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장이의 딸 - 상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아고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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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조이스 캐롤 오츠의 책이 번역 출간되어 성황리에 읽히고 있다. 읽어보려 책을 선택한 순간, 아쉽게도 나하고 궁합이 덜 맞는 역자의 이름이 표지에 박혀 있었다. 처음 대하는 작가의 작품을 선택할 때 어떻건 간에 마음에 들지 않는 역자의 문장으로 읽었다가 엉뚱하게 작가 본인을 경원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어서, 오츠의 다른 작품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고른 책이 <사토장이의 딸>이다. 사토(莎土)장이는 “무덤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 원 제목도 ‘The Gravedigger's daughter’ 즉, 무덤 파는 사람의 딸이다. 모두 두 권 950여 쪽의 장편소설이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조이스 캐롤 오츠가 1938년생. 만81세. 1963년 등단했으니 작가생활 56년 동안 장편소설 58편을 발표했다. 외에도 드라마, 노벨라, 단편소설, 에세이 등 이이야말로 평생 쓰는 일에만 전념해온 사람이다. 그러니 한 스토리를 펼쳐가기 위해 설치한 구조나 구성 같은 것에 관해 감히 아마추어 독자가 섣불리 불만을 토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 한 사건의 필연성을 완전하게 갖추려 타당한 원인을 제공하기 위한 집요한 설명이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쯤은. 이런, 나중에 이야기해야 마땅한 것을 미리 밝혀버리고 말았다.
 먼저 사토장이 제이콥 스워트 씨를 소개한다. 스워트 씨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1920년대에 독일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상류계급의 자재들만 다닐 수 있던 남자 고등학교에서 다년간 수학교사를 역임하며 이후 과학서적 전문 출판사의 뛰어난 편집자로 활약하던 중 재수 없게 히틀러가 집권하는 바람에 아내 안나, 두 아들 허셀과 어거스트를 이끌고 전 재산을 써 미국행 배를 탄 인텔리 유대인이다. 몇 달에 걸친 항해 끝에 뉴욕에 도착해 모든 이민자들은 하선을 마쳤으나 창도 없는 더러운 공간에서 아들들이 다 보고 있는 와중에 안나 스워트 여사는 무려 열한 시간의 산통 끝에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속에서 다리부터 빠져나온 딸을 성공적으로 순산하여 이름을 레베카로 하고, 아이를 누더기에 싼 채로 약속의 땅에 첫 발을 내딛기에 이른다. 레베카는 그리하여 다른 가족과 달리 미국의 속지주의 정책에 의거해 낳자마자 미국인이라는 타이틀이 달리고, 부모와 형제들은 여전히 미국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외국인의 처지에 머물게 된다.
 제이콥 스워트 씨가 유럽, 그것도 독일 땅에서 나치의 손아귀로부터 도망치는 와중에 그는 철저하게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을 체험한다. 그리하여 길고 긴 장편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약자들은 금방 죽음을 당한다.”
