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어느 관리의 죽음 - ‘쿨사과’를 다르게 읽기 위한 출발

체호프의 소설 중 『어느 관리의 죽음』이란 것이 있다. 내용은 짧고 간단하다.

체르바코프라는 회계관이 오페라를 보러 갔다. 관람을 하는 중 갑자기 큰 재채기가 나왔다. 그는 창피함을 이리저리 신경쓰다가 순간 자신의 대머리를 닦고 있는 한 남자를 봤다. 그는 통신부 장관인 브리잘로프라는 노인이었다. 체르바코프는 그 노인이 다른 부서의 상관이었지만 마음에 걸려 용서를 구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용히 자리로 향했다. 체르바코프는 조용히 용서해달라는 말을 속삭였는데, 브리잘로프는 “괜찮다”라는 반응만 보였다. 순간 체르바코프는 자신이 브리잘로프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나 싶어 마음에 계속 남았다. 그래서 아내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전전긍긍하다가  브리잘로프가 일하는 곳에 가서 용서를 구하기로 했다. 브리잘로프가 사과를 하러 갔다.  하지만 브리잘로프는 체르바코프의 용서에 큰 화색을 보이지 않고 업무에 임했다. 체르바코프는 이 상황이 못마땅한지 계속 자신의 진심을 전하려 했다. 브리잘로프는 체르바코프가 저지른 일에 별로 개념치 않는다는 표시를 했다가 급기야 그의 거듭된 사과에 화를 냈다. 체르바코프는 당황했고 그 후 집에 돌아와 제복도 벗지 않고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죽었다.


『쿨하게 사과하라』(김호·정재승, 어크로스,2011)(이하 ‘쿨사과’)를 읽고 이 소설이 생각난 이유는 무엇일까. ‘쿨사과’의 시선이라면 ‘좋은 사과’에 대한 코칭(coaching)을 체르바코프에게 시도했을 것이다. “미안해”라는 말은 진정한 사과가 아닙니다. 사과에도 타이밍이 있어요. 그 사과의 시기를 잘 포착해 보세요. 당신이 브리잘로프에게 좋은 답변을 듣고 싶다면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하세요. 혹시 당신은 브리잘로프에게 ‘사과같지 않은 사과’(본 책에서는 ‘비사과 사과’ / ‘유사 사과’라는 용어로 나온다)를 한 거 아닌가요. “제가 원래 오페라만 보면 알레르기가 있어서요..”로 시작하는 핑계를 대며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은 사과 말이죠.
그런데 나는 여전히 ‘쿨사과’를 읽으며 이렇게까지 ‘사과의 방법’을 설명/제안하는 것은 ‘오바’라는 생각이 든다. ‘쿨사과’에 대해 다른 시각을 표하고 싶은 것이다. 

  

 

# 2. ‘이런 책’을 같게/다르게 읽기 위한 제안 (1) - 어빙 고프만의 ‘연극론적 분석’

우선, ‘쿨사과’를 다르게 읽기 위해 몇 가지 참조해 본 개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공교롭게도 이 개념들은 ‘쿨사과’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일단 ‘쿨사과’는 ‘사과’라는 행위가 의도된 연기인가 혹은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인가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런 책이 나오지 않더라도 ‘사과’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나의 자아를 다치지 않기 위한 / 타인의 자아를 염려하기 위한 ‘의례’라는 건 이미 공유하는 상식일 것이다. ‘쿨사과’는 여기서 ‘사과’가 경제적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언어, 특히 (기업으로 대변되는) 조직을 잘 이끌어가기 위한 ‘리더의 언어’로서 필요한 전략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시선은 사과를 둘러싼 ‘처세술’적인 시선을 더 강조하기 마련이다. 흥미로운 것은 ‘쿨사과’의 두 저자는 ‘진정성’과 ‘공감’을 성공적인 사과의 중요 요인으로 꼽고 있는데, 이것을 두 저자가 강조할수록 사과는 곧 이 사회라는 무대를 살아가는 당신이 일종의 ‘사회적 연기자’임을 공인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사회적 연기자’가 되기 위해서 당신은 ‘진심’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진심마저도 갖출 수 있는 연기력’도 갖춰야 된다는 주장이 성립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쿨사과’가 '사과의 방법'이란 논지를 펴면서 맞이할 수밖에 없는 비판론 중 하나일 것이다. (상당히 ‘도덕적’이라는 한계도 있지만 말이다) 
 

‘쿨사과’가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쿨사과’의 논지를 중요하게 디자인하는 것은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의 견해들이다. 고프만의 복잡한 사회학적 성과들을 거칠게 요약하기는 부담스럽지만, 그는 이 사회를 연극의 한 무대로 보았다. 그리고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대면하는 타인에 대해 좋은 인상을 유지하도록 효율적인 표현을 구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례(ritual)’라는 사회학적 개념에 주목하면서 사람들이 일상에서 행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자신이 곧 사회인입니다”라는 상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봤다. 고프만의 견해는 상당히 ‘상식적인’ 견해로 오늘날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 견해에 비판을 가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굴드너는 고프만의 ‘연극론적 분석’이 중산계층의 생활만을 옹호하는 사회학이며, 인간의 행위를 이해타산적인 차원에서만 한정하여 취급하는 “영혼을 팔아먹는 사회학”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굴드너의 이런 비판은 과한 측면도 있다. 굴드너가 “이해 타산적”이라고 몰아붙인 고프만의 ‘연극학적 분석론’이 권력의 정치술을 깊이 읽어내고 비판할 수 있는 용도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쿨사과’가 올바르지 않는 사과법을 예시로 드는 경우, 정치지도자나 기업 총수의 사과 등 권력층의 잘못된 정치 행위가 그 사례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쿨사과’는 올바른 사과법을 학습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지만, 이 책이 나오고 나서도 여전히 지속될 권력층의 올바르지 않은 사과법을 짚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후자의 측면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가능성을 짚어가면서 읽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 3. ‘이런 책’을 이제 다르게 읽기 위한 제안 (2) - ‘쿨’(COOL)의 의미를 짚어보기

