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젠 신형철의 [이 사랑을 계속 변주해나갈 수 있을까]와 김소연의 [순교하는 장난]을 읽었다. 두 편 다 김수영에 관한 글이다. 읽고 나서 이 두 편을 중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형철의 글이 김수영에 관한 대서사시라면, 김소연의 글은 단막극 같은 느낌이다. 신형철이 답은 지문 속에 있더군요 하는 그다운 범생이의 마음으로 김수영을 우직하게 계승하려고 한다면, 김소연은 커피에 따라나오는 냅킨에 우연히 적어본 메모들에서 출발한 소소한 선언 같다.




2
소소한 선언이라고 했지만 조촐하진 않다. 김소연은 소소함 속에서 김수영의 감각들을 꼼꼼하게 포착하고 배치한다. 이 시인은 김수영에게 천진성이란 감정을 발견하고 그가 언급한 '와선'에 호감을 느낀다. 부처를 체감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성실한 기운을 내뿜기보다 방구석에 누워 허공을 보며 부처를 느껴보려는, 그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 그것이 와선이다. 와선은 단지 건방짐이 아니다. 김소연에게 와선의 버르장머리 없음과 이에 기인한 천진성은 시대가 강압하는 정서와 맞붙기 위한 감정이다.




3
신형철은 김수영에게서 사랑을 끄집어낸다. 그는 김수영이 사랑을 모호하게 다뤄왔다고 말하며 이것은 김수영의 성실한 방황을 입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김수영은 '사랑은 무엇이다' 대신 '무엇도 사랑이다'라고 시를 통해 말해왔다. 사랑이 전자처럼 주어가 아니라 서술어가 됨으로써 신형철은 김수영에게서 어떤 필사적인 기운을 느꼈다고 진술한다. 그 기운은 419에 가닿아 있으며 김수영이 맞닥뜨린 현대사와 관련이 있다. 김수영은 사랑을 통해 절망으로 주변을 다 뒤덮고 싶은 체념 대신 그래도 남아 있는 기운의 긍정을 도모하려 한다. 그리하여 신형철이 주목하는 김수영의 사물은 '주전자 물 끓는 소리'다. 한때 김수영은 이 물 끓음에서 소시민적 안일함을 느꼈다. 시대는 험악해지는데 '나'는 방 안에서 이 '들끓음'을 외면한 채 물 끓음에서 생명의 존속을 확인하는구나 하는 그런. 그러나 시인은 그 생각을 확언하지 않았다. 사랑을 욕망의 자리, 일상의 자리에 한 단계 '내려놓음'으로써 그것이 외려 우리가 다시 한번 시대의 불우함을 뜨거이 이야기하기 위한 예열이자 시작이라 믿는다.




4
김소연은 오보에와 오케스트라의 음적 조화를 위해 오보에가 반음을 낮추어온 유래를 설명하며, 시인으로서 '낮춤'의 자세가 굴복이 아니라 성숙으로 가길 소망한다. 
김소연이 주목한 김수영의 사물은 '팽이'였다. 팽이를 세차게 돌리는 어린아해. 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 풍경에서 낯섦과 그리움을 느끼는 어른. 그녀는 우리는 어른이라서 이미 서럽다고 말한다. 어린아이의 천진성을 어른이 되어서도 나이를 먹은 만큼 잘 발휘할 것 같지만 그 기대는 빗나간다. 어른은 자신도 모르게 정돈되어간다. 시대가 요구하는 기운에. 그래서 팽이가 돌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그 팽이가 동공 안에 들어와 접착된 상태일 때까지 그 순간에 중독되어보는 장면은 어른에게 남겨진 가냘프지만 붙잡아야 하는 새로운 선언의 동기가 된다.
김소연이 밝히는 선언은 다음과 같다.

"불온이 아닌 악동, 반란이 아닌 반동, 이것이 우리에겐 우리의 악기로, 우리의 음계를 찾는 우리의 주법이다."

신형철은 주전자 물 끓는 소리를 듣고 보는 김수영의 옆에 다가가 그 기운에 청진기를 댄다. 정확성과 엄밀함을 목적으로 한 진단이 아니다. 고스란히라는 태도가 담긴 전달이자 공유의 목적이 담긴. 그러했을 때 김수영의 시 <사랑의 변주곡> 속 호소력은 "넉넉한 믿음이 있어서 아들을 껴안는 아비가 아니라, 아들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믿음을 믿어야 했던 아비"에서 나온다. 