 제이콥 씨가 자식들에게 두고두고 강조하는 것은 그러니 ‘약점을 숨겨야’ 한다는 것. 선생의 경험에서 비롯한 철학 속에, 유대인이라는 것도, 평생 육체적인 일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도, 하다못해 풍부한 지식과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삶의 정글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 제이콥씨에게 뉴욕 변두리의 지방정부에서 묘지관리를 맡기자마자 정확한 선택을 하신 겁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는 부지런하며 몸으로 하는 일은 자신 있습니다. 라고 지방 공무원에게 말한다. 그리하여 묘지와 묘지 근처 습기찬 지역에서 돌로 만든 자그마한 오두막에 다섯 가족이 정착하게 되는 것.
 고된 일과와 사토장이에 대한 지역주민의 멸시, 독일 이민자로 2차 세계대전 전 미국인들의 불쾌감, 여기에 또 (더러운)유대인이란 정체성에다 그동안 겪었던 온갖 수난 속의 생존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발아시킨 비정상적 두뇌활동. 이것들이 과학서적 출판사 편집자 출신의 제이콥 씨뿐만 아니라 한때는 아르투르 슈나벨 만큼은 아니지만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칠 줄 알았던 부르주아 출신의 안나, 그들 사이의 유복한 유년기를 지낸 두 아들의 뇌 속에서도 발아하기 시작한다. 낳자마자 미국인이었으며 한 번도 여유롭게 살아본 경험이 없는 주인공 레베카는 자신을 사랑해주던 아버지가 차츰차츰 변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역시 사토장이의 딸에게 쏟아지는 멸시를 거친 싸움을 통해 이겨가며 소녀로 성장해간다. 대강 그림이 그려지실 것.
 그러던 어느 날, 매장을 위해 공동묘지에 온 한 신사가 제이콥 씨에게 평상시 같으면 자연스러웠을 무람없는 말을 했고, 이를 들은 제이콥 씨는 아무 대답도 없이 돌오두막집으로 가더니 천에 싸인 뭔가를 외발 수레에 싣고 와 ‘나리’들을 향해 갑자기 “나치 살인자들! 더 이상은 가만 안 둬!”라고 외치면서 거대한 엽총을 쏴 가슴과 그 위에 놓였던 손을 통째로 날려버린다. 눈이 홱 돌아간 제이콥 씨는 엽총을 들고 집에 들어오더니 아내 안나의 머리를 향해 또 한 방을 쏴버리고, 이어서 레베카의 가슴에다 총구를 댄 채 잠깐 생각에 잠긴다. “너. 너는 여기에서 태어났어. 저 사람들이 너는 건드리지 않을 거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총구를 레베카의 가슴에서 자기 머리통으로 돌리고는 발사해버리고 만다. 어마어마한 큰 총소리 뒤에 피와 뼈의 파편과 뇌의 잔해가 레베카의 머리카락에 엉겨 붙으면서, 이미 두 오빠가 이미 집을 떠나버린 레베카는 완전히 천애고아가 돼버리고 만다.
 하지만 아직 레베카의 불운한 초년운세는 끝나지 않는다. 1936년에 태어나 1999년에 죽을 운명인 레베카. 동시에 피투성이가 되어 부모가 죽어버리는 것과 견주어 더하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혹독한 젊은 시절의 고통이 또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20대 중반부터 도래한 두 번째 시절을 맞아 몇 백만 분의 일의 확률에 당첨이 되어 험한 초년운세가 끝나고, 살면서 누구나가 겪는 애환을 제외하면 한 마디로 정의해, ‘아메리칸 드림’을 완성하는 신데렐라의 관을 쓰는 이야기.
 흠. 이런 스토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불행한 소녀가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되어 하늘에서 우수수 행운의 별이 줄지어 쏟아진다는 결말이라니. 난 신데렐라가 싫단 말이다. 이런 결말이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애초 구상이었을까, 아니면 출판사 편집자의 권유에 의해, 책을 많이 팔기 위한 의도였을까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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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be00 2019-12-13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이 분 책들 좀 편차가 심한 것 같아요. 가장 최근에 읽은 위험한 시간 여행도 딱히 좋지는 않았는데 워낙 다작하셔서 그런가..;;

