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오 패트리의 <완전범죄>(1970)에서 소름끼치는 씬은 영화 초반부에 나온다. 


A 경찰과 살인마의 정체성을 함께 안고 사는 개인. 이제 스릴러의 흔하디흔한 소재가 되었지만, 정부를 죽인 주인공이 자신을 종교적 벽화처럼 기념하는 듯한 씬은 단지 영화 끝나기 5분 전의 반전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B 정치 스릴러이자, 파시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이 블랙코미디는 '집' 밖을 나가면 당황하는 권력자의 모습을 그려낸다 



C 이 영화는 때론 단서를 스스로 흘리며 제시하고 다니는 어느 '살인마-로마 경찰간부'의 '범죄스릴러 맞춤형 심리드라마'로 요약되곤 했다. 허나 더 눈여겨볼 대목은 왜 이태리의 치안을 주무르는 권력자가 정녕 '실내'에서만 힘을 쓰는가란 영화에 내재된 질문이다 


D 집 밖을 나가면 어찌할 줄 모르는 '아이'와도 같은 모습은 정작 자기자신을 제외하곤 타인이 아이와도 같다며 훈계하고 질타하는 경찰간부-살인마에게 있다 그는 자신의 살인을 입증할 증거를 경찰 동료들에게 흘리고자 주요한 단서인 푸른 넥타이를 자신이 산 가게서 통째로 사들이려 한다. 그때 주인공은 한 시민에게 넥타이를 대신 사주길 부탁한다. 시민이 시킨 대로 넥타이를 사올 때 주인공의 모습에선 아이처럼 당황한 눈빛을 가린 선글라스가 유약하게 씌여있다 


E 주인공은 살인이든 살인의 법적 결과든 살인의 경과를 파헤치는 과정이든 실내에선 소리의 강도가 높고 달변이지만, 그래서 그는 이른바 '코쿤(cocoon)'의 정치에서만 권능자다. 어찌되었든 자신이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은 어설프고 그리하여 타인이 자신의 거처로 오게끔 만들거나 자신의 거처화된 곳이 아니면 힘을 못 쓰는 경찰-살인마는 밀실 정치에서 비롯된 자신의 중요한 결함을 감추고 있다. 


F 엘리오 패트리는 이 결함에 깃든 정신분석학적 장치를 통해 파시즘과 남근의 절묘한 유비 관계로 짜인 정치적 우화를 만들어냈다. 신이 되려는 아이(의 모습을 한 어른)는 히틀러 혹은 무솔리니에 투사된 무엇이었을까. 이 영화가 단지 테크닉이 좋은 스릴러 영화의 수준을 뛰어넘는 '클래식'인 이유는 당대 정치에 관한 비평적 물음이 도처에 숨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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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2030 세상보기 2월엔 요즘 주목하는 감독 노아 바움백의 뉴욕3부작 <프란시스 하> <위아영>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을 통해, 신자유주의체제 청춘이 짊어진 '공모전 자아'라는 현실을 고찰해보았다.


원고 전문 링크 (공모전 자아)
















나는 다른 지점에서 바움백의 영화가 흥미롭다. 먼저 그의 작품에는 ‘타임 푸어time poor’가 된 젊은이들이 강조된다. 바움백 영화의 뮤즈인 배우 그레타 거윅은 영화 속에서 늘 바쁜 인물을 연기한다. 허나 우린 눈치 채고 있다. 바쁨이란 정말 바쁜 게 아니라, 제대로 진행되는 일이 없거나 정작 하는 일이 없다는 뜻임을. 그녀가 맡은 인물은 대체로 ‘쩌는 활동성’을 지녔지만, 그 에너지는 일의 구상 단계에 쏠린다. 거윅을 비롯해 영화 속 인물들은 ‘이상’을 품는 게 얼마나 손해인지 미리 자각하면서도, 사회가 자신들에게 늘 ‘구상’중인 인간임을 확인하려 드는 것에 지쳐 있다.

이 문제를 현실과 견주어볼 때, 마치 공모전 준비 태세를 상시적으로 요구 받는 우리네 젊음과 이어진다. 바움백의 영화엔 구상을 경제적으로 실현시킬 사람을 정하고자 자신의 신체 감각을 프레젠테이션에 맞춰놓은 이들이 곧잘 등장한다. 젊은 문화노동자들의 비애를 보여주는 거윅은 ‘프로젝트식 삶’을 따른다. 그녀는 일의 성과가 주는 효과와 쾌감이 짧을지 길지 불확실한 가운데, 이 불안한 현실을 ‘쿨하게’ 인정할 줄 아는 동료를 찾는다. 하지만 이러한 쿨함은 본연의 마음이기보단, 프로젝트식 삶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자 단련한 자아상에 가깝다.

