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프로듀스101>을 눈여겨보는 이유
_'플랫폼화된 (예술적) 신체'에 관하여

1. <프로듀스101> 같은 프로그램은 사람이 얼마나 자신의 특색 있는 컨텐츠를 갖고 있냐는 기준으로 보기 쉽다. 하나 매주 에피소드를 챙겨 보면서 101명 중 자신의 신체 감각을 고유의 컨텐츠가 아닌, 하나의 플랫폼으로 보는 몇몇 캐릭터들이 마음속에 맴돌았다.

2. 아이돌도 엄연히 문화노동자임을 감안할 때 그 개인은 자신의 미적 감각, 신체에 내재된 그 취향의 채널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적 자원을 배치하는가. 

3. <프로듀스 101>에서 트레이너는 있지만, 그들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도와주는 범위는 지정된 에피소드의 성과에 부합하는 '조직화 생성'까지 나아가진 않는다. 이것을 수행하는 사람은 걸그룹 데뷔를 이루려는 101명이다. 본 프로그램은 센터, 메인보컬, 서브보컬, 랩, 서브랩 등 대중적 성공을 위해 일시적으로 모여야 하는 임시 공동체에 필요한 역할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분업 형태를 인식한 101명 중 김청하나 전소미, 임나영(물론 이들은 주어진 미션에서 뛰어난 컨텐츠를 보여준다)은 101명의 캐릭터를 나름 하나하나 살펴가면서 매 프로젝트에 주어진 목표를 위해 다른 동료의 미적 신체가 무슨 위치에 있어야 하고,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는지 '미적 배분'을 수행하고, 기꺼이 자신의 신체를 플랫폼으로 삼는다. 

4. 이런 플랫폼화된 신체를 보여주는 그들에게 반드시 좋은 결과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미적 에너지의 분할과 배분 속에서 그들은 임시 공동체를 위한 그라운드가 되어주지만, 지금까지 그들의 순위는 생각보다 최상위권은 아니다.

5. 101명 다 크고 싶어서 왔지만, 이미 그 안엔 누굴 키울 수 있는 캐릭터가 있다. <프로듀스101>엔 소속사, 브랜드의 힘, 국민프로듀서와 투표, 미모와 매력 등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클 가능성의 요소'에 따른 금수저-흙수저(이미 될놈될 같은), 101명의 열의를 착취하는 문화노동 구조와 이를 안전하게 가린 채 냉정한 소비자로서 보고 싶어하는 대중의 심리 등, 비판해볼 지점이 있지만 그게 이 프로그램에서 보려는 내 관심사는 아닌 것 같다.

6. <프로듀스101>에서, 몇몇의 플랫폼화된 미적 신체를 현시하는 개개인은 얼마나 '자기조직화'를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던져준다. 프로젝트식 삶에 최적화된 임시 공동체의 형성, 그것에 따른 관계의 탈부착과 여파, 임시 공동체의 목표를 위해 취향과 각자의 정서에너지까지 챙겨야 하는 오늘날 청춘의 미적 신체와 그 감각이 어떻게 배치되고 있는지. <프로듀스101>을 계속 눈여겨보게 되는 이유다. 101명은 걸그룹 데뷔를 해야 하면서도 실은 그 안에서 자신이 '걸그룹 데뷔를 시켜줄 능력'이 있는지도 동시에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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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매체는 발전하지만, 매체에 대한 성찰은 외려 과거를 참조해야 할 때가 많다. 매체에 대한 성찰은 다종다양한 테크놀로지의 존재, 능수능란한 수용과 지식에 있는 게 아니라, 매체가 희소했던 시대에 사람들이 보여준 감정, 유령 같은 행위에 내재된 당시엔 해석할 수 없는 어떤 깨우침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 


B. 버스터 키튼의 <카메라맨>(1928)은 이를 입증하는 영화다. 1919년부터 미국에선 뉴스릴카메라가 활용되기 시작했고, 1920년대 뉴욕은 사건과 사람을 담아내기 위해 카메라를 든 사진가들이 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주인공인 버스터 키튼은 거리에서 사람들의 초상을 찍어주는 사진사인데, 우연히 언론인 샐리와 사랑에 빠지면서 샐리가 다니는 언론사에 입사하려 한다. 그는 오디션을 거치면서 '정지된 사람의 모습'이 아닌,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을 찍는데 <카메라맨>은 이 오디션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연발의 해프닝을 담은 작품이다. 


