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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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읽고 -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


동창생 모임에 참석을 잘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고정관념이다. 한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진부하다. 나의 답은 이렇다. ‘동창생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유능한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유능한 사람들은 아무리 바빠도 일 처리를 다 하고 바쁜 티를 내지 않고 모임에 참석하기 때문이다. ‘나 바빠서 그 모임에 못 나갈 것 같아’라고 말하며 바쁜 티를 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해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들이다. 내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만든 사람은 이 책의 저자 ‘에코’이다. 이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읽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이 책의 저자 움베르토 에코(1932년 이탈리아에서 출생)는 베스트셀러 소설 작가이자 저명한 기호학자이면서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이다. 그리고 지독한 ‘공부벌레’로 정평이 나 있으며 여러 언어에 능통한 ‘언어의 천재’로 알려져 있다. 이런 대학자가 유머 있는 가벼운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이 될까? 이런 궁금증이 이 책을 구입하게 만들었다.


진짜 힘 있는 사람은 걸려 오는 전화를 일일이 받지 않는다. 늘 회의 중이라서 전화를 직접 받을 수 없는 자, 그가 바로 힘 있는 자이다. (203쪽)


이렇듯 휴대폰을 권력의 상징으로 과시하는 자는 오히려 자기가 말단 사원의 한심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만인 앞에서 고백하는 셈이다. (203쪽)


이것은 “긴급한 업무 때문에 자기들에게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 온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자들”, 이를 테면 아무데서나 휴대전화로 큰 소리를 내며 통화하는 사람들을 겨냥하여 일침을 가한 것이다.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집에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책이 많이 있는 걸 본 방문자는 이렇게 묻기 일쑤다.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 나도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아 대답하기 곤란할 때가 있었는데, 그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음의 세 가지의 대답을 소개해 놓았다.


질문 :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

대답 1 :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 두겠어요?

대답 2 : 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었지요. 여기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책들을 말입니다.

대답 3 : 지금부터 다음 달까지 읽어야 할 것들입니다. 다른 책들은 대학의 연구실에 놓아두지요.


그럼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밝혀 놓는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누구나 많은 책들을 마주하게 되면 ‘지식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그래서 무심결에 그런 질문으로 자기 자신의 고뇌와 회한을 표현하는 게 아닌가 싶다. (253쪽)


책을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며 사는 나로서도 서점에 있는 많은 책들을 접할 때면 마음이 편하질 않곤 했다. 세상엔 이렇게 책들이 많은데 그것에 비해 난 조금밖에 읽지 못한 것에 대한 찜찜함 같은 것이었다. 그때의 내 마음을 에코는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지식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는 것.


영화가 늑장을 부린다면 그건 포르노 영화가 맞다


‘포르노 영화를 식별하는 방법’의 소개는 참 신선하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영화가 포르노 영화일까, 아닐까를 구분하는 방법을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단다.


“만일 배우들이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면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늑장을 부린다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포르노 영화이다.” (174쪽)


왜냐하면 “한 시간 반 동안 오로지 그런 장면들(입에 담기 어려운 천한 장면들)만 본다면 아무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쓸데없는 공백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174쪽).”는 것이다.


얼마나 그럴 듯한가. 이 책엔 유쾌하게 또는 통쾌하게 웃음 짓게 만드는 글로 가득 차 있다. 책 속의 ‘차례’에 있는 제목들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도둑맞은 운전 면허증을 재발급하는 방법 /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방법 / 반박을 반박하는 방법 / <맞습니다>라는 말로 대답하지 않는 방법 / 축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


앞으로 누군가가 묻는 말에 개성 없이 ‘맞습니다’로 대답하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참고할 말은 이렇다. 괄호 안은 대답이다.


경찰입니다! 로시 씨이십니까? (카를라, 짐 꾸려!)

아니, 자기 팬티 안 입었잖아! (그걸 이제 알아차렸어?)

보아하니, 당신 10억 리라짜리 부도 수표에 서명을 하고 나를 보증인으로 내세운 거 아니야? (당신의 예리한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

벌써 탑승이 끝났나요? (저기 하늘에 작은 점 보이시지요?)

뭐라고? 너희들 지금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는군.) (112쪽)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싶은 사람은, “오늘 날씨는 비가 내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101쪽).”라고 말하면 된다는 것.


