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이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커트 보니것에 따르면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이상 대가족이 함께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여자들이 바라는 것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고, 남자들이 바라는 것은 많은 친구들이라고 말한다. 결국 여자든 남자든 얘기를 나눌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가족 시대가 끝나고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신랑과 신부 두 사람만이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신랑은 친구가 하나 생기는데 그나마 여자이고, 신부는 이야기 상대가 하나 생기는데 그나마 남자이다. 신랑과 신부 가까이엔 얘기를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얘기다. 

 

 

부부 싸움이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예전엔 대가족이 함께 살다 보니 부부 싸움을 말리는 식구도 있겠고 화해시키려는 식구도 있겠고 싸운 것에 대해 의논할 식구도 있었겠다. 그런데 이젠 두 사람만 살다 보니 그런 식구들이 집안에 없다. 그래서 누군가가 개입하지 않고 자기네들끼리만 싸우다가 이혼하게 되어 이혼율이 높아졌다는 해석이 가능하겠다.

 

 

....................
부부싸움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대개 돈이나 권력이나 섹스나 자녀 양육 같은 것 때문에 싸운다고 생각한다. 사실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만으론 사람이 너무 모자라!”(56쪽)


- 커트 보니것, <나라 없는 사람>에서.
....................

 

 

“당신만으론 사람이 너무 모자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런 의견이 있을 수 있겠다.

 

 

A : 제가 알고 있는 부부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하죠. 시부모와 함께 살지 않으니 부부 싸움을 할 때 조심성이 없어 서로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졌죠. 두 부부만 살다 보니 싸움을 말리는 사람도 없었죠. 그래서 서로 상대를 모욕하고 깊은 상처를 줬지요. 결국 이혼하게 되었으니 커트 보니것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B : 제가 알고 있는 부부는 그것과 정반대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시부모와 함께 살다 보니 고부간의 충돌이 많았고 그것으로 인해 부부 사이가 나빠졌어요. 게다가 시누이까지 함께 살아서 힘들다고 하더니 이혼을 하더라고요. 커트 보니것의 말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C : 이젠 세상이 변했어요.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경제력이 생겼고 학력 수준도 높아져서 옛날처럼 참고 살지 않으려 해요. 그러니 이혼율 증가 이유에 대해선 ‘가족 형태’뿐만 아니라 여러 변수를 고려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커트 보니것의 말은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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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29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진심을 털고 다정히 얘길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면 없는 것보다 더 외로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양보다 질^^ 그리고 공감과 이해.

페크pek0501 2015-05-29 16:59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이에요. 공감과 이해를 받을 수 없다면 누가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있는 게 최고죠.

첫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

아무개 2015-05-29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대가족제의 붕괴가 주요 원인이라기 보다는
가부장제에서 여성들이 탈출(?)할수 있는 여건이 개선되다보니
실질적으로 이혼률이 높아지는게 아닐까 싶어요.
예전같았으면 맞아도, 남편이 바람펴도, 고부갈등때문에 속이 문드러져도
남들도 참고 살으니 나도 그래야지 하고 버텼던것을
지금은 ˝됐다 그래!˝ 이러고 박차고 나와 버리니까요.

이혼률이 높다는게 뉴스거리가 되지 못할 만한 시대도 오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비가 오려는지 바람이 쓍쓍~
감기조심 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셔요^^

페크pek0501 2015-05-29 16:57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을 해 주셨어요. 님 덕분에 위의 글에 C의 말을 넣었어요.

요즘 부모님들은 이혼하려는 자식을 말리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미래에 딸들이 결혼해서 많이 괴로워하면 참고 살라고 말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이혼 뒤에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는 거라며 희망을 주려고 노력할 것 같아요.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셔요.~~


하늘초록 2015-05-30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생활보다 이혼후 자유가 더 좋으니까 이혼하겠죠..여성이 경제적힘이 생겼다는게 결정적이유중 하나인것같아요..

페크pek0501 2015-05-30 23:5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제야 답글을 쓰게 되어 죄송합니다.
오늘 일이 많았답니다.

