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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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고 - 이혼율이 높을 이유를 제시하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남녀차별이 예전만큼 심하진 않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하게 남녀평등이 이뤄진 건 아니다. 지금도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여전히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어떤 문제로 대립하게 된다면 강자와 약자로서가 아닌, 옳은 자와 옳지 않은 자의 대결로써 해결해야 한다. 이때 물론 옳은 자가 승리해야 좋은 세상일 것이다.


이 작품은 여성들이 살기엔 얼마나 잘못된 세상인가를 말해 주는 페미니즘 소설이다. 이 소설 속 여자들(혜완, 경혜, 영선)은 남자들에 비해 약자이며, 그런 약자가 보는 세상은 공정하지 못하고 모순투성이다. 이로 인해 그녀들의 결혼생활은 불행하다. 세 여자의 삶 중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혜완의 삶이다.


남편의 말인지 아내의 말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건 남녀평등이 이뤄지지 않은 증거




“그까짓 한심한 책들을 만들기 위해 아이를 버려두고 (직장에) 나가려는 니 저의가 대체 뭐야?”

“아이를 키워 놓고 (직장에) 나가란 말이야. 그땐 내가 말리지 않을게.”

“직장과 가정 둘 중에서 택하란 말이야. 난 그꼴 못봐.” <본문 중에서>




위의 글은 회사를 다니던 혜완(아내)이 회식자리에서 맥주를 마시고 돌아온 날 밤에, 화가 난 남편이 혜완에게 퍼부은 말이다. 우리는 이것만 읽어도 남자의 말인지, 여자의 말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부부가 주고받는 말 중에서 남편의 말인지 아내의 말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남녀평등이 이뤄지지 않은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직장과 가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남편의 말에 혜완은, 왜 직장은 여자만 포기해야 하는지에 분노하고 억울해 한다. 어느 아내든 남편에게 육아를 위해 직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육아는 엄연히 여자의 몫이라는 건 이 사회의 고정관념이다.


흔히 남편들은 부부싸움 중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당신이 참고 살면 안돼?”라고. 그러면 아내들은 말할 것이다. “당신이 참으면 되잖아. 왜 꼭 여자가 참아야 하는데?”라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참고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왜 한 쪽이 참아야만 평화롭게 유지되는 가정을 가져야 하지?’ ‘누구를 위한 가정이길래?’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을 짓밟고 이루는 평화가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한 쪽의 희생을 담보로 한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이에 대한 해결책은 ‘공평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똑같은 비중으로 양보하고, 동등하게 희생하고, 균등하게 참아야 하는 것, 그래서 함께 힘들고 함께 행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자들은 말이야 이 사회에서 멸시당해도 싸다구...... 자기들과 같은 성을 낳아서 좀더 권리를 회복시켜줄 생각은 안하고 남자를 낳아서 다른 여자들을 구박하는 꼴을 보고 싶다는 거 아니니? 딸을 낳는다고 구박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 구박을 하는 사람의 부당함과 싸워야지 아부를 하다니...... <본문 중에서>




이것은 남아선호사상을 가지고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여자들을 탓하는 대목이다. 어쩌면 이런 여자들은 남존여비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탓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도 항변할 게 있을 것이다. 자신이 여자로서 받은 설움을 딸이 고스란히 받게 될까 봐 딸보다는 아들을 낳고 싶었다, 라고.