새삼스럽지만 그간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삶의 일시성을 요구해왔다. 이러한 일시성이 ‘안전한 비정규직’이란 모순을 만들었음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젊은 세대가 공모전을 삶의 단위로 받아들이도록 신자유주의가 유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모전이란 실제 대회나 경연이라고만 할 수 없다. 이른바 ‘공모전 자아’를 갖게 된 젊은이들은 가상의 사원(社員)이 되어 직업에 대한 지식을 얻음과 동시에 노동에 대한 환멸을 자주 체험한다. 피로와 냉소가 누적되는 가운데, 소진(burn-out)은 일에 파묻힌 채 성과에 중독된 직업인의 경험만이 아니라 직장 문을 두드리기 전부터 청춘의 체내에 침투한 바이러스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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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철학, 문학비평, 소설, 미디어아트 등 그간 '파국'을 다룬 다양한 표현영역이 있었지만, 대박은 뜬금없이 영화에서 터져나왔다. 감히 말하자면, <빅 쇼트>는 파국을 다룬 근래 작품들 중 가장 섹시하게 이 주제를 건드리고 있다. 

2. 사실 난 이 영화가 나올 당시 크레디트에 아담 맥케이(감독)가 있는 걸 보고 의아했다. 진지한 사회적 주제에 윌 패럴 같은 유머를 얹어 그만의 논평을 해온 의진 알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라니. '만만찮은'이란 표현도 모자란다. 누가 이 테마를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을까. 하나 맥케이는 '블랙 코미디'라는 자신의 오랜 장기를 십분 발휘해 비슷한 주제를 건드린 영화 <마진 콜>을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의 선택은 자신이 연출한 내용 속 인물들의 운명과 일치했다.

3. 사실화된 정보가 무수히 나오는 작품을 보면 (이동진이 요즘 한국영화의 재능을 까는 것과 유사한 차원에서) 부러울 때가 많다. 가령 애론 소킨 같은 작가가 보여주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 속 정보량의 적절한 배치, 서사와 대사에 녹여내는 정보 전달의 안정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데 꼭 공로는 이야기 전달자인 작 가들에게만 있을까. <빅 쇼트>의 숨은 공신인 편집기사 행크 코윈은 실화 바탕의 영화, 특히 사실화된 정보량이 압축적으로 쏟아져나올 수밖에 없는 작품에서 '편집'이 갖는 매력과 기여도를 증명했다. 




4. 영화를 본 이들은 느낄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영화의 편집적 특색을 '지젝적 편집'이라 부르려 한다. 어그레시브하면서 다변가인, 그리고 2008 금융위기에 관해 그가 수없이 언급해온 우화, 주장, 이론 등을 떠올려본다면, <빅 쇼트>는 지젝의 퍼포먼스와 닮았다. 살짝 정신적으로 흥분한 상태마저도. 

5. 코윈은 애덤 맥케이와 한 번도 같이 일해본 적이 없었다. 테렌스 맬릭과 올리버 스톤 등 그가 함께 작업해온 감독을 생각해볼 때 애덤 맥케이는 속된 말로 고삐리 양아치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코윈은 "왜 나지?" 하며 캐스팅 과정을 두고 의아해했다. 허나 코윈은 촬영 과정에서 맥케이가 이 무거운 주제를 유머러스하고 영리하게 풀어가는 걸 확인하면서 신뢰하기 시작했다. 





6. 영화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두 축인 크리스천 베일과 스티브 카렐을 통해 숏 자체를 상당히 '분열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풀 숏은 거의 나오지 않는 가운데, 영화는 경제적 파국의 불안을 대화와 표정의 교환에서 읽어내려 한다. 여기서 코윈의 역할은 '잡스럽고 다변적이며 혼란스러운' 숏의 의미를 커팅을 통해 살려내는 것이다. 

7. <빅 쇼트>는 고난이도의 금융공학 용어가 등장할 때, 이를 재치있게 설명하는 인터미션을 적절히 살렸지만, 이 금융 비극과 연관된 여러 인물의 시공간적 속 활동과 템포에 색깔을 넣는 데 큰 공을 들인 것이 느껴진다(그리고 그런 것이 은은하고 은근하게 보여야 편집은 성공한 것이다).

