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에 「연구자와 폭로자」란 칼럼을 썼습니다. 근래 화제가 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이하 '지방시')의 한계를 들춰보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한 연구자의 용기를 소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지식노동자를 연구자와 폭로자로 위치짓게 하는 이 구조를 더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가운데, 특히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개인의 '인격적 고백'을 도모하면서, '인격화'라는 심성 전략으로 더 깊은 정치적, 경제적 모순을 우리가 파고드는 것을 막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일찍히 학문사회를 객관화하며, 성찰이라는 행위를 시도했을 때 우려했던 그 '진솔함'이라는 폭로자에 부과된 선의. 그러한 심성은 우리를 그저 도덕적 괴물이 된 대학과 이를 멀리하는 개인의 양심이란 윤리적 장면에만 머물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한국일보 2030 세상보기(전문 링크)


어느덧 철 지난 용어가 되었지만, 신자유주의는 ‘인격화’라는 형태로 그 위용을 계속 떨치고 있다. 사람의 품성, 그 품성이 빚어내는 감수성, 감수성이 챙기는 양심은 신자유주의의 대항마가 아니라 친구가 되었다. 오래 전 양심에서 빚어진 고발은 난국을 타개할 인간의 무기였지만, 한나 아렌트도 얘기했듯 양심은 비정치적 무기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양심을 비웃는 것을 넘어, 이 비웃음마저 시시하다는 생각의 경로를 터놓았다. 더 나아가 개인의 양심이 선한 인상 자체로만 소비될 수 있게 감정구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관심은 양심 너머 정치적ㆍ경제적 모순이 아니라, 양심을 지키는 진솔한 인격체에 머문다. 신자유주의는 얼마든지 이런 인격 소비가 반가울 것이며, 학문사회의 모순을 밝히는 개인의 인격적 고백에도 까딱하지 않을 것이다.

‘지방시’는 학문 활동이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구조적 모순을 날 것 그대로 섬세하게 담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인문학을 학생과 교수가 주고받는 훈훈한 품성으로 쉽게 갈음한다. 저자인 309동1201호는 연구실ㆍ강의실 풍경 속에서 “부끄럽다” “배운다”란 표현을 성찰의 언어로 끄집어낸다. 허나 그의 성찰은 더 부딪치고 갈등으로 풀어내야 하는 순간을 개인의 인격으로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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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30세상보기에 <위플래쉬 증후군>이란 칼럼을 썼다. 보험사기에 잘 활용되는 이 증상을 통해, 보상시장이 국내에도 점차 활발해진 가운데, '보험사적 사고의 일상화'가 일어나고 있진 않은지 돌아보았다. 


한국일보 2030 세상보기 (전문링크)



올해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은 ‘위플래쉬(whiplash)’. 직설을 서슴지 않는 음악가 플레처란 캐릭터 때문에 ‘채찍질’이란 의미가 선명하게 다가오는 영화다. 한데 위플래쉬엔 흥미로운 의미가 하나 더 있다.

사회학자 윌리엄 데이비스는 ‘행복 산업’에서 ‘위플래쉬 증후군’에 대한 일화를 들려준다. 어느 날, 아픈 딸 때문에 데이비스는 병원을 찾았다. 그는 진료를 기다리다 서류를 놓고 쑥덕거리는 남자 무리를 봤다. 그들은 뭔가를 상의 중이었다. 간호사가 나왔다. 서류를 쓰던 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갑자기 어깨를 늘어뜨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동료들은 걱정스런 낯으로 돌변했다. 데이비스가 보기에 남자는 목을 다쳤다. 허나 진료를 받으러 간 남자는 응급한 상황치곤 동작들이 과했다. 데이비스는 보험사기 공모의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뒤에서 오는 차가 정차한 차를 들이박는 장면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이때 정차해 있던 사람이 자신의 목뼈를 ‘심하게’ 다쳤다고 ‘느끼는’ 상태, 그것이 위플래쉬 증후군이다. 이 증후군은 보험사기에 자주 활용된다. 의사와 사고 연기자들은 보험금을 타기 위해 공모하기도 한다. 이때 의사는 다친 이의 아픈 느낌을 병명이란 사실로 진단하지만, 보험사는 다쳤다는 게 실상 느낌은 아닌지 그 ‘저의’를 진단한다. 사고를 낸 사람, 당한 사람, 이를 중재하는 사람 모두 보험금 앞에선 육체에 가해진 고통은 사실이 아니라 온갖 주장들임을 숙지하고 있다는 듯 논쟁을 벌인다. 보상의 수준을 따지기 위해서다.

여기서 내가 위플래쉬 증후군을 곱씹는 이유는 누가 정말 다쳤고 다침을 연기하는지 밝혀내고 싶어서가 아니다. 위플래쉬 증후군은 언젠가부터 사람들 사이에 만연한 ‘보험사적 사고’를 돌아보게 해준다. 사건ㆍ사고 속 의도 읽기에 단련된 보험사들은 제대로 아프지 않은 사람들을 가려내고자 심혈을 기울인다. 허나 타인의 의도를 읽는 데 치중하면 그 혹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는 ‘꼼수’로만 해석되기 마련이다.

일이 터지면 기꺼이 보험사가 되길 바라는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사건을 바로 나누고, 갑을이란 관계를 쉬이 들이민다. 피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속된 말로 ‘피해자질’을 자처하진 않는지 꿍꿍이를 검사한다. 이 과정에서 보상금은 누군가의 육체적ㆍ감정적 손실을 막는 차선의 비용이기보다는, 돈을 받은 이상 피해자도 채찍질할 구석이 있으리란 의혹의 비용으로 탈바꿈한다. 사람들은 ‘을질’이란 표현으로 을이라면 을로서 감수해야 할 비난의 비용을 책정한다. 새삼스럽지만 오늘날 보상금은 누군가의 이유 없는 화풀이나 혐오를 응석 정도로 받아줘도 되지 않겠냐, 당신은 돈이라도 챙겼으니까라는 메시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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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 '사소주의자들'이란 칼럼을 썼습니다. 최근 국내에 부쩍 들어온, '센스를 측정화하는 심리적 경향'을 통해

'초-미시적 인간이 되라'는 담론엔 문제가 없는지 고찰해보았습니다.



















