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알랭 타네의 영화 <2000년에 스물다섯이 되는 요나>(1976)는 구약성경 《요나》에 등장하는 그 요나다. 영화엔 깊이 있게 안 다뤄졌지만 왜 하필 이 68혁명의 상흔을 안은 주인공들의 자식으로 태어날 이의 이름이 요나일까 더욱 궁금했다. 


B 영화에선 고래 안에 갇힌 요나라는 상식적인 선에서의 성경의 요지를 인용한 대사와 노래가 등장한다. 성경을 깊이 읽은 진 오래되었지만, 《요나》는 가장 깨름칙하게 마무리되는 성서 이야기 중 한 편이다. 타네의 이 영화를 두고 그래도 어떤 희망을 조금 암시하는 듯하다는, 몽글몽글한 기존 평들을 떠올려볼 때, 정작 요나는 자신을 믿어주는 하나님에 대해 엄청 뾰루퉁해 있는 인물임이 생각났다. 이야기가 끝나는 장까지. 하나님이 애써 봉합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요나는 뭔가 아닌 것 같으면 티를 내고 계속 갸우뚱하는 인물이다. 


C《요나》는 흔히 풍랑에 빠져 하나님의 은총으로 큰 물고기 안에서 그 은혜를 체험한다는 이야기로 통용되지만, 실은 《요나》의 재미는 요나가 신의 섭리에 대해 단번에 수그리지 않으려는 어떤 일관됨이다. 이 영화의 각본을 쓴 타네와 존 버거가 그런 의미를 감안했다면, 요나를 축복하는 저 장면은 단지 새 생명에 대한 응원이 아니라,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간접적인 항명이 된다. 엄마의 배라는 큰 물고기 안에 갇힌 요나는 신의 섭리를 지키고자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는 신의 섭리에 갸우뚱하고자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하긴, 더 희망적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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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오타르 이오셀리아니의 <달의 총아들>(1984)_이 영화는 깨진 접시에 관한 이야기다. 누군가 접시를 깨뜨렸고, 다른 누군가는 그 깨진 접시를 줍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이오셀리아니 감독은 깨진 접시를 통해 저 깨짐의 상태를 붙임의 상태로 돌려놓을 자가 누굴까, 관객이 습관적으로 몰입하는 '해석 게임'을 깨는 데 더 관심이 많다. 


B 이오셀리아니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 개인과 사회, 고립과 연대 같은 사회학적 용어는 본 작품에서 무용하다. 옛부터 구소련 체제와 오랜 반목 관계에 있었던 그루지아 출신의 감독에게 기대하는 정치적 메시지로 영화 속 깨진 접시, 두 발만 남은 동상의 강조를 떠올려보지만, 이 할배 감독은 아예 '국적성'으로 소비하는 것 자체에 무심하다(본 영화는 프랑스에서 찍었지만 '프랑스적인 것'의 강조는 없다). 그가 언론을 통해 강경하게 드러낸 정치적 관점과 달리 영화는 천연덕스럽게 제 갈 길을 간다. 


C 작품 속 인물들은 일을 벌리고 다니지만, 그 일을 정리하려는 자는 또 다른 일을 벌리고 다니는 자가 된다. 유물론자인 그는 그릇, 사진, 동상, 가구, 천장등의 균열을 반복하면서 인물들의 해석이 '지식의 윤곽'에 포획되지 않게 장면마다 일을 벌리고 다니는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D "제 영화는 결국 우화에 관한 것입니다." 이오셀리아니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달의 총아들>은 우화하면 떠오르는 조화로운 귀결에도, 혹은 그 조화로움에 반기를 들어 새 해석을 꾀하고픈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악동스런 불화에도 그리 관심이 없다. '이게 뭐야' 섭섭해하는 사이 화면엔 "FIN"이란 자막이 떠 있다. 그래, 이게 그만의 (정치적) 우화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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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 '이달의 소설'에 선정된 오한기 작가와 미니 인터뷰를 가졌다. (금정연 서평가의 선정 이유 링크)

선정된 작품 「사랑」은 《문학들》2015년 겨울호에 실렸다. 이하 인터뷰 내용이다.






