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욱 저, <정신분석을 통해 본 욕망과 환상의 세계>‘한 시대를 뒤흔든 33인의 삶을 분석하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으로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다이애나, 톨스토이, 루소, 사르트르, 알튀세르 등 33인의 삶을 ‘정신분석’이라는 렌즈로 살펴본다.

 

 

 

 

 

 

 

 

 

 

 

 

 

 

 

 

 

 

 

사람들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경제적 형편, 부모의 성향, 부모와의 관계, 어릴 때의 특별한 경험 등 성장 시절의 환경이나 특징이 어른이 된 뒤에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그래서 성장 시절의 삶을 모르고선 한 사람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이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인간관계와 여러 경험 등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존재인 것이다. 즉 인간이란 자신의 천성만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이병욱 저, <정신분석을 통해 본 욕망과 환상의 세계>를 통해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톨스토이의 경우엔 10세가 되기 전에 부모를 모두 잃었는데 그래서 그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집착하게 되었고 그런 그의 집착은 작품 속에서도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일 것이다. 또 어린 나이에 겪은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단란한 가족의 행복을 맛보며 자라지 못해서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의 염세주의적인 태도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만을 통해서 얻은 교훈과 지혜만으로 삶을 산다면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덜 어리석기 위해서, 현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겐 타인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교훈과 지혜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유익하다. 타인의 생애를 통해 인간과 삶에 대한 안목을 한층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아쉬운 점은 33인의 삶을 한 권에 담다 보니 각각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이 이뤄지지 않은 점이다. 하지만 이 점은 한 사람의 삶을 한 권에 담은 책과 비교하면 당연할 일일 것이다. 나는 그런 단점보다 여러 명의 삶을 비교하며 한꺼번에 읽을 수 있는 장점에 무게를 두고 읽었다.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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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저, <절망은 나의 힘>은 카프카가 쓴 일기, 편지, 산문 등의 글에서 뽑아 쓰고 이에 대해 일본 번역가인 가시라기 히로키가 그의 글마다 설명을 덧붙인 것으로 인간 카프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변신>, <소송> <성(城)> 등의 작품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된 카프카의 배경에는 그의 어두운 정신세계가 있었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카프카는 희망보다는 절망에, 낙관보다는 비관에 친숙한 삶을 살았다. 카프카처럼 절망과 비관에 친숙한 삶을 산 작가들이 많이 있다. 이렇게 어두운 정신세계를 가진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쓰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어두운 정신세계가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사람을 만들기 때문일 것 같다.

 

 

<절망은 나의 힘>, 절망 속에서 사는 사람도 성공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같아서 책 제목이 맘에 든다. 실제로 카프카는 그의 절망감과 열등감이 문학의 원동력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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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이애나의 삶

 

 

이병욱 저, <정신분석을 통해 본 욕망과 환상의 세계>에 따르면 다이애나의 삶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다이애나는 20세 때에 33세의 찰스 왕세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신혼 초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찰스는 다이애나에게 성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둘은 말다툼이 잦았다. 특히 둘째 아들 해리를 낳고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더 나빠지기 시작했다. 찰스 왕세자는 과거의 옛 연인인 카밀라 볼스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으며, 다이애나 역시 그녀의 승마 코치인 제임스 휴이트와 염문을 뿌렸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된다.

 

 

다이애나의 어린 시절은 평범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녀가 8세 때에 부모는 이혼을 했고, 그녀가 15세일 땐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재혼하였다. 다이애나로서는 부모 양측 모두에게서 배신과 버림을 당한 셈이다. 그녀는 계모를 미워해서 함께 살기를 거부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을 오가며 지냈다. 이처럼 혼란스럽고 갈등적인 상황에서 성장한 그녀였기에 어려서부터 매우 공격적이며 충동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찰스와 여왕이 시기할 정도로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시절에도 그녀 자신의 내면은 모호함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정서적 혼란을 겪었다. 미국의 전기 작가 샐리 스미스는 다이애나가 경계성 인격장애를 지닌 것으로 보고, 그녀의 우울증, 정서적 불안정, 편집증, 폭식 등을 주된 증세로 지적한 바 있다.

 

 

1997년 그녀는 아랍계 부호의 아들인 바람둥이 도디 알 파예드와 함께 파리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지고 만다.

 

 

다이애나의 삶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녀는 20세에 찰스 왕세자와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음에도 그 이후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영국의 왕세자비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것으로 인생이 완성되지 않았던 것. 오히려 그때부터 파란만장한 새 인생이 펼쳐졌다. 누구나 자신이 열망하는 위치에 오르는 수가 있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오를 수 있으나, 그것으로 인생이 행복하게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다이애나의 삶을 읽고서 카프카가 쓴 다음의 글이 떠올랐다.

 

 

 

 

인간의 근본적인 연약함

 

인간의 근본적인 연약함은 승리를 쟁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모처럼 손에 넣은 승리를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 프란츠 카프카 저, <절망은 나의 힘>에서.

 

 

 

어떤 직업을 갖는 게 목표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과 결혼하는 게 목표인 사람도 있고, 어떤 계획을 실천하는 게 목표인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목표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니다. 목표가 이뤄진 다음에도 삶은 계속되는 것이므로. 모처럼 손에 넣은 승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으므로.

 

 

 

 

2. 톨스토이의 삶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모순 덩어리’인지를 알고 있다. 그 점을 나타내기 위해 작가들이 쓴 소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인간이 ‘모순 덩어리’임을 보여 주는 삶을 산 작가가 있다. 바로 톨스토이다. 이병욱 저, <정신분석을 통해 본 욕망과 환상의 세계>에서 조명한 톨스토이는 말과 행동이 다른 모순적인 삶을 살았다.

 

 

이 책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 무저항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는 50대에 극심한 회의론에 빠져 그 후로부터 죽을 때까지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무소유사상 및 비폭력주의에 바탕을 둔 이타적인 기독교 신앙에 몰두했다.

 

 

톨스토이가 내세운 신앙적 지침은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 “첫째, 화내지 말라. 둘째, 간음하지 말라. 셋째, 맹세하지 말라. 넷째, 악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 다섯째,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이 다섯 가지 실천 도덕이야말로 그가 내세운 톨스토이즘의 핵심이 되는 지침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라고 강조하는 것과 다르게 그는 아내와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는 결혼 초기에는 행복한 시간이 있기도 했지만, 말기로 갈수록 "결혼이란 단지 무덤에 불과한 끔찍스런 재앙"처럼 불행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특히 그가 가족을 위한 아무런 대안이 없이 자신의 영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의 엄청난 저작권 수입조차 추종자들에게 넘겨주고자 해서 아내 소피아와 큰 마찰을 일으켰다. 더욱이 말년엔 톨스토이 사상의 열렬한 추종자이던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가 이들 부부 사이에 끼어들어 이간질함으로써 부부 사이가 더 악화되어, 톨스토이는 82세에 병든 몸으로 가출하여 폐렴에 걸려 조그만 시골 역에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딸들이 결혼하는 것에 대해 ‘결혼은 무덤이요 지옥이라며 끝까지 반대하는 입장을’ 보일 만큼 결혼에 대한 환멸감을 표시했다. 그가 쓴 일기를 보면, 결혼 초부터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톨스토이는 여성혐오증이 있는 금욕주의자로서 대중에겐 금욕적 생활 태도를 요구하였으나, 이와 모순되게도 무려 12명의 자식들을 둘 만큼 왕성한 성욕을 보였다. 또한 그는 인간은 사랑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음을 주장하였으나, 이와 모순되게도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자신보다 총명하고 행복한 사람들에 대해 강한 질투심을 지녔다. 한마디로 톨스토이의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 찬 인생의 한 전형이었다.

 

 

톨스토이의 삶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41세에 <전쟁과 평화>를 그리고 49세에 <안나 카레니나>를 완성하여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자리를 굳힐 수 있었음에도 그 이후 극심한 염세주의 및 우울증에 빠졌고 행복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이끌지 못했다. 가고 싶지 않은 인생의 곁길로 들어서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톨스토이의 삶을 읽고서 카프카가 쓴 다음의 글이 떠올랐다.

 

 

 

 

인생의 곁길로 새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곁길로 새는 일이다. 원래는 어디로 향하고 있었던가. 뒤돌아보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 프란츠 카프카 저, <절망은 나의 힘>에서.

 

 

 

우리는 앞으로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되는 것과 같은 행운을 갖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90퍼센트 이상이 실패한 삶을 산다는 통계가 있듯이, 자신이 바라던 위치에 도달했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교훈이다. 오히려 이때가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는, 인생의 갈림길에 놓이는 중요한 때이므로. 자신이 가고 싶었던 길로 가느냐 아니면 가고 싶지 않았던 곁길로 새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으므로.

 

 

 

 

3. 이 글을 쓰면서 든 생각

 

 

우리는 성공과 행복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바라던 방향으로 무조건 성공만 하면 행복한 삶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성공과 행복을 다른 각도로 보면 그 둘의 다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성공해야 행복한 삶이 되는 게 아니라 행복해야 성공한 삶이 된다는 것을.

 

 

그래서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중요한 건 성공이 아니라 행복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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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3-02-18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경우에 있어서) 성공이 아니라 행복에 중요성을 두려면,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어두운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스스로 행복해질 수가 없는 모순을 낳는군요.