‘쿨사과’를 정치적으로 읽는 방식은 ‘쿨’의 의미를 짚어보는 것이다. ‘쿨사과’의 제목을 다시 한 번 펼쳐보자. ‘쿨하게 사과하라’다. 그런데 본 책에서는 ‘사과하라’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나와 있지만 ‘쿨하게’에 대해서는 세심한 논의가 없다. ‘사과하라’ 자체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면서 두 저자들은 ‘어떻게’ 사과하라는 방식을 고안해냈지만, ‘어떻게’ =‘쿨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 ‘쿨하게’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일단 두 저자들은 ‘쿨’을 단순히 ‘초연한 감정’ 등으로 규정한 것 같다. 여기서 ‘쿨’은 경영학이나 요새 각광받는 ‘PR컴’쪽이 강조하는 기업의 위기 대처 능력을 위한 필수 요건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전제가 되는 것은 기업의 본질은 ‘이윤 창출’이며, 그것을 위해 기업의 ‘경영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경영 합리성’을 최대한 고수하는 인지적인 태도가 바로 ‘쿨’이란 점이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읽어내기 위해 나는 ‘쿨’의 의미를 둘러싼 몇 가지 과정을 거쳤다. 

 

3-1.  성공적인 '쿨한 사과'는 결국 또 다른 권력의 유지 수단이 아닐까

 

먼저 ‘쿨사과’가 건드리는 기업과 쿨의 관계를 ‘감정사회학’의 차원으로 읽어보는 것이 필요했다. 이는 기업의 행위를 합리성/효율성에서만 읽어내는 것을 거부한다. 감정사회학자들은 기업의 행위를 분석해보니 기업이란 곳이 상당히 감정적이란 곳임을 알았다. 이런 주장들은 사실 그렇게 무겁게 받아들일 것만은 아니다(우리가 이미 일상에서 체험한 부분들을 잘 정리한 수준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업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기업 내 구성원들이 감정의 차고 넘침을 조절/자제하길 원한다는 전제가 이 논의에 깔려 있다. 감정사회학자 헬레나 플람은 ‘경영합리성의 신화’가 기업의 대표적인 감정을 만들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러한 경영합리성이 기업 내 구성원들의 감정을 관리하고 그로 인해 구성원들이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그들만의 감정 소비 / 해소 방식을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주목하는 건 구성원들의 감정 소비 / 해소 방식이다.   

  우선 ‘쿨사과’가 제시하는 ‘훌륭한 사과’라는 모델은 기업의 이윤 창출을 위한 이미지 신장을 위한 수단으로 자주 제시된다는 점부터 짚어보자. 그리고 그 이미지 신장에는 그 조직을 관할하는 리더 /경영자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불만이 생긴다. 결국 ‘쿨하게’라는 것도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부분이라면, 그 보여짐이 멋지게 보여지는 결정의 여부가 저자들이 제시하는 ‘쿨’을 구성하는 멋진 몇 개의 사과 방식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쉽게 말해서 쿨하게 사과하는 것도 이미 그 쿨을 멋지게 보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부여된 특권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쿨사과’의 논지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들이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쿨하지 못한 사과’를 한 사람들이 결국 ‘성공적으로’ ‘쿨하게’ 사과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견해는 지나친 '계급결정론'이 아닌가라는 한계도 있다. 몇 년 전, 강준만은 쿨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쿨'의 용법엔 '계급'을 '문화' '취향'으로 바꾼 혐의가 스며있다. 누군들 촌스럽고 싶어서 촌스럽겠는가? '쿨'하기 위해선 투자가 필요하다. 돈이 필요하다. 투자를 하지 않더라도 '믿는 구석'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쿨'할 수 있다. "너 돈 없구나"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너 '쿨'하지 않구나"라고 말할 수는 있다. 이처럼 '계급'을 '문화' '취향'으로 바꿔 말하는 건 우리 시대의 예법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계급결정론'도 경계해야 한다. '쿨'엔 계급만으론 다 설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7쪽). - 강준만,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쿨에너지』(인물과사상사, 2007) -

강준만이 말하는 쿨과 '쿨사과'에서 비판적으로 읽어볼 수 있는 개념으로의 쿨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강준만의 주장처럼 '쿨'이 계급의 의미에서 문화적 의미로 넘어갔다고 해서 '계급의 의미'가 온전히 사라졌다고 보기엔 어렵다. '쿨함'이란 결국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평가받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쿨'은 보임의 과정을 통해 누군가를 미안하게 만들고 주눅들게 만들며 이를 통한 권력 관계가 양상될 가능성도 늘 갖고 있다. 혹은 그런 쿨함을 보임으로써 훼손된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는 기능을 할 여지도 있다. 나는 묻는다. '쿨사과'가 제시하는 성공적인 쿨한 사과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볼 수 있는 방식이 되는가. 이것은 또 다른 권력의 유지 수단으로 활용될 위험은 없는가.   

  

 

 

 

 

 

 

 

 

 3 -2. 우리 안의 '체르바코프'를 구해야 한다 

감정사회학자 헬레나 플렘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녀의 견해에 주목하는 건 기업과 기업의 대표자가 주도하는 기업 내 감정관리를 통해 불가피하게 억압받고 있는 많은 '피고용자'의 입장이다. 쿨한 사과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적은 입장을 따져보는 것. 그리고 그들의 입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 이것이 내가 '쿨사과'를 비판적으로 읽고 싶은 요지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의 '체르바코프'를 구해야 한다. '쿨한 사과'는 권력과의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그릇된 권력 자체를 깨진 못한다. '쿨한 사과'는 여전히 그 권력의 잔존을 허용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 고로 권력자는 쿨한 사과를 할 수록 자신의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지만, 피권력자는 그것을 함으로써 얻는 감정의 이윤이 권력자보다 많다고 볼 수 없다. 그렇기때문에 피권력자는 체르바코프처럼  사과라는 행위에 쩔쩔 매며, 그것이 제대로 된 효과를 얻지 못할 경우 정신 착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사회가 '쿨한 사과'의 대표상을 보고 환호하며 즐기길 원하지만, 권력이 없다고 간주된 일반인들의 '쿨한 사과'에는 별 매력을 못 느낀다는 점이다. 사과가 루저의 언어에서 21세기 리더의 언어로 부상하리라는 저자들의 의견이 거북한 것은 사과를 둘러싼 승자/패자의 구도 자체를 설정한다는 것, 그것으로 인해 이미 많은 신경증적 외상을 입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세심히 짚으려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다. '쿨한 사과'가 때론 자신이 성공적인 '쿨한 사과'를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겐 배신의 언어로 다가오지는 않을까. 내가 '쿨사과'를 쿨하지 못하게 읽은 이유이다.  