C. 이 영화의 공동감독이기도 한 키튼은 사건을 찍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더 나아가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사건을 타인에게 보여준다는 건 무엇인가에 대해 예리한 시선을 드러낸다. 영화는 사진의 시대에서 영화의 시대로 신체와 그 감각을 안정적으로 옮겨가는 미국 사회의 풍경 속에서, 결국 좋은 사건(으로 인정받는 것)이란, 누군가의 모습이 있는 사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사건이 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D. 사건이 중요해지고 그만큼 이를 담아낼 매체의 발전과 엘리트, 대중의 호기심도 커지는 시기. 그러나 이 영화는 오늘날 대중이 사건에 느끼는 피로감을 예언이라도 한 듯, 사건 하나하나에 대한 강조점을 두지 않는다. 사건과 특종, 카메라맨들의 활력이 두드러질 시기에 <카메라맨>은 사건에 대해 어떤 허무함을 강조한다. 


E. 그리고 그 허무함은 "스톤 페이스"란 별명답게 무표정이 자아내는 버튼의 유머로 인해 도드라진다. 이는 며칠 전 별세한 움베르토 에코가 좋아했던 개념인 "우모리스모", 즉 희극에서 어떤 비극을 아울러 느낄 수 있는 인간 본연의 모습과 이어진다. 


F.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어왔지만, 나는 자기 예언적인 실현을 담은 영화에서 어떤 매력을 느낀다. <카메라맨>은 카메라, 사람, 눈, 시각성, 보는 대중에 대한 미래를 스스로 내장했던 작품이라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키튼은 희극이란 도래하는 비극을 감지하는 예술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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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이후_아케로 마냐스의 <노벰버>(2003)를 봤다. 재미란 말이 재미가 없는 것처럼(이는 금정연이 어느 글에서 썼던 표현이다), 시도란 말에 '시도스런' 기운은 없다 


A 시도란 것에 시시함을 느끼고 있음을 표해야 우리는 그 동여낸 마음을 갖고 그나마 상처를 덜 받고 살겠거니 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어쩌면 방금 꺼낸 그 말을 괜시리 왜 하냐고 이죽거려야 하는 단계까지 와 있는지 모르겠다 


B <노벰버>는 '선언'과 '시도'에 관한 영화다. 작품은 순진하고 우직하다. 그래서 더 생각할 거리를 준다. 


C <노벰버>는 '수행성'에 관한 영화다. 언어는 표현될 때 그 자체의 힘으로 인간을 얼마만큼 움직이게 하는지, 더 나아가 고뇌에 빠뜨리게 하는지 영화는 그 곤경을 그려낸다. 어떤 강제와 어떤 자율이 이상하게 섞인 상태에서 '노벰버'라는 극단의 인물들은 수행성의 덫에 갖히고 만다 


D 애초에 자신들의 시도를 견고히 해줄 극단 내 '약속의 언어'가 자유 대신 감옥이 될 때, 인간은 예술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E 우리가 한 번쯤은 들은 대답일 수도 있겠으나 이 영화가 후반부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공연 씬은 , 왜 인간이 '시도 이후'의 예술에도 결국 '시도'를 찾게 되는지를 우스꽝스럽게 보여준다. 요즘 시대엔 점점 찾아보기 힘든 어떤 대의를 위한 자기 희생적인 우스꽝스러움을.