페크pek0501 2013-02-19 20:33   좋아요 0 | URL
아하하... 마립간 님.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사람이 오히려 안 행복한 것 같아요. 그 반대로 생각 많지 않고 낙천적인 사람이 즐겁게 사는 듯해요. 우리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고 살아요. ㅋㅋ
저는 요즘 대충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곤 한답니다. 그냥 대충 대충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된다는...
첫 댓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크아이즈 2013-02-19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절망은 나의 힘 - 제목 한 번 맘에 듭니다.
기형도가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중얼거렸을 때 혹 이 책이 곁에 있었던 건 아니겠지요. ㅋ
날마다 절망이고, 날마다 흔들리고, 날마다 타협하는 저는 제 내면의 풍경을 누가 스캔이라도 할까 두렵습니다.
성공보단 행복이란 그 말에 위안을 삼으며 추천 날리고 도망갑니다.^^*

페크pek0501 2013-02-19 20:38   좋아요 0 | URL
호호~~ 고마운 님아... ㅋㅋ
저는 열등감은 나의 힘, 이라고 외치며 살겠사와요.
오늘 외출했었는데 겨울바람이 찼어요. 우리의 마음은 봄이길 바랍니다. ^^
님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합니다. ^^

마태우스 2013-02-19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카프카는 왜 자기 작품을 그리도 부끄러워했을까요. 태워버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
2) 다이애나는 그래도 많은 것을 누리고 산 사람인데, 의외로 추앙받더라고요. 사실 전 그게 지금도 미스테리예요. 물론 좋은 일도했지만, 음음... 오드리헵번과는 좀 다른 경우 같던데...
3) 저는 실패 안하는 10%가 될 거예요. 되게만 좀 해주세요^^ 벌써 복권산지 10년째, 꼬박꼬박 샀으니 언젠가 되겠죠?^^

페크pek0501 2013-02-21 13:36   좋아요 0 | URL
아, 반가운 마태우스 님!!!!!!!!!!

1) 세계적으로 탁월하다고 인정받게 된 작가들 중엔 그런 작가들이 많더군요. 글의 눈높이가 높아서가 아닐까요. 또 글에 대한 높은 안목으로 자신의 글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 잘 알아서가 아닐까요. 누군가가 말했듯이(니체였던가? 모르겠음) 자기 작품에 만족하는 사람은 싸구려 예술가뿐인지도 모르겠어요.

2) 그녀가 추앙 받는 건 워낙 국민들의 인기를 받고 있었던 터에, 왕세자비의 지위를 잃을 수 있는 이혼을 과감하게 하고 나서 세계 곳곳을 다니며 여러 봉사활동을 했기 때문인 듯해요. 또 남편의 외도로 인해 그녀가 받은 상처에 대한 국민들의 연민도 작용했을 듯하네요. 이것 말고도 그녀가 얻은 인기엔 그녀의 미모와 매력도 영향을 미쳤을 듯...

3) 으음~~ 저는 님이 (소액은 괜찮지만) 거액의 복권 당첨이 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아요. 그 돈을 지금은 좋은 일에 쓰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지만 또 그걸 실천할 수 있지만, 아마 큰돈이 생기면 논문을 열심히 쓰지 않을 걸요. 그리고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일이 생기면 ‘당장 학교를 때려치울까’하는 생각으로 갈등하는 시간이 생길 것 같고 그 갈등은 님을 불행하게 만들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모아 가는 그 즐거움을 잃을 수 있어요. 월급을 푼돈으로 여기게 될 테니까요.
또 친구를 잃을 수도 있어요. 아마 친구들과 식사하면 자동으로 님이 내야 할 것이고 한 번이라도 안 내면 그 친구가 섭섭해 할 거예요. 복권에 당첨까지 됐는데 짜게 군다고... 한마디로 인간관계가 피곤해지죠. 그래서 남들에겐 복권 당첨을 비밀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할 거예요.
저는 자신이 노동한 대가로(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수입을 얻는 게 참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저도 막상 복권 당첨의 행운이 오면 기절하게 좋아하겠지만요...ㅋㅋ)

(님 덕분에 제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감사~~^^)

마태우스 2013-02-23 14:28   좋아요 0 | URL
3번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요, 저는 아내랑 복권이 됐을 때에 대비한 시뮬레이션 훈련을 무지하게 많이 했어요. 돈은 건드리지 않고 이자만 가지고 뭔가를 할 거구요, 지금까지 그냥 살던대로 살 거예요.주위 사람들에게 절대 비밀로 할 거예요. 전 의외로 입이 무거울 땐 무겁답니다. 뭐, 훈련과 실제는 다를 테지만, 그래도 훈련을 전혀 안한 사람과는 다르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페크언니, 되도록 좀 도와주세요. 오늘밤 추첨입니다^^

페크pek0501 2013-02-25 20:05   좋아요 0 | URL
제가 뭐 힘이 있나요... 후후후~~~ 입이 무거우시군요. 그래도 당첨되면 저에겐 알려 주세요. 두 분이 어떻게 그 돈을 쓰고 사시는지 궁금하거든요. 참고로 저도 입이 무겁습니다. 으음~~ 오늘밤 추첨인 것도 궁금... 앞으로 추첨인 것도 궁금... 꾸준히 10년째 사셨다니 언젠가 될 것 같아요. 행운을 빌어요. ^^

노이에자이트 2013-02-22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나 배우자와 불화한 작가들이 많죠.안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이 더 힘들죠.작픔에 감동했다가 그 작가의 생애를 알고 막장드라마 같아서 충격을 받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저는 그 정도는 감안하고 읽습니다.저는 오히려 막장드라마 같은 생을 산 작가들에게 흥미가 있습니다.

페크pek0501 2013-02-25 20:09   좋아요 0 | URL
막장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아봐야 삶이 뭔지 조금 알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좋은 소설을 쓰려면 고통의 쓴맛을 봐야 한다는 거죠.
다양하게 느끼고 깊이 느끼려면 막장드라마 같은 인생이 최고죠.

그런데 님은 오랜만에 방문하시는 것 같군요. 반갑습니다. ^^

2013-02-26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03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줄을 서 있다. 이곳의 방문자들은 내게 새 글을 빨리 올리라고 재촉하는 것만 같아 블로거로서 글을 써야 하고(이런 착각을 한다.ㅋ),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독서논술’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매주 수업 프로그램을 짜야 하고(게다가 강의계획서, 공개수업지도안, 학생개별평가서 등을 작성하여 제출하는 잡무도 많다.), 친정 부모님은 ‘우리 딸 언제 또 오나’하면서 나를 기다리는 것만 같아 외동딸로서 친정에 자주 들러야 하고(일주일에 두 번은 들른다.), 집안에선 내 손길이 닿아야 하는 일들이 있어서 주부로서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하고, 또 추가하자면 읽을 책들이 쌓여 있다. 아, 바쁘다 바빠!!!

 

 

바쁜 티를 내지 않고도 일을 잘 해 나가는 것이 유능한 사람인데, 난 바쁜 티를 내는 것으로 보아 무능한 사람이 맞다. 내가 궁금한 건 이렇게 바쁘다고 생각하는 게 행복한 사람일까 아닐까, 이다. 행복이란 어떨 때 느끼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일이 많아서 즐거움(행복)을 얻을 때도 있지만 일이 많아서 스트레스(불행)를 받을 때도 있으니, 그게 알쏭달쏭하다는 것이다.

 

 

스티븐 핑커 외 지음, <마음의 과학>을 읽다가 ‘행복 쳇바퀴(happiness treadmill)’라는 말에 눈이 멎었다. 진화심리학자 도널드 캠벨이 말한 것으로 “명성, 부 등을 얼마나 많이 획득하든 간에, 행복 수준은 결국 처음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스티븐 핑커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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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절대 기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구석기 시대 수렵채집인은 운동화나 중앙난방이나 페니실린이 없다고 짜증을 냈을 리가 없어요. 뇌는 추구할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있는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뇌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남들이 얼마나 풍족한지 살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죠. 남들은 우리의 행복 등급을 정하고, 나 자신이 합리적인 수준에서 이루기를 희망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안타깝게도 그 방식은 많은 이들을 불행하게 하는 행복의 한 가지 특징을 빚어냅니다. 즉 자신이 주변의 모든 사람보다 좀 더 나으면 행복하고 좀 못하면 불행해지는 것이죠. 월급봉투를 보고서 월급이 5퍼센트 오른 것을 알면 기뻐하겠지만, 다른 모든 동료의 봉급이 10퍼센트 오른 것을 알면 망연자실할 겁니다.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마음의 과학>,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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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가 행복할지, 행복하지 않을지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남들과의 비교’라는 것이다.

