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어떤 사람들은 인문-사회 서적 무슨 재미로 읽어요? 라고 물어본다. 

나는 말한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짠해서요. 그 사람들의 이론과 논리에 애착이 가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그 개념을 만들기까지 들인 그 수고로움이 뭔가 짠하게 다가와서 읽습니다.." 

어려운 언어에 대한 질책을 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러나 그 어려운 언어에 들인 수고로움. 그 수고로움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가 지탱되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를 

찾아보기란 너무나 어려운 세상이다.

어려움을 쉽게 바꾸려는 노력 여부에 대한 비판은 있을지언정, 어려움 그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내가 인문- 사회 서적을 읽는 예의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을 쓰는 사람이 부럽겠지만, 학문 사회에서 책쓰는 사람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논문이 아니면 정성들인 번역서 한 권이라도 제대로 된 실적으로 쳐주지 않는 풍토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종종 논문이 아닌, 책을 낼 때 자신의 글을 '잡글'이라고 하는 이상한 표현으로 낮춰 부르는 악습까지 생겼다. 책을 내면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썩어 빠진 우리 학문 사회의 현실이다. 그 난관을 뚫고 사람들과 정성스럽게 이야기하려는 공부하는 이들의 글쓰기 노력은 때론 가엾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들이 짠하고 한편으론 고맙다.

 그런 분들의 가치가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그런 분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분들이 힘을 내서 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고민들을  만들어가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그러기위해서는 공부 또 공부다. 우리 동네 한식집에서부터 최근에 나온 신간 서적까지. 공부 또 공부다. 어려운 말이 나오면 그것을 지우지 않고 살리되, 사람들이 한 개념 더 알 수 있게 정성을 들이고 깊이 파는 것. 공부 또 공부다. 이제는 어려움을 쉽게 바꾸려는 노력 또한 슬슬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그 기운은 여전히 미약하지만 말이다. 그 저자들에게, 그 출판 기획 편집자들에게 더 뜨거운 관심과 위로를 보내줘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비판도 함께.

이런 생각을 가진 나는 '리뷰어'도 아니고 '서평가'도 아니다. '공부꾼'이다. 공부길을 그만두었지만, 여전히 나는 '공부꾼'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나의 운명보다 무서운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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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11-05-16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공부하는 사람이 짠 - 해서요. '
 이 말도 너무 짠 , 해요.. .
 

얼그레이효과 2011-05-18 00:13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짠한 시절에서 저를 탈출 못시키고 있어서.흐흐..

비로그인 2011-05-17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님 화이팅!!!^^

얼그레이효과 2011-05-18 00:13   좋아요 0 | URL
후와님도 화이팅!!!

바라 2011-05-17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공부 또 공부! 얼그레이님의 길에 응원의 한 마디 보태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5-18 00:13   좋아요 0 | URL
바라님은 늘 열심히 사시는 것 같던데요!. 바라님에게도 제 응원이 팍팍!

pjy 2011-05-19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고로 선비 똥은 개도 안먹는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5-19 23:05   좋아요 0 | URL
뜻을 몰라서 ~개도 안 먹는다를 쳐보니 시리즈가 주루루 나오네요..^^ 깊은 뜻이 있군요.
 

이런 스승의 날을 꿈꾸며 

1."이 난잡한 세상에 그래도 착한 학교, 착한 스승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는 진부한 말만 가득한 날이 되지 않기를. 

2. '스승됨'이라는 훈훈한 울타리 속에서 여전히 자신의 '스승됨'을 고수하기 위해 제자들의 지성을 자신의 성과물로 환원하는 

스승들에게는 반성의 날이 되기를. 

3. '스승'과 여전히 '불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발견되는 날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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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5-15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승'이란 단어처럼 저에게 와닿지 않는 것도 없는 것 같아요. ^^ 그렇다고 혼자 깨달은 사람도 아니지만 뭐랄까 한국에서 제가 만난 '선생'이란 이름 붙은 작자들은 보수적이고 지들 맘대로 하는 인간들 이었거든요.

전 그런 공식 직함이 있는 '선생'들이 스승이기 보다는 저의 멘토 화물차 운전 아저씨, 경비 반장님 등 민중 속에 있는 분들이 저에게 더 큰 깨달음을 주셔요. 아, 아파트 동네 아주머니들도요. ㅋ

얼그레이효과 2011-05-15 23:00   좋아요 0 | URL
'어떤'선생을 만나고, 그에게 자극을 받고 또 자극을 줄 것인가. 늘 찾게 되는 문제입니다.