Falstaff 2019-12-13 13:54   좋아요 0 | URL
전 이이의 작품들 제목을 보면서 혹시 장르문학 작가 아닌가 싶어 읽기를 머뭇거렸습니다. 근데 워낙 많이 쓰긴 썼습니다. ^^;;
 
광대 샬리마르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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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바로 소설 속 이야기로 들어가자.
 80년대 후반 또는 90년대 초반, 늘씬한 체격에 잘 생긴 외모와 거의 무한정한 재산을 보유한 전직 출판업자, 레지스탕스, 첩보원, 대사, 경제학자, 대 테러리즘 국가조직의 부서장, 영화제작자이며 이혼남인 막시밀리안 오퓔스 씨는 그의 늦둥이 딸이자 혼외자녀인 스물네 살의 미인 인디아의 집 앞에서 자신의 건장한 유색인 운전수가 그은 식칼에 의해 거의 참수 수준으로 목에 깊은 자상을 입어 선홍의 피를 한없이 뿌리며 만찬 상 위의 할랄 닭고기처럼 처참하게 죽는다. 할랄. 이슬람 식 만찬을 위해 이슬람식으로 사육해 이슬람식으로 도살한 식재료처럼. 첫 장 ‘인디아’에서 사건이 이렇게 벌어진다. 루슈디의 다른 작품 <수치> 속에서도 거의 앞부분에 앞으로 벌어질 행위와 살인을 미리 알려주고 그것에 이르는 과정을 밝히는 구도를 사용한 것과 비슷하게, <광대 샬리마르>도 애초부터 국가적 주요인물인 막스 오퓔스 살해 사건을 올려놓은 것.
 이후 이야기는 매우 거창하게 펼쳐진다.
 파키스탄과 인도 국경 사이의 카슈미르 지역. 그곳의 작은 마을 파치감(이 동네 이름을 몇 번이나 ‘파김치’로 읽었는지 모르지만). 파치감에서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가 서로 잘 조화하여 이교도들이라기보다 그저 같은 카슈미르 사람이라는 정체성으로 고유한 문화를 만들어 잘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의 파키스탄과 힌두교를 믿는 인도가 서로 세력을 다툼으로 비극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 전에 이슬람 청년 노만 셰르 노만과 힌두 처녀 부니 카울이 서로 사랑하고, 사랑해서 관계를 맺고, 이게 알려져 이교도들 간의 결혼이 이루어지게 된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카슈미르 정서라는 것 하나로 주민들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것. 파치감은 전통적으로 카슈미르의 공연예술을 이어가는 매우 중요한 곳이며 노만 가문이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네 명의 형제 모두 공연에 참여하는데, 동네의 가장 어여쁜 이교도 처녀를 얻어 결혼에 성공한 노만 셰르 노만이 바로 ‘샬리마르’라는 예명으로 탁월한 재능으로 줄타기 곡예를 벌이는 광대이며 작품의 주인공이다.
 알자스 지방에서 대대로 출판업과 고급 문예잡지를 발간해 온 부르주아 유대인의 아들 막시밀리안 오퓔스. 2차 세계대전 발발 즈음해 부모와 함께 망명을 시도했으나 치매 증상처럼 보이는 부모의 완고함 때문에 바다를 건너지 못해 결국 부모가 나치수용소의 의료 마루타로 생을 마감한 후 레지스탕스로 항독 전선에 뛰어든 인물. 이야기를 끌고 가는 캐릭터답게 아름다운 용모와 무한정한 부와 좋은 두뇌의 소유자로 망명 드골정부에서 드골의 눈 밖에 나 미국으로 이민한 바람둥이. 눈부신 업적으로 주 인도 대사로 임명되어 뛰어난 활약을 벌이지만, 카슈미르 탐방 때 한 무희의 매혹적인 자태에 반해 그녀를 미 대사관으로 불러 공연하게 하고, 수도에서 살면서 최고 무용 선생을 사사하게 해주는 대신에 자신의 정부로 취해버린다. 무희의 이름이 부니 카울. 막스와 부니 사이에 생긴 아이가 바로 인디아 오퓔스, 부니가 지어준 이름으로는 ‘카슈미아 노만’이 된다.
 부니는 결국 아이를 막스의 법적 아내에게 빼앗기고 다시 카슈미르로 돌아가지만 그곳 주민들에 의하여 이미 법적으로 사망신고를 마친 상태. 그리하여 산송장으로 남은 생을 이어가야 하며 마을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남편 셰르 노만을 사랑했었다는 걸 너무 나중에야 깨달은 그녀에게 남편이 줄 수 있는 것은 부정한 아내의 목숨을 거두게 하는 일. 그러나 그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이미 부니는 죽은 상태, 유령의 몸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둘이 연애할 때, 노만 셰르가 농담 삼아 한 맹세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만일 네가 다른 남자의 자식을 낳으면 너와 너의 자식을 죽여 버리겠다.”
