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 김규항 아포리즘
김규항 지음, 변정수 엮음 / 알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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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에 담겨 있는 아포리즘을 음미하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쓰고 나서 여섯 개의 핵심어를 뽑아 번호를 붙여 다시 정리한 것이다. 

 

 


     

1. 글쓰기

 

나는 “예술이 어때야 한다”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에 반대한다. 예술은 그런 당위에서 가장 자유로운 어떤 것이다. 그리고 당위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그런 당위에서 집중하는 예술조차 자유롭게 구가되며 존중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142쪽)

 

 

소설에 대한 리뷰를 쓸 때 소설에 대한 나의 해석이 틀린 게 아닐까 해서 고민한 적이 있는데 이젠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해석은 그저 나의 생각일 뿐임을, 나의 해석은 정답이나 오답으로 나눠지지 않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소설을 읽는다고 해서 느낀 점이나 깨달은 점이 어찌 모든 사람들이 똑같을 수 있겠는가. 각자 인생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가 다르고 삶의 경험이 다르고 환경이나 처지가 다른데도 모든 이들이 똑같이 느낀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만 명의 사람들이 만 개의 내용으로 “문학은 이런 것이다!” “예술은 이런 것이다!”라고 떠들어대는 풍경이야말로 가장 문학적이며 가장 예술적인 사회의 풍경이 아닐까.(142쪽)

 

 

이 리뷰는 만 개의 리뷰 중 하나라고 가볍게 생각하며 쓰리라. 하지만 가볍게 생각하며 쓴다고 해도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을 보여 주는 일이라고 믿는다. 저자에 따르면 문장에 대한 자신의 태도는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같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문장에 대한 내 태도는
삶에 대한 내 태도와 같다.(154쪽)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나 역시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연구할 때가 있는데 다음의 글을 읽고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글쓰기 책을 읽는다고 해서 글을 잘 쓸 수 있거나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글쓰기에 도움을 주는 건 느린 독서, 고독한 사색, 인간의 이면에 대한 관심 같은 것들이다. 그것들을 대체할 방법은 없다.(49쪽)

 

 

여기서 ‘느린 독서’라 함은 꼼꼼히 읽는 것을 말할 것 같고, ‘고독한 사색’이라 함은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을 말할 것 같고, ‘인간의 이면에 대한 관심’이라 함은 사람의 겉모습을 통해 보이는 대로만 보지 않는 것을 말할 것 같다. 이것을 내가 다른 말로 표현해 보면 ‘글쓰기에 도움을 주는 것은 정보와 지식의 습득 그리고 사고력과 관찰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 덧붙일 변수가 있다면 ‘어떤 체험을 했느냐?’, ‘체험을 통해 무엇을 느꼈느냐,’ ‘어떤 일의 인과 관계를 분석해 본 적이 있느냐?’ 등이 되지 않을까.

 

 

고정된 진리의 말, 정의의 말 같은 건 없다. 의미를 담은 모든 말은 편견이며 우리는 이 순간 어떤 편견이 좀더 공공의 이해에 부합하는가를 유동적으로 고민할 뿐이다. 말은 잡히긴커녕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어려운, 쉬지 않고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과 같다.(129쪽)

 

 

나의 글 역시 나의 편견으로 가득차 있겠다. 내가 옳다고 보는 무엇이 객관적으로 볼 때도 늘 옳은 건 아닐 거라는 걸 안다.

 

 

당대를 올바로 보기란 정말 어렵다.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134쪽)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도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다름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다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은 이런 점을 유념하여 자신의 생각이 옳음에 대해 강한 확신은 삼갈 일이다.

 

 

 

 


2. 독서

 

우리에게 독서가 필요한 이유를 뭐라고 말하면 정확한 답이 될까?

 

 

우리가 바쁘게 살면서도 굳이 남의 글을 읽거나 의견을 듣는 이유는 내 생각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이지, 내 생각과 같은지 다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117쪽)

 

 

내가 독서하는 이유는 첫째, 독서를 통해 지식인이라고 할 만한 저자의 생각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둘째, 독서를 하는 동안 걱정과 스트레스 등 모든 걸 ‘잊기’ 때문이다. 셋째, 독서가 그냥 ‘재밌기’ 때문이다. 이 셋째 이유가 제일 중요하다. 아무리 그럴 듯한 목적이 있더라도 책을 읽는 게 재미가 없다면 그래서 인내를 가져야만 읽을 수 있다면 바쁜 일상을 살며 독서를 하는 게 쉽지 않으리라. 

 

 

 

 


3. 부모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부모로서 자격 미달’임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고등학생이었던 큰딸이 어느 날 친구 집에서 자고 올 테니 허락을 해 달라고 학교에서 내게 전화를 했다. 그 친구는 지방에서 올라와 학교 근처에서 자취방을 얻어 혼자서 생활하며 학교를 다니는 아이였다. 외박을 허락해 달라는 건 처음 있는 일이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서 당황스러워하며 무조건 안 된다고 하였다. 고등학생이 외박이라니, 하면서 펄쩍 뛰었다. 그런데 몇 번이고 폰 문자를 보내며 졸라대서 나중엔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아빠가 허락하면 외박을 허락할게.’라고. 그런데 그 다음에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빠도 ‘엄마가 허락하면 허락할게.’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로에게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의 똑똑한 친구에게 의견을 물으면 된다는 것. 당장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좋은 답을 줬다. 그 친구의 어머니와 통화를 해서 그 어머니가 허락하면 자고 와도 된다고 해 보라는 것이다. 아하,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그 어머니가 허락한다면 왠지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딸에게 문자를 보내 그대로 전하며 그 어머니의 폰 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딸이, 그냥 집에 오겠다고 답장을 했다. 그 이유인 즉 그 친구의 어머니는 딸에게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 주며 하나의 조건을 내세웠는데 그 조건이란 게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자취방에 절대로 친구를 데리고 오지 말 것.’ 아마도 그 어머니는 딸에게 자취방을 얻어 주면서 자취방에 친구가 들락거리며 모여 놀까 봐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여고 시절이란 친구와 함께 있다면 밤을 새워 수다를 떨어도 좋을 그런 시절이 아닌가. 만약 얘기하며 노느라 밤을 새운다든지 잠을 덜 잔다든지 하면 그 다음날 수업에 지장이 있을 게 뻔한 일인데 어떤 부모가 그걸 바라겠는가. 이리하여 나의 똑똑한 친구 덕에 딸의 외박 문제가 깨끗이 종결되었다.

 

 

지금도 그때처럼 부모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모를 때가 가끔 있다. 그럴 때마다 그 친구의 의견을 묻곤 한다.

 

 

내가 문제 있는 부모임을 알아채는 결정적인 순간은 ‘나 정도면 괜찮은 부모’라는 생각이 들 때다. 자기 확신 없는 문제는 없다.(15쪽)

 

 

이 글을 읽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모로서 자격 미달’을 느낄 때가 많으니 최소한 ‘문제 있는 부모’는 면한 것 같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나 역시 ‘나 정도면 괜찮은 부모’라고 자신할 때가 있다는 걸 생각해 냈다.

 

 

큰딸이 친구 집에서 자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그때 생각했었다. 이 아이에게도 ‘하고 싶은 그런 것이 있구나.’ 하고. 난 그저 아이가 공부에 집중하고 학교 성적에 연연해하는 아이로만 알았다. 그래서 아이가 갑자기 외박 타령을 왜 하는 건지 당황스러웠고 이럴 땐 부모로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라서 애먹었다.

 

 

지금은 아이들에 대해 더 모르겠다. 부모로서 자식은 마냥 어린애로만 보여서 내가 말장난을 치면 둘째딸이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수준을 높여 주세요.”라고. 이럴 때 난 섭섭해진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많이 달라져 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이 달라지는 속도를 내가 못 쫓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학교에서 처벌해야 하는 수위로 문제를 일으킨 몇 명의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아이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라고. 학원에 가지 않은 것도, 술을 마시게 된 것도, 외박을 한 것도 친구를 잘못 사귄 탓이라고 모든 학부모가 말한다면 도대체 그 학생들을 그렇게 만든 나쁜 친구는 누구인가? 그런데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다면 나도 아마 똑같이 그렇게 말할 것 같다. “우리 아이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게 된 거예요.”라고. 나는 우리 아이를 제대로 정확하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이의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는 존재가 아니던가.   

 

 

아이를 보며 종종 되새겨야 한다.
‘나는 이 사람을 잘 모른다.’
아이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데서 부모의 비극이 시작된다.(42쪽)

 

 

티브이 드라마를 통해 욕심 많은 어머니가 자식의 인생을 망쳐 버리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자식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성과 부모가 며느리로 삼고 싶은 여성이 일치하는 않는 데에서 비극이 시작되고, 자식이 바라는 직업과 부모가 바라는 직업이 일치하지 않는 데에서 비극이 시작된다. 자기가 자식을 가장 사랑한다고 믿는 부모가 오히려 자식을 불행 속으로 내몰고 마는 형국을 초래한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을 잘 안다고 믿는 나머지 자식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종종, 아니 어쩌면 거의 언제나 ‘내 자식을 위하여’ 자식을 괴롭히고, ‘내 애인을 위하여’ 애인을 괴롭히며, 급기야 ‘내 국민을 위하여’ 국민을 괴롭힌다.(45쪽)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식을 구속하고 간섭하기보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객관적인 시각부터 가져야 할 것 같다.

 

 

자기 자식에겐 좋은 경험만 하게 만들고 싶고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은 건 부모로서 갖는 당연한 욕심일 터이다. 하지만 양지의 세계와 음지의 세계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양자택일이 불가능하다면 부모로서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란 어떤 것일까? 다음의 글로 정답을 헤아려 보고자 한다.

 

 

어른들이 할 일은 아이들에게
맑고 깨끗한 것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맑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것이다.(48쪽)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열정이 없는 사람이 좋은 부모가 될 가능성은 없다.(35쪽)

 

 

이렇게 말하는 딸이 있다.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라고. 반면에 우리 부모님을 보면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딸이 있다.

 

 

딸은 단지 딸, 아들 하는 자식 중의 하나가 아니다. 딸은 한 남자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가장 정교하게 알아낼 수 있는(폭로하는), ‘삶의 시험지’이다. 한 남자가 ‘딸에게서 존경받는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면 그의 삶은 좀더 근사해질 것이다.(150쪽)

 

 

 

 

 


4. 걱정

 

아이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영어 학원에 가게 했는데 같은 반 아이가 영어 학원과 수학 학원을 다닌다는 말을 들은 학부모는 우리 아이도 수학 학원을 추가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며 걱정하기 시작한다. 늘 남과 비교하며 살다 보면 만족이 없고 걱정만 늘어난다.   

 

 

사람은 걱정이 일상화하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잊는 속성이 있다. 걱정하는 습관만 남아, 걱정을 걱정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걱정으로 지배하는’ 체제다. 자본주의는 끝없이 걱정하게 만드는 것만으로 끝없이 지배한다.(27쪽)

 

 

이런 경험을 누구나 해 봤으리라. 걱정이 하나 있어서 그게 중대한 문제로 여겨지더니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이 생기니까 앞의 걱정은 대수롭지 않은 게 되어 버리는 것. 예를 들면 이런 것. 누군가가 나에 대해 험담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분이 나빠 그날 밤잠을 설쳤는데 그 다음날 아이가 머리가 아프다며 고통스러워해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동안 앞의 험담 문제는 대수롭지 않은 게 되어 버린다. 큰 걱정이 작은 걱정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걱정이 있을 때 그것보다 더 심각한 걱정을 상상해 보면 효과가 있을까?

