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설 작가의 새 소설집 『오늘처럼 고요히』의 해설을 썼습니다. 살면서 소설집 해설은 처음입니다.  '착잡한 자들의 몸짓'이란 제목의 글인데, 본 소설집을 '밥값' '밥심' '밥때'란 관점으로 재구성해 다시 읽어본 시도를 담았습니다.


독자들의 작품 읽기에 소소한 도움되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살과 타액의 교환이 형편의 교환으로 한 단계 나아가는 순간,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이 ‘이 정도밖에 못 살았다’는 미안함과 ‘그런 것 따지는 사람 아니다’라는 의연함을 주고받는 과정임을 안다. 표면적으론 훈훈한 성품의 교환이지만, 이면에는 ‘사회적 삶의 상처’들이 교환된다. 김이설은 이 상처를 전략으로 읽어내고 계발해내는 사람들, 그러한 그들을 어설프게나마 따라 하는 사람들, 이 잔혹한 현실이 자신도 모르게 이뤄져버린 데 대해 멍한 사람들의 구도를 정밀하게 소묘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일보 2030세상보기. 연재 마지막 글입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 영화계는 잠시 일상성이란 용어에 취했다. 관객은 자신이 목욕탕 한증막에서 자주 보인 습관, 사과를 감자 깎듯 할 때의 당황스러움, 가끔 발가락 사이를 문지르며 냄새를 맡는 동작까지 영화가 담아낸다는 것에 공감이란 반응을 보냈다.


더 깊은 논의가 있어야겠지만 영화비평가나 연구자들 사이에선 홍상수 감독의 작품과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작품이 주목 받으면서 일상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영화계에서만 일상성을 주목한 건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출판계에서는 ‘○○가지’라는 제목을 단 책들이 연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20대에 운명을 바꾸는 50가지 습관’처럼 일상은 소소한 미담과 체험이 가득 찬 에피소드로 가지런히 수집되었다.

뒤돌아보면 일찍이 이게 대체 일상성인가라며 의문을 표한 사람들은 많았다. 당시 평자들은 ‘쇄말주의’란 용어를 자주 언급하곤 했다. 쇄말주의는 삶에 대해 우리가 놓쳐선 안 될 질문을 던지는 대신, 삶을 유난히 자잘하게 표현하는 데 그치고 마는 어떤 기교를 비판할 때 쓰인다. 이 기교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것은 일상 속 한 장면을 ‘~하는 법’으로 재현하는 경우였다.


과거 영화계나 출판계가 주목해온 일상성은 최근 피키캐스트 같은 생활플랫폼, 웹툰 그리고 독립출판계로 옮겨온 듯하다. 선뜻 입 밖으로 꺼내기엔 창피하거나 곤란한 생활상을 ‘짤방’과 위트 있는 짧은 글로 보는 게 낯설지 않은 요즘, 기존 언론사와 포털도 주요한 카테고리에 ‘~가지’로 수렴되는 이야기를 자주 게시한다. 작은 서점, 독립 책방에 꽂힌 다종다양한 잡지와 책들에는 생활들이 난무한다. 가히 생활이 폭발 중이다. 나는 이를 ‘가지 저널리즘’이라 부르려 한다.

가지 저널리즘에서 눈여겨보는 지점은 배려와 배움이다. 가령 생활툰이라 불리는 웹툰, 그리고 우리 삶을 유머러스하게 재구성해내는 피키캐스트의 감각엔 배려가 있다. 특히 피키캐스트는 삶 속에서 신경 쓰이는 여러 순간을 재치로 전달한다. 이때 재치는 우리가 예민하게 고민한 생활상을 불편하지 않게 전하는 배려의 기술이다. 하나 뒤틀어 보면 배려란 당신이 사회가 세워놓은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게 권하는 삶의 소극적 방어술일 뿐이다. ‘직장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 푸는 법 TOP5’ ‘조별 과제할 때 챙겨야 할 갈등 5가지’를 통해 얻은 재치에서 내가 속한 세계를 탈바꿈할 수 있는 상상은 없다.

가지 저널리즘이 우리에게 재촉하는 것은 이른바 ‘생활 지능’이다. 우리 삶이 베스트로, ○○가지로, 탑으로 항목화되는 사이 개인은 생활의 미세한 장면을 그때그때 어떻게 신경 쓸지 요구 받는다. 이는 어린 시절 들었던, 몇 살 인데 아직도 형광등을 제대로 못 갈아?, 신발끈도 못 묶어? 같은 부모들의 ‘생활점수’ 채점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다.

