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국엔 내향적인 사람들과 관련된 흥미로운 자료가 꽤 많다. 그중 '내향적인 사람도 사회학을 전공해도 될까요?'란 질문이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를 내향적인 사회학자라고 지칭한 랜들 콜린스(실제로 내향성을 연구하기도 했던)는 전문가 냄새를 풍기며 명쾌한 사회학적 지식으로 그 질문에 답을 해줄지도 모른다(그는 내향성의 미시사를 실제로 정리해본 사람이며, 자신이 주창한 사회적 상호작용의 연쇄론으로 내향성이라는 현대형 개인주의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한 사람이다).

 

2. 그러나 이럴 땐 학문의 때가 덜 묻은 이들의 답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찾을 수도 있다. 답을 쭉 읽어보니 예 내향적이어도 충분히 사회학을 전공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한 쪽은 먼저 자신을 수줍음을 타는 사람 (shy person)이라고 소개하며 사회학을 전공 중이라 밝혔다.  자신은 곧 사교에 능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사교성에 대한 이런 부인은 답변자가 충분히 사회학의 신조(?)를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게오르그 짐멜은 시민사회를 분석하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친교'였으니 말이다. 랜들 콜린스 또한 내향성을 설명할 때 사교적/비사교적이라는 대비를 자주 애용한다. 콜린스는 내향적인 사람이 비사교적이다라는 시선에 더 가깝다. 허나 심리학자 소피아 뎀블링은 내향적인 사람들 보고 제발 사교적이지 않다는 편견 좀 던지지 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3. 이보다 더 흥미로운 건 답변자 중 몇몇이 자신들이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내용이다. "수줍음이 많아서 강의실에 가면 자리 뒤에 앉아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즐기죠" 혹은 인터뷰 등의 작업이 흥미롭다는 답변도 있었다. 사람들을 조사하는 만남이 좋다는 것이다.

내향적인 사람들을 다룬 여러 책을 보면 '관찰자observer'로서의 내향성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띌 정도로 많다. 그러면서 연구자들은 내향적인 사람들의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강조해 편견을 깨려는 논지를 택한다. 간단한 관심 수준이 아니라 특유의 섬세함과 감수성을 동원하는 관찰자로서의 내향적 인간은 '내향성의 장'에서 자주 다뤄지는 테마다. 

 

4. 아무래도 사회학적 진술에서 내향성이란 곧 '비사교성'으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허나 이는 좀 재고해볼 문제다. 랜들 콜린스는 나름 섬세하게 내향성을 설명하지만, 군데군데 내향적인 사람이 사람과 접촉하고 교제하는 것에 대해 에너지를 너무 안 쓰는 경향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내향성에 대한 연구는 아무래도 심리학 쪽이 강세이긴 하지만, 심리학계에서는 '내향성의 장'이라고 하는 영역을 하나의 사회로 보려는 데는 별로 주안점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면 대 면(face to face)의 측면에서 나타나는 진실된 자아-거짓된 자아라는 축에서 정서적 에너지를 생산, 소비하는 데 디테일을 동원하기 때문에 상호작용이라는 형식 안에서 개입되는 개인 간의 불균등(사회적 현실에 속한 개인의 상태, 계급-자본-젠더-정치 의식 등등)에는 문제의식이 약하다. 

 

5. 그러나 역시 이런 질문에서 가장 심적 우위에 있는 사람은 "사람마다 다 다양한 성향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다. 참고로 내향적인 사람들은 이런 답변을 하는 사람에게 약하다. 자신이 섬세하고 꼼꼼하게 준비한 표현에 대해 가장 성의 없고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타인을 향해 투여한 정서적 에너지가 그만큼 회수되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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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성의 심리학에서 감정사회학이라는 매개를 거쳐 내향성의 사회학으로 가는 길. 이 길을 가기 위해선 매개의 기능을 하는 개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중 내향성/외향성에서 /의 넘나듦을 설명하는 데 동원되는 '연극성'을 재고찰할 필요를 느낀다.

