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주도의 나무
2. 제주도의 카페 또는 레스토랑
3. 제주도의 바다
7박 8일간의 제주도 여행을 마쳤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친구 모임마저 삼가야 했으니 가족과 함께한 이번 제주도 여행은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하게 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엔 매우 행복한 여행이 돼서 집에 와서는 여행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집안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이 붕 떠 있는 것 같고 어디론가 또 떠나고 싶을 뿐이다. 내가 이렇게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하고 나 자신도 놀라워하고 있다.
여행을 떠나는 날만 해도 귀찮다는 생각을 갖고 출발했는데 역시 귀찮음을 극복하고 노력해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아름다운 추억의 탑을 쌓고 돌아온 여행이었으니.
여행지에서 해 본 것 중 좋았던 것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예쁘게 꾸민 낯선 집에서 살아 본 것
2) 밥하지 않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
3) 바다를 실컷 본 것
4) 푸른 자연 속에서 산책한 것
5) 예쁜 물건을 파는 가게에서 손수건, 머리핀, 양말, 카드지갑 등을 산 것
6) 밤에 풀장에서 수영한 것
7) 차를 렌트하여 멋진 풍경을 보며 드라이브한 것
8) 멋진 풍경을 사진에 담은 것
9) 바다가 보이는 예쁜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책을 읽은 것
10) 여행지에서 내 글을 이메일로 신문사에 보낸 것(마침 내 글이 게재될 차례가 되었다.)
11)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씨에 여행지를 돌아다닌 것
12) 여행지의 작은 서점에서 시집을 산 것
내가 산 시집은 최승자 시인의 <쓸쓸해서 머나먼>이다. 이 책에서 시 한 편 뽑아 옮긴다.
....................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
내 詩는 지금 이사 가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내 詩밭은 황폐했었다
너무 짙은 어둠, 너무 굳어버린 어둠
이젠 좀 느리고 하늘거리는
포오란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그러나 이사 갈 집이
어떤 집일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너무 시장 거리도 아니고
너무 산기슭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예는, 다른, 다른, 다, 다른,
꽃밭이 아닌 어떤 풀밭으로
이사 가고 싶다
- 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 50쪽.
....................
이번 여행에 책 두 권을 가지고 갔는데 그중 하나가 장석주 시인의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라는 산문집이다. 나는 여름을 싫어하는데 여름을 예찬한 글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여름의 기쁨들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산문에서 한 단락을 뽑아 옮긴다.
....................
콩국수나 냉면, 찐 옥수수를 먹는 것은 여름에 누리는 조촐한 기쁨이다. 크고 둥근 수박을 쩍 갈라 식구들이 한 조각씩 나눠 먹는 것도 여름의 보람 중 하나다. 파블로 네루다는 수박을 예찬하며, 이것을 물의 보석상자, 과일가게의 냉정한 여왕, 여름의 초록고래라고 썼다. 이 초록고래들이 집집마다 배달된다. 집집마다 붉은 과육이 꽉 찬 이것을 몇 통씩 깨 먹으며 무더위를 이기는 것이다. 누가 내게 여름이 행복한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기꺼이 흰모래와 푸른 바다를 떠올리며, 그렇다, 라고 대답한다.
- 장석주,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251쪽.
....................
여행의 후유증을 앓으면서 ‘그래도 내게는 후유증을 날려 버릴 수 있는 책이 있고 글쓰기가 있어 다행이야. 그것도 없었다면 어쩔 뻔...’하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