 

 

 

 

 


5. 전쟁

 

이봐, 전쟁이 나면 총이니 폭탄이니 핵이니 이런 걸로 인해 몸을 다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저절로 죽게 돼. 왜 그런지 알아? 고혈압 환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자네 알지? 이런 환자들은 혈압을 효과적으로 조절해 주는 고혈압 약을 매일 먹어야 한단 말이야.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병원 건물이 파괴되고 의약품 보급이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게. 어찌 되겠는가? 고혈압 환자들은 결국 죽겠지? 또 우울증 약을 매일 복용해야 하는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우울증 약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 보게. 특히 불안증이 심한 우울증 환자가 자신이 꼭 먹어야만 하는 약을 구할 수 없어 불안증이 더 심해지고 큰 공포를 느끼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만큼 끔찍한 일을 하나 더 생각해 볼 수 있다네. 내가 다치지 않아도 말이야, 가족이나 친척이 또는 이웃 사람이 전쟁으로 인해 다쳤거나 죽었다는 소식을 계속 전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얼마나 괴롭겠나? 그래서 난 전쟁이 나면 살아남아서 집이 무너지고 도로가 폭파되고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는 소식을 수시로 들으며 불행하게 살기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네.

 

 

가장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라네. 전쟁 없이 늘 평화롭게 사는 사람들 중에는 평화의 소중함을 모르고 큰 욕심을 부리며 사소한 일로 고민하며 괴로움을 하소연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나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일들이 발생하면 그때 가서 평화롭던 시간들을 그리워한다네. 왜 진작 평화에 대한 감사를 할 줄 모르냔 말이야. 지금 하늘을 보니 맑고 푸르며 햇살은 눈부셔서 전깃줄에 걸쳐 있는 거미줄마저 반짝거리며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난 티브이 뉴스를 통해 다른 나라에서 전쟁으로 인해 다쳐 피 흘리는 부상자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가엾게 여겨지면서 우리가 전쟁을 겪지 않으며 사는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네.

 

 

오늘 전쟁을 반대하는 것만이 내일 전쟁을 거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149쪽)

 

 

 

 

 


6. 감사

 

다음의 글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기도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은 없다.
사람에겐 가진 소중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능력이 없다.
형식이 무엇이든 기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위험하거나 적어도 섣부르다.(7쪽)

 

 

 

 

 

 

 

 

 

 

 


....................................................................

* 맺는말

 

(아포리즘의 뜻 : 깊은 진리를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나 글. 격언, 금언, 잠언, 경구 따위를 이른다.)   

 

 

이 책은 아포리즘으로 채워져 있다. 아포리즘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 압축성 있는 글이기에 마치 시를 읽듯이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며 읽어야 제맛이 난다. 쓰윽 한 번 훑듯이 읽는다면, 그래서 무엇을 읽었는지 나중에 기억하지 못한다면 실패한 독서가 될 것이다. 실패한 독서가 되지 않고 성공한 독서가 되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읽었다.

 

 

소설을 읽을 땐 최소한 몇 장을 넘겨야 밑줄을 긋고 싶은 구절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책은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고 싶은 구절로 가득차 있어서 빨리 읽는 게 아까워 느린 독서를 했다. 이 책을 커피로 말하면 벌컥벌컥 마시는 냉커피가 아니라 호호 불며 마시는 뜨거운 커피였다. 이 책을 친구로 말하면 쉽게 사귀고 빠른 시간에 가까워진 새 친구가 아니라 어렵게 사귀고 많은 시간이 흘러서 가까워진 오래된 친구였다.

 

 

저자는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면 생각의 문부터 열어라.”(121쪽)라고 말하고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건 결국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해체하는 것이다.”(109쪽)라고 말한다. 저자가 걸은 사유의 길을 따라가노라면 이상적인 사회를 향해 열려 있는 문에 이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더욱 이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저자가 낸 책 중에서 정수만 모아 놓은 책이 아닐까 여겨질 만큼 만족스럽기도 했다. 

 

 

내가 읽은 아포리즘의 책 중에서 몇 년 뒤에 또 읽어도 좋을 책을 꼽는다면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역 니체의 말 2>, 에밀 시오랑의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의 <잠언과 성찰> 등이다. 그리고 한 권 더 추가한다면 바로 이 책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이다. 나처럼 아포리즘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주저 없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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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9-27 1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에서 상대방의 리뷰를 읽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 번째, 김규항 씨가 말한 것처럼 내 생각을 발전하기 위한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장바구니를 채우기 위해서죠. ^^

페크pek0501 2017-09-27 18:44   좋아요 0 | URL
으음~~. 맞는 말씀 같습니다. 신간인 경우 저도 남의 리뷰를 읽고 나서 책을 구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하시길...

hnine 2017-09-27 2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한줄 한줄 마음에 쏙쏙 들어올수가 있나요.
리뷰든 그냥 페이퍼든, 잘 쓰고자 하는 마음은 내려놓은지 오래이고요 (^^), 다만 정직하게 쓰려고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더라고요. 이거 다른 사람 의견과 너무 엇나가는거 아닌가, 나만 좋다고 느낀거 아닌가, 나만 별로라고 느낀거 아닌가, 자꾸 신경쓰이고요. 그래서 정직하게 쓰다보면 그 작품의 포인트를 놓쳐 형편없는, 나중에 읽어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리뷰를 올리기도 하고요 ( 제 경우 허클베리핀, 톰소여 같은 것들이 그 예).
따님의 이야기는 저도 도움이 많이 되겠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요구에 대해서는 일단 안된다고 하는게 제 원래 성격이었는데 요즘은 일단 된다고 할때가 많아요. 제가 너그러워져서가 아니고 어차피 말을 안들을테니까요 ㅋㅋ

페크pek0501 2017-09-29 15:51   좋아요 1 | URL
나인 님, 저 역시 그렇습니다. 내 글이 너무 주관적인 글이 아닌가, 편견이 담긴 글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답니다. 나인 님도 그렇다니 반가운 걸요. ㅋ

이젠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만약 남들이 느끼지 못한 것을 나만 느꼈다면 그래서 작가도 놀랐다면 그거야말로 독창성이 있는 게 아닌가, 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우리 이렇게 생각하는 걸로 합시다.)ㅋ

맞아요. 저는 어차피 말을 안 들을 거면 모르는 척해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귀가가 늦을 경우 잠든 척한답니다. 잠들어서 너를 못 혼냈다는 느낌을 주려고요.

부모 노릇 하기가 쉽지 않아요. 나이는 늘어가는데 지혜는 늘지 않는군요.

댓글, 고맙습니다.

AgalmA 2017-09-29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쓰기 책이 주로 하는 말은 ‘정답은 없다‘와 ‘내가 한 말과 방법을 모두 잊고 당신의 길을 찾아라‘죠. 저도 동의.
아이 키우기에 관한 방책은 일종의 집단지성이군요ㅎ

페크pek0501 2017-09-29 15:54   좋아요 1 | URL
너만의 길을 가라... 그렇죠.
그렇다고 해도 이 책 저 책 보는 건 저로선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아이 키우기에 대해선 부모들이 ‘좋은 부모가 되는 법‘과 같은 강의를 들으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에요. 아니면 그런 책을 보든지요.

고맙습니다.

stella.K 2017-09-28 15: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오독할 자유가 있어야 하는 거죠.
그리고 다음에 또 한 번 읽어봐야 합니다.
그럼 화들짝 놀랄지도 몰라요.
어머, 그런 뜻이었어?
얼굴이 화끈 거릴지도 모르죠.
그래도 오독할 자유가 있어 괜찮습니다.
말씀마따나 소설에 정답은 없는 거죠.

이책 좋은가 봅니다.
몇 페이지 안 되는데도 뼈가 되고 살이 되고...^^


페크pek0501 2017-09-29 15:57   좋아요 2 | URL
오독할 자유, 표현이 좋습니다. 따지고 보면 오독이란 게 없는 거죠. 내가 그런 뜻으로 읽었다는데 누가 틀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완전 자유죠.

원래 예술이란 게 해석의 다양성이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잖아요. 무엇을 느끼든 오답은 없는 거예요.
우리, 자신의 해석에 대해 소심해지지 말자고요.

예, 이 책 참 좋습니다. 탁월한 구입을 한 것 같아요.
좋은 하루 되시길...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17-10-02 18: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은 길이에 상관없이 좋겠지만, 짧은 글에서는 의미가 압축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추석연휴가 되어 인사드리러 왔어요.
pek0501님, 즐겁고 좋은 추석연휴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17-10-07 10:23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추석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이렇게 추석 인사를 남겨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ㅋ
나를 위해 누군가가 메시지를 남긴다는 것에 대해 새로운 느낌이 드네요.

남은 연휴를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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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단편집보다는 이야기가 쭉 이어지는 장편 소설을 선호한다. 그런데 열 편의 단편이 담겨 있는 <체호프 단편선>을 읽고 나니 이런 단편집이라면 얼마든지 애독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 그만큼 모든 단편을 흥미롭게 읽었다. 


 
리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이 책에 담겨 있는 열 편의 단편 중 다섯 편만 선택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다섯 편의 선택은 나의 독서 취향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겠다. 이 리뷰를 읽는 이들이 다섯 편의 소개만으로도 체호프 단편의 진가를 알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1. ‘베짱이’ : 안타까움이 여운으로 남은 작품

 

여자의 이름은 올가 이바노브나, 남편은 이름은 드이모프. 올가 이바노브나는 22살에, 드이모프는 31살에 결혼식을 마치고 살림을 꾸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노래하고 피아노 연주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연극 동호회에 참여했는데, 이 모든 일들은 단순한 심심풀이가 아니라 재능의 발현이었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명한 사람들과 재빨리 사귀고 가까운 사이가 되는 일에서만큼 그녀의 재능이 돋보이는 경우는 없었다.(40쪽)

 

 

그녀는 예술을 사랑하고 화가, 작가 등의 유명한 사람들을 숭배하고 그들을 사귀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병원에 근무하는 남편 드이모프는 예술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자연과학과 의학에 매달리며 산다. 그녀는 남편이 예술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을 매우 심각한 결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잘생긴 화가 청년의 사랑 고백을 받게 되고 불륜의 사랑을 키우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에 집착하게 된 그녀는 나중에 화가 청년이 변심했음을 알게 되어 괴로워한다.

 

 

한편 남편 드이모프는 아내의 불륜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마도 한겨울 무렵부터는 드이모프도 자신이 속고 있음을 눈치 챈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자기 양심이 찔리기라도 한 듯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으며 그녀와 마주치고도 행복한 미소를 짓지 않았다. 아내와 단둘이 남는 경우를 되도록 피하기 위해 그는 동료인 코로스텔료프를 점심 식사에 자주 데려왔다. (···) 두 사람이 의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로지 올가 이바노브나로 하여금 침묵할 수 있도록, 즉 거짓말을 안 해도 되도록 배려하는 것처럼 보였다.(61~62쪽)

 

 

남편이 화가 청년과 불륜 관계에 빠져 있는 그녀를 눈감아 주고 있는데도 그녀는 변심한 화가 청년에게 매달리며 사랑을 구걸한다.