 노만 셰르의 남은 생은 자신이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바쳐진다. 그리하여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조직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천성적으로 갖고 있어 외줄타기를 그토록 훌륭하게 할 수 있게 만든 운동신경을 보태 그는 인간병기로 변신한다. 카슈미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싸고 소비에트가 침공을 하고 이를 막기 위해 보내준 미국의 무기로 저항을 하다가, 이제는 다시 그들을 향해 총부리를 돌리게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애초부터 종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맹세를 완결시키기 위했던 것. 그리하여 20여 년이 흐른 후, 셰르 노만, 광대 샬리마르는 막스 오퓔스의 운전수 겸, 집사 겸, 비서까지 헌신을 하는 아랫사람으로 일하기에 이르러 어느 날 아내와 아내의 정부 사이에서 나온 ‘인디아’이기도 하고 ‘카슈미아’이기도 한 의붓딸이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서, 백주 대낮에 부엌에서 쓰는 식칼로 아내의 정부의 목을 깊숙하게, 거의 뒷목의 피부만 남아 달랑거릴 정도로 베어버렸던 것.
 이 책은 그리하여 크게 ① 남아시아, 특별히 인도 북부 지역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와 유럽/아메리카의 문화의 충돌, 그리고 ② 인도, 파키스탄 사이에서 종교 갈등으로 새우등 터지는 최고의 자연 유산 카슈미르 지역의 불행을 그리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이라면 광대 샬리마르는 오리엔탈 문명의 문화이고 자존심일 수도 있고, 종교적 폭력일 수도 있으나 어떤 경우라도 유럽식 사고, 문화는 샬리마르와 그의 동양식 문화를 야만으로 규정하여 수용 하지 못하게 된다. 여기에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루슈디 특유의 신비주의적인 색채도 적절하게 가미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특히 루슈디가 강조하고 싶었던 점은 문화충돌과 종교 갈등이 앞으로도 화해의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전망으로 읽었다. 그의 비관적인 미래관이 당분간은, 아니, 앞으로도 상당한 세월 동안 타당할 것으로 보이는 것도 비극이긴 하다.
 그리하여 이 책은 거대한 담론이 되는데, 글 쓴 이가 루슈디라서 이 세계적 이야기꾼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도 결론이 어떻게 날까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위에서 이야기한 소설의 내용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큰 프레임이 이렇다는 것이고 세목별로 들어가면 저절로 풍부하고도 풍부해 넘쳐버릴 것 같은 이야깃거리가 마치 35가지 혹은 60가지 코스 요리로 만드는 카슈미르 전통 만찬인 와즈완을 맛보는 것과 비슷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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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be00 2019-12-12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만 루슈디 읽어보려던 중인데 폴스태프님의 리뷰 읽으니 확 땡기네요~ 조지프 앤턴 먼저 읽고 소설 읽으려 했는데 이 책 궁금합니다~ 집에 손도 안 댄 무어의 마지막 한숨이랑 악마의 시도 있는데 꼭 없는 책이 더 땡기는^^;

