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니 벌써 날짜가 이렇게 되었구나. 그렇다면 서재에 글을 하나 올려야지.’라고 하면서 이 글을 쓴다. 이 세상에서 느려 터진 것은 시간. 이 세상에서 쏜 화살과 같이 빠른 것은 시간. 

 

 

 

 

 

2. 글을 올리려고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글을 찾았다. 내 컴퓨터의 바탕화면에는 ‘페크의 서랍’이라는 폴더가 있다. 이 폴더 안에 서른 개가 넘는 파일이 있다. 모두 미완성의 글이다. 어떻게 완성해야 할지 몰라 쓰다가 말았던 것들이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유에스비(USB)를 넷북에 꽂으니 거기에도 수십 편의 글이 있네. 오래전에 쓴 글인데 모두 미완성의 글이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종이로 된 노트에도 이런저런 글이 있네. 역시 완성된 글은 아니고 낙서처럼 아무렇게나 쓴 글이다. 이것들을 다 삭제하려니까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서재에 올릴 만한 글은 아니다. 어떻게든 보충하고 수정하는 손질을 해서 완성하고 싶은 글이니 그냥 놔둘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내가 글을 많이도 썼구나, 하는 생각.

 

 

 

 

 

3. 창작하는 동안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고 한다. <불안의 황홀>이란 책에 이런 글이 있다.

 

 

20세기 일본 문단과 지성계의 신으로 군림한 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작가는 자신의 사상과 세계관, 정체성 등을 이해하고 그것을 작품 속에 표현하는 존재가 아니고, 작품을 창작하는 동안 비로소 자신의 사상이 무엇인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존재다.

---------- 김도언 저, <불안의 황홀>, 75쪽. ----------

 

 

그런 것 같다. 내가 글을 쓰면서 얻은 것 중 하나는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나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건 아니다. 글을 쓰면서 나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가고 있을 뿐이다. 만약 글을 쓰지 않았다면 책 좀 읽었다고 내가 꽤 똑똑한 줄 알 뻔했다. 꽤 현명한 줄 알 뻔했다. 글을 쓰면서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실수를 연발하는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한마디로 모자라. 쯔쯧.) 글을 쓰면서 배운 두 가지는 ‘관찰’과 ‘분석’이다. 나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걸 배웠다. 이 배움은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4. 여러 책을 읽다 보면 표현만 다를 뿐 뜻은 같은 글을 반복해 읽게 되는 경우가 있다. 김도언 저자와 밀란 쿤데라의 글도 그랬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작품보다 훌륭하지 않은 작가는 작품보다 훌륭한 작가보다 훌륭한 작가일 가능성이 현저히 높다.

---------- 김도언 저, <불안의 황홀>, 76쪽. ----------

 

 

다시 말해 작품이 똑똑해야지 작가만 똑똑해서는 안 된다는 것.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제 생각에는 소설가보다 위대한 것은 소설인 것 같습니다. 소설은 소설가의 편견까지도 극복하게 해 준다고 말할 수 있어요. 소설을 쓰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문제를 소설가는 소설을 쓰면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헤르만 브로흐라는,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는 “소설이 열어 주는 세계관”이라고 표현했지요.

---------- 박성창 외 저, <밀란 쿤데라 읽기>, 92쪽. ----------

 

 

 

 

 

 

 

 

 

 

 

 

 

 

 

 

 

 

 

작품보다 작가가 더 똑똑하다면 ‘창작’을 하지 말고 ‘평론’을 써야 할 것이다.

 

 

나의 경우로 말하면 ‘내 글’보다 ‘나 자신’이 (속되게 표현하면) 더 후지다. 아마 내 글을 평가한 사람들의 점수가 나를 평가한 사람들의 점수보다 나을 것이다. 맞는 말인가?

 

 

 

 

 

5.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예전에 문학을 배우는 강의 시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단편 소설을 써 온 글쓴이에게 누군가가 소설의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글쓴이가 변명처럼 설명을 했던 것. 이때 글쓴이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할 것.“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말로써 독자를 이해시키지 말고 작품으로 이해시켜라.“

 

 

 

 

 

6. 유명한 시의 구절을 변형한 말을 읽었다. 소설 속에서 캐머런 씨가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

 

 

“여러분이 배워야 하는 것 가운데에는 지겨운 것도 많습니다.” 그는 관대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마무리했다. “아마 그런 것들은 최종 시험에 통과하자마자 잊어버릴 겁니다. 하지만 해부학에서는 전혀 배우지 않는 것보다는 배우고 나서 잊어버리는 게 낫습니다.

---------- 서머싯 몸 저, <인간의 굴레에서 1>, 437쪽. ----------

 

 

해부학에서는 전혀 배우지 않는 것보다는 배우고 나서 잊어버리는 게 낫습니다.

 

 

이것은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 <인 메모리엄>에 있는 다음의 구절을 변형해 말한 것이라고 한다. 

 

 

...................................

사랑을 전혀 해보지 못하는 것보다

실패를 하더라도 해보는 것이 낫다.

...................................

 

 

책을 읽고 나면 책의 내용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한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것보다는 읽고 나서 잊어버리는 게 낫다고. 그래서 나의 책 읽기는 계속된다.

 

 

 

 

 

 

 

 

 

 

 

 

 

 

 

 

 

 

 

 

 

 

 

7. 실패한 일에도 유익함은 있다. 소설 속 필립은 이 년 동안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지만 자신에게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화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진로를 바꾼다. 그렇다면 그가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해 이 년의 시간을 보낸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일까?

 

 

“자네가 파리에서 이 년을 낭비한 게 안타깝게 여겨지는군.”

헤이워드가 말했다.

“낭비라고요? 저 아이의 움직임을 좀 보세요. 그리고 나무 새로 비쳐든 햇빛이 땅바닥에 만드는 무늬를 보세요. 저 하늘을 좀 보세요. 글쎄, 제가 파리에 가지 않았더라면 저 하늘을 보지 못했을 거예요.”

----------  서머싯 몸 저, <인간의 굴레에서 1>, 517~518쪽. ----------

 

 

필립은 만약 자기가 그림을 공부하지 않아서 예술을 몰랐더라면 ‘나무 새로 비쳐든 햇빛이 땅바닥에 만드는 무늬’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고 ‘하늘’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풍경을 보고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음악을 듣고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그러므로 필립이 실패한 일에도 유익한 점을 찾을 수 있는 것.

 

 

실패가 실패이기만 하지 않다는 건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실패를 한 번도 겪지 않고 살 수 없는 우리에게 세상이 주는 위로다.

 

 

 

 

 

8. 서머싯 몸 저, <인생의 베일>의 리뷰를 반 정도 썼다. ‘우리는 왜 가짜에 빠져드는가’에 초점을 두고 쓰려고 한다. 어째서 가짜는 매력적인지 모르겠다. 버섯 중에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독버섯이고 아름답게 보이는 풍경 그림은 가짜 예술품인 경우가 많듯이 사람 또한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매력적으로 보인다. 여기에 인생의 함정이 있다. 이것을 알면서도 또 가짜에 속는 나. (앞으로도 속겠지.)

 

 

 

 

 

 

 

 

 

 

 

 

 

 

 

 

 

 

 

 

 

9. 요즘 신형철 저, <느낌의 공동체>를 읽고 있다. 2006년~2009년에 쓴 산문이라고 한다. 저자가 1976년생이니 39세인데 무슨 글을 그리도 잘 쓰는지 감탄! 감탄! (이건 다음에 소개할 예정.)

 

 

 

 

 

 

 

 

 

 

 

 

 

 

 

 

 

 

 

 

 

10. 세상 전체가 우울한 날들이었다. 그런데 날씨는 5월의 푸른 나무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도록 화창한 날들이었다.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 같은 부조화. 

 

 

많은 부조화 속에 우리는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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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5-10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동생이 놋북에 새 프로그램을 깔아주는 바람에 그동안 썼던 파일들을 폴더에 담아 잠시 usb에 보관했다 다시 꺼내봤더니 그 사이 몇 개가 날아갔더군요.
분명히 폴더에 다 넣다고 생각했는데, 일기도 있고 모아 놓을 원고도 있는데 못 찾았어요.
좀 아쉽기는 했지만 속이 상할 정도는 아니더군요.
일기는 일부러 태워버리는 사람도 있던데 어차피 다시 볼 것도 아니다 싶고.
원고는 30장쯤 썼던 건데 마침 일부는 누구한테 보냈던 걸 다시 살려서 쓰기로 했어요. 어차피 다시 써야하거든요.
기계라는 게 다 그렇죠. 날려 버리면 흔적도 없는 것.