이혼 후 자유가 더 좋다, 에 한 표 던지겠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 여자들은 남편을 귀찮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집안일은 남자보다 여자가 많이 하다 보니 그럴까요. 반면 남자들은 아내를 필요로 하고 말이죠.

댓글, 고맙습니다. ^^

stella.K 2015-05-3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에 대한 만족도가 남자 보다 여자가 현저히 낮더군요.
그럴만도 해요. 남자만 좋으면 뭐하겠습니까?
갈수록 여자는 혼자있는 것을 좋아한다더군요.
게다가 인간의 평균 수명이 늘어났잖아요.
2, 30대에 결혼해서 평생 한 사람과 산다는 건 재앙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ㅋ
작년인가 재작년에 60에 만나 90 넘게 해로하는 노부부 얘기를 본적이 있는데
저도 그랬으면 좋겠다 싶어요.
당신네들도 그렇게 늦게 만나 늦게까지 살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정말 행운 아닐까요?^^

페크pek0501 2015-05-31 00:09   좋아요 0 | URL
예, 그런 노부부는 부러움의 대상이죠.

옛날엔 바깥일-돈 버는 일을 남자가 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하고 이렇게 딱 분리가 되어 있어서 서로 의지하고 불만 없이 살았다고 하면 요즘은 여자도 밖에서 돈 버는 경우가 많다 보니 집안일까지 하면서 힘들다는 거죠. 그래서 마찰이 생기기도 하고 만족도가 떨어지기도 하고 그런 것 같아요.
여자가 바깥일을 하는 만큼 집안일도 두 사람이 나누어 해야 할 것 같아요. 시대가 변하면 문화도 그 속도로 변해야 하는데 문화의 변화는 느립니다. 맞벌이 부부는 많이 생겼지만 그런 부부가 많이 생긴 시대 변화에 문화가 발 맞추어 나가기가 쉽지 않은 게 문제 같아요.

아마 요즘 신혼 부부들 중엔, 우리 어머니는 집안일을 다 하셨다고 말하는 신랑과
이제 시대가 변했으니 남자도 집안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신부의
마찰도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친구 사이인 남자 세 사람이 만난 자리.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른 A에게 B가 심한 모욕을 줬다. 그것을 보고 있던 C는 심한 모욕을 받아 곤경에 처한 A에게 위로를 하기는커녕 쏘아붙이며 한 마디 거들었다. B로 인해 쓰러져 있는 친구를 밟기까지 한 셈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무엇이 옳은가? A가 잘못을 했으니까 심한 모욕을 준 것이 옳은가? A가 잘못을 했으니까 밟기까지 한 것이 옳은가? A의 주위에 아무도 비난하는 사람이 없고 구경을 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그는 자기가 한 일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모를 테니까 모욕을 줘야 하는 게 옳은가?

 

 

이런 글을 읽었다.

 

 

..............................
“어쩔 수 없지요.” 90세의 노파는 현재, 미래, 상황의 진전 등에 관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대고 무슨 말을 외쳐대도, 계속 그렇게만 대꾸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뭐든지 다른 대답을 끄집어내고 싶어서 두려움, 불만, 불평을 계속 늘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변함없는 “어쩔 수 없지요.”라는 말밖에 얻어내지 못한 나는 지친 나머지, 그녀와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자리를 떴다. 얼간이 같은 노파에게 마음을 열어 보일 생각을 하다니!
거리로 나오자 나의 생각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노파 말이 옳다. 그녀가 중얼거리듯 되풀이한 이 구절이 진리를,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음을 왜 진작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진리를 웅변으로 보여 주고 있는데, 우리 속의 모든 것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게 아닌가?”(221~222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

 

 

‘어쩔 수 없지요.’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닐 것이다. 잘못된 것에 대하여 개선할 의지가 없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런 태도를 갖는 것이 스트레스를 덜 받는 방법일 수 있겠다. 우리의 정신 건강엔 좋을 수 있겠다. 그래서 때론 우리에게 그런 태도가 필요할 때가 있겠다.

 

 

‘어쩔 수 없지요.’를 ‘어쩔 수 없었겠지요.’로 바꾸어 써 보았다.