“당신은 얼마나 자주 일광욕을 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재밌는 답변을 하고 싶은 사람은 “햇볕에 노출될 때마다(106쪽)”라고 대답하면 된다.


내 경험에 의하면 어떤 책을 읽든 독자는 저자에게서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은 배우게 된다. 이 책을 쓴 저자에게서 내가 배운 것은 웃음을 유발하는 유머러스한 말을 통해서 보여 주는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이다. 내가 ‘비스듬히’라고 표현한 이 말은 세상을 정면에서만 보지 않기를 의미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자신이 위치한 곳에서의 한 쪽의 시각만으로 보는 데에 길들여져 있다. 하나의 컵을 예로 든다면 머릿속에서 컵을 상상할 때 습관적으로 정면으로 본 컵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컵의 모습은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양을 볼 수 있다. 컵을 위에서 볼 때와 아래에서 볼 때의 모습이 다르고 또 오른쪽에서 볼 때와 왼쪽에서 볼 때의 모습이 다르다. 여러 각도를 달리해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컵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 여러 모습의 총합이 바로 ‘컵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예로 들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경우 미국의 시각에서 보자면 ‘테러와의 전쟁’이지만 이슬람세계의 시각에서 보면 ‘문명충돌’일 뿐이다. 제삼의 시각으로 보면 또 달라진다. 그러므로 한 쪽의 시각으로만 보는 건 제대로 보는 게 아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제대로 보려면 여러 각도에서 봐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느 각도에서 보는 게 옳은가 하는 점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봄으로써 사고의 영역을 확장시켜야 하는 점이다. 그것은 저자와 같이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를 통해서 가능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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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0-02-09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고 나서

이 글을 일주일 전에 써 놓고 이제야 글을 올렸다. 대충 써 놓은 초고이므로 다시 한 번 읽고 수정해서 올려야 하는데 늑장을 부린 것이다. 이유는 게을러서다. 좋게 말하면 느긋해서다.

글을 쓰면서 간혹 내 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관적인 생각에 치우쳐 억지를 부리며 글을 썼을 때가 그렇다. 사실 그런 글은 문제가 있는 글로 잘 쓴 글이라고 할 수 없으나, 알면서도 부족한 대로 글을 올린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 “오늘은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내일 쓰는 글은 오늘과 다른 견해를 가진 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닌, 흐르는 물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람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성’의 인생을 사는 것이므로.”

사실, 옛날에 찍은 사진 속의 자신이 촌스럽고 초라하게 보일 때가 있듯이, 글도 마찬가지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보면 세련되지 못한 내 글에 부끄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점점 글쓰기가 부담스러워진다.

이런 어려운 작업을 하는, 글 쓰는 모든 이들에게 우정과 사랑을 보낸다.



gimssim 2010-02-24 22:55   좋아요 0 | URL
제 주관적인 생각
'선한 사람은 성공하지 못합니다.'(물론 예외도 있지만)
글은 그때, 그 순간의 생각의 모습이지요.
큰 줄기는 변하지 않지만 세세한 지류는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며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런지요.
그건 읽는 사람의 몫이겠지요.

페크pek0501 2010-02-0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남길 지인들에게

저를 잘 아는 분은 댓글을 남길 때 굳이 로그인 하지 않고 댓글을 써도 됩니다. 댓글을 쓴 뒤에 이름 쓰는 칸에 이름 적고 비밀번호는 아무거나 본인이 기억할 수 있는 숫자 적으면 됩니다. 비밀번호를 쓰는 이유는 나중에라도 본인이 댓글을 삭제하고 싶을 때 그 비밀번호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삭제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요. 저는 누가 들어오는지 모르니까 댓글을 남겨 주시면 무척 반가울 것입니다. (참고사항 : 남기지 않아도 됨)

옹달샘 2010-02-24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유머감각을 배우고 싶어집니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말도 있지만 쓸데없는 말, 피곤하게 만드는 말, 상처주는 말,짜증스런 말을 자주 하거나 듣고 살잖아요.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유쾌해지는 말을 하면서 살면 세상살기가 한결더 즐거울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0-02-26 11:19   좋아요 0 | URL
예 맞아요. 특히 불행하거나 우울한 일이 있을 때 유머감각으로 기분전환이 될 수 있으니까요.
 