언니는 참 책 취향이 저랑 비슷한 것 같아요.
<불안의 황홀>이라. 읽고 싶네요.
<느낌의 공동체>는 사 놓고 몇 년째 못 읽고 있어요. 조만간 읽어야겠어요.^^

페크pek0501 2014-05-10 14:32   좋아요 0 | URL
저는 예전에 엠피쓰리를 오래된 노트북에 꽂았다가 음악이 다 날아가 버린 적이 있어요. 호환성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안전하게 하려면 컴퓨터와 유에스비, 두 군데 보관이 좋죠.

<느낌의 공동체>보다 <몰락의 에티카>가 더 좋다고 글쟁이 친구가 추천하던데 그 책이 두꺼워서 우선 느낌~부터 읽으려고 샀어요. 이게 좋으면 그땐 두꺼운 책도 읽을 만할 것 같아서요.
<불안의 황홀>은 저자가 일간지에 연재하는 글을 인터넷으로 보고 반해서 구입했던 것이에요. 내용보다는 문장을(표현기법을) 감상하는 재미로 읽어요. 문학일기라는 부제가 달린 책이에요.

책 속으로 들어가면 잡념이 사라져서 좋아요. 평화롭죠. 책은 마음의 약인 셈...^^

2014-05-09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0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0 1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13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지금 하나만 말하라면 ‘나로 하여금 할 말이 많게 만드는 책’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내게 글감을 많이 주는 책. (또는) 인용할 문장이 많은 책. 다 같은 말이다.

 

 

내가 쓴 글 중에서 일곱 편의 글에 인용을 한 작품이 <달과 6펜스>였고, 여덟 편의 글에 인용을 한 작품이 <인간의 굴레에서>였으니 서머싯 몸은 내게 좋은 책을 쓴 작가임에 틀림없다. 나는 서머싯 몸의 광팬이라고 할 만하다.

 

 

이 페이퍼에서는 눈여겨볼 만하면서 내 글에 인용한 적이 없는 문장들을 ‘인간의 굴레에서 1’에서 뽑아 옮겼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내 생각이나 느낌을 곁들였다.

 

 

 

 

 

1. 표현할 수 없는 게 있다 : 길을 걷다가 좋은 풍경을 보고 반해 버려서 마음이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런데 이 느낌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걸 느낀다. 이럴 때 작가라면 표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 주인공도 나처럼 이런 느낌을 가진 듯해서 반가웠다.

 

 

필립은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대성당 건물을 바라볼 때는 가슴을 설레게 하는 어떤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 창문 밖으로 손질이 잘된 오래된 잔디밭과 잎이 무성한 멋진 나무들이 보였다. 그걸 내다보고 있노라면, 아픔인지 기쁨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야릇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았다. 심미적 감정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던 것이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113쪽. ----------

 

 

 

 

 

 

2. 십자가로 생각하라 : 교장이 필립에게 불구의 다리를 십자가로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것(불구라는 것)을 반항심으로 받아들이면 수치로만 여겨질 뿐이다. 하지만 그것을 하느님이 네게 짊어지게 한 십자가로 생각해 보아라. 네 어깨가 특별히 강하여 사랑의 표시로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고 생각해 보란 말이다. 그러면 그게 불행이 아니라 행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117쪽. ----------

 

 

이 글을 보니 다음의 글이 생각났다.

 

 

...................................

“종식아,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단다. 저 들판의 작은 들풀과 꽃, 하늘에 맴도는 하루살이 벌레도 다 이 세상에 나온 의미가 있단다. 종식이의 장애는 종식이의 십자가야.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거란다. 이왕 지는 십자가 기쁜 마음으로 지겠니, 슬픈 마음으로 지겠니?”

- 고정욱 저, <아주 특별한 우리 형>에서.

...................................

 

 

(이 글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어느 책에서 봤더라, 하면서 여러 책을 뒤졌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특별한 우리 형>에서 찾아냈다. 기뻤다.)

 

 

 

 

 

 

3. 잘 아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다 : <달과 6펜스>에 정작 자신은 그림을 잘 그릴 줄 모르면서 그림에 대한 안목만큼은 뛰어난 사람이 나온다. 이 소설에서도 그림을 잘 그릴 줄 모르면서 남에게 그리는 방법을 잘 가르쳐 주는 사람이 나온다. 그의 이름은 프라이스이다.

 

 

프라이스 양은 예측불가능한 사람이었다. 오늘은 사이좋게 헤어졌다 하더라도 다음에 언제 또 토라져서 함부로 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필립은 그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자기는 정작 잘 그리지 못하면서도 뭘 가르쳐야 할지는 모르는 게 없었다. 그녀의 끊임없는 조언 덕분에 필립의 솜씨는 상당히 향상되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337쪽. ----------

 

 

두 작품에서 똑같은 특성을 가진 인물이 중복되어 그려지는 것으로 보아, 잘 아는 것과 (실제로) 잘하는 것은 다르다는 걸 작가가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인물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나를 본 듯해서다. 내가 예전에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아는 것은 많은데 아는 만큼 글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이다. 아마 그때 나와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이 이 글을 본다면 웃으리라.

 

 

 

 

 

 

4.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크론쇼가 묻고 필립이 대답한다.

 

 

“ (…) 그런데 자넨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지라 필립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요컨대, 남이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너도 남에게 하라, 는 것인가?”

“그런 셈이죠.”

---------- <인간의 굴레에서 1>, 348~349쪽. ----------

 

 

“글쎄, 잘 모르겠지만,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크론쇼의 물음에 필립이 잠시 생각하고 나서 대답했다는데 이렇게 완벽한 대답을 할 수가 있을까? 이럴 땐 이렇게 써야 할 것 같다.

 

 

...................................

필립은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러나 집에 가면서 그 물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니 이런 대답을 하는 게 더 좋았겠다 싶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 이렇게 대답했어야 했다고 필립은 아쉬워했다.

...................................

 

 

이래야 리얼리티가 있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누군가가 어떤 물음을 던졌을 때 완벽하게 대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므로. 그리고 물음이 잘못된 것 같다. (번역의 문제인가?)

 

 

“그런데 자넨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가 아니라 “그런데 자넨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로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런 답이 나오기 위해서는.

 

 

 

 

 

 

5. 자신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환상 : 크론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가 자유롭다는 환상을 너무 철썩같이 믿고 있어. 그래서 나도 그걸 쉽게 받아들이고 마네. 나는 내가 자유로운 행위자인 것처럼 행동하지. 하지만 어떤 행위가 이루어질 때는 우주의 모든 힘들이 저 영겁에서 함께 작용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분명해.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지. 그건 필연이니까. 선한 행위였다 해도 난 공적을 주장할 수 없고, 나쁜 행위였다 해도 난 비난받을 수 없네.”

---------- <인간의 굴레에서 1>, 351쪽. ----------

 

 

이 글과 비슷한 글을 어디서 본 듯한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해 냈다. 에리히 프롬의 저작에서 봤다는 것을.

 

 

...................................

우리 결정의 대부분은 실제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암시되는 어떤 것이다. 결정을 내린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을 수는 있어도, 실제로 인간의 결정 행위는 인간이 두려운 고립감이나 생명, 자유, 안락함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위협에 내몰렸을 때 타인의 기대에 보조를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 에리히 프롬 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

 

 

두 개의 글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하기로 결정할 땐 자신의 의지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스마트폰을 구입하는 일조차 여러 가지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단지 그것이 필요해서라기보다 남들이 다 사니까 나도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 고립되기 싫다는 생각, 최신의 기술을 자랑하며 유혹하는 광고 등 여러 가지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구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자신의 의지로만 스마트폰을 구입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런데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1941년에, <인간의 굴레에서>가 1915년에 발표된 것이니 서머싯 몸이 먼저 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사랑을 사랑하다 : 필립은 사랑이라는 것을 사랑한다.

 

 

그는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막 잠에서 깬 어린 짐승처럼 팔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잔물결을 일으키며 흐르는 강물, 산들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포플러, 새파란 하늘, 이 모든 것을 그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이라는 것을 사랑하고 있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378쪽.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보면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7. 돈은 제6감과 같다 : 돈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무슈 프와네가 필립에게 말한다.

 

 

돈은 제6감이라는 것.

 

 

“세상에 가장 굴욕스러운 일은 말이지, 먹고 사는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이야. 난 돈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보면 경멸감밖에 들지 않네. 그런 자들은 위선자가 아니면 바보야. 돈이란 제 육감과 같아. 그게 없이는 다른 오감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지. 적정한 수입이 없으면 인생의 가능성 가운데 절반은 막혀버리네.

---------- <인간의 굴레에서 1>, 414쪽. ----------

 

 

가난은 사람을 천하게 만든다는 것.