2011-05-15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5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 1 - 노엘 카스트리에 대하여

'윤리적 소비'를 연구하는 동무랑 함께 스터디를 하다가, 우연히 노엘 카스트리(Noel Castree)라는 인문지리학자를 알게 되었다. 그의 개념을 통해 '환경의 신자유주의화'를 고찰했던 엄은희 교수의 발제문<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환경의 신자유주의화>을 읽다가 발견한 학자였는데, 여러 자료를 뒤지다보니 인문지리학쪽에서는 상당한 권위자인 것 같았다. 맑스주의 이론을 통해 학제적으로 환경 문제에 접근하면서 신자유주의 체제가 '자연'을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일상 속에서 소비하는 우리의 모습은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이 많은 듯했다.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소비하는가'에 대해선 삶의 더듬이가 민감한 이들은 한번쯤은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생각들이 있을 것 같다.  

# 2- 사회가 자연을 생산하다  

이런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선 '사회적으로 만들어진'자연이란 개념, 흔히 '사회-자연(social nature)'이라고 불리는 용어부터 알아야 한다. 겁먹을 것 없다. 이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쉽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자연 / 사회라는 구분법에 익숙했다. 사회의 저 빠듯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은 늘 우리에게 소중한 안식처가 되어준다는 어떤 심리적 방어선이란 게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전략이 점점 자연과 사회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자연이 점점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연구자들은 일례로 우리의 '밥상'에 들어오는 식품의 생산 과정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 가장 큰 사례로 유전자조작 식품의 사례 같은 것. 우리가 소비하는 식품의 생산 과정 속에서 개입되는 과학 지식, 그리고 이와 연계된 기업의 이윤 창출을 위한 투자 사업 및 이것을 둘러싼 윤리적 문제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소위 사회에 의한 '자연 생산'이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학자들의 고민이 속속 하나의 담론 영역을 만든다. 그리고 글로벌-글로컬의 문제로 돌입하기.

# 3 - '자연의 신자유주의화'라는 이론화를 시도하기 

이제 기후문제부터 시작해서 국가와 국가 간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현재 상황들, 그리고 여기서 주고받는 매우 평화롭고 진보적인 것 같은 협약들이지만 알고보면 선진국과 후진국의 권력 관계에서 벌어지는 오염 허용/비허용의 문제들. 이것이 국제적인 문제라면, 그러한 국제적 추세를 국내에 접합시키려는 정부의 정책들. 우리가 지겹게 듣고 있는 이번 정부의 '녹색 성장'이란 개념과 그것이 주도하고 있는 어긋난 결과들. 노엘 카스트리는 비유를 들자면 '녹색'과 '성장'이란 딜레마 속에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권력의 통치기술은 무엇인지 정의한다. 엄은희 교수의 발제문 내용에 나온 카스트리의 견해는 아래와 같다. 

환경적인 측면에서 자본과 국가 간의 신자유주의적 영역 조절 과정은 다음의 네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첫 번째 환경적 조정의 형태는 '자유시장 환경주의'유형으로, 외부효과로 여겨지던 환경 오염 문제를 적극적인 상품화와 새로운 시장 창출을 통해 해결하려는 일련의 시도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환경적 조정의 형태는 '탈취에 의한 축적' 유형으로, 보호지역이었거나 정부 관리 하에 있던 자연환경을 자본축적을 위한 새로운 영역으로 개방하는 일련의 시도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환경적 조정의 형태는 '오염의 권리 및 자연의 생산' 유형으로, 자본의 국가의 영역을 훼손하며 환경을 오염시킬 권리를 획득하거나 생명공학 산업을 통해 새로운 자연을 생산하는 행위 등이 포함된다. 

네 번째 환경적 조정의 형태는 '분권과 최소정부화 ' 유형으로, 국가가 환경관리의 권한을 지방이나 시민사회에 이양하거나 최소정부의 입장에서 케인즈주의 시대 환경규제들을 대폭 감축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아파트가 있는 곳이면 으레 하나씩 있는 '인공 냇가'로 시작되는 '인공적인 여유로움'에서부터, '녹색'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 이 시각에도 재구성,재조정되고 있는 국내 곳곳의 풍경까지. 여기에는 '자연을 지켜내야 한다'를 강경하게 주장하는 '심층생태론자'들과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지금 이 지경까지 온 것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이 사회는 자연을 좋은 쪽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본-기술의 미래가 있다는 '생태적 현대화론'자들의 논쟁이 있다.가장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이지만 가장 '사치스러운'문제로 여기는 테마라는 모순을 극복하기. '자연의 신자유주의화'라는 섬뜩한 개념은 우리네 일상을 되돌아볼 주요 키워드일 것이다.   