변신. 유형지에서 (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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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형지에서’를 읽고 - 확신의 위험성을 보여 준 인물


소설 <유형지에서>에는 두 유형의 인물이 나온다. 한 사람은 잘못된 생각을 가졌으면서도 그것이 옳다고 굳게 믿는 사람(장교)이고, 한 사람은 무엇이 잘못된 일인지 알면서도 침묵하는 사람(탐험가)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전자이다.


장교는 판사로서 유형지에 임명되어 왔으며 사형 집행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는 탐험가에게 사형 집행의 기계를 보여 주며 이것의 우수성을 과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뾰족한 바늘이 죄수의 몸을 찌르게 되어 있는 사형 집행기다. 죄수는 이 기계 안에서 12시간 동안이나 고통을 받다가 죽게 되는데, 바로 이 잔인한 사형 방식을 찬미하고 집착하는 사람이 장교인 것이다.


죄수는 근무를 태만히 했다는 죄로 이곳에 끌려와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보초를 서는 새벽 두시에 잠이 들었다는 것과, 이를 본 상관이 자신의 승마용 채찍으로 얼굴을 후려갈기자 상관에게 잘못을 빌기는커녕 오히려 대들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런 죄수에게 변호할 기회는 절대 주어지지 않으며 장교의 독단적인 판결로 사형이 집행된다.


장교는 말한다. “저는 판사로서 하나의 원칙을 세워 놓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범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범죄는 단지 범죄일 뿐이라는 장교의 이런 고정관념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장교는 작은 실수를 저지른 죄수가 사형을 당하는 게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조차 지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죄수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지 않는 불공평함에 대해서도, 사형 방식의 잔인함에 대해서도 나쁘다는 것을 판단할 줄 모른다.


이곳의 사형 집행기는 구사령관이 발명한 것인데, 이 기계의 제작과정에 참여한 장교는 이것에 대해 유별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구사령관이 죽고 새로 부임한 신임 사령관이 이 사형 집행기를 없애고 싶어 하자, 이를 막기 위해 장교는 탐험가에게 이 기계 장치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탐험가에겐 그럴 만한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 부탁을 탐험가가 거절하자 장교는 죄수를 석방하고는 자신이 직접 기계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장교를 지탱해 주던 그 신념이, 그렇게 옳다고 믿었던 자신의 재판 과정이, 그리고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그 기계 장치가 이제 아무에게도 존중 받지 못하고 쓰레기 취급을 당할 처지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기계는 고장이 났는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이상하게 작동하여 장교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게 하더니, 결국 장교를 고통스럽게 죽게 한다.


장교는 자신의 죽음을 용기 있게 선택할 만큼, 자신의 신념에 대한 실천력이 훌륭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는 존경의 대상이 아닌, 비난의 대상이다. 그가 가진 신념은 그릇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은 역사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독일을 지배하던 히틀러는 국민들에게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다른 민족들을 잔인하게 박해하는 일을 국민들로 하여금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잘못된 판단은 다수의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그의 독재가 가능할 수 있었다. 히틀러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도 오판했던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으로 인해 다수의 사람들의 오판이 생기는 일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어 참으로 위험하다. 특히 요즘은 인터넷을 이용한 정보 전달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저널리스트의 한 편의 글이 여론에 큰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얼마든지 다수의 ‘잘못된 생각’을 양산해 낼 수 있다.


사실 옳게 판단하는 일이 늘 쉽지만은 않다. 이 소설에서처럼 죄수에게 긴 시간의 고통을 주는 처형제도는 비난할 일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지만, 잘 판단하기 어려운 일도 있다. 예를 들면 사형제도 폐지 문제만 해도 그렇다. 범죄억제의 효과를 중요시한다면 사형제도를 실시해야겠지만, 인간의 생명권을 중요시한다면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게 옳기 때문이다. 또 주택가에 CCTV를 설치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찬반의 의견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범죄가 감소한다는 이유로 CCTV를 설치하는 것에 찬성할 수도 있지만 사생활이 노출된다는 이유로 반대할 수도 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누구나 자신이 여러 번의 착오를 경험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데도 자신의 현재의 생각은 늘 옳다고 여기기 쉽다. 이럴 때 우리의 모습은 이 소설 속 장교의 어리석은 모습과 닮아 있을 것이다.


수전 손택은 <문학은 자유다>라는 저서에서 “문학의 지혜란 뚜렷한 견해를 가지는 것과 상반된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견해에 대해 확신하는 자세보다는 차라리 견해가 뚜렷하지 못해 어떤 것이 나은지 고민하는 자세가 오히려 신중할 수 있다는 수전 손택의 말에 동의한다. 고민한다는 것은 내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일 테니까.