해외에서 발표된 내향성을 다룬 여러 시선에 깔려 있는 건 '당신 늘 이렇게 진짜 마음 감추고 살아왔는데, 사람들 앞에서 다른 모습 보이느라 힘들었죠?'에서 멀리 떠나지 않는 위로의 언어였다. 이 위로의 언어는 그 연극성을 디테일하게 관찰한 스케치로 이어지지만 역시나 우린 개인의 연극성을 둘러싼 그리고 이를 발휘할 수밖에 만드는 사회 환경이 무엇인지는 찾아볼 수 없다. 
앨리 혹실드의 '관리되는 마음'이 조금 더 연극성을 괜찮게 분석했던 건 현대사회 내 일의 의미를 작업장이라는 공간, 경영자 혹은 고용자-피고용자라는 요인을 감안했기 때문이란 것. 이를 참조한다면 내향성의 사회학은 내향성이라는 감정 영역과 연계된 고유의 '일터 감정'과 엮일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편집자'라는 직업을 세분화해보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감정을 둘러싸고 있는 경제자본에 대한 미묘한 좌절감 그리고 이 미묘함을 건드리는 문화자본, 더 나아가 그들이 직업의 스킬이자 그 성과물로 받아들이는 사회자본은 부르디외를 감정사회학 분석에 끌어올 계기를 마련한다.
그런 가운데 이 세 자본을 '관리'하고 그 관리의 과정 속에 괴로움을 스스로 느끼는 요인 중 하나는 연극성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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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독교인도 아마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는 헨리 나우웬에 의해 널리 퍼진 운디드 힐러. 즉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개념은 오늘날 '공감 주파수'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데 자주 동원되곤 한다. 더 정확하게 나아가 공감 주파수에 대한 하나의 요건으로 언급되는 것 같다. B라는 사람이 아파한다. A도 B라는 사람이 아파했던 것으로 '아픈 적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아픈 적이 있다'다. A는 그러한 '상처입음'의 순간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B의 삶에 조언이란 과정 안에서 개입을 하며 A 스스로의 더 큰 상처를 만들어가게 된다.

 

사회적으로 목회자 자녀 출신의 문화계 종사자들-말과 글을 다루는 저자들에게 보여지는 공감과 경청에 대한 강박은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자신의 위치를 강조함으로써 더욱 굳건해진다는 게 몇 년간 관련자들을 만나 이야기해보면서 내린 소결론이다.  마음이 여리고 삶의 선택에서 어찌할 줄 모르며 누군가에게 자신의 두려움이 노출될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은 상처입은 치유자 유형의 저자들에게 메일, 전화 등 일대일이 될 수 있는 메시지 환경으로  다가가 S.O.S를 요청한다. 그러면 그 저자들은 자신도 편하게 살고 싶다며, 그간 자신이 그들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해왔던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공격적인 방식으로 풀곤 했다. 물론 이러한 공격성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독자이자 의뢰자에게 드러나선 안 된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가운데, 이 점이 자신의 신앙적 근본을 방해하지 않는 선(물론 독자의 측면에선 이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었어?라는 의문이 들수록 좋은 삶의 어떤 유형을 살아가지만)에서 이뤄지는 말과 글을 통한 상처입은 치유자의 '다가가기'는 내향성의 사회학이 '조력자 콤플렉스'를 주시하는 이유와 이어진다.

 

상처입은 치유자에 은밀히 내포된 '감정의 헌신'은 상처입은 치유자가 갖는 감정노동의 그늘을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그늘은 삶에서 자기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 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다는 활력 있는 언변, 똘끼 있는 그 나름의 경험담으로 나타나곤 하지만 결국 이러한 점들이 커지면 상처입은 치유자는 '원치 않은 대변자'의 자리에 자연스레 추대된다. 물론 이러한 추대는 상처입은 치유자의 위치에 우연/필연적으로 놓인 사람들이 무조건 원한다고  볼 수 없다. 거기서 심리적 에너지의 소비는 커지고 이러한 에너지 소비에 따른 스트레스는 심해진다.

 

상처입은 치유자의 위치에 놓인 저자들이 대부분 바랐던 점은 '평범성으로의 귀환'이었다. 뭔가 특수한 경험으로 점철된 자기 서사 혹은 타인보다 뛰어난 통각으로 사회적 고통을 매만졌던 그들에게 사람들은 하나의 '특수한 에피소드'였으며 이제 이러한 특수성은 진저리가 난 상태. 그들에게 삶의 평범함은 외려 더 '특별한' 가치였다. 

어찌 보면 '나도 당신이며, 그들이었다'라는 생각이 담긴 상처입은 치유자의 주요한 지향점은 이 개념이 지향하는 삶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타자에 대한 동일시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게 살고 싶은 감정노동의 그늘과 더 맞닿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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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가을 어느 날. 영은은 남편 주훈이 정식으로 목사가 된 예배에 참석했다. 많은 목사가 남편의 머리에 손을 대고 안수기도를 해주었다. 영은은 그 장면을 본 순간 몹시 벅찼다. 시간이 지나 23년째, 영은은 한 목회자의 사모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교회 반주자로서. 그녀는 이제 주훈의 성급한 리듬을 따라가지 못한다. 주훈은 주훈대로 찬양을 하고 반주는 조금 뒤처진 채 예배의 소리는 채워진다.