믿음을 필사적으로 믿어야 했던 김수영은 신형철이 보기에 사랑을 필사적으로 사랑했던 시인이다. 그는 그가 체험한 사랑을 배반하지 않고자 충성, 성실, 헌신의 윤리를 보였다. 물론 이 글 말미에 바디우의 사도바울론을 끌어들여 기념하는 신형철의 태도는 그다우면서도 그답지 않은 '물끓음'이 느껴져 부담스러웠다. 김수영의 존재 의의에서 유훈을 이어받고 싶은 건 아니니까. 바디우를 '교훈적'으로 전유했던 건 아쉬웠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필자가 시도한 김수영의 조망 속에서 다시 한번 예술에게 아니 실은 내 자신에게 부탁하고픈 문장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을 느꼈다. 김수영이라는 인물을 사건을 기념하고 싶은 문장이 아니라 김수영의 감각들을 끄집어내고 해체하고 새로이 공유하고픈 문장 그리고 문장에 도취되지 않는 사유.
그러기 위해 이제 필요한 건 감각하다, 즉 계속 김수영을 '덜어내는' 시도일 것이다. 덧대려는 기운은 끌리지 않는다. 내가 우리가 보고 싶은 건 기념비가 아니라 지금 여기, 세상이니. 다시 김수영처럼 턱을 괸 채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복사 씨 살구 씨의 존재인 인간을 믿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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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귤이나 까먹으며 영화나 보자 하는 마음도 들지만, 그래도 특별한 날 붐비는 곳에서 조금은 힘겹게 있어보고 싶은 것도 사람의 마음. 준비가 서툰 남자들은 예쁜 옷과 센스 있는 화장을 하고 나온 여자에게 눈치가 보여 "다리 많이 아프지? 미안"이라는 말을 여러 번 남기며 상황을 넘기기 급급할 것이다. 그러는 것도 한두 번. 여자에게 '괜찮아라는 게이지'가 떨어져간다. 

예약을 미처 하지 못한 날, 준비를 외려 많이 한 발제자가 더 입이 굳는다는 자기만의 개똥철학을 대입해 우연의 기적을 믿어보자고 하며,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발품에 은총을 내려주실 것이다라고 하며, 여기저기 식당을 찾아보지만, 남은 것은 연인의 손에 서린 땀. 그리고 곧 대기 중인 "그냥 여기 들어가면 안 돼?"라는 여자의 음성.
남자는 우연의 기적 대신 우연의 오기를 따른다. "조금만 더 찾아보고 아니면 정말 거기 가자"라는 맹세는 오기에 묻힌다. 그러다가 그 오기는 유머도 아닌, 화도 아닌
이상한 표현들로 채워진다. 여자는 지금 이 남자가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지 의아할 것이다. 이미 남자는 혼이 나간 상태. 자기가 미리 검색해놓은 옵션 1,2,3가 무너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드디어 찾았다"(자리 있다)라는 말과 "여기 맛있다"라는 말은 흥정을 해야 하고, 남자는 그래두 이 시간에 이렇게 나오니 좋다는 '의의평론가'로, 여자는 그 '의의평론가'가 매긴 별점과 코멘트에 반격을 할 차례다.

여자의 깨작깨작이 신경 쓰이고, 남자는 식당을 나와 걷다가 어렵게 들어간 카페 구석자리에서 여자와 어색하게 커피 한잔을 마신다. 침묵하는 여자 앞에서 남자는 "야 인상 좀 펴라. 아 참말로 느무하네" 갑자기 사투리가 나온다.
"왜 화를 내?" / "아니 좀 사람이 그럴 수 있지. 너는 그걸 또 꿍하게 그러고 있냐"

남자는 내심 여자가 말없이 그냥 나가지 않을까 두렵다. 말을 주워담기엔 이미 늦었고 현실은 정말 그렇게 된다. 
남잔 집으로 혼자 뚜벅뚜벅 돌아와 라면을 끓여먹으면서 '아씨 그 돈만 내버렸지 맛 더럽게 없네'를 면발을 거세게 빨아들이는 소리에 입힌 뒤, 냄비뚜껑 옆에 놓인 스마트폰을 계속 쳐다볼 것이다. 식당 예약은 잘 못하지만(모르지만) 남자는 자신의 미래만큼은 예약을 잘해왔다.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고 달다. 

