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체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뭔가 임팩트가 있는 것도 아닌 '문화연구의 21세기'를 죽이는 것은 '빨간펜 선생님들' 때문이다. 지난 8월 [문화연구에 저항은 있는가]라는 '뜨거운' 주제를 내걸었던 문화연구자들의 문화연구캠프는 그들이 왜 무기력한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세션의 좌장들은 마음 속 빨간펜으로 대학원생들의 글을 '좋은 논문이 되려면'으로 시작하는 훈수를 두었고, 나는 그 훈수에 기분이 상해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않고 나왔다. 용산참사부터 시작하여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그리고 촛불에 대한 문화연구자들의 기계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장문의 비평을 작성하여 가지고 갔던 나는, 무엇보다 이 비평문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거부당했다. 그들은 비평의 내용보다는 '재미있네요'라는 멘트로, '좋은 논문이 되려면 다음의 사항을 지킬 것을' 더 말하고 싶었나보다.

'촛불'을 이야기하는 한 세션은 2008년의 이야기들을 대학원 특유의 '재미주의'라는 시선으로만 스케치했을 뿐, 그 어떤 영향력도 없었다. 미디어/문화연구자라는 이름 아래 속해 있던 그들은 기존의 딱딱한 실증적 언론 연구와는 다른, 차별적인  그리고 대중적인 연구를 한다 자임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터무니 없는 교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대학원 생활을 하며 느꼈다. 문화연구자들이라 하면, 다른 연구와는 달리 뭔가 멋스럽고 반항스러운 것 같지만, 그건 정말 큰 오산이다. 똑같이 기계적이며, 체제순응적이다. 고로 문화연구에서 정치를 논하는 젊은이들에게 정치는 '흥미로운 논문'의 소재로 전락한다. 수업 시간에 감화받은 목소리로 촛불을 연구하겠다던, 한 이는 그 이후 그 연구가 끝나자마자 어느새 그랬냐는 등, 다른 길을 향해 가버렸다. 여기서 그가 표방하는 정치는, 의식있는 학생으로서의 체면을 적당히 유지하고, 문화연구 진영 내에서 나름 정치적 시각을 강하게 드러내는 권력자-교수에게 이쁨을 받기 위한 포장이라 하면 너무 잔인한 해석인가.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빨간펜을 꺼내 "음 좋은 논문이군", "좀 더 발전시키면 좋은 논문이 되겠어" 수준으로 모든 글을 판단하며, 처리하는 빨간펜 선생님들의 그 고마운(?) 조언은 대학원생들의 자기 검열과 잘 섞여 '그들만의 리그'로 변질된다.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그토록 저항을 외치며, 혁명적 사유를 이야기하던 문화연구의 정신은 정작 그 문화연구를 하겠다던 문화연구자의 연구 안에서 증발된다.  

다가오는 현상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늘 '그건 논문의 주제로 어울리지 않아'라고 딱 잘라버리고, '딱 그 만큼의' ,' 기존의' 것에서 너무 벗어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제도의 목소리는 젊은 대학원생들의 몸과 마음을 늙게 만들고, 글은 축 처진 노인의 살과 같게 한다. 자신이 참 젊다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서 사유의 게으름을 학문의 연차로 지배하려는 그 젊은 권력의 스승들마저도 내게는 '무지한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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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부터 제가 책임간사로 있는 <당대비평>에서 온라인 블로그를 오픈했답니다.  

<온라인 당비의 생각 : http://dangbi.tistory.com >  

<당대비평>은 2007년부터 '당비의 생각'이란 단행본 기획신서 체제로 바뀌었는데요. 

온라인 상의 의사 소통을 지나칠 수 없어, 작년부터 천천히 준비했는데, 이제 워밍업을 마치고 

기획한 글들을 막 쏟아내는 중입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려요.  

기획일을  정말 오랜만에 해보는데, 처음이라 많은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요.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시길.  