 

 

예술가에게 가난이 제일 좋은 채찍이 된다는 말들을 하잖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가난의 쓰라림을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 그래.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천하게 만드는지 몰라. 사람을 끝없이 비굴하게 만드네. 사람의 날개를 꺾어버리고, 암처럼 사람의 영혼을 좀먹어 들어가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 방해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고, 너그럽고 솔직할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정도는 있어야지. 나는 말이야, 글을 쓰건 그림을 그리건 예술하는 사람이 먹고 사는 일을 자기 예술에만 의존하다면 그런 사람을 정말 가련하게 보네.”

---------- <인간의 굴레에서 1>, 414~415쪽. ----------

 

 

이 글은 예나 지금이나 맞는 말 같아서 긴 글을 그대로 옮겼다.

 

 

가난해서 품위를 잃게 되고, 가난해서 방해받게 되고, 가난해서 속 좁아지고, 가난해서 거짓말을 하게 되고, 가난해서 누군가에게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다면 불행한 일이다. 돈이 필요한 이유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떤 것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제시해 주는 이런 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8. 화가 나면 상대의 약점을 이용한다 : 누구나 화가 나면 상대를 자신보다 더 화나게 만들고 싶어진다. 그래서 상대의 약점을 언급하는 치사한 방법을 쓰기도 한다.

 

 

백부는 필립에게 말한다.

 

 

“네 돈은 이제 나와는 상관없다. 너도 이제 독립된 인간이고.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다. 네게 한없이 쓸 만한 돈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불행한 일이지만 네 신체가 불편하여 돈 벌기가 남만큼 쉽지가 않다는 것 말이다.”

필립이 이제 알게 된 것은, 누구든 자기에게 화가 나면 맨 먼저 그의 불구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는 점이었다. 거의 누구도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사실로써 필립은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425쪽. ----------

 

 

이런 글은 경험한 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만약 경험이 없다면 피상적 관찰이 아닌 세심한 관찰을 한 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9. 자신의 약점을 자신이 이용할 때도 있다 : 필립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자신의 약점을 이용한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본능적인 느낌으로, 무슨 말을 하면 그녀의 마음이 움직일지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하자니 진절머리가 났다.

“가혹해. 정말이지 못 견디겠어. 하기야 당신은 절름발이의 심정을 모르겠지. 그래, 내가 싫을 거야. 나도 기대 안해.”

“필립, 그건 아녜요.” 그녀가 얼른 대답했다. 목소리에 갑자기 연민이 어려 있다. “그게 아니라는 건 당신도 알잖아요.”

이제 필립은 연극을 하고 있는 셈이다. (…)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잖아요, 필립. 어떨 때 당신이 좀 피곤하게 굴긴 하지만. 이제 마음 풀어요.”

그녀가 그에게 입술을 갖다대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맞춘다.

“어때, 이젠 기분좋아요?” 그녀가 물었다.

“그래, 좋아 죽겠어.”

---------- <인간의 굴레에서 1>, 494쪽. ----------

 

 

약점은 때론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강점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극과 극은 하나의 길로 통한다.

 

 

 

 

 

 

10. 모퉁이 저편에 경찰이 있다고 생각하라 : 인생의 좌우명으로 이건 어떨까?

 

 

모퉁이 저편에 경찰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되,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르라.

---------- <인간의 굴레에서 1>, 429쪽. ----------

 

 

이런 생각으로 산다면 신문에서 보도하는 사고나 사건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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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4-14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3,7,8,9,10 표제에 공감합니다. 특히 7,8 번에요. 그리고 10번 마지막 문장은 「모퉁이 저편에 사신(死神)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되,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르라.」로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페크님 하면 서머싯 몸이 떠올라요. 자동이예요. ㅎㅎ

페크pek0501 2014-04-15 21:23   좋아요 0 | URL
ㅋㅋ 자동입니까? 그럼 영광이지요.

공감 가는 글이 많고 여러 번 읽고 싶은 글이 많아 밑줄을 많이 그었답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

2014-04-14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15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4-04-1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참 좋네요. 완독 축하드려요. 인용하신 대목 대목 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에리히 프롬의 책도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겠습니다.

페크pek0501 2014-04-15 21:32   좋아요 0 | URL
예, 서머싯 몸의 글이 참 좋지 않습니까?
제가 쓴 글 중에도 누군가가 이렇게 옮겨 소개하고 싶을 만큼 좋은 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큰 욕심인가요?ㅋ

에리히 프롬은 마르크스와 프로이드를 정신적인 두 기둥으로 갖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두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거겠죠.
제가 언급한 프롬의 책은 의외로 인용문이 많아서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잘 지내시죠?
 

 

단상(84)에 이어서 쓰는 글이다. 이번에도 역시 소설 속 문장들을 옮겨 적고 그것과 관련하여 나의 단상을 풀어놓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 글의 제목은 ‘선행도 쾌락 때문인가?’로 정했다.

 

 

 

 

제목 : 선행도 쾌락 때문인가?

 

 

필립과 크론쇼는 얘기를 나눈다. 논쟁에 가까웠다.

 

 

 

“제가 보기엔 그건 만사를 아주 이기적으로 보는 방식입니다.” 하고 필립이 말했다.

“아니, 그럼, 자넨 인간이 이기적이 아닌 동기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건 불가능해. 자네도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거야. 세상을 살 만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선 필요한 일은 인간의 불가피한 이기성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 사람은 인생에서 단 한 가지를 추구하지. 그건 자기 자신의 쾌락이야.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필립은 소리쳤다.

크론쇼는 낄낄 웃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353쪽. ----------

 

 

 

크론쇼는 말을 이어 나갔다.

 

 

 

“놀란 망아지같이 왜 그러나. 자네 기독교가 싫어하는 말을 내가 사용해서? (…) 내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자넨 놀라지 않았을 거야. 그 말은 덜 충격적이니까. 그리고 자네 마음은 에피큐로스의 돼지우리에서 그의 정원으로 이동하게 되니까. 하지만 난 쾌락이란 말을 사용하겠네. 왜냐하면 바로 그게 사람의 목표거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는지는 모르겠어. 자네가 말하는 그 착한 일들을 실천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쾌락 때문이야.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지. 그것이 남들에게도 이로우면 선한 일로 여겨지는 거야. 은혜를 베푸는 데 쾌락을 느끼는 사람은 자비를 베풀지. 사회에 봉사하는 데 쾌락을 느끼는 사람은 공중정신을 가지게 되고. 하지만 자네가 거지에게 동냥을 하면 그건 자네 자신의 괘락을 위한 거야. 내가 위스키 소다를 또 한 잔 마시는 게 내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나 같아. 난 자네보다는 솔직한 편이라 내 자신의 쾌락을 위해 나 자신을 칭찬하거나 자네의 감탄을 요구하지 않네.”

---------- <인간의 굴레에서 1>, 353~354쪽. ----------

 

 

 

필립이 질문했고 크론쇼가 대답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보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없네. 자네 질문 방식이 틀렸어. 자네가 말하려는 건, 당장의 쾌락보다 당장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겠지. 질문 방식도 그렇지만 문제 제기 자체도 어리석네. 사람들이 당장의 쾌락보다 당장의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건 분명해. 하지만 그건 미래의 더 큰 쾌락을 위해서이지. 때로 쾌락은 환영과 같아. 하지만 계산착오가 있다고 해서 법칙을 부정할 수야 없지 않은가. 자넨 어리벙벙한 모양인데 그건 자네가 쾌락을 감각의 산물이라고만 생각하니까 그런 거야. 하지만 젊은 친구,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그게 좋아 그렇게 한다네. 그건 양배추 절임을 먹는 사람이 그게 좋아 먹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게 창조의 법칙이야. 사람이 혹 쾌락보다 고통을 더 좋아할 수 있다면 인류는 진작 멸망했을 거야.”

---------- <인간의 굴레에서 1>, 354~355쪽. ----------

 

 

 

나는 이 글이 흥미로워 여러 번 읽었다. 크론쇼가 필립에게 해 주는 말을 작가가 독자에게 해 주는 말로 읽었다. 물론 작가의 생각이 크론쇼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작가가 독자에게 인간에 대해 크론쇼와 같은 시각에서 볼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으로 보는 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크론쇼가 말한 것의 핵심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것과 ‘인간이 선행을 베푸는 것도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이다.’라는 것. 

 

 

이 두 가지는 다른 책에서도 읽은 적이 있어서 작가들의 생각이란 ‘거기서 거기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에 동의할 수 없는 독자도 있으리라.

 

 

이 두 가지를 합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인간은 이기적이어서 선행을 베풀 때에도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여 예를 들어 본다.