(*김애란의 <성탄특선>을 읽고 마음속으로 새겨본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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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서스 2014-09-04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재기발랄하네요. 맛깔나는 서평 덕분에 책 구매하고 싶어졌어요.
저 상황을 겪어봤는지라 터져나오는 실소를 막지 못하며 읽어내려갔습니다.
저 상황 정말 짜증나고 뭐 같죠. 문득 예약하는 남성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네요.
지금 이 순간 잠시 이해하는 척 해보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면
저 여자만큼이나 견딜 수 있을 지는 모르겠네요 :)


사실 이렇게 댓글을 남기는 이유는 포스팅이 좋아서도 있지만 홍보 떄문이에요.
저희 출판사에서 올해 20주년을 맞이해 여러가지 이벤트를 하고 있습니다.
평소 도서에 관심이 많거나 좋은 리뷰를 올려주시는 블로거님들을 따로 선정해 이벤트 소개를 하고 있거든요.
간단한 참여로 신간 인기도서와 빕스 외식상품권 등 선물 받아가시고
직접 이벤트에 참여하신 후 뭐, 홍보해서 오긴 왔지만 썩 나쁘진 않은데? 나름 괜찮아
라고 생각되시면 포스팅 하나 살포시 해주시면 더욱 더 감사할 것 같아요. :)
(사실 블로그 포스팅을 해주시면 신간 도서 이벤트에 당첨되실 확률이 어마어마하게 높아지거든요)


아래 블로그로 링크하시면 좀 더 자세한 참여방법이 있으니 꼭 참여하시고
상품 받아가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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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높은 전문가라면 마땅히 감사의 말도 능숙하게 작성할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집필을 마치고 나서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설령 그게 사실일지라도 누구에게든 빚을 졌다고 꾸며대야 할 일이다.”

-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서문을 쓰는 방법」 중에서



*아래의 트윗은 사실이라 믿어도 좋고, 허구라 믿어도 좋다. 근데 어찌 되었든 진실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김신식 @jjcrowekr 9월 3일

논문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중앙도서관 4층에 위치한 논문보관소에 갔다. 정작 본문은 반도 쓰지 않았는데 감사의 말을 어떻게 쓸지 고민이다. 다른 사람들은 감사의 말을 어떻게 썼을까. 학과를 불문하고 천편일률적이다. 정말 그렇게 고마운 사람이 많나.(139/140)


김신식 @jjcrowekr 9월 3일

드디어 음흉한(?) 감사의 말을 찾았다. 유 씨의 감사에는 분명 뼈가 있다. 지도 교수를 향해 ‘고…맙…습…니…다.’ 입을 앙다문 어떤 분노가 느껴졌다. 유 씨에겐 미안하지만 150쪽이 넘는 본문보다 감사의 말 1쪽이 훨씬 재미있었다.(*134/140)


김신식 @jjcrowekr 9월 4일

원래 학위논문 주제는 「한국의 비디오문화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 VCR 수용자의 가정 내 영화 소비를 중심으로」였다. 마음이 흔들렸다. 「감사의 말을 통해서 본 학술계의 감정」으로 바꾸고 싶었다. 지난 학기 날 잡아먹을 듯한 심사자 때문만은….(137/140)


김신식 @jjcrowekr 9월 6일

사회학자 패멀라 리처즈는 하워드 베커에게 보낸 답장편지에서 심사자인 동료와 선배들에 대한 불안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두 개의 꿈을 고백한다. 하나는 대학원 시절 절친이 자신의 초고에 신랄한 비판을 하는 꿈, 다른 하나는 초고가 잘 써지는 꿈.(135/140)


김신식 @jjcrowekr 9월 6일

허나 패멀라는 현명했다. 자신의 생각을 달달한 온기로 지지해줄 동료부터 의심해보는 것이 필요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설익은 초고가 완성된 논문 직전의 글이라고 쉬이 판단해버리는 학술계에서 그녀는 좀 더 유연하고 냉정해져야 한다고 결심했다.(136/140)