Falstaff 2019-12-12 12:06   좋아요 1 | URL
ㅎㅎㅎ 다 인생입죠.
전 루슈디 가운데 <한밤의 아이들> <광대 샬리마르> <수치> <악마의 시> 순서로 좋더라고요. 단편집 <이스트, 웨스트>는 루슈디 책으로 보면 경쾌하고, <하룬과 이야기 바다>는 그저 그랬습니다.

slobe00 2019-12-12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밤의 아이들에 이어 두번째라니~ 와ㅡㅡㅡ폴스태프님 순위를 염두에 두고 집근처 알라딘 가봐야겠어요~^^

Falstaff 2019-12-12 13:23   좋아요 0 | URL
읽어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근데 제가 읽은 루슈디가 많지 않아서요. ㅜㅜ

레삭매냐 2019-12-12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흥미롭게 읽은 그런 책이었습니다.

루슈디 덕에 카슈미르 여행을 한 그런 기분
이라고나 할까요.

Falstaff 2019-12-12 13:58   좋아요 1 | URL
옙.
카슈미르가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네요. 저도 카슈미르, 사마르칸트 뭐 이런 동네에 로망을 품고 있답니다. ^^
 
생활이라는 생각 창비시선 392
이현승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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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1973년생. 시집의 출간 연도가 2015년. 그러면 만 42세. 여자는 모르겠고(내가 한 번도 여자였던 적이 없어서) 남자로 말할 거 같으면 황금기다. 그런데 나는 다른 42세 남성 시인이 낸 시집에서 정말 엿 같은 노래를 읽은 적이 있다. “내 나이 때면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등 모든 죄가 어울린다.”고 조잘댄 시인.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겠다. 그래 마흔두 살의 남성시인에 대해 별로 감정이 좋지 않다. 물론 선입견이겠지만.
 마흔두 살 정도의 나이는 만일 집의 맏이가 아니라면 이제 슬슬 부모가 세상을 하직하기 시작할 즈음이다. 이현승도 당연히 이런 삶의 완결을 목격한 것처럼 보인다. 다 인생이지 뭐. 만일 직장 생활을 하는 마흔두 살이라면 주위에 소위 ‘명예’나 ‘희망’이나 ‘권고’ 퇴직을 권유받아 저항하지 못하고 봉급쟁이 졸업하는 사람들 구경도 깨나 했을 나이다. 그것도 심각하게. 다음은 내 차례거니, 하는 심정으로. 아이들 키우면서 아프기도 하고, 어디가 찢어져 꿰매기도 하고, 심지어 수술도 해봤을 수도 있으며, 본격적으로 중2 타이틀을 달고 바락바락 기어오르는 낭패를 당할 수도 있을 나이. 결혼생활마저 “승차는 했으니 하차만 남은 사람처럼 / 앉아서 흔들리는 미이혼남”, 즉 아직 이혼을 하지 못한/안 한 남자인 것 같은. 이런 우울한 그림이 하필이면 인생의 황금기에 도래한다.
 그래 마흔두 살의 시인은 딱 그때의 우울을 시집에 차곡차곡 담았다. 결과는? 우중충하다. <봉급생활자>라는 시를 통해 “우리는 나가고 싶다고 느끼면서 /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면서 더 간절해진다. / 간절해서 우리는 졸피뎀과 소주를 섞고” 그걸 마시는 행위를 통해 삶의 한 순간을 망각하려 애쓴다고 노래한다. 비슷한 시인데(만일 이것도 시라면 말이지만) 내가 빌어먹고 사는 회사의 사보에 실린 한 아마추어(회사 직원)의 노래(부분)


 이 절 말고 절밥 먹을 데 또 있을까
 석간수 한 모금에 체하는데
 山門 나서는 길 멀기만 해
 일신상의 사정으로 삼가 하산하고자 하오니
 차마 마저 쓰지 못하고
 山門만 내려다보는
 바랑 걸머진 중