이런 남아선호와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여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 사회에 적응하며 살든지 아니면 그런 부당함과 싸워 나가며 살든지…. 그런데 이 시대 여자들은 이런 부당함에 맞춰 사는 건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판단할 줄 알 만큼, 이미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로서 받는 불이익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자신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이혼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


예전에 비해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마 이혼율은 점점 높아질 것이다. 난 이 소설에서 앞으로 이혼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한 가지를 알아내었다. 남녀의 인지의 차이, 그것이다. 맞벌이 부부가 많은 요즘, 결혼한 뒤 남과 여, 이 두 개의 다른 성은 한 세계 속에 살면서 서로의 인지의 차이를 확인할 터이다.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처럼 집안일과 육아를 마땅히 여자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고, 아내는 시대가 변했다며 집안일과 육아를 나눠서 남자도 여자와 똑같이 공평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래서 부부싸움이 잦아지고, 둘의 관계가 악화되고, 급기야 회복할 수 없는 사이가 되면 그땐 이혼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은 출간된 지 오래되었으나 지금 읽어도 진부하지 않다. 특히 결혼을 앞 둔 연인에게 이 책을 꼭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결혼한 뒤 남편으로서의 할 일과 아내로서의 할 일에 대해 서로 의논해서 미리 정하고 결혼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문제 말고도 결혼생활에서 또다른 문제들이 생기겠지만 이 문제만이라도 해결을 하고 결혼식을 올린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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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 관련한 다른 책들의 구절


“우리들의 결혼은 다만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여기에서 나는 당신의 장난감 인형 아내였을 뿐이에요.”(아내가 남편에게 한 말) - 입센 저, <인형의 집> 중에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는 것이다.” - 보부아르 저, <제2의 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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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의 기호학 - 개정판
박정순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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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의 기호학’을 읽고 - 당연하게 보이는 것들을 거부하다


재미가 있는 책을 읽을 것인가, 지식과 정보가 있는 책을 읽을 것인가, 이 두 가지로 나눠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단순한 재미만으론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한 권의 책값을 지불했으면 그것이 아깝지 않은, 유익한 가치를 얻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찾게 된 것이 전문서적이다. 전문서적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그 이상의 즐거움을 준다. 이 책도 그렇다.


전문가는 ‘전문적으로 문외한인 사람’ 또는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정의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의 시대는 다방면의 지식과 정보를 통합한 사고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문서적은 전공자들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은 이제 폐기되어야 할 생각이다.


대중매체에 대해 다양하고도 유연한 시각을 가지고 싶거나 또는 기호학에 입문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대중매체의 기호학>을 권한다. 기호학은 미디어를 통해 나타나는 인간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분석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된다. 저자는 책의 머리말에서 ‘이 책은 기호학적 이론들을 논의하기 위한 이론서가 아니라 단지 다양한 기호학적 접근 방법의 개념적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기호학적 아이디어들을 가능하면 쉽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려고 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기호학의 기초 개념을 말하고 기호학이 무엇인지를 기초적인 차원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기호학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소쉬르와 퍼스, 또 지적 사조에 큰 영향을 미친 야콥슨, 레비스트로스, 바르트 등의 학자들을 소개한다.


여기서 기호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대신 의미해 주는 어떤 물리적 실체를 말한다. 예를 들어, 장미꽃은 평상시에는 그냥 하나의 꽃일 따름이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사랑하는 이에게 갖다 바쳤을 때는 기호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장미를 사랑의 표시로 대신 사용했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장미를 사랑의 표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p102>


이처럼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기호’라는 수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장미꽃을 받아 든 사람은 그것을 선물한 사람의 의도를 해석하게 되는데, 이때 발생하는 현상을 의미작용이라고 한다. 이 기호의 의미작용에 관한 학문이 기호학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의 ‘5ㆍ18 광주사건’에 대한 기호표현의 변화를 추적하여 보면, ‘광주소요’, ‘광주난동’(당시) → ‘광주사태’(5공화국 시절) → ‘광주항쟁’, ‘광주의거’(1988년 6공화국 이후) → ‘광주 민주화 운동’(1994년 이후)으로 나타난다. 광주사건에 대한 기호표현의 변화는 정치적 지배 집단과 한국사회의 정치 사회적 변화와 그 궤적을 같이한다.<p199>