 

 

(1) 예전에 내가 살던 곳의 이웃 사람한테서 들었다. 아이를 가르치는 미술 선생과 다투게 된 일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는 그의 딸(초등학생)을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해 주기 위해 집을 방문하는 미술 선생에게 점심을 몇 번 대접한 적이 있다고 한다. 수업 시간이 그 집의 점심시간 즈음이라서 그리 된 모양이다. 미술 선생은 매번 밥 생각이 없다며 몇 번 사양하다가 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선생이 미술 수업료를 만 원을 올려야겠다는 말을 하더란다. 그래서 그가 웃으면서 좋게, 아이가 미술을 배운 지가 오래된 단골손님인데 만 원 인상은 많다면서 오천 원만 인상하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단다. 그러자 미술 선생은 그럴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더란다. 결국 옥신각신하며 다투게 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는데 그들의 대화가 이런 식이었다.

 

 

이웃 사람 :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은 적도 많은데 오천 원은 빼 줄 수 있잖아요. 오천 원만 인상해 드릴게요.

미술 선생 : 제가 밥 먹고 싶어서 먹은 줄 아세요? 어떤 날은 배부른데도 억지로 먹었다고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세요?

이웃 사람 : (어이없음.)

 

 

나는 이 말을 듣고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싶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일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호의를 베풀 때조차도 사실은 그 상대가 싫으면서도 참고 호의를 받아 주는 경우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2)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다. 어느 모임이 끝나고 나서 자동차가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자동차로 집까지 바래다 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 모임이 있을 적마다 같은 방향이라는 이유로 그 둘은 함께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다툼이 생겼다. 그들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오갔다.

 

 

A : 오늘은 제 차를 타고 가지 않겠다고요?

B : 예, 오늘은 혼자 가고 싶어요.

A : 저 혼자 가기 심심한데 같이 가면 안 될까요?

B : 왜 제가 늘 당신 때문에 같이 가야 하죠? 저에게도 맘대로 하고 싶은 자유라는 게 있어요.

A :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가 있나요? 섭섭해지네요.

B : 저더러 차를 얻어 탈 때마다 황송해하란 말인가요?

A : 그런 말은 아니지만... 고맙지 않나요?

B : 뭐가 고맙다는 말인가요? 그동안 당신의 만족감을 위해서 그만큼 타 줬으면 됐죠.

 

 

이건 내가 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을 재구성하여 써 본 것이다. 실제로 B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식사비를 내고 싶은 그의 과시욕을 위해 밥을 먹어 줬어요. 얻어먹기 싫은 적도 있었다고요. 꼭 내가 고마워해야 되나요?”

 

 

이것을 크론쇼의 시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되겠다.

 

 

“당신이 내 식사비까지 지불한 것은 당신의 쾌락 때문이다. 당신이 하고 싶어서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고마워할 이유가 없다.”

 

 

 

(3) 이곳 서재에 적용시켜 또 하나 예를 들어 본다.

 

 

A : 저는 님의 서재에 댓글을 많이 썼어요. 그런데 왜 님은 저의 서재에 댓글을 한 번도 쓰지 않는 거죠?

B : 솔직히 말하면 저는 님이 제 서재에 댓글을 쓰는 게 싫었어요. 늘 호의적인 댓글이 아니었거든요. 어떤 날은 기분이 나쁜 댓글이었는데 참았다고요.

A : 뭐라고요?

B : 기분 나쁜 댓글일 때가 있었지만 님이 기분 상할까 봐 내색하지 않고 참았다고요. 만약 제가 님에게 “앞으로는 저의 서재에 댓글을 달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하면 님이 기분 좋겠어요?

 

 

B의 생각을 크론쇼의 시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되겠다.

 

 

“당신이 내 서재에 댓글을 단 것은 당신의 쾌락 때문이다. 당신이 하고 싶어서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고마워할 이유가 없다.”

 

 

(물론 내 얘기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여러분이 댓글을 달지 않으면 삐질지 모르는 사람이다. ㅋㅋ)

 

 

 

내가 어느 페이퍼에서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독자인 나의 고정관념을 비웃으며 나로 하여금 헷갈리게 만드는 글을 좋아한다.’라고.

 

 

나의 고정관념을 비웃는 글, 그리고 나를 헷갈리게 만드는 글.

 

 

바로 크론쇼의 말이 어떤 독자에겐 고정관념을 비웃는 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헷갈리게 만드는 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며 소개해 봤다.

 

 

 

 

................................

<덧붙이는 말>

 

- 나는 언제부턴가 내가 남에게 호의를 베풀 때엔 상대의 답례를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태도가 서로에게 최선이란 생각이 든다.

 

- 크론쇼의 말에 대해선 옳은지 그른지를 여러분이 각자 판단해 보시길...

 

 

 

 

 

 

 

 

 

 

 

 

 

 

 

 

 

 

 

 

서머싯 몸의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 1>과 <인간의 굴레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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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4-0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서 봤는데 뭔가 착한 일이라는 것들을 하고나면
신경전달 물질인 도파민이 분비 된다고 하네요.

그래서 작은 선행으로 시작된 일들이 점점 커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뭐랄까 도파민 중독이라고나 할까요.

'내가 널 위해서 어쩌구 저쩌구...."
이따위 말들 저는 안 믿습니다.
다 자기 좋자고 하는거 맞다고 생각해요.

저는 뭐 크룐쇼의 의견에 동감입니만.

하여간...서머싯 몸. 멋져요. 참.

페크pek0501 2014-04-03 14:48   좋아요 0 | URL
도파민... 이런 걸 진작 알았더라면 제 페이퍼의 내용이 이것보다 좋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기네요. (아는 만큼 쓰는 것이니까요...)
다 자기 좋자고 하는 것....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크론쇼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실 분들이 많을 것 같아 이 페이퍼가 논란의 여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님을 비롯, 여러 댓글을 보니 동의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반론의 분들은 댓글을 안 쓴다고 쳐도...)

서머싯 몸이 멋지다는 건 그의 책 네 권을 읽고 내린 저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

비로그인 2014-04-02 1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봐도...페크님은 점점 도를 깨치고 계신 것 같아요. 정말이지 막힘없이 술술 몰입하며 읽었어요..

(저의 이 댓글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저의 쾌락이 더 크답니다 ^^)

페크pek0501 2014-04-03 14:49   좋아요 0 | URL
도를요? 우후~ 별 말쌈을요...
저도 댓글을 달기 위해 여기저기 서재를 돌아다니는 게 저의 쾌락입니다. ㅋ

마립간 2014-04-03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것 ; 이것에 관해서 연구가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의 증거나 증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전자의 이기'라고 해도.
단지 모든 것이 이기적이냐에 관해서 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을 근거로 인간은 이기적이지 않은 면이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어렵죠. 그 상황에서의 의견 선택은 가치관일테고요.

‘선행을 베푸는 것도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이다.’라는 것 ; 이기적인 것 중의 중요한 요인이 쾌락이고요.

페크pek0501 2014-04-03 14:53   좋아요 0 | URL
선행을 베푸는 것도 당신의 쾌락을 위해서이다, 라고 말하는 게 어떻게 보면 싸가지가 없는 말 같긴 해요. 하지만 결국 자신이 하고 싶어서 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을 듯해요. 선물이란 것도 선물하고 싶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반영한 물건일 뿐이니까요... ^^

어쨌든 인간에 관해선 늘 흥미롭습니다. 진기한 물건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인간 탐구의 소설이 제일 재밌습니다. 인간에 대한 얘기는 다 재밌어요. ^^

세실 2014-04-0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 꾹!!

페크pek0501 2014-04-03 14:54   좋아요 0 | URL
오잉?

감솨합니다요. ^^

노이에자이트 2014-04-04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의 중단편까지 거의 다 읽어본 제가 내린 결론은...이 사람은 좀 극단적이다!

특히 남을 위해 착한 일을 한 사람을 조롱하며 바보취급하고 오히려 잔인하게 짓밟는 내용이 그의 작품엔 꽤 있습니다.몸의 작품이 재밌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분명히 불건전한 요소가 있음도 사실입니다.아마 페크 님도 언젠가는 <몸의 인간관에 내재하는 독소>라는 제목으로 멋진 평론을 쓰게 될 날이 곧 오겠지요.

페크pek0501 2014-04-05 13:45   좋아요 0 | URL
하하~~ 제가 진작 평론을 공부했다면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건방지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했어요. 인간에겐 누구나 사악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서머싯 몸이 통찰했고 그래서 소설을 그렇게 쓴 것이라고요. 분별력이 없이 착하기만 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구석이 있는 것도 인간의 특성이 아닐까 해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그런 특성도 인간의 특성이 될 수 있지요. 그런 것들의 총합이 '인간'일 테니까요.