가지 저널리즘은 개인의 눈에 심리를 부여한다. 카페, 칸막이 책상, 술집, 고시원, 교실에 위치한 ‘나’는 상대의 마음을 활달히 꿰뚫어볼 수 있는, 그러나 성격상 내향적인 관찰자로 규정된다. 관찰자인 나도 누군가에게 생활지능을 평가 받는다. 관찰 속에서 생활은 점차 오디션이 된다. 그럴수록 내 관찰은 정찰로 변한다. 조용한 당신과 내가 일상 속에서 언제 음침하고 괴물 같은 적으로 다가올지 모르니 미리 조심하자는 정찰. 여기엔 서로 부대끼며 얻는 배움의 예상치 못한 묘미란 없다. 예측 가능한 심리적 패턴을 접하면서도, 공감이란 이름 아래 전혀 생각지 못한 삶에 관한 고민을 만난 마냥 연기(演技)할 뿐이다. 생활의 세밀화(細密畵)에만 집착하는 가지 저널리즘이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공감이야말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괴물이 아닐까. 난 여전히 공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과 김엄지의 작품을 비교해보면서, 과연 작품을 쓴다는 것은 어디까지가 범위인지 고민해보게 되었다. 두 작품 다 표면적으론 시적인 호흡과 소설적인 호흡의 경계를 되묻는다. 물론 당신은 이런 '시도' 자체에 대해 이미 기대치를 낮추고, 실험이란 용어에 냉소라는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기에, 내가 할 이야기를 비교적 냉랭하고 차분하게 받아들일 줄 믿는다. 아울러 나 또한 실험이란 용어를 내걸어 언급하는 작품들에서 느낀 아쉬움을 어떤 성공작으로 둔갑시키고픈 마음은 없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명백한 실패작을 완성도 있는 성공작으로 둔갑시키는 독창적인 해석'이란 지젝의 견해를 고스란히 내 시야로 전유할 능력은 아직 내겐 없다. 물론 내가 언급하는 작품들 또한 명백한 실패작도 아니다.

2. 난 두 작품을 읽으면서 책이라는 물성을 띤 출판이 과연 그 작품에 어울리는 것일까 생각했다.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시적인 호흡과 소설적인 호흡이란 장르에 대한 신경 씀에서 온 것은 아니다. 특히 김엄지의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의 손은 검은 글자를 지면에 새기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끝내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게 맞는 걸까, 아리송했다. 소설도 일종의 조형이라면, 소설가는 자신의 언어를 '디자인을 기다리는 말들'로 규정하지 말고, 자신의 언어에 대한 디자인까지 책임지는 것이 작품을 쓰는 것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을까.

3. 어느 문학 웹진에 실린 김엄지의 소설을 보면서 나는 스마트폰으로 한 번, 데스크톱으로 한 번 작품을 읽었다. 그리곤 스크롤바를 내리는 내 손가락의 감각과 눈의 이동, 이 감각적 배치에 스며든 작품의 행갈이와 어떤 호흡, 서술하는 언어들의 헤엄침을 보면서, 과연 웹진이라는 형태의 공간, 더 나아가 책이라는 형태의 공간과 그 공기는 김엄지가 글자로 자아내는 공기와 어울리는 걸까. 나의 눈과 몸은 그리 익숙하게 작가의 언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4. 여전히 우리는 디자인과 디자이너를 어떤 미적 결과물을 위한 오퍼레이터 정도로 염두에 두고선, 텍스트에 대한 보완적 성격으로 디자인의 미적 가치를 한정해버린다. 그러나 과연 디자인은 소설을 위한 어떤 전략이자 소설의 언어를 뒷받침하는 테크놀로지로만 치부해야 하는 것일까.

5. 가령 나는 최근 한 계간지에 실린 이종산의 단편을 보면서 '페이스북화된 관찰기'라는 특성을 떠올렸다. 본 작품 속 등장하는 카페에서 주인공 화자가 선보이는 어떤 '심리적 눈'은 페이스북 사용자 중 출근길이나 퇴근길에 자신이 카페에 앉아 주변을 살피던 내용을 1. 2. 3. 순번을 매겨가며 공유하는 것과 유사했다.(물론 이종산 작가가 직접 그런 행위를 벌였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실천의 감각 또한 우리 삶의 신체적, 심리적 재배치를 유도하는 '디자인적인 것'으로서 저 소설이 책이라는 지면이 아닌 다른 영역을 통해서 '표현'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이 들었다.