 

 

마틴 셀리그먼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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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에 나는 낙관주의 대 비관주의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낙천적인 사람들이 우울증에 빠지는 비율이 비관적인 사람들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낙천적인 사람들은 예외가 있긴 했지만 우리가 조사한 모든 직업에서 더 성공을 거두었다. 낙천적인 사람들은 비관적인 사람들보다 면역계가 더 활발하고 더 양호했으며, 좀 더 오래 사는 듯했다.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마음의 과학>, 175쪽~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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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인간의 행복은 재산이나 명예보다 인격과 개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이를 달리 말하면, 행복은 재산이나 명예보다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 된다. 즉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미시마 유키오는 <부도덕 교육강좌 69>에서 되도록 자만심을 가질 것’을 주장하나 보다. 그에 따르면 “겸손이란 것은 결실 없는 과일일 때가 많고, 또 세상에서 겸손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고 있는 자는 대개가 위선적이다.” 그리고 자신감과 자만심을 비교하면, “자신감이란 실질을 거느리는 귀찮은 자격”이며 “누구나 쉽게 자신감이 생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만심이라면 마음먹기에 따라서 오늘부터라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자만심이 행복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그의 글을 통해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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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걸리는 대개의 병들은 보통 거리에서 만난 낯모르는 여자가 자기와 같은 옷을 입고 있다거나, 더구나 그녀가 자기보다 더 잘 어울리고 미인이라는 데에서 기인되는 경우가 많다. 여자가 이런 일을 계속해서 두세 차례 당하면 틀림없이 드러눕고 만다. 이런 때라면,

“뭐야, 내 흉내를 내고 있잖아. 어울리지도 않는 주제에.”

하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자만심이 있다면 병이 날 걱정도 없다.

남자의 병이란 것도, 회사에서 저 녀석은 분명히 나보다 잘한다, 나보다 출세가 빠를 것 같다, 저 녀석이 먼저 과장이 될 것은 틀림없다 라는 종류의 열등감에서 기인되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은 간장이 나빠지거나 한다.

“뭐 저런 녀석쯤은 내 손톱의 때만큼도 못한 녀석이지.”

이 정도의 자만심만 있다면 그렇게 병약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 미시마 유키오 저, <부도덕 교육강좌 6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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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자만심으로 행복해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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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코는 왜 이렇게 낮을까.”

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내 코는 왜 이렇게 귀엽게 생겼을까? 미국에서의 성형수술이란 모두가 너무 큰 코를 깎는거야.”

라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좋다.

- 미시마 유키오 저, <부도덕 교육강좌 6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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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코는 왜 이렇게 낮을까.”라고 생각하면 열등감이 생기고, “내 코는 왜 이렇게 귀엽게 생겼을까? 미국에서의 성형수술이란 모두가 너무 큰 코를 깎는거야.”라고 생각하면 자만심이 생길 것이다.

 

 

자만심이 있는 사람과 열등감이 있는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 친구로 삼아야 한다면 나는 전자를 택하겠다. 나도 어느 부분에선 열등감을, 어느 부분에선 자만심을 가지고 있는데, 자만심을 가지고 있을 때가 훨씬 타인에게 너그러울 수 있기에, 상대방도 그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열등감이 있는 문제에선 마음이 좁아져서 과잉 반응을 보이기 쉽다. 또 열등감은 이상한 방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가 있어서, 열등감 있는 사람과의 만남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만큼 배려를 많이 해 줘야 하는 상대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심한 열등감에 한해서다.)

 

 

..........

남을 미워하는 것은 단지 그의 모습을 빌려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고 있는 것과 같다. 자신 안에 들어 있지 않는 것은 결코 당신을 흥분시키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남을 미워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 저, <세상을 보는 지혜>에서.

..........

 

 

 

..........

타인을 향한 비난은, 많은 경우 비난하고 있는 사람 자신의 콤플렉스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비난하는 사람의 불행한 심리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비난하는 사람이 오히려 애처롭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 혜민 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

 

 

 

..........

“얘야, 너도 어른이 되어 보면 세상에 화가 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이해하게 될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화를 내게 되는 일이 있어도 그건 결국 자신한테 화를 내는 거란다. 자신이 밉기 때문이지. 바로 그렇게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미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 위기철 저, <아홉살 인생>에서.

..........

 

 

 

글쓴이 세 사람이 다르게 표현했을 뿐, 같은 뜻의 말을 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행복할 수 있고 남에게 관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그것이 자만심이 아니겠는가. 자만심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자만심과 행복과의 관계이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

어느 사모님, 모처럼 만난 동창들과 신나게 놀다 보니 저녁때가 되었다. 집에서 저녁을 기다리는 남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재미있게 놀던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왔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 저녁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모님 너무 재미있게 놀다온 여운이 남아 멍하니 있으니 남편이 물었다.

 

남편 : 왜? 친구들이 돈이 많아?

아내 : 아니.

 

남편 : 그럼 친구들이 차가 좋아?

아내 : 아니.

 

남편 : 그럼 친구들이 가방이 다 명품이야?

아내 : 아니.

 

대답하지 않는 아내에게 남편이 다시 묻자,

.

.

.

아내 : 에이씽... 나만 남편이 있잖아.

..........

 

 

사모님이, 그의 친구들은 남편이 다 죽어서 친구들과 노는 일에 방해받는 일이 없는데, 자신만 남편의 저녁상을 차리러 집에 가야 하는 것에 불만이 있다는 얘기다. (이런 아내들이 젊었을 땐 그 남편과 열렬히 연애를 했고, 신혼 생활을 할 땐 질투로 인해 사랑싸움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이 얘기를 듣고 몇 가지를 생각했다. 첫째, 어쩌다 남편들의 신세가 이 지경까지 딱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 둘째, 인간은 변심하는 존재라는 것. 셋째,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건 ‘남들과의 비교’라는 것. 넷째, 행복과 불행에 대한 느낌은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것.

 

 

결론적으로,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행복의 문제에서 남들과의 비교는 필수일 수밖에 없는 것. 남들과 비교하되, 남편이 있는 여자들은 외롭게 하지 않는 남편이 있다는 것에 자만심을, 남편이 없는 여자들은 밥상을 차려 줘야 하는 남편이 없다는 것에 자만심을 가지고 살면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로 돌아가서 생각해 본다. 내가 할 일이 많아 바빠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무료한 삶을 살지 않아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것에 자만심을 가져야겠다고,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

<후기>

 

자만한 사람은 재수 없게 보일 수 있어서 겸손한 사람이 되자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 페이퍼를 쓰면서 자만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남들이 느낄 정도로 자만심이 밖으로 튀어 나와선 안 될 것 같고, 마음속에서만 자만심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쇼펜하우어의 글을 다시 읽는다.

 

 

.......... 

인간의 세계란 무엇보다 각 개인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그 때문에 정열적인 사람은 현실 속에서 흥미진진한 갈등만 보고, 조용하고 침착한 사람은 무의미만 보며, 우울한 사람은 비극만 보게 되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 저, <쇼펜하우어 인생론>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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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2-11-15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깥의 겸손, 내면의 자만 이건 위선이고
내면의 겸손, 바깥의 자만 이건 위악이라 할 수 있을까요?
위선도 위악도 옳지 않겠지요?
근데 페크님 말씀처럼 겸손한 자 열등감 있을 수 있고,자만심 있는자 타인에게 너그러울 것 같기는 해요.

무궁무진한 가지치기 사유를 하는 페크님 글,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페크pek0501 2012-11-15 22:32   좋아요 0 | URL
바깥의 겸손, 내면의 자만 이건 위선이고
내면의 겸손, 바깥의 자만 이건 위악이라 할 수 있을까요?
- 이 말씀, 참 훌륭한데요. 한 수 배워요. ㅋ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숲노래 2012-11-15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만심이든 자존심이든 자신감이든,
'나를 믿고 좋아해서 내 삶을 즐기자'는
이야기라고 느껴요.

나를 속 깊이 들여다보지 못하면
나 스스로 언제나 불행할 테지만,
나를 제대로 알고 깨우치면
언제나 즐거운 나날이에요.

페크pek0501 2012-11-16 20:22   좋아요 0 | URL
자기 자신을 속 깊이 들여다보는 것, 쉽지 않은 일이에요.
저도 제 자신을 모를 때가 있지만 어떤 상대가 자기 자신을 너무 몰라서
다른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줄 때는 답답하더군요.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공부가, 우리 모두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2-11-16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쇼펜하우어의 세 부류 중에선 그나마 첫번째 부류에 속하는 듯해요. 아직은.ㅎㅎ
그니까 절대지존의 행복이란 없는 것이겠군요. 한 마디로 마음의 문제란 결론이 되나요^^ 열등감이 심한 사람은 꽤 힘들더라는 거 동감해요.
굿나잇, 페크님^^

페크pek0501 2012-11-16 20:24   좋아요 0 | URL
저도 첫 번째 부류할래요.
작은 것에도 감동 받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 - 이런 부류이고 싶어요.
지금 프레이야 님, 비 와요. 비 오는 밤에 저는 댓글을 쓰고 있고요. ^^
또 봐요, 반가운 프레이야 님!!!!!!!!!!

잘잘라 2012-11-1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감과 자만심의 차이 개념이 와닿길래 <부도덕 교육강좌 69> 클릭했어요. 지은이가 할복자살을... 무서워요. 옛날엔 자살하는 사람, 얼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생각이 달라졌거든요. 무관심의 끝에 자살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혼자서 살아갈 수 없듯이, 자살 역시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족이라는 말도 있지만 행복 역시 혼자서는 느낄 수 없는 것 같구요. 그래서 저는, 어떤 말을 갖다 붙이더라도 자살하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불행한 삶, 자살한 사람의 글은 읽고 싶지 않아요. 저도 모르게 그 길을 따라가게 될까봐 무섭거든요. 겁쟁이 메리포핀스..

