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 <안목 중독>(전문 링크)이란 이야길 해보았습니다. '진부함'에 대해 쉽게 나무라고, 사람을 서문에 비유하며, 서문 몇 쪽만 봐도 감이 온다며 뻔한 자로 규정하는 각박해진 세상을 논했습니다.

글로 먹고 사는 인생에도 안목은 중요한 능력이다. 나 같은 경우 글도 쓰지만, 잡지를 만들면서 다른 이의 글도 꾸준히 읽는다. 괜찮은 필자를 찾다 보면 글에 대한 평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런 생리를 잘 아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안쓰러운 신경전이 벌어진다. 대화 가운데 뻔하다는 말이 자연스레 나온다. 여기서 뻔함은 나름의 방어다. 행여 자신이 진부해 보일까 걱정되어 누군가의 질문과 관점에 대뜸 뻔하다 받아 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익히 알다시피’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본다. 실컷 글 쓰거나 말한 뒤 이미 이뤄졌던 논의인가 싶어 습관적으로 서두에 ‘익히 알다시피…’로 표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 이들에게 ‘익히 알다시피…’란,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좀처럼 접하지 못했으리란 과욕을 낮추는 겸손이 아니다. 나중에 가서 타인에게 뻔한 사람으로 취급 받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을 신경 쓰는 태도에 가깝다.

안목의 사회적 용법에 의구심을 품지 않으면, 이러한 두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게 된다. 사람들의 표현을 금세 식상함과 그렇지 않음으로 지각하는 감정 구조가 굳어진다. 누군가의 언어를 제대로 들으며 헤아리려는 노력 대신, 세상을 오로지 비범함과 평범함으로만 솎아내는 것을 ‘뛰어난 감각’이라 여기는 착시가 생긴다. 그 구조 속에선 진부한 이로 규정될까 걱정되는 사람들을 통해 자기 감각을 과시하는 사람의 목소리만 드셀 뿐이다.

이를 ‘안목 중독’이라 부를 수 있다면, 안목 중독의 사회는 각자 나름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이들의 메시지를 곧잘 ‘글러먹음’으로 평가하는 데 스스럼없다. 이러한 태도에 제동이 걸리지 않으니, 안목에 중독된 이들은 높을 대로 높아진 기준에 망설임이 없다. 타인이 왜 아직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지를 ‘용납’의 수준으로 사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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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정은 최근 관심을 갖게 된 소설가다. 이력에 대한 흥미. 문화연구자 출신의 소설가란 이력이 끌렸다. 최근 나온 10명의 작가가 참여한 테마 소설집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착하게>란 작품을 거기에 발표했고, 칼국수면을 이로 끊어먹는 아이의 도입부 묘사가 좋아서 페이질 끈질기게 잡았다.


그녀의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를 샀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 대체로 좋은 몸살 기운을 안고 돌아온다. 한데 그러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시달려야만 하는 기운이었다. 좋다 나쁘다기보단 내가 휘말려서 뭔가로 빚어내야 하는 기운이었다.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를 볼 때 그랬다. 보고 와서 몸져 누웠다. 비슷한 기운. 소설집의 표제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가 그랬다.

몸살의 연원이 잔인, 잔혹에서 오는 묘사의 수위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럴 것 같으면 전아리 작가가 더 셀지 모른다. 뭔가 마음을 툭 건드리는 표현이 맴돌고 그게 속에서 밍밍하게 돌다가 돌덩이가 되는 그런 경우.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엔 '부산물'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그게 속을 밍밍하게 했다.

낙태의 경계에 있는 아이를 의미하는 그 표현은 '실토'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서 작품의 미묘한 잔혹함을 뒷받침하는 핵심어다.

형과 동생이 등장한다. 기이한 형이 있고 세상의 여자들은 그 형을 사랑했다. 화자인 동생은 병약한 병신이라 불리운다. 형만이 동생을 병신이 아니다라고 해준다. 온화는 불화를 조장한다. 작품은 이 불화를 형과 동생의 직접적인 갈등으로 넣지 않는다. 그사이에 형을 좋아한 그녀가 있다.

병신인 동생은 병신이 아니야라고 해주는 형을 위해 뭔갈 해야 했다. 형은 동생에게 형의 그녀가 있는 곳으로 잠입하라고 시킨다. 그녀가 부산물이라고 하는, 존재의 상태. 아이를 지우기 위해서다. 동생은 형의 그녀와 살면서 그녀를 병신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순간을 노리는 생활이 시작되었고, 작품은 그 죄책감을 페이지의 분위기로 끌어낸다.

