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마.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도 끝이 나는 거다. 알았냐?"

•드라마 <낭만닥터>, 닥터 부용주의 말•

이 책은 삶의 종착역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책입니다. 종착역은 목표가 아닙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나 행동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그 의미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이 나를 둘러싼 세상을 조금 더 알고 싶다면 테드 강연을 계속해서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식 습득이나 영어 공부를 위해 한두 번 듣고 마는 것이 아닌, 강연자가 말하는 의미를 되새겨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삶의 끝에 와서야 ‘의미’를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나요?"

"여러분은 어떤 가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나요?"

"여러분은 삶의 끝에서 어떤 걸 얻길 원하나요?"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고 우리의 내일은 또 다른 현재입니다. 하지만 정작 삶의 끝에서 우리가 추구했던 가치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현재 삶의 만족과 불만족은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때 더 큰 상실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지안은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에서 인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인생이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살기엔 너무 소중하고, 출세만을 위해 살기에는 너무 값지다. 혼자 깨어 있는 적막한 시간에 마음 깊은 곳에서 영혼의 갈채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뜻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 좋은 인생일 것이다."

여러분이 ‘내 삶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한다면, 아마도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할 겁니다. 나는 정말 나를 잘 알고 나라는 사람을 믿는지, 추락한 자존감은 어떻게 높여야 하는지 말입니다. 이 여행에서 여러분은 현재 자신의 스토리가 아닌 재구성된 인생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여행이 끝나면 내 마음의 상처를 돌봐주어야 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생각하고 마음관리를 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입니다.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는 나에게 행복과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거울 수 있지만 사실 우리 자신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장하고 나다움을 찾아 삶의 끝에 서 있을 때, 우리는 그 어떤 상실감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삶은 항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언제든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직 마음의 준비를 안 했을 뿐입니다.

이제 꿈에 그리던 삶을 향해 달려갈 차례입니다

누구나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모든 게 완벽한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게 불안한 사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게 어려운 사람, 글쓰기가 어려운 사람.

모든 걸 잘한다면 정말 좋겠지요. 그런데 모든 걸 잘한다고 해서 부족한 게 없을까요? 혹은 처음부터 그렇게 다 잘했을까요?

사람들의 완벽한 모습 뒤에는 항상 ‘결핍’이 있습니다. 그 결핍은 새로운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 결핍 때문에 아무도 모르게 수많은 노력을 합니다.

"네가 그걸 한다고?"라는 말을 사람들에게 들었다고 해서 상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그만입니다. 지금의 모습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의 모습에만 집중하면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아이가 처음부터 걷지 못하는 것처럼 삶은 끝이 없는 계단을 천천히 하나씩 오르는 일입니다. 빨리 간다고 해서 꼭 좋은 일도 아닙니다

"눈에 띄는 결점을 갖고 있을 수도 있으며

주목할 만한 강점을 갖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점이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카드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카드로 승부를 해야 한다."

_ 브루스 바튼(미국의 광고인)

우리는 똑똑한 사람들은 원래부터 똑똑했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지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능과 별개로 우리가 어떤 상황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능력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지가 ‘어려움을 쉽게 극복할 수 있게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결정합니다.

성장 마인드셋은 노력을 통해 자신이 개선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죠. ‘아직’의 힘입니다. 반면 고정된 마인드셋은 지능은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지금, Now’에만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인가요, 아니면 ‘지금’인가요? 아이의 현재에만 매몰되어 큰 꿈을 꾸지 못하는 아이로 키우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는 ‘노력’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금 더 노력해봐"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드는 생각은 ‘내가 아직도 부족하구나’입니다. 왜 우리는 ‘노력’이라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할까요?

내가 노력하는 것은 부족해서라기보다 좀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직’의 힘을 알기 위해서는 현재가 아닌 좀더 긴 안목을 갖고 봐야 합니다.

엘링 카게Erling Kagge는 저서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에서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을 전체론적인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끝이 올 때까지 결론은 유보되어야 하는 것이죠."

"지금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건 확고한 비전을 세우고
착실하게 미래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

_ 괴테(독일의 작가)

어린 시절 수줍음이 많았던 수전 케인Susan Cain은 ‘내성적인 성향의 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녀 또한 내성적이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 내성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대략 7년간의 연구 끝에 『콰이어트』라는 베스트셀러를 출간했습니다.