  책이 더 많은데 알라딘 이미지가 계속 오류다. 일단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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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4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5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랜만에 서점을 들렸다. 우석훈 선생의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흉내낸 듯한 제목의 책이 보였다. 그 책이 무슨 내용일까 궁금하기보단, "~콘서트", "~연습", "~란 무엇인가"와 같은 제목의 책을 보고 약간 속이 메쓱거리는 그런 기분으로 몇 초간 책의 제목만 봤다. 꼭 '직선'을 저렇게 부정적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을까. 직선이란 단어를 통해 한국 사회의 어둠을 비유한다는 진부함만큼이나 진부한 생각. 그렇지만 직선의 반대말인 '곡선'이 놓여있다보니 오히려 밉상인 쪽은 '곡선'이 되버렸다. 그 기분을 갖고 집으로 돌아와 짧게 잠을 청했다. 일어나서 책이 여기저기 쌓여 있는 꼴을 주말만 되면 복도를 채우는 총각들의 호르몬 냄새를 맡은 기분으로 쳐다봤다. 오늘도 읽은 책, 읽지 않은 책대로 조금씩 구분해 놓는다. 그러다가 '가볍게' 읽은 책은 다시 '읽지 않은' 책 쪽에 갖다 둔다.  

언젠가부터 소설을 잘 읽지 않게 되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자신이 '그래도 인간적인' 사회과학도임을 보여주는 '전략'같은 냄새가 나서, 소설과의 사이는 더 멀어지게 되었다. 학자라는 어른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나오는 책 수다. 그 속에서 어김없이 나오는 소설에 대한 고백들도 불편했다. '대학로용'이나 '홍대용'대화의 구색에 맞추기 위해 간혹 읽은 티를 내야 할 때는 그냥 '사두기만' 한 작품을 이리저리 뒤적인다,라는 것은 거짓말이고. 차라리 그 작품의 뒷면에 있는 비평을 읽고 자리에 나갔다. 난 작품보단 차라리 비평이 좋았다. 영화를 보진 않아도 비평은 챙겨 본다는 '진부한 영화평론가 당선소감 같은 멘트는 나의 삶에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화살표를 재조정하여 보면 소설을 읽는 지인, 친구들 중에는 내게 '읽을 만한' 인문/사회 쪽 책을 추천해달라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권해주지만 "와 이 옷 완전 네껀데.."라는 말처럼 책 재단을 해준다. 그러다가 간혹 또 진부한 질문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이런 책 무슨 재미로 읽냐는 같은. 글쎄, 난 무슨 재미로 '이런' 책을 읽을까. 요즘 내 독서를 '독서법'으로 정리해보는 가운데, 난 인문/사회 영역의 책들을 에세이를 읽는 기분으로 매번 읽었던 것 같다. 어떤 확실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대학원 첫 수업 때 스튜어트 홀을 소개하는 책의 발제를 맡았는데 뭔가 직선적이고 따갑고 까칠하게 채워질 줄 알았던 발제문이, 스튜어트 홀의 인물론으로 채워지자 발제 시간은 미술관에서 그림 한 점, 한 점을 쳐다보며 감성을 교환하는 분위기가 가득 했다.  

치밀한 논리의 이론서들을 에세이를 읽는 기분으로 읽다 보니 주장- 근거 - 반론 검토 - 재주장 등의 논리 회로는 개인의 짠한 삶을 보여주는 무엇으로 느껴졌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읽을 때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이 할아버지가 열심히 기존 사회학 이론들을 검토하고 진중하게 의견을 제시할 때, 그것을 빼곡하게 외우고 또 흠은 없나 논리적인 회로를 세우기보단 짠한 감정을 갖고 한 장, 한 장을 넘겼다.  