페크pek0501 2012-11-17 16:30   좋아요 0 | URL
<부도덕 교육강좌>는 전혀~, 작가가 자살한 사람 같지 않게 유쾌한 책이랍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읽으세요. 일본 작가들 중엔 할복 자살한 경우가 많더군요. 이에 제가 이름을 붙인다면 예술가 병, 이 되겠습니다.
우울증도 일종의 예술가 병이 아닌가 생각되어요.

메리포핀스 님, 오랜만이라 무지 반갑습니다. 앞으로 우리 자주 보아요. ㅋㅋ

oren 2012-11-17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페크님의 글 속에서 늘 꼬투리만 잡는 것 같아 죄송스럽지만, '행복의 문제에서 남들과의 비교는 필수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대목도 쉽게 동의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역설적으로는 '남들과의 비교'로부터 벗어나면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거든요.

저는 잠시후에 KTX를 타고 1박2일 일정으로 '어릴 적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대구로 갈 예정인데, 그 친구들과 만나면 (설사 비교할 게 정말 많더라도) 서로 '비교할 틈'조차 느낄 겨를이 없이 마냥 즐겁게 떠들고 논답니다. 친구들 모두 하나같이 금새 어릴 때 함께 뛰어놀았던 그 꿈같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거든요.

페크pek0501 2012-11-17 16:27   좋아요 0 | URL
하하하~~~
오렌 님 덕분에 페이퍼 하나 써서 올렸습니다. 지금 올린 <싱거운 후기>입니다.
잘 놀다 오시고 나중에 제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ㅋㅋ
(친구들과의 일박이일이 부럽군요.)
 

 

 

 

 

대부분의 연인들은 서로 사랑하니까 만난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만남은 지속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둘의 사랑의 크기가 똑같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두 사람은 상대보다 더 사랑하는 쪽이 되거나 덜 사랑하는 쪽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더 사랑하는 자일까?

 

 

알랭 드 보통 저, <우리는 사랑일까>와 롤랑 바르트 저, <사랑의 단상>을 읽고 나니 그 답이 보였다.

 

 

 

 

 

1. 노력하는 자가 더 사랑하는 자이다

 

 

연인 관계에서 둘 중 누가 더 사랑하는 자일까. 이를 알기 위해 ‘두 사람 중 누가 더 노력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우리는 사랑일까>에 이런 글이 있다.

 

 

....................

(전화 통화로) 대화가 펼쳐지는 어느 지점에서, 앨리스(여자)는 자신이 가지 않으면 에릭(남자)은 자기 집에서 나오지 않으리라는 감을 잡았을 것이다. 저녁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은 그 남자의 욕망은 아주 작고, 분명히 그녀의 욕망보다 약했다. 그 남자는 혼자 있는 것마저 감수할 테지만, 그녀는 쉽게 그러지 못했다. - 그래서 노력하는 일은 그녀의 몫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사랑일까>, 371쪽.

 

 

 

 

연인들이 바라는 것 중 하나가, 둘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가 있는지 모른다.

 

 

“나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상대보다 더 노력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상대보다 더 사랑하는 자이다.

 

 

 

 

 

2. 기다리는 자가 더 사랑하는 자이다

 

 

두 연인 중에서 누구에게 권력이 있을까. 당연하게도 덜 사랑하는 자에게 권력이 있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사랑을 더 받는 자에게 권력이 있다.

 

 

....................

스탕달은, 애인 사이에서는 언제나 한쪽이 상대방을 더 사랑하며, 그래서 두 사람 관계의 권력이 인지되기 마련이라는 비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우리는 사랑일까>, 172쪽.

 

 

 

 

연인 관계에서의 권력은 ‘기다림’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주로 기다리고 있는 쪽보다 기다리게 하는 쪽에 권력이 있다.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썼다.

 

 

....................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요, “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이다.”

....................<사랑의 단상> 67쪽~68쪽.

 

 

 

 

기다리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과도 같은 것. 기다리는 자가 더 사랑하는 자이다.

 

 

 

    

 

 

 

 

 

알랭 드 보통 저, <우리는 사랑일까>

롤랑 바르트 저, <사랑의 단상>

 

 

 

 

 

 

 

 

 

 

 

 

 

 

3. 연인에 대해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더 사랑하는 자이다

 

 

연인들은 서로 상대를 얼마나 알까. 몇 년 연애를 했다고 해서 친숙한 사이라고 해서 과연 상대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친구와 연인을 비교한다면 친구보다 연인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

앨리스는 사랑하는 남자(에릭)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 남자의 행동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에릭은 처음 만난 날과 똑같이 복잡해 보였다. 그 첫 만남에서 그녀는 그 남자를 ‘안’ 줄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주장할 수 없었다. (…) 그리고 예상할 수 없고, 끊임없이 질문과 해석이 뒤따르는 불안정 상태에 힘이 빠졌다.

....................<우리는 사랑일까>, 149쪽

 

 

 

 

앨리스처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연인이 어느 날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연인인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면, 롤랑 바르트가 한 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

“아무리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라는 뜻이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해독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을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단상>, 196쪽.

 

 

 

 

누구에 대해 의문을 품고 골똘하게 생각하는 건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상대를 사랑할수록 상대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질 것이고, 상대가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믿음이 약할수록 상대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연인에 대해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더 사랑하는 자이다

 

 

 

 

 

4. 피곤하다는 말을 듣는 자가 더 사랑하는 자이다

 

 

함께 있을 때 상대로부터 “당신을 만나면 한순간에 나의 모든 피로가 풀려요.”라고 말하는 걸 듣고 싶은 게 연인일 것이다. 반대로 상대로부터 듣고 싶지 않은 말 중 하나가 이 말일 것이다.

 

 

“오늘 좀 피곤해요.”

 

 

피곤하다는 상대의 말을 들은 연인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나를 만나면서 피곤함을 느낄 수 있지?”하는 생각을 하며 울적해질지 모른다.

 

 

....................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앨리스, 지금은 밤 1시 30분이에요.”

“그래서요?”

“이런 토론을 시작할 때가 아니라는 거죠. 왜 매사를 복잡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지 모르겠어요. 뭘 알고 싶은데요? 내가 왜 청혼하지 않는지?”

에릭은 반대편으로 돌아눕고 베개에 머리를 고쳐 뉘었다.

“사랑을 나누면서 당신은 날 똑바로 보지 않아요.”

“앨리스, 부탁이에요. 이런 얘기는 내일 하면 안 되겠어요? 지금 피곤해요.”

....................<우리는 사랑일까>, 256쪽~257쪽.

 

 

 

 

상대가 피곤하다고 말하면 잔인하게 들리는 게 사랑하는 자의 마음이다.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하지 않음을 전달하는 말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나는 이미지를 변질시키러 오는 것은 모두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의 피로를 두려워한다. 피로란 경쟁 대상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것이다. 어떻게 피로에 대항해 싸울 수 있단 말인가? 나와 그 사람을 연결하는 이 유일한 끈인 피로를, 사랑에 지친 그가 ‘내게 주기 위해’ 조각조각 자르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내 앞에 놓인 이 피로의 꾸러미를 어쩌란 말인가?

....................<사랑의 단상>, 167쪽.

 

 

 

 

상대의 피로와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걸 아는 연인은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피곤하다(피로하다)는 말을 듣는 자가 더 사랑하는 자이다

 

 

 

 

 

 

 

 

**********************

마광수 저, <마광수 인생론 - 멘토를 읽다>에서 저자는 말한다.

 

 

“청춘시절에 연애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평생토록 ‘비퉁그러진 성격’을 갖고서 살아가게 된다.”(41쪽)고. “‘숫총각, 숫처녀 박멸 운동’을 벌여야만 그때 비로소 자유로운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다.”(41쪽)고. 그리고 연인 관계에서의 ‘정신적 사랑’이란 ‘육체적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육체적 쾌락’을 강조한다. 육체적 쾌락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장(場)인 이 생태계에서 원칙적으로 지고지순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46쪽)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헌신적인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랑은 그 속을 벗겨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헌신적 사랑은 이기심의 또다른 가면일 뿐이다.(47쪽)

 

남녀가 서로 사랑하며 연애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로 ‘하늘의 축복’이 아니다. 연애는 언제나 피 튀기는 ‘심리전(心理戰)’의 양상을 띠고 있다.(49쪽)

 

연애는 그 사람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지만, 한없는 ‘줄다리기’의 연속이라서 동시에 극심한 피로감도 안겨 준다.(51쪽)

....................<마광수 인생론 - 멘토를 읽다>

 

 

 

 

 

 

 

 

 

 

 

 

 

 

 

 

 

 

 

 

 

<우리는 사랑일까>와 <사랑의 단상>를 읽으면서 연애는 ‘피 튀기는 심리전’이고 극심한 피로감을 안겨 준다는 <마광수 인생론 - 멘토를 읽다>의 글에 공감하였다. (그러므로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은 연애를 삼갈 일이다.) 연애가 ‘피 튀기는 심리전’이 되고 극심한 피로감을 안겨 주게 되는 이유는, 사랑이란 감정이 유동적이기 때문이고 상황에 따라 더 사랑하는 자와 덜 사랑하는 자로 나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연인 관계에서뿐 아니라 부부나 친구 사이에서도 더 사랑하는 자와 덜 사랑하는 자로 나뉜다.)