 

아직은 덜 여문 이야기. 생각은 각자의 몫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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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1-05-09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재승 교수님이 이 서평에 대해 깊이있고 신선한 시각이라고 내 트윗에 글을 남겨주셨는데, 갑자기 내가 '쿨하지'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 기분 뭐지. 켁.

김호 2011-05-1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정재승 교수님과 함께 이 책을 쓴 김호입니다. 제가 본 여러 서평 중 가장 깊이있고, '쿨한' 서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쿨커뮤니케이션 전문가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저도 쿨하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고민중이고, 이를 파악하기 위한 또 하나의 작업중에 있습니다. 지난 3년 이상을 붙잡고 있으면서 제게는 너무나 익숙한 책 '쿨하게 사과하라'를 낮설게 만들어주셔서 제게는 선생님의 서평이 쿨하게 느껴졌나 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얼그레이효과 2011-05-11 01:21   좋아요 0 | URL
앗. 선생님도 들려주셨군요. 이렇게 써볼 수 있었던 것은 또 선생님과 정재승 선생님이 흥미롭게 책을 써주신 덕분때문이랍니다. '사과'라는 키워드로 논문들을 뒤져보니 흥미로운 분석들이 많더군요. 몇달 전에 저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학생인데..PR컴이라는 세계가 이런 곳이었구나 살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전에 번역하신 책 <쏘리 워크스>도 읽으려고 챙겨두었습니다. 읽고 또 좋은 생각들 나누길 고대합니다.^^ 저도 감사드립니다 꾸벅.
 

한국 사회에서 유난히 문제가 되고 있는 '연예인'을 향한 사회적 비난, '연예인'의 이미지 추락에 대한 냉소. 이것은 비단 '한국 사회'의 일만은 아니라는 걸, 우린 브리트니 스피어스, 패리스 힐튼, 린제이 로한 등의 소식을 통해 알고 있다. 이것과 관련하여 내가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신진 미디어-문화연구자인 조 리틀러가 스티브 크로스와 함께 [Celebrity and Scahdenfreude : The cultural economy of fame in freefall]이란 논문을 지난 6월에 발표했다.    

샤덴프로이데라는 표현을 잘 알고 싶다면, 미국 법정 드라마 [보스턴 리갈]을 참고하는 게 좋을 듯하다. 한 유능한 남자의 아내가 된 젊은 여자가 '살인 혐의'를 받게 되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살인 이유에 '남편의 재산'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이 에피소드에서 중요한 건, '잘 나가던' 타인의 불행을 은근히 바라고 거기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주변인들의 심리(샤덴프로이데를 설명하는)였다. 주인공 제임스 스페이더는 법정에서 바로 이 '샤덴 프로이데'(속된 말로 '쌤통의 심리학'이라고 이름 붙여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말을 꺼낸다.   

 

(조 리틀러의 모습)

본 논문은 '샤덴프로이데'가 현대 사회의 일상에 어떻게 '잠입'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저자들은 셀레브리티를 향한 '샤덴프로이데'가 신자유주의적 문화의 한 단면이라고 주장한다. '명성'의 문화경제 속에서, 사람들의 '평등 추구 심리'. 거기에 개입된 증오와 적개심엔 경제와 감정 그리고 그것을 매개하는 정치의 관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견해 포인트인 것 같다. 어제 MBC 스페셜에 나왔던 이야기 중 일부와 공명하는 바가 있다.  (시간이 나는대로, 이 논문을  해석하여, 심층 해부해 보도록 하겠다) 

 

덧붙임) 문화연구의 새로운 맥락 속에서, 요즘 내가 주목하고 있는 학자는 조 리틀러다. 정치철학적 논의를 통해 '윤리적 소비'가 갖고 있는 문화정치학적 함의를 끄집어내기도 했던 그녀는, 다방면의 정치이론,문화이론,사회이론의 수렴을 통해, 문화연구의 새로운 흐름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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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0-09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서점에 '샤덴 프로이데' 코너가 따로 개설되어야 한다고 늘 주장해 왔어요.

얼그레이효과 2010-10-09 22:09   좋아요 0 | URL
이 코너 따로 진열되면, 볼만하겠는데요. ~

2010-11-09 0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0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학원에 들어가, 지도교수에게  처음 밝힌 포부는 앤서니 기든스의 <친밀성의 구조변동>과 같은 책을 꼭 한 권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성과 문학>이라는 학부 교양 시간에 처음 알게 된 이 책은  나의 마음을 계속 움직였고, 최근 '감정사회학'을 연구하면서, 조금씩 다시 읽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파트는 제6장 <공의존의 사회학적 의미>이다. 속된 말로 나는 이 파트에 '꽂혔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 돌아보면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이 파트에서 기든스가 언급한 인간 유형들을 실제로 만난 적이 있고, 나 또한 그런 경험을 했다. 그리고 최근 영화 <대혼란(Havoc)>을 보면서, 나는 '공의존'의 개념을 더 깊이 고민해보게 되었다.  과연 '공의존'이란 개념은 무엇인가? 