그래도 꼭, 그의 소설 속에는 선량한 사람이 등장한답니다. 필립도 그런 사람이에요. 서머싯 몸은 결국 선인과 악인을 모두 그려내고 있는 셈입니다.
좋은 주말 보내고 계십니까?

그런데 어제 왜 제 서재에 422명이 방문했는지 궁금해졌어요...
아, 이제 삶은 감자 먹으러 친정에 가려 해요. ^^

노이에자이트 2014-04-06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정이 가까운가요? 삶은 감자 먹으러 가실 정도면...

페크pek0501 2014-04-09 08:49   좋아요 0 | URL
아... 예...
친정이 가까워요. 걸어서 십 몇 분 정도로...
일부러 제가 이사왔지요.
 

 

 

 

예술적 재능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게 고마울 때가 있다. 음악을 만드는 재능과 음악을 연주하는 재능이 존재해서 나를 즐겁게 해 줄 때 그렇다. 요즘 조지 윈스턴의 <December>를 들으면서 음악가의 재능에 감사했다. 음악가의 예술적 재능이 나를 얼마나 즐겁게 해 주는가. 서머싯 몸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작가의 예술적 재능이 나를 얼마나 즐겁게 해 주는가. 그러니 내게 예술적 재능이 없음에 서운해 할 일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이 있음에 감사해야 할 일인 것 같다.

 

 

 

 

                          

 

 

 

 

 

 

 

 

 

 

 

 

 

 

서머싯 몸의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 1>과 <인간의 굴레에서 2>.

 

 

 

 

두 권을 합해 천 쪽이 넘는 분량의 글을 다 읽었다. 어떤 날은 십 쪽 이하의 분량을 읽었고 어떤 날은 백 쪽 이상의 분량을 읽었다. 적게 읽은 날도, 많이 읽은 날도 좋았다. 이런 소설이라면 아무리 두꺼워도 지루해 하지 않고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재밌고 유익한 독서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 필립은 불구의 다리를 가진 몸이어서 자신은 청년이 되어서도 어떤 여자와도 연애를 할 수 없을 거라고 절망한다. 그러다가 한 여자와 연애를 하게 되고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며 행복해 하다가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만다. 또 다른 여자와의 만남에선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는 자신이 그림에 재능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정한다. 그림 그리기를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렜다. 그리하여 그림을 배우러 파리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예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즐거워한다. 그러다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자 자신은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우울해 한다. 그리고 마침내 진로를 바꾸기로 하고, 화가가 되는 길을 포기하며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의 길로 들어선다. 그것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결정 같았다. 하지만 의사가 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는 의사가 되기까지 어려운 시련을 겪으며 인생에 대해, 인간에 대해 깊이 깨달아 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흥미를 끈 것은 줄거리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 그것은 작가의 사색을 감상할 수 있는 문장들이었다. 그 문장들은 내게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그래서 그 문장들을 옮겨 적고 그것과 관련하여 나의 단상을 풀어놓는 방식으로 글을 써 봤다. 글의 제목으로 무엇을 할까 하다가 ‘이게 사랑이란 말인가?’로 정했다.

 

 

 

 

제목 : 이게 사랑이란 말인가?

 

 

 

그는 (그녀에게) 정열적으로 키스를 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침에는 전혀 끌리지 않던 그녀가 오후에는 좀 괜찮게 느껴지고, 밤이 되니 이처럼 슬쩍 손이 닿기만 해도 짜릿짜릿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자기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말들이 마구 쏟아져나왔다. 대낮이라면 도저히 그런 말은 입에 담지 못하였으리라. 필립은 자신이 쏟아내는 말들이 놀랍고 대견스럽기만 했다.

“사랑의 고백이 너무 근사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생각해도 그랬다.

“아니, 다 표현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에요. 뜨겁게 타는 내 마음을 말이에요.” 그는 열정적으로 속삭였다.

너무 근사했다. 사람을 이렇게 흥분시키는 놀이는 처음이었다. 놀라운 일은 자기가 속삭인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로 감정이 된다는 것이었다. 말보다는 감정이 조금 과장되어 있을 뿐이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243~244쪽. ----------

 

 

 

필립은 연상인 그녀를 사랑하는 감정에 빠진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는 그녀를 만나는 게 싫어진다. 결국 필립은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그녀를 버리고 만다.

 

 

 

어떻게 해서 그리된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가장 추한 모습을 보고 만 것이다. 그녀가 몸을 돌렸을 때의 그 모습, 캐미솔과 짧은 속치마 차림의 모습을 보았을 때의 당황스러움이 잊혀지지 않았다. 거칠거칠한 피부, 목의 옆쪽에 길게 패인 주름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승리감은 곧 사라져버렸다. 나이를 다시 따져보니, 도저히 마흔 아래로 잡을 수가 없다.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어버렸다. 상대는 못생기고 늙은 여자. 필립의 머릿속에는 퍼뜩, 신분으로 봐서는 지나치게 야하고, 나이로 보아서는 지나치게 젊은 사람의 옷차림을 한, 주름지고 초췌하고 화장을 짙게 한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소름이 끼쳤다. 갑자기 다시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를 했다는 생각을 하니 견딜 수 없다. 제 자신이 끔찍스럽게만 느껴진다. 이게 사랑이란 말인가?

그녀를 대면하는 시간을 늦추려고 필립은 되도록 느릿느릿 옷을 입었다.

---------- <인간의 굴레에서 1>, 248~249쪽. ----------

 

 

 

어느 날엔 슬쩍 손이 닿기만 해도 짜릿짜릿한 느낌을 주던 상대가 어느 날엔 소름이 끼칠 만큼 보기 싫은 것, ‘이게 사랑이란 말인가?’ 하고 필립은 의아해한다. 필립의 시각에서 보자면 사랑이란 감정은 무가치하다. (만약 이것이 사랑의 본모습이라면 상대로부터 달콤한 사랑의 고백을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랑’을 믿고 인생을 거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그러나 필립의 시각을 뒤집어 보면 어떻게 될까? 나는 뒤집어 해석해 보았다. 필립이 시간이 지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대는 못생기고 늙은 여자"임에도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만들었던 사랑의 힘은 경이롭지 않은가. 

 

 

 

“사랑의 고백이 너무 근사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생각해도 그랬다.

“아니, 다 표현하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에요. 뜨겁게 타는 내 마음을 말이에요.” 그는 열정적으로 속삭였다.

너무 근사했다. 사람을 이렇게 흥분시키는 놀이는 처음이었다. (243~244쪽)

 

 

 

자신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에너지의 감정을 분출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점에서 사랑이란 감정은 위대하다.

 

 

결과적으로 ‘사랑이란 감정은 변한다.’라는 전제 하에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필립의 시각에서 보면 사랑이란 감정은 무가치한 것, 필립의 시각을 뒤집어 보면 사랑이란 감정은 위대한 것. 

 

 

여기서 문제 제기 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고 진실하며 자신보다 상대를 더 아끼는 사랑, 이런 ‘완전한 사랑’이라는 게 있을까.

 

 

어쩌면 ‘완전한 사랑’이란 건 우리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인데 어떻게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건 ‘진짜 사랑’을 흉내 내고 있는 ‘가짜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닐까.

 

 

문제 제기 또 하나. 상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데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질투를 하는 게 ‘사랑’인가.

 

 

어째서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상대가 친구를 만나서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즐거워하면 질투를 하고, 상대가 등산이나 낚시에 즐거워하면 질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상대가 행복한 걸 싫어하는 게 사랑인가. 오히려 ‘당신이 즐거워하는 걸 보니 나도 즐겁다.’라고 해야 ’사랑’이 아닌가. 또 어째서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둘이 다툰 뒤에 상대가 괴로워하면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가. 상대가 불행한 걸 좋아하는 게 ‘사랑’인가. 오히려 ‘당신이 괴로워하는 걸 보니 나도 괴롭다.’라고 해야 ‘사랑’이 아닌가.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사랑’의 뜻을 알아보았다.

 

 

(1)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2)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3)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이 세 가지 중에서 우리는 사랑의 뜻을 무엇으로 알고 있어야 할까? 나는 사랑을 이 세 가지의 뜻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보고 문제 제기를 했다. (참고로, 소설 속 필립의 사랑은 (1)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사랑이란 말을 쓸 땐 (1)번의 뜻으로 ‘사랑’을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3)번의 뜻으로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자신은 (1)번의 뜻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상대는 (3)번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서로 오해하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것이므로.

 

 

 

 

 

.......................................................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오늘이 만우절이라고 하던가.