8. 크리스찬 베일이 맡은 베리와 스티브 카렐이 맡은 바움이 나오는 씬을 비교해보면, 숏의 다채로움과 보여지는 템포는 차이가 나며, 그러한 편집술이 인물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내성적이지만, 어떤 분노를 메탈과 락으로 다스리는 베리란 캐릭터는 좀처럼 사무실 바깥을 나가지 않으며 협소한 영역에서 씬을 끌어간다. 이에 반해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카렐의 캐릭터 바움은 공격적이면서도 인간미 있는 씬을 만들어가면서 특히 월가를 쏘다니고 인간들을 직접 접촉한다. 카메라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두 주연을 빈번한 클로즈업, 줌인, 줌아웃, 핸드헬드로 잡아갔고, 코윈은 분열증적이고 잡식적인 편집으로 캐릭터들의 불안과 영화 속 사실화된 정보량을 성공적으로 제어해나간다. 


9.맬릭의 느리면서 명상적인 스타일, 한 작품에 쏟아내는 시각적 정보량하면 일가견 있는 스톤의 다큐식 스타일을 접해본 코윈에게 <빅 쇼트>는 그 믹싱을 시험해볼 무대였을지 모른다. 지금 평단의 환호와 코윈에 대한 언론들의 주목으로 봐선 테스트 결과는 성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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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밍량의 <안녕, 용문객잔>(2003)은 '정교한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다. 


A 정교한 헤어짐은 "정확한 사랑"만큼이나 서운한 표현이지만, 차이밍량은 정교한 쇼트를 통해 헤어짐을 인상 깊이 보여준다


B 그간 이 작품의 롱테이크는 많이 언급되었지만, 나는 그보다도 영화에 나타나는 비가시적인 분할선들에 끌린다. 사실상 폐관을 앞둔 복화극장. 영화는 벽이라는 분할선 아래, 한 화면 안에 상영관 복도와 화장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매표소의 유리창이라는 분할선 아래, 적막하고 적적한 매표소 안과 밖이 그려진다. 영화의 후반부 <용문객잔> 상영이 끝나고 셔터가 내려갈 때, 셔터 또한 작별을 담담히 보여주는 분할선의 기능을 맡는다. 


C 마지막 회차를 보러온 관객 사이에도 묘한 분할의 기류가 흐르는데, 그 기류는 흔히 영화관을 다루는 영화에서 나타나는 '영화 보기'의 의례와 그 추억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안녕, 용문객잔>은 <용문객잔>의 상영과 <용문객잔>을 보러온 관객을 분할한다. 고로 우리는 굳이 이 영화에서 호금전 감독의 작품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착을 확인하고 다질 필요는 없다 


D 영화는 무관하게 전개되고, 무심하게 흘러간다. 차이밍량의 영화가 그렇듯 이러한 무심함은 소외라는 지속된 문제의식을 떠올리게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시간 앞에 소외된 관객-개인은 소외된 자신과 소외된 타인 사이에 놓인 분할선이 실선이 아니라 점선일 수도 있겠다는 여지의 무심함으로 영화 안에서 머문다 


E 나는 <안녕, 용문객잔>에서 보이는 이 비가시적인 점선 모양의 분할선을 '카스테라 커팅 쇼트'라 부르고 싶다. 카스테라를 자를 때 쓰는 흰 칼로 빵을 자를 때 , 칼의 이가 만들어낸 빵 윗부분 칼자국처럼(점선과도 같은), 영화에는 이런 분할의 기념적 순간들이 존재한다. 다리를 저는 매표소 여직원이 영사기사인 이강생에게 호빵을 잘라 갖다주려 할 때, 영화가 호빵의 먹음직스러움보다 호빵이 반쪽으로 '나뉜' 상태를 지긋이 보여주는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정교함'은 결국 깔끔한 관계의 선언이 아니라, 미련의 동의어는 아닐까. 


F 우린 아직 완전히 헤어지지도 온전히 이어지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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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의 『첫숨』서평 시리즈 중 '사회학 파트'를 맡아 썼다. 


'각도의 정치학'이란 관점 아래. 


사람은 90도의 동물이다. 아니, 요즘엔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걸어야 하니 75도 정도의 동물이라고 하자. 땅이 있고 그 땅을 딛는 발이 만들어내는 각도를 통해 사람은 ‘수직적’이라는 이미지를 품어왔다. 물론 사람이 0도의 동물이 되는 시간도 있다.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거나, 새벽녘 깊은 잠을 청할 때 사람은 ‘수평적’인 이미지를 갖는다.