 

 

..............................
“A는 왜 그런 부도덕한 행동을 했나요?”
“그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겠지요.”

 

 

“B는 A에게 왜 그랬나요?”
“그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겠지요.”

 

 

“C는 A에게 왜 그랬나요?”
“그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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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16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 시오랑을 담아두고 구매를 잊었네요 이 기회에 이거랑 같이 ㅎㅎ 근데 이 책 표지가 참 마음에 들어요. 어쩔수없지요, 라는 태도의 미덕은 관용과 용서이기도 할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5-05-16 16:07   좋아요 0 | URL
아, 소설도 있군요. 저는 에세이만 찾았답니다. 왠지 시오랑은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나을 것 같은 예감이에요. 읽으시고 나서 좋으면 저에게 추천해 주세요.

관용서 용서... 관용을 생각했는데 글에는 넣지 못했어요. 제가 이래요.
글을 쓰다가 스치는 수많은 생각 중 무엇을 잡고 글에 꼭 넣어야 하는지 모른다니까요. 쓰고 나서 그것도 며칠 지나서 생각나는 일도 있답니다.
행복한 5월 되세요.

프레이야 2015-05-16 16:35   좋아요 0 | URL
제가 왜 소설이라고 썼지요? 무의식이 부른 오타입니다. 댓글수정했어요 ^^

페크pek0501 2015-05-17 14:33   좋아요 0 | URL
하하 ~~ 그러셨군요. 소설이 있는 줄 알고 인터넷 찾아봤지 뭐예요.
약력을 보니 허무주의 철학자, 수필가로만 되어 있네요.^^

이 책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되고 아무 데나 펴고 봐도 좋답니다.
글이 쭉 이어지는 게 아니라서요. ^^

AgalmA 2015-05-1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쩔 수 없지요˝는 자기 중심적인 게 좀 더 강한 거 같고,˝어쩔 수 없었겠지요˝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더 묻어나서 듣기 좋습니다.
두 말 다 상황에 대한 자포자기 심정으로 쓰지는 말아야겠다 생각해봅니다.

페크pek0501 2015-05-17 14:36   좋아요 0 | URL
환영합니다.
예, 좋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썼어요.

타인에 대한 배려,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태도겠지요.
아, 그럴 만한 일이 있어나 보다, 이렇게요.

반가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세실 2015-05-1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도덕한 행위가 뭘까를 생각했어요.
어쩔수없지요는 왠지 포기와 관용의 중간?
그때그때 달라요ㅎ
어쩔수없었겠지요가 좀더 신중해보여요.

페크pek0501 2015-05-17 14:40   좋아요 0 | URL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쓰려다가 읽는 사람의 상상력에 맡기기로 하고 일부러 쓰지 않았어요. 회사 공금 횡령? 두 집 살림? 등등 많겠지요.
그것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신중한 태도를 늘 가졌으면 합니다. ^^

yureka01 2015-05-18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바로 주문 했답니다...리뷰 써야겟어요.
예를 들어....아프리카 기아에 대하여 유니세프등 자선단체가 먹을 거 일시적으로 주기 보다는 차라리 피임약을 주는게 더 낫겟는가...고민이 되는 책...먹거리 조차 없이 낳고 굶기고 죽어가게 기아의 고통을 겪게 하는 고통 제도의 속성은 뭘까..싶었어요.

페크pek0501 2015-05-20 13:38   좋아요 1 | URL
주문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소설을 한 권 읽으면 생각할 거리(또는 글감)를 서너 개 얻게 된다면,
이런 에세이는 생각할 거리를 삼사십 개 얻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요즘 소설보다 에세이를 주로 읽는 이유입니다.

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제가 부담 주고 있나요?) ㅋ

yureka01 2015-05-20 14:49   좋아요 0 | URL
ㅎㅎ오늘 책 옵니다.장문의 리뷰 쓸거 같은 확실한 예감.^^.

페크pek0501 2015-05-20 15:04   좋아요 1 | URL
와아~~ 좋겠습니다.
책이 오는 날, 참 행복하지요...