많은 치료서(therapeutic literature)에서 공의존 codependence이라는 말은 - 결코 여성들에게만 국한되는 용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 한때 '여성적 역할'일반이라고 불렸던 것을 기술하는 용어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공의존적 여성이란 타자를 돌보는 것을 스스로 필요로 하는 보호자(carers)이지만,그러나 무의식 수준에서는 부분적으로 혹은 거의 전적으로 자기의 헌신이 퇴짜맞기를 기대하는 그런 사람이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아이러니인가! 공의존적인 여성은 엽색가와의 관계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그녀는 그를 '구해 줄' 준비가 되어 있고 어쩌면 그것을 열망하기까지 할 것이다. 145 - 146쪽 

이 부분만 읽으면, '공의존적 여성'이란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의 캐릭터를 정리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기든스가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사회의 로맨스를 정리하는 차원은 아니다. 그가 '공의존'이란 개념을 통해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건 바로 다음 대목이 아닐까 한다. 

공의존적인 사람이란 존재론적으로 안전감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의 욕구를 정의(define)해주는 다른 한 사람 또는 일련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공의존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헌신하지 않고는 자기확신(self-confidence)을 갖지 못한다. 공의존적 관계란 한 개인이 어떤 종류의 강박성에 지배되는 행동을 하는 파트너에게 심리적으로 묶여있는 관계이다. 148쪽 

 공의존적인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어떤 욕망이 있는지 모른다. 그 혹은 그녀가 추구하는 욕망이란, 결국 타인의 욕망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스타를 좋아하는 사춘기 여성들의 팬덤 문화로 환원될 수 있겠으나,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차원도 아니다. 보다 미시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역동성, 우연성 등등이다. 특히 나는 영화 <대혼란>을 보면서, 자신에게 '일탈'의 캐릭터를 부여하는 '범생이'들을 공의존의 개념으로 분석하고 싶어졌다. 이 캐릭터는 언급하면 누구나, 아하!하는 캐릭터일 것이다. 당신이 조금만 섬세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유형의 사람을 학창 시절에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대혼란>은 그러한 캐릭터를 생각보다 잘 드러낸 영화 중 하나라고 보면 된다. 

  

(영화 내용에 대한 설명이 있다)

 <대혼란>의 주인공 앤 헤서웨이 그리고 그녀의 친구 비조 필립스는 백인 우월주의를 경멸하는 중산층 자녀이다. 영화는 이 두여성의 '일탈 게임'에 주목한다. 이들은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역겨움을 표시하는 그들만의 장치로써, 힙합 음악을 듣고, 친구들과 어울려 로스엔젤레스의 '동부 지역'에서 코카인을 사보기도 한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앤 헤서웨이는 자신의 일탈에 시동을 거세게 걸어 줄 남자 프레디 로드리게즈를 만난다. 이 남자를 만나자마자, 힙합 흉내를 내며 껄렁대는 자신의 백인 친구들과의 놀이는 재미가 없다. 프레디는 네가 정말 여기에 온다면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고 경계하지만, 이미 앤 헤서웨이의 마음은 이 동네에, 그리고 이들이 누리고 있는 문화에 흡수되기를 갈구하는 쪽에 더 치우쳐 있다. 급기야 앤 헤서웨이는 친구 비조 필립스와 함께 프레디 로드리게즈가 있는 '16번가'라는 무리들에 합류하려고 '그들이 사는 '동네를 찾는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전혀 다른 환경, 경찰들의 치안이 늘 이 동네를 '비상사태의 일상화'로 내몰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자신의 삶에 부여된 '스릴'인 것이다.   

이미 스릴에 대한 갈망은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섰다. 그런데, 이 '16번가'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조건이 있었다. 주사위 게임을 하여, 나온 숫자만큼 남자들과 섹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앤 헤서웨이는 망설이지만, 승낙하고 비조 필립스도 결정을 따른다. 하지만, 앤은 섹스 도중 자신보다 많은 숫자가 나온 비조의 아픔을 보고 그곳을 도망치게 된다. 학교에서 순식간에 소문이 퍼지고, 진상 조사에 들어간다. 앤과 비조의 백인 친구들은 흥분하여 총을 든 채 '16번가'를 찾아가게 되고, 앤과 비조는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모른다. 앤과 비조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순한 고양이가 되어 버린다. 진한 스모키 화장, 야한 옷차림, 누가 들으라고 하지라는 태도의 시끄러운 욕설이 채우던 영화 전반부와 달리, 창백하고 여린 두 여성의 모습이 영화 후반부를 채운다.  

앤과 비조의 '하위문화에 대한 잠입'은 앤서니 기든스가 '공의존적 인간'이라고 설명한 부분과 만나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내가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 현재 친구로 있는 사람들. 소위 '날라리'라고 하는 유형의 이 사람들, 그들의 속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정말 사회가 간주하는 일탈적 문화를 열정적으로 추구하고 체험하며, 자신의 삶에 지속시킬 용기가 있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추구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빠져들게 되는 '일탈적 인간'에 대한 추앙에서 비롯된 '스릴' 그 자체의 만끽?.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정말 자신이기를 스스로 정당화시키는 일종의 '가면 놀이?' '공의존'이란 개념은 후자에서 내가 표현한 '가면 놀이'의 측면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분석 장치로 다가온다.  이것은 기든스가 '허위적 정체성'이란 표현으로 기술한 인간의 유형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공의존적인 사람은 카슬이 본대로, 핵심 정체성이 미발달되었거나, 또는 인식하지 못하는, 그리고 외적 자원에 대한 의존적 애착에 기반하여 허위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사람인 것이다. 152 
 공의존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욕구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데 익숙해져 있다. 152

 이 시선을 받아들인다면, 앤과 비조의 문화 체험에서 그들은 정말 그 문화의 깊은 곳까지 빠져든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게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 또래로부터 스스로가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전략의 차원으로, 또 그런 '차이 전략'에 수반되는 '위험 게임'에 스스로를 던지면서, 스스로의 내면에 스며든 두려움을 덮어버리는 데 더 방점을 찍은 유형에 가깝다. <대혼란>이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 대목은, 영화가 이 두 여성의 일탈을 연결짓는 장소에 있는 '16번가'의 주인공 프레디 로드리게즈의 캐릭터를 나름 세심하게 다듬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면과 행위의 어긋남 속에서, 결국 앤과 비조에게 상처를 주는 남자이지만, 앤과 비조가 자신들의 문화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는 앤과 비조, 너희들이 추구하고 싶은 게 정말 우리가 진정으로 체험하고 있는 그 문화의 깊숙한 곳인지 질문함으로써, 앤과 비조의 문화 체험을 일종의 '전략'으로 생각하고 있다.  