소설 속 장교처럼 확신의 위험성은 우리에게도 흔히 일어날 수 있음을 상기할 때 옳은 판단의 중요성을 새삼 인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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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신념이 틀릴 수도 있지만 자기 신념이 없다면 일에 부딪혔을 때마다 흔들리겠지요.그런 이유로 옳건 그르건 자기 신념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저는 높은 점수를 줍니다.위 글을 읽어보니 객관적 시각의 밝은 눈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 최선의 신념을 갖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글 잘 읽고 갑니다.

페크pek0501 2009-12-3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어 왔군요, 반갑습니다. 맞아요, 객관적 시각. 그러니까 내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고 남의 얘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열린 마음도 필요하죠. 다음에 들어오면 제가 쓴 <확신이 어리석은 이유>라는 칼럼을 읽어보시길... 새해 행운 가득하세요.

페크pek0501 2009-12-31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일주일만에 들어와 글 한 편 올렸는데, 오늘은 두 번이나 들어왔네요. 오늘밤 12시가 되면 2010년이 시작됩니다. 한 해를 이렇게 또 보내는구나, 하는 생각 듭니다. 이제 나이가 드는 것에도 무감각해질 정도로 무뎌지고, 한 편으론 나이 드는 게 좋기까지 합니다. 이게 좋은 현상인지 어떤 건지 잘 모르겠군요. 조금씩 진화해 가는 즐거움으로 살고 싶은데... 진화하는 삶인지, 퇴화하는 삶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블로그가 생겼다는 것, 수십 편의 글을 썼다는 것, 그리고 한 일간지로부터 칼럼 연재의 제의를 받았다는 것으로 조금씩 진화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려 합니다. 내년엔 어떤 일이 생길지...

pek0501 2010-01-06 20:1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자유가 확보된다는 것이죠. 아이가 초등학생땐 엄마를 찾더니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찾질 않습니다. 예전엔 외출시 아이가 학교에서 오기 전에 귀가했어야 했다면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그래서 예전보다 편한 마음으로 외출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만큼 아이의 중학생 생활이 바쁘다는 얘기이고, 자기의 세계가 생겼다는 것이겠죠. '아이의 성장'은 곧 '엄마의 자유'입니다. 육아로부터의 해방을 생각할 때 늙어가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마지막 잎새 외 하서명작선 23
0. 헨리 지음, 이가형 옮김 / (주)하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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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지막 잎새’를 읽고 - 마음가짐의 신비한 힘


“창 밖을 좀 볼래. 벽 위에 남아 있는 마지막 담쟁이 나뭇잎새를 좀 봐. 바람이 불어도 펄럭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아, 저게 바로 버만씨가 남긴 걸작품이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진 그날 밤 버만씨가 저기에다 저걸 그린 거야.”


이것은 <마지막 잎새>의 마지막 글이다. 독자가 예상 못한 극적 결말의 소설 기법이 감동과 재미를 주며 소설은 끝난다.


예술가촌의 삼층 벽돌건물의 꼭대기에 존시와 수는 그들의 아틀리에를 갖고 있다. 그런데 존시는 심한 폐렴에 걸려 환자가 되고 만다. 창 밖으로 보이는, 담쟁이 덩굴에 붙어 있는 나뭇잎을 세고 있었던 그녀는 담쟁이 잎이 모두 다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존시는 수에게, 담쟁이 나뭇잎이 사흘 전에는 거의 백 장이나 되었는데 이제 남은 것은 다섯 장뿐이라고 하면서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지면 나도 가게 될 거야.”라며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채찍질하듯 매서운 빗발과 격렬하게 몰아치는 바람이 밤새도록 계속되었는데도 여전히 벽돌담 위에 담쟁이 나뭇잎새 하나가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일층에 살고 있는 화가인 버만 노인이 벽에 그린 그림이었다. 이 노인은 수로부터 존시가 삶을 포기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녀를 가여운 아가씨라 여기며, 어떠한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을 ‘마지막 잎새’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 덕분에 존시는 “내가 얼마나 나쁜 애였나를 보여 주려고 무언가가 저 마지막 잎새를 저기에 남아 있게 한 것 같아”하고는 살기로 마음먹고 병을 이겨 낸다. 하지만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으며 밤새도록 벽에 잎새를 그리느라 노인은 급성 폐렴에 걸려 죽는다.