한때 영은은 매우 뜨거운 '사모님 사모님 우리 사모님'이었다. 교인들의 힘겨운 삶을 다독이고 자신의 아픔처럼 상담해주었다. 과거 한 중소규모의 학원에서 상담실장으로 일했던 경력은 보탬이 되었다. 사람을 어려워하던 목회자 주훈을 커버해주던 역할을 그녀가 맡았다. 어느새 교인들은 지난 육일간의 고뇌를 자동적으로 영은에게 맡기게 되었다. 영은은 귀가 뜨거울 때까지 통화했고, 늘 호감 가는 덕담과 성경구절을 교인들에게 건넸다.


교인들의 고뇌가 행여 어디로 새어나갈까봐 화장실로 들어가 전화를 받는 건 예사였다. 그런 성의가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좋은 사람 콤플렉스'를 연구했던 신학자 듀크 로빈슨의 표현처럼 '친절 알림이'라고 불려도 지나침이 없었다.

허나 그녀가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 아주 활달한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거절을 잘 하지 못하고, 또 누군가에게 거절을 당할까봐 두려워하기도 했던 영은은 자주 몸살이 났다. 물론 이 몸살은 가급적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은 흐트러지지 않은 채 살아야 하며, 남의 흐트러짐을 위한 조력자로 살아가는 것을 '티나지' 않게 하는 것. 그게 남은 삶의 목표라고 여기던 영은이었다.


그러던 영은은 무언가 마음의 체함을 느꼈다. 늘 단호하고 분명하게 누군가의 삶에 조언을 해주던 그녀는 작은 일에도 쉽게 당황스러워 했다. 남편 주훈이 없어도, 아니 외려 주훈이 의지했던 생활 영역에서 영은은 주훈이 없으면 매우 불안해했다. "여보 어떡하지?"라는 말이 늘어가고, 판단을 주훈에게 맡겨버렸다.

자신을 위해 선택이란 걸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영은은 작은 화장품을 사러 갈 때도 매우 긴장했다. 어느 날 파우더가 떨어져 어느 브랜드점에 들어갔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 파우더..." 하고 점원에게 말했다. 점원은 때마침(?) 적극적으로 물건을 파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 선택을 해주길 바랐던 영은에게 점원의 태도는 높은 레벨이었다. 당황하던 영은은 용기를 내어 "저한테 맞는 게 뭔지 좀 골라주실래요?"라는 말을 꺼냈다. 이 말을 꺼내기에 앞서 물론 영은은 가게에 가기 전 내가 어떤 파우더를 사야 하는지 마음속으로 골라놓은 상태였지만. 입구에 들어선 순간 선택의 장소에서 당황스러움을 느꼈고, 이는 약간의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점원에게 어느 파우더가 어울릴지 물어보기 전, 엉뚱한 파우더를 골라 점원에게 "어 그 파우더는 손님한테는 안 어울릴 것 같은데요"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영은은 점원에게 자신의 의사를 조금 얹은 소극적인 성향 찾기를 타인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영은은 가게문을 열고 나오자 명랑해졌다. 그리고 울리는 전화.


"어 집사님. 안녕하세요.  아구 맞다. 집사님 보험들라고 한 거 가입 깜빡했어요. 미안..근데 연지 시험 결과는

나왔어요?"


사모님, 사모님 우리 사모님은 어느덧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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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4-04-19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 좋은 콤플렉스라...참 힘든 거지요...
 

익히 알다시피 스웨덴에는 '늑대의 시간'이라 일컫는 게 있다. 새벽 3시~새벽 5시에 대한 사회적, 문화적 의미다. 남들이 코~하고 깊은 잠에 빠진 시간, 잠을 청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설명하는 데 자주 쓰이는 용어다.

실수가 자꾸 기억난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두렵고 그 목록이 떠오른다. 교회에서 방언이라 말하는 알 수 없는 괴랄한 언어들이 누군가의 방 안을 떠도는 시간이다.


늑대의 시간을 겪어나가는 이들은 '과소감정'(과소감정에 대한 견해는 친구 정용택님의 소중한 생각을 참조했다)이 주는 내면의 억압상태에 예민하다. 혹은 누구나 한 번씩 진단하려는 '과잉감정'에 대한 피로감으로 인해 녹초가 되기도 한다.


새벽3시~새벽5시는 아침9시나 저녁6시에 비해 의미 부여가 뭐 있을까 하는 시간일 수 있다. 허나 내향성의 사회학은 바로 이 '늑대의 시간'을 떠도는 감정의 장에 주목해보려 한다.

늑대의 시간에 쏟아지는 혼잣말, 욕설, 외계어 같은 자기주문 혹은 누군가를 향한 저주는 단순히 심리학의 수리수리마수리만 다룰 문젠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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