 F 이 영화의 결말을 보고 나서 숙연해지거나 혹은 야유를 보내거나. 이 틈을 비집는 새로운 질문을 여전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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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 <젠틀 진보라는 환상>이란 글을 썼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줄곧 제기하고 있는 진보의 싸가지론이 어떤 한계가 있는지 그의 '인용력'이 갖는 문제점에서 고찰해보았다. 그러기 위해 우선 2014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젠틀 진보라는 환상>(전문 링크) 


"2014년은 현재 강 교수의 생각을 읽는 데 중요한 해다. 그해 싸가지 없는 진보가 나올 당시, 그의 생각에 보탬이 된 책이 나왔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의 ‘모멸감’과 미국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이다. 특히 올해 2월에 나온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에서 ‘모멸감’은 중요하게 언급된다. 얼핏 제목만 보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두 사람 다 정치와 도덕의 관계 회복을 주장한다. ‘이왕 싸우는 거라면 건설적으로 싸울 수 없을까’라며, 품격과 교양 있는 정쟁 그리고 정치적으로 나이스하고 젠틀한 개인상을 제시한다. 한데 논의를 자세히 뜯어보면 저자들은 정치와 감정의 연관성 속에서 유독 정치 현상을 ‘자극과 반응’의 틀에서만 생각하려 한다.

강 교수는 이를 참조해 자신이 오랫동안 제기해온 정치의 종교화라는 프레임을 다시 한번 강변한다. 이념과 영웅화된 정치인에 대한 극단적인 몰두를 중단하자고. 백 번 천 번 옳은 이야기다. 하나 그가 보수와 진보를 종교적 은유에 가둘 때 간과하는 지점이 있다. 중도와 부동층이야말로 현실 정치의 새로운 종교적 은유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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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 다>에 『정동 이론』에 관한 서평을 썼다. 정동 이론의 언어는 어떻게 정동연구자와 정동연구 비판자 양쪽에게 덫으로 작용하는가, 그 문제를 지적해보았다.




어느 날, 퇴직하고 카페 창업을 준비 중인 A가 친구 B와 서울 연남동을 찾았다. A는 지인 D의 소개로 연남동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C를 만났다. A는 C와 함께 커피 한잔을 마신 뒤 연남동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물었다. “가장 최근에 생긴 카페가 저곳이에요?” C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차피 그 옆에 금방 또 생길 거예요.” 대화를 듣던 B가 속으로 중얼댔다. ‘아니, 최근에 생긴 카페가 저 건물이면 저 건물이라고만 얘기하지. 왜 저리 말한담.’ 

 

   사회심리학자가 대화를 들었다면, C의 말에 스며든 빈정거림은 요즘 사회에 팽배한 집단적 냉소가 전염된 예라고 말했을 것이다. 내향성을 다루는 정신의학자는 C의 인간 관계와 성격을 조사해 전두엽을 문제 삼으며, C의 빈정거림과 까탈스러움에는 세로토닌의 부족이 핵심이라고 진단할 것이다. 문화연구자나 문화사회학자들이었다면, 홍대 특유의 ‘힙스터스러움’과 젠트리피케이션의 연관성을 꼬집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를 다 들은 뒤 그런 감정을 하나하나 포착하고 진단하는 게 체제에 타격이라도 줄 것 같냐며, 다 개소리라고 성질을 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대화를 진지하게 따져보려는 연구자들의 영토가 있다. 『정동 이론』은 그 영토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정동연구자들의 맥락을 따르면, 우리가 대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C의 빈정거림이 아니다. 정동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이 포문을 열 것이다. C가 왜 ‘아직 있지 않은 상황’을 자신의 현재로 언급했을까. 정동연구자들의 눈엔 C의 행동은 빈정거림 혹은 따스함이라는 감정의 유형에 쉬이 포섭될 수 없다. 몸과 마음의 마주침에 집중하는 이 연구자들에게 C는 그저 ‘내뱉은’ 자 일 수 있다. 내뱉음은 ‘헐’ ‘대박’ ‘작살’ ‘열라’처럼 순간을 기념하되 금세 휘발될 가능성이 있는 몸짓이다. 이 몸짓은 우발적이되 삶 가운데서 어떤 반복된 리듬을 확보한다. 내뱉음을 인정하는 순간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의 에너지가 ‘자신도 모르게’ 삶의 어떤 패턴으로 만들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다. 고로 나는 내뱉는 자신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내뱉는 자는 자신을 믿기 때문에 말의 에너지를 분출하지 않는다. 내뱉음은 자신을 믿지 못할 수밖에 없는 데 기인한 어떤 긴장감이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적 분출이다. 

