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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평점 :

『바움가트너』는 세계적인 작가 폴 오스터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40여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애나를 잃고 10년 넘는 시간 동안 상실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던 한 남자, 노교수 바움가트너의 이야기다. 아내가 떠난 후, 그의 삶은 고요하게 흘러간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는 그저 시간을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전에는 겪지 않았던 사소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마침내 태우지 않던 냄비까지 까맣게 타버리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그는 그 냄비를 바라보며 아내와 함께한 지난 날의 추억이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사라졌다고만 생각했던 기억들이, 생활 속 아주 작고 평범한 순간들 속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바움가트너는 애나가 생전에 써왔던 시, 에세이, 미완성 소설 원고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간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았는지, 자신과의 삶을 어떻게 느꼈는지를 다시 마주하며 그녀와 다시 대화를 나누는 듯한 시간을 갖게 된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과거 역시 되짚기 시작한다.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집안 형편상 양장점을 이어받았던 아버지,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고 남편의 양장점을 지키며 살아온 어머니, 그리고 동생과의 유년 시절까지. 그의 인생 이야기가 조용히 펼쳐진다.
또한 그는 애나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던 순간들, 함께 살아온 세월, 결혼 생활의 기억을 떠올린다. 더 나아가 애나가 쓴 글들 속에서 자신을 향한 그녀의 사랑과 감정,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가 고스란히 묻어난다는 것을 느낀다. 그녀의 작품은, 그들 삶의 기록이자 또 하나의 추억이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사람들과도 마주하게 된다. 새로운 인연인 여성 주디스 애나의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찾아 온 젊은 대학원생, 그리고 . 처음에는 조심스럽던 이 만남들은 그에게 다시금 ‘연결됨’이라는 감각을 되찾게 해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상실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으며, 삶은 멈추지 않고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바움가트너』는 단순히 죽은 아내를 추억하는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상실이라는 거대한 감정을 안은채 , 삶을 천천히 다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다. 기억은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살게 만드는 원동력이며, 사랑은 사라져도 흔적을 남겨 남은 이의 삶을 이끌어 준다는 것을 이 소설은 조용히 들려준다.
개인적으로도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언젠가 나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할 날이 오겠지. 그때 나는 어떤 감정을 겪고, 어떤 방식으로 그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바움가트너』는 그런 미래를 상상해보게 만들었고,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결국 우리는 다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전해주었다.
누구나 겪게 될 상실의 순간 앞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바움가트너』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되어 줄수 있는것 같다. 상실과 치유, 기억과 사랑이 얽힌 이 소설은 마음 깊은 곳에 잔잔한 울림을 남긴다. 그리고 아주 작고 조용한 희망 하나를 함께 건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