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았네
동창생 넷이서 만났다. 그중 한 친구가 만둣국을 잘 하는 음식점을 안다고 해서 점심을 먹으러 거기로 갔다. 소문난 곳이라 그런지 손님들이 많았고 깔끔해 보였다. 우리는 만둣국을 주문했다. 우선 종업원이 물을 가져왔는데 그의 손가락이 컵 안의 물에 닿아 있었다. ‘자기 손가락을 적신 물을 먹으라는군.’
못마땅했지만 참았다. 그녀는 바빴고 청결문제 같은 건 관심도 없어 보였다. 이윽고 만둣국이 나왔다. 맛있었다. 반쯤 먹었을 때 내가 먹고 있는 만둣국에 긴 머리카락이 하나 빠져 있는 게 보였다. 비위가 상해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친구들까지 비위가 상할까 봐 그들에겐 말하지 않았다. 종업원에게 따질 수도 있었으나 또 참았다.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날에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2. 이번엔 못 참았네
그로부터 한 달 뒤쯤 대구에 사는 친구 둘이 서울로 놀러 왔다. 나처럼 서울에 사는 친구 한 명이 있어 넷이 모였다. 대구의 두 명과 서울의 두 명이 만난 것이다. 원래 대구와 서울의 중간 지점인 대전역에서 넷이 만나곤 했는데 이번엔 대구에 사는 두 사람이 서울로 오겠다고 했다. 그 덕분에 내가 대전까지 가는 수고를 덜었고 차비도 굳었다.
일단 우리 집에서 모였다. 대구의 두 친구가 얼마나 부지런을 떨며 일찍 출발했는지 오전 11시쯤 되니 네 명이 다 모였다. 우리 집에서 빵과 과일과 커피와 함께 신나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점심은 나가서 먹기로 해서 12시가 넘자 우린 외출 준비를 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인, 음식점과 카페가 모여 있기로 유명한 카페촌에 가기로 했다.
우리 넷은 의견을 모아 한정식 음식점을 찾아 들어갔다. 분위기가 고급스러웠다. 음식 가격이 비싼 편이었지만 반찬 종류가 다양하고 다 맛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질 낮은 서비스였다. 우리가 음식을 다 먹고 숟가락을 놓자마자 바로 종업원이 쟁반을 가지고 와서는 그릇을 치우는 게 아닌가. 그것도 양해도 없이 달그락, 쾅쾅 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마치 우리에게 빨리 나가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푸대접을 받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고급 음식점으로 보이던 곳이 싸구려로 보였다. 손님이 많아 자리가 없어서 그런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비어 있었다.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고급스런 음식점에서 이런 불친절이라니.
대구 친구 한 명이, 서울은 다 이러냐고 물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친구들 모두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우리의 기분이 구겨진 종이처럼 되어 버렸다. 참을 수 없었다. 음식값을 내면서 한마디 해야겠다고 별렀다.
계산대로 갔더니 음식점 주인이 있었다. 음식값을 지불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릇을 치우는 게 그렇게 급한 일인가요? 모처럼 지방에서 친구들이 올라와서 점심 먹으러 왔는데 우리 넷 다 불쾌해졌어요.”
주인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그릇을 치우고 깨끗한 테이블에서 이야기 나누시라고 그런 것 같아요.”
이건 핑계 같았다. 그나마 죄송하다고 하니 마음이 좀 풀렸다.
3. 며칠 뒤 애덤 스미스가 떠올랐네
며칠 지나 그 일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가 불친절을 지적한 게 잘한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만약 나로 인해 음식점 주인한테 그 종업원이 꾸지람을 들었다면 그래서 그가 상처를 받았다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준 건 마찬가지가 아닌가.
대체로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 단 한 가지 이유로 그랬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정확하지 못하다. 그때의 나를 돌아보면 내가 불친절을 지적한 것은 단순히 한 가지 이유 때문만이 아니고 다음과 같은 여러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첫째, 지난번 종업원의 손가락이 닿은 물도 참았고, 머리카락이 빠져 있는 음식도 참았는데, 이번에도 또 참으면 내가 아주 억울할 것 같았다.
둘째, 이번에 참으면 내가 처신을 잘못했다고 나중에 후회가 될 것 같았다.
셋째, 이번에 참으면 내가 친구들 앞에서 바보가 될 것만 같았다.
넷째, 우리들의 자존심이 상했으므로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다음 이유가 중요하다.
다섯째, 내가 느낀 불쾌감을 얘기해 줘야 앞으로 나와 똑같이 당하는 손님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다섯째 이유로 인해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다.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에 대한 다음 글이다.
「도둑놈이 어떤 부잣집의 물건을 훔치는 경우, 그는 부자는 이 물건이 없더라도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비록 도둑을 맞더라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어떤 악(惡)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간부(姦夫)가 자기 친구의 처(妻)를 유혹해서 간통을 하려는 경우, 그가 자신의 음모를 감추어 그 남편의 의혹만 사지 않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가정의 평화만 깨뜨리지 않는다면, 자신은 어떤 악(惡)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이처럼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에 굴복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행하지 못할 정도로 흉악한 범죄행위는 하나도 없게 된다.」
도둑이 어떤 부잣집의 물건을 훔칠 때 집 주인이 부자니까 괜찮다고 여기며 도둑질을 하는 경우가 있다면, 부자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사기꾼도 그런 생각으로 사기를 치는 경우도 있겠다. 또 빈자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사기꾼도 당신의 형편이 나보단 나으니까 괜찮다고 여기며 사기를 치기도 하겠다. 그래서 그들은 악(惡)을 행하면서도 자신이 악(惡)을 행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겠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자기방어의 명수’여서 자신이 한 일을 합리화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때의 나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손님이 나처럼 불유쾌해지는 일을 막기 위해 종업원의 불친절을 지적한 것이니 나는 악(惡)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옳은 일을 한 것일까 아니면 혹시 나도 애덤 스미스의 말처럼 ‘교묘하게 꾸며낸 생각들’에 의해서 저지른 것일까?
지금도 모르겠다. 음식점에서 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참아야 할지, 참지 말아야 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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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쓴 글을 우연히 보게 되어 올립니다.
옛 글을 오랜만에 보니 반갑더군요.
제가 경험한 걸 그대로 쓴 글이어서
글을 읽으며 그때의 일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답은 독자들에게 돌리고 필자는 문제 제기만 했습니다.
재밌게 읽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그야말로 추억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