 

 

우리가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사랑을 더 하는 쪽과 사랑을 덜 하는 쪽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고 싶을까. 우리는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기 바라면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을 것이다. 설령 질투로 인해 고통이 따른다고 해도.

 

 

혹시 어떤 관계에서 자신이 더 사랑하는 쪽에 있다고 해서 울적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예를 들면, 한 여자를 몇 년 동안 짝사랑을 하던 한 남자가 드디어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두 사람이 사랑을 하는 자와 사랑을 받는 자로 나뉜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여자보다 그 남자를 부러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여자보다 그 남자가 더 행복해 보일 것이므로.

 

 

달콤한 행복은 사랑을 받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랑을 하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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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심리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2-11-06 00:38 
    <더>와 <덜>의 구별사람들은 보통 감각, 감정, 열정, 노력과 같은 의식의 상태들이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어느 한 감각이 같은 성질을 가진 다른 감각보다 두 배, 세 배, 네 배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음을 확언한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정신물리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정신물리학의 반대자들조차 다른 감각보다 더 강한 감각, 다른 노력보다 더 큰 노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리하여 순전히
 
 
숲노래 2012-10-27 0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을 그으면서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을 나눌 만한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글로 쓰고 책으로 내는 사람이 있고... 또 읽는 사람이 있으니 ^^;;;

사랑할 뿐인 삶일 테니까요.
스스로 즐겁게 누리는 사랑스러운 삶일 테니까요.

페크pek0501 2012-10-27 16:58   좋아요 0 | URL
된장 님, 반갑습니다. 님 덕분에 무플을 면했네요. 감사드립니다.
님에 대한 답글은 제가 올린 글 <싱거운 후기>로 대신하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프레이야 2012-10-27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늘 이렇게 몇 권의 내용을 비교분석해가며 읽고 생각정리하고 쓰시고,
놀라워요. 참 좋습니다.^^
저 위의 두 권은 저도 좋아하는 책이에요.

-우리가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사랑을 더 하는 쪽과 사랑을 덜 하는 쪽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고 싶을까. 우리는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기 바라면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을 것이다. 설령 질투로 인해 고통이 따른다고 해도.-

특히 이 부분에 공감해요.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피곤하고 힘든일이란 점도요. 그만큼의 감정과 에너지를 쏟아붓는 일이니.
더 사랑하는 자가 약자,라는 대사 영화 '음란서생'에서도 나왔지요.^^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왕비를 지극히 사랑하여 질투하고 집착하는 왕이 하는 말...

여긴 하루종일 비가 내려요. 추적추적... 몇 개씩 달려있는 나뭇잎이 다 젖었어요.
전둥번개도 치고 아까 대낮부터도 하늘이 어둡네요.
그래도 즐겁고 행복한 주말 보내자요^^

페크pek0501 2012-10-27 18:02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 님, 고맙습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네요.
으음~~ 점점 자신이 없어져서 글 쓰면서 힘이 빠지고 그래요.

몇 권의 책 내용을 비교분석했다는 평은 과분하고요, 그냥 읽다 보니 두 권의 책이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배열해 본 것입니다. ㅋㅋ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프레이야 님을 보면서(올려진 글의 제목의 목록을 보면서) 아, 부럽다, 했어요.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저, 졌어요. ^^

다크아이즈 2012-10-28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며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찍이 토마스 만이 토니오 크뢰거에서 가르쳐 준 이 단상을 연애중이거나 치열한 연애를 거쳐온 사람들에게 말해봐도 공감 못 얻는 이 분위기를 어찌할까요? 피폐한 상처만 남을 뿐인데도 사랑은 주는 거기 때문에 충분히 행복하다는 그릇된 학습 위안 같은 거가 아닐까 생각해봤답니다.

더 사랑하는 자들이 연애의 이런 기본 심리(아닌 정직한 상식!)를 알고 덤비면 덜 상처받을 수도 있을까 해서 저는 아들이 대학생 되면 이런 책을 마구 선물할까 합니다. 기질 상 이백오십프로 사랑에 지고도 그게 사랑이라 문밖에 서성일 부류 같아서요. 하기야 암만 알고 덤벼도 지 맘대로 안 되는 게 사랑이니 별 도움이야 되겠습니까.


페크pek0501 2012-10-30 00:1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인상 깊어서 리뷰를 쓴 적이 있어요.

저는 연애 심리를 잘 나타내어 준 책으로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꼽습니다. 이 책을 보고 연애 심리를 좀 알게 되었어요. 하긴 안다고 해도 실전에선 아마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니 젊은이들에게 읽으라고 해도 큰 효과는 없을 듯해요. 차라리 나이가 들어서 그 책을 읽어 봐야 좀 알게 된다고 할까요.
사랑도 결혼도 어렵습니다. 그런 어려운 관문을 잘 통과할런지, 저도 우리 애들을 보면 걱정될 때가 있어요. 마음 다치는 일이 생길까 봐, 말이죠.ㅋㅋ

"사랑에 지고도 그게 사랑이라 문밖에 서성일 부류 같아서요."- 이 문장 참 맘에 드네요. ^^
긴 댓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oren 2012-11-06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페크님의 이 글을 보자말자 참으로 '도발적인' 제목의 글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했었답니다. 아무튼 쉽게 답글을 달 수조차 없게 만드는 그런 인상을 잠시 받았었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두 연인이 언제나 서로를 향해 '더'나 '덜'에 대해서 예민한 촉각을 곤두세울 수도 있고 그래서 언제나 피곤할 수도 있겠지만, 누가 더 사랑하는 것일까를 글로 표현한다는 건 하여튼 여간 어려운 글이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부터 들었거든요.

사랑하는 연인관계에서 '더'와 '덜'을 따진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나 있을 수 있는 문제일 수도 있겠구요. 그런 측면에서 저는 '된장님'의 댓글에 적극 공감을 느끼게도 되더군요.

아무튼 뒤늦게 제가 긴 댓글을 달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심리상태들의 '더'와 '덜'에 대한 한 탁월한 철학자의 통찰을 (페크님의 글에 기대어) 정리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 먼댓글로 쓴다는 것도 아울러 말씀드릴께요.

덧) 10월 마지막주에 '가을산행' 때 '필례약수터'를 막 지나자말자 '더덜'이라는 제목의 팬션 같은 집을 발견했는데, 그 집 주인이 더도 덜도 말고 '더덜'과 같은 그런 집을 상상하고 이름을 달았다면 정말 대단한 이름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답니다. (관련글 http://blog.aladin.co.kr/oren/5940503)

페크pek0501 2012-11-06 19: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님의 댓글에 대한 답글은 오늘 올린 <싱거운 후기>로 대신하겠습니다. 쓰다 보니 길어져서요.

추신.
먼댓글을 받으니 영광스럽습니다. ㅋ
 

 

1. 종교를 배우다

 

가이 해리슨 저, <사람들이 신을 믿는 50가지 이유>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타 종교의 경전을 읽어보지도 않고 자기들의 신앙 체제가 다른 것들보다 월등하다고 믿는 것은 마치 다른 팀과 한 번도 경기를 해 보지 않은 축구팀이 자기들이 대회의 우승자라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그리고 신에 대한 예배가 넘쳐나는 가장 종교적인 국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불안하고 폭력적이고 가난하다는 것.

 

 

다른 팀과 경기를 해 보지 않고는 자신의 축구팀의 실력을 알 수 없듯이, 종교 역시 타 종교에 대해 공부해 보지 않고는 자신의 종교가 월등하다는 것을 알 수 없다는 지적이다. 또 가장 종교적인 국가들이 사랑과 평화가 있는, 살기 좋은 국가가 되어야 할 텐데, 그 반대로 가장 불안하고 폭력적이고 가난한 국가라는 지적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몇몇 종교만을 다루지 않는다. 긴 역사 속에서 모든 신은 동등하다며,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한다.

 

 

“물론 세상의 종교들은 좋은 점도 많이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종교의 어두운 점이 지나치게 간과되는 것을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어린이 교육이나 새로운 치료법의 개발, 여성의 안전과 평등, 그리고 과학의 발전과 같은 것들을 위협하고, 세계 평화에 악영향을 미친다면 그 주장은 반드시 도전받아야만 한다.”(<사람들이 신을 믿는 50가지 이유>)

 

 

 

이 책은, 저자가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에 대한 일반적인 답변 50가지를 모아서 그것들을 조목조목 따지고 분석하면서, 그 이유들이란 게 믿을 게 못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책이다. 그 50가지 이유 중엔 신이 나를 보호해 주기 때문에, 심판이 두렵기 때문에, 라는 이유도 있다.

 

 

이것을 읽으니 다음의 글이 생각났다.