태어나고 보니 만우절이었다는...

웃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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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4-0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십니까? 저의 옛 친구가 오늘이 생일이라고 해서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생일 축하드려요.^^ 그런 의미에서 공감 한 방 쏘겠습니다.ㅋ

생각해 보니 이 나이 먹도록 내가 정말 사랑해 본적이 있었나 싶어요.
늘 머뭇거리기만 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게 짝사랑 겸 첫사랑에 실패해선가 봐요.ㅠ
누군가를 보고 가슴 설레었던 기억조차 이젠 가물가물해요.ㅠㅠ


페크pek0501 2014-04-02 16:39   좋아요 0 | URL
ㅋㅋ 저도 학교에 다닐 때, 생일이라고 하면 친구들이 믿지 않았답니다.

첫사랑... 그 설렘이라는 것도 오래가지 않아 문제지요. 그런데 또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죠. 매일 설렌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하고요.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설렘이란 일종의 긴장감인데... 늘 긴장하며 살 순 없잖아요.
제 나이가 되고 보면 편안한 게 최고, 입니다. ㅋ

잘잘라 2014-04-01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페크님 생일 축하합니다~! 짝짝짝~
(이 노래를 진짜로 한 번 불렀습니다. 귓속말 하듯 아주 작게요~)

페크pek0501 2014-04-02 16:3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님을 보면 흥겨운~ 경쾌한 음악이 생각납니다.

마립간 2014-04-01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생일 축하드립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단일 정체성을 갖는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pek0501님의 글을 일고 제가 사랑을 다시 정의한다면 ; 네이버 사랑의 정의 1)~3)까지의 정의에 상충, 모순이 없는 상황으로 정의하겠습니다.

페크pek0501 2014-04-02 16:41   좋아요 0 | URL
예, 사랑이란 게 미묘 복잡하지요.
아직도 저는 사랑에 대해 다 파악하지 못했어요.
더 알게 되면 좋은 페이퍼를 올릴 수 있을 듯요...^^

비로그인 2014-04-01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계절에 태어나셨네요~~ 생일 축하드립니다. 페크님..~~ 오늘 날씨 정말 좋네요 .. 바람도 너무나 좋습니다.. ~~^^

페크pek0501 2014-04-02 16:4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요즘 날씨가 얼마나 죽이는지, 어젠 두 시간을 걸었답니다.
봄 풍경을 만끽하세요. 비가 오면 벚꽃이 질 거예요.

비로그인 2014-04-0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정말로 페크님 생일이라는데, 몰빵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페크님은 절대 이런 걸로 만우절 장난 안치실 분 같아서요..ㅎㅎ 그런 의미에서 저도 스텔라님처럼 공감 쏘고 갑니다~^^

...

사랑이 뭔가, 뭐긴 뭐냐고 쉽게 살고 있고 이젠 생각하는 것 자체도 귀찮을만큼 게을러져버렸는데 정말 생각해보게 하시네요. 언제나 그러시지만..

페크pek0501 2014-04-02 16:43   좋아요 0 | URL
몰빵, 좋은 선택이십니다. 진짜 생일입니다.

동의해요. 제 나이가 되면 사랑을 받는 것도 귀찮다, 가 될지 모릅니다.

생일로 인해 공감이 홍수네요. ^^

다락방 2014-04-0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인간의 굴레에서>를 사야겠다, 생각했는데 결국 생일 축하를 해야겠다는 결과가 나오네요. 페크님, 생일 축하합니다!! :)

페크pek0501 2014-04-02 16:4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아마 다락방 님이 읽으신다면 재밌게 금방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소설입니다. 강추!!!

blanca 2014-04-02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도 댓글 단 것 같은데 저는 이 작품을 어렸을 때 축약본으로 읽은 비극이 있답니다. 그런 면에서 원작 그래도 접한 페크님이 부럽습니다. 서머싯 몸! 정말 그렇죠. 저는 톨스토이도 그래요. 진짜 그런 작가들이 있어요.

생일이셨군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좋은 날 태어나셨네요.

페크pek0501 2014-04-02 16:46   좋아요 0 | URL
비극이라니요. 그건 그것대로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읽으신다면 어렸을 때 보는 책과 느낌은 다를 것이고요...그 차이를 경험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저는 맘에 드는 소설은 두 번 이상 읽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생일 축하... 고맙습니다. 어제였지만...요.

세실 2014-04-03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카스에서 본 법륜스님의 글 '한눈에 반했다는 것은 욕심의 극치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랑 통하는 글이네요. 사랑,사랑~~~~
지났지만, 페크님 생일 하늘 땅만큼 축하드려요^^

페크pek0501 2014-04-03 14:56   좋아요 0 | URL
법륜 스님의 글이 좋은 게 많은가 봐요.

"한눈에 반했다는 것은 욕심의 극치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 어떻게 이렇게 사고할 수 있는 건가요... 감탄 감탄!!!!!!!!!!!!!
 

 

 

 

1. 최근 댓글이 0(영)을 기록한 날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푸하하하~~~. (나중엔 댓글이 달렸지만.) 설마 나를 골탕먹일 속셈으로 모든 알라디너들이 어떤 모의를 한 건 아닌지를 의심했다. 나만 빼고 모두가 짜고 하는 게임에 끼어 있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런 모의를 할 만큼 내가 비중 있는 사람은 아니잖아, 라는 생각이 스쳤다. 내가 그렇게 비중 있는 사람이라면 걱정할 게 뭐란 말인가, 하는 생각도 스쳤다. 영광인 거지. 그러다가, 내가 비중 있는 사람이 못됨을 다행으로 여겼다. 내가 다수의 표적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공감도 영이고 댓글도 영이면 어떠랴. 공감 수도 적고 댓글 수도 적으면 어떠랴.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묵묵히 가겠다.

 

 

나아가, ‘영’을 즐기겠다. 둘째 아이가 어릴 적에 학교에서 치는 받아쓰기 시험을 빵 점 받아온 어느 날처럼 재밌다고 웃겠다.

 

 

그리고 생각했다. 공감 수와 댓글 수가 적은 내 글이 누군가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끼게 하고 위로가 된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좋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거다. 인생은 그렇게도 살아야 하는 거다. 승자가 아닌 패자가 되는 느낌을 맛보며 사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괜   찮   다.

 

 

 

 

 

 

2. 무슨 이유 때문일까? 구***님, 프***님, 팜***님, 마***님, 말***님 등 다섯 분이 요즘 글을 올리지 않는다. 내 서재에 흔적을 남기지도 않는다. 서재 활동을 중단한 모양이다. “왜 나타나시지 않는 건가요?”라고 물어 보려다가, 아마 자기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있고 싶어서일 거야, 아니면 휴식 시간이 필요해서일 거야, 라고 생각했다. 요즘 김이 빠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들의 서재에 들러 여전히 새 글이 없는 것을 볼 때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라는 책 제목을 이렇게 변형해 쓴다. ‘나만 새 글을 올리면 무슨 재민겨?’ 

 

 

나도 쉴까, 잠시 생각했다. 인생이 좀 피곤하긴 해서 나도 휴식이란 놈을 갖고 싶긴 하다. 열렬한 휴식을. 소극적인 휴식이 아닌 적극적인 휴식을.

 

 

 

 

 

 

3. 날씨가 좋구나. 나가도 되겠다. 안심이다. 기분이 좋다. 이젠 매일 아침에 창밖을 보며 날씨를 살피게 된다. 미세먼지 때문이다. 미세먼지가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해졌다. 오늘처럼 창밖에 있는 먼 곳의 건물들이 선명하게 보이면 미세먼지가 없는 맑은 날이다. 이런 날이면 굳이 오늘의 날씨가 어떤지를 네이버 양에게 알아볼 필요가 없다. 결과적으로 미세먼지의 존재가 내게 기분 좋은 날을 선사한 셈이다. 미세먼지가 아예 없었다면 오늘이 기분 좋은 날이 아니었을 테니까. 만약 ‘불행’이 아예 없다면 ‘행복’도 없는 것과 같다.

 

 

 

 

 

 

4. 어느 분이 내 닉네임이 쓰기 불편하다고 하셨다. 사실 나도 불편하다. pek0501, 이라고 쓰면 영어로 쓴 부분이 한글로 바뀌기 때문이기도 하고 길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어느 서재에서 댓글로 ‘pek0501이 다녀갑니다.’라고 쓰는 것보단 ‘페크가 다녀갑니다.’라고 쓰는 게 편할 것 같아서 ‘pek’를 소리 나는 대로 쓴다고 생각하여 ‘페크’라고 쓰기 시작했다. 여러분도 그렇게 써 주시길.