특히 미래를 위해 앞을 내다보고, '비평의 야심'을 지닌 젊은 논객들을 발굴하고 소개하고자 

합니다. '명석하고 영민한 젊은 글쟁이'들 있으면 많은 추천 바랍니다.

- '당비의 생각'에서 지금까지 나온 책들은?  

11월에 '문제적인(?) 기획'을 담은 신간으로 찾아뵙지요.  

(웅진씽크빅 인문사회과학 담당 임프린트 산책자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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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2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09-10-12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도와주세요^^!
 

때론 정말 오늘만 일어날 것 같은 일들이, 몇 년 후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약간의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그 회의감이 보다 좋은 쪽으로 스며들면 좋으련만, 옹졸한 가슴은 계속 그늘의 발달에 솔깃한다. 제발 사라졌으면 하는 일들을 '변덕'이란 주머니 안에 넣어두면, 그 자체로 다시는 안 일어나겠지라는 안일함이 찾아오리라는 기대를 하건만, 인간의 변덕은 '변수'가 아니라, 결국 그 어떤 하나로 수렴되는 '상수' 가 아닌가라는 개똥철학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변하니깐, 변수가 아니라, 그 변하는 일 자체가 다시 그 변하는 일 자체로 똑같이 찾아왔을 때 찾아오는 모멸감이라고 할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잔인무도한 일들은 정말 그 기약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내일에는 찾아오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 불확실한 잔인무도함은 불확실하기때문에 또 다른 변화된 미래의 시간으로 오기보다는, 오히려 언젠가 찾아올 고정된 '불확실함'으로 찾아온다. 그래서 변하는 것은 변하는 게 아니다. 지긋지긋한 원한의 굴레들, 분노의 홍수들, '대중'이란 이름과 '변덕'이란 이름, 그리고 그 사이에 '어쩔 수 없이'라는 체념의 언어를 집어넣을지라도, 사실 그 체념은 기대를 갓 포장한 것이었기에,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대를 촉구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지성을 쌓아갈수록, 그 지성이 주는 불확실함 때문에 주변 동료들이 고통을 호소한다. 그리고 당신들보다 부족한 나에게 찾아와서 길을 물으면, 나는 난감해지고, 또 난감해진다. 그 길을 물을 때마다, 이미 그 길을 가는 방법을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은 이들의 '가면의 질문'을 눈치챌 때면, 인생이 시험같다는 진부한 표현은 어느새 내 등 뒤의 땀으로 바뀌어 있을 때가 많다. 어느새 뜨거워진 백팩, 그리고 겨드랑이에서 흐르는 머스크향 섞인 체취들, 사막을 걷는 듯한 기분을 주는 축축한 발가락.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다는 사람에게 찾아가, 지혜를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알고 있음을 자랑하기 바쁘다. 그리고 그 분주함을 자기 존재의 당위로 삼으면서, 타인을 지성으로 짓밟으려 한다. 지성 자체에 대한 순수함을 가진 아이들은 마음을 다친 채로, 이 공간을 떠나 볼까라며 애써 쓴 웃음 짓는다. 그러나 안다. 그들의 힘 없는 웃음, 그 담백함 하나 없는 과장된 미소는 훈련된 희망이라는 것을, 그것은 오히려 티내는 절망보다 더 어두운 동굴 속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안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희망은 없는 것일까. 인간의 덧 없는 삶 속에서 남는 것이란 결국 지속된 깨달음과 성숙 뿐이라는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한 톨, 한 톨 그리면서,,이 밤을 접는다.지성이 나를 사랑할 때까지, 그리고 당신을 지성의 힘으로 사랑할 때까지, 그리고 그 지성을 뛰어넘는 격정의 언어로 당신을 어루만질 때까지. 그 성숙의 고통을 애무하면서, 한 걸음 내딛기. 그것이 역사의 상수라면 나는 받아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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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 와서 첫 학기였습니다. '벌써부터' 이론서 읽는 것에 지쳤던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소설책을 막 빌려다가 읽는 한 선배가 부러웠습니다. 푸코의 <성의 역사 1권 - 앎의 의지> 앞부분에 헥헥거릴 때, 그나마 푸코니까 다행이었지만,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같은 책들의 사회과학적 문체들을 접할 때면, '어이쿠나'했었죠. 나도 모르게 스며들어가는 글자들, 그 글자들이 주는 어떤 과학적인 향취가 내 가슴을 마른오징어처럼 만든다고 느낄 때, 매주 읽어가는 소설책이 바뀌어 있는 그 선배를 보면서, 나는 언제 저렇게 되어보지라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제 전공이 국문학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 사회과학적 문체에 적셔져 있는 이상, 대학원 후배들에게도, 대학원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도, 저는 시간이 나면, 소설책을 많이 보라고 말을 많이 했습니다. 소설책을 읽으면 뭔가 축축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런데 그 축축함이 힘을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니고, 일정한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그런 느낌을 줘서 좋았더랬죠. 그래서인지 저는 당장 읽지는 않아도, 앞으로 읽어보고 싶은 / 읽게 될 소설책들을 사서 쌓아두는 편입니다. 예전부터 '온스타일'이나 '동아티비'가 'vj특공대'보다 훨씬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저에게, 요즘 '칙릿소설'이그렇게 눈에 잘 들어오더군요. 그래서 백영옥의 [스타일] 서유미의 [판타스틱 개미지목]같은 이 분야의 '명전'들을 샀고, 조금씩 읽어보려 합니다.  