 

 

“우리는 자식과 부모를 사랑하고, 배우자들에게 충실하며, 친구들에게 진실하고, 공동체에 이바지하며, 우리가 속한 집단에 헌신한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까닭은 사전에 그것들이 어떤 가치와 장점이 있는지 따져보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 아니라, 직감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가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지를 논리적으로 따져보고 고민하는 사람은 위의 인간관계에 ‘적응하지 못했음’을 드러낼 뿐이다. (…) 따라서 신성한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아주 중요하다.”(존 브록만 엮음, <위험한 생각들>)

 

 

우리가 속한 집단(종교 집단도 가능함)에 헌신하는 것은 그것이 올바른지를 논리적으로 따져 봐서가 아니라 직감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가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란다. 이것을 우리는 ‘실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종교’하면 떠오르는 건 ‘과학’이다. 그 둘의 세계는 서로 반대의 편에 있으므로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신념은 종교적인 사람들이 합리적인 설명에 실패할 때, 그러한 명제를 믿기 위하여 서로에게 주는 면허증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과 종교의 차이는, 새로운 증거와 주장을 냉정하게 고찰하려는 의지가 있는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가에서 생긴다. 그 구별은 명백하고, 필연적이지만, 아직도 곳곳에서, 심지어 상아탑에서마저 묵살되고 있다.”(<위험한 생각들>)

 

 

 

 

 

 

 

내게 확고한 종교관을 갖게 해 준 책은 A. J. 크로닌 저, <천국의 열쇠>이다. 이것은 프랜치스 치셤 신부의 생애를 보여 주는 이야기로, 회고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쪽 문을 택했듯이 새로 오시는 선교사들은 또 다른 쪽의 문을 택했다는 것이 다르지요. (…)”(<천국의 열쇠>)

 

 

치셤 신부는 자신의 종교만을 최고의 위치에 놓지 않고 어느 종교에도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있다고 말한다.

 

 

“(…) 어떤 것인가 하면 확고한 믿음만 가지면 결코 지옥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그렇지요. 불교도든 회교도든, 또한 도교를 믿든……선교사를 죽인 후 그 고기를 먹어 버렸다는 식인종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부끄럽지 않게끔 자신의 삶에 성실한 자세를 갖는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지요. 최후의 심판 때에 결코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노라 대답하는 사람들에게도 진노의 채찍을 내리지는 않으실 겁니다. 아마 ‘여기를 보아라, 네가 그토록 부정하려 했던 나와 천국이 있지 않느냐. 자, 들어오너라’하고 말씀하시겠지요.”((<천국의 열쇠>)

 

 

이 글을 읽고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런 내용이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책을 참 오래 전에 읽었는데도(2000년에 읽었다) 지금도 이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건 그만큼 내 마음속에 깊게 각인된 소설이어서다. 주인공 치셤 신부를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가질 수 있었던, 유익한 독서 경험이었다.

 

 

 

 

 

2. 기도의 효과

 

일 년에 몇 번쯤 절에 간다. 지난 5월의 석가탄신일에도 어머니와 함께 절에 갔다 왔다. 절에서 기도할 땐 나의 가족은 물론 친정 식구들과 시집 식구들이 건강하고 무탈하길 비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기도는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기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만약 그들 중 누구라도 큰 병에 걸린다면 내가 편히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문병을 가야 하고, 약값에 보태 쓰라며 얼마의 돈을 건네야 하고, 안부를 묻는 전화를 자주 해야 하고, 환자로 인한 걱정을 달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내가 아프지 말고 무탈하게 살아야 한다. 한마디로 ‘서로의 삶에 폐를 끼치기 없기’가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이기심으로 기도를 한다고 해도 기도는 아름다운 것이다. 기도란 인간의 가장 겸손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가 아니라 ‘운명아 도와 줘, 나 여기 있어’와 같이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가장 낮은 마음으로 엎드려 비는 것이니까. 나의 경우에 기도의 제일의 효과는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기도한 내용에 대해 최선을 다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절에 갔다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3. 종교와의 거리

 

종교에 너무 깊게 빠진 광신도들이 인생을 망치게 된 신문 기사를 접할 때가 있다. 종교에 대한 믿음도 지나치면 독이 되나 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할지라도 나쁜 쪽으로 왜곡하여 읽는 독자에겐 그 책이 독이 될 수 있듯이,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나는 종교인들 중에서 타 종교를 존중할 줄 아는 종교인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은 광신도가 되지 않는다.

 

 

종교에 대한 믿음은, 공자가 말한 것과 같이 “(정도가)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과유불급:過猶不及)”고 생각한다. 좋은 종교라고 할지라도 종교에 지나치게 빠진 사람에겐 이로운 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종교가 이로운 종교인가, 해로운 종교인가 하는 것은 그 종교를 믿는 신도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말이 된다. 거리, 여기서 중요한 건 ‘거리’이다. 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필요로 하지 않던가.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고, 부부 간에도 그렇고, 연인 간에도 그렇듯이, 종교와 신도와의 관계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것이다.

 

 

생각도 습관처럼 굳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고정관념의 노예가 되고 편견의 노예가 된다. 어떤 것에 대해 머릿속에 박혀 버린 생각을 지우고 좀처럼 새로운 생각을 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이런 우리에게 때에 따라선 자신의 생각(종교에 대한 생각)을 수정할 줄 아는 열린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지성인다운 태도가 아니겠는가. 지성인에 대해 러셀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실 단지 자신의 의견을 취한다고 해서 지식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지식인이란 이러저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타당한 논거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교조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다.”(버트런드 러셀 저, <런던통신 1931 - 1935>)

 

 

‘교조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종교도 한 가지만 보지 말고 다른 종교를 비교하며 종합적으로 보는 균형 감각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4. 좋은 인생이란

 

며칠 전 <탈무드>라는 책에서 ‘인생의 비결’이란 글을 읽었다.

 

 

한 사나이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목청 높여 소리쳤다.

“여러분, 인생의 비결을 팝니다! 필요하신 분 없으십니까?”

사나이의 외침에 사람들이 인생의 비결을 사기 위해 너나없이 모여들어 순식간에 북새통을 이루었다. 사람들 틈에는 랍비도 몇 사람 끼여 있었다. 시장에 모인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사나이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디 인생의 비결을 사 가십시오. 인생을 보람 있고 참 되게 사는 비결은 바로 여러분의 혀를 주의하는 겁니다.”(<탈무드>)

 

 

좋은 인생의 비결은 혀를 주의하는 것. 이 말은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표독스레 내뱉은 한마디의 말이 그에겐 평생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 또 무심코 흘린 말도 그럴 수 있다.

 

 

어떻게 사는 게 좋은 인생인가. 종교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말로 인해 누군가를 불행에 빠뜨리지 않는 게 좋은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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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9-25 0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잘 살아가면 '좋은 삶'이에요. 혀이든 무엇이든 모두 스스로 잘 살아가느냐를 말하는 대목이에요.

종교와 과학은 갈래가 다르다 하지만, 밑바탕은 둘 모두 같아요. 믿음이 종교가 되고, 삶이 과학이 되면, 종교와 과학은 모두 권력과 독재가 되지요. 종교가 언제 어디에서 왜 생겼고, 과학이 언제부터 진보와 발전을 대변하는가 하는 뿌리를 헤아리면, 둘은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속내가 똑같은 줄 깨달을 수 있어요.

아이들은 모두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까닭이란, 어른 누구나 모두 하느님이란 뜻이에요. 다만, 어른이 되며 스스로 사회 제도권에 스스로 톱니바퀴 되어 들어가니, 어른은 스스로 하느님인 줄 잊거나 내버린 셈이에요.

모든 사람이 서로 같은 하느님인 줄 아는 일이 '믿음'이고, 이 믿음을 비틀어서 '지옥과 구원과 기도'를 만든 제도권 권력이 종교예요. 종교인이 스스로를 깨닫는다면, 이이는 이녁 종교조차 얼마나 허울이고 껍데기인 줄 알아차릴 수 있어요. 곧, 천주교이든 개신교이든 불교이든 겉옷을 벗고 알맹이를 찾아서 홀가분해지겠지요.

...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니, 잘 헤아리며 느껴 보셔요 ...

페크pek0501 2012-09-25 13:14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잘 헤아리며 느껴 볼게요. ^^
이렇게 길게 쓰는 것, 쉽지 않은 일일 텐데요...
제가 댓글을 써 보니까 , 어려운 걸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댓글을 소중히 받아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프레이야 2012-09-25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좋은인생관에 끄덕끄덕하며 혀단속, 생각단속,마음단속 잘하며 살아겠구나 새삼 느껴요. 러셀의 인용구 마지막 문장도 새깁니다. 믿되, 내믿음을 의심하라, 이 정도 뜻이 될까요. 기도의 본성에 대한 말씀에도 공감해요. 낮게 엎드린 절박한 마음이 기도겠지요. 진정한 기도를 잊고 산 것 같아요. 오늘밤엔 잠시라도 나만의 기도를 하고 그런 마음으로 잠을 청해야겠어요.^^

페크pek0501 2012-09-26 15:00   좋아요 0 | URL
예 맞아요. 백 퍼센트의 확신은 금물이라는 것이죠. 이런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자만하지 않게 살 수 있을 듯해요.

