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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복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양영란 / 동문선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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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조금 눈이 감겨 있는 상태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모르는 번호와 밤. 보이스피싱의 기운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혹시 옛 여인의 흔적? 그럴 리가. 나처럼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번호를 완전히 상기하진 못하더라도, 그 낌새만은 붙잡았을 것 같다. 한 앳된 목소리의 여자가 내 이름에다 ‘선배’라는 호칭을 붙어주고 나서야, 나는 조금 설레는 마음이 가셨다. 그리고 침착해졌다. 모교인 한 