 

 

화실에서 그를 못 보게 되는 날에는, 만약 오늘 그가 그녀에게로 오지 않으면 당장 독약을 마시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겼다. 겁이 난 그는 결국 그녀에게로 갔으며, 남아서 식사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는 남편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불손한 말을 해댔고 그녀 또한 똑같은 방식으로 대꾸했다.(63~64쪽)

 

 

불륜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폭군이며 원수여서 주위에 누가 있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서로 으르렁거리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그녀는 화가 청년에게 다른 여자가 있음을 짐작하고 질투와 분노, 모멸감과 수치심 때문에 침실에서 대성통곡을 하기도 한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 드이모프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이렇게 조그맣게 말한다.

 

 

“그렇게 울지 마, 여보······. 왜 그래? 그냥 조용히 있어야 돼. 이 일은······.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없어. 알잖아.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길 수 없어.”(64쪽)

 

 

어느 날 저녁 남편은 그녀에게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이 통과됐다며 일반 병리학 강의를 맡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기쁨을 아내와 함께 나눌 수만 있다면 남편은 아내의 불륜을 용서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일반 병리학이 뭔지도 몰랐고 다만 극장에 갈 채비를 할 뿐이었다.

 

 

이 소설의 결말에서는 이렇게 이야기가 펼쳐진다.

 

 

남편 드이모프는 심한 두통을 앓게 되는데 그 이유는 병원에서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던 그녀는 불륜 관계를 청산하고 남편과 함께 새 삶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남편이 위험한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된 그녀는 남편이 불쌍해졌다.

 

 

자신에 대한 그의 끝없는 사랑, 그의 젊은 생명, 심지어 그가 이미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은 이 짝 잃은 침대까지도 불쌍했다. 그리고 그의 한결같은 수줍고 얌전한 미소가 떠올랐다.(71쪽)

 

 

올가 이바노브나는 침실에 앉아서 이것은 남편을 속인 죄로 신이 자신을 벌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73쪽)

 

 

올가 이바노브나는 그와 함께 했던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돌이켜보았다. 그리고 그가 참으로 얼마나 비범하고 드문 인간인지, 자기가 알았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간인지를 문득 깨달았다. 또한 그녀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모든 동료 의사들이 그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상기하고 그들 모두가 그에게서 장래의 저명인사를 보았으리라는 것을 이제야 이해했다.(78쪽.)

 

 

저명인사들을 좋아하며 그들을 쫓아다녔던 그녀였는데 그녀 가까이에 있던 남편이야말로 장래의 저명인사였다는 것. 그러나 그녀가 그 사실를 이해했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다른 예술가들과 시간을 보내길 좋아하고 한 남자와 불륜 관계에 빠졌다가 버림받고 뒤늦게야 남편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 과거를 청산하고 남편과 함께 새 출발을 하고 싶었던 그녀. 그러나 박사 학위 논문이 통과되어 일반 병리학 강의를 맡게 될지 모를, 장래가 촉망되는 의사였던 남편은 병원에서 디프테리아 감염되어 결국 죽고 만다.

 

 

남편이 이제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녀는 그의 어깨를 흔들며 이름을 불렀다.
“드이모프, 드이모프, 제발!”(79쪽)

 

 

이 이야기는 안타까움이 여운으로 남게 되는 이야기여서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베짱이처럼 놀기만 하다가 뒤늦게 깨달은 그녀의 불행에서 보듯이 깨달음은 늦을 때가 많은 법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가까이에 있는 보석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사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 중 하나일 것이다.

 

 

참고로 이 작품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모델로 하여 쓴 소설이라는데 이 작품으로 인해 작가는 절친한 친구와 한동안 불화를 겪어야 했다고 한다.

 

 

 

 

 

 


2. ‘베로치카’ :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불가사의한 남녀 관계를 그린 작품

 

아그뇨프가 베라의 단추 하나하나, 주름 하나하나에서 따뜻하고 편안하고 단순한 무언가를 읽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그녀가 마음에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것은 진실되지 않거나 아름다움에 둔감한 차가운 여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선량하고 시적인 그 무엇이었다.(94쪽)

 

 

그러한 그녀(베라)가 막상 사랑을 고백하자 그 남자(아그뇨프)는 반기기보다 난처해한다.

 

 

무엇보다도 난처한 것은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상황이었다. 대놓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고, 그렇다고 <네.>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마음속을 아무리 헤집어보아도 사랑의 불씨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105쪽)

 

 

그 이유를 말하자면 이런 것이라고 작가는 쓴다.

 

 

그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것은 영리한 인간들이 종종 과시하는 그런 이성적인 냉담함도, 자아도취적인 바보의 냉담함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영혼의 무기력, 아름다움을 깊이 지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일 뿐이며 또한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한 지저분한 싸움과 독신의 하숙방 생활, 그리고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얻어진 조로증에 다름 아닌 것이다.(109쪽)

 

 

‘베로치카’을 읽고 내가 생각한 것을 정리해 봤다.

 

 

‘베로치카’라는 소설에서 여자의 사랑 고백을 들은 남자는 평소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으면서도 사랑 고백을 반기지 않는다. 그 남자는 그녀와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 이유가 늘 자신이 수동적으로 살았기 때문인지, 영혼이 무기력하기 때문인지, 아름다움을 깊이 지각하지 못할 만큼 무능력하기 때문인지 자신도 잘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원래 인간이란 자기 마음조차 잘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존재다.)

 

 

내가 보기엔 그 남자가 그녀와 연애를 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어떤 하나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절실함’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열정’이고 ‘뜨거움’이다. 연애를 하려면 고속으로 달리는 자동차와 같은 맹렬한 기세가 필요하다. '잊고 있다가 당신을 만나면 좋아요.'라고 상대에 대해 생각할 정도가 아니라 '당신이 그리워서 괴로워요. 꼭 만나야겠어요.'라고 상대에 대해 생각할 정도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 이런 맹렬한 기세가 있어야 연애를 할 수 있는 것.

 

 

만약 그립지가 않고 만나지 않아도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고 그러나 만나면 좋은 그런 상대라면, 연애는 시작되기 어렵고 연애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언젠가는 깨지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연애란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연애란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연애란 상대에게 이행해야 할 의무가 많은 무엇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

 

 

- 첫눈이 온 날, 첫눈이 왔다고 상대가 불러내면 반갑게 나가야 된다. 귀찮아서 안 나간다고 하면 안 된다. 두 사람 관계에 금이 간다.
- 상대가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하면 무조건 병문안을 가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먼 병원일지라도 병문안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두 사람 관계에 금이 간다.
- 상대와 만나기로 약속한 휴일엔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고 싶어도 그 약속을 깨면 안 된다. 두 사람 관계에 금이 간다.

 

 

두 사람 관계에 금이 가면 그때부터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한쪽에선 사과를 하고 한쪽에선 화를 내고, 이런 일이 반복되다가 서로에게 싫증이 나고, 그러다가 냉전의 시간이 오고, 그러다가 어느 한쪽에선 연인에게 시달리는 상태에 이르고. 그다음엔 증오와 이별.

 

 

늘 상대가 좋고 늘 기분이 좋을 수만은 없는 게 인간인지라, 때로는 화를 참을 수 없고 자존심이 상하는 걸 참을 수 없는 게 인간인지라, 싫증이 나는 게 인간인지라 첫사랑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되는 것이고 수많은 연인들이 오래 사귀고도 헤어지는 것.

 

 

그러니 귀찮음을 감수할 자신이 있을 만큼 뜨거운 마음을 가질 때에만 연애를 할 일이다. 괜히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심심풀이로 연애를 시작해서 상대에게 상처만 남기는 일이 되지 않도록 할 일이다. 이 소설의 남자처럼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3. ‘관리의 죽음’ :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공감하며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

 

회계원인 체르뱌코프는 객석 두 번째 줄에 앉아 오페레타 공연을 보면서 행복의 절정에 다다른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재채기가 나와 버렸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친 다음에 주위를 둘러본 그는 당황스런 일이 생겼다는 걸 알았다. 첫 번째 줄에 앉아 있던 노인이 자신의 대머리와 목을 장갑으로 열심히 닦으며 투덜거리는 것을 보고 그 노인에게 침이 튀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 노인은 운수성에 근무하는 브리잘로프 장군이었다. 사과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장군의 귀에 “용서하세요, 각하. 제가 침을 튀겼군요. 본의가 아니었습니다만…….”라고 속삭였다. 장군은 “괜찮아요, 괜찮아…….”라고 답했다. 그는 “제발 용서하십시오. 저는 그저…… 저도 모르게!”라고 다시 사과를 했고 장군은 “아, 앉으세요 제발! 공연 좀 봅시다!”라고 말했다. 휴식 시간에 그는 또 한번 장군에게 사과를 했고, 장군은 벌써 잊어버렸다고 말하며 신경질적으로 아랫입술을 떨었다. 그는 ‘잊어버렸다고 하지만 눈에는 원한이 담겨 있는 걸.’ 하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장군이 화가 풀리지 않았다고 여겨져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장군에게 재채기에 대한 해명을 하러 찾아갔다. 장군은 접견실에서 청원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그는 또 사과의 말을 했고 장군은 그 바쁜 와중에 또 계속되는 그의 사과에 짜증이 났다. 그래서 장군은 “여보세요, 날 놀리자는 겁니까, 뭡니까!”하고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 그는 그 다음날에도 장군에게 찾아가 사과를 했다. 자신은 잊어버렸다고 말했는데도 필요 이상 반복되는 사과에 화가 난 장군은 급기야 소리를 빽 질렀다. “꺼져!!”라고. 이 말을 듣자 두려움에 질린 그는 속삭이듯 “뭐라고요?” 하고 물었고, 장군은 발을 구르며 되풀이 말했다. “꺼지라니까!!” 이 말을 들은 그는 뱃속에서 무언가가 터져버렸다.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집에 돌아온 그는 관복을 벗지도 않은 채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죽었다.

 

 

A.
나는 이 소설을 흥미롭게 읽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 속 주인공인 회계원의 속마음을 알기 위해 내가 ‘가상 인터뷰’를 해 보는 방식으로 써 봤다.

 

 

물음) 당신은 장군에게 한 번만 사과하고 말면 될 텐데 왜 여러 번 사과해서 장군을 짜증이 나게 했습니까?

 

회계원 : 저는 장군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일부러 침을 튀긴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재채기가 나와서 침을 튀기게 되었다고 정확히 말하며 미안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그런 뜻이 사과할 때마다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서 여러 번 사과를 하게 되었던 거죠. 장군이 화가 풀리지 않은 것처럼 보여 걱정이 되었습니다.

 

 

물음) 당신은 그 사건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계원 : 그런 작은 일로 제가 죽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장군이 “꺼져!”라고 말을 하는 순간 독화살을 맞은 것처럼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장군이 한 번 더 “꺼지라니까!”라고 말하자 제 뱃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버렸고 공포를 느꼈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소파에 누워 정신을 잃었나 본데 그게 죽음이었습니다.

 

 


B.
이번엔 장군의 속마음을 알기 위해 ‘가상 인터뷰’를 해 보는 방식으로 써 봤다.

 

 

물음) 왜 당신은 회계원이 거듭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꺼져!”라고 화를 냈습니까?