 이라 하는 게 더 깔끔하지 않나? 세상의 봉급쟁이들 가운데 뛰쳐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별로 없고, 그중 거의 대부분 역시 직장이라는 폐쇄공간에 갇혀 있다는 폐쇄공포증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폐쇄공간에서 나가기는 두려워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 희망을 포기했다는 핑계로 소주에 졸피뎀, 고유정이라는 여자가 살해도구로 삼아 유명해진 수면유도제를 섞어 마시는 극단의 우울까지 몰고 가서야 어디 되겠어?
 예컨대 움직임을 노래하는 시 <이동>에서도 “제자리란 하나의 강박이다. / 켜놓고 온 가스불을 떠올리는 사람의 동공처럼 컴컴하게 열린 / 저 구덩이 어디쯤에서 돌아온 자리를, 또 또나온 자리를 보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묘혈墓穴이다. 또는 중한 수술을 받아 회복실에서 의식 없이 뜬 아내의 눈동자, 동공이든지. 그래 다음 연은 “불현 듯 아내에게 필요한 사람은 아내였다는 생각. / 컴컴하게 풀린 구덩이 앞에서 / 어디를 봐도 돌아보는 오르페우스의 아내여 / 소금기둥이 된 아내여”로 이어지는 것. 오르페우스의 아내는 에우리디케. 기껏 저 깊은 지하에까지 내려가 하데스하고 담판을 지은 끝에 다시 세상에 이르는 계단을 오르면서 조잘조잘 끝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여인?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하여간 죽었거나 죽음의 근처에까지 왕림한 아내를 말하는 것이겠지. 근데 감정과잉분비 아닌가 싶다. 시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시어들 역시 시류를 닮아가는 것일까. 과격하다. “켜놓고 온 가스불”에서 이미 죽음의 이미지가 상당할 정도의 타격감을 준다. 그래서 시들을 읽기가 조금은 부담스럽다.
 (잠깐. 정말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한테 여기까지 와서 자기 얼굴 한 번 안 보냐고 졸랐을까? 그렇다. 그럼 오르페우스는? 정신을 차려 생각해보니 계단 세 개만 오르면 또다시 에우리디케와의 결혼생활이라는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는 엄연한 현실에 번쩍 눈이 뜨이며, “그래, 여기서 끝내자.”라면서 홱, 뒤를 돌아봤다는 거다. 미셸 오스트가 <밤의 노예>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제 지긋한 연세의 “청춘 노인”들께서도 인터넷 접속을 자주 하시어 이렇게 이야기하기 송구하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감정이 과한 시어들이 힘겹고, 부담스럽고, 지긋지긋하다. 이현승의 이 시집은 그나마 덜 한 편이다. 덜한데도 이럴진대 다른 시집을 읽는 경우는 어떻겠는가. 죽음, 권고사직, 명예퇴직, 중환자실, 독감, 링거 병. 이런 것들, 당할 때 당하더라도 좀 덜 듣고 싶다. 가뜩이나 변비 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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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잘못이다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7
알베르토 바스케스 피게로아 지음, 정구석 옮김 / 책세상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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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진진한 추리극. 주인공 가에타노 데르데리안 기메라에스는 일찍이 체스에 탁월한 재질이 있어 체스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세상의 모든 체스 팬의 관심을 딱, 뒤로 한 채 사람과 사건을 분석, 해체해 다시 조립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변호사 겸 수사관으로 변신한 브라질 사람이다. 이이가 프랑스의 거대 다국적 기업 아쿠아리오-오리온 그룹의 총수 로멩 라크루아로부터 사건을 의뢰받는다. 부회장이자 요르단의 해수 담수화 사업을 지휘하고 있는 마티아스 바리에레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이어 회장의 목숨까지 협박하는 일을 해결해 줄 것과, 이 일과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철통보안이 이루어지고 있는 갑부 집안에 걸려 있던 고흐의 그림 한 점이 도난당하는 사건도 해결해주기를 요구하고 있다. 당연히 범상하지 않은 외모와 신묘한 능력을 가진 완벽한 두뇌의 소유자 가에타노 데르데리안이 두 가지 사건을 모두 해결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