김신식 @jjcrowekr 9월 6일

패멀라의 이 진솔한 답장편지 전문은 그녀의 어느 책에 감사의 말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적어도 ‘익명의 세 심사위원에게 감사함을 표한다’는 형식적인 말보다는 나은 듯하다. 답장을 받은 베커 또한 말한다. 그녀의 느낌이 대다수의 학자를 괴롭힐 거라고.(138/140)


김신식 @jjcrowekr 9월 9일

학술에서 감사와 겸양은 늘 따라다닌다. 허나 안다. 겸양은 가면이라는 것을. “난 학자가 아니니 잘 모르겠습니다만”이라고 운을 뗀 다케우치 요시미. 그를 연구한 쑨거는 말한다. 그건 겸손이 아니라 사상의 독창성이 없는 현대 학술계에 대한 반감이라고.(139/140)


김신식 @jjcrowekr 9월 9일

비슷한 맥락에서 “익히 알다시피”란 표현도 있다. 허나 안다. 이 관용구는 내 논문을 읽을 당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길 한다는 게 아님을. 실은 이제부터 당신들이 전혀 들어보지 못한 ‘힙한’ 이론을 소개하겠다는 선언임을. 겸양은 학술을 잠식한다.(139/140)


김신식 @jjcrowekr 9월 13일

출판의 사회사를 연구했던 존 맥스웰 해밀턴은 ‘감사의 말’만 모아 연구한 적이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예전에는 감사의 말만 써주는 업이 흥했다. 잘 나가는 이는 300만~500만 원 정도를 벌었다. 새뮤얼 존슨도 그중 한 명이었다.(132/140)


김신식 @jjcrowekr 9월 13일

‘acknowledgement는 주로 외서에서 볼 수 있다. 국내에선 주로 서문에 감사의 표현을 쓰기 때문이다.’ 또는 ‘외국 책에선 acknowlegement를 자주 볼 수 있다. 국내에선 주로 서문에 감사의 표현이 들어 있다.’ 학자는 감사의 말에서 섬세함과 유머를 실험한다. 평생 연구실에 틀어박힌 이에게 유머란 위험한 시도라 따뜻한 호명이 일반적이다.(138/140)


김신식 @jjcrowekr 9월 18일

감사의 말은 특히 학자들의 가족애가 발산되는 공간이다. 아내와 아들딸, 심지어 장모까지 등장한다. 9·11 이후 뉴욕의 도시재개발 논쟁을 연구한 도시사회학자 그레고리 스미스사이먼은 감사의 말에서 초교 교정을 봐준 장모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표한다.(137/140)


김신식 @jjcrowekr 9월 18일

감정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쓴 감사의 말은 남편 애덤을 향한 러브레터다. 혹실드의 고백에 따르면, 애덤은 혹실드가 힘들어할 때마다 그녀의 책상과 초고에 재치 있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그녀는 말한다. 남편의 사랑이 책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고.(137/140)


김신식 @jjcrowekr 9월 18일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에 대한 오해』 감사의 말에서 동료애를 천명한다.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동료들이 있는 한 이기심을 일으키는 유전자 따위는 없다”란 표현은 나름 센스가 있다. 좀 오글거리긴 하지만, 위트를 시도했다.(140/140)


김신식 @jjcrowekr․9월 19일

연구실 복도에서 교수님과 마주쳤다. 교수님은 엷게 웃었다. “얘 준비는 잘 되가나.” 하고 싶지만, 부담 줄까 싶어 인사만 받아주신 듯했다. 재심사가 다가온다는 고요한 경고장 같았다. “교수님, 저 요즘 관심사가 바뀌었어요.”라 말하고 싶었지만….(138/140)


김신식 @jjcrowekr 9월 19일

뭔가 찔려서 논문보관소로 향했다. 물론 감사의 말을 읽으려고. 본문은 조금 썼는데, 감사의 말부터 쓰잔 생각이 들었다. 골랐다, 적합한 말을. “○○에게” 이 학자들의 진중하고 내밀한. 그래, 나도 바르트가 되어보자. 실명을 쓸까, 애칭을 쓸까.(137/140)