다시 화살표를 재조정하기. 소설은 내게 '무서운 곡선'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촌스럽게 '남성적'이니, '여성적'이니 이런 분류의 관점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식으로 '소설 읽기'를 치부하는 사회학도들, 문화연구자들이 "아..소설을 읽어야겠다.."라고 운을 띄우며 '문학적 상상력'이란 말을 쉽게 꺼낼 때 참 재수없다라는 생각을 갖는다. 너무나 당연하겠지만 내가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이유는 '무서운 곡선'. 작가들이 독자들을 휘감는 것이 어쩌면 과학적인 논리보다 더 치밀하다는 그런 무서움 때문인지 모르겠다. 앞으로 소설을 계속 무서워할 것 같다. 한 작품, 한 작품을 정성스럽게 열거해가며 맨날 '사회과학적'인 싸움을 하던 사람이 이런 재주가 있었단 말이야?라는 타인의 반응을 예상하게 만드는 열의도 체력도 없다. 그냥 계속 이론서들에서 '감성을' 찾고 싶다. 어색하지만 사회과학 이론서들을 읽는다는 것에서 나는 '감수성'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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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5-13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소설에서 사회과학적인 이론을 찾을 때 희열을 느끼기에 주로 소설을 많이 읽거든요. 얼그레이효과님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찾아내고 있는 것 같아요. 전 사회과학 이론서들이 너무 딱딱하다고 느껴져서 소설을 통해 그런 짓을 하거든요. 근데 얼그레이효과님의 글처럼 대충 쓰인 소설에서는 그런 재미를 못 느끼고 사람들은 이름은 익숙히 알고 있지만 읽지 않는 그런 책 속에서 전 그런 사회과학적 이론을 찾아 내는 것 같아요. ^^
그래도 사회과학 이론서에 대한 갈망은 포기하지 않고 있기에 앞으로 좋은 책 리뷰 많이 부탁드려요. 헤헤

얼그레이효과 2011-05-14 00:07   좋아요 0 | URL
요즘 벌이는 일이 있어 책 소화력이 떨어져 큰일입니다..그래도 또 읽고 또 읽을려구요. '살려면'^^

루쉰P 2011-05-15 07:36   좋아요 0 | URL
^^ 책 소화력은 원래 뭔 일 있을 때 광폭적인 힘을 낸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거든요. 살기 위해 읽는 것이 진정한 독서인 듯 ㅋㅋ 화이팅!!

게슴츠레 2011-05-15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어떤 개념을 말할 때 거기에는 내가 생각하고 사랑하고 나름 싸워온 그런 모든 과정이 들어있구나 싶더군요. 공감도장찍고 갑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5-15 22:56   좋아요 0 | URL
쉽게 말하면 뭔가 짠해서 이론서가 끌려요.^^;;
 

박순열(2010). 한국생태시티슨집 인식유형에 관한 경험적 연구. ECO. 제14권 2호. 7-52. 

 11쪽 

 규범적으로 보자면 생태시티즌십은 지구적인 틀에서 생태적으로 건전하면서도 민주적인 시민과 관련된 일련의 관행, 제도, 권리와 의무 등을 의미한다. 생태시티즌십의 논의의 출발점은 생태적으로 건전한 시민의 형성이 정치적, 사회적인 것과 같은 사회구조적인 변화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있다. 생태민주주의, 혹은 생태정치론이 민주적이면서 생태적인 주체를 위한 제도적인 배치나 그런 제도의 운영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이라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시티즌십 논의를 국내적, 국제적,지구적 환경문제에 적합하게 재구성하려는 생태시티즌십 논의는 새로운 유형 주체와 그런 주체의 

12쪽 

일상생활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태시티즌십은 시티즌십 논의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인 자유주의적 시티즌십과 공화주의적 시티즌십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생태시티즌십 논의에서는 양자가 자산으로 이루어진 세계상에 기반을 둔 합리적인 개인들이 사회 계약을 토대로 그들의 정체를 형성하고, 계약에서 파생한 권리, 의무, 책임을 강조한다고 평가한다. 또한 공통체의 사안이 논의되는 정치의 영역은 공적인 영역에 국한되고, 시민들에게 요구되는 덕성은 없거나 정의와 같은 남성적 덕성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들의 공동체는 배타적인 영토에 기반하고 있어 영토안팍의 타자들에게 배타적이고 많은 경우에 차별적이라서 (지구적) 환경문제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많은 경우 환경문제를 악화시킨다고 본다. 이에 비하여 생태주의, 여성주의, 세계시민주의 등의 문제의식을 토대로 재구성된 생태시티즌십은 인간과 비인간 생물종들간의 호혜성에 입각한 세계, 그 속에서 역사적으로 누적된 공동체와 자연, 그리고 공동체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강조, 그런 공동체의 생태적이고 사회적인 의무와 책임을 강조한다. 또한 시민들은 타자에 대해 배려하고 그들과의 호혜성을 강조한다. 그들의 공동체는 영토적으로 구획되지 않고, 안팍의 배제와 차별을 최소화하고, 그 대상은 미래세대와 비인간 생물종까지 확산된다(박순열,2010;182) 