《한국일보》2030세상보기 / 사소주의자들 (전문 링크)

나는 일본인이 쓴 에세이를 즐겨 읽는 편이다. 일본의 심리학 에세이엔 내가 종종 ‘사소주의’라 부르는 사고가 스며들어 있다. 비유를 들자면, 사소주의란 다른 나라에선 한 장의 김을 네 등분할 것을 일본에선 여덟 조각을 내어 먹을 것 같다는 식의 자잘한 마음 상태다. 읽다 보면 무얼 이런 일까지 털어놓나 싶다. 일본인들이 그려내는 사회에 뭉툭함이란 없다. 이들은 이제 그저 미시적이어선 안 된다며,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선 ‘초-미시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논한다. 그리곤 자신이 몸소 겪은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사소주의자들은 자신의 일상을 세분화하는 데 익숙하다. 시간대별로 삶을 세세히 조각 내어 이야기한다는 게 아니다. 사소주의자들은 자신을 성가시게 하거나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 혹은 인상 깊은 호감을 준 사람에게 받은 감정을 알알이 들춰내는 기술을 지녔다. 이런 기술은 ‘센스’로 요약된다. 사소주의자들은 묻는다. 당신은 이 사회를 살아가기에 충분한 센스를 지녔습니까? 센스는 감각으로 받아들여도 되지만, 오래 전 철학자 나카무라 유지로는 ‘감득력(感得力)’이라 정의한 적이 있다. 즉, 누군가의 마음을 얻어 깨닫는 힘이 센스다.

이런 정의에 치우쳐 사회를 그려내는 사소주의자에게 문제가 없진 않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데 신경 쓰다 보니 그만큼 되돌아온 상처에 예민한 그들은, 사회를 호감과 불편으로 나누어 진단하는 데 익숙하다. 이 진단은 개인의 센스를 하나하나 따져서 ‘측정’하는 과정이다. 숫자가 나타나진 않지만, 사소주의자가 묘사하는 체험담은 수치라는 은유가 스며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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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예술잡지 『F』18호 '전염'에 <사회문화사적 열병>이란 글을 썼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서브 컬처: 성난 젊음> 전을 다녀와서 남긴 쌉싸래한 리뷰. 데리다의 '아카이브 열병'을 떠올리며 썼다. 



"이 아카이브의 사운드는 과연 무슨 말을 건네고 싶은 걸까. 전시장을 살펴보면서 손짓하는 유령들을 미리 만나보았다. 다행히도 가장 식상한 유령이 먼저 다가왔다. 그 유령은 내게 공간 진입의 자격을 물었다. ‘이 기록이 서울시립미술관에 들어올 만해?’로 시작하는. 이내 그 질문에 성의가 없었다고 느꼈는지 예술관에 진입함으로써 얻는 상징자본 따위를 운운했다. 그리 마음이 움직이는 지적은 아니었다. 다음 유령은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는 사회문화사적 에너지가 과하게 분비되는 것 같지 않냐고 물었다. 관심이 갔다. 그것은 요즘 내가 시각장(visual field)에 느끼는 불안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전시회에 가면 예술가들은 사회문화사 연구자가 되어 있었다. 예술가들은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하나의 문서/문서고 이미지로 축약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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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에 테마 소설집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에 관한 서평을 썼다. 


<피로, 작가들의 건강법>(전문 링크)












글쓰는 사람이 쓰기에 대해 쓸 땐 두 경우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해보자’의 글쓰기다. 야심이 넘실댄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써보겠단 말엔 수줍음이 느껴지나 포부의 농도는 짙다. 다른 하나는 ‘해봤자’의 글쓰기다. 침울함이 뚝뚝 떨어진다. 뭐가 뭔지 모르겠기 때문에 이 생활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란 말엔 피로가 느껴지나 외려 건강의 수위는 높다. 각 작품마다 소재는 다르지만 대체로 ‘글을 쓴다는 것은?’이라는 물음이 겹쳐 있는 테마 소설집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한겨레출판 2015)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후자다. 이 소설집에 참여한 열명의 작가들은 각자의 피로를 독자에게 이야기한다.

 

피로가 쌓이면 예민해진다. 간혹 선의는 비의가 되고 단어와 문장들엔 저의가 쌓인다. 피곤한 사람들은 이런 저의로 가득 찬 사회를 포착하는 눈이 밝다. 가령 이런 것이다. 오늘날 ‘○○을 준비하다’의 동의어는 ‘놀(쉬)고 있다’이다. ‘불우하다’의 동의어는 ‘(다들 힘겨우니 그 정도는) 평범하다’이다. ‘월세’의 동의어는 ‘(이 땅을 살아가는 자들의) 자세’다. 내가 보기에 작가들은 ‘잘 피로한’ 자들의 체질을 지녔다. 없으면 단련시켜야 한다. 그래야 버틴다. 해보자의 글쓰기를 얼른 ‘흑역사’로 부인하고 부질없음의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찌질하진 않되 찌들어야 한다. 그것이 작가들의 건강법이다.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까진 없다. 피로를 활력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문장에 졸릴 틈은 없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을 관통하는 것은 ‘잘 표현된 피로’이기 때문이다. 내게 이 소설집은 열가지 색깔의 숙성된 피로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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