내성적인 것과 부끄러워하는 것은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부끄러워하는 것은 보통 사회적 판단에 대한 두려움인 반면, 내성적인 것은 사회적 자극을 포함한 여타 자극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내성적인 사람들만의 ‘나다움’을 찾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활용해 나만의 ‘내성적인 성향의 강점’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사랑받을 바에는
본연의 내 모습 때문에 미움받는 게 낫다."

_ 커트 코베인(미국의 뮤지션)

어떤 버전의 이야기가 진실인지는 모릅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이야기를 어떤 관점에서 편집하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 될 수도, 아니면 희생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특정 부분을 강조 혹은 축소합니다. 어떤 이야기는 남고 어떤 건 아예 빠집니다. 자신이 무엇을 보는지, 무엇을 보길 원하는지에 따라 또 달라집니다.

"한 죄수가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고 창살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왼쪽과 오른쪽에는 창살이 없습니다.
사실 그 죄수는 감옥에 갇혀 있지 않은 거죠."

『행복한 이기주의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가치는 나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만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줄 수 없다."

_ 캐럴 버넷(배우)

탈리 샤롯

나는 때로 너무 긍정적이었습니다.

지나친 낙관주의는 화를 부르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소중한 걸 붙잡으려다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가끔씩 현실과 친구를 하려 합니다

먼저 높은 기대를 가진 사람들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항상 기분이 좋습니다. 감정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무언가를 예상하는 행위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면 그만큼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낙관적인 것보다는 조금 지적인 낙관주의자가 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펭귄처럼요.

사실 우리는 몸에 난 상처보다 심리적 상처를 더 많이 견디며 살고 있습니다. 실패, 거절, 외로움 등 이런 걸 무시하다 악화되기라도 하면 자칫 삶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울한 것 같은데, 그냥 잊어버려. 그건 그냥 네 생각일 뿐이야." 그런데 다리가 부러졌는데 "그냥 걸어다녀"라고 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심리적 상처를 치료할 방법이 있음에도 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

_ 랠프 왈도 에머슨(사상가이자 시인)

성공보다 실패가 왜 머릿속에 더 오래 남아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의 마음은 부정적인 것에 갇히는 걸까요?

컵에 물이 반 정도 차 있으면, 어떤 사람은 "반이나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반이나 없다"고 합니다. 전자를 이득 프레임gain frame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얻은 것에 집중하고 좋아합니다. 후자는 손실 프레임loss frame입니다.

긍정심리학자인 에밀리 에스파하니 스미스Emily Esfahani Smith 또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감사일기를 언급했습니다. 감사일기가 유대감을 더 높여줄 수 있다고 했죠.

좋은 소식을 반복해서 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하는 것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을 오래 생각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더 많이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것은 잊혀져갑니다.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한번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면 쉽게 빠져나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가능한 한 긍정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도록 말이죠.

"인간에게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삶을 높일 능력이
분명히 있다는 것보다 더 용기를 주는 사실은 없다."
_ 헨리 데이비드 소로(사상가이자 작가)

스트레스가 해롭다고 믿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사망률이 낮았습니다.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않은 사람처럼요.

스트레스를 나쁘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닥칠 때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낙관주의는 성공으로 인도하는 믿음이다.
희망과 자신감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_ 헬렌 켈러(사회사업가이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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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으로 읽는 감정 수업 - 관계 속에서 상처받은 내 마음 회복하는 법
송귀예 지음 / 빌리버튼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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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그림책 테라피스트로 활동해온 저자는 ‘그림책’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찾는 법을 알려준다. 저자는 삶을 조금 더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다양한 감정의 파편들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도서관이 휴관중이라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그림책을 찾아보지 못한 게 아쉽다. (그림책 전체 줄거리는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림책을 통해 내면 속 치유되지 않았던 감정을 만지기도 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게도 한다

처음엔 내용이 가볍다고 생각했는데 읽을수록 좋았다
어른인척 했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았던 마음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어른이 읽고 나누는 그림책에는 삶이 녹아져있어서 더 깊은 통찰력으로 나눔을 하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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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는 민들레입니다.
길모퉁이에 있어도 민들레,
꽃이 져도 민들레입니다.