후애(厚愛) 2015-05-20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겁고 행복한 오후되세요.^^

페크pek0501 2015-05-21 11: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후애 님도 즐거운 날 되세요. ^^

비로그인 2015-05-29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 시오랑의 책이 또 있는지 몰랐네요. [절망의 끝에서]만 살짝 훑어본 정도에요. 체념하는 것과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하는 건 사뭇 다른 것 같아요. 덮어버리는 것과 비워버리는 것의 차이랄까요. 그래도 역시 어려운 말이네요. 90세 노파가 아니라 20세 청년이 저런 말을 했다면, 왠지 다르게 들렸을 것 같기도 하구요. 페크님의 글은 삶에 적용시켜볼만한 유용성이 있어서 읽는 게 즐거운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네요.

페크pek0501 2015-05-29 17:14   좋아요 0 | URL
에밀 시오랑, 저 위의 책이 맘에 들어요.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요.
저런 책이 있다면 또 사고 싶어요.

비워버리는 것... 그렇겠네요. 제가 댓글을 통해 배우는 게 많아요.
첨삭 지도 받는 것 같아요. ㅋ

비로그인 2015-05-29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고 나서 늘 드는 생각은, 왜 이런 부분에 대해서만 쓴 걸까, 에요. 쓰고 나서 다시 보면 내가 쓴 글이 이렇게 편향적이고 부분적인(일면만 비추는) 글이라니, 하고 절망까진 아니더라도 맥이 빠지는 경우가 많아요. 모든 입장을 관통하는 글을 쓰려는 게 욕심이기도 하겠지만.. 문장을 쓰더라도 내가 제한적으로 선택한 이 문장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오래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에세이를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소설만 읽었더니 하나의 이야기 흐름으로만 글을 쓰려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해서요.

페크pek0501 2015-05-29 17:20   좋아요 0 | URL
저도 관심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어느 부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요. 다방면이면 좋겠지만요...

내 글이 옳은 생각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선 자신감이 없어요. 그래서 여러 분들의 댓글에서 많이 배우려고 해요. 시간이 지나서, 그건 그렇게 쓰는 게 아니었어, 하는 글도 있어요. 뭐 어쩔 수 없음인 것 같아요. 완벽을 추구하다간 글 한 편도 쓰지 못할 것 같으니까요. 여러 글을 쓰면서 시행착오 끝에 점점 향상되어질 거라는 믿음으로 써야 할 것 같아요. ^^

 

 


글을 잘 쓰고 싶다면 글을 많이 써 보는 것 이외에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이에 대한 나의 대답.

 

 

첫째, 독서광이 되려고 노력할 것.

 

 

둘째, 좋은 품성을 가지려고 노력할 것.

 

 

..............................
책을 많이 잃을수록 아는 것이 많아진다. 아는 게 많을수록 텍스트를 빠르게 독해할 수 있고 정확하게 요약할 수 있다. 텍스트를 독해하고 요약하는 데 능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 그러면 글을 잘 쓸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그래서 많이 읽지 않고는 잘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독서광(讀書狂)이 되어야 한다. 책을 읽지 않고 타고난 재주만으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없다. 글 쓰는 기술만 공부해서 잘 쓰는 사람도 물론 없다.(79쪽)


- 유시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우선 독서광이 되어야 하겠다. 재주와 기술만 가지고 글을 쓰는 건 아니기 때문. 

 

 

..............................
귀곡자 연구자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레토릭에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의 전형인 ‘너 자신을 알라!’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대단히 불쾌하게 하는 어법입니다. (...)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와의 대화가 기쁜 것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도덕성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게 마련입니다.(54~55쪽)

 

- 신영복, <담론>에서.
..............................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좋은 품성을 가져야 하겠다. 자신의 지식과 도덕성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되기 때문.

 

 

..............................
귀곡자는 언어를 좋은 그릇에 담아서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 성(誠)이라고 했습니다.(55쪽)

 

- 신영복, <담론>에서.
..............................

 

 

“언어를 좋은 그릇에 담아서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것”

 

 

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이런 게 아닐까?