6. 여기 한 편의 문학 작품이 있고, 그 작품은 작가의 손과 독자의 손에 의해 어떤 의미를 갖는다. 그러했을 때 우리는 어떤 단촐함과 평상심으로 독서 경험이라는 자체의 향수와 여전한 매력을 공유한다. 하나 우리 손이 느끼는 어떤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좀 더 과감함을 느껴봐도 되지 않을까. 작가의 손과 독자의 손은 문학과 디자인의 관계에 대한 재설정을 도모해봐도 되지 않을까. 디자이너의 어시스트와 소설가의 텍스트라는 형태가 만들어내는 기존의 시각적 실험 체제라는 영역 대신, 우리는 좀 더 소설가 본인의 직관에 따른 시각 체제의 구상과 그 실천을 작품을 쓴다는 것이라는 범위로 더 밀어붙임을 같이 모색해봐도 되지 않을까.

7. 언젠가 웹투니스트 이자혜 작가가 너의 아버지는 부자란다라는 암호와도 같은 짧은 말을 sns에 올린 적이 있다. 사람들은 이 암호를 제각각 받아들이면서도 뭔가 해석될 수 없는 기운 가운데 리트윗을 하고 관심을 보였다. 나는 김엄지의 작품이 외려 책이 아닌 트위터를 통해 공유되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았다. 그러했을 때 비평가들은 자신의 앎의 깊이로 표층 너머를 해부하려는 데서 오는 허탈함을 돌아볼 경우가 올 것이다. 암호와도 같은 말에 대해 그 암호를 푸는 게 정말 맞는 걸까. 이 아리송한 고민에 대한 답을 풀려고 발버둥치다 보면, 표층 너머의 세계를 '소설 너무 쉽게 쓰는 거 아냐'라는 식으로 작가의 태만으로 몰고 싶은 유혹과 전진하지 않는 자동차 바퀴에서 나는 탄 냄새 자욱한 '공회전식 물음' 같은, 비평은 왜 하는 걸까란 마주하기 싫은 질문 사이에서 또 한 번 방황한다. 나도 그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것이 알고 싶을까

_대중영화, 그 정치적 읽기의 매혹과 한계 


1. 대중영화, 특히 '천만영화'로 비롯되는 작품에서 정권과 정치, 시대/당대의 분노와 좌절을 징후적으로 읽어내려는 건 빠져들기 쉬운 유혹이자 거부하기 어려운 매혹이다. 며칠 뒤 학생들과 '천만영화라는 감정'의 테마로 이야길 나눠야 하는데, 사실 나는 이 확신과 자신이 묻어날 수 있는 테마에서 꽤 오래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는 지금도 혼란스럽다.


2. 평자가 비평의 초반부에 어떤 무력감이나 곤경을 표하는 게 그리 낯선 일은 아니나, 여전히 완료된(그것이 유사-의 형태로라도) 귀결점(그것이 영화의 의미를 넓히든, 안온한 윤리적 소실점의 제시든 무언가 손에 쥘 수 있는 목소리를 '예리하다'는 평으로 보고 싶어하는 도착지로서)이 익숙한 가운데, 그럼에도 그 곤경과 무력함을 숨기지 않는 쪽은 내게 어떤 모험으로 다가온다.


3. 에두르지 않고 말하자면, 나는 최근에 영화평론가 김경욱이 쓴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 '국제시장'에서 생긴 일》을 읽고 많이 실망했다. 쉬이 정의하기 어렵지만 소위 '정치영화'라고 불릴 수 있는 최근 대중영화의 한 장르에서 정작 '정치적 탈색'이 일어나고 있음을 논하는 이 비평집은 평자가 대상으로 삼은 너무 쉽게 정치를, 사회를 들이미는 요즘 영화들만큼이나 비평 또한 그러했다. 차라리 신중함 측면에선, <부러진 화살> <도가니>를 통해 고다르의 관점 "정치에 대한 영화"/ "정치적인 영화"를 숙고해본 남다은의 옛글 <정치영화는 정치적인가>(《에프》기고)가 나았다.