흔히 남성교수는 ‘교수’로, 여성교수는 ‘여교수’로 표현됨을 목격한다. 이것은 남성이 교수라는 직업을 지니는 것은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이며, 여성이 이와 같은 직업을 갖는 것은 특별한 것임을 함축의미하는 것으로 직업이라는 것 자체가 남성의 것이라는 성 역할 구분의 이데올로기(또는 신화)가 숨겨져 있다.<p202>


우리가 사용하는 말 하나 하나를 분석하면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다. 광주사건이 어떻게 지칭되느냐에 따라 그 사건에 대한 당시의 평가를 알 수 있고 그 시대의 사회분위기를 알 수 있다. 또 ‘여교수’, ‘여류작가’라는 말의 사용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남성 중심의 사회인지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은유와 환유의 개념을 알고 이를 분석한다는 것은 우리가 기호를 통해 지시하는 대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분석, 더 나아가서는 우리 생각의 심층과 사고방식에 대한 분석이 된다.<p206>


거꾸로 대중매체가 생산하는 다양한 콘텐츠에서 은유와 환유가 어떤 식으로 활용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어떤 식으로 조작되고, 다시 그것이 사회의 지배적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를 깨닫게도 해 준다.<p206>


예를 들면 우리가 신문을 가리켜 ‘독재정권의 시녀’라는 표현을 썼다면 우리는 은유를 사용한 것인데, ‘시녀는 절대 군주에 무기력하고 신문은 독재정권에 무기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서<p207>’ 만든 은유가 된다는 것.


또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가족의 수를 말할 때 ‘입이 여섯이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것은 가족을 '입'으로 환유함으로써 식생활 비용을 축내는 존재로 본다고 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환유적 의미작용은 은유적 의미작용과 마찬가지로 환유되는 것(의미화되는 것)에 대한 기호 사용자의 인식을 모양 짓는다.<p216>’


기호학이 구조주의의 형태를 갖는 것은 ‘기호학의 기본 전제가 구조주의적이기 때문<p310>’이다. 기호학은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우리의 문화가 갖고 있는 관념과 언어적 구조를 통해서 바깥 세계를 인식한다<p311>'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관성과는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우리는 사회화를 통해 성장한다. 사회화란 개인이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가치와 규범을 내면화해 가는 과정인데, 이 사회화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가족이라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게 대중매체일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 등의 대중매체가 전달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정서나 사고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다. 설사 대중매체를 외면하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그런 영향을 받고 사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현실에서 대중매체의 영향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우리가 대중매체에 무력하게 세뇌 당하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당연하게 보는 시각을 거부하고 그 이면의 의미를 읽어내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시각이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여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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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유형지에서 (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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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을 읽고 -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는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어느새 거대한 벌레로 변신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이 소설의 시작이다.


그레고르는 상과대학을 나와 군대생활을 마쳤고, 아버지가 5년 전 파산한 이후 세일즈맨이 되어 성실하게 일하며 부모와 17살의 누이동생을 부양하며 살고 있었다. 이렇게 평범하게 살던 그에게 이런 기이한 변신이 일어난 것이다.


그가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하자 가족에게도 변화가 일어난다. 그를 대신하여 돈을 벌기 위해서다. 아버지는 은행의 말단 수위로 취직하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고, 여동생은 가게 점원으로 취직을 한다. 그리고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한 방에 세 명의 하숙생을 받게 되어 그로 인해 그레고르의 방은 짐으로 가득 찬 창고처럼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는 불행하게도 벌레로서 마음껏 기어 다닐 수 있는 공간조차 없게 된다.


벌레란 어떠한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은 혐오스러운 존재이다. 가족은 한때 가족이었던 그에게 식성에 맞지도 않은 음식만 그의 방에 가져다 주고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이제 그는 그들에게 가족이 아닌 것이다. 가족 모두 그를 점점 소외시키고 짐스러워함으로써 그레고르의 외로움은 깊어만 간다.