방학 때 읽었던 소설 중에 숄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가 기억에 나는군요. 소설 속 주인공이 마치 미래의 내 삶이 될 것 같아서 두려움을 갖고 읽었던 책이었습니다. 소설에 문외한인 저에게 좋아하는 소설책은 레이먼드 카버의 [제발, 좀 조용히 해요] 정도였는데, 이런 '소설-샤워'를 주기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솔 벨로의 소설을 읽으면서 말이죠. 

이 소설의 마지막이 참 멋있어요. 아버지에게도 자신의 삶을 구원해줄 것 같던 심리학 박사에게도 희망이 없었던 것을 안 주인공은 결국 모르는 이들의 장례식에 가서 눈물을 흘리는데요. 그런 행위를 해본 적도 없기 때문에,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그 '어떤 미래'를 오랜만에 따스하게 품어보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그러면서 공부를 인간에 가까이 가게 하려는 제 노력도 다듬어보구요. 은둔의 필요성을 느껴서 집안 커튼을 베이지색에서 보라색으로 바꿨습니다. 하루 종일 밤입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 늘 감추어 놓은 태양을 오랫동안 비추어보이기 위해 단련 중인 밤입니다. 밤은 노래한다. 자, 우리 어디서부터 시작해볼까요?(김연수 흉내 한 번 내보는 것으로 오늘은 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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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9-17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자취집에 아주 큰 창이 있어서 여름이면 새벽같이 겨울이면 늦으막히 일어나곤 하는데, 보라색 커튼 탐이 나네요.(물론 게을러서 바꿀 엄두는 안납니다만)
소설-샤워는 저 역시 필요합니다. 세상의 향내를 밀도있게 맡고 싶다고나 할까요~
얼그래이효과님 좋은 하루 되세요.

얼그레이효과 2009-09-1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사가 늦었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휘모리님.
 

학문은 순수한 것일까요. 난 사실 공부를 한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깨끗한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순수함'이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겠지요. 저에게 공부를 하면서 갖게 되는 순수함이란, 공부를 많이 하고 그것을 통해 알면 알수록 더 많이 나누는 삶을 뜻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지성의 의지를 확보하는 것도 포함되구요. 대학원이라는 것에 대해 사실 그리 영악하게 미리 파악하지 못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주 깨끗한 놈이라는 것은 아니구요. 뭐랄까요. 그래도 희망은 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여름 방학 때부터 찾아온 슬럼프는 그 희망에 대해 다시 질문을 하게 만드네요.  

