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테오도로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황새의 정지된 비상>(1991)을 봤다. 난민과 국경, 이주를 담은 이 영화 속 인물과 사물의 인상적인 움직임은 역설적으로 '서 있는' 것이다. 인간의 성격으로 치자면 내성적인 카메라는 영화 내내 조심스레 움직인다. 의자들, 나무들, 테이블 위에 놓인 꽃병, 건물들, 심지어 주요 인물의 몇몇 동작엔 그것이 딛고 있는 접촉면을 유심히 쳐다보게 만든다. 걸을 땐 평소와 같은 움직임이지만 인물들은 서 있을 때 꼿꼿하고 진중해진다 '대기실'이라고 불리우는 이주를 기다리는 난민들의 영화 속 공간을 떠올려보면 이런 서 있음에서 바닥과 사람의 발, 바닥과 사물/건물의 밑이 유지하는 '접착'은 불안하게 느껴지기에 그 서 있음은 인상적이었다 


B 영화 속 인물들의 행위는 중요한 씬들에서 사뭇 연극적이다 시선 처리나 인물이 대사를 할 때의 위치는 연극에서 배우들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C 그리고 유명한 결혼식 장면. 글로만 읽었던 이 장면을 직접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침묵과 소리를 강조하는 영화에서 결혼은 더 이상 밝고 환한 소리들의 의례가 아니다. 카메라가 소리를 잠시 흡입해 화면 밖으로 내모는 듯한 결혼식 씬에서 신부와 신랑, 신부의 아버지, 주례를 서는 종교자, 함께한 난민들은 감시중인 당국에 잡히지 않기 위해 고요한 결혼식을 치른다. 신부와 신랑은 의식 막바지 국경 사이로 흐르는 강을 두고 서로 마주보며 사랑을 맹세한다. 그리곤 말없이 오른팔을 든다. "우린 이길거야"라는 난민들의 의사 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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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린지 앤더슨 감독의 <만약>(1968)을 보면 '소리'의 쓰임새가 인상깊다.갠적으로 본 작의 명장면으로 꼽는 체벌씬에선 주인공 트래비스(안티 히어로의 표상 말콤 맥도웰이 연기한)가 맞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닌, '지켜보는' 듯한 공립학교 기숙사 학우들의 모습이 나온다. 소리를 구경할 수밖에 없는 학우들은 이후 체벌의 소리가 교내에 울려퍼짐으로 인해 공포에 순응하게 된다 


B 선도부의 강압에 분노하는 트래비스가 그 강압의 소리에 저항하는 소리는 달변이나 웅변이 아니다. 영화 후반부. 트래비스는 행사장인 채플실에 연막탄을 피우고, 행사에 참여한 학부모들은 연기에 못 이겨 기침한다. 이 기침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장황한 연설을 하던 학교 공로자인 장군의 훈화는 자동적으로 '개소리'가 된다. 어찌 보면 트래비스는 기침소리를 연출해낸 것이다 


C 그리고 공인된 명장면인 교내 총격씬. 채플실을 빠져나온 학부모와 학생들, 학교 선생들과 트래비스 무리가 대치하는 장면. 본 작에서 가장 교묘한 지배자인 교장은 "이러는 너희들을 이해한다"는 소릴 한다. 이후 영화가 제시하는 장면 속 소리의 의미는 보는 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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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알랭 타네의 영화 <2000년에 스물다섯이 되는 요나>(1976)는 구약성경 《요나》에 등장하는 그 요나다. 영화엔 깊이 있게 안 다뤄졌지만 왜 하필 이 68혁명의 상흔을 안은 주인공들의 자식으로 태어날 이의 이름이 요나일까 더욱 궁금했다. 


B 영화에선 고래 안에 갇힌 요나라는 상식적인 선에서의 성경의 요지를 인용한 대사와 노래가 등장한다. 성경을 깊이 읽은 진 오래되었지만, 《요나》는 가장 깨름칙하게 마무리되는 성서 이야기 중 한 편이다. 타네의 이 영화를 두고 그래도 어떤 희망을 조금 암시하는 듯하다는, 몽글몽글한 기존 평들을 떠올려볼 때, 정작 요나는 자신을 믿어주는 하나님에 대해 엄청 뾰루퉁해 있는 인물임이 생각났다. 이야기가 끝나는 장까지. 하나님이 애써 봉합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요나는 뭔가 아닌 것 같으면 티를 내고 계속 갸우뚱하는 인물이다. 