1. 돼지소리 오디션 

김신식 실없는 질문부터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당신에게 쫄지 않을 것 같다(이미 이 말을 함으로써 쫄았다는 게 티 나지만). 「사랑」을 읽고 작품에 나오는 “오잉크”라는 돼지 소리가 인상 깊었다. 김태용의 「풀밭 위의 돼지」에선 “퀠퀠”이란 돼지 소리가 기억난다. 어느 날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질문을 던졌다. 내일 당장 돼지로 변한다면 무슨 소릴 낼 것 같냐고. 중곡역 근처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 B는 “꾸엑꾸엑”이라고 했다. 파주에서 책을 만드는 디자이너 F는 “꽤에엑! 꽤에엑!”이라고 답을 보냈다. 서초동에서 학원 교재를 만드는 친구 J는 “꿀꿀[야호]”이라고 했다. 어느 소리가 마음에 드는가. 선정된 소리와 간단한 심사평을 부탁한다.

오한기 문지 편집위원이 되신 것을 축하드린다. 연말에 악수를 나눴던 게 기억난다.

마음에 드는 소리 : 꿀꿀[야호]. 심사평 : 돼지는 울지 않는다. 눈물을 참고 있을 뿐이지.

 

  1.  소설은 번역일까

김신식 「사랑」을 이야기하려면, 작품에서도 언급하지만 유리 올레샤의 단편 「사랑」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당신이 자주 언급하는 햄버거에 비유하자면, 유리 올레샤의 「사랑」이란 빵 속에 오한기의 「사랑」이란 패티가 들어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유리 올레샤의 「사랑」을 당신의 언어로 번역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혹시 ‘소설은 번역이다’란 관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오한기 나는 유리 올레샤의 「사랑」을 내 언어로 번역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소설에 유리 올레샤의 「사랑」이 언급되고 제목이 같을 뿐, 둘은 별개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다. 홍상희 씨가 번역한 유리 올레샤의 「사랑」을 작년에 처음 읽었는데, 너무 좋았다. 그 뒤로 그 소설이 떠오를 때마다 반복해 읽었다. 소설을 쓰고 있을 때도 읽었고, 소설을 쓰지 않을 때도 읽었다. 유리 올레샤의 다른 소설도 읽었다.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유리 올레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영감도 많이 받았다. 이런 차원에서는 말씀대로 「사랑」을 통해 유리 올레샤를 번역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  한국문학의 김기덕?

김신식 어느 소설가가 당신을 두고 한국문학의 김기덕이라고 평한 글을 본 적이 있다(개인적으론 난 당신이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초·중반기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근데 「사랑」을 읽으니 정말 김기덕스러운 장면이 많더라. 특히 <섬>과 <나쁜 남자>가 떠올랐다. 선정 과정에서도 김기덕이 받아온 반응과 유사한 그것으로 인해,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자주 들어온 질문이겠지만 묻고 싶다. 본인은 발표한 작품들에 대해 ‘여성 혐오’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한기 우선 김기덕과 크로넨버그 영화의 팬이라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 혐오. 그동안 내 소설이 ‘여성 혐오’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조금 슬펐고 충격도 받았다. 때문에 이 소설을 쓸 때도 루돌프를 남자로 할까 생각했다. 소설을 통해 내 생각을 전하는 데 ‘사람’이라는 게 중요하지 ‘성별’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썼다. 그래도 내 소설이 ‘여성 혐오’로 읽힌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1.  피부과 병원

김신식 「의인법」에도 나오고 「사랑」에도 언급되지만 피부(병)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의인법」에서 주인공이 “사람 얼굴에도 곰팡이가 피나요?” 물으니, 의사가 “그럼요. 사람도 좋은 숙주지요” 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사랑」에서도 병원으로 진료 받으러 가는 중 괴물로 묘사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주인공은 성인 여드름 진단을 받는다. 묘사 속에서 언급되는 표현들을 보면 바이러스 등 기본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만남을 ‘접촉’ 혹은 ‘전염’으로 보는 듯했다. 특별히 피부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만남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한기 직장을 다닌 지 3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피부가 너무 안 좋아졌다. 거울을 보며 괴물처럼 끔찍하다고 느낄 때가 간혹 있었다. 무서워서 거울을 피해 다닌 적도 있었다. 이런 내 경험이 소설에 투영된 것 같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접촉과 전염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인간과 인간의) 감정과 생각의 만남을 접촉과 전염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다. 광기와 우울이 퍼지는 게 그 증거이다.

만남. 나는 외로울 때 텔레파시를 보낸다. 텔레파시를 받은 적은 없다.