 

장군 : 사과를 한 번 했으면 됐지 자꾸 사과하니까 화가 났습니다. 누구나 불쾌한 일은 기억하고 싶지 않고 잊고 싶잖아요. 그런데 잊을 만하면 느닷없이 찾아와서 그 일을 상기시키니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업무 중 그가 나타나 사과를 할 땐 피곤하게 느껴지고 지치고 짜증이 무척 나더군요.

 

 


C.
공연장에서 재채기가 나와 버린 일로 한 남자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희극적이고도 비극적인 이 이야기에서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즉 작가는 독자가 무엇을 느끼길 바랐을까?

 

 

내가 느낀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인간은 자기가 손해 본 것을 상기시키는 말에 위로를 받기보다 불쾌감을 느낀다는 것.
- 공포를 느끼는 상상력이란 자신을 죽이기도 할 만큼 위력이 세다는 것.
- 마음의 병을 앓으면 죽음에 이르게 되기도 할 만큼 마음이란 신비롭다는 것.
- 사소한 실수라고 할 수 있는 작은 일로 죽을 수도 있는 게 인간이라는 것.
- 서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해 서로를 배려할 수 없는 게 어리석은 인간의 심각한 문제라는 것.
- 인간관계에서 소통과 공감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
- 이토록 어이없는 일이 세상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 (공연을 보면서) 지금은 행복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다른 일로)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 즉 행복이란 건 (재채기라는) 작은 일로도 얼마든지 쉽게 깨질 수 있다는 것. 언제 깨질지 모르는 게 행복이라는 것. 

 

 

난 ‘마음의 기적’을 믿는다. 여러 번 그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평소 안구건조증이 있어서 컴퓨터를 사용할 땐 쉬는 시간을 갖는 편인데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을 땐 쉬지 않고 긴 시간 동안 컴퓨터로 작업해야 한다. 이상한 것은 급한 일로 컴퓨터를 계속 사용해야 할 땐 안구건조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래전, 논문을 쓰던 시절엔 이런 적도 있었다. 마감이 임박한 논문을 아침부터 하루 종일 쓰고 또 밤 12시부터 밤새워 새벽 6시까지 썼는데 눈이 전혀 피로하지 않고 몸도 전혀 피로하지 않았다. 이것에 대한 내 해석은 이러하다. ‘논문 마감 때라서 논문을 꼭 끝내야 한다는 강한 정신력을 가졌더니 기적이 일어나더라는 것.’ 이것을 나는 ‘마음의 기적’이라고 명명하겠다. 속담에도 있지 않은가.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고. 

 

 

이렇게 강한 마음으로 극복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약한 마음으로 병을 얻기도 한다. ‘관리의 죽음’이란 소설에서 그런 예를 볼 수 있다. 마음의 병으로 인해 급기야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어느 관리자의 이야기를 쓴 체호프는 ‘인간’을 아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향한 악성 댓글로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하기도 하는 게 인간이라는 것을 그는 그 옛날에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4. ‘주교’ : 죽음 이후에 남는 것은 무엇인지 씁쓸하게 그린 작품

 

‘주교’는 실제로 매우 쇠약해진 작가가 자신에게 머지않아 죽음이 오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썼다고 해서 작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살았던 주교가 죽은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주교가 죽고 난 뒤 태평한 세상의 풍경을 스케치한 다음의 글로 알 수 있다.

 

 

예하가 돌아가신 것이다.
다음날은 부활절이었다. 이 도시에는 마흔두 개의 교회와 여섯 개의 수도원이 있었으니 기쁨의 종소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 도시 위로 쉼없이 울리면서 대기를 진동시켰다. 새들은 노래 부르고 태양은 화창하게 내리쬐었다. 장이 벌어진 광장에서는 그네를 타네 손풍금을 울리네 하며 왁자지껄했고 손풍금 소리와 술 취한 이들의 주정이 요란했다. (...)
한 달 뒤에 새 대리 주교가 임명되었으며 그때는 이미 아무도 표트르 예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완전히 그를 잊어버렸다.(185~186쪽)

 

 

한 사람이 죽었는데, 그의 인생이 끝났는데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흘러갔고 죽은 사람은 잊혀지고 만다는 것. 이 글을 읽고 내가 그랬듯이, 이 글을 읽는 이들도 이 글을 인상 깊게 읽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위의 글을 옮겼다.

 

 

우리 중 누가 죽는다고 해도 세상은 변함없이 계속 즐겁게 계속 태평하게 돌아갈 것이다. 당신이 죽는다고 해도 또는 내가 죽는다고 해도 지금과 같이 하늘은 청명하고 햇빛은 눈부실 것이다. 

 

 

 

 

 

 


5. ‘내기’ : 한 인간의 모험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작품

 

이런 어처구니없는 ‘내기’가 있다니 놀랄 일이다. “당신이 독방에 오 년 동안 들어가 있을 수 있다면 이백만 루블을 걸겠소.”라는 은행가의 제안에 젊은 변호사는 이렇게 답한다. “오 년이 아니라 십오 년을 조건으로 내기에 응하겠소.”라고. 그리하여 십오 년 동안 독방에서 지내면 이백만 루블을 받게 되는 ‘내기’가 시작된다.

 

 

변호사는 은행가의 집 정원에 지어진 바깥채 중 하나에서 엄중한 감시 속에 감금되도록 결정됐다. 또한 그에게는 십오 년 동안 바깥채의 문턱을 넘을 권리, 살아 있는 사람들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을 권리, 그리고 편지나 신문을 받아볼 권리를 박탈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악기를 지니고 있거나 책을 읽고 편지를 쓰는 일, 그리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허용되었다. (···) 책이든, 악보든, 술이든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은 메모지에 쓰기만 하면 무한정 공급받을 수 있지만 반드시 창문을 통해야만 했다.(137쪽)

 

 

혼자 감금된 변호사는 사 년만에 육백여 권의 심오한 서적을 섭렵했고 복음서를 읽는 데 일 년을 허비했다.

 

 

유폐되고 나서 마지막 이 년 동안 수인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읽었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바이런과 셰익스피어를 요구했다. 종종 그로부터 화학, 의학 교과서, 장편소설, 철학이나 신학 논문 따위를 동시에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메모가 오기도 했다. 그의 독서열은, 바다 위에 널린 난파선의 잔해들 속에서 헤엄치면서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아무것에나 무턱대고 매달리는 한 인간을 연상시켰다!(139~140쪽)

 

 

이 글을 읽으며 나는 두 가지가 궁금했다. 첫째, 과연 그는 15년 동안 독방에 갇혀 지내는 생활을 끝까지 할 수 있을까? 둘째, 여러 종류의 많은 책들을 읽고 나서 최후에 그가 느낀 것은 무엇일까?

 

 

결국 그는 15년 동안의 독방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이백만 루블이라는 거금을 손에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15년이 되는 날의 바로 전날에 발견된, 그가 종이에 쓴 글이 있었다. 그는 자고 있었고 은행가는 그가 쓴 글을 읽게 된다. 

 

 

은행가는 책상에서 종이를 집어들고 읽어 내려갔다.

 

내일 열두시에 나는 자유를 얻고 사람들과 교류할 권리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 방을 떠나 태양을 보기에 앞서 나는 그대들에게 몇 마디 해줄 필요를 느낀다. 순수한 양심에 따라,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신 앞에 맹세코, 나는 자유와 생명과 건강을, 그리고 그대들의 책 속에서 지상의 축복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을 경멸한다고 그대들에게 단언하는 바이다.
십오 년 동안 나는 속세의 삶을 면밀하게 연구했다. (···) 그대들의 책은 나에게 지혜를 가져다주었다. 지칠 줄 모르는 인간의 사고 능력으로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해 낸 모든 것들이 나의 두개골 속에서 작은 언덕으로 쌓였다. 내가 그대들 누구보다도 현명하다는 것을 안다.
또한 나는 그대들의 모든 책을 경멸한다. 이 세상의 모든 행복과 지혜를 경멸한다. 그 모두가 시시하고 무상하며, 신기루처럼 공허하고 기만적인 것이다. 그대들이 아무리 오만하고 현명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죽음은 그대들을 마루 밑의 쥐새끼들처럼 지상에서 쓸어버릴 것이다. (···)
그대들은 분별을 잃고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 그대들은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추악한 것을 미(美)로 받아들이고 있다. (···)
나는 그대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기 위해, 내가 한때 천국을 꿈꾸듯 갈망했으나 이제는 하찮게 보이는 이백만 루블을 거부하겠다. 그 돈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기 위해 나는 약속한 기한이 다 되기 다섯 시간 전에 여기에서 나갈 것이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계약을 위반하는 바이다······.

 

이것을 다 읽은 은행가는 책상 위에 종이를 내려놓았다.(143~145쪽)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책을 많이 읽어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 모두가 시시하고 무상하고 부질없게 느껴지는 것임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난 이 이야기를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가 성공이라고 부르는 성공은 사실 성공이 아니고 하나의 실패를 숨기고 있는 건지 모른다.’라고. 예를 들면 기혼자인 한 중년 여성이 어느 분야에서 명성을 떨칠 만큼 사회적 성공을 거두었다면 거기에는 최소한 하나의 실패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그 성공을 거두기 위해 혼자서 노력하고 애쓴 시간들 속에는 가족이 없었을 테니까. 남편과 함께할 시간도, 자식들과 함께할 시간도 모두 성공을 위한 노력의 시간에 바쳤을 테니까. 그래서 그녀는 한 분야에서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그녀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다시 말해 그녀의 가정은 실패한 가정이라고.

 

 

짐작하건대 세상의 이치를 꿰뚫을 만큼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성공과 실패가 헷갈리고 행복과 불행이 헷갈릴 것 같다. 성공은 다른 실패를 의미하고 행복은 다른 불행을 의미할 것 같다. 커 보였던 성공과 실패의 격차가, 커 보였던 행복과 불행의 격차가 좁혀져서 나중엔 성공과 실패의 경계선이, 행복과 불행의 경계선이 희미해져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될 것 같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공한 삶과 행복한 삶은 다르다는 사실이다. 성공과 행복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성공할수록 고독해질지 모르는 일임을, 그리고 중요한 건 성공한 삶이 아니라 행복한 삶이라는 것임을 새삼 생각한다.  
 

 

 

 

 


* 맺는말

 

나의 경우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인간의 새로운 점을 발견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친척 집이나 친구 집에서 더부살이로 지내던 사람은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나중에 은혜를 갚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는 경우가 있다는데 그 이유는 뭘까? 어떤 소설에 따르면 더부살이로 지내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자기를 위해 주는 사람에게 동정 받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여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오히려 분노가 끓어오른다는 것. 인간에 대한 이런 발견이 소설의 가치가 아닐까 싶다. 만약 소설을 읽지 않는다면 우리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게 되리라.

 

 

아모스 오즈는 “소설을 읽는 건 누군가의 집 거실, 아이들의 방처럼 친밀한 공간에 초대받는 것 같은 일이다. 문학은 적이 아니라 이웃으로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소설에서 주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본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주제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주제란 그저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다 보면 드러나기 마련인 어떤 것에 불과하다. 내가 소설을 읽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저렇구나.’ 하면서 인간을 알아가는 것이다. 내가 소설을 읽는 것은 그런 마음으로 사니까 또는 그런 행동을 하니까 ‘인생이 저렇게 흘러가는구나.’ 하면서 인생을 알아가는 것이다. 