13쪽 

규범적인 측면에서 바람직하게 생각되는 지구적인 수준에서의 보다 생태적이면서도 민주적인 시민과 관련된 생태시티즌십에 관한 시민들의 인식은 다양하게 존재할 것이다. 또 사람들이 규범적으로 바람직한 인식을 지닌다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실천과 행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45쪽 

개발주의와 환경주의로 표현되는 환경에 관련된 사람들의 인식은 환경 혹은 개발로만 볼 수 없는 여러 요소들, 즉 자연에 대한 태도,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정치제도, 시민들의 정치참여, 시민운동에 대한 태도, 저개발국가에 대한 선진국들의 책임과 역할, 주권으로 상징되는 현재의 국가간 체계, 그리고 과학기술에 대한 태도 등과 같은 대단히 복합적인 인식망의 극히 작은 부분에 해당한다.  

46쪽 

'생태적 세계시민주의'는 서구를 중심으로 진행된 이론적 논의와 아주 유사하다. 이 유형은 자연과 미래세대에 대한 배려,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총체적인 사회구조적인 변화, 시민들의 보다 많은 참여에 대한 강조, 그리고 시장과 과학기술에 대한 적절한 통제, 마지막으로 성장의 한계와 주권국가를 넘어서는 지구적인 책임과 협력을 강조한다.  

'동정적 소비주의'는 적극적인 시민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인 에너지 소비자라 할 수 있는 녹색성장의 녹색 시민과 유사하다. 그들은 저탄소 녹색상품을 소비하고 일상생활에서 녹색생활을 하지만, 녹색성장과 관련한 공적의사결정에 대한 체계적인 참여는 보장되지 않고, 사회적 정의와 동료시민, 자연에 대한 관심보다는  경제적 효율성에 관심을 갖는다. 또한 기후변화와 에너지 고갈을 야기한 세계적인 수준의 정치경제체계보다는 영토화된 대한민국에 관심을 갖는다.(박순열, 2010;190) 

김홍수영(2005). 시민성을 기준으로 조명한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 경제와 사회. 통권 제65호. 179-200. 

 182쪽 

시민으로서의 등록 / 시민의 인간됨과 덕성 / 시민으로서 이행해야할 권리와 의무 / 시민으로서의(182) 소유 및 자격으로 세분하고 - 183. 

183쪽 

주거지나 신분관계가 불분명하여 국가의 체계적인 관리가 불가능한 사람들은 국민으로서의 멤버심을 온전히 획득할 수 없게 된다. 멤버십을 위한 계약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동등하게 부여하는 행위는 '선량한 시민'들의 불만을 가져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근대국가는 사회 구성원들을 확실한 거주와 신분관계를 가지고 있는 '일반시민'과 그렇지 못한 '열등시민'으로 양분 하여 관리하는 시스템을 발전시킨다.

186쪽 

국민등록이 법적, 제도적 차원의 구성원리라면, 사람됨과 덕성은 인식론 차원에서 시민성의 구성원리가 된다. 사회적 소수자가 겪는 권리침해는 이들이 고립된 단독자로 존재하면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오해받게 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인간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면 아예 '인권'을 말할 수도 없다.  

189쪽 

시장노동은 근면, 정상이라는 도덕적 단어와 결부되면서 도덕적 인간이라는 시민성의 한 면을 구성한다. 

195쪽 

인권은 '인간이면 (누구나) 소유하는 권리'라기 보다, 오히려 '(일정한 재산과 특성을) 소유한 인간의 권리'인 것이다. 인권과 시민권이 단순히 권리를 넘어서 정치경제적 권력의 표현이 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7쪽 

국민등록제도, 도덕성의 잣대, 의무-권리 연계 체계, 재산의 소유 여부 등 시민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기준들은 권리의 보편화를 제약하는 구체적인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시민권과 인권은 관념적으로는 무조건적인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위 전제조건들과의 연결고리 속에서 존재한다.  

엄은희().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환경의 신자유주의화. 

# 자연의 신자유주의화 

200쪽 

- 환경적인 측면에서 자본과 국가 간의 신자유주의적 영역 조절 과정은 다음의 네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CASTREE,2008). 