기도, 저도 잊고 살아요. 다급할 때만 기도를 하는 경향이 있어요.ㅋ 절에 자주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질 않네요.
절에 들어서면 우선 절 입구에서부터 기분이 좋아져요. 나무들이 많아 맑은 공기가 느껴지고 자비의 공기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제가 다니는 절이 멀어서 좀 가까운 곳을 알아 두려 하고 있어요.
반가웠어요, 프레이야 님. 추석 잘 보내세요.

oren 2012-09-26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아주 가벼운 필치로 사뿐사뿐 써내려간 글이어서 읽기가 참 좋네요. '서양종교'에 관해서라면 이미 그 핵심적 존립기반인 '신의 존재증명'에 관한 수많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믿음 때문에 앞으로도 오랫동안 인류의 생각을 '계속 지배'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페크님께서 인용해 주신 러셀의 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타당한 논거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교조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페크pek0501 2012-09-26 15:01   좋아요 0 | URL

“'종교'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아주 가벼운 필치로 사뿐사뿐 써내려간 글이어서 ...”
- 이런 호평을 해 주시다니요. 고맙습니다. 그냥 아는 데까지 쓴 것이라, 더 많이 알았다면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는 건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글은 딱 자신이 아는 만큼만 쓰는 것 같아서 공부가 많이 필요하단 생각이 듭니다.

oren 2012-09-26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읽었던 쇼펜하우어의 몇몇 책에서도 '종교'에 관한 '인상적인' 구절들을 참 많이 발견했는데 몇 가지만 덧붙여 보고 싶네요.

* * *

"불교 체계는 영원하고 창조되지 않은, 모든 시간 이전에 있었고 모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창조한 유일한 신적 존재를 알지 못한다. 이런 이념은 불교에 전혀 생소하며 불교 서적에는 이에 대한 최소한의 흔적도 없다."(238쪽)

"중국에서는 마호메트 교도도 기독교도도 신성의 이론적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중국어 낱말도 찾지 못했다. ······ 물질로부터 독립적이고 물질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으로서 신, 영혼, 정신이라는 단어들은 중국어에는 전혀 없다. ······ 이런 사유 과정은 언어 자체와 매우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창세기의 첫 구절을 광범위하게 고쳐 쓰지 않는다면 실제로 중국어가 되도록 중국어로 번역할 수 없다." 바로 그래서 스톤턴 경은 1848년에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데서 신이라는 단어를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출판했다.(240쪽)

-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中에서

* * * * *

그것이 그래도 더 이전에 알려졌더라면!

말하자면 칸트가 왔고, 이미 60년보다 더 이전에 『순수이성비판』이 저술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기독교의 세기 동안 신의 현존을 위해 세워졌고, 세 개로만 가능한 증명방식(존재론적, 우주론적, 자연신학적 신 존재 증명)으로 소급되는 모든 증거들은 절대로 요구되는 것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그 결과 누구도 칸트의 주장에 대해 결정적인 반박을 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 결과로 신의 현존에 대한 증거들이 완전히 신용을 잃었고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 일은 자명한 것이어서, 그것을 증명하려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이런, 이런, 이런! 그것이 그래도 더 이전에 알려졌더라면! 그랬다면 사람들은 수 세기 동안 그 증명을 위해 애쓰지 않았을 것이고, 칸트는 그것을 이성비판의 모든 무게로 부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157쪽)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中에서

페크pek0501 2012-09-26 15:04   좋아요 0 | URL
쇼펜하우어의 '종교'에 관한 구절들을 옮겨 주시니 매우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좀 어렵군요. 으음~~ 쇼펜하우어의 저작은 세 권 읽었는데, 이런 구절은 보지 못한 것 같군요.
<쇼펜하우어 인생론>이란 책이 가장 맘에 들어 곁에 두고 애독하고 있답니다. 제게 글감을 많이 주는 책이랍니다.

추석 잘 보내시고 자주 글 올리시길 바라겠습니다. (아, 최근에 올리신 멋진 사진들 잘 보았답니다. 추천만 누르고 왔답니다. 9번째 추천은 저예요.ㅋㅋ)

노이에자이트 2012-09-26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속에서도 치셤의 신앙관 선교관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등장하잖아요.기득권을 가진 성직자뿐 아니라 인습화된 신앙에 물든 일반신자들도 그런 반응을 보일 겁니다.

페크pek0501 2012-09-27 09:47   좋아요 0 | URL
아, 님도 읽으셨군요. 저는 이 책을 (제 독서목록을 보니까) 2000년 7월에 읽었더라고요. 줄거리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고 치셤 신부의 훌륭한 말만 기억이 나요. 인품이 훌륭하다고 할까요. 그런 곳에 밑줄이 많이 그어져 있어요. 하서출판의 책으로 읽었는데 이곳 알라딘에선 책 이미지를 찾을 수가 없더군요. 오래되어서인가 봐요. 이 책에 반해 크로닌의 다른 책을 읽은 게 <성채>인데 이 책도 좋았어요. 크로닌의 전집을 사고 싶을 정도로 팬입니다.

제게 드라마 작법이란 책이 있는데, 이 책 제1장의 제목이 '드라마는 갈등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드라마뿐만 아니라 소설도 마찬가지겠죠.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작가란 갈등을 제시하고 그 갈등을 풀어 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겠죠.

반가웠어요. ㅋ

2012-10-05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7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당신은 외향적인 사람인가, 내향적인 사람인가

 

 

 

 

 

 

 

 

 

 

 

 

 

 

 

수전 케인 저, <콰이어트 Quiet>

 

 

 

오늘날 세상은 내향적인 사람보다는 외향적인 사람을 우대한다. 교육 또한 외향적인 사람으로 키워 내려는 방향으로 설정된다. 학교에서의 수업 시간에도 발표를 못하는 학생보단 발표를 잘하는 학생을 우수하다고 평가한다. 소극적인 내향형인 학생보단 적극적인 외향형의 학생을 선호하는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다. 적극적인 외향형의 사회인을 우대한다. 우리는 외향적인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셈이다. 이것은 내향적인 사람들을 위축되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위축된 내향적인 사람들을 찬양하는 책이 있다. 수전 케인 저, <콰이어트 Quiet>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내향성의 장점을 부각시켜 오히려 세상을 바꾼 건 내향적인 기질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저자 자신도 내향성을 가졌다면서, 내향성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위대한 기질을 가진 것이지를 강조한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섬세하고 감수성이 높고, 통찰력이 깊다고 한다.

 

 

 

“우리 삶은 성별이나 인종에 따라 달라지듯이 성격으로부터도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성격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내향성-외향성 스펙트럼 중에 어디쯤에 위치하는가에 달려 있다. (…) 이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친구와 짝을 선택하고, 대화를 풀어나가고, 차이를 해소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자신이 내향성의 사람이냐, 외향성의 사람이냐 하는 사실은 중요해진다.

 

 

 

“전형적인 외향인은 숙고보다는 행동을, 의심보다는 확신을 좋아하고, 조심하기보다는 위험을 무릅쓴다. 틀릴 위험이 있을 때조차 빠른 판단을 선호한다. 팀으로 일할 때 능률이 높아지고 다수의 사람들과 어울린다. (…) 수다스러운 사람들은 더 똑똑하고, 잘생기고, 재미있고, 바람직한 친구로 평가된다.” 그런 반면에, “내향성은 (그 친척뻘인 섬세함, 진지함, 수줍음과 함께) 이류로 여겨지고 있는 성격 특성으로, 실망스러운 일 아니면 병적인 것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하지만 저자는 ‘외향성 이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중대한 실수라고 지적한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 예술, 발명품 등 수많은 것들이 조용하고 이지적인 사람들에게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내향적인 사람들이 없었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중력의 법칙, 상대성의 법칙, W. B. 예이츠의 <재림>, 쇼팽의 <녹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피터 팬, 오웰의 <1984>와 <동물농장>, (…) 구글, 해리포터” 등.

 

 

 

(내가 가장 주목해서 본 것은 이 부분이다.) 이것들을 보면, 정작 세상을 바꾸는 건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향적인 사람들이 기죽어 지낼 필요가 없겠다.

 

 

 

“200명이 앉아 있는 강의실에서라면 절대로 손을 들지 않을 사람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2천 명, 아니 200만 명이 보는 블로그에 글을 쓰기도 한다.”는 건 기억해 둘 만하다.

 

 

 

 

 

2. ‘내향형’과 ‘외향형’으로 나누었던 카를 융

 

 

 

일찍이 카를 융은 인성을 ‘내향형’과 ‘외향형’으로 나눴다.

 

 

 

 

 

 

 

 

 

 

 

 

 

 

 

 

 

에드워드 암스트롱 베넷 저, <한 권으로 읽는 융>

 

 

 

이 책에 따르면 “외향성은 에너지가 주로 바깥으로 분출하며 의식의 내용이 주로 외부 대상으로 향하는 것을 가리킨다. 내향성은 의식의 내용이 개인의 내부에 있는 주체를 향한다. 정신적 에너지가 흐르는 방향이 바뀌면 그 효과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똑같은 대상을 두고서도 외향적인가 내향적인가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으며 견해도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순수한 유형이란 있을 수 없다. 예를 들어 1백 퍼센트 외향적인 속성을 지닌 사람이라든가, 아니면 내향성이 완벽하게 쇠퇴해 버린 사람 같은 경우는 없는 것이다. 다만 두 범주의 서술적인 타당성을 널리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

 

 

 

카를 융은 “모든 개인들은 외향성과 내향성의 메커니즘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중 어느 것이 상대적으로 우세한가에 따라 유형이 결정된다.”고 말했다.