 

 

저는 페크입니다.

 

 

 

 

 

 

5. 서머싯 몸 저, <인간의 굴레에서 1>과 <인간의 굴레에서 2>를 다 읽었다. 두 권을 합해 천 쪽이 넘는 분량이라서 다 읽고 나서 뿌듯했다. <인간의 굴레에서 1>은 이미 읽어 놨고 <인간의 굴레에서 2>를 이번 3월에 읽었다. 다른 책들을 읽느라고 이제야 읽기를 끝냈다. (조만간 이 두 권의 책에 대해 나의 감상을 써서 올리려고 한다.) 같은 작가의 작품 <달과 6펜스>만큼 재밌다. 역시 그의 작품 <인생의 베일>도 재밌다.

 

 

<달과 6펜스>를 두 번 읽었는데, <인간의 굴레에서 1>과 <인간의 굴레에서 2>, 그리고 <인생의 베일>도 나중에 한 번 더 읽고 싶은 소설로 꼽는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첫 번째 읽을 때 놓친 좋은 문장을 읽게 되리라. 작품을 더 이해하게 되리라. 

 

 

서머싯 몸의 작품은 다 읽으려고 계획했는데 차질이 생겼다. <서밍업>이란 책은 ‘품절’이라 구할 수가 없고, <과자와 맥주>는 동서문화사에서 ‘달과 6펜스’와 함께 묶어 나온 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달과 6펜스’는 두 권 가지고 있어서 이 책을 또 구입하기가 망설여진다. 어서 새로 출간하는 출판사가 생기면 좋겠다.

 

 

<서밍업>은 77개의 철학적인 짧은 글로 되어 있고 문학적 회상록의 성격을 띤 책. 

<과자와 맥주>는 토마스 하디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라고 해서 구설수에 올랐던 책. 

.......... 전자는 서머싯 몸만이 알고 있는, 문학에 관한 비밀들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되고, 후자는 <테스>라는 소설을 쓴 작가의 이야기로 알려졌다니, 게다가 문단의 내막을 그린 것이라니 기대된다. (나는 이 두 권의 책이 궁금해 죽는다. 무지 매우 퍽 몹시 굉장히 읽고 싶다.)

 

 

이 두 권이 새로 출간되기를 기다린다.

 

 

(에고... 출판사에서 일하시는 분들이여... 유명한 작가의 구할 수 없는 작품을 알아보시고, 저 같은 독자를 위해서 발 빠르게 움직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6. 도정일 저자의 산문을 읽고 기죽었다. 하지만 나를 기죽게 만드는 글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랴.

 

 

몇 개 뽑아 옮긴다.

 

 

나자렛 예수가 태어난 곳은 여관방도, 호텔도, 산실도 아닌 말구유다. 그의 탄생은 가장 지고한 존재가 가장 미천한 곳에 내려온 사건, 말하자면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 가장 부유한 것과 가장 빈한한 것의 결합이고 만남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홈리스’이다. 그는 집이 아닌 곳에서 집 없이 태어난 존재다. 이상하지 않은가, 집 없이 홈리스로 태어난 자에게서 사람들이 되레 ‘집’을 발견하고 집을 구한다는 것은?

- 도정일 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52쪽

 

 

나자렛 예수가 ‘홈리스’였다고 말하다니. 멋지다.

 

 

다음의 글은 나도 궁금해 하던 내용이어서 흥미로웠다. 문학을 읽는 사람들과 읽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어느 쪽이 자원봉사 활동을 더 할까?

 

 

문학 독자한테서는 비독자와는 다른 어떤 행동상의 특징이 발견되는가? (…) 가장 두드러진 발견은 문학 독자가 비독자에 비해 자선활동이나 자원활동 같은 사회적 참여행위의 빈도가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 문학 독자들이 사회적 자선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43%임에 비해 비독자의 참여율은 17%에 그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이 차이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 도정일 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83쪽.

 

 

시는?

 

 

사람들은 왜 시를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시가 그들의 삶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중요성의 핵심은, 내 생각에, 시가 ‘연결의 다리’라는 데 있다. 시는 사람들이 가슴과 가슴을 연결하고 나를 나 아닌 모든 다른 것들과 연결시키고 나를 나 자신에게 연결한다. 사람과 사람들을 이어붙이고 인간과 별과 바람, 나무와 구름, 지렁이와 개구리까지도 한데 이어붙인다는 점에서 시는 인간이 가진 최선의 선린 외교정책이다. (…) 나보다 더 작고 약하고 미천한 것, 그래서 내가 노상 업신여기고 깔아뭉개고 구둣발로 걷어찼던 것들도 사실은 내가 그 존재의 귀함을 몰라보았던 ‘더 큰 어떤 것’이다. 그 모든 작은 것들을 어느 순간 나에게로 이어붙여 그 존재의 고귀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시다. 사람들이 시로부터 멀리멀리 떠나 있는 삶을 강요당하면서도 시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시가 가진 이런 느낌과 연결의 마술 때문이다. 시가, 문학이, 사람들을 바꿔놓을 수 있는 힘의 원천도 거기 있다.

- 도정일 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82~83쪽.

 

 

이렇게 정리하는 글도 좋았다.

 

 

인간이 부단히 어떤 가치들을 추구하고 탐색해왔다는 것은 인간이 가치의 탐색자를 부단히 발명해온 존재라는 것을 웅변한다. ‘참’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인간은 과학자를 발명했고 ‘선’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다가 철학자를 발명했으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다가 시인을 발명하고 예술가를 발명했다. ‘생명‘이라는 가치를 위해 인간은 의사를 발명했고 지금도 발명하고 있다. 인간은 사랑과 우정이라는 가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하는 인간을, 자유, 정의, 평등 같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목숨도 내던지는 인간을 발명했다. 그리고 지금도 발명하고 있다.

- 도정일 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203~204쪽.

 

 

 

 

 

 

7. 에세이를 읽고 싶은 분들을 위해 ‘읽으면 좋을 책’으로 세 권의 에세이를 뽑는다.

 

 

왜?

 

 

이곳은 책 정보를 주고받는 곳이므로. 나도 책 정보를 많이 얻고 있으므로.

 

 

 

 

 

 

 

 

 

 

 

 

 

 

 

 

 

 

도정일 저,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도정일 저,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이명원 저,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세 권 모두 제목이 줵인다. 표지도 줵인다.

내용도 줵이겠지.

 

 

 

 

 

 

세트로도 있구나. 

 

 

 

 

 

 

세 권을 다 읽지 못했다. 다 읽고 나서 다음에 좋은 글을 더 뽑아 소개하겠다. 

 

 

 

 

 

 

8. 누군가가 비밀 댓글로 내 글에 대한 느낌을 알려 주셨다.

 

 

“저 근데 사실은요.. 처음 한동안은 pek님이 남자분이신 줄 알았어요. 여성적 감각을 겸비한 20, 30대 청년 같았거든요. 단호함.. 의지.. 이상하게 그런 느낌이 느껴졌었어요.”

 

 

“문학쪽 혹은 국어쪽 분야에서 일하실 수도 (있겠구나) 했었어요. 글이 절도가 있다고 할까요. 차렷 경례..~~^^ 똑 부러지고 단단한 느낌.. 그랬거든요 페크님.”

 

 

하하하~~~.

 

 

내가 그런 줄 몰랐는데, 생각 못했는데, 그의 댓글을 읽고 보니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 깜짝 놀랐다. 웃음이 나왔다. 나를 들킨 것 같았다. ‘단호함’, ‘의지’와 같은 말은 나와 친숙한 말 같아서. 그리고 ‘똑 부러지고 단단한 느낌’도 맞는 말 같아서. 내 글에 대해 ‘차렷 경례’라고 표현한 것은 탁월하기까지 하다. (이건 내가 몰랐던 거다.) 게다가 문학 쪽 혹은 국어 쪽 분야에서 일하는 것으로 추측했다니... 직업까지 맞추는구나. 글의 정직함에 새삼 놀랐다. 나는 내가 부드러운 여자의 모습으로 보이길 좋아하고 그래서 그런 모습으로 글을 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  니  었   다.

 

 

앞으로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글을 써야겠다.

 

 

(님! 고맙습니다. 제가 균형을 잡고 글을 쓸 수 있게 해 줘서 말이에요. 단단한 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겠습니다.)

 

 

아, 그런데 나의 어떤 글이 그런 걸 느끼게 했을까? 이상하다, 이상해...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의 댓글은 줄곧 내 글에 대해 호의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왔기 때문이다. 그 댓글도 호의적인 관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부드러운 여성적인 문체와 단단한 남성적인 문체 중 어떤 것이 좋은가? 여자의 문체는 여성스러워야 하고 남자의 문체는 남성스러워야 하는가?