사람은 악취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 그것을 사랑한다는 귄터 그라스의 말이 이 작품에 인용되는데, 작품엔 정말 악취가 난다. 비린내에 가깝다.

소설집 속 해설이 추려주는 관점이기도 하지만, 박민정 작가는 '가족 불능'을 시인해버리는 '고의적 미성장'이란 지점에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도 해당된다.

인물들은 성장과 성숙에 관심이 없다. 아니, 아예 그것을 '놓아버리는' 인물들이다. 놓아버린다는 건 지쳤다는 것이다. 혹은 부러 놓아서 누군가 자신을 지치게 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야 그 고단함이 자신의 악취미가 된다.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는 고단함이 악취미가 된 이 세상의 세태를 묻는다. 악취미는 튼튼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비릿한 게임 언어가 되어 누가 더 잘 지치는지 시험한다. 누가 더 잘 이 세상을 '놓아버릴 것인가' 대책도 대안도 없다. 통제불능의 상태.

저는 짐승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전 글러먹었으니 제가 당신을 안 잡아먹기보단 차라리 당신이 제게 안 잡히도록 도망가세요란 '미안함'은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에서 느낀 몸살 기운이었다.
오늘날 미안하다는 말은 악취미적 인사가 되었다. 


시달릴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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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를 보면 갈등하는 속마음을 쳐다보게 된다. 갈등의 구도는 이러하다. 이 영화를 여행으로 인식하고 싶은 마음 대 여행임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촬영'이라는 행위가 여행의 의미를 변질시키고 있다는 비판은 이제 익숙하다. 그런 맥락에서 <멋진 하루>에서 카메라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영화를 여행이란 관점에서 해석하는 데서 벗어나고픈 이에게 안도감을 줄지 모른다. 


2. 허나 카메라의 등장 유무가 중요하다고 보진 않는다. 외려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어떤 사고의 형태다. 내가 바라보는 이 순간이 '여행이길 바라는 마음' (이를 '여행적인 것'이라 부르려 한다). 여행은 일과 여가라는 낯익은 구분선 안에서 구획된 행동이다. 이 구분선은 우리에게 일=채워넣음, 여행=비움이라는 사고 구조를 심는다. 사람들의 점심 대화, 계절을 알리는 주말 뉴스 소식을 통해 우리는 이 구조에 익숙한 장면을 접한다. 흔히 '인파'라고 하는 표현은 이 장면을 고착화시킨다. 


3. '여행적인 것'이라는 사고 구조는 이 구분선을 크게 따지지 않는다. 물론 일에 찌들어 있고, 쉼이 무색해지는 삶의 형태를 의식해서 나온 것일 수 있지만. 어찌되었든 도시는 지금 내가 쳐다보는 하나하나의 사물, 건물, 사람이 여행의 흔적이길 도모한다. 도시는 도시인을 '지도적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도시를 사는 나는 '가볼만한 곳' / '그러지 않은 곳'이라는 구분선으로 공간을 인식하는 데 길들여진다. <멋진 하루>는 이 지점에서 문제를 던지는 영화다. 그래서 흥미가 생긴다. 


4. <멋진 하루>의 주인공 희수(전도연)와 병운(하정우)는 빚으로 다시 만난 옛 연인 사이다. 병운은 희수에게 350만원이란 빚을 갚아야 한다. 표면적으로 영화의 시작점은 350만원이며, 영화의 끝점은 0원이어야 한다. 수치는 '목적성'을 불러일으킨다. 고로 보는 이는  <멋진 하루>의 완결성을 빚을 다 갚는 데 몰두하는 것으로 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묘미는 그 목적성에서 오는 긴장감이 아니라, 그 긴장감을 이완시키는 두 주연의 행동이다. 그 이완의 찰나가 두 인물이 자신들의 이 경험적 순간을 여행으로 인식하게끔 만든다. 빚을 갚기 위해 병운과 함께 가는 곳은 '가볼만한 장소'가 아니다. '찍어볼만한 장소'도 아니다. 허나 희수는 시내버스에서 젊은 연인의 대화를, 타워팰리스 로비의 거울에 비친 할머니의 쓸쓸한 모습을, 성도여중 미술실에서 껌을 떼내고 있는 소연을, '쳐다보면서' 여행적인 감정을 느낀다. 카메라는 없지만, 희수는 자신의 눈이 절로 카메라가 되고 있는 지점을 체험한다. 희수의 쳐다봄은 단순 관찰을 넘어 '여행적인 느낌'을 도모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5. 병운은 여행의 요건을 부정함으로써 이 작품에 '여행적인 것'을 불어넣는 역할을 맡는다. 가령 그는 영화 초반, 희수가 네비게이터를 꺼내자 언짢아 한다. 대신 그에겐 기억이란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 희수와 잘 갔었던 식당 '제주집'이 문을 닫아버린 것을 확인한 순간은 이 영화의 '여행성'을 보여준다. <멋진 하루>에서 병운의 화법은 '과거 지향적'이다. 이 과거 지향적인 화법은 '지도적 인간'의 핵심 요소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도적 인간에게 '갔던 곳' '그때 우리 그랬었지?라고 떠올리게 하는 곳'은 '가볼만한 곳'만큼의 위상을 지닌다. 희수는 처음엔 동요하지 않지만, 병운이 계속 추억을 언급하자, 병운의 사연을 들어보려는 형태로 태도를 바꾸어나간다. 그러면서 희수도 기억을 섞어 지금 현재의 행동(빚을 갚아야 한다는)이 중요함을 잊지 말라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 현재 행동의 목적은 점점 물렁물렁해진다. 
