공의존적 개념을 복습한다는 차원에서 내가 상상해본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공의존적 인간을 통해 우리는 날라리라는 유형의 인간들(예로 들면 <비트>의 로미 같은)의 '사회적 전술'을 생각해볼지도. 하지만 이것은 그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함께 고민해본 삶의 한 단면으로 이해해준다면 고맙겠다. (가족과의 관계, 거기서 연유된 아픔, 학교 문제, 친구들과의 관계 등등에서 쌓여진 사회성의 문제들) 

# ' '앨리와 지나' , 너 정말 너였니?

앨리와 지나라는 두 여성이 있었다. 지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조용하고 말이 없는 차분한 여성이었다. 앨리는 지나와는 상반된 캐릭터다. 욕도 잘하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어젯밤 만난 남자와의 섹스 경험담을 큰 목소리로 공개해도 전혀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 지나는 그런 앨리가 부럽다. 그리고 앨리와 매일 함께 생활하면서 앨리의 캐릭터를 닮아간다. 어느날 잭이라는 남자가 지나를 보고 반하게 된다. 잭은 지나의 모습에 호감을 갖는다. 얌전한 척 하지 않고 과감하고 섹시한 모습, 그리고 자신이 맡은 일은 영민하게 책임지고 끝내는 모습에 끌린 것이다. 지나와 잭은 사귀면서, 앨리 또한 그들 사이에 끼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잭은 지나의 과감한 모습에 두려움을 갖게 된다. 주변의 시선을 느끼게 되면서, 지나에게 자제할 것을 부탁한다. 사이가 틀어진다. 그리고 결국 둘은 헤어진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지나에게서 전화가 온다. 그런데 잭은 지나의 모습에 너무 놀란다. 자신이 알고 있던 지나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다소곳한 모습에 잭은 속으로 "너,정말 너였니?"라고 묻는다. 지나와 헤어진 후, 잭은 앨리를 우연히 만나 술자리를 갖게 된다. 자연스레 지나와의 이야기가 대화 소재로 나온다. 잭은 지난 번 만난 지나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잭은 너무나 놀랐다고, 예전에 알고 있던 지나가 아니라고 앨리에게 말한다.앨리는 웃는다. 그리고 잭에게 하나,둘 이야기를 꺼낸다. 지나와 사이가 안 좋다고. 앨리는 지나와 친해지면서, 그녀가 점점 자신을 따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그것에 기분 나빴지만, 어느 정도겠지하고 그녀는 참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새 지나는 앨리와 똑같은 캐릭터가 되고, 그때 잭은 지나를 알게 된 것이다. 앨리는 지나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잭은 앨리를 만나던 것이었을까? 지나를 만나던 것이었을까?  잭은 생각한다.지나는 앨리의 모습을 닮아가면서, 스스로가 가지지 못했던 '차이'를 두드러지게 체험할 수 있는 그 기회를 잡았다는 차원이 절박했는지 모른다고. 앨리는 나름의 '문화 매개자'가 된 것이다(여기서 문화매개자는 부르디외가 설명하는 것과 다르다)  지나의 '날라리'놀이는 그렇게 끝이 났다.

  당신은 인생을 살면서 이런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 그런 사람들의 삶을 동경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 그런 기억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든스의 '공의존의 사회학적 의미'는 당신의 그 순간을 뜻있게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줄지도. 그들이 추구하는 일탈, 방황. 과연 정말 그들의 것이었을까? 이것은 선과 악의 문제 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을 더 세밀하게 돌아볼 수 있는 작은 방 하나를 마련하는 것이다.    

 

 덧붙임)

(물론 똑같진 않지만) 앨리와 지나의 이야기를 영화로 체험했다고 기억한다면, 아마 당신이 바벳 슈로더 감독의 <위험한 독신녀>를 늦은 밤 여러번 봤기 때문일 것이다. 제니퍼 제이슨 리는 우리 시대의 '지나'로 나온다. (아, 추억의 이름이여..제니퍼 제이슨 리..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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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10-09-11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지나에게서 전화가 온다. 그런데 지나는 잭의 모습에 너무 놀란다"
요기서 "잭은 지나의 모습에 너무 놀란다" 이렇게 바뀌어야 되는거 아닌가요?

재미있게 봤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9-11 13:12   좋아요 1 | URL
앗. 그렇군요. 큭. 고쳤습니다. 세심히 봐주셔서 감솨요^^

pjy 2010-09-11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덧붙이신 영화는 저도 봤습니다^^
영화속의 등장인물이 심하게 공의존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도 잠깐은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부러웠던 친구의 극단적인?면을 그대로 따라해보려고 했었던....'날라리'놀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서로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런게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겠죠?

얼그레이효과 2010-09-12 15:16   좋아요 1 | URL
네 그렇겠지요.^^
 


http://www.geekculture.com/joyoftech/joyarchives/301_999/692flash.html  

검정색 하프 터틀넥, 리바이스 청바지, 뉴밸런스 운동화.  스티브 잡스의 패션이다.  이 갑부가 이런 단촐한 옷을 왜 입는지 이해를 못 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어떤 익살스러운 사이트는, 스티브 잡스의 옷을 입혀주는 게임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누가 가장 스티브 잡스에게 새로운 옷을 잘 입혔는지 컨테스트를 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스티브 잡스의 패션에 대해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패션을 숭배하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숭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장근석의 '스티브 잡스 따라하기'는 우리 시대의 한 징후를 보여주는 것 같다.  한국에서 기업가를 흉내내는 것은 그동안 고작해야 성대 모사 정도였을 것이다. (당신은 정주영 흉내를 내는 코미디언 최병서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스티브 잡스가 왜 이렇게 일관된 패션을 유지하려 하는지, 사람들의 궁금증이 여기저기 인터넷에 흔적으로 나타난다. 최근 기사들을 보면, 스티브 잡스가 검정색 하프 터틀넥을 특별히 집착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는 일본의 한 유명 디자이너의 터틀넥만을 몇 백벌 갖고 있는데, 더 주문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그 디자이너 측에 주문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잡스의 부탁에 의해 그 디자이너 측이 정확한 촉감과 재질을 요구하는 잡스때문에 미국의 잡스 집에 들려 주문 내용을 체크했다는 일화였다.  