첫번째, 환경적 조정의 형태는 '자유시장 환경주의' 유형으로, 외부효과로 여겨지던 환경 오염 문제를 적극적인 상품화와 새로운 시장 창출을 통해 해결하려는 일련의 시도라 할 수 있다. 두번째 환경적 조정의 형태는 "탈취에 의한 축적" 유형으로, 보로지역이었거나 정부 관리 하에 있던 자본축적을 위한 새로운 영역으로 개방하는 일련의 시도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환경적 조정의 형태는 오염의 권리 획득 및 자연의 생산 유형으로, 자본의 국가의 영역을 훼손하며 환경을 오염시킬 권리를 획득하거나 생명공학 산업을 통해 새로운 자연을 생산하는 행위 등이 포함된다. 네 번째 환경적 조정의 형태는 '분권과최소정부화' 유형으로, 국가가 환경관리의 권한을 지방이나 시민사회에 이양하거나 최소정부의 입장에서 케인즈주의 시대 환경규제들을 대폭 감축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박혜경(2010). 신자유주의적 주부 주체화 담론의 계보학. 한국여성학. 127~158. 

140쪽 

사회주부담론과 페미니스트들이 퍼뜨린 아줌마 담론은 주부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주부를 공적 존재로 만드는 담론이자, 주부의 역량을 인정하고, 그 힘을 사회에 기여하도록 하는 계몽주의적 담론이었다. 미시족 담론이 주부를 시장으로 끌어내어 세련된 소비 주체로 만드는 시장중심 담론에 포섭된 담론, 즉 신자유주의 담론의 일환이라면, 사회 주부 담론은 주부를 정치의 광장으로 끌어내는 것으로서 미시족 담론에 대한 저항 담론이었다. 미시족 담론이 주부로 하여금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다면, 사회주부 담론은 주부에게 사회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다.  

이강용(2004). 유럽연합과 기업시민권. 유럽연구 제19권. 245~268. 

250쪽 

기업시민권(Coporate Citizenship)이란 용어는 전 세계적으로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나 할 것 없이 점진적으로 그러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기업들의 행동양식을 구체화하기 위해 사용된다. 기업시민권은 사회와 기업들간의 쌍방향성의 관계를 의미한다. 기업시민권처럼 하나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현실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업적 관심을 가진다. 위험의 회피와  

251쪽 

사회적 평판의 유지, 미래의 위험에 대비한 보험, 기업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다각화와 복합화의 추구, 기업과 사회와의 안정적 관계설정, 전략적 제휴관계의 확대, 일관된 전략적 태도의 견지, 기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기법개발 등을 포함함한다. 시민권 개념은 다음 도덕적 사항도 포함한다. 도덕적으로 바른 일을 한다. 기업조직은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곳이라는 믿음과 또 즐거이 일할 수 있는 곳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실현시켜 주는 것도 중요하다.  

세 가지 논리적 토대 

1)도덕적 관점 : 도덕적 윤리적 원칙의 준수 

2) 사회적 관점 : 종업원들을 지역공동체와 통합시키려는 노력 

3) 경제적 관점 : 이해관계자들의 욕구를 균형을 맞추어 주면서도 동시에 기업의 장기적 가치를 증대시킬 수 있는 기업관 

254쪽 

"기업시민권은 기업경영자가 명심해야할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이 마음가짐에 따라 기업경영자들은 기업의 의사결정을 하고 시스템을 구축하고 나아가 도덕적 원칙에 입각한 프로그램을 세워야 한다. 두 번째로는 지역공동체와의 통합을 촉진해나가야 한다. 세 번째로는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기업이 진출하는 곳이면 좋은 사회적 평판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65쪽 - 266쪽 

유럽연합집행위원회는 2001년 6월에 기업시민권 관련 청서를 발행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유럽연합집행위는 기업시민권 활동을 기업내부적 활동과 기업외부적 활동으로 분류하고 있다. 기업내부적 활동으로는 기업구성원들에 대한 인적자원관리, 직원들의 건강과 작업안전관리, 변화하는 사회적(265)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직원들을 교육시키는 일 그리고 자원낭비를 막고 환경을 보호하는 것을 기업시민권 활동의 기업내부적 과제라고 본다. 그리고 대외적 기업시민권 활동은 지역공동체에 대한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고 공급자와 수요자 그리고 사업파트너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제3세계의 협력업체나 공급업체 직원들의 인권보장에 노력하고 지구적 차원의 환경보보활동 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기업시민권활동을 기업의 일상적인 활동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본다. 일정기간동안의 기업시민권 관련 활동을 보고서로 내고 이에 대한 적절한 감사를 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경우에 '사회라벨'을 기업이 환경보호에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경우 '환경라벨'을 활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으며 투자를 할 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투자를 행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끝으로 그린 페이퍼는 각국 정부, 각국의 기업과 시민단체 등 모든 관계자들이 기업시민권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여 이를 함께 토론하고 합의점을 찾아내어 유럽차원의 기업시민권 틀을 구축하고자 한다.  