6. 결국 <멋진 하루>가 제기하는 '여행적인 것'은 '영화적인 것'이란 문제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렇다면 '영화적인 것'을 사유하기 위해 보는 이는 도시에서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보드리야르가 『아메리카』에서 제시하듯) 외려 영화적인 것을 고민하려면 스크린 안에서 도시 바깥으로 가야 하는 걸까. 그렇다고 여기서 영화적인 것이 '내가 보는 이 모든 풍경이 영화적이다'라고 하는 인상에 머무는 감탄으로 머문다면, 이는 정작 이 질문에 여행을 기념하고픈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과 같다. 


7. 아직 답을 찾진 못했다. 여러 개의 단서들. 그중 흔히 '모빌리티'라고 하는 개념에 안주하고 마는 자동차에 대해 나는 '영화적인 것'을 사유하고픈 유혹과 매혹을 느낀다. <멋진 하루>에서 희수와 병운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와 그 창들. 이 영화에서 여행적인 것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이 자동차는 '영화적인 것'을 엮어 생각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병운은 희수가 네비게이터를 꺼내 설치하자 대뜸 텔레비전 기능이 되는지 묻는다. 희수는 호응해주지 않는다(이 장면과 더불어 병운이 음악을 듣자고 하자 희수가 호응해주지 않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한때 영화와 대결했던 매체의 부정과 부재. 자동차 안에서 남은 것이란 다시, '쳐다봄'의 행위. 이 순간이 사진적이길 넘어, 여행적이길 넘어, 이제 영화적일 수 있는 장면들은 무엇일까. 고로 나는 이 영화를 '다시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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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홍상수 감독의 <북촌 방향>을 총 36씬으로 나누는 편이다. 즉흥이 곧 규칙이 되는 그의 영화답게 9번째 씬-17번째 씬-25번째 씬, 이렇게 8개 장면 단위로 작품의 주무대 술집인 '소설'이 나온다.


2. <북촌 방향> 속 인물들의 대화는 성격심리학에서 '개인구성개념'이라 부르는 내용에 충실하다. 이는 '나'가 낯선 누군가를 만나, 자신이 보유한 사람의 감정지식이 담긴 고유의 틀에 따라, 그 상대가 어떠한 사람인지 정리하고 평해주는 태도를 뜻한다. 본 영화에선 유난히 '난 어떤 사람인 것 같아요?'란 질문이 많다(홍상수 영화엔 이 질문이 자주 나온다). 영화의 주인공인 영화감독 성준(유준상), 그의 선배인 영화평론가 영호(김상중), 또다른 선배인 영화배우 중원(김의성)은 그 질문에 능수능란하면서도 확신에 찬 답을 내놓는다.


3. 이 영화의 공인된 하이라이트는 아마도 36번째 씬에서 성준이 사진가인 한 영화팬(고현정)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기 전까지 예전에 알고 지내던 영화 관계자와 우연히 조우하는 씬의 연속일 것이다. 이는 같이 술을 마신 영화학과 교수 보람(송선미)이 술자리에서 꺼낸 화제가 그대로 이행되는 것이기도 하다.