어쩌면 그렇게 놀라울 만한 일화는 아니지만, '이름값 효과'는 잡스의 신화화를 촉진한다.   비범함의 자장 안에서 평범함은 비범함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평범함은 사람들로부터 환호의 대상이 될만한 자리에 앉는다.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는 경제적 질서 안에서, 경제 자본을 위시한 고도의 자본 소유가들이 뽐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능력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건, 그들이 언제든지 '가난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자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난한 사람의 삶, 혹은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흉내낼 수 있고, (중요한 건) 다시 자신의 삶을 원상복구 할 수 있다는 것.(그리고 그런 환경이 이미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삶의 모험을 걸 수 있는 안전망도 된다) 고로 부자들이 명풍 백화점에 진열된 에르메스의 천만원 단위 백을 어께에 메는 그런 장면으로 묘사되는 우리 시대의 드라마는 다 '후지다'. 오히려 우리 시대의 부자를 잘 묘사해보고 싶다면, 작가들은 부자들이 '가난과 부의 이동을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깊숙히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방영되면서 인기를 얻고 있는 <언더커버 보스>는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흥미로움을 준다. 회장님이 몰래 말단 직원들이 있는 곳으로 잠입해서, '암행어사 놀이'를 한 후에 자신의 고해성사를 직원들 앞에서 하고, 칭송을 받는 과정. 그 안에서 우리는 '감동'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감동의 이면' 또한 조용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야, 저거 다 쇼야 쇼.."란 수준의 사고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빈자들의 적대가 주목하는 대상은 '부유한 자'가 아닐지 모른다. 엄밀히 말하자면, '가난한 자신이 얼마든지 될 수 있지만, 그래서 그런 자신의 처지와 함께 어떤 동질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들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현실'이다.  

부자는 '부자라서' 부자가 아니라, 부자는 '빈자도 될 수 있는' 부자라서 부자이다. (부자들에게 빈티지는 라이프스타일이지만, 빈자들에게는 자신의 삶, 그 자체의 표상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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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8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9 0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8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09 0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헤는밤 2010-09-26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한 마디가, 정곡을 찌르네요. 좋은 글 읽고 갑니다. ^^
까만진주씨 http://blackpearls.tistory.com

얼그레이효과 2010-09-27 10:5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예술을 공부하는 것이 아닌, '예술사회학'을 공부하게 되면, 좀 못된 심성이 스며든다. 내가 바로 그런 인간이다. 예로 들어, <아버지는 똥이다>같은 제목의 영화가 있다고 치자. 그 작품이 평단에 좋은 평가를 받는다. 누군가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에게 '천재성'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치 않고 사용할 때, 나는 그 사람의 궤적을 조사하고 싶어진다. 왜 저런 제목을 달았을까? 평소에 저 영화 감독이 튀는 행동을 잘한다고 하는 데, 저런 행동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등등. 요즘 영화문화를 지배하는 담론인, "각자의 취향이 있으니까요 뭐." 같은 반-지성주의와 지성주의 사이에 걸쳐진 '패배적 다원주의'로 무장한 이들의 생각과는 또 다른 영역인데, 이러한 '조사 취미'를 갖게 되는 과정을 밟고 싶다면, 피에르 부르디외의 책을 자주 읽으면 된다.  

나는 그동안 늘 '홍대형 인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주목해왔다. 물론, 여기서 '홍대'는 홍익대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상징적인,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홍대'라고 부르는 상징적 공간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그 공간 안에서 특징적인 문화 자본을 습득하고, 자신들의 코뮤니타스를 설정해놓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질 기회가 있었다. 이것은 물론 일반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누적된 경험에서 오는 정리 단계다.  (이는 물론 '홍대적 감수성'을 확보한 다른 지역의 사람들도 해당된다.)

예로 들어, 카페에서 공부를 하니, 잘 된다는 사람이 즐겁게 자신이 카페에서 공부를 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러면 '홍대형 인간'들은, 특유의 '예술적 감성'으로, "난, 그런데 가면 왠지 공부하는 것 티 내는 거 같아서 싫던데.."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 '예술적 감성'이란 의미를 개입시키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다만, 내가 이 의미를 넣는 건, 이 의미의 개입이 다른 대화에서도 비교적 유사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남들이 편안하게 이야기 하는 주제에 대해서, 그들은 근본적인 의미를 되물으면서 분위기를 숙연하게 /어색하게 만든다. 예로 들어, 사람들이 정치에 관련된 주제에 대해 활발하게 자신의 의견을 꺼내놓는다. 그럼 홍대형 인간은, 조용히 있다가, 웃으면서 한 마디 건넨다. "과연, 정치라는 게 무엇일까요?" 이런 커뮤니케이션의 작용은, 열정적으로 이 세계를 옹호하거나, 혹은 부정하는 사람을 순식간에 무안하게 만들어버리는 효과로 나타난다.  

이런 '조사 취미'가 갖는 딜레마는 도덕과 예술의 접합 지점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접합을 만들어내는 사회와 유/무관한 예술가들의 생활에 대해 내가 개입하고자 할 때, 갈등이 일어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천재성'에 대한 의구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내내 자위행위가 나오고, 구토를 하고, 그 안에서 기이한 재미를 주는 영화들이 있다. 그런 영화들을 만든 감독의 사생활을 알게 되었을 때, 가령, 야, 저 사람. 영화만 골때리는 줄 알았는데. 사람도 골때려. 노래방에서 팬티까지 벗고 노래하고 난리도 아니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그러면 이 의구심은 영화의 내용과, 그 영화가 받았던 평가(평가가 좋으면 좋을수록) 그리고 만든 사람의 생활-성격에 대한 연관성으로 압축된다. 소위 영화를 팔기 위해 저런 것 아니야?라는 진부한 '노이즈 마케팅'식의 질문은 물론 아니다. 이건 부르디외가 말하는 개인의 하비투스, 그리고 그 하비투스에 연관된 장 내부의 특성을 면밀한 체계로 구조화시켜 보는 작업이다.  