 여기에 제목을 ‘우리 모두의 잘못’으로 뽑은 건, 여기서 ‘우리’라고 함은 제3세계 국가를 제외하고 먹고 살만한 나라의 국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소위 OECD 국가의 일원인 대한민국 국민도 포함이 될 터인데, 이들에게 넘쳐나는 재화가 결국 일부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민들의 수탈로 이루어졌으며, 부국들이 함부로 소비해버리는 물자로 얼마나 많은 ‘없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지를 아쿠아리오-오리온, 약자로 A&O 그룹의 회장 사모님, 베네주엘라 빈민가 출신으로 열두 살에 알코올중독자 기자의 눈에 띄어 그때부터 잠깐, 잠깐 양도 가능한 정부情婦 생활을 하다가 미스 유니버스가 된 인물인, 서시, 양귀비, 왕소군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아름다운 나이마 폰세카의 입을 통해 자주 언급을 하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지난 세기 끝 무렵부터 세계적 골칫거리로 등장한 국제적 테러 사건을 첨가해 추리 소설을 위한 완벽한 조합을 만들어 냈다. 다국적기업, 도둑, 암살자, 천부적 재능을 지닌 수사관, 미녀, 테러.
 추리소설에서 거의 모든 문제는 대개 부자의 악한 행위로부터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는 프랑스 국적의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 아쿠아리오-오리온 그룹이 등장한다. 이름부터 가히 엽기다. 약자로 하면 A&O, 무엇이 생각나시는가. 난 한 방에 이 그룹의 회장 로멩 라크루아 씨가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모든 것을 ‘소유’한 인물로 설정을 한 것으로 읽었다. 그러나 작가 피게로아는 그가 비록 거대기업을 만들기까지 선한 일만 하지는 않았어도 인간 자체가 그리 나쁜 사람도 아니고, 될 수 있는 한 적법하고 양심적인 경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대기업, 거대조직이라는 것은 세포망처럼 자꾸 자기 복제를 통해 꿈틀꿈틀 움직이는 생명체와 몹시 닮았다. A&O에서도 한 부서에는 선량한 과학자/기술자가 설계한 바닷물을 담수화 하는 장치와 아이디어를 도용해 그 기술로 요르단에서 거액을 투자한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원천기술을 발명한 기술자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보트 폭발로 순식간에 행방불명 됐으며, 그의 동업자이자 매부인 빅토르 데르데리안은 차량 폭발로 한 팔과 다리 한 짝을 잃어버린 채 외딴 섬에 박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아내는 이 사건으로 죽고 말았다. 이 기술 도용과 요르단에서의 사업을 진두지휘한 인물이 아무 이유도 없이 강에 빠져 죽어 자살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회장 자리에 오를 때까지는 절대 자살할 생각이 없었던 부회장 마티아스 바리에레. 이어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진행하던 클로드 타베르니에 마저 이유 없이 강에 빠져 비슷하게 죽어버리고, 요르단 현지에서 사업에 참여하던 압둘 샤미 역시 죽음을 맞았으니 이거야말로 연쇄살인 아닌가 말이지. 그러나 걱정 마시라. 상상초월의 추리력을 자랑하는 우리의 주인공 가에타노 데르데리안이 있는 한 세상엔 참평화가 있으리니.
 이렇게 흥미진진한 스토리이긴 한데, 그리 읽기가 쉽지 않을 걸? 왜 그러느냐고? 역자의 한국말 실력에 조금 회의가 든다. 추리 소설 읽는 것이, 내용이 아무리 복잡다단해도 추리소설인데 말씀이지, 논문 읽는 것보다 결코 쉽지 않게 씌어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나는 오늘도 역시 번역 자체가 잘했네, 오역이네를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난 서반아어를 하나도 모른다. 스페인어를 전공해서 마드리드에서 오래 공부를 했다면 정확한 번역이겠지 뭐. 근데 그렇다고 다는 아니다. 어찌 한국 사람이 우리말 읽고 이해하기가 이렇게 힘드냐고. 오죽했으면 내가 이 책을 통해 동감하며 한 방에 딱 알아들었던 내용은 아래 쓴 것이 유일했을까.