 

 

 

“두 가지 일반적인 태도의 유형인 외향성과 내향성은 각기 사고 ‧ 감정 ‧ 감각 ‧ 직관의 기능을 지닌 네 가지 묶음으로 세분된다. 따라서 이것들이 조합되어 모두 여덟 가지의 요소가 생겨난다. 즉 외향적인 사고 ‧ 감정 ‧ 감각 ‧ 직관과, 내향적인 사고 ‧ 감정 ‧ 감각 ‧ 직관이 그것이다. 융의 경험에 따르면 그 네 가지 기능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사고를 통해 관찰하는 대상의 의미나 목적을 알고 그것에 대한 관념을 구성한다. 감정은 그 대상이 우리에게 지니는 가치를 알게 해 준다. 감각은 시각 ‧ 촉각 등의 감각기관으로 얻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직관은 미래의 가능성을 바라보는 시간관념을 갖게 해 준다.”

 

 

 

 

 

3. 네 가지 유형의 사람들

 

 

 

 

 

 

 

 

 

 

 

 

 

 

 

 

톰 버틀러보던 저, <내 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50>.

 

 

 

이 책은 심리학의 명저 50권을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한스) 아이젠크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인간의 유형을 명랑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냉정하거나, 침울한 네 부류로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에 내향성자와 외향성자를 구분한 카를 융에게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한스 아이젠크는 외향성과 내향성을 이렇게 구분해 놓았다.

 

 

 

외향성

- 외향성자의 뇌는 일반적인 추측과 달리 내향성자의 것보다 흥분성이 약하다.

- 내적 경향성이 약하며, 외적 자극 및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삶의 느낌을 얻는다.

- 객관적으로 사건에 접근하되, 사건에 대한 인식적 고뇌는 덜한 편이다.

- 대체로 명랑하고 낙천적이나, 침착하지 못하고 모험을 즐기며 신뢰성이 부족하다.

 

 

내향성

- 내향성자의 뇌는 쉽게 흥분하는 탓에 감정적인 상처를 잘 받으며, 내면적인 삶을 강렬히 지향한다.

- 민감한 내적 감각을 지닌 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고자 정신적 부담을 주는 지나친 사회적 상호작용을 피한다. 혹은 풍요로운 내면의 삶으로 인해 과도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

- 매사를 강렬하고 집중적으로 경험하며, 삶에 대해 깊이 고뇌하는 경향이 있다.

- 대체로 진지하고 차분하고 염세적이며, 자존감이 약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브릭스 마이어스는 오늘날처럼 외향성 위주의 사회에서는 보조 수단으로 내향성을 계발하지 못한 외향성자보다, 외향성을 계발하지 못한 내향성자들이 훨씬 힘든 삶을 살아간다고 지적했다.”

 

 

 

<내 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50>에서 ‘4가지 선호 성향’을 보니 흥미롭다.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ST_감각과 사고가 결합한 경우

SF_감각과 감정이 결합한 경우

NF_직관과 감정이 결합한 경우

NT_직관과 사고가 결합한 경우

 

 

 

네 가지 유형

 

 

1) ST(감각/사고) 유형의 사람들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기본적인 사실을 추종한다. 실용적인 성향을 지닌 이들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직종은 외과의사, 법률가, 회계사, 엔지니어 등 객관적 분석을 요하는 직종이다.

 

 

2) SF(감각/감정) 유형의 사람 역시 자신의 감각에 의존하지만, 사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결론을 내린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인간적인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분야, 예를 들어 간호나 교육, 봉사, 판매, ‘웃으면서 하는 서비스직’에 잘 맞다.

 

 

3) NF(직관/감정) 유형의 사람들도 따뜻하고 친절한 성향을 지녔지만, 눈앞의 상황이나 사실에 집중하기보다는 현실의 변화 가능성이나 미래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상황을 개선시키려는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일을 선호한다. 교사나 성직자, 광고인이나 상담가, 심리학자, 작가, 학자 등이 그것이다.

 

 

4) NT(직관/사고) 유형의 사람들도 미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들은 합리적 분석으로 결과를 이끌어낸다는 차이가 있다. 독창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분야에 주로 종사하며, 과학, 컴퓨터, 수학, 금융 등의 과학적인 직종에 잘 맞다.

 

 

 

“감각, 직관, 사고, 감정 중에 무엇을 선호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특정 가치와 요구, 습관, 특성 등을 결정한다.”

 

 

 

 

 

* 중요한 것은...

 

외향형과 내향형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우월한 것인지 가릴 수는 없다. 위의 네 가지의 유형도 마찬가지다. 그저 성향의 차이일 뿐이니까. 어떤 것이 좋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이니까.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이고, 독약도 잘 쓰면 양약이 될 수 있다. 그저 자신의 특성을 잘 살려 장점으로 만든다면 좋을 것이다.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선 이런 유형도 필요하고 저런 유형도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이 좋고 나쁨의 ‘차별’을 하지 않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이겠다. 인생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실성과 노력이 아니겠는가.

 

 

 

 

 

** 나는...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나는 내향성 쪽에 가까운 것 같다. 특히 다음의 글에 공감이 간다.

 

 

 

“민감한 내적 감각을 지닌 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고자 정신적 부담을 주는 지나친 사회적 상호작용을 피한다. 혹은 풍요로운 내면의 삶으로 인해 과도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네 가지의 유형 중에서 (직관/감정) 유형에 속하는 것 같다. 이 유형의 직업을 보니 성직자만 제외하곤 교사, 광고인, 상담가, 심리학자, 작가, 학자 등, 내가 다 좋아하는 직업들이기 때문이다.

 

 

 

“(직관/감정) 유형의 사람들도 따뜻하고 친절한 성향을 지녔지만, 눈앞의 상황이나 사실에 집중하기보다는 현실의 변화 가능성이나 미래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이들은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상황을 개선시키려는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일을 선호한다. 교사나 성직자, 광고인이나 상담가, 심리학자, 작가, 학자 등이 그것이다.”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 하는 걸 먼저 보고 나서 거기에 알맞은 직업을 보는 게 맞는 순서인데, 나는 직업을 먼저 보고 내가 (직관/감정) 유형의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본다. 어떤 직업을 좋아하는가 또는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가 하는 것은 그 자신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 하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할 테니까.

 

 

 

당신은 어느 유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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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9-06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내향성이 더 강한 것 같아요. 외향적인 면이 보강되면 좋겠다고
느낄 때가 많답니다. 반반이면 좋을텐데요.ㅎㅎ

페크pek0501 2012-09-07 14:32   좋아요 0 | URL
반반... 그거 좋겠는데요. 동의하겠습니다.ㅋ

2012-09-07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07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테레사 2012-09-1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향적인 사람의 특징들은 어떤게 있는지요? 저는 자신이 헷갈려서요. 사실 저는 단연코 내향성인게 맞는데, 또 까불고 장난도 잘 치거든요....하지만 발표 못하고, 조리있지 못하고, 나서지 못하고, 사람들 만나는게 별로 안좋아요..

페크pek0501 2012-09-13 13:07   좋아요 0 | URL
아, 반갑습니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내향적인 사람의 특징은 위의 페이퍼에 나와 있고요, 그 이상은 저도 몰라요. ㅋㅋ

제가 아는 대로 말하면, 사람마다 두 가지 성향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어떤 쪽에 더 치우치는지의 문제라는 거지요. 저의 경우에도 어떤 때는 외향성이, 어떤 땐 내향성이 나타나거든요. 예를 들면, 어떤 날은 명랑하고 어떤 날은 우울하지만 대체로 뭐뭐한 편... 이런 게 아닐까요. 외향성과 내향성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하나 예를 들면, -(이건 지금 생각난 건데...) 만약 직장인이 4일의 휴가를 얻었다고 할 때 그 4일 동안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여러 약속을 만들면 외향성의 사람이고, 그냥 4일 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고 집에서 음악이나 책으로 시간을 보내겠다고 하면 내향성의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아는 건 요기까지~~)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하여 이와 같은 질문에 정확하고 완전한 대답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공부중이랍니다.ㅋ)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마태우스 2012-09-11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내향적인 사람이어요! 성격 고치려고 무지 노력했는데 잘 안되더군요. 지금도 수줍음 무지 타고, 웬만하면 손 안들어요. 회의 때도 한마디도 안하구요. 근데 세상을 바꾸는 게 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건, 음, 제 삶을 돌아보면 잘 모르겠어요. 300명이 보는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건 맞습니다 호호

페크pek0501 2012-09-13 13:08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 님을 TV에서 봤는데, 내향성이 맞는 것 같더군요. 그 이유는 (부끄러울 실테니)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ㅋㅋ 그런데 외향성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이번 승진 건도 그렇고 한마디로 사회생활을 잘 하시는 이상적인 성향을 가지셨을 거라고 추정하는 바입니다. 호호~~

테레사 2012-09-25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펙님 고맙습니다....이렇게 상세하고 친절하시다니..근데 펙님의 예를 보니 전 확실히 내향적인 사람이네요...

페크pek0501 2012-09-25 13:24   좋아요 0 | URL
ㅋㅋ 그 예에 따르면 저도 내향적인 사람이에요.
친구들과 만나 수다 떠는 것도 좋아하지만 모처럼의 휴가는 집에서
방~콕~ 하고 싶을 것 같아요. 맛있는 거 해 먹으면서 음악 듣고 티브이
보고 책 보고 그렇게 보내고 싶을 것 같아요.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