 

 

노노노노노... 둘 다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요에 따라서 적합한 문체를 쓸 줄 알아야 한다. 문체를 골라 쓰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어떤 글엔 여성적인 문체가 필요하고, 어떤 글엔 남성적인 문체가 필요할 테니까. 

 

 

어쨌든 그 비밀 댓글은...

 

 

“문체는 곧 그 사람이다.”라는 뷔퐁의 말이 내 머리를 세게 후려치게 만든 댓글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문체는 곧 나다.

 

 

(아이, 무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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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3-26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무서워라.를 괄호 안에 넣으신 페크님! 온종일 굳어있던 제 얼굴이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녹습니다. 녹아요. 흐흐흐흘~러내리는 표정 닦으러 저 지금 화장실 가요. ㅋㅋ

페크pek0501 2014-03-27 14:09   좋아요 0 | URL

ㅋㅋ 늘 재밌는 메리포핀스 님...
진짜 이곳은 무서운 곳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강심장이 되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못 버팁니다. 호호~~


2014-03-26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7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4-03-26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0이면 얼마나 민망하던지요.
나름 진지한 글에 그러면 그래요. 반대로 별거 아닌 글에 추천이 돼 있으면 뜨아하구요. 더 괴로운 건 남과 비교될 때가 젤 괴롭더군요.
어떤 분은 쓰기만 해도 공감에 댓글에 화려한데 난 왜 이러지?하는 자괴감이란...ㅠㅠ
물론 지금은 열심히 안 하니까 거의 없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글쓰기란 역시 어려운 것 같아요.ㅠ

근데 언니 글이 그렇다는 게 좀 이해가 안 가는데요?

소개하신 저 3권의 책은 저도 읽고 싶은 책 0순위랍니다.^^


페크pek0501 2014-03-27 14:15   좋아요 0 | URL
민망해 않기로 하기 위해서 제가 이 글을 썼다는 것이죠. ㅋ
우리는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글쓰기를 멈출 수 없는 환자들 같아요.
‘어쩔 수 없음’인 거죠.

님은 예전에 명성 있는 알라디너였죠. 하루의 방문자가 수백 명이었죠. 제가 햇병아리 시절에요.
그때와 비교하지 마시고,
한때 나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면서 여유를 찾으시길...
잘 나가던 시절이 없는 사람도 많답니다.

제 글... 20대부터 글이 건조하다는 평을 들었어요. 드라이하다는 거죠.
고쳐진 줄 알았지 뭐에요. 그러다가 끽~~~
그분 말씀이 그게 제 자질이래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지다고 하네요.
하지만 저는 균형을 잡고 싶어요.

님처럼 제 글에 대한 느낌이 다른 분들도 있으리라 믿어요. 똑같은 것을 봐도 받아들이기는 각자 다른 법이니까요. 저의 다른 면에 치중해 볼 수 있으니까요.

책 세 권을 한꺼번에 구입하지 마시고 <쓰잘데없이~ >이란 책부터 먼저 구입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게 맘에 드시면 또 구입하시라고...

책을 살 땐 책 욕심을 잘 통제하기... ㅋㅋ

착한시경 2014-03-2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개해주신 책... 저도 모두 가지고 있는데~소금밭만 다 읽었고~도정일 산문집은 서점에서 읽다가 너무 좋아서 바로 사가지고 왔어요~ ^^ 페크님 글은 언제나 기다리고 있고, 저두 서머싯 몸 책들 꼬옥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저도 어떤 일 하시나 궁금했어요~

페크pek0501 2014-03-27 14:18   좋아요 0 | URL
페크님 글은 언제나 기다리고 있고... 이것만 눈에 쏘옥 들어와요. 호호~~ 고맙습니다.

서머싯 몸의 책은 <달과 6펜스>부터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화가 고갱을 모델로 한 소설이라서 한 화가의 생애를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는 소설이죠. 저는 작가의 사색적인 글을 좋아해서 팬이 되었지만요. 어디를 펼쳐 놓고 봐도 맘에 드는 이런 책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서...


2014-03-26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7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렇게혜윰 2014-03-26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여자였어요?ㅋㅋ 전 댓글0 공감0 은 늘 있는 일인지라 아닐때 반가울뿐인 1인임돠ㅎㅎ

도정일 산문집, 페크님이 추천하시니 더 땡기네요^^

페크pek0501 2014-03-27 14:21   좋아요 0 | URL

저, 남자 아니고 여자예요. ㅋ
그러니까 우린 추락도 해 봐야 해요. 그래야 추천 1에도 감지덕지하지 않겠습니까.
댓글 0이었다가 누군가가 하나 남기면 눈물이 나올지 몰라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것을 믿고 싶은 1인이에요
.
<쓰잘데없이 ~>란 책을 읽으며 오랜만에 맘에 드는 에세이를 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이 정도로만 내가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뭐 이런 생각을 했네요.
또 봐요!!!!!!!!!!

아무개 2014-03-27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읽고 완전히 빠져서 인간의 굴레에서, 인생의 베일까지 찾아 읽고
다른 책들 찾아보니 페크님과 같은 상황이 되더군요. =..=


페크pek0501 2014-03-27 14:22   좋아요 0 | URL
아, 님도 저와 같은 상황에 당도했군요.
새로 출간되길 기다릴 수밖에요.
그 기대되는, 아끼게 될 책을 중고서점에서 헌 책으로 사고 싶진 않잖아요.
같은 작가의 팬으로서 반가워요.

그런데 님의 닉네임이 참 좋군요...아무개 님...

세실 2014-03-27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귀여우신 페크님~~ 공감 다 눌러 드릴게요^^

페크pek0501 2014-03-27 14:33   좋아요 0 | URL
호호호~~~ 귀여웠나요? 외로워서 엄살 좀 피워 봤어요.
세실 님이 다녀간 흔적을 남겨 주시면 제 외로움은 바람과 함께 사라진답니다.

어느새 세실 님이 새 친구가 아니라 이젠 옛 친구가 된 느낌입니다. 이 느낌 좋아요.
이 느낌 아시죠?



세실 2014-03-27 15:28   좋아요 0 | URL
느낌 아니까~~~~
저도 자주 외로워요 ㅜㅜ

페크pek0501 2014-03-28 13:47   좋아요 0 | URL
호호~~ 원래 외로운 사람은 외롭다는 말을 안 하는 법입니다만,
님의 명랑한 목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습니다만,
믿을게요.ㅋ

마립간 2014-03-27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댓글 0개인 것뿐만 아니라 댓글 브리핑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쩌면 동시대가 아닐지라도), 아마 맞을 것입니다.

제가 평균에서 조금 멀리 있기 때문이지만, 그만큼의 대가도 있습니다. 음, 그리고 저는 공감할 때 공감 아이콘을 누릅니다.^^

페크pek0501 2014-03-27 14:25   좋아요 0 | URL
누군가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 굉장히 중요한 생각이에요.
서머싯 몸의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자신만 특이한 생각을 한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이 지구엔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이 존재하지요. 신기해요.

댓글이 많이 달리기 위해선 자신이 먼저 여기저기 발로 뛰어야 하는 건데, 사실 저도 수줍음이 많은지라 새로운 만남을 개척하지 못하는 쪽입니다.
님도 그런 것 같아요. ^^
이제 제 서재엔 아무런 불편한 마음 없이 오실 수 있는 거죠? ㅋ

노이에자이트 2014-03-28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머싯 모옴 작품은 절판된 게 많죠.30여년전 모옴 전집이 나왔는데 요즘은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힘들어요.<크리스마스 휴일><그늘진 인생><크래도크 부인><람베드의 라이자>등의 장편도 절판되었고, 중단편도 절판된 게 많죠.

물론 저는 단편 몇 편 빼놓고는 모옴의 소설은 다 구했답니다.

페크pek0501 2014-03-29 11:16   좋아요 0 | URL
님은 대단하시군요.
그러고 보니 30여년 전이라면 저도 몸의 전집을 가지고 있었겠다 싶어요.
친정에 각종 전집이 많았거든요. 유명한 외국 작가의 전집은 거의 있었어요.
그런데... 세로줄로 된데다가 글자가 작아서 다 버렸답니다.
제가 도서관에 기증하려고 전화해 봤는데, 그런 책은 이제 받지 않는다고 해서요...
지금 만약 세로줄이라도 <서밍업>이 있다면 가져 와서 읽고 제가 워드 작성하여 베껴 놓고 읽을 뻔했어요. 아 쉬 워 라...
하지만 뭐, 좋은 책은 넘쳐나 있으니까요.
괜히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큰 거죠.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