이 소설은 한 인간이 벌레 같은 존재가 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우리에게 잘 보여 준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에 대해서 가족은 처음엔 무척 놀라고, 그 다음엔 가엽게 여기고, 무서워하고, 분노하고, 화내고, 나중엔 귀찮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되며, 그로부터 점차 식욕을 잃고 비실대다 시체가 되어 하녀에게 발견된다. 결말에는 벌레가 죽은 뒤 가족은 소풍을 갈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진다. 귀찮은 존재가 죽었으므로 예전의 삶의 즐거움을 되찾은 것이다. 이것이 ‘인간’임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여기서 벌레라는 설정이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 독자라면 벌레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병에 걸려 누워서만 지내는 환자로 변했다고 가정하고 읽어도 좋을 것이다. 혹은 각자의 삶에서 소외된 적 있는 자신의 모습을 벌레의 처지에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비인간적인 면을 다룬 이 소설의 핵심은 물질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버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인간이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을 때, 그 자신은 어떻게 변화하고, 또 주위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변화할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변신이 있는 상황에서 인간이 대응하는 방식일 것이다. 벌레가 되어 버린 그레고르는 자신이 인간이었던 사실을 점점 잊게 되고 진짜 벌레로서의 삶에 적응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가족이 그를 가족이 아닌 벌레로서만 취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레고르는 몸은 벌레일망정 가족과 함께하고 싶어 하나 가족은 그를 벌레로만 인식하고 소외시켜 버린다. 그가 가장 사랑한 누이동생마저 처음엔 벌레가 된 그를 잘 돌봐 주다가 나중엔 마음이 변하여 그를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어머니 역시 모성을 가지고 늘 그를 걱정하지만 그레고르를 쫓아내자는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레고르가 변신한 벌레는 일상적 세계(가정과 사회)에서의 소외됨을 상징한다. 누구든지 한번쯤은 소외감이 느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사소한 일로 이런 경험은 가능하다. 예를 들면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외국 얘기가 나왔는데 나만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없어서 친구들의 화제에 끼지 못한다거나, 친구들의 직업은 모두 화려해 보이는데 나만 무직자임을 자각할 때 마치 이 소설 속의 그레고르처럼 소외감과 고독을 느낄 것이다.


벌레로 변신한 그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을 갖는데,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면서는 그런 진지한 사색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일상 생활을 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윤택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또 하루라도 일하러 나가지 않으면 생활에 타격이 오기에, 한가롭게 생각할 여유가 없이 바쁘게 살았던 그는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지에 대한 고민은 빠져 있었던 것.


이처럼 벌레로 변신하기 이전엔 노동이 그레고르를 자신으로부터 소외시켰다면, 변신한 이후엔 자신의 경제적 무능함이 그를 인간세계로부터 소외시킨다. 결국 가족이라는 것도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초를 두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논리에 영향을 받는 관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문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즉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을 인간학이라고도 한다. 이 소설을 통해 독자는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돈을 못 버는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면 이렇게 구박을 받아도 마땅한가,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혜택을) 받아야만 호의적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물질만 중요시하여 인간의 정신이 황폐해진다면 너무 몰인정하고 살벌한 세상이지 않은가, 만일 가족 중 누군가가 벌레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면 어떤 태도를 갖는 게 바람직한가, 인간의 운명이란 원래 모순과 불안과 허무 등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일까 등등….


밀란 쿤데라(‘소설의 기술’의 저자)에 의하면, “역사가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소설은 실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존이란 실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의 가능성의 영역”이다. 그러니까 소설가들은 인간의 이러저러한 가능성들을 찾아냄으로써 실존의 지도를 그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인가를 보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게 해 준다는 것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연인들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 연애기간이 길어지면 싸울 일이 생기는데, 싸움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상대방의 밑바닥까지 본 느낌을 가져야 비로소 서로에 대해 알기 시작한다. 관계가 좋은 상태에선 상대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고 인간의 실존은 극단적 상황에서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쓴 카프카는 그런 극단적 상황을 만들어 인간의 실존을 보여 주려고 인간을 벌레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먼 얘기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극단적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은 독자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다. “소설 속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한 것처럼 어느 날 나의 부모님이 치매에 걸린 환자로 변신한다면, 나의 실존은 어떤 모습으로 표출될까?”