나는 이 작품을 여러 번 읽었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땐 버만 노인의 아름다운 이웃사랑에 주목하였다. 그 다음에 읽었을 땐 마음을 담은 작은 정성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큰 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읽었을 땐 존시를 통해서 본, 삶과 죽음을 좌우하는 ‘마음가짐의 신비한 힘’에 주목하게 되었다.


만약 노인의 그림이 없었다면 그래서 그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고 말았다면 존시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그녀는 자신의 마음가짐대로 죽었을 것이다. 마음가짐의 힘은 이렇게 신비롭다. 작품 속 의사는, “그 아가씬 살아날 가망성이 거의 없어요. 희망이라고는 열에 하나밖에 안 된단 말이오.” 그러고 나서 “그 실낱 같은 희망도 본인이 살고 싶다는 의지를 보일 때만 기대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그렇듯이 장의사 쪽에 줄을 설 생각만 해선 어떤 약을 처방해도 소용없지.”라고 말한다. 소설에서가 아닌 현실에서도 의사들은 암에 걸린 환자의 보호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의 의지입니다. 병을 이겨 내겠다는 의지가 병을 낫게 합니다.”라고.


마음가짐의 힘이 얼마나 신비한 것인지 잘 알 수 있는, 이야기(구미래 엮음, <행복의 문을 여는 이야기> 중에서)를 하나 알고 있다.


부잣집의 한 노파가 매일 지성으로 절을 찾아 부처님께 불공을 드렸다. “제 나이가 다 찼으니 언제라도 데려가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이 광경을 매일 지켜보던 동자승이 짓궂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날도 노파는 불공을 드리고 마지막 끝맺음을 하였다. “제 나이가 다 찼으니 언제라도 데려가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그때 부처님 뒤에 숨어 있던 동자승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위엄 있게 말했다. “그렇게 소원이니. 내 오늘 데려가마.” 이 말을 들은 노파는 그 자리에서 그만 죽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마음의 영역에 신비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학창시절이었다. 중학교 체육시간에 ‘철봉 매달리기’라는 것을 하였다. 철봉에 턱걸이한 자세로 최대한 오랫동안 매달리는 운동이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철봉에 오래 매달려 있으려고 노력해도 되지 않았다. 삼십 초 동안 매달려 있어야 만점을 받는 것이었는데 겨우 몇 초 동안 매달리고는 몸이 곧 땅으로 떨어지곤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것으로 시험을 보는 날엔 만점을 받았던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삼십 초 동안이나 철봉에 매달려 있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점수를 잘 받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강하게 작용했던 결과다. 아마 철봉 밑에 사람을 해치려고 으르렁거리는 짐승들이 있다면 인간은 초인의 힘을 발휘하리라.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이 일상 생활이 되어 버린 내 인생은 지겹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노동 자체에서 행복하고, 노동의 결실에서 행복하고, 그리고 노동한 뒤의 휴식에서 또 한번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렇듯 똑같은 조건에서도 각기 다른 얼굴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마음가짐의 차이일 것이다.


“바다보다 더 장대한 것은 하늘, 하늘보다 더 장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한 V. 위고의 말이 생각난다. 한 생명의 얻고 잃음의 큰 문제도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할 때, 마음가짐의 신비한 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일이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잎새를 보며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죽음과 삶을 오갔던 존시의 모습에서 우리의 마음가짐에 따라 천국에서 살 수도 있고, 지옥에서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위안이 되지 않을까.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우리의 재산에 따라 혹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좌우되기보다 마음가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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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칠근 2009-11-22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돌지 않는 풍차... 그림이 시원합니다.

페크pek0501 2009-11-22 16:2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예전엔 며칠에 한 번씩 배경사진을 바꾸곤 했는데,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어 그냥 풍차 있는 풍경으로 고정하게 됐어요. 이 그림, 정말 맘에 들어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 개정판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이태주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리어 왕’을 읽고 - 진실은 왜 멀리 있을까



노인이 된 리어 왕은 세 명의 딸들에게 ‘자신을 누가 가장 극진히 사랑하는지’를 말해 달라고 하면서, 세 딸의 말을 들어보고 큰 재산을 주겠노라고 한다. 이에 첫째 딸 고네릴과 둘째 딸 리건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셋째 딸 코델리아는 아무 할 말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리어 왕은 아무 할 말이 없다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다시 말해 보라고 한다. 코델리아는 마지못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언니들이 정말 아버님을 그토록 사랑한다면, 어째서 남편을 얻었단 말입니까? 저도 만약 결혼을 한다면, 아마도 저의 배우자인 주인께서 제 애정과 관심과 의무의 반은 빼앗아 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절대로 언니들같이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아버님께 효도를 다하기 위해서라면.”