 

 

인터넷 블로그에서 누군가가 쓴 어떤 글을 읽고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를 가정해 본다.

 

 

“A 님, 그 글은 무엇을 배경으로 쓴 글인지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님의 생각이 잘못된 것 같아서요.”

 

 

또는,

 

 

“A 님, 그 글에 대해 제가 반박하는 글을 써 보겠습니다. 어느 것이 옳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는 것. 이런 게 좋은 그릇에 담은 언어의 예가 될 듯.

 

 

어느 시인의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비판의 글을 쓰더라도 글에서 누군가를 향해 독화살을 직접 쏘지 말라고. 그렇게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메시지를 전달하는 글을 쓸 수 있다고.

 

 

어느 알라디너가 쓴 리뷰가 생각난다. <밤이 선생이다>라는 책에 대해 쓴 리뷰인데 그 리뷰에는 저자의 글 중 어느 대목을 비판하는 글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독자로서의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을뿐더러 거칠지 않고 부드럽게 참 잘 썼다. 저자의 잘못된 생각을 정확히 지적하면서 그것 때문에 아쉬웠다는 점을 말할 뿐이었다. 저자가 그 글을 보더라도 뭐라고 따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글 속엔 정중함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리뷰를 읽고 ‘글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하고 감탄하며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용기를 내어 댓글을 남겼다. (일 년이 넘은 일로, 내가 어느 페이퍼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결국 글을 잘 쓰고 싶다면 필자의 ‘사고’뿐만 아니라 ‘품성’도 중시해야 할 것 같다.

 

 

..............................
언어에는 분명 언어 자체의 개념적 의미와 함께 언어 외적인 정서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삶 속에서 경작된 그 사람의 인품과 체온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각 단어의 문자적 의미가 아닙니다. 단어들이 만들어 내는 언술言述이 더 중요합니다. 언어도 결국 언술을 구성하는 요소에 불과합니다.(55쪽)


- 신영복, <담론>에서.
..............................

 

 

그 리뷰에서 나는 그 알라디너의 인품과 체온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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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16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 외적이 정서가 담긴 점. 분명합니다. 내용전달만이 언어의 목적이 아닐진대 우리는 지면 위에서든 지면 밖에서든 유려하지 못한 경우가 많지요. 저도 마찬가지구요. 어제 모임에서 어느분의 그런 달갑지않은 태도, 즉 언어 외적인 정서,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일이 잠시 있었거든요. 나를 돌아보게되더군요. 그럼에도 아직 거칠지만요.

페크pek0501 2015-05-16 16:04   좋아요 0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요.

혹시 제가 앞으로 글쓰기에 품성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잊고 쓴 듯한 글을 쓰게 되면 프레이야 님이 저를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일침을 가해 주세요.
고럴 땐 창피하니까 비밀댓글이면 더욱 감사하고요. ㅋㅋ 그러면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고 고치겠습니다.

제가 훗날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을까 봐,
이런 페이퍼를 올렸다는 사실조차 잊을까 봐 걱정입니다.
요즘 기억력이 얼마나 나쁜지... 에고...

stella.K 2015-05-16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작가는 바르고,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ㅋㅋ

페크pek0501 2015-05-17 14:55   좋아요 0 | URL
그건 스텔라 님이 겸손해서가 아닐까 해요. ㅋㅋ

<밤이 선생이다>라는 책은 잘 쓴 에세이가 많아요. 단 하나, 옥의 티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거야 뭐, 나중에 개정판 낼 때 고치면 되지 않겠어요.
저 같으면... 처음엔 이렇게 썼는데 독자의 지적을 받고 나니 내가 놓친 부분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러면서 고쳐서 실을 것 같아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겸손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잖아요.

제일 위험한 것은, 나도 틀릴 수 있다 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 태도 같아요.
위대한 철학자도 사상가도 옥의 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요.
우린 신이 아니고 인간이니까요.
아니, 신도 틀릴 때가 있었을 거라고 봐요. ^^

돌궐 2015-05-17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요일 아침에 좋은 글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15-05-17 14:49   좋아요 0 | URL
환영합니다.