인간은 자기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각에 비추어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식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대인 관계에서 우리가 상대방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가 하는 문제는 서로에게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까. 누구든,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적으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은 늘 변화가능성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를 알려면 우선 ‘인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적인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 철학적 사색의 기회를 갖고 싶은 독자에게 ‘변신’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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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IC 2009-06-06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몇번을 다시 봐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명작입니다.
늘 잊지 않고자 노력하지만, 쉽게 잊혀지는 것이 '삶의 본질'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글 정말정말 잘 읽고 갑니다.

페크pek0501 2009-06-07 13:2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책을 읽은 뒤에 그 내용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리뷰를 써서 좋은 점은 책의 내용을 훤히 꿰뜷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권을 읽고도 마치 두 권을 읽은 것처럼 좋은 공부가 됩니다. 좋은 글이라 하시니 고맙습니다.

옹달샘 2009-10-26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학창시절 변신을 읽고 많은 것을 느꼈었어요. 이 글을 읽으니 그 때의 감동이 밀려오는군요. 정확한 분석과 사색이 담긴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은 글 읽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페크pek0501 2009-10-26 12:30   좋아요 0 | URL
옹달샘님, 고맙습니다. 오늘 본 동화, 가능성 많은 작품입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행복한 작업, 많이 즐기며 하세요.

2010-02-07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0-02-07 13:00   좋아요 0 | URL
반가워. 다음부턴 로그인 하지 않고 댓글 남겨도 돼. 그냥 이름 쓰는 칸엔 이름 적고 비밀번호는 아무거나 본인이 기억할 수 있는 숫자 적으면 돼. 비밀번호를 쓰는 이유는 나중에라도 본인이 댓글을 삭제하고 싶을 때 그 비밀번호를 써야 되기 때문이야. 아무나 삭제하게 만들면 안 되잖아. 내가 쓴 글 중 책 리뷰만 읽으라고 말하고 싶네. 공부에 도움이 될 듯 싶어서. ㅋㅋ
 
젊음의 탄생 (양장) - 젊음의 업그레이드를 약속하는 창조지성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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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탄생’을 읽고 - 오리로도 보이고 토끼로도 보이는 건 생각의 힘


이 책은 77세의 저자가 ‘젊은이들에게 주는 메시지’로 읽혀지는 책이다. 이 책의 제목은 <젊음의 탄생>이지만 이것을 <생각의 탄생>으로 읽어도 무방하리라. ‘중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우리는 흑백논리와 OX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라는 본문의 글들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젊은이들에게 생각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기존의 생각을 바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은 어찌 젊은이들에게만 중요하랴. 오늘을 사는 현대인 모두에게 중요하리라.


누군가에 대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제일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바로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외모나 직업, 학력도 그 사람을 파악하는 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생각’은 그 사람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생각이 훌륭한 사람은 훌륭한 행동을 할 수 있다. 생각은 행동의 씨앗이므로.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하는 문제도 따지고 보면 어떤 생각으로 살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생각에 따라서 아주 다른 인생을 살게 되기에.


저자가 독자들에게 힘주어 말하고자 하는 것 중,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열정을 가져라 - “꿈을 향해 목숨을 건 그런 바보들이 역사를 만들어갑니다. 열정에 몸을 불사르는 그런 미치광이들이 사회를 바꾸어갑니다.”


둘째, 다양성을 중요시해라. - “하늘처럼 열린 공간에서는 모두가 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날 수 있습니다. 360명이 360도의 다른 방향으로 달리면 360명 모두가 일등이 될 수 있지요.”