 

 

이 책으로 많은 것을 느꼈고 많은 것을 배웠다. 앞으로 체호프의 다른 단편도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그만큼 체호프는 나를 매료시킨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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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13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 ‘관리의 죽음‘ 관련해
세사르 바예호 시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가 있죠. 이건 우리가 가장 숨길 수 없는 부분이죠. 이 시 전편을 읽어 보시면 그럼에도 사람을 보듬는 바예호의 의지가 무척 감동적이랍니다.

4. ‘주교‘ 관련
카프카 ‘변신‘ 끝이 그레고르가 죽자 가족들이 소풍가잖아요ㅎ;
역시나 위에서 제가 언급한 세사르 바예호 시에서 나오는 대목 ˝내가 사랑함을 알고, 사랑하기에 미워하는데도, 인간은 내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의 무정함을 깊이 아는 본능인 것도 같고요. 그걸 이해하고 삶을 긍정의 대상으로 볼 지 부정의 대상으로 볼 지도 각자의 몫이겠죠. 부정으로 작동한 게 5. ‘내가‘의 결말인 듯.

페크pek0501 2017-09-13 22:21   좋아요 0 | URL
댓글의 3번. 멋지군요. 제 글과 관련된 글을 쓸 줄 아시는 님의 센스...

댓글의 4번도 멋지군요. 저도 카프카의 <변신>에서 소풍 가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성장한 딸의 모습에 시집 갈 때가 되었다며 흐뭇하게 보는 부모의 시선에 대한 문장도 있었던 것 같아요. 아들은 죽었는데 말이죠.
제가 리뷰로 올린 적 있는 소설이라 기억하는 것 같아요.

무플 면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굿 밤 되세요.

아침에혹은저녁에☔ 2017-10-21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 드립니다

페크pek0501 2017-10-21 23:04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살다 보니 그런 일도 있네요... ㅋ

2017-11-05 0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05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06-09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장 사야겠는데, 당장 읽을수 있을지는 의문이네여 읽을게 넘쳐서 ㅎ

페크pek0501 2018-06-09 22:32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읽을 게 넘쳐도 아마 이 책은 금방 읽으실겁니다. 지루하지가 않고
재밌거든요.
강추합니다. 체호프를 좋아하시게 될 것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06-09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근데 리뷰쓰는데 엄청 시간 들이신 것 같아요 역쉬 페크님!

페크pek0501 2018-06-09 22:34   좋아요 1 | URL
10편의 단편 중 5편을 골라 썼는데도 글이 길어졌어요.
글이 긴 건 기술 부족 때문입니다. ㅋ
저로 하여금 할 말이 많게 하는 책은 대체로 저에게 좋은 책입니다.
좋은 토요일 밤 보내십시오.
고맙습니다.

카알벨루치 2018-06-09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장 주문했는데 그 놈만 안 오고 딴 놈들만 왔네요 기대하고 기다리게 만드네요 ㅎ

페크pek0501 2018-06-10 13:06   좋아요 1 | URL
기대하고 기다릴 때가 행복한 시간입니다. ㅋ
 

 


1.
..........
이 서재의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초창기 때 ‘알라딘 서재’에 대해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세계에는 아주 웃기는 현상이 있어. 방문자가 수백 명이 되는 알라디너는 다른 서재에 기웃거리며 댓글을 남기지 않아. 다만 자기 서재에 몰려드는 댓글에 답글을 쓸 뿐이야. 그는 수많은 신하들을 거느린 왕의 포즈를 하고 있는 거지. 난 그런 왕이 어쩌다 한번 내 서재에 댓글을 남겨 주면 너무 영광스러워지는 거야.”

 
- 어느 서재에 쓴 나의 댓글을 옮김.
..........

 

 

서재 알라디너로서 활동한 지 8년이 넘었다. 여전히 수많은 신하들을 거느린 왕들을 볼 때가 있다. 그들을 보면 그런 방면으로 ‘능력자’라는 생각을 한다. 유능해 보인다. 그렇다고 내가 왕이 되고 싶지는 않다. 자주 글을 올리고 자주 답글을 써야 하는 게 시간을 많이 빼앗길 것 같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단지 자주 글을 올리는 편에 속하지 않는 내 서재에, 보잘것없는 내 서재에 ‘좋아요’를 눌러 주시고 댓글을 써 주시는 분들에게 각별히 고마움을 느낀다.

 

 

 

 

 

 


2.
..........
저의 경우, 아주 신중해지면 글을 올리지 못하겠더라고요. 대충 살자,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 글을 올려요. 글을 올릴 때 자신 없는 글 - 내가 맞게 쓴 건지 잘 모를 때를 말함 - 을 올릴 때도 있는데 저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나중에, 예전에 이러이러하게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지금은 저러저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라고 쓰면 되지 뭐.)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실제로 작가들의 책을 읽어 보면 시간에 따라 생각의 변함이 있더라고요. 생각이 늘 고여 있는 물일 수는 없잖아요.

 

블로거가 되려면 제일의 조건은 이것 같아요. 신중하지 말 것. 다른 말로 바꾸면 소심하지 말 것, 이 되겠습니다. 신중함과 소심함은 동의어로 느껴지곤 합니다. 원래 글쟁이란 창피함을 무릅쓰고 글을 쓰는 자, 라고 봅니다. 창피한데도 글을 쓰는 이유는? 글을 쓰지 않는 것보단 창피한 게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랄까요?

 

이 댓글 역시, 내가 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라고 생각하며 올리는 바입니다. ㅋ


- 어느 서재에 쓴 나의 댓글을 옮김.
..........

 

 

나는 왜 창피함을 무릅쓰고 글을 쓰며 사는 걸까? 이것에 대한 답을 생각하곤 한다.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잘 쓴 책들이 많은데 그러니 나까지 보탤 필요가 없는 건데 하면서 말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내 생각을 남들과 단순히 공유하고 싶어서일까, 내가 어떤 멋진 생각을 했음을 뽐내고 싶어서일까, 즐거운 생활을 위해 취미는 있어야 하겠고 그런데 다른 취미는 없고 어쩌다 보니 글이라도 쓰자는 생각을 하게 돼서일까?

 

 

내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다가 요즘 다른 이유를 찾았다. 근심이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함이라는 것. 예를 하나 들면 병치레가 잦은 친정어머니가 이번 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하는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글을 쓰는 거라는 것. 글을 쓰는 동안에는 글쓰기에 집중한 나머지 어떤 상념도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게 나는 좋은 것이다. 결국 글을 쓰는 건 나를 위한 것이다. 

 

 

 

 

 

 

홍천의 생태숲

 

 

 

 

 

 


3.
요즘 한약을 먹고 있다. 친정어머니를 보살피느라 애쓴다며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이 한의원에 나를 데리고 가서 지은 약이다. 보약인 셈이다. 나뿐만 아니라 아랫동서까지 데리고 가서 약을 지었으니 며느리들의 건강을 챙겨 주기 위함일 것이다. 사실 며느리한테 병이 생기면 시어머니의 입장에선 당신의 아들이 불행해질 것이니 며느리의 건강을 챙기는 일은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시어머니가 흔치 않으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무엇보다도 나에 대한 시댁 식구들의 애정이 느껴져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약 얘기를 하면서 “난 다음에 또 태어난다면 우리 시댁으로 또 시집가고 싶어.”라고 말했더니 한 친구가 이렇게 물었다. “그럼 다음에 또 태어나면 또 니 남편과 결혼하고 싶어?”라고. 이것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랬다. “노노노. 다음엔 다른 남자와 살아봐야지 무슨 소리야? 시댁만 그렇다는 거지.” 모두들 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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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9-07 1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오늘 글은 유난히 저의 마음을 대변하시는 것 같아
웃음이 나와요. 어쩌면 그리도 꼭 집어내시는지...ㅋㅋ
사람들이 SNS를 하는 건 인정 받고 싶어서라더군요.
정말 그렇구나 싶어요.
이것 땜에 죽는 사람도 있다니 참...
저도 어머니 아플 때 유독 많이 그랬던 것 같아요.

시어머님 정말 속이 깊으시네요.
배우자를 잘 만나는 것도 복이지만
시댁 어른을 잘 만나는 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복이 많으시네요. 언니는.^^

페크pek0501 2017-09-07 18:46   좋아요 2 | URL
왕이 납시셨네요. ㅋㅋ 제가 여기서 올챙이일 시절에 스텔라 님도 왕에 속했답니다. 님의 서재가 매일 수백 명이 방문하는 서재였으니까요. 그러니 스텔라 님이 제 서재에 첫 댓글을 남기셨을 때, 저는 영광스러웠겠지요.

그 시절, 왕으로 생각되던 분들로 스텔라 님, 로쟈 님, 마태우스 님, 글샘 님, 순오기 님 등이었어요. 참 대단하다 싶었죠.

그로부터 벌써 8년이 지났다는 걸 생각하니 참 시간이 빠르다 싶습니다.

stella.K 2017-09-07 18:57   좋아요 3 | URL
헉, 제가 언니 서재에 첫 댓글러였습니까?
몰랐네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좀 더 읽직 알아 뵙는 건데...
그래서 언니가 저를 예뻐라 하시는거구나.ㅋㅋ

하긴 첫 대글자를 잊지 못하죠.
저도 저의 서재 첫 방명자가 있었는데
kimji라는 분이셨어요.
오래 전에 활동을 중단하셨지만.
그런데 그분이 이후에 별로 제 서재에 댓글을 안 남기셔서
뜨악하니 멀어졌습니다. 전 안 그러죠? 열열히 남기잖아요.ㅎㅎ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네요.
지금은 북풀 땜에 조회수가 높지 않아요.
두자릿수죠. 어떤 땐 한 자리인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아예 투데이를 확인 안하려고 막아놨잖아요.
물론 알라딘 서재 가면 확인할 수 있지만.ㅠ

벌써 8년이군요. 축하드려요.^^

페크pek0501 2017-09-07 19:06   좋아요 3 | URL
처음 왕의 댓글을 받은 것은 글샘 님이셨어요. 아마 그 다음이 순오기 님이셨을 듯하네요.
스텔라 님은 제가 주로 방문하고 제가 주로 댓글을 썼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언젠가부터 서로 왕래하며 댓글을 쓰게 되었죠.

어쨌든 스텔라 님은 왕이셨습니다. 제 눈엔... ㅋ

(참고로, 북플로 제 글을 읽는 건 방문자 수에 포함되지 않는 것 같으니 방문자 수보다 많은 사람들이 글을 본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북플로 들어가 보는 것도 방문자 수에 포함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stella.K 2017-09-07 19:07   좋아요 3 | URL
ㅎㅎㅎㅎ 언니....
오늘 완전히 저를 들었다 놨다 하시는군요. 어떻게...ㅋㅋㅋㅋㅠㅠ
암튼 전 언니를 사랑합니다.^^

페크pek0501 2017-09-07 19:08   좋아요 1 | URL
미 투...(하트 뿅뿅)

qualia 2017-09-07 18: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pek0501 님, 정말 좋은 생각,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큰 공감을 주니까요. 위 stella.K 님 생각도 정말 제 생각을 그대로 표현해주신 듯하네요.

페크pek0501 2017-09-07 19:03   좋아요 1 | URL
와와와... 반갑습니다. 글쟁이들의 생각이란 게 다 비슷한 모양이군요.