4. 하나 남다은 또한 예술=이데올로기라는 투박한 관점의 개입으로,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대중적 "분노의 드라마"를 고찰하는 데 대한 허술함을 잘 털어놓았으면서도, 자신이 대안적 모델로 삼은 영화들에 내재된 실험성과 그 의미를 지나치게 확신하고, 그 목소리를 영화의 정치적 실천으로 내세운다. 남다은은 '불온한 실험성', 그 또한 글에서 경계하려 하지만, 여전히 매혹될 수밖에 없는 독립영화 특유의 '유사-멸망'의 정서에서 오는 답없는 공간들의 은근한 자기 확신에 대해 쉬이 기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해 물으면서 나는 또 방황하는 내 마음을 확인했다.




5. 그리고 여기 노무현을 관통하는 두 영화평론가의 글이 있다. 하나는 <변호인>을 다룬 허문영의 <살균과 표백>이고, 다른 하나는 김선일 피랍 영상을 논한 정성일의 <영화를 볼 것인가, 말 것인가>다. 두 글 다 비평가로서 어떤 곤경과 난색, 괴로움을 표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두 글은 토로로 시작하면서 자신이 무얼 이야기하는 걸 두려워하며 피하고 싶은지란 고백이 예상외로 평문의 열쇠가 된다. 어떤 불안과 무력감으로 시작하는 두 글은 결국 선명한 정치적, 윤리적 결단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비평의 테크닉이기보단 둘 다 쓰면서 작동하는 감정들에 자신을 내맡긴 결과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6. 다만 허문영의 글은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가 실화 속 인물을 신화로 가두게 되는 사회적 단계가 어떻게 정치를 삭제할 수 있는가란  차원에서, 정성일의 글은 윤리적으로 역겨운 것을 봄으로써, '봄(seeing)'이 어떻게 정치적 타개책이 아니라, 더 정치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지 않음을 드러내는가, 보기를 수행하면서 정치를 행한다고 확신하는 눈이 실은 '탈정치적 눈'이라 주장한 점에서. 여전히 영화와 정치적 독해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곤경은, 정치에 대한 살균과 표백이 일어난 영화상의 '재현, 선택, 배제'의 문제임을 의도치 않게 제시해버렸다. 그나마 정성일이 '보지 않음'이란 실천을 정치적 행위이자 윤리적 결단으로 확언하는 바는 투박했지만 필요로 한 지점이긴 했다.


7. 그러나 정성일이 피랍된 김선일의 비디오 영상을 보지 않음을 외치는 것과 다른 맥락일지라도, 여전히 볼 수밖에, 아니 보며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보지 않음'이란 이 정치-윤리적 실천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프로야구팀을 향해 무관중 시위를 보여주자는 헛헛한 결의만큼이나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8. 지난주 샹탈 애커만의 회고전을 다녀와서 마음에 남는 한 작품으로 나는 조금 생각을 정리해보는 중이다. 1999년 발표된 <남쪽>이란 작품이다. 텍사스 주 캐스퍼 시에서 일어난 '인종 차별 범죄'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그것이 알고 싶다>류의 '법의학적 눈'으로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 사건 이후, 보통 영화들은 사건을 다시 재현하고자 노력하며, 그 가상의 세심함으로 관객 앞에 '사실이란 허구'를 내놓는다. 그러나 애커만은 재현하기 위해 단서를 찾지 않으며, 증언의 목소리는 관객의 울분과 애도를 동원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애커만이 집요하게 잡아대는 이 '트래킹 숏'에서 비춰지는 길에 백인들에게 죽임당한 제임스 버드 주니어라는 인물을 둘러싼 흔적은 없다. 영화는 속된 말로 '그것이 알고 싶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인다. 여기서 밀어붙이는 어떤 무심함에서, 그것을 정치적으로 읽고 싶은 유혹과 아니, 삼가야지 하는 유혹이 서로 스며들며 마음을 어지럽힌다. 