김신식 @jjcrowekr 9월 25일

실명을 혹은 애칭을? 고민하다 6일을 보냈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자 감사의 말들을 읽었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의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 감사의 말은 책 기운대로 뭔가 꼬인 게 있을까. 허나 시시했다. 그야말로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이었다.(137/140)


김신식 @jjcrowekr 9월 25일

입을 앙다문 분노를 위트로 전환한 감사의 말을 찾았다. 시인 E.E. 커밍스는 헌사에 자신의 시집 출간을 거절한 출판사 14곳을 적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300달러를 빌려 인쇄업자 친구의 도움으로 자가출판을 했다. 시집 제목은 『감사할 것 없다』였다.(140/140)


김신식 @jjcrowekr 9월 26일

내 논문에 의구심을 표하는 이들을 써보기로 했다. 키보드로 치면 맛이 살지 않아 만년필을 꺼냈다. 새 노트의 비닐을 뜯었다. 쓰면서 마음에 물파스를 바른 기분이 들었다. 물론 공부 안 한 과목의 시험지에 ‘선생님 사랑해요.’를 쓰는 기분도 함께.(137/140)


김신식 @jjcrowekr 10월 5일

지도교수 연구실 앞. 심사를 미루고 싶다 말해야 하나, 사실 새 주제에 관심이 생겼다 말해야 하나 고민 중. 마음은 후자에 가 있다. ‘선생님, 학계가 자신의 격정을 온화함 속에 묻어놓는 게 마뜩잖아요. 그 고분고분한 온기에 제동을 걸고 싶어요!’(138/140)


김신식 @jjcrowekr 10월 10일

며칠간 몸살이 나 아팠다. 그날 일이 떠올랐다. 교수님은 말했다. “신식아, 논문 잘 써가지고 이런 논문 내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말 들어보자 생각한 적은 없니?” 잽 정도 맞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묵직한 훅이 들어왔다. 뭔가 말린 기분이었다.(137/140)


김신식 @jjcrowekr 10월 10일

나는 머리에 전구가 켜졌다는 모양새를 담아 정신 차리겠다는 요지의 약속을 소심히 뱉었다. 학술계가 잘하는 ‘깨달음의 연극’이었다. 미련이 남았는지 오늘도 감사의 말을 연구했다. “따라서 내용에 대한 책임은 나의 몫이다.”류의 감사와 겸양에 대해.(137/140)


김신식 @jjcrowekr 12월 13일

@kiman 아, 네 오랜만이에요, 빵 님. 저 논문 쓴다고 트윗을 통 못했네요.^^; 그때 긴히 여쭌 주제는 접었습니다. 그놈의 ‘논의의 배경’에서 막혀서요. 그냥 지금 주제 빨리 써서 졸업하려구요. 돈 벌어야죠?! 흐흐흐….(12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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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와 트뤼포의 <이웃집 여인>(1981)속 두 주인공 베르나와 마틸드는 헤어졌던 사이다. 8년 뒤 그들은 누군가의 남편 혹은 아내가 되어 이웃으로 만난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그런 이야기인 것 같다. 인물의 매력으로만 버티는 영화인가 싶기도 하다. 근데 트뤼포는 몇 가지 상징을 배치해놓고 그 법칙이 주는 이야기의 묘미로 보는 이를 옥죈다. 


그중 인상 깊은 것은 '방'이다. 주인공들은 서로를 탐하고픈 한 공간을 원하지만 쉬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호텔 18호'와 방열쇠는 은밀하지만 안전하지 않은 사랑을 대변한다. 
"여길 한 달간 빌릴까? 우리가 있던 곳에 남들이 사랑하는 게 싫어"라는 대사는 베르나와 마틸드가 처한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각자의 입에 비슷하게 나오면서 여운을 준다.
서로를 위한 고정적이고 안정된 공간이 없기에 주인공들은 불안한 심리 상태로 서로가 사는 방을 몰래 구경한다. 정작 사랑하는 사람은 없고 각자의 방 안엔 흔적만이 놓여 있다. 