댓글, 고맙습니다.

cyrus 2017-09-07 19: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크님의 글에 인용된 첫 번째 댓글, 제가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작년부터 인맥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친구 수 많아봤자 별 의미가 없고 셀럽, 인기 블로거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페크pek0501 2017-09-09 18:22   좋아요 0 | URL
인맥 다이어트라, 처음 듣습니다. 재밌는 말이에요.
블로그에서뿐만 아니라 저는 이미 친구 수도 줄였답니다. 많은 게 좋은 게 아니더라고요. 열 명 미만으로 만들었어요.
친구 수 많은 것보다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서너 명만 있는 게 좋다고 누군가가 말해 주더군요.

그런데 cyrus 님 정도면 인기 블로거입니다. ㅋ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17-09-07 2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재가 8년 되셨다고 하시면 그동안 좋은 글을 많이 쓰셨겠네요. 저는 중간의 어디쯤 부터 읽었을 것 같은데요. 앞으로도 계속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블로그를 하면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고 좋은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pek0501님 편안한 밤 되세요.^^

페크pek0501 2017-09-09 18:24   좋아요 1 | URL
8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만큼 훌쩍 가 버린 느낌이에요. 세월을 화살로 비유한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앞으로 8년도 훌쩍 가 버릴 것 같아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좋은 저녁 보내세요.

AgalmA 2017-09-07 21: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와서 소통을 부르짖으며 다른 서재 댓글 엄청 남겨서 제가 얻은 게 뭐였나 생각하면.... 트러블과 마음상함이 더 컸던 거 같아요. 쌍방의 과실도 있겠으나 암튼 그래서 요즘은 예전의 반도 남기지 못하게/않게 됐어요. 댓글로 생각지 못한 유익한 깨달음을 얻을 때도 있겠지만 시간적으로도 에너지적으로도 책 읽는 게 더 유익할 지도 모르겠단 잠정적 결론. 아마 다른 분들도 대개 이렇지 않나 하는데요. 속깊게 길게 대화하는 이웃들이 다들 편중되어 있죠.
그러나 가끔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게 될 때는 정말 기쁘죠. 저도 알맹이 있는 댓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요.
요즘 저는 서재에 수다성 글을 많이 쓰는 편인데 이웃에게 정보가 될 만한 글이면 올린다는 제 나름의 방침이 있습니다ㅎ
누가 내 서재 얼마 오고 나가고 신경쓰지 않고 마이웨이~하시면 더 맘이 편하지 않을까요^^?

페크pek0501 2017-09-09 18:31   좋아요 2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요. 말도 소통이 안 될 때가 있는데 문자는 더 그럴 거고,
각자 생각이 다르니 마음이 상할 수 있겠죠. 저도 어떤 때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댓글을 쓴 것 같아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 마음 쓰일 때가 있더라고요.

매일 체크하는 건 아니지만 방문자 수를 보는 게 저는 재밌습니다. 그것에 대해 스트레스 전혀 없습니다. 차라리 방문 수로 스트레스를 받을 만큼 일상의 고민이 하나도 없으면 좋겠어요. 난 오로지 블로그가 내 고민이야, 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방문자 수가 그날 내 글을 읽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부정확한 게 싫어서 정확함을 기하기 위해 북플로 글을 읽는 사람도 포함시켰으면 했습니다. 물론 방문자 수가 많아지면 적은 것보다 좋지요.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나의 길을 가겠노라, 마이웨이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7-09-08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9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장소] 2017-09-08 03: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시죠 ? ^^ 구구절절 공감 표시를 눌러도 된다면 그러고 싶은 얘기들입니다 .
댓글로 말하면 저 만큼 많이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말을 거는 사람도 없지 싶은데요 .ㅎㅎㅎ
막상 제 방은 늘 거의 비어있기 마련 ^^
그래도 늘 짧은 글이어도 있을때마다 좋아요 ㅡ 쿡! 눌러 주시는 분들 덕에 그렇게 떠드는게 힘들지 않았네요 .
단 ,제가 먼저 걸지 않으면 제게 말을 걸어 오는 분들은 지극히 제한적이란 것 ..!!

그러나 , 알라딘 , 북플의 이웃님들은 제게 소중한 가족입니다 . ^^
쓸데없이 떠들어도 항상 귀기울여 주신 pek0501 님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17-09-09 18:37   좋아요 2 | URL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장소 님의 방이 비어 있지 않던데요. ㅋ
˝알라딘 , 북플의 이웃님들은 제게 소중한 가족입니다˝와 같은 말씀은
마음이 아름다운 분만이 하실 수 있는 거랍니다.
저도 고맙습니다. 앞으로 쭉~ 왕래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AgalmA 2017-09-09 18:57   좋아요 2 | URL
저는 어쩌다 그볶음자리님 스토커가 되어서...만나면 반갑다고 댓글러~~🎼
그장소님과 이야기하는 재미에 빠지면 도끼 썩는 줄 모르는데 그게 무섭죠ㅎㅎ

역시 댓글이 많을라면 얘기거리 많은 걸 가득 쏟아내든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야기 정을 많이 풀어야 되는 듯~

페크pek0501 2017-09-09 19:05   좋아요 2 | URL
발품을 팔아야 하는 건 맞습니다. 짝짝짝~~~.
그것이 덕을 쌓는 일이기도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응원의 뜻이니까요.
저도 시간이 날 때 여기저기 다니며 댓글을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AgalmA 2017-09-09 19:28   좋아요 2 | URL
그런데 댓글도 마음이 동할 정도여야 글이 써지지 않나요? ˝좋은 하루 되세요˝ 댓글을 주고받는 게 적어도 님과 제 목적은 아니잖아요.
암튼 pek0501님은 소통에 대해 아직도 많이 열려 있으신 거 같아 보기 좋네요. 좋은 대화 거리도 상대도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점점. 위 본문에서 말씀하셨다시피 왕의 선언문 같은 양식이거나 자기 정신분석 해달라는 요청서 같은 글이 넘쳐나서.

[그장소] 2017-09-09 20:16   좋아요 2 | URL
pek0501 님 말씀에 갑자기 마음이 더없이 아름다워지려고 하잖아요~^^
바탕이 아름다운 마음은 아닌데 , 그러려고 ~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것 뿐이지 , ㅎㅎㅎ
그러니 앞으로도 쭉 그런 마음 가꿀 수 있게 마음 가두리가 되어주세요 . ^^

[그장소] 2017-09-09 20: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AgalmA 님 ~^^ 낮동안 좋은 하루셨나요?ㅎㅎㅎ
맞아요 . 맞아 . 댓글을 주고 받는 게 마음 자체를 주고 받는 것이기도 하고 , 그러면서 책의 정보도 생각도 , 일상도 점차 주고받게 되는거 같아요 . 나누는 것이랄까요 ?

글구 창졸지간에 볶음자리 스토커에 썩는 줄 모르는 도끼자루 역 까지 동시다발성 1인 다역극의 주역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닷~~^^ㅋ

여기에 , 또 제겐 AgalmA 님도 계시고 pek0501 님도 계셔서 운도 좋고 , 복도 많지 그럽니다~^^

페크pek0501 2017-09-13 11:37   좋아요 2 | URL
AgalmA 님도, 그장소 님도 계셔서 저는 인복 많은 사람이올시다. 으하~~

이 청명한 계절를 평화로운 마음으로 만끽하는 하루가 됩시다.

두 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그장소] 2017-09-13 11:45   좋아요 1 | URL
ㅎㅎ 저도 역시 고맙습니다~^^pek0501 님 !!♡
 

 

 


..........
사람은 대개 보고 듣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믿는다. 믿는다는 건 실은 욕망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식인 것이다. 교양인을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입만 벌리면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극복될 수 있다는 건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실은 그들은 원하지 않는다.(81쪽)

 

 


행복은 경쟁이 아니라 관계에서 온다. 경쟁에서 뒤쳐져 불행하다 생각하는 사람이나 경쟁에서 이겨 행복하다 생각하는 사람이나 불행하긴 매한가지다.(89쪽)

 

 

 

자기를 성찰한다는 건 자기만 생각하지 않는 것.
남 생각도 하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건
결국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해체하는 것이다.(109쪽)

 

 


모든 운동엔 두 가지 필수적인 덕목이 있다. 첫째는 자기가 하는 운동에 대한 분명한 ‘자부’이고, 둘째는 자기가 하는 운동이 운동의 일부라는 ‘겸손’이다. 자부가 없는 운동은 비루해지고, 겸손이 없는 운동은 빗나간다.(109쪽)

 

 


김규항,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에서.
..........

 

 

 

 

제가 밑줄을 그은 글 중에서 뽑아 옮겼습니다.
멋진 책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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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8-29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책이라고 하시는만큼 좋은 책이겠지만, pek0501님이 고르신 내용도 참 좋습니다.
오늘은 비가 그치고 조용한 것 같아요. 시원하고 기분좋은 하루되세요.^^

페크pek0501 2017-08-30 13:19   좋아요 1 | URL
옙, 감사합니다.
아포리즘의 글은 마치 시를 읽는 것처럼 음미하는 재미가 있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

에디터D 2017-09-01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이 책 읽고 있어요. 도서관에서 대출했는데 구매할까 고민중이에요.ㅎㅎ

페크pek0501 2017-09-04 15:3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오, 이 책을 읽고 계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이런 류의 책은 구매하여 자주 들춰 보는 걸 저는 좋아합니다.
아포리즘은 한번 쓱 읽고 말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입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고맙습니다.
 

 


..........
누군가에게 홀린 사람은 자기를 홀린 것이 그 사람의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다. 얼굴선, 몸매, 눈빛 같은 것에 실려 있는 어떤 것,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기운이지, 얼굴선이나 몸매나 눈빛 자체는 아닌 것이다. 홀림당한 사람은 이성적 판단을 할 줄 모른다. 아니, 홀림은 이성적 판단에 잡히지 않는다. (···) 따라서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매력이다.
- 이승우 저, <사랑의 생애>,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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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 <사랑의 생애>를 완독했다. 위의 글을 읽다가 내가 대학 일년생이었던 과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학교 앞 다방에서 친구들과 넷이 모여 앉아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해 얘기를 나눴던 어느 시간 속이다. 우리는 그때 남학생과 미팅을 몇 번 했던 터라 남자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은 때였다. 우리가 가장 궁금했던 것 즉 미팅을 할 때 우리 눈에 어떤 남학생이 멋있게 보이는 건지 우린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 건지 하는 것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러니까 미팅 파트너의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눈 것이다. 외모인가? 학벌인가? 성격인가? 목소리인가? 집안인가?

 

 

누군가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저런 얘기 끝에 만장일치로 명쾌하게 내린 그때의 결론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것은 상대의 빼어난 외모도 아니고, 좋은 학벌도 아니고, 호감 가는 성격도 아니고, 성우와 같은 목소리도 아니고, 든든한 백이 있거나 부유한 집안도 아니고 그저 상대가 풍기는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에 따라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는 거라고 단정을 지었다. 다시 말해 남자가 풍기는 분위기가 좋으면 우리가 끌리는 것이라고 단정을 지었다. 우리 나이 고작 스물이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던 풋풋한 스물.