C《요나》는 흔히 풍랑에 빠져 하나님의 은총으로 큰 물고기 안에서 그 은혜를 체험한다는 이야기로 통용되지만, 실은 《요나》의 재미는 요나가 신의 섭리에 대해 단번에 수그리지 않으려는 어떤 일관됨이다. 이 영화의 각본을 쓴 타네와 존 버거가 그런 의미를 감안했다면, 요나를 축복하는 저 장면은 단지 새 생명에 대한 응원이 아니라,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간접적인 항명이 된다. 엄마의 배라는 큰 물고기 안에 갇힌 요나는 신의 섭리를 지키고자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는 신의 섭리에 갸우뚱하고자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하긴, 더 희망적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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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오타르 이오셀리아니의 <달의 총아들>(1984)_이 영화는 깨진 접시에 관한 이야기다. 누군가 접시를 깨뜨렸고, 다른 누군가는 그 깨진 접시를 줍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이오셀리아니 감독은 깨진 접시를 통해 저 깨짐의 상태를 붙임의 상태로 돌려놓을 자가 누굴까, 관객이 습관적으로 몰입하는 '해석 게임'을 깨는 데 더 관심이 많다. 


B 이오셀리아니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 개인과 사회, 고립과 연대 같은 사회학적 용어는 본 작품에서 무용하다. 옛부터 구소련 체제와 오랜 반목 관계에 있었던 그루지아 출신의 감독에게 기대하는 정치적 메시지로 영화 속 깨진 접시, 두 발만 남은 동상의 강조를 떠올려보지만, 이 할배 감독은 아예 '국적성'으로 소비하는 것 자체에 무심하다(본 영화는 프랑스에서 찍었지만 '프랑스적인 것'의 강조는 없다). 그가 언론을 통해 강경하게 드러낸 정치적 관점과 달리 영화는 천연덕스럽게 제 갈 길을 간다. 


C 작품 속 인물들은 일을 벌리고 다니지만, 그 일을 정리하려는 자는 또 다른 일을 벌리고 다니는 자가 된다. 유물론자인 그는 그릇, 사진, 동상, 가구, 천장등의 균열을 반복하면서 인물들의 해석이 '지식의 윤곽'에 포획되지 않게 장면마다 일을 벌리고 다니는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D "제 영화는 결국 우화에 관한 것입니다." 이오셀리아니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달의 총아들>은 우화하면 떠오르는 조화로운 귀결에도, 혹은 그 조화로움에 반기를 들어 새 해석을 꾀하고픈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악동스런 불화에도 그리 관심이 없다. '이게 뭐야' 섭섭해하는 사이 화면엔 "FIN"이란 자막이 떠 있다. 그래, 이게 그만의 (정치적) 우화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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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 '이달의 소설'에 선정된 오한기 작가와 미니 인터뷰를 가졌다. (금정연 서평가의 선정 이유 링크)

선정된 작품 「사랑」은 《문학들》2015년 겨울호에 실렸다. 이하 인터뷰 내용이다.






1. 돼지소리 오디션 

김신식 실없는 질문부터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당신에게 쫄지 않을 것 같다(이미 이 말을 함으로써 쫄았다는 게 티 나지만). 「사랑」을 읽고 작품에 나오는 “오잉크”라는 돼지 소리가 인상 깊었다. 김태용의 「풀밭 위의 돼지」에선 “퀠퀠”이란 돼지 소리가 기억난다. 어느 날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질문을 던졌다. 내일 당장 돼지로 변한다면 무슨 소릴 낼 것 같냐고. 중곡역 근처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 B는 “꾸엑꾸엑”이라고 했다. 파주에서 책을 만드는 디자이너 F는 “꽤에엑! 꽤에엑!”이라고 답을 보냈다. 서초동에서 학원 교재를 만드는 친구 J는 “꿀꿀[야호]”이라고 했다. 어느 소리가 마음에 드는가. 선정된 소리와 간단한 심사평을 부탁한다.

오한기 문지 편집위원이 되신 것을 축하드린다. 연말에 악수를 나눴던 게 기억난다.

마음에 드는 소리 : 꿀꿀[야호]. 심사평 : 돼지는 울지 않는다. 눈물을 참고 있을 뿐이지.

 

  1.  소설은 번역일까

김신식 「사랑」을 이야기하려면, 작품에서도 언급하지만 유리 올레샤의 단편 「사랑」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당신이 자주 언급하는 햄버거에 비유하자면, 유리 올레샤의 「사랑」이란 빵 속에 오한기의 「사랑」이란 패티가 들어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유리 올레샤의 「사랑」을 당신의 언어로 번역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해보았다. 혹시 ‘소설은 번역이다’란 관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오한기 나는 유리 올레샤의 「사랑」을 내 언어로 번역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소설에 유리 올레샤의 「사랑」이 언급되고 제목이 같을 뿐, 둘은 별개의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다. 홍상희 씨가 번역한 유리 올레샤의 「사랑」을 작년에 처음 읽었는데, 너무 좋았다. 그 뒤로 그 소설이 떠오를 때마다 반복해 읽었다. 소설을 쓰고 있을 때도 읽었고, 소설을 쓰지 않을 때도 읽었다. 유리 올레샤의 다른 소설도 읽었다.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유리 올레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영감도 많이 받았다. 이런 차원에서는 말씀대로 「사랑」을 통해 유리 올레샤를 번역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1.  한국문학의 김기덕?