나는 스스로 이런 예술가들의 독특한, 그리고 그런 예술가들의 삶과 양식을 습득하는 특정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소외 취향'이라고 부른다. 이제 고민은, 얼마 전 아프락사스님이 올려주셨던 정치에 대한 '기계적 균형'의 맥락이 과연 내가 '홍대형 인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특성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의 지점이다. 이 부분은 아직 숙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나는 정치가 '취향화'되고 있으며, 이 '취향화'과정이 갈수록 심해질거라는 생각이 확고해지고 있다. 사실 정치라는 영역 안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 이제 스타와 팬, 그것을 지켜주는 건 '도덕의 언어'라는 생각이다. 예전 '시사인'의 특집 기사 제목처럼, '팬클럽 민주주의'라고 하는 형태. 이 팬클럽 민주주의가 주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오타쿠'로서, 자신의 스타가 무슨 짓을 하든, 그 스타에게 '쉴드'를 치는 것으로서 삶의 만족감을 찾는 라이프스타일. 우리가 잘 아는 '아버님들'의 출몰도 그런 면에서,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오빠부대'이며, 이건 다분히 최근 현상이 아니라, 역사가 빚어낸 산물이기도 하다. 이 산물은 역사에 무지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역사를 간과하고 싶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탈퇴의 자유로움'이다. 스타가 좋아서, 취향을 바꾸는 사람들, 아니면 갑자기 '급취향'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도덕적 언어의 붕괴, '도덕적 사건'이 터질 때, 혹은 언론이 그렇게 도덕적 담론을 만들어, 인물의 완벽성, 특히 그 인물을 구성하는 도덕적 전기를 파괴하려 할 때, 팬들은 당황하고, 분열한다. 그리고 자신의 엄청난 정치적 열정이, 이 도덕적 담론에 의해 붕괴됨을 보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공간 안에서 '소외 취향'을 가진 자가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 '소외 취향'을 가진 자에 쉽게 선입견을 씌우기엔 조사가 필요하다. 그들의 소외 최향이 다수가 유시민을 좋아하는데, 나는 김문수를 좋아하면 안 되요?라는 식으로 표현된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근거를 가지고 김문수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소외 취향에 대한 감수성은 무지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문화 자본을 갖고 있는. 학력 자본에 기반한 것임도 간과할 수 없다.  

학력 자본이라는 것과 연관만 살짝 시킨 채 이야기 다시 하기. 다른 맥락에서, 이 '기계적 중립'을 알바라고 치부하면서, 그 중립을 표하는 사람을 '무지하다'고 쉽게 무시해선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건 내가 부르디외의 책을 보면서 느낀 생각이다. 부르디외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하여, 학력 자본과 계급이 갖고 있는 특성을 흥미롭게 연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정확히 말해, 자신이 학교에서 배운 것과 그 배운 것을 정치에 대해 연관시켜 말하는 것을 즐겨사용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하지만, 그는 의심한다. 정치적 의견을 표출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로 시작하는.) 오히려, 그런 '기계적 중립'은 '나'가 배웠다는 사실. '나'가 배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그것을 이전의 역사가 준 씁쓸한 교훈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이건 내 조사취미가 가져다 준 습관적 사고이기도 하다.) 즉, 그들은 정치적 현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말해왔던 편향성을극복하고, 합리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드러내보이기 위함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합리화하기 위함이다.하지만, 이 성찰의 방향에 대해 우리는 다시 의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가 '기계적 중립'에 대해 불편함을 드러내야만 하는 시도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오히려 '배운'사람들이 합리성, 공정성,객관성이라는 언어로 먼저 시작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정치적 교양을 뽐낼 때, 그 정치적 교양을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의심해본다. (오히려, 내겐 그들이 '알바'이다.) 그것이 기계적 중립으로 이어질 때, 그들이 내세우고 싶은 것은 '정치'인지, 아니면 '자신의 배운 능력'에 대한 표현인지, 나는 아직 구분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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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5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의 취향이라고 잘 못 보고 들어온....으이구~ㅠㅠ.

높은 학력자본과 계급에 우린 그의 가치관과 됨됨이도 무조건 동급일거라고 믿는 경향이 있죠.
얼그레이님~~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님께 반하게 되어요.
박학다식한 면 만이 아니라...줏대와 고집이 단단히 느껴져서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5 22:4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하지만 칭찬을 받을 만큼 그렇게 좋은 시선과 글인지는 아직 자신이 안사네요. 응원해주셔서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욧

신지 2010-05-15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그동안 추천은 여러번 눌렀지만 댓글은 처음 달아 봅니다.^^;

"오히려 '배운'사람들이 합리성, 공정성,객관성이라는 언어로 먼저 시작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정치적 교양을 뽐낼 때, 그 정치적 교양을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의심해본다. (오히려, 내겐 그들이 '알바'이다.) 그것이 기계적 중립으로 이어질 때, 그들이 내세우고 싶은 것은 '정치'인지, 아니면 '자신의 배운 능력'에 대한 표현인지"

ㅡ>

마침 방금 제가 본 기사가 있는데, 이게 비슷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제도만 남은 ‘민주주의’ㅡ 서경식,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16457.html


비슷한 사례가 맞나요.. (음, 그러고 보니 저도 서경식씨에게 그런 의심이 드는군요.)
효과님의 글을 읽고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내세우고 싶은 것은 '정치'인지, 아니면 '자신의 배운 능력'에 대한 표현인지, 나는 아직 구분이 가지 않는다."