김유은(2009). 지구거버넌스의 민주화와 시민사회의 역할. 정치정보연구. 61-84. 

63. 

지구거버넌스란 일정 이슈영역에서 공동의 목적을 실현하거나 또는 집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위를 제한하는 지구적 차원의 느슨한 규제 틀과 이행 체제를 의미한다. 

73. 

정부는 대리인으로서 주인인 시민들에 대해 그들의 약속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고,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주로 선거를 통해 평가 받는다. 반면 세계시민사회는 대리인으로서 가지게 되는 그러한 제한이 명확하지 않다. 이들은 설립 초기부터 현대 자유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책무성을 물을 - 국내정치에서 시민에 해당하는- 주인의 범위가 분명하지 않다.앞서도 지적했듯이 초국가적 ngo 의 이해당사자들은 재정 후원자, 회원 또는 지지자, 수혜자(잠재적 주인)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 집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시민사회는 이들 이해당사자들 모두에 대한 책임을 고려해야만 하는데, 내부적 책무성은 재정적 후원자, 회원, 지지자들에 대한 것이라면 외부적 책무성은 수혜자들에 대한 것이다. 즉 내부적 책무성은 세계 시민사회 활동의 자원을 제공하는 주인에 대해 져야하는 책무성이라면 외부적 책무성은 시민사회 활동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잠재적 주인들에 대한 부담해야 할 책무성인 것이다.  

(중략) 

내부적 책무성 - 비리 외부적 책무성 - 대표성  

 

강영안(2001). 책임으로서의 윤리. 철학 제81집. 51-85. 

레비나스의 '책임의 윤리학' 

51쪽 

여기서 책임은 타인의 고통을 대신하는 주체의 생성으로 나타난다. 주체는 근대적 주체의 모습처럼 세계를 지배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권력 주체가 아니라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타인의 고통을 대신하는 대속적 주체로 등장한다.  

96쪽 

레비나스가 말하는 책임은 "자기에도 불구하고 자기에서 출발해, 타인을 위해" 대속의 자리에 서는 것이고 책임적 주체는 앞의 표현을 좀 더 풀어 쓰자면 자신의 경제적 추구와 존재 유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미 먼저 선택 받은 자로, 타인의 고통을 위해 자신의 입에 있는 빵조차 타인을 위해 내어놓는 존재이다. 

부인과 말살을 구별하기.  

서선영(2010). 한국 에코맘(환경친화주부)의 정체성과 그린생활의 의미 분석. 소비문화연구. 제13권 제3호. 123-139 

135쪽 

하지만 에코맘들에게 실질적으로 환경의식이 뛰어난 그린소비자 또는 윤리적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인정하기에는 부족한 점도 없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코맘의 경우 환경에 대한 관심은 있으나 가족이라는 사적이익에 더욱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중략)....그러나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 또한 '웰빙'이나 '건강'에 초점을 둔 것으로 명확히 환경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중략)...즉, 이들의 자기만족적 실천은 정보권력을 가진 소비자로서의 권력행사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또 그 소비행동의 의미는 그린소비행동이라기보다 '웰빙'이나 자연주의 소비행동에 가까운 것으로서,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자신이나 가족에게 돌아올 위험요소를 회피하기 위한 행동 및 과시적 소비로서의 의미화하고 있었다.  

(중략) 에코맘에 대한 사회적 담론 형성이 재고되어야 한다. 즉, 에코맘 문화 형성의 주체가 누구이며, 누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녹색성장' 및 '환경친화적 소비사회'의 해법으로써 에코맘이라는 주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담론은 국가의 정책적 비용부담을 줄이고 기업의 입장을 반영한다. 시장 및 대중매체가 제시하는 에코맘이라는 집단정체성은 부지런하고 알뜰살뜰한 살림의 여왕이자, 아이들을 위해서는 높은 가격의 상품을 구매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에코맘의 라이프스타일을 현실적으로 따를 수 없는 많은 엄마들을 소외시킬 우려가 있다.  

(중략) 그린, 친환경이라는 용어가 웰빙 담론과 연결되어 건강위주의 자연주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 

136쪽 

소비자로서 에코맘은 단순히 주부의 역할이 아닌 소비자 주권을 충실히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김정은 , 이기춘(2009) 소비자시민성의 구성요소와 소비생활 영역별 차이 분석.소비자학연구. 20권2호. 27-52. 