김신식 어느 소설가가 당신을 두고 한국문학의 김기덕이라고 평한 글을 본 적이 있다(개인적으론 난 당신이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초·중반기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근데 「사랑」을 읽으니 정말 김기덕스러운 장면이 많더라. 특히 <섬>과 <나쁜 남자>가 떠올랐다. 선정 과정에서도 김기덕이 받아온 반응과 유사한 그것으로 인해,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자주 들어온 질문이겠지만 묻고 싶다. 본인은 발표한 작품들에 대해 ‘여성 혐오’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한기 우선 김기덕과 크로넨버그 영화의 팬이라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 혐오. 그동안 내 소설이 ‘여성 혐오’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조금 슬펐고 충격도 받았다. 때문에 이 소설을 쓸 때도 루돌프를 남자로 할까 생각했다. 소설을 통해 내 생각을 전하는 데 ‘사람’이라는 게 중요하지 ‘성별’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썼다. 그래도 내 소설이 ‘여성 혐오’로 읽힌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1.  피부과 병원

김신식 「의인법」에도 나오고 「사랑」에도 언급되지만 피부(병)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의인법」에서 주인공이 “사람 얼굴에도 곰팡이가 피나요?” 물으니, 의사가 “그럼요. 사람도 좋은 숙주지요” 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사랑」에서도 병원으로 진료 받으러 가는 중 괴물로 묘사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주인공은 성인 여드름 진단을 받는다. 묘사 속에서 언급되는 표현들을 보면 바이러스 등 기본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만남을 ‘접촉’ 혹은 ‘전염’으로 보는 듯했다. 특별히 피부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는 만남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오한기 직장을 다닌 지 3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피부가 너무 안 좋아졌다. 거울을 보며 괴물처럼 끔찍하다고 느낄 때가 간혹 있었다. 무서워서 거울을 피해 다닌 적도 있었다. 이런 내 경험이 소설에 투영된 것 같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접촉과 전염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인간과 인간의) 감정과 생각의 만남을 접촉과 전염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다. 광기와 우울이 퍼지는 게 그 증거이다.

만남. 나는 외로울 때 텔레파시를 보낸다. 텔레파시를 받은 적은 없다.

 

  1.  암기의 섬

김신식 너무 진지한 질문만 한 것 같아서 엉뚱한 질문 하나 하겠다(물론 엉뚱하다는 말이 내 입에서 먼저 나왔기에 실패한 개그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영화 「화씨 451」엔 책을 읽으면 소방차가 출동해 책을 불태워버리는 사회가 등장한다. 이 사회를 도망쳐 나온 주민들은 자신들의 섬을 만든다. 그리곤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각자 외우며 돌아다닌다. 혹시 본인이 암기의 섬에 들어간다면, 달달 외우고 싶은 소설이 있는지 궁금하다(자신의 작품도 좋다). 꼽은 이유도 듣고 싶다. 불태우고 싶은 작품은 안 되냐며 무안 줄 것 같지만.

오한기 정말 뛰어난 유머 감각을 지니신 것 같다.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려봤지만, 달달 외우고 싶은 소설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암기의 섬에 노트나 노트북을 갖고 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돌아다니다가 지치면 내 이야기와 생각을 적고 읽는다. 다른 책이 읽고 싶으면 다른 사람이 암송하는 걸 들으면 된다. 사람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 같다. 인간 도서관. 무섭다.

 

  1.  페이퍼 시네마

김신식 정지돈 작가와 함께 쓴 「신형철의 칭찬합시다」라는 각본을 재미있게 읽었다. 골 때린다는 표현은 식상한 듯하고, 괴기스러운데 귀여웠다. 본인이 「사랑」을 영화 각본으로 바꾼다면,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는 누구일지 궁금하다. 주인공, 루돌프, 공장장, 친구 H 이렇게 네 명에 한 해.

오한기 한상경 : 마쯔다 류헤이, 루돌프 : 유아인, 공장장 : 나탈리 포트만, H : 우디 알렌.

 

  1.  왜 손가락을 살려두었을까

김신식 「사랑」의 후반부. 주인공이 들어간 공장에서 공장장의 손가락을 실수로 날려먹는 장면. 나는 ① (주인공의) 손가락을 자를 것인지, ② (공장장에게) 월급을 양도할 것인지 두 항목 중 실은 ① 을 택할 줄 알았다. 당신의 작품 속 인물들은 손가락이 잘리면 왠지 소설을 더 잘 쓸 것만 같아서. 손가락을 살려둔 이유는 당신이 그토록 피로해하는 소설 쓰기 속에서도 결국 지켜내고 싶은 쓰기의 어떤 이유가 있어서일까.

오한기 화자가 손가락을 자르지 않은 이유는 「사랑」에서 인간의 신체는 자본/소유물(월급/루돌프)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 즉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들은 「사랑」의 세계에서 하찮게 여겨진다. 따라서 공장장 역시 그 세상에서 더 값진 걸 택한다. 소설 쓰기에 대해서 특별한 사명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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