ㅡ>

그런데 원래, 마음은 실제로 시간표처럼 딱딱 경계가 구획되는 것이 아니어서...... 또 "'자신의 배운 능력'에 대한 표현"이라고 해도, 그건 '누구한테나' 해당되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좀 더 부연설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비판이나 지적이 아니고, 효과님의 의심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편이어서요. )

얼그레이효과 2010-05-15 23:05   좋아요 0 | URL
신지님,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서투른 글에 이런 친절한 인용과 응답 고맙습니다. 서경식 님 칼럼은 아, 처음 봤는데, 흥미롭군요. 근데 좀 맥락이 약간은 다른 것 같기도 하네요. 그 이념과 효율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마 제가 따로 글을 써야 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제가 칼럼을 한 번 더 읽고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아마 제가 언급한 패배적 다원주의라는 측면. 이것에 대한 이야기의 심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사실 신지님 말씀이 논리적으로 맞지요. 저는 아무래도 사회학을 하는 놈이라서, 패턴을 정하고, 그 구조들을 만드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지라, 아마 이런 '결정주의'적 시각에 반하는 논리에 취약한 점이 있습니다. 고로, 특히 신지님의 생각처럼, 심리의 측면, 그리고 그 배운 능력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능력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정의가 내려질 수 있는 부분, 특히 오늘 제 글처럼, 이런 보이지 않는 부분이, 어떻게 보이는 부분으로 나타날까의 측면은, 사회학적으로 상당히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구한테나'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거구요. 저는 그래서 그 반박이 안나오도록, 더 세밀한 근거를 제시해, 상대방에게 설득할 기회를 잡아야 하겠죠. 그래서, 부르디외 같은 사람들이 공격을 받는 이유도, 아마 그런 데서 있을 겁니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쉽게 결정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쉽게 결정 안 되지도 않는 형태의 무엇인가가 사회에 있다는 걸 늘 강변한 것 같습니다. 그게 아마 저처럼 공부하는 사람이 세상 사람에게 낼 수 있는 사유의 대안이겠죠. 아직은 부족한 사람이라, 이렇게 밖에 말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신지 2010-05-16 07:46   좋아요 0 | URL
그래서, 부르디외는 쉽게 결정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쉽게 결정 안 되지도 않는 형태의 무엇인가가 사회에 있다는 걸 늘 강변한 것 같습니다. 그게 아마 저처럼 공부하는 사람이 세상 사람에게 낼 수 있는 사유의 대안이겠죠.

ㅡ> 아아, 이제 이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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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제가 댓글을 단 배경 ㅡ

저는 (서경식씨의 글이) 비슷한 사례라고 봤습니다 :

" ‘애교심’이라는 말이 홀로 걷기를 하면서 교직원이나 학생의 ‘애교심’의 크기를 재고,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을 배척하는 따위의 위험한 움직임을 조장할지 모른다. 이 대학에는 중국이나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도 있고 나와 같은 교원도 있다. 그런 소수자나 타자가 거리낌없이 다닐 수 있는 대학이 됐으면 좋겠다.”

애교심’이라는 말에는 저항을 느낀다. 운운~은 사실 진부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리가 마르고 닳도록 들어온 내용인데, '애국심'에 대한 비판을 '애교심'이라는 말에 응용한 것 뿐이니까요.

애국심 고취라면 모를까, 애교심이라는 말에 저렇게까지 거창하게 주장을 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특히 마지막 부분은 애국심이 아닌 애교심에는 좀 어울리지 않는 느낌입니다. (외국에서 온 유학생에게 애국심까지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애교심 정도야...)

그래서 저도 효과님처럼 과연 저 분이 " 내세우고 싶은 것이 '정치'인지, 아니면 '자신의 배운 능력'에 대한 표현인지" 의문이 들더군요. ^^;

그는 <<스포츠 활동을 통해 학생의 ‘애교심’을 고취한다는 대목>>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기계적 중립을 고깝게 볼 것이고, 반대로 서경식 자신과 서경식의 칼럼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그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

" 누군가가 발언해주기를 기대했으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ㅡ> "하는 수 없이 나는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ㅡ> "곧 나와 같은 소수자가 항상 긴장감을 유지한 채 남이 싫어할 일을 피하지 않고 전면에 나서서 발언하지 않는다면, 그런 흐름을 막을 수 없지 않겠는가." (서경식)

만약 단순히 "'자신의 배운 능력'에 대한 표현"이라고 해도, 그것이 부당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구요. (타인의 생각이 자신과 다를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수도 있고, 그냥 가만히 있을 수도 있는데, 둘 다 부당한 것은 아니니까요.)

효과님의 글에 저 사례를 대입해보면서, 공감이 되면서도, 이렇게 '저 자신'이 모호한 부분이 있어서 질문을 드렸더랬습니다.

친절한 답변 고맙습니다. 여러모로 생각할 수 있는 글을 좋아하는 편인데요, 생각이 같거나 다르거나 늘 많이 배우게 되어서 효과님의 글을 자주 챙겨보는 편이에요.. 효과님, 고맙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6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이거 제가 한 방 먹었는걸요^^! 칼럼을 꼼꼼히 읽고,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덧글 내용은 잘 읽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16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배운 것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거부하는 것은 아니죠. 제 글에 단서가 되는 것은, 정치적 현실 안에서 작동하는, 그런 정서와 결부된, 어떤 제한/조건 안에서 이 세상의 정당함. 이 세상의 필요한 그 무엇을 위해 배운 능력을 발휘함. 그 정치적 의견을 표시하는 것을 말하는 게 거부되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단, 이제 그 반대의 문제이겠지요. 정말 말도 안 되는 경우(다만, 이 말도 안 되는 경우의 기준이 뭔지, 이것이 심리적인 측면과도 크고, 생각보다 세상 사람들은 다양하다는 딜레마가 있지만.)의 정치적 의견, 또 그 의견이 기계적 중립이 될 때의 상황을. 가정해볼 때, 그 '중립'이란 말 안에 들어있는 성찰성이 있을 것입니다. '성찰'이라는 개념은 좋지요. 하지만, 그 성찰이 요즘 시대에는 분명 오용되는 경우도 있고..(한나라당 소장파라고 불리는 이들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그 성찰 오용의 사례를 기계적 중립에 연결시켜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