셋째, 질문을 해라. - “유대인들이 노벨상을 많이 타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질문하는 버릇을 어린아이 때부터 길러 준 가정교육 때문이라고 합니다.”


넷째, 창조성을 가져라. - “여름밤 아버지는 덥다고 창문을 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들어와서는 모기 들어온다고 창문을 닫으라고 합니다.(중략) (어떻게 할까요.) 망으로 된 창을 만들어 다는 것이지요. 바람은 들어오고 모기는 막아주는 이 방충망을 창조하는 것. 그것만이 분쟁 없는 공존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 책에는 색다른 구성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매직카드’라는 것을 만들어 나눈 점이다. 카니자 삼각형, 개미의 동선, 매시 업, 지의 피라미드 등 아홉 개 제목의 매직카드는 각각 내용을 구분짓는 장(章)의 역할을 한다.


그 중에서 내 마음을 가장 끄는 것은 ‘개미의 동선’이란 매직카드에서 우리의 삶이 ‘우유성으로 가득 찬 숲’과 같다고 말한 부분이다. 여기서 우유성이란, ‘반은 규칙적이고 반은 우연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현상’을 일컫는다. 예상할 수 있는 것과 예상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살아가는 게 우리들의 삶이요, 그 현장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날쌘 사슴을 쫓아 경주를 하는 사냥꾼의 새벽 숲이야 말로 가장 우유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또 축구가 사람들을 매혹하고 열광케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삶 그 자체처럼 우유성에 가득 차 있는 경기이기 때문이라는 것.


이것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게 ‘빈칸 메우기’라는 매직카드에서 인생을 ‘빈칸 메우기의 퍼즐’이라고 말한 부분이다. 삶의 반은 운명처럼 주어진 문자가 있고 그 옆에는 마음대로 자신이 써넣을 수 있는 자유로운 공백이 있다는 것.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운명처럼 정해진 부모와 관계를 맺는다. 또 성장하는 동안의 가정환경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다. 하지만 공부를 잘 하기 위해 노력한다든지 어떤 재능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따라 삶의 좌표는 바뀌게 된다. 이것이 바로 ‘빈칸 메우기’이다. 빈칸 메우기는 삶을 변화시킨다. 축구경기처럼 결과를 알 수 없는 게 인생이기에 인간은 의욕적으로 살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평생 정해져 있는 어떤 운명에 따라 살아간다면, 즉 빈칸 없는 삶을 산다면 얼마나 맥 빠지는 일인가.


“빈칸은 결핍이다. 그러나 결핍은 필요를 낳고 필요는 목표를 낳고 목표는 노력을 낳고 노력은 창조를 낳고, 창조는 당신의 젊음을 더욱 새롭고 찬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177쪽>


“가르칠 것이 있다는 것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이고, 부족함이 있다는 것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합니다.”<183쪽>


“산업사회의 열등생(우리나라)이 정보사회의 우등생이 된 것은, 양이 없고 땅이 없고 전력이 없고 부존자원이 없었던 빈칸이 만들어 낸 창조력 덕분입니다.”<187쪽>


저자는 자원의 ‘결핍’이 낳은 ‘발전’의 예로 우리나라를 들었는데, 이런 예를 개인의 삶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남보다 부족한 면이 있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경우는 실제로 아주 많다. 어떤 게임에서든 이긴 사람보단 진 사람이 그 다음의 게임에서 이기고 싶은 열망이 더 강한 법이다. 패배감을 맛본 자는 갈망으로 인해 더 많이 노력함으로써 전화위복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열등감이 오히려 성공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열등감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열등감의 또 하나의 좋은 점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만에 빠지지 않게 만드는 점이다. 자신도 약점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약점이 있는 타인에 대해 무시하기보다 포용하는 아량을 베풀 수 있다.