이 대답에 리어 왕(아버지)은 그것이 진심이냐고 격노하면서 셋째 딸과의 인연을 끊는다. 이 말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우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을 늘어놓은 첫째 딸과 둘째 딸에게 재산을 나눠 준다. 그러나 이 두 딸은 효도는커녕 아버지를 학대하기에 이른다. 결국 불효하는 두 딸로 인해 리어 왕은 불행한 파국을 맞는다. 너무 솔직했던 셋째 딸의 말에서 진심을 읽지 못한 대가는 그렇게 혹독했다.


리어 왕은 어째서 딸들로부터 사랑의 표현을 듣고 싶어 했을까, 왜 진실을 몰랐을까, 그리고 솔직한 것은 나쁜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여기서 인간의 특성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인간은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것. 둘째, 인간은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을 만큼 외롭고 나약한 존재라는 것. 셋째, 같은 말인데도 인간은 해석의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것. 넷째,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는데, 솔직함이 지나쳐서 아버지를 분노케 할 만큼 셋째 딸은 어리석었고, 딸의 진심을 모르는 아버지 역시 어리석었다.


이 작품은 리어 왕의 충신인 글로스터 백작의 비극도 함께 전개되는 이중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백작은 서자인 에드먼드에게 속아 장남인 에드거를 불행 속으로 빠뜨리고, 자신도 에드먼드에게 배반당하고 눈알을 뽑히고 만다. 이 역시 진실을 몰랐던 대가였다.


진실은 왜 알 수 없을까. 리어 왕뿐만이 아니라 실지로 우리도 무엇의 진실(진심)을 제대로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생텍쥐페리 저, <어린 왕자>에 이런 구절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볼 수가 없어. 마음으로 찾아야 보이지.” 이 말은 겉만 보지 말고 그 속도 헤아려서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마음으로 보는 것 또한 소용없는 게 아닐까. 차라리 수전 손택(소설가, 평론가)의 말에 믿음이 간다. “이해라는 것은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보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라는 말.


나 역시 나의 진실이 왜곡되는 일을 경험하곤 하였다. 나는 ‘A’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그것을 ‘B’라고 알아듣는 것이다. 나 또한 누군가의 말을 그렇게 왜곡한 적이 있을 것이다. 또 내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던 그것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거짓임이 밝혀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은 없는 거라고 여겨졌다. 우리가 지금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 중에서 반 정도는 진실이 아닐지 모른다. 진실은 우리가 쉽게 닿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저 산 너머에 핀 꽃과 같은 것이라서.


진실은 잘 알 수 없는 것이어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뒤늦게 발견되는 것’이라는 게 이 작품의 메시지다. 이 책처럼 명작이란 오래 전에 씌어졌다고 하더라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유용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일 것이다.


카알라일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위대하게 평가 받았던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는 듯하다. “당신이 현재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그 사실은 실제로 진실이 아닐 확률이 많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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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구절>

아비가 누더기를 걸치면 자식들은 장님이 된다는데, 아비가 돈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자식들은 친절하다네. 운명의 여신은 매춘부라서 가난한 사람에게 문을 잠그네.(본문 중에서)


<내가 쓴 구절>

뒤늦게 알게 된 진실이 확실한 진실임을 확신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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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고 - 이혼율이 높을 이유를 제시하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남녀차별이 예전만큼 심하진 않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하게 남녀평등이 이뤄진 건 아니다. 지금도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여전히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어떤 문제로 대립하게 된다면 강자와 약자로서가 아닌, 옳은 자와 옳지 않은 자의 대결로써 해결해야 한다. 이때 물론 옳은 자가 승리해야 좋은 세상일 것이다.


이 작품은 여성들이 살기엔 얼마나 잘못된 세상인가를 말해 주는 페미니즘 소설이다. 이 소설 속 여자들(혜완, 경혜, 영선)은 남자들에 비해 약자이며, 그런 약자가 보는 세상은 공정하지 못하고 모순투성이다. 이로 인해 그녀들의 결혼생활은 불행하다. 세 여자의 삶 중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혜완의 삶이다.