 

   정동연구자들은 기본적으로 마음을 어떤 형태로 확정하는 언어보다는 순간적 분출에 매료된 자들이며, 때론 의심을 품는 자들이다. 책 속 표현처럼 형언할 수 없는 것을 편평하고 매끄럽게 해석하려 드는 자들에게 엿 먹이려 하는 자, 이들이 정동연구자다. 

 

   물론 이 예를 통해 정동 연구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만을 건드린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들은 ‘아직 아님not yet’이라는 약속 가운데서 이 사회의 지배 체제에 내장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모순을 파헤치는 데 관심이 많다. 확신보다는 도래를 신봉하는 이들의 사유는 어쩌면 시대의 음모론을 음모론으로 맞서는 ‘맞불의 문화정치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동연구자들의 기술은 다가올 위험에 대한 편집증적 과장이 아니라, 부대낄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섭렵에 가깝다. 


 다만 확실보다는 불확실을, 달라붙음보다는 흘러내림을, 서 있음보다는 미끄러짐이라는 사고 체계를 따르는 『정동 이론』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이 액체적 언어에 대해 혼란을 느낄지 모른다. 

 

   가령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정동 이론은 결국 학자가, 혹은 이 사회를 깊이 고민하려는 독자가 가져야 할 ‘윤리적 당위’ 수준에 머물러버리는 건 아닐까. 이 책에선 정동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와 결과가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정동 이론이 지향하는 근본적인 사고가, 외려 연구자들의 언어를 불확실하고 형언할 수 없는 세계를 세밀하게 그려냈다는 ‘소묘의 기술’, 정동으로 가득 찬 세계를 두고 신경 써야 할 다채로운 맥락을 ‘수집·편집하는 기술’로만 인식되게 주저앉혀버리는 건 아닐까. 여기서 정동연구자들이 챙기는 근본적 사고는 정동을 특정한 마음의 양태로, 주체의 신체에 스며든 일정한 기운·에너지·정서로 확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나 정동연구자들의 말대로 (들뢰즈의 영향력이 느껴지는)  ‘잠재성’이란 가치는 자신들이 수고스럽게 내린 진단의 맛을 도리어 싱겁게 하며 주장의 선명함을 도려내는 ‘윤리적 강박’으로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정동이란 영토를 휘젓는 다채로움과 열림의 사고가 서로 스며들며 현란하게 맞부딪힐 때, 그 결과는 예상보다 헛헛한 구석을 남긴다. 

 

   나는『정동 이론』을 읽으면서 아직 아님을 희망의 모토로 외치는 정동연구자들에게 잠재성과 가능성이란 정동의 주요한 가치는 덫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들은 자칫 그들의 섬세한 노력을 학문을 다루는 사람이 갖는 이색적인 태도로만 소비할 수 있다. 특히 정동을 둘러싼 이색적 언술이 우리의 닫힌 사고를 묘파해내는 실제적 장치가 아니라, 우리 모두 의식하며 살아야 할 불확실한 미래의 설계도가 이럴 것이라고 되풀이하는 청사진으로만 기능할 때 더욱더. 정동연구자들은 이 미지의 세계를 미지로 수긍할 청사진으로서의 정동을 자주 언급한다. 이때 그들은 아직 학문적으로 제대로 꽃피지 않은 정동적 사고의 시간성을 언급하며 더 무르익을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약속하는 자가 약속에 도취되었을 때, 약속은 자신이 정한 룰에 안주해버리는 허황된 말의 게임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러한 위험은 약속 자체를 견고히 하고자 누군가가 찾지 못했다는 데서 온 희소성에 희열을 느끼는 장이 될 수 있다. 마치 문화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할 때마다, “그동안 00에 관한 연구는 관심을 받지 못해왔다”로 소재주의에 안착하는 한계를 보였을 때처럼. 