이 책 속에 ‘오리토끼 그림’이 나오는데, 이것은 ‘오리’로도 볼 수 있고 ‘토끼’로도 볼 수 있는 그림이다. 오리로 보일 때엔 토끼 모습이 사라지고 토끼로 보일 때엔 오리가 지워지는 것이다. 이와 연관해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부자와 빈자 중 누가 더 행복할까. 만약 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부자가 찬이 많은 식탁에도 흥미가 없고, 빈자는 찬이 없는 밥상에서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누가 더 행복할까. 언제나 할 수 있는 쇼핑에 권태를 느끼는 부자와 월급날에만 즐겁게 쇼핑할 수 있는 빈자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어느 쪽이 더 행복할 거라고 확신하는 게 가능하긴 할까. ‘오리토끼 그림’처럼 생각의 각도에 따라서 사물은 얼마든지 다르게 보이는데….



각자의 생각에 따라서 희극의 무대에서 살 수도 있고 비극의 무대에서 살 수도 있는 게 인생인 것 같다. 비극적인 일로 느껴지는 것도 생각의 각도를 바꾸어 다시 바라보면 희극적인 일로 생각되는 경우가 우리 삶에 많으니까. 이렇게 비극도 희극으로 변화시키는 건 발상의 전환, 곧 생각의 힘이다. 그래서 ‘생각’에 대한 글이 많은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저자를 처음 만난 것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이 책 서장에 씌어진 ‘풍경 뒤에 있는 것’이란 글을 아직도 수작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국인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적확하게 표현한 저자의 글들에 감탄하곤 했는데, 그때의 글들에 대한 기억으로 <젊음의 탄생>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마음이 젊어지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연령에 상관없이, 보다 높은 곳을 향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유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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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남는 글


- (그 그림은) 오리로 보일 때에는 토끼 모습이 사라지고 토끼로 보일 때에는 오리가 지워집니다. 언제나 둘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요. 관점이라는 것은 내 마음 안에 품고 있는 자유이면서도 때로는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편으로 쏠리는 편향성을 갖게 됩니다. 쏠린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이고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한쪽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98쪽>


- 우리가 익혀야 할 진정한 지식과 진리는 오리-토끼 그림처럼 항상 양면성을 띠고 있는 모호한 도형 같은 것이기 때문에 고정 시점처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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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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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고 - 사람은 타인의 도움으로 사는 것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동화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좋을 작품이다. 혼자가 아닌,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인생의 의미를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천사가 인간으로 변신되어 가난한 구두장이 집에서 8년째 머물면서 겪는 이야기다.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천사는 하나님이 말한 세 가지 문제의 답을 알게 되는 날에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세 가지 문제란, 인간 안에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이다.


첫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추운 겨울날, 가난뱅이 구두장이가 벌거벗은 젊은이(천사)를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고 집에 데려온다. 그의 아내는 낯선 거지(천사)와 함께 귀가한 남편이 못마땅하여 화를 내다가 어느 새 이 남자(천사)가 가엾게 느껴져 계속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것을 알게 된 천사는 인간 안에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세 가지 물음 중 첫 번째 답을 구한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구두장이 가게의 직공으로 일하게 된 천사가 한 신사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가게를 방문한 신사는, ‘1년을 신어도 찢어지지 않고 모양이 변하지 않는 구두’를 주문한다. 천사는 그가 그날 해가 지기 전에 죽는다는 것을 예견할 수 있었다. 이때 두 번째의 답을 구하게 된다. 즉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자기 육체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는 것’이었다. 그 신사에게 필요한 것은 구두가 아니라 죽은 사람이 신을 슬리퍼였는데, 그 신사는 자신이 잠시 후에 죽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한 여인이 쌍둥이 아이들의 구두를 맞추러 가게에 왔을 때 이어진다. 천사는 그 애들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두 아이의 생모가 아니었다. 생모는 6년 전 쌍둥이 딸을 낳은 후 죽었다. 그때 천사는 아이들의 아버지도 죽고 없는데 홀어머니마저 죽었으므로 고아가 된 두 쌍둥이가 살아가지 못할 거라고 추측했었는데, 6년 뒤에, 한 여인이 두 아이를 맡아 정성을 다해 키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여인은 이웃집 사람이었는데 생모가 죽자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키우며 살았던 것. 천사는 이때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깨우친다. 이것이 세 번째 물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답이다.