물음표,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기도

물음이 찾아오는 순간이 나를 만나줄 때입니다. 진정한 나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몰입할 것인지에 따라 나의 나머지 인생은 달라집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 것인지,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것인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마음의 문제는 대부분 가정 안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 무의식속에 남아 있어 인생에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잘 지내다가도 상처가 건드려지는 일이 발생하면 이성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왜인지를 모르고 정신없이 살아가다 물음을 만나고 변하고 싶어집니다.

"당신은 귀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참모습을 회복하세요. 당신은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축복합니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들꽃과 나무, 바람, 햇살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지구가 이렇게 아름다웠었던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열정이 샘솟아 무엇에든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고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알게 됩니다. 어떤 순간에도 어떤 상황에서도 무슨 일을 겪어도 나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요.

길에 피어도 민들레, 지붕에 피어도 민들레. 담벼락에 피어도 민들레이듯이 당신은 어디에 있어도 무엇을 해도 변함이 없습니다. 민들레가 민들레이듯이 당신은 당신입니다. 당신의 참 존재를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어린 시절에 누구를 만나고 어떤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의 삶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재능뿐만이 아니라 나의 재능에도 한계를 짓고 금방 멈춰버리는 순간이 많습니다. 아니,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작조차 하지 않습니다. 남을 의식하고 더 잘하고 싶지만 그렇게 못할 것 같아 창피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이 세상에서 중요한 존재이고 싶습니다. 특출나고 싶고 자신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멋진 모습이고 싶습니다.

아이가 무슨 일을 한 데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 아이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눈에 비친 아이의 모습은 미숙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려고 하는 열정과 호기심은 가득하지만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부모의 성에 차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 어떤 부모는 자신이 다 해줘버립니다. 아이가 어지르지 못하게 말끔하게 다 정리해놓고 아이가 손도 못 대게 합니다. 그리고 늘 "안 돼. 하지 마."라고 하며 행동에 제약을 가합니다.

내가 먼저 충족되면 타인이 보입니다. 나의 재능과 끼를 맘껏 발산할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도전하십시오

선생님이 베티를 지지하고 격려하듯이 내가 나를 지지하고 격려해주면 됩니다. "잘했어. 멋져. 정말 작품이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었어." 하며 나 자신에게 칭찬을 듬뿍 해주면 됩니다.

하고 또 하고 또 하다보면 능숙해집니다. 처음에는 미숙할지라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두각을 나타내는 순간이 반드시 다가옵니다

독수리는 자꾸 닭장으로 가서 닭들처럼 행동합니다. 날고 싶지 않습니다. 그동안 편안하게 살았는데 모험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의 안정된 생활이 좋습니다. 자신은 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닭이지 독수리가 아니에요. 잘못 보신 거예요.’ 하고 말하고 싶습니다.

천리마는 한 섬의 곡식을 먹어야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주인은 천리마인지 모르고 다른 말들과 똑같은 양의 먹이를 줍니다. 천리마는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힘이 없어 늘 누워 있고 털은 윤기를 잃었습니다.

스스로를 무한한 능력의소유자라고 믿을 것

자신이 닭인 줄 알고 살았던 독수리처럼, 자신을 보통 말로 착각하며 살았던 천리마처럼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나 자신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사실은 다 아는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할지 모릅니다. 자신의 가치를 모르고 닭 모이를 먹고 닭들처럼 살아가는 독수리처럼 닭장에 갇혀 지낼것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시도해보았나요?

자신의 삶을 사랑하세요.
자신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세요.
당신은 그 자체만으로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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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나라가 아니라 아픈 나라였다》는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행태가 부쩍 늘어가는 일본에 대해 품게 되는 의문에 가장 근본적이고 균형 잡힌 관점을 제시한다. 현장 취재와 다양한 현지 언론 보도, 각종 통계 자료 등을 토대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일본 사회의 본질과 비밀스런 심층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책은 단지 나쁜 나라가 아닌 깊이 병든 일본의 환부를 통해 한일 관계는 물론, 집단주의의 폐해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20.12.16---
나는 일본을 나쁜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쁜 나라‘가 아닌 ‘아픈 나라‘라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게 될 지, 반대하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관점으로 ‘일본‘을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무라하치부는 마을 전체가 특정 구성원이나 가족을 따돌리는 방식으로 징벌하는 행위를 말한다. 잘못을 저지른 이를 제재하기 위한 마을 공동체의 ‘공동 절교’ 행위라고 보통 정의하는데, 한 가족 전체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우메보시와 일본도(梅干と日本刀)》(2000)에서 이 같은 주장을 펴기도 했다. 죽음으로 인해 누군가와 이별하거나 불이 나는 비극이 일어났을 때만큼은 모든 마을 사람이 슬픔을 공유했다는 해석이다