 

   한편 ‘아직 아님’이란 정동연구자들의 모토는 이 연구 영역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논거이기도 하다. 정동연구자들을 비판하는 논리 중 하나는 ‘대세론’이다. 비판자들은 최근 몇 년간 국내에 정동 연구가 주류가 되었다는 식의 인트로를 내세우며, 정동 연구를 비롯한 감정에 관한 관심이 지배 세력의 효과로 전락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여기서 내가 갤럽이나 리얼미터에 의뢰해 정동 연구가 메인스트림에 올랐는지 수치화해보려는 건 우스꽝스러운 일일 게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은 정말 이 연구가 대세인지 여부가 아니다. 자신이 비평하려는 대상을 대세로 쉽사리 선정한 채, 그 대세라는 위치에서 사람들이 자연스레 갖는 부정적인 시각을 고스란히 자신의 논지에 시너지로 활용하는 사고다. 소위 ‘힙hip’에 예민한 국내 학문 사회에서 두드러진 이 사고는 정동 이론을 비판하는 데 안일하게 쓰이고 있다. 

 

   대세론 안에는 시급한 시국에 ‘마음 나부랭이’나 고민하고 앉았다는 ‘호전론’도 보인다. 호전론에는 자신은 냉철하고 파이팅 넘치는 관점을 내놓고 있는데 반해 마음을 다루는 연구자들은 그 어떤 갈등도 봉합한 채 고요하고 고귀하게 이 사회를 분석하고 있지 않냐는 의구심이 들어 있다. 이러한 호전론이 2008년 촛불 집회 당시, 미디어를 수용하는 사람의 쾌락과 욕망을 발견하며 지내는 문화연구자들이 그간 얼마나 물러 터졌는가, 다시 강성한 이데올로기로 돌아갈 때라며 문화연구를 비판했던 목소리와 겹쳐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닐 게다. 정동 연구를 꾸짖는 호전론은 정치에 관한 연성화를 꼬집는 거센 우려만큼이나 게으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동 이론』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책임을 입증한다. 정동연구를 비판하는 자들은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을 빌어 ‘아직 아닌’ 상황들을 예측하고 짐짓 진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여기서 더 주목해보고 싶은 점은 비평의 몰락이란 새삼스런 진단 가운데, 정동이론가나 이 연구를 비판하는 자들을 통해 발견되는 어떤 비평의 속성,  소위 ‘건강염려증’에 걸린 비평이다. SNS에 흩뿌려진 저 정체 모를 냉소와 혐오, 분노 / 근거 없는 긍정, 애정, 찬사 가운데서 우리는 저 두 유형 중 어느 쪽이든 쉬이 안주해 호응을 얻고자, 내가 받을 ‘반응 자체를 상상하며 염려하는’ 비평을 하고 있진 않은가. 아직 아님이란 정동연구자들의 희망 섞인 약속의 언어는 아직 오지도 않은 정동적 반응을 지정해 이 정도면 ‘먹히겠지’ 하는 안전한 비평어로 의도치 않게 변질되어버린 건 아닐까. 

 

   고로 지금 우리에게 환영받는 비평이라곤 사람들의 격노가 지나치면 자제하라고, 사람들의 분노가 모자라면 증폭시키라고 주문하는 ‘수위 측정의 비평’일 뿐이다. 아직 오지 않은 웃음, 아직 오지 않은 울음, 아직 오지 않은 냉소, 아직 오지 않은 분노를 종합선물세트처럼 떠안은 채 늘 상상하고 방어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이러한 비평이 ‘사이다’로 대접받는 만큼 서글픈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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