6년 전,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벌을 받아 인간 세상에 내려온 것이었는데, 바로 쌍둥이 아이들을 낳은 여인(생모)의 영혼을 데려오라는 게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즉 생모를 죽게 하는 게 천사의 임무였다. 그 명령에 따르기 위해 그 여인에게 가 보니, 방금 쌍둥이 아이들을 낳았던 것이다. 그 여인은 천사가 자신의 영혼을 데리러 온 죽음의 천사인 줄 짐작하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 천사님! 제 남편은 숲 속에서 혼자 일하다가 나무에 깔려 죽어 며칠 전에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나는 형제도 없고 큰어머니도 또 할머니도 없기 때문에 갓난아기를 돌볼 사람조차 없습니다. 제발 내 영혼을 불러 가지 마시고 이 아이들을 제 힘으로 키우게 해주세요. 부모 없는 아이들은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천사는 차마 그 가엾은 여인의 영혼을 빼앗아 가지 못했으나, 하나님이 다시 분부하여 할 수 없이 여인의 영혼을 빼앗아 갔던 것이다. 결국 여인을 죽게 하긴 했지만 하나님의 처음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천사는 벌을 받아 인간 세상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천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나는 깨달았다. 모든 사람 각자가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애씀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실은 사랑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람은 사랑(타자의 사랑)에 의해 살아가는 것’임을 우리에게 강조한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인간은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나는 특히, 하나님이 말한 문제 중 두 번째 문제인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자기 육체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는 것’이라는 점에 생각이 길게 머문다.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어 그날의 죽음을 앞두고도 1년간 신을 구두를 주문한 신사의 모습은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미래를 보는 눈이 없는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혼자의 힘으로 살 수 없다. 죽고 난 뒤 장례식조차 타인의 손을 빌려야 한다. 이것은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단 하루라도 혼자의 힘으로 사는 게 가능한 일이던가. 누군가가 땀 흘려 일해 지은 집에서 살고, 누군가의 노고로 수확한 쌀로 밥을 먹고, 누군가의 수고로 만든 옷을 입고 사는 나.


내 주위를 둘러보니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전화 등, 빈손으로 태어나 가진 게 아주 많다. 모두 그것들을 만든 타인의 덕분이다.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 그런 것들을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해 누군가가 유용하게 사용한다면 그것으로 사회에 공헌한 것이 되겠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은, 그런데 나는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그저 내 인생을 위해 살고 내 가족을 챙기는 일에만 급급해 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만약 끝까지 그렇게 산다면 결국 개인이기주의와 가족이기주의로 생을 마감하는 게 아닐까, 세상에 태어나 타인의 도움으로 이 만큼 누리며 살고 있는 나도 뭔가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데에 기여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 같은데….


사회 공헌이라는 것을 그리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내가 한 작은 일로 누군가가 도움을 받았다면 그것도 역시 사회에 기여한 것이 될 터. 자원봉사를 하거나, 불우이웃돕기의 성금을 내거나,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면 모두 좋은 세상 만들기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한 것이리라.


앞으로의 삶의 모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이 작품은 독자에게 유익한 시간을 주리라 믿는다. 영국 속담이 떠오른다. ‘한 사람이 못을 박으면 다른 사람은 그 못에 모자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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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2009-10-26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데 그걸 잊고 이기적으로 살 때가 너무 많아요.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어요.

페크pek0501 2009-10-26 12:33   좋아요 0 | URL
옹달샘님은 착하셔서 아름다운 작품 쓰실 수 있을 거예요. 큰 성과 있으시길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