4. 17번째 씬.보람은 중원이 끼어 새 술자리가 된 소설에 오기 전까지, 20분간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음악감독을 우연히 차례로 만난 일이 너무나 신기하다며 이야기한다. 이에 성준은 이유가 없는 게 이유라고 답한다. 삶은 어쨌든 나름의 살만한 이유를 사람들이 조합해가며 산다는 맥락에서, 성준은 스스로 누군가의 성격이나 특성을 파악하고 평해주는 자신의 태도를 자신도 모르게 조롱한다. 이는 같은 자리에 있던 영호와 중원의 태도에도 해당된다.












5.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보법'(걷는 법)을 눈여겨본다. 여기서 보법이란 어떻게 걷느냐가 아니라, 다리와 발이 딛고 있는 땅이란 현실감각이 무색해지는 어떤 몽환에 가깝다. 다리와 발이 디디는 땅에선 말이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정상이라 생각하지만 홍상수의 영화는 이를 늘 어긴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평범한 말들("넌 참 착해" "좋은 사람이야" "넌 특별해")에 집착하며 생각을 하고 살아야겠다며 매번 다짐한다. 
벤야민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들이 걷는 이 도시 속 장소엔 늘 꿈나라가 스며들어 있다. 
각성하면 괴롭지만 그렇다고 각성하지 않으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는 처연한 핑계로 홍상수가 늘 집착하는 김현의 명제인 '잘 살아간다는 것/살아볼만한 것'의 의미를 부착하고 지내야 하는 인물들이 그려진다.


그러나 홍상수 영화에서 인물들의 각성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래서 인물들은 늘 덜 깨어 있다. <북촌 방향> 속 인물들의 안부 인사가 "ㅇㅇ야 너 되게 피곤해 보인다"라는 건 그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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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리버 색스의 유머를 좋아한다. 그는 의사이면서 실인증 환자였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에 구슬퍼 하진 않았다. 외려 자신과 반대 증상을 보이는(올리버 색스가 사람의 얼굴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의 아버지는 아무에게나 아는 체하는 신경질환에 걸렸다)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낙천적으로 그려내며 타인을 이야기한다는 것의 분량을 세심히 챙길 줄 알았다.



2. 그렇다고 그를 마냥 유머러스한 '의학 에세이스트'로 두기엔 그 공로의 범주가 좁은 듯하다. 나는 갈수록 유머가 더해지고 그 유머에 깔린 인간에 대한 집요함이 돋보이는 후기작도 좋아했지만 《편두통》 같은 다소 건조한 아카데미 스타일의 초기작에 애착이 간다. 흔히 아우라 하면 발터 벤야민을 떠올리지만, 《편두통》에는 올리버 색스식 아우라의 해석 영역이 있다.



3. '언젠가'란 단서를 붙일 수밖에 없지만 내게 르포르타주를 써보고 싶게 만드는 이는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 그리고 올리버 색스였다. 이 노인의 재치는 생사의 문제에 잠겨 있다. 그래서 더욱 눈여겨보게 된다. 죽는다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깎을 타이밍을 놓친 길이의 손톱으로 노트를 북북 긁어대는? 색스는 부지런히 죽음의 느낌을 살폈고 이를 떠벌리는 전개 방식보다는 논거와 위트로 독자들이 그 느낌에 마냥 허우적거리지 않게 도왔다.



4. 그는 시각적으로 예민했지만 그 예민함을 과신하지 않았다. 인간의 장점과 매력을 찾아보려 노력했으며 그 노력은 확신이 있는 밝은 곳보다 존재 증명의 불안을 느끼는 이들의 어두운 곳에 가까이 있었다.



5. 비판이론은 사라지고 고통과 상처에 대한 감각적 진단이 그 자리를 꿰차는 시간 속에서, 올리버 색스의 기록을 읽는다는 건 왠지 비판적 지성을 예열하기 위한 휴식 같지만 그것이야말로 고인을 기리면서 범할 쉬운 무례일 것이다. 올리버 색스는 자신이 처한 싸움을 선명하게 인식했고 미셸 푸코와는 다른 스타일로 의학이 우리 삶의 투쟁 영역임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의 담백한 유머가 그 지점을 잠시 잊게 해준 것은 그의 천성에서 나온 선물이자 이 생을 살고 있는 우리가 여전히 안고 가야할 실천의 과제 부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별은 지지만 밤은 아직 있다. 그리고 내일 밤을 기다린다. 하루의 간격을 그렇게 측정하면서 이 연약한 인간은 살아낸다. 올리버 색스가 남긴 '고맙다'는 말에 인간으로서의 믿음을 덧대고 싶은 이유다.


올리버 울프 색스

Oliver Wolf Sacks (1933~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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