절연을 하더라도 슬픈 일만은 나누자는 것이 무라하치부다. 이것은 일본의 의리, 인정의 마음과도 깊은 관계가 있겠지만 이렇게 마음씨 착한 징벌 풍습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우메보시와 일본도》 중에서)

일본 국민이 ‘집단의식’이 강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집단에서 떨어져 나가선 안 된다. 집단에서의 이탈은 곧 사회적 존립 근거를 잃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선택이라는 잠재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지메의 경우 가해자에게 ‘모델’이 있다는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했다거나 다른 곳에서 이지메의 대상이 된 아이가 거꾸로 ‘가해자’가 된다는 것으로, 가해자가 ‘피해자’의 면모를 함께 가질 수 있다는 관점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일본 사회의 여러 가학적 성향 속에서 아이들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희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이지메는 1980년대에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인식됐고, 해외에도 ‘이지메(苛め)’라는 일본어 단어가 ‘학교에서의 집단적 괴롭힘’이라는 뜻으로 그대로 전해졌지만, 사실 일본은 역사적으로 ‘무라하치부’라는 어두운 전통을 가지고 있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이미 일본 사회에 깃들어 있던 성향이 학교라는 특정 공간에서 또 다른 형태로 발현되기 시작한 현상이 ‘이지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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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어긋난 관계들을 제대로 회복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이 순간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원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매 순간을 감사히 여기고, 헛되이 흘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라는 이름으로 미루고 있는 일들이 있다면, 지금 바로 시작하십시오. ‘언젠가’는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미루고 있는 일들 중에서 특별히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더더욱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세요.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상처로 남지 않을 죽음을 위해서 마음껏 사랑하고, 삶에 대한 그리고 사람에 대한 감사함으로 죽음이 아닌 이별을 준비하길 바랍니다.

죽음이라는 것도 충분히 따뜻하고 빛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슬프지만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죽음,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은 죽음이 그렇습니다.

나이 오십을 넘기다 보니, 친구 부모님의 부음을 심심찮게 접합니다. 더러는 또래 친구의 안타까운 부음도 전해 듣습니다. 그때마다 죽음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바쁜 일과 중에는 슬픔도 사치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음껏 슬퍼해야 마음껏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눈물로 비워낸 정화된 가슴이라야 사랑이라는 싹이 단단히 뿌리를 내립니다.

<호스피스>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이 편안하고도 인간답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위안과 안락을 베푸는 봉사 활동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호스피스 완화병동의 아침이 오늘도 어김없이 밝았습니다. 누군가는 또 하루의 생을 얻었고, 누군가는 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터입니다.

내 주위 사람들은 "이제 7년 정도 일했으니 죽음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겠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병동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하나도 같은 게 없습니다. 각각의 죽음은 제 나름의 이야기가 있고, 제 나름의 향기와 빛깔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의 죽음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이로써 죽음은 이제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 되는 것이지요. 끝까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죽음이 머지않은 곳에서 자리를 잡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힘든 시간입니다.

다행히 그들 곁에 호스피스라는 좋은 친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호스피스의 존재조차 아예 모르기도 하고, 알아도 모른 척합니다. 끝내 죽음을 부정하며 고생을 자처하기도 합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만남이 수많은 우연과 필연을 거듭하면서 전생의 어느 지점과 맞닿은 연유로 해서 이어진다고 합니다.

사랑이 깊은 만큼 슬픔도 깊어져서 무력감과 공허함에 ‘나도 따라 죽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함께하며 기억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슬픔과 고통을 공감하며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사별가족 관리를 하면서 더욱 애틋하게 깨달았습니다

떠난 가족들은 하늘의 별이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어, 우리가 닿는 시선 어디든 머물러 있습니다. 땅의 꽃이 되고, 물이 되고, 공기가 되어, 우리가 내쉬는 숨결 하나에도 존재하고 있을 영혼들에게 영원한 안식이 있기를 바랍니다.

