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드 몽테뉴, <에세 1>
몽테뉴가 습관에 관하여 쓴 글이다.
(209쪽) 어떤 시골 아낙이 갓 태어난 송아지를 두 팔에 안고 다니며 계속 쓰다듬다 보니 그 일에 익숙해져 다 큰 황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들고 다닐 수 있게 되었더라는 이야기를 처음 지어낸 사람은, 내 보기에 습관의 힘이 어떠한지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습관이란 정말이지 포악하고 음흉한 여선생 같기 때문이다. 습관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조금씩 우리 안에 자기가 행사하는 권위의 발판을 세워 놓는다. 이처럼 유순하고 눈에 띄지 않게 일단 시작하고 나서는 시간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고정시켜 단단히 박아 넣은 뒤, 이윽고 폭군의 성난 얼굴을 우리에게 드러내며, 그 앞에 선 우리는 감히 눈을 들어 올려다볼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규칙이 언제나 습관에 의해 깨지는 것을 볼 수 있다.
⇨ 매주 발레를 배우면서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나이가 들어 70대가 되어도 이런 동작을 할 수 있을까? 만약 늙어서 발레 동작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난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 나이가 많아져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한다는 것은 참 쓸쓸한 일이 아닐까.
우리 애들은 스트레칭을 하는 나를 보면 발레를 해서 내 몸이 유연한 거라며 부러워한다. 그런데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가 노화로 인해 발레를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날이 올 것이다. 발레 슈즈가 쓸모없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몽테뉴의 글이 말해 주듯 습관이란 힘이 센 것이어서 앞으로 계속 발레를 한다면 70대의 나이에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송아지를 두 팔에 안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된 시골 아낙이 그 송아지가 다 큰 황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들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처럼.
글쓰기는 어떠할까? 70대가 되어도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80대에도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많으니까.
나의 글쓰기는 어느 해 가을에 하나의 행동으로 시작됐다. 아이를 낳고 나서 이대로 전업 주부로 살 순 없다고 생각하여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문학 배움터에 등록을 해 버렸던 것. 문학 강좌가 있는 배움터에 등록하면서 내 생활은 확 달라졌다. 거의 매일 책을 들고 살았고 글쓰기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큰애가 초등학생 때 독서광이 되었던 것은 독서광으로 살았던 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성인이 된 둘째 아이가 책을 많이 읽는데 이 또한 나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습관은 지속시키는 힘이 셀 뿐만 아니라 전염시키는 힘도 세다.
(209쪽) “습관은 무슨 일에서나 가장 힘있는 주인이다.”(플리니우스)
배명희, <엄마의 정원>
지인이 두 번째 소설집을 냈다. 일곱 편의 단편이 실린 <엄마의 정원>이라는 책이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책을 구매했다. 여러분이 관심을 가져달라는 뜻에서 ‘작가의 말’을 옮겨 놓는다.
(4쪽) 이 책에 실린 소설 속 사람들은 외롭다. 가난해서, 친구나 사랑이 부재해, 혹은 비가 내리거나 세상이 두려워.
인간이 안전하고, 행복하기 위해 스스로 걸어 들어간 제도. 가정, 사회, 그리고 강철로 만든 견고한 담장 안. 경계로 내몰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불안하다.
고독과 달리 외로움은 위안을 받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무엇이 그들을,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지 사실 모르겠다.
사람은 원래 외로운 존재이고, 타인의 도움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너무 쓸쓸하다.
삶이 그런 것이라 해도, 생명은 능동적이다.
약자에게 자꾸 가혹해지는 세상에서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사람마다 능력과 역량이 다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약자인 우리 모두 서로를 위로하고, 공감하는 것. 그것이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위로가 될지 잘 모르겠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다. -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준비해 놓고 책 보는 게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