그 어떤 일이든 그렇겠지만, 대학원은 '야심'이 있어야 인정받는 곳입니다. 사실 아주 겸손한 미소로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는, 그 미소를 한 꺼풀 벗겨보면 다 남모를 이유가 숨겨져 있을거에요. 지성과 친절함의 관계에 대한 불순함, 그것에 대한 의심은 일찍이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바가 있지요. 뭐 꼬치꼬치 사람을 험담하려고 이러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공부와 인간 관계 속에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친구들의 넋두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 괴로움 속에서 '타인지향형'의 공부 태도를 발견하게 되죠. 또, 그런 것을 과도하게 어떤 전략화된 형태로 보여주는 듯한 이들이 계속 너스레를 떨 때마다, 괴로움들은 우리들만의 '뒷담화'가 되는 것이 사실이구요. 

"아 떨려..어떡해. (드디어 내가 교수 A의 프로젝트를 맡았어)" 그러면서 그 교수랑 내가 같이 일을 한다는 것을 티내려고 컴퓨터를 끄지 않고 자신의 작업을 훤히 공유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을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 간의 관계. 현실적으로 대학원에서 '지적 경쟁'이라는 것은 그리 순수하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닐테고. 제가 그리 오랜 대학원 생활은 안해봤지만, 대학원은 분명 고인 물이 썩어 지린내가 나는 곳이 맞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너무 영악해져서, 그 지린내를 "아이 달다~"하고 연기하며 버티어내죠. 나만 잘하면 되지라는 심정으로 말이죠.  

지성이 정말 나를 키워줄거라는 사람들에게 대학원은 '인정 투쟁'이란 장애물을 선사합니다. 당신이 조용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라인'에서 부터 시작하는 그 호들갑스러운 '과시적 태도'의 소비들에 몸서리를 칠지 몰라요. 그리고 공부라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안 좋은 방향으로 파고드는 괴물로 변해있을 수도 있구요. 그래서 종종 제 지인들은 이런 대학원의 모순을 알고, 이 대학원을 탈출하고자 자신의 인생이 <트루먼 쇼>의 결말처럼 되길 희망하며, 노를 저어요.(사실 그러면서 탈출하려고 하는 이 대학원으로 언젠가 다시 돌아올것 같다는 모호한 희망 아닌 희망을 품고 살면서 말이죠) 

'키친 타올 심부름'을 시키고, '미용실 예약'을 부탁하는 교수들의 뒷처리를 위한 예민지수가 이제 몸에 베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대학원 동료들의 모습을 들어볼 때마다, 저는 '야인'이 되고 싶습니다. 지난 주부터 용기를 내어 대학원 측에 터무니 없는 등록금 항목에 대한 항의를 시작했습니다. 기대했던 것처럼 성의 없는 답변이 나왔지만, 그리고 그것을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보는 동료들이 너무나 많은 것에 아쉬움 금할 길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모순을 내버려두지 않기. 공부한다는 것에 희망을 걸기. 그리고 공부를 내 삶에 스며들게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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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9-14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한 교수님이 재밌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께서 재직중인 대학은 아직도 등록금이 130만원이라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다들 궁금해서 물었는데, 지방 국립대의 경우 - 서울 소재 국립대도 마찬가지긴 합니다 - 매년 5%씩 올리다보니 80년대 몇십만원 하던 등록금이 매년 올라도 얼마 안 오른다는거죠. 몇만원 정도. 반면, 사립대는 똑같이 매년 5%를 올려도 수십만원씩 올라가게 되니, 지금처럼 거의 5-6배의 차이가 나는거라고요. 우리는 '5%'라는 동일한 수치에 속아버린겁니다. 사립대학은 부지값으로 돈을 모으기만 하지 학생들을 위해 쓰지는 않습니다. -_-

얼그레이효과 2009-09-15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 때부터 [교육투쟁]을 해왔던 사람인지라,,아프락사스 님의 덧글을 읽고 다시 한 번 한국 대학의 모순에 대하여..느끼게 되는군요..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