배명훈의『첫숨』을 읽으면서 ‘각도의 정치학’이라는 말이 맴돌았다. 그간 이 소설을 두고, 미래 도시 첫숨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키는 ‘걸음걸이’의 특색은 자주 언급되었다. 허나 걸음걸이의 구분을 통해 형성된 계층 문제에만 주목한다면, 사회는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가란 논의로 이 작품의 매력을 가둘 수 있다. 『첫숨』엔 사회에 대한 물음을 넘어 어떤 정치성이 보인다. 사람의 발과 지면의 구도가 자아내는 ‘각도’에서 비롯된.




작품의 한 축을 담당하는 무용수 한묵희. 또 다른 축인 보안책임자 최신학은 그녀를 따라다니며 “분류되지 않는 동작”에 주목한다. 지구에서 온 망명자인 최신학과 달에서 온 이주민 한묵희는 ‘중력비평가’가 되어 각자의 행성에서 느낀 이색적인 중력을 해석한다. 이 비평의 목표는 중력의 정치를 실감하는 것이다. 특히 한묵희는 공연을 통해 중력의 정치를 몸소 보여준다. 6분의 1 네이티브인 한묵희는 첫숨의 상류층으로 구성된 3분의 1 네이티브인 화성계 사람들, 이 중력이 부과하는 걸음걸이 등을 따라하며 상류층을 꿈꾸는 첫숨 주민 앞에서 중력을 ‘교란’한다.


교란이란 표현을 썼다고 해서 한묵희의 행동을 ‘전복’과 ‘전위’의 의미로 쉬이 해석하고 싶진 않다. 『첫숨』은 생각보다 조심스러운 소설이기 때문이다. 과감하게 지르기보단 과감함 이전에 나오는 세심한 모색에 에너지를 더 쓰고 있다. 가령 배명훈은 짧은 대목이지만 무용수의 상(像)에서 흔히 보이는 상처투성이의 발가락 대신, 발목에 주목한다. 한묵희의 발목은 지구 중력의 6분의 1(달)과 3분의 1(첫숨) 사이, 지면과 허공 사이, 도약과 착지 사이를 잇는 정치적 장치다. 한 곳만 챙기기에도 하중이 실리는 사람의 발목. 한묵희는 양쪽을 매개하며 발목에 스며든 무게를 견딘다.


이 무게는 어느 무용수의 고생담 같은 인간미를 우려낸 서사가 아니다. 중력을 교란하는 일은 곧 한 사회가 부과하는 걸음걸이의 분류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며, ‘수직적’ 인간이란 일정한 각도의 이미지를 분열시키는 정치적 행위다. 방방 뛰어올라도 안 되며, 그렇다고 너무 위축되어서도 안 되는 이도 저도 아닌 첫숨 사회의 보법(步法)을 떠올려보자. 무대에서 펼쳐지는 한묵희의 춤은 지면과 탈·부착하며 곧추세워 살아온 ‘90도의 인간들’이 받아온 부담을 폭로하고 위로한다. 90도의 인간들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 어딘가를 정복하고, 높은 새 건물과 웅장한 기념비를 지으며 그렇게 자신들을 위무해왔다. 자신들의 발이 그 무엇보다 정직하고 성실하리라 믿는 가운데, 90도라는 각도는 문명과 진보의 척도가 되었다.


작품의 중후반부, 한묵희가 공연에서 선보이는 춤은 ‘상상력’이란 말에 갇힌 채 사람이 차마 하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동작이 아니다. 문명이 도래한 이래, 사람이 사회와 관계 맺어온 90도라는 각도의 형식은 무대의 천장 유리가 깨지듯, 한묵희의 비행을 통해 신랄한 의문에 부쳐진다. 한묵희의 춤은 비판적 물음이 탈색된 아름다운 기예가 아니라 예술비평가들이 중요하게 언급해온 ‘비판적 무용학’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소위 ‘걸음의 사회학’은 퇴보해가고 있다. ‘만보객’ ‘산책자’의 정치성은 시끄러운 사회를 버티는 고요한 사색의 힘 따위로 변질되었다. 방방곡곡을 누비는 것이 자연스런 여행 시대. 걸음이란 라이프스타일을 꼬집는 비평은 고작해야 주말 등산객에 대한 불편함을 하소연하는 것에 멈춰버렸다. 그것은 ‘걸음의 사회학’이 사람의 발과 지면이 만들어내는 각도에 안일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첫숨』은 문명과 사회를 지탱해온 인간의 문제는 발도 땅도 아닌, 그것을 잇는 중력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중력은 그저 사람이라면 알아야 할 과학 교양이 아니다. 중력은 이 사회를 좌우하는 이데올로기이자, 투쟁해야 할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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