녀 캐스린. 이야기가 확장됨에 따라 등장하는 아들 둘로부터 소외당한 홀아비 옛 지역 판사, 어려서부터 정신 이상인 어머니에게 혹독한 훈육을 받고 자란 젊은 가장. 이들이 서로 연대하여 서로를 위무하고 어려움의 시절을 관통하며 성장하는 광경이 사람의 가슴을 띵,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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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9-04-01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라는 상투적은 댓글이지만, 진심이랍니다. ^^

Falstaff 2019-04-01 10:5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좋은 표현을 많은 사람들이 쓰니 ‘상투적‘이 됐겠지요. ^^

싱클레어 2019-05-12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만간 민음사패밀리데이에 가서 담아 올 쇼핑 목록을 적고 있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레마르크 소설은 저도 정말정말 좋아하는데 <개선문>은 이번에 이벤트로 받았습니다. 치누아 아체베의 작품도 좋아하는데 <사바나의 개미 언덕>, <소피의 선택>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Falstaff 2019-05-13 09:15   좋아요 0 | URL
책 선택에 도움이 되면 저도 참 즐겁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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