 “사랑은 사람의 가슴을 우아하게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 사랑은 사람의 가슴을 난폭한 망치질 한 번으로 산산조각내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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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모아젤 보바리
레몽 장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1998년 5월
평점 :
품절


 

 

 작가 이름만 보고 선택한 책. 레몽 장. 내가 읽어본 장은, 글쎄 프랑스에도 장 씨가 있지 뭐야, <책 읽어주는 여자>와 <카페 여주인> 두 편. 둘 다 생각만큼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근데 왜 또 읽었느냐고? 레몽 장은 우리나라에도 두 번인가 온 적이 있고, 책 깨나 읽었다 하는 사람들한텐 입에 와서 착착 감기는 이름들, 김화영, ‘최윤’이라고 필명을 쓰는 최현무, 평론가 김치수, 이들의 지도교수가 장 씨였으며, 특별히 김화영이 <책 읽어주는 여자>의 ‘역자해설’에서 이이가 얼마나 특별한 작가이며 교사였는지를 입에 침이 마르게 ‘과찬過讚’ 즉 지나치게 칭찬하는 바람에 <책 읽어주는 여자>가 그리 감명 깊지도 않았음에 불구하고 한 권 더 고른 것이 <카페 여주인>이었으며, 그것 역시 별로여서, 이제 레몽 장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완전히 끝이다, 하는 마음으로, 구하기 쉽지 않은 책을 헌책방을 뒤져 사 읽은 내력이다.
 141쪽. 근데 본문이 29쪽에서 시작하며, 한 페이지에 달랑 열여섯 줄, 한 줄에 원고지로, 즉 띄어쓰기도 한 자로 봐서 모두 서른 자가 들어가는 현묘한 편집을 했다. 즉 한 페이지에 원고지 2.4매. 모두 113쪽 (초등 수학: 29~141쪽은 141-29+1 = 113)이니 원고지로 치면 271.2, 즉 272 장이면 단편 소설, 기껏해야 짧은 중편으로 봐야 하겠다. 이걸 도서출판 여백은 책 껍데기에 레몽 장, 점 찍고, 장편소설, 이라고 해놓았으니 출판사 이름 하나는 잘 지었다. 여백餘白. 지금은 절판.
 본문이 29쪽에서 시작하면 앞에는? 당연히 역자 서문. 책을 넘기면 “이 소설을 읽는 기쁨을 배가하기 위해서는 필히 옮긴이의 말을 읽기 바랍니다.”라고 첫 장에 써 놓았다. 책의 길이고 편집이고 간에 나는 옮긴이의 말을 건너뛰고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건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쓴 모든 작품을 읽은 상태였고, 심지어 플로베르 평전까지도 완독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플로베르 평전에 대한 독후감을 썼다가 완전 쪼다 된 바가 있었지만(그래 지금은 독후감도 흔적 없이 삭제해버렸고 비싸게 주고 산 책도 내다 버렸다. 그 후 다시는 특정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책 읽는 루틴을 어기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 평전 역시 플로베르의 작품을 섭렵하지 않은 독자가 읽기엔 재미없을 거 같다는 취지였는데, 이 책 <마드모아젤 보바리>를 재미나게 읽기 위해서도 반드시 먼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의 선행독서가 있어야 한다, 라고 나는 단정한다. 그것 말고도 이왕이면 줄리언 반스가 쓴 <플로베르의 앵무새>도 미리 읽어두면 금상첨화이며, 더없이 좋으려면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까지 미리 읽어두는 일.
 이 책에선 레몽 장의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본문 첫 페이지(그러니까 책의 29쪽)를 열면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마지막 장면이 그대로 씌어있다.
 “모든 것을 팔고 나자 12프랑 75쌍띰만이 남았다. 이것은 보바리 양을 할머니 집으로 보내는 여비로 쓰여졌다. 할머니는 그 해에 돌아가셨고, 루오 영감 또한 중풍에 걸려 한 분 남은 숙모가 그녀를 키웠다. 가난했던 숙모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그녀를 방직 공장에 보냈다.”
 즉 보바리 부인이 극약을 먹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보바리 씨 역시 어린 베르뜨 하나를 남겨둔 채 피식, 고꾸라져 죽었으니 이제 세상에 남은 보바리는 오직 하나, 베르뜨.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 이 고아 소녀 베르뜨가 ‘마드모아젤 보바리’가 된다. 즉 <마드모아젤 보바리>는 <보바리 부인>의 속편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건, <보바리 부인>에서 일종의 악당으로 등장해 결국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가슴팍에 달고 마는 약사 ‘오메’를 기억하시나? 세월이 흘러 방직공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베르뜨 앞에 역시 다 커서 이제 성인이 된 오메의 아들 나폴레옹이 나타나 낡은 책을 한 권 건네주니, 한때 금서禁書 판정을 받았던 <보바리 부인>. 베르뜨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렸던 시절의 소꿉동무 나폴레옹은 여전히 베르뜨를 사랑하고 있어 그녀를 수소문한 끝에 찾아온 것.
 그러니까 소설 속에서 <보바리 부인>의 내용은 전부 정말로 있었던 일이었고, 그걸 콧수염만 울창한 대머리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소설로 만들었다는 전제가 깔린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나는 저절로, 흔히들 그러하니까, 마드모아젤 보바리인 베르뜨가 앞으로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메의 아들 나폴레옹과 연인 사이로 발전하려는가 보다, 하고 뻔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베르뜨는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는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한테 연락도 없이 찾아가, 자신의 가정에서 벌어졌던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를 그렇게 까발릴 수 있느냐고 항의하기에 이르고 실제로, 조카 꺄롤린을 파산에서 면해주기 위해 거의 전 재산을 팔아 이제 거렁뱅이 비슷한 처지로 전락해 늙은 하녀 펠리시떼, 앵무새 루루와 함께 셋이서 살고 있던 플로베르 씨에게 일요일마다 찾아가 몇 번의 대화를 하는 가운데 쉰다섯 살의 노인과 스무 살 처녀 사이에 은근한 사랑의 군불이 지펴진다.
 자, 스토리는 여기까지. 그러니 나폴레옹과의 연애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어머니의 방종한 삶과 아버지의 찌질한 일생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사법 당국에 의해 외설 판정을 받은 책을 쓴 플로베르와의 연애 이야기라니 참 포인트 하나는 잘 짚었다. 아니 그런가.
 재미있다. 분량이 책 한 권으로 만들기엔 너무 짧긴 하지만 흥미로운 건 사실이다. 그리고 절판. 뭐라? 플로베르가 베르뜨하고 하냐고? 에라, 이……,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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