27쪽 

소비자시민성은 공적이었던 시민성의 개념이 보다 사적인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생활실천원리이자 철학으로 거듭난 소비자주의의 발전된 맥락하에서 이해할 수 있다.  

28쪽 

소비자시민성은 전술한 바와 같이, 과거 정치적인 영역으로 한정되었던 시민성의 일상적 확장과 더불어 소비자주의의 정치적 영향력이 확장되는, 즉 소비자의 정치적 임파워먼트가 강조되는 경로의 접점에서 자연스레 도출된다. 

29쪽 

시민성의 영역은 자칫 무겁고 거대한 정치적 국가조직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탈근대적 문화의 확산은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담론의 주제가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시민성 이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소비의 일상 역시, 보다 사회적이고 공적인 담론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사적인 것의 공적인 힘은 결국 현대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문제의 시작인 것이다. 

30쪽 

소비자시민성은 소비자의 윤리적 정체성 회복을 강조한다. 이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환경과 다음 세대로까지의 자발적인 책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일상적 시민성의 가치를 실천하기 위한 토대로 작용할 것이다. 

(중략) 

소비생활의 문제제기로부터 시작되는 소비자주의적 철학은 권리의 주장과 더불어 소비자 개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소비자주의는 소비자시민성의 이념적 토대로서 소비생활에 대한 윤리적 인식의 근거가 되며 동시에 소비자시민성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나타낸다.  

(중략) 

소비자주의는 컨슈머리즘이 국내에 도입되면서 해석된 용어로 서구에서는 이를 두고 소비자 권익을 보호하는 측면과 소비를 통해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소비지향적 측면의 상반된 두 해석이 혼재되어 있다.  

32쪽 

소비자시민성을 이해함에 있어 맹목적인 참여의 위험을 지양하기 위해 윤리에 관한 논의는 필수적이다. 소비윤리에 합당한 윤리 개념의 이해를 위해서는 의무의 윤리를 파악할 수 있다. 전통적인 한국사회의 윤리가 보은의 윤리였다면 현대의 보편적 윤리는 '의무' 혹은 '책임'에 관한 윤리이다.   

34쪽 

소비자시민성은 결국 소비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톨해 배양되는 소양으로서 명확한 도덕적, 사회적 명분과 구체적인 정보의 제시를 통해 소비자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소비자시민성은 근본적으로 소비자의 양심에 대한 도덕적 호소를 강화한다.  

 

47쪽 

소비자시민성의 고취와 소비자의 사회적 책임 강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비자들이 지니는 의식의 진심을 파악하여야 한다. 기존의 윤리의식에 관한 척도들이 주로 환경의 소재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은 따라서 이러한 개인적 윤리의식의 전체를 담아내지 못한 한계를 나타낸다.  특히나 제한적이었던 기존의 교육적 소재를 개인적 소비영역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고 동시에, 공동체와 환경, 그리고 세계로까지 확대해 나갈 수 있는 거시적 관점의 성립이 중요하다.

 

장용석, 송은영(2007)한국사회의 투명성 패러다임의 전환. 한국사회학 42집 7호. 146-177. 

153쪽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투명성 개념은 정보공개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수치나 결과의 공개라는 기술적 투명성 개념과 통했다.  

154쪽 

기술적 투명성이 일차적인 수치상의 보고나 결과물을 드러내는 결과중심의 투명성이라면, 절차적 혹은 문화적 투명성은 여러 주체가 의사결정이나 정책집행의 투입-과정-결과 전반에 걸쳐 참여함으로서 증대되는 투명성이다. 시민사회 영역이 성장하면서 시민의 알권리로서의 투명성은 정책의 결과만을 공개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중략) 이전의 기술적 투명성 개념이 위로부터 아래로 전달되는 일방적인 정보공개의 성격을 지녔다면, 문화적 혹은 과정상 투명성 패러다임은 다양한 행위자들에 의해 아래로부터 위로도 요구되고 실행되는 참여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173쪽 

요약하면 한국사회는 '통치적 보고 패러다임'에서 '협치적 문화 패러다임'으로 투명성 패러다임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외뿐 아니라 국내 투명성 주문자가, 일원적인 상부조직뿐 아니라 다원적 혹은 자가 투명성 주문자가 증가하고 있다. 또한 투명성 규범을 모범적으로 준수하는 선진국 정부나 조직이 투명성 실천의 모델 케이스였던 것에 반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내 다양한 행위자가 주요 실천자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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