남편의 말인지 아내의 말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건 남녀평등이 이뤄지지 않은 증거




“그까짓 한심한 책들을 만들기 위해 아이를 버려두고 (직장에) 나가려는 니 저의가 대체 뭐야?”

“아이를 키워 놓고 (직장에) 나가란 말이야. 그땐 내가 말리지 않을게.”

“직장과 가정 둘 중에서 택하란 말이야. 난 그꼴 못봐.” <본문 중에서>




위의 글은 회사를 다니던 혜완(아내)이 회식자리에서 맥주를 마시고 돌아온 날 밤에, 화가 난 남편이 혜완에게 퍼부은 말이다. 우리는 이것만 읽어도 남자의 말인지, 여자의 말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부부가 주고받는 말 중에서 남편의 말인지 아내의 말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남녀평등이 이뤄지지 않은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직장과 가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남편의 말에 혜완은, 왜 직장은 여자만 포기해야 하는지에 분노하고 억울해 한다. 어느 아내든 남편에게 육아를 위해 직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육아는 엄연히 여자의 몫이라는 건 이 사회의 고정관념이다.


흔히 남편들은 부부싸움 중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당신이 참고 살면 안돼?”라고. 그러면 아내들은 말할 것이다. “당신이 참으면 되잖아. 왜 꼭 여자가 참아야 하는데?”라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참고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왜 한 쪽이 참아야만 평화롭게 유지되는 가정을 가져야 하지?’ ‘누구를 위한 가정이길래?’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을 짓밟고 이루는 평화가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한 쪽의 희생을 담보로 한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이에 대한 해결책은 ‘공평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똑같은 비중으로 양보하고, 동등하게 희생하고, 균등하게 참아야 하는 것, 그래서 함께 힘들고 함께 행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자들은 말이야 이 사회에서 멸시당해도 싸다구...... 자기들과 같은 성을 낳아서 좀더 권리를 회복시켜줄 생각은 안하고 남자를 낳아서 다른 여자들을 구박하는 꼴을 보고 싶다는 거 아니니? 딸을 낳는다고 구박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 구박을 하는 사람의 부당함과 싸워야지 아부를 하다니...... <본문 중에서>




이것은 남아선호사상을 가지고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여자들을 탓하는 대목이다. 어쩌면 이런 여자들은 남존여비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탓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도 항변할 게 있을 것이다. 자신이 여자로서 받은 설움을 딸이 고스란히 받게 될까 봐 딸보다는 아들을 낳고 싶었다, 라고.


이런 남아선호와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여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 사회에 적응하며 살든지 아니면 그런 부당함과 싸워 나가며 살든지…. 그런데 이 시대 여자들은 이런 부당함에 맞춰 사는 건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판단할 줄 알 만큼, 이미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로서 받는 불이익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자신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이혼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


예전에 비해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마 이혼율은 점점 높아질 것이다. 난 이 소설에서 앞으로 이혼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한 가지를 알아내었다. 남녀의 인지의 차이, 그것이다. 맞벌이 부부가 많은 요즘, 결혼한 뒤 남과 여, 이 두 개의 다른 성은 한 세계 속에 살면서 서로의 인지의 차이를 확인할 터이다.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처럼 집안일과 육아를 마땅히 여자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고, 아내는 시대가 변했다며 집안일과 육아를 나눠서 남자도 여자와 똑같이 공평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래서 부부싸움이 잦아지고, 둘의 관계가 악화되고, 급기야 회복할 수 없는 사이가 되면 그땐 이혼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은 출간된 지 오래되었으나 지금 읽어도 진부하지 않다. 특히 결혼을 앞 둔 연인에게 이 책을 꼭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결혼한 뒤 남편으로서의 할 일과 아내로서의 할 일에 대해 서로 의논해서 미리 정하고 결혼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문제 말고도 결혼생활에서 또다른 문제들이 생기겠지만 이 문제만이라도 해결을 하고 결혼식을 올린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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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 관련한 다른 책들의 구절


“우리들의 결혼은 다만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여기에서 나는 당신의 장난감 인형 아내였을 뿐이에요.”(아내가 남편에게 한 말) - 입센 저, <인형의 집> 중에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는 것이다.” - 보부아르 저, <제2의 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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