 

  1.  암기의 섬

김신식 너무 진지한 질문만 한 것 같아서 엉뚱한 질문 하나 하겠다(물론 엉뚱하다는 말이 내 입에서 먼저 나왔기에 실패한 개그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 「화씨 451」엔 책을 읽으면 소방차가 출동해 책을 불태워버리는 사회가 등장한다. 이 사회를 도망쳐 나온 주민들은 자신들의 섬을 만든다. 그리곤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각자 외우며 돌아다닌다. 혹시 본인이 암기의 섬에 들어간다면, 달달 외우고 싶은 소설이 있는지 궁금하다(자신의 작품도 좋다). 꼽은 이유도 듣고 싶다. 불태우고 싶은 작품은 안 되냐며 무안 줄 것 같지만.

오한기 정말 뛰어난 유머 감각을 지니신 것 같다.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려봤지만, 달달 외우고 싶은 소설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암기의 섬에 노트나 노트북을 갖고 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돌아다니다가 지치면 내 이야기와 생각을 적고 읽는다. 다른 책이 읽고 싶으면 다른 사람이 암송하는 걸 들으면 된다.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 같다. 인간 도서관. 무섭다.

 

  1.  페이퍼 시네마

김신식 정지돈 작가와 함께 쓴 「신형철의 칭찬합시다」라는 각본을 재미있게 읽었다. 골 때린다는 표현은 식상한 듯하고, 괴기스러운데 귀여웠다. 본인이 「사랑」을 영화 각본으로 바꾼다면,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는 누구일지 궁금하다. 주인공, 루돌프, 공장장, 친구 H 이렇게 네 명에 한 해.

오한기 한상경 : 마쯔다 류헤이, 루돌프 : 유아인, 공장장 : 나탈리 포트만, H : 우디 알렌.

 

  1.  왜 손가락을 살려두었을까

김신식 「사랑」의 후반부. 주인공이 들어간 공장에서 공장장의 손가락을 실수로 날려먹는 장면. 나는 ① (주인공의) 손가락을 자를 것인지, ② (공장장에게) 월급을 양도할 것인지 두 항목 중 실은 ① 을 택할 줄 알았다. 당신의 작품 속 인물들은 손가락이 잘리면 왠지 소설을 더 잘 쓸 것만 같아서. 손가락을 살려둔 이유는 당신이 그토록 피로해하는 소설 쓰기 속에서도 결국 지켜내고 싶은 쓰기의 어떤 이유가 있어서일까.

오한기 화자가 손가락을 자르지 않은 이유는 「사랑」에서 인간의 신체는 자본/소유물(월급/루돌프)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 즉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들은 「사랑」의 세계에서 하찮게 여겨진다. 따라서 공장장 역시 그 세상에서 더 값진 걸 택한다. 소설 쓰기에 대해서 특별한 사명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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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 「연구자와 폭로자」란 칼럼을 썼습니다. 근래 화제가 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이하 '지방시')의 한계를 들춰보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한 연구자의 용기를 소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지식노동자를 연구자와 폭로자로 위치짓게 하는 이 구조를 더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가운데, 특히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개인의 '인격적 고백'을 도모하면서, '인격화'라는 심성 전략으로 더 깊은 정치적, 경제적 모순을 우리가 파고드는 것을 막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일찍히 학문사회를 객관화하며, 성찰이라는 행위를 시도했을 때 우려했던 그 '진솔함'이라는 폭로자에 부과된 선의. 그러한 심성은 우리를 그저 도덕적 괴물이 된 대학과 이를 멀리하는 개인의 양심이란 윤리적 장면에만 머물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한국일보 2030 세상보기(전문 링크)