삶의 곁에 죽음이 있고, 죽음의 곁에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아 있는 삶을 어떻게 가치 있게 보내도록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죠. 죽음은 인간이 태어나서 필연적으로 겪는 인생의 과정입니다. 죽음은 연습할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앞날이고,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음이 다가올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의 죽음을 통해 나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덜어 쓰는 삶의 유한성을 아는 만큼,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는 겸허하고 편안해야 할 것입니다

‘웰빙well-being을 통한 웰다잉well-dying’도 중요하지만 ‘웰다잉을 위한 웰빙’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떠나는 사람이 있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남아 있는 가족들이 살아내야 할 삶도 있습니다.

부모가 없는 삶, 배우자가 없는 삶, 자식이 없는 삶, 형제자매가 사라진 삶. 그 삶을 이어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상실의 삶이 잘 치유되려면 떠나보내는 죽음 자체가 고통스럽지 않아야 합니다. 가족 간의 화해와 용서가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불의의 사고나 예기치 못한 급작스런 죽음에 비해,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죽음은 다행히 예견된다는 점에서 준비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나마 상처가 덜하지 않을까 싶지만, 죽음이라는 과정은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설명을 들어도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준비할 수 있는 행위는 아닙니다.

임종 징후가 보여주는 각종 지표나 수치를 통해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이성적으로는 느끼면서도, 심정적으로는 ‘설마 설마’ 하는 것이 가족의 마음입니다. 심전도 기계가 ‘0’이라는 숫자를 가리켜도 말이지요.

"난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해도 실제로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죽음의 언저리에 있으면서도 죽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만큼 아직은 살고 싶기 때문이겠지요.

떠나는 사람과 떠나보내는 사람 모두에게 ‘슬픔’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다만 각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슬픔의 색깔과 깊이는 서로 다릅니다.

그렇기에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떠나는 사람에게도, 떠나보내는 사람 그 누구에게도 상처로 남지 않을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소리 내어 우는 것조차 비통함을 인정하는 것 같은 생각에 울지 못했다고 합니다.

‘냉정해지자. 지금까지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면, 이제는 잘 갈 수 있도록 보내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이렇게 마음을 다졌습니다.

박노해 시인의 <삶의 나이>라는 시가 떠오르는 밤이었습니다. ‘일 년 뒤 오늘, 삶의 나이를 한 살 더해서 전해줘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예쁜 편지지에 시를 곱게 옮겨보았습니다. 이제 추억이 될 그와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을 기억하며.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맞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은 내 삶의 일부입니다. 수많은 죽음을 보는 것 역시 내 삶의 일부입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죽음을 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는 많은 죽음과 함께하면 할수록 더욱 깊어집니다.

유일하게 면역이 생기지 않는 것이 사별의 슬픔인 것 같습니다. 오늘의 위로가 어제보다 더 어렵고, 오늘의 눈물이 어제보다 더 뜨거운 것을, 매일 하루씩의 삶을 더해가며 더 크게 느끼고 있으니까요.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의 시간이 있었기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그는 더없이 편안해 보였습니다

죽음이 나의 일이 아니었던, 그래서 그때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사별의 애통함과 슬픔은 경험해보지 못한 힘든 감정이라는 뜻이겠지요.

나는 27세에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보내드리고, 30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말기암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사고로 한순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일이 얼마나 잔인하고 충격적인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사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기억합니다. 또한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의 충격, 투병 과정의 고통과 위기 상황들, 암세포와의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말기 판정, 시한부 삶…. 그리고 안녕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시절이었지요. 아니, 사람들의 위로와 격려가 오히려 상처가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지요. 그래서 지금 환자 가족들의 "선생님은 모를 거예요"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과 준비된 죽음을 경험하며, 삶 속에 사별의 슬픔을 녹여내어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듬고 간호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프고 힘들어도 살아지더라"는 사별가족들. 아마도 사랑의 기억이 가슴 깊이 남아 있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에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별 상실을 인지하고 애도하는 시간이 충분하더라도 ‘직면’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직면은 사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기에 피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별 상실의 과정 중 한 부분일 뿐이고, 직면을 해야만 ‘건강한 애도과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절차나 확인 없이도 조용한 직면도 있고, 긴 시간 동안 미루어진 직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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