좋은 글로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가끔이라도 들러 주셔서 댓글을 남겨 주시면 저로선 고마운 일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2015-05-19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5-05-20 13:13   좋아요 0 | URL
하하~~ 웃겠습니다.
닉네임이 두 개이신 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아마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겁니다.

인터넷 공간에선 비밀이 없답니다. 신상 털기가 일어나기도 하는 곳이잖아요.

어쨌든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책을 읽다 보면 이 책과 저 책의 주장이 달라 헷갈릴 때가 있다.

 

 

옳은 편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과 반대라고 볼 수 있는 다음의 글을 읽을 때에도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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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서건 우리는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야 한다. 그들이 옳지 못할 때에라도 그렇다. 하지만 그들도 억압자들과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175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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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모르겠다. 어떻게 옳지 못한 때에도 그편에 설 수 있단 말인가?

 

 

‘악의’가 아니라 ‘무지’인 것이 문제가 될 경우에 그렇다는 것인가?
 


우리가 비난해야 할 것은 ‘악의(惡意)’이지 ‘무지(無知)’가 아니기 때문인가?

 

 

‘무지’는 죄가 아니기 때문인가? 오히려 연민을 가져야 하기 때문인가?

 

 

살아갈수록 확신할 수 없는 게 많아지는 것 같다. 

 

 

어렵다.

 

 

다음의 글로 위로를 받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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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에 대해서도 깊이 천착하지 않은 자만이 확신을 가질 수 있다.(186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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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아버지가 재작년 여름에 돌아가셨으니 벌써 두 해가 바뀌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2주일 가까이 병원에서 폐암으로 고통스러워하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녀는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서 임종하기 직전까지 아버지를 간호하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병원에서 보낸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들 중 하나가 ‘임종하기 직전에 왜 고통이 필요한가?’에 대한 것이다. 

 

 

지금도 그녀의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한다. 아버지가 병석에서 꽤 힘들어 해서 (떠나지 말라고) 붙잡을 수도 없었다고.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게 허전하다가도 병석에서 힘들어 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잘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신단다.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하며 위안을 받는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병석에서 괴로워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끔찍하다. 이처럼 고통이 있음으로써 오히려 유가족이 슬픔을 조금 덜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임종하기 직전의 고통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녀는 생각했다.

 

 

고통이 필요한 이유는 또 있다. 만약 점점 죽음을 향해 가는 환자가 고통을 하나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 환자는 죽기 싫을 것이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떨 것이다.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아쉬워 몸부림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몸이 아파서 괴로워하다 보면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삶을 포기하게 될 터. 그래서 임종하기 직전의 고통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환자의 육체적 고통은 죽게 될 환자와 남게 될 가족의 정신적 고통을 덜기 위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며 그녀는 이런 생각도 했다. 만약 내가 죽음을 앞두고 고통받는 환자라면 하늘을 향해 이런 기도를 하게 될 것 같다고. “제발 고통 없이 죽게 해 주세요.”라고. 그런데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으려면 사는 동안 죄를 짓지 않고 살아야 할 것 같다고. 죄 많은 사람의 기도는 이뤄지지도 않을뿐더러 기도할 자격도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누구나 고통 앞에선 두려움이 생겨 어쩔 수 없이 나약해지고 겸허해지는 인간의 모습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고통이 없다면 인간은 죄로 인해 받게 되는 벌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되리라. 고통이 필요한 이유다. 

 

 

임종하기 직전에 왜 고통이 필요한가? 이에 대한 답을 이렇게 정리해 봤다.

 

 

첫째, 유가족의 슬픔을 덜기 위해 환자의 고통이 필요하다.
둘째, 환자가 삶을 포기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 환자의 고통이 필요하다.
셋째, 죄로 인한 벌을 두려워하게 하기 위해 환자의 고통이 필요하다.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환자를 봐야 죄를 짓고 않고 살려고 노력할 테니까.)

 

 

이게 맞는지 맞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여기까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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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4 16: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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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5 2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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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4 17: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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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5 20: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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