 

 

지금 생각하면 우리를 끌리게 하는 것이 상대의 ‘분위기’인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 같은 조건의 두 사람 중에서 잘생긴 사람보다 잘생기지 않은 사람에게 끌리는 경우가 있다면 그 이유를 ‘분위기’로 설명할 땐 제법 설득력을 갖는 것 같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에 따라 상대의 외모, 학벌, 성격, 목소리, 집안, 눈빛, 어떤 태도, 어떤 재주, 말솜씨, 지성미, 야성미 등 여러 변수 중 그 어떤 것에 유독 끌리는 게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는 그것들의 총합이 남들보다 월등하여 끌리는 경우도 있겠다. 반대로 초라해 보이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껴 끌리는 경우도 있겠다.

 

 

이런 경우는 어떤가? “그의 매력을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어쩐지 그가 좋아.”라고 말할 경우다. 어쩌면 ‘어쩐지’라고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큰 매력을 나타내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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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8-29 1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분위기.
그런데 그 나이 땐 분위기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잘 생겼냐, 못 생겼냐부터 따지지 않나요? ㅎ
암튼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어요.
지금은 우리의 자식들이 그럴 차례니 격세지감 입니다.ㅠ

오늘은 많이 선선해졌습니다.
이불도 끌어 덮고 자고.
어떻게 날씨가 이럴 수 있는지 그 또한 신기할 정돕니다.
작년 이맘 때도 더워서 헥헥댔는데.
건강 조심하세요.^^

페크pek0501 2017-08-30 12:46   좋아요 2 | URL
분위기가 좋은 남자를 좋아하는 1인입니다만, 저도 미혼 시절 땐 외모 많이 따졌지요. 마치 그것이 그 사람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양. 요즘 우리 딸들이 외모 따지는 걸 보니 한심하더군요. 중요한 건 외면이 아니라 내면인데 말이죠.

제가 터득한 바에 따르면 못생긴 사람도 재주 없는 사람도 다 각자의 매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누가 발견하느냐에 따라 연애가 시작되지요. 이걸 실험으로 외국에서 증명한 일도 있어요. 직장에서 한쌍씩 묶어서 일을 시켰더니 몇 퍼센트의 사람들이 사랑에 빠졌다는 거예요. 정확히 생각이 안 나는데 꽤 높은 퍼센트였어요.
배우들이 남녀 주인공을 맡으면 결혼에 골인하는 것도 그래서일 거라는 추측입니다.

날씨가 어제는 춥기까지 해서 이렇게 여름이 훌쩍 떠날 수 있는 건가, 의아해 했다는...

오늘도 좋은 날씨가 될 것 같습니다. 저녁이면 시원해질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2017-08-29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30 1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29 14: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현실보다는 만화에서 주로 나오는 상황인데, 상대가 불쌍하게 느껴져서 결혼해주는 동정혼이라는 게 있어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반 고흐가 가난하고 병든 시엔과 결혼하고 싶었던 이유를 동정혼의 의미로 봤습니다.

페크pek0501 2017-08-30 12:50   좋아요 1 | URL
여자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남자들이 있어요. 예전에 그런 이유로 제임스딘이 인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가 눈물을 흘리면 안아 주고 싶게 만들죠.
남자들도 여자들의 눈물에 약한 경향이 있는 것 같고...
사랑은 저마다의 빛깔이 다 있어서 다 다른 감정으로 사랑하게 되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사랑은 뭐다, 라고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qualia 2017-08-29 22: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에게 홀린 사람은 자기를 홀린 것이 그 사람의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다. 얼굴선, 몸매, 눈빛 같은 것에 실려 있는 어떤 것,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기운이지, 얼굴선이나 몸매나 눈빛 자체는 아닌 것이다. 홀림당한 사람은 이성적 판단을 할 줄 모른다. 아니, 홀림은 이성적 판단에 잡히지 않는다. (···) 따라서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매력이다.
- 이승우 저, <사랑의 생애>, 72쪽.

→ 저는 pek0501 님께서 인용해주신 소설가 이승우의 윗글을 읽고, 인공지능(AI)은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궁극적으로 인공으로 만든 유사 지능 혹은 시뮬레이션 지능(simulated intelligence, simulation of intelligence)에 머물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더욱더 확신하게 됩니다. 인공지능은 결국 의식을 소유할 수는 없을 것이란 얘깁니다(적어도 근미래 2045년 안팎까지는). 기껏해야 유사 의식이나 시뮬레이션 의식(simulated consciousness, simulation of consciousness) 소유에 그치리라 봅니다. 인공지능이 의식을 지니지 못하는 한, 결국 인간을 모든 점에서 능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다는 것인지 소설가 이승우의 위 얘기를 중심으로 함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두 사람 F와 M이 있다고 합시다. F가 M한테 홀렸어요. 근데 F가 M한테 홀리기 위해선 반드시 F와 M 사이에 어떤 감각적 자극과 반응이 오고가야만 하죠. 즉 F가 M한테 홀렸다는 사실은 F와 M 사이에 어떤 감각적 자극과 반응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함축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감각적 자극과 반응 없이는 그 어떤 의식 작용(예컨대 홀림이라는 의식 작용)도 발생할 수 없다는 인과의 기본 사실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소설가 이승우는 F의 홀림이라는 의식적·심리적 변화를 초래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F 자신은 모른다는 식으로 얘기합니다. 즉 당사자 F는 그 감각적 자극과 반응의 구체적 명세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게 소설가 이승우가 윗글에서 얘기하는 요지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소설가 이승우의 위 얘기를 분석적 차원에서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F의 홀림을 야기한 감각적 자극(과 반응)의 후보로서 소설가 이승우가 윗글에서 예시한 것을 함 도식적으로 나타내 보죠.

① 얼굴선, 몸매, 눈빛 같은 것에 실려 있는 어떤 것
②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기운
③ 얼굴선이나 몸매나 눈빛 자체

윗글에서 소설가 이승우는 홀림을 야기한 것은, 좀 더 정확히 말해 홀림을 야기한 감각적 인과 요소는 ①과 ②이지 ③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①, ②, ③ 각각이 정확히 무엇인지 다시 더 세밀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①은 홀림을 야기한 것이 얼굴선, 몸매, 눈빛 같은 시각적 자극(물)에 ‘실려 있는’ 어떤 것이라는 얘기인데요. 이게 과연 무엇일까요? 시각적 자극에 실려 있는 것은 더 고차적인 시각적 자극일까요? 즉 더 미묘하고 더 섬세하고 고차적인 통합적 유형의 시각일까요? 그런 유형의 시각이 있을까요? 아니면 시각적 자극에 실려 있는 것은 시각적 자극 이외의 다른 유형의 자극인 것일까요? 위 짧은 인용문만 가지고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을 듯합니다. 다만 시각적 자극에 실려 있는 어떤 것이라고 했으니까, 시각적 자극이 아닌 다른 유형의 자극이라고까진 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이걸 부정하면 위 문장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순의 악순환에 빠지는 무의미한 문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각 자극과 다른 여러 유형의 자극이 융합되거나 통합된 형태의 복합 자극일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해서 우리가 논의를 명료하게 진행하기 위해 일단은 ①을 얼굴선, 몸매, 눈빛 같은 일차적이고 개별적인 시각 자극을 중심으로 하지만 다른 여러 유형의 자극들과 융합되거나 통합된 형태의 복합적 시각 자극, 즉 좀 더 미묘하고 섬세하고 고차적인 통합적인 유형의 시각 자극이라고 합의해 보죠. 다음으로 ②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기운’은 더욱더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감각적 자극 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러나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촉각으로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직설적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닌 것 같고요. 일종의 문학적 표현이랄 수 있는데요. 그래도 감각적 자극의 측면에서 분석을 해보면 단순히 일차적인 시·청·촉·후·미각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에 묻어서 함께 느껴져오는 어떤 감각의 총체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즉 뭐라고 딱 꼬집어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감각의 총체를 기운이라고 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죠. 여기에서도 기운이라는 말에 현혹돼 감각이라는 근본적 인과 요소를 배제하면 애초에 말이 성립되지 않는 무한퇴행에 빠진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다음으로 ③은 말 그대로 ‘얼굴선이나 몸매나 눈빛 자체’라고 했으니까 일차적인 시각 자극을 직접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우리가 혼란스러움 없이 곧바로 동의할 수 있는 사항이라고 봅니다. 이제까지의 분석을 종합·정리·요약해 말하자면, 소설가 이승우의 얘기는 결국 홀림이라는 의식적 변화 즉 심리적 사건을 야기한 것은 일차적인 감각으로서의 개별적 시·청·촉·후·미각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 그것은 개별적 시·청·촉·후·미각들이 전체적으로 어우러져 좀 더 고차적인 것으로 통합된 감각의 총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가 이승우는 나아가 “홀림은 이성적 판단에 잡히지 않는다. (···) 따라서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매력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홀림에 대한 이런 명제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해 보죠.

④ 홀림은 이성적 판단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⑤ 홀림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홀림의 의식적 속성을 얘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홀림을 야기한 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고차적인 통합적 감각의 총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홀림 자체의 의식적·감정적 측면까지 이성적 접근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란 얘기죠. 다시 말해 소설가 이승우는 홀림의 감각적 인과 관계는 파악할 수 있지만, 그 감각적 인과 관계에 따라 발생한 홀림이라는 의식적 사건의 본질은 이성적(과학적)으론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저 홀림이라는 독특한 느낌이나 감각질(qualia)을 느낄 수 있을 뿐이란 것이죠. 이것은 pek0501 님께서 위에서 얘기한 분위기(일종의 mood)라는 개념에도 거의 동일하게 해당되는 얘기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위에서 말한 인공지능의 한계와 직결되는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공지능(AI)은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인공으로 만든 유사 지능 혹은 시뮬레이션 지능(simulated intelligence, simulation of intelligence)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의식과 관련해선 기껏해야 유사 의식이나 시뮬레이션 의식(simulated consciousness, simulation of consciousness) 소유에 그칠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은 근본적으로 계산(computation, 연산, 전산)을 기반으로 하는 전기전자전산적 체계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알고리즘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의식의 본질에는 다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산은 궁극적으로 의식을 실현(realization, implementation, instantiation, 구현, 예화)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해서 홀림이라는 본질적으로 의식적인 사건을 인공지능은 파악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으리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pek0501 님의 윗글 중 맨 마지막 단락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끝맺도록 하죠.

《이런 경우는 어떤가? “그의 매력을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어쩐지 그가 좋아.”라고 말할 경우다. 어쩌면 ‘어쩐지’라고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큰 매력을 나타내는 것인지 모른다.》

과연 인공지능 AI가 위와 같은 의식적 느낌을 느낄 수 있을까요? 물론 제가 판단하기에도 근미래(적어도 2045년까지)의 인공지능 로봇은 완벽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어떤 느낌을 느끼고 있는지를 완벽한 말솜씨로 우리한테 설명해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의 본질은 유사 지능 혹은 시뮬레이션 지능(simulated intelligence, simulation of intelligence)이거나 유사 의식 혹은 시뮬레이션 의식(simulated consciousness, simulation of consciousness)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로봇은 튜링 테스트를 충분히 통과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튜링 테스트로는 근본적으로 의식의 소유 여부를 판별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뇌의 내부 나아가 의식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선 튜링 테스트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고 애초에 의식 내부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는 것으로 설정한 테스트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페크pek0501 2017-08-30 12:56   좋아요 1 | URL
qualia 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좋은 글은 댓글로 남기기 아깝지 않나요? 저 같으면 쓰다가 길어지면 페이퍼로 올리게 될 때가 있어요. 님도 페이퍼로 올려 보시길 강추합니다.
님의 댓글을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우리가 스마트폰을 하나씩 가지고 다니듯이 언젠가는 로봇을 하나씩 갖고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로봇에게 감정을 심게 됩니다. 그랬더니 나의 로봇과 내 딸의 로봇이 사랑에 빠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인간을 위해 복종하며 살아야 하나?‘그러면서 가출을 합니다. 그리고 돈을 버는 방법도 알고 있어서 다른 데에 취직을 합니다.
나중엔 로봇이 반란을 일으키며 인간들과 싸우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하하~~ 제 상상입니다. 님의 댓글을 읽다가 생각난 걸 써 봤어요.
긴 댓글,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요즘 날씨가 좋아서(특히 저녁에) 걷는 걸 좋아합니다.
님도 좋은 늦여름을 만끽하시길...
댓글 감사합니다.