9. 그렇다면, 이 어지러운 마음, 뭔가 정의하기 어려운 이 마음은 정치적인 것일까. 다시 돌아와 <국제시장>에서 덕수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와 절삭된 한국 현대사를 비판하며, 여전히 국가주의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세대론의 헤게모니 각축전 으로 대중영화에서 정치를 읽어내며, 탈정치적인 것을 색출해내는 이 확신 어린 비평은 정치적인 것일까. 아니면, 어디서 정의할 수 없는 아니, 이 좀비 같은 현대인에게서 함부로 읽어낼 수 없는, 아니 읽어내기가 두려운 영화의 실험성과 그 비서사적 제스처들, 거기에 내재된 세계관의 징표를 우회하는 비평은 과연 정치적인 것일까.


10. 여전히, 그 어느 쪽이든 확신에 찬 말들 속에서 나는 <남쪽>의 집요한 트래킹 숏이 담아내는 길을 떠올리며, 우리가 알아야 할 일들에 대해 '그것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일까?'라고 묻는 영화의 질문에 대해, 영화로 행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이 무엇인지 그 가능성을 탐색해본다. 본다,  보려고 만든 영화에서 그녀는 정작 보여주지 않고 있으며, 알아야 하는 것처럼 만든 영화에서 그녀는 정작 아는 것에 무심하다. 괘씸하지만 고마운 영화다.  그 괘씸함을 통해 나는 다시 영화를 통한 정치의 발견을 더듬거려본다. 물론 더듬거리기 때문에 확신에찬 대답은 금물이며, 이미 실패를 예감하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L.SHIN 2016-03-15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호인].. 인상깊게 봤던 영화에요. 내용들이 떠올라서 VOD 사진을 잠시 멍하니 쳐다보았네요.(웃음)

얼그레이효과 2020-02-28 16:21   좋아요 0 | URL
너무 오래되어 이 덧글을 보실진 모르겠지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에릭 로메르의 희극과 격언 시리즈 네번째 작품인 <만월의 밤>(1984)은 '영역과 성격'에 관한 이야기다. 


A 실제로 영화의 실내디자인을 책임지기도 한 주연배우 파스칼 오지에는 루이즈란 디자이너로 나온다. 현실 속 오지에의 미적 취향은 주인공 루이즈의 취향이다. 


B 삶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얼마만큼 확보할 수 있는지 신경쓰는 루이즈. 그러나 루이즈를 독점하려는 남자들인 도시건축가 레미, 작가 옥타브는 그런 루이즈를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관계맺음을 자기 영역 안에서만 잘 발휘하려 한 채, 타인의 영역에 발들여놓는 걸 어색해하는 모습들을 그려낸다 


C 특히 레미와 옥타브는 자신의 실내 공간에선 기가 살지만 바깥에 나가면 사람들을 힘겨워한다. 루이즈는 그들을 간파하고 변화를 줄 것을 제안하지만 레미는 거부를, 옥타브는 외려 자신이 실은 사교적인 사람임을 강변한다 


D 영역을 확보한다는 건 일과 여가 사이의 균형, 삶의 패턴과 그 배치이기도 한데 본작에서 이를 인상적으로 연출한 장면은 '좀 앉아서 이야기해도 될까'라고 묻는 대화씬이다. 영화에선 누군가의 집으로 초대받고 그 누군가의 취향을 구경한 뒤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간다. 이때 자신이 늘 해온 삶의 패턴이 있는 주인공들은 상대가 좀 앉아서 이야기해도 되겠냐고 말할 때까지 눈치채지 못한다(영화에선 앉아서 이야기해도 되겠냐는 질문이 세 씬에서 꼭 한 번씩 등장한다) 


E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과연 서로의 영역을 확보해준다는 건 가능한가란 질문을 시종일관 던진다. 


F 영화엔 시적인 영화가 있고, 소설적인 영화가 있으며, 에세이적인 영화가 있는 것 같다. 로메르의 영화는 아마 에세이적인 영화에 해당하지 않을까. 그의 영화엔 아주 세심하고도 인상적인 말들은 없지만, 우리가 늘 쓰는 말들의 산문적 배치 속에서 곱씹게 만드는, 묘한 울림이 있다. 


G <만월의 밤>하면 영화가 시작할 때 나오는 "두 여성을 가진 자는 영혼을 잃고, 두 집을 가진 자는 이성을 잃는다"는 로메르 본인이 지은 격언이 유명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삶과 영역을 늘 고민하는 여성 루이즈가 카페에서 처음 만난 이에게 듣는 어떤 한마디를 더 좋아한다. "동전을 던져봐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