어느덧 철 지난 용어가 되었지만, 신자유주의는 ‘인격화’라는 형태로 그 위용을 계속 떨치고 있다. 사람의 품성, 그 품성이 빚어내는 감수성, 감수성이 챙기는 양심은 신자유주의의 대항마가 아니라 친구가 되었다. 오래 전 양심에서 빚어진 고발은 난국을 타개할 인간의 무기였지만, 한나 아렌트도 얘기했듯 양심은 비정치적 무기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양심을 비웃는 것을 넘어, 이 비웃음마저 시시하다는 생각의 경로를 터놓았다. 더 나아가 개인의 양심이 선한 인상 자체로만 소비될 수 있게 감정구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관심은 양심 너머 정치적ㆍ경제적 모순이 아니라, 양심을 지키는 진솔한 인격체에 머문다. 신자유주의는 얼마든지 이런 인격 소비가 반가울 것이며, 학문사회의 모순을 밝히는 개인의 인격적 고백에도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지방시’는 학문 활동이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적 모순을 날 것 그대로 섬세하게 담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인문학을 학생과 교수가 주고받는 훈훈한 품성으로 쉽게 갈음한다. 저자인 309동1201호는 연구실ㆍ강의실 풍경 속에서 “부끄럽다” “배운다”란 표현을 성찰의 언어로 끄집어낸다. 허나 그의 성찰은 더 부딪치고 갈등으로 풀어내야 하는 순간을 개인의 인격으로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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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30세상보기에 <위플래쉬 증후군>이란 칼럼을 썼다. 보험사기에 잘 활용되는 이 증상을 통해, 보상시장이 국내에도 점차 활발해진 가운데, '보험사적 사고의 일상화'가 일어나고 있진 않은지 돌아보았다. 


한국일보 2030 세상보기 (전문링크)



올해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은 ‘위플래쉬(whiplash)’. 직설을 서슴지 않는 음악가 플레처란 캐릭터 때문에 ‘채찍질’이란 의미가 선명하게 다가오는 영화다. 한데 위플래쉬엔 흥미로운 의미가 하나 더 있다.

사회학자 윌리엄 데이비스는 ‘행복 산업’에서 ‘위플래쉬 증후군’에 대한 일화를 들려준다. 어느 날, 아픈 딸 때문에 데이비스는 병원을 찾았다. 그는 진료를 기다리다 서류를 놓고 쑥덕거리는 남자 무리를 봤다. 그들은 뭔가를 상의 중이었다. 간호사가 나왔다. 서류를 쓰던 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갑자기 어깨를 늘어뜨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동료들은 걱정스런 낯으로 돌변했다. 데이비스가 보기에 남자는 목을 다쳤다. 허나 진료를 받으러 간 남자는 응급한 상황치곤 동작들이 과했다. 데이비스는 보험사기 공모의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뒤에서 오는 차가 정차한 차를 들이박는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이때 정차해 있던 사람이 자신의 목뼈를 ‘심하게’ 다쳤다고 ‘느끼는’ 상태, 그것이 위플래쉬 증후군이다. 이 증후군은 보험사기에 자주 활용된다. 의사와 사고 연기자들은 보험금을 타기 위해 공모하기도 한다. 이때 의사는 다친 이의 아픈 느낌을 병명이란 사실로 진단하지만, 보험사는 다쳤다는 게 실상 느낌은 아닌지 그 ‘저의’를 진단한다. 사고를 낸 사람, 당한 사람, 이를 중재하는 사람 모두 보험금 앞에선 육체에 가해진 고통은 사실이 아니라 온갖 주장들임을 숙지하고 있다는 듯 논쟁을 벌인다. 보상의 수준을 따지기 위해서다.

여기서 내가 위플래쉬 증후군을 곱씹는 이유는 누가 정말 다쳤고 다침을 연기하는지 밝혀내고 싶어서가 아니다. 위플래쉬 증후군은 언젠가부터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보험사적 사고’를 돌아보게 해준다. 사건ㆍ사고 속 의도 읽기에 단련된 보험사들은 제대로 아프지 않은 사람들을 가려내고자 심혈을 기울인다. 허나 타인의 의도를 읽는 데 치중하면 그 혹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꼼수’로만 해석되기 마련이다.

일이 터지면 기꺼이 보험사가 되길 바라는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사건을 바로 나누고, 갑을이란 관계를 쉬이 들이민다. 피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속된 말로 ‘피해자질’을 자처하진 않는지 꿍꿍이를 검사한다. 이 과정에서 보상금은 누군가의 육체적ㆍ감정적 손실을 막는 차선의 비용이기보다는, 돈을 받은 이상 피해자도 채찍질할 구석이 있으리란 의혹의 비용으로 탈바꿈한다. 사람들은 ‘을질’이란 표현으로 을이라면 을로서 감수해야 할 비난의 비용을 책정한다. 새삼스럽지만 오늘날 보상금은 누군가의 이유 없는 화풀이나 혐오를 응석 정도로 받아줘도 되지 않겠냐, 당신은 돈이라도 챙겼으니까라는 메시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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