한수철 2017-08-29 2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는 제 기준에는 실패한 소설이라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끝까지 읽지 않은 유일한 이승우의 소설이니까요.ㅎㅎㅎ 고루했어연.
농담입니다.
그나저나

이 소설은 남녀의 연애를 뭔가 ‘의고적‘으로 다뤘지요. 즉, 실망스러웠습니다. 제 기준에는 그렇습니다. 예컨대 한국의 이십 대 남녀가 이 소설을 읽는다면 몇 페이지 읽다가 집어던질 거라는 데 전재산을 걸고자 합니다.

아무튼

stellak 님의 댓글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의 댓글은

약간 기상천외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왜 소설 외적인 이야기를 아무 전제도 없이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저라면 댓글을 달아 주기 너무나 어려울 것 같은데요. 오지랖이라면 실례했습니다. 어쨌거나

이승우의 장편소설 ‘사랑의 생애‘는 좀 별로였다는 생각입니다. 뭐,

그냥 그렇다고요.^^

qualia 2017-08-30 20:47   좋아요 1 | URL
아무튼

stellak 님의 댓글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의 댓글은

약간 기상천외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왜 소설 외적인 이야기를 아무 전제도 없이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저라면 댓글을 달아 주기 너무나 어려울 것 같은데요. 오지랖이라면 실례했습니다. 어쨌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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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맞아요. ‘기상천외’는 너무 과한 칭찬의 말씀의 말씀인 것 같고요. 약간 맥락이 벗어난 느낌은 들 수도 있겠습니다.

근데 저는 pek0501 님의 윗글을 읽으면서 우리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이나 감정(emotion, feeling, affect)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요즈음, 인공지능의 의식 소유 여부 논제에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알라딘 블로그 동네에서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동네에서도 인공지능의 의식 소유 여부 논제에 대한 (댓)글들을 꽤 많이 써올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관심이 아주 고조돼 있던 참이었죠. 근데 딱 pek0501 님의 윗글을 읽게 된 거예요.

pek0501 님의 윗글은 우리 인간 의식의 핵심적인 속성들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글입니다. pek0501 님께서 인용해주신 소설가 이승우의 ‘홀림’에 대한 단상뿐만 아니라 pek0501 님의 ‘분위기’에 대한 사유는 인간 의식 혹은 감정의 고유한 속성(property, attribute)이 어떤 것인지, 그런 속성들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떤 독자적 실체인지, 과연 인공지능이나 미래의 앤드로이드 로봇들은 그런 의식이나 감정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인지, 의식/감정은 지능(intelligence)과 어떤 점에서 다르고 같은 것인지... 등등 여러 가지 흥미로운 논제들을 논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 안성맞춤인 글이라는 것이죠.

함 생각해보세요. 과연 인공지능이, 그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앤드로이드가 저런 홀림과 분위기라는 미묘하고도 독특한, 그 신비로운 의식의 풍요로운 스펙트럼을 느낄 수 있을까요? 단지 기계에 불과하고, 단지 계산이라는 디지털 연산으로 모든 걸 처리하는 인공지능과 로봇들이 저런 인간 고유의 감정과 느낌들을 생생하게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인공지능과 로봇들이 자신의 내적 의식 세계의 풍경을, 감정의 섬세한 갈피갈피를 다채로운 의미를 지닌 언어로써 표현해낼 수 있을까요? 그래서 pek0501 님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학교 앞 다방에서 친구들과 옛 추억에 대해 즐겁게 얘기를 나누면서, 미팅 상대 남학생들한테 느꼈던 첫인상을 재미있게 풀어놓으면서 품평회를 할 수 있을까요? 인공지능과 로봇이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느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 감정을 느끼고 ‘마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과연 ‘초라해 보이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껴 끌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인공지능과 로봇의 의식 소유 여부에 대한 논제를 다루는 데 아주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들입니다. 위와 같은 질문들로부터 인공지능과 로봇의 의식 소유 여부에 대한 논의와 탐구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위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의식과 지능 개념에 대한 논자들의 철학적·과학적 입장이 갈린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 일반이나 지식인 사회에 인공지능에 대한 논제가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흥미를 끄는 논제의 하나로 떠올랐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러나 그런 무성한 논의들이 있음에도 위와 같은 기본적·본질적인 물음들에 대한 논의와 천착은 그닥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 아쉬움을 느끼고 있던 차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는 pek0501 님의 윗글을 읽고 제 의견을 써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pek0501 님께 속으로 아주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아주 짧게 소설가 이승우의 ‘홀림’에 대한 단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올리려고 했던 것이었죠. 사실 소설가 이승우의 윗글은 매우 애매모호하고 매우 비일관적인 논리의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가의 단상이니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문학가의 저런 문학적인 글을 논리적 분석의 잣대로 평가하고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격에 맞지 않는 ‘우물에 숭늉’이나 연목구어적인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소설가 이승우의 위 단상은 pek0501 님의 윗글이 그렇듯이 우리 인간 의식의 고유성을 너무나 깊고도 적실하게 드러내는 아주 훌륭한 사례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의 인간 추월을 확실한 미래 사실로 맹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확신 혹은 맹신 중 지식(knowledge)이나 지능(intelligence) 분야의 인간 추월 주장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사안이라 봅니다. 하지만 의식에 관한 한 인공지능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해서 인공지능이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완전 추월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느냐, 적어도 최소한 특이점 도래 예측 시점인 2045년 이전까지는 전혀 불가능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이런 근미래를 넘어 중미래 2099년까지도 인공지능·로봇·앤드로이드 등의 의식 소유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21세기 초 현대 인간의 기대수명을 편의상 100년이라고 한다면, 이 기대수명을 훨씬 넘어서는 150년 이상의 원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실효적·실질적·현실적 의미가 그닥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런 구체적 시간 설정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고 SF 영화적 공상과 환상을 펼치는 것은 미래 예측으로서의 의미와 가치가 더욱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서 구체적 미래 시점을 밝히지 않고 인공지능·로봇·앤드로이드가 인류한테 반란을 일으켜 인류를 멸종시킬 것이라는 식으로 막연한 AI 종말론, AI 비관론을 아무런 논거도 없이 주장하는 것은 그 의미나 가치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에 대한 논증은 그럴 듯하게 제시하지 못하는/않는 것 같습니다. 대체로 근거 없는 억측과 강변이 대세인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문 철학자·과학자들 중에는 아주 설득력 있는 논증을 제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죠. 해서 저는 인공지능의 완전 인간 추월을 주장하시는 분들한테 위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묻고 싶다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인류한테 반란을 일으키고 심할 경우 인류를 멸종시키고 지구 종말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과연 저런 기본적·근본적 물음엔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런 물음에 설득력 있게 답할 수 없다면 그들의 AI 종말론, AI 비관론 주장은 허구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결론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충 이런 생각에서 제가 위 댓글을 써올렸다는 것이죠. 해서 (앞뒤 맥락을 모르는) 어떤 분들한테는 한수철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약간 기상천외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이번에도 쓰다 보니까 또 이렇게 글이 쓸데없이 길어졌네요. 아무튼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처음 올린 시각 : 2017-08-30 11:47]
[수정해 올린 시각 : 2017-08-30 12:53]
[다시 일부 수정 증보해 올린 시각 : 2017-08-30 20:46]

페크pek0501 2017-08-30 13:03   좋아요 1 | URL
한수철 님.
‘사랑의 생애‘는 저도 실패작이라고 봅니다. 사서 본 것을 후회할 정도예요.
오래전에 읽었던 <생의 이면>이 훨씬 좋았어요. 팬이라서 너무 큰 기대를 갖고 읽어서인지 실망하며 읽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독한 것은 술술 읽혀서이고 끝에가서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문장 반복과 의미 반복이 많은 것도 흠입니다.
왜 같은 저자의 소설인데 어떤 것은 매력적으로 읽히고 어떤 것은 시시하게 읽힐까요?
저는 저자가 매력적인 사람은 글도 매력적으로 쓸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에 보니 제 생각이 틀렸지 뭡니까.

하지만 이 책을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읽는다면 유익한 소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 작가의 연애 또는 사랑에 대한 분석이니까, 한 사람의 관점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물론 이것만 읽으면 안 되고 여러 책을 두루 봐야 제대로 연애 또는 사랑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17-08-30 13:13   좋아요 0 | URL
qualia 님,

˝근데 저는 pek0501 님의 윗글을 읽으면서 우리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이나 감정(emotion, feeling, affect)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기계에 불과하고, 단지 계산이라는 디지털 연산으로 모든 걸 처리하는 인공지능과 로봇들이 저런 인간 고유의 감정과 느낌들을 생생하게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인공지능과 로봇들이 자신의 내적 의식 세계의 풍경을, 감정의 섬세한 갈피갈피를 다채로운 의미를 지닌 언어로써 표현해낼 수 있을까요?˝
- 이것에 희망을 겁니다. 로봇이 바둑에서 인간을 이길 순 있어도 인간을 못 따라오는 영역이 있으니 그것은 감정의 영역.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긴 댓글을 쉽게 쓰시는 분들은 저로선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좋은 댓글 남겨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qualia 2017-08-31 21:16   좋아요 1 | URL
pek0501 님, 한수철 님, 촌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가 이승우의 작품은 아주 오래전에 읽어본 것 같은데요. 좀 철학적인 취향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프랑스에서 이승우의 소설이 꽤 읽힌다는 보도도 있었죠. 사실 위에 pek0501 님께서 위에 인용해주신 이승우의 ‘홀림/홀림당함’에 대한 단상은 분석적 잣대로 봤을 때는 매우 불투명한 문장이라고 봅니다. 제가 위 댓글들에서 나름대로 분석은 해봤습니다만, 어떤 일관적 논리성을 포착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 소설가, 시인들의 단상 혹은 에세이에 그런 점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소설가나 시인들은 더욱더 그런 논리적 일관성을 벗어나 달아나야겠지요. 혹은 넘어서거나 추월해야 할 겁니다. 저 자신 또한 너무 했던 얘기 또 하고 중언부언하고 동어반복하고 다람쥐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한 단계 더 올라서거나 한 단계 더 파고들어야 할 텐데요. 아무튼 그런 (미래의) 계기를 주신 pek0501 님과 한수철 님께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페크pek0501 2017-09-04 15:31   좋아요 0 | URL
qualia 님, 감사합니다.

청명한 하늘을 만끽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