영화는 이별과 재회 그즈음, 예전처럼 돌아간다는 것이 파문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파문은 주인공들의 사랑에 도덕적 재판관을 자청하는 이들이 만들어나가는 뻔한 가십이 아니다. 파문은 사랑하지만 그러기에 가슴 아픈 남녀의 진공 영역으로 자리잡는다. 그 파장으로 인해 기쁘든 슬프든 해결의 주체는 주인공이다. 사랑 앞에서 사실 해결만큼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것이 없기에 8년 만에 만난 베르나와 마틸드에게 사랑은 매일 혼란이고 영화 속 대사처럼 재앙이다. 대사는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사랑에 대한 지혜로운(?) 말들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재앙과도 같은 사랑에 매번 탈진하는 그들은 무엇을 놓아야 하고 무엇을 잡아야 하는지 정리해보려 그 지혜를 입밖으로 꺼내어보지만 그럴수록 사실 마음은 편하지 않다. 불안을 막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트뤼포는 인상적이고 강렬한 결말 처리를 통해 사랑하기에 하지만 정작 그땐 몰랐던 미제를 던지는 듯하다. 
우리는 그때 사랑했을까?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이젠 성숙했다는 증거를 남기고픈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늘 어린아이일 수밖에 없다. 아니 그러길 원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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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밤길 버스 안에서 누군가의 살아온 길을 듣게 될 때가 있다. 내릴 사람은 다 내린 가운데 "그냥 잘 사는지..."로 시작된 통화 소리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다가 데시벨 조절에 잠시 실패해 목소리가 커져버린 상태를 넘어선다. 

2. 보통 취기 가득한 남자들의 몫이긴 하나 오늘은 어느 아주머니가 역할을 대신 해주셨다. 아주머니 특유의 고소한 하이톤 속에서 구사되는 단어는 몇 개 되지 않았지만 아주머니의 반응으로 보아 통화는 랠리가 제법 긴 저녁 배드민턴과도 같았다.

3. 누군가의 자식은 좋은 회사에 다니고, 누군가의 친척은 결혼을 앞두었고, 누군가라는 그 익명의 당사자는 자신의 근황을 담담하게 "그냥 살지요"로 정리하며 '당당한 평온'을 자랑했다.

4. 엿듣는다는 쾌감에서 아주머니의 통화를 인생 제법 산 이들의 재미로 느끼고 싶진 않았다. 외려 궁금했던 건 왜 저 누구나가 하고 보고 듣고 그러는 저 그저그런 '겪음들' 자체가 흥미롭고 심지어 미간을 찌푸려가며 집중하게 될까라는 태연한 의문 자체가 괜시리 신기했다.

5. 한때 '살다보면'이란 말은 삶을 뻔히 우려낸 관용구인 줄 알았다. 삶을 늘 모험으로 대했고 독특한 서사를 보유하지 않은 사람이 시시해 보이고 얻을 게 없다는 관계론에 도취되었던 시기. 
나이가 들어 사십대 중반이 되면 모험적 서사를 몸소 생산해낼 시기도 지나가면 모험적인 (젊은) 여성의 서사에 기대어 그 에너지를 빨아먹어야겠다는 예비 뱀파이어 선언문도 구상했었던 시기. 

6. 허나 간혹 만나는 이들이 겪고 견뎌나가는 이야기를 들으면 세대를 불문하고 '살다보면'이란 어찌 되었든 내 지난날들을 영민하게 포장해보려는 엄살이 아님을 느낀다. 모험은 생산도 재구성도 아닌 편평한 지금이었다. 편평함은 탓이 아니라 덕분으로 다가오고 자잘한 말들은 굳이 연출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모험적인. "그래 몸조심하고...응 네 편한 시간 잡아보고....응 그래" 고성 섞인 통화가 끝났다.
아주머니의 발목까지 내려간 짧은 스타킹과 허름한 샌들, 손에 꼭 쥐고 있는 종이가방 사이로 미세한 목소리가 끼어드는 것 같았다.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 그 아주머니와 함께 이규리 시인의 시집을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이규리의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시인은 성실한 심리학적 관찰자로서 '살다보면'의 비밀을 공유한다. 고소하면서도 쓴맛나는 시어는 기름진 체념을 따르지 않는다. 삶을 아련한 사담私談으로 두지 않고 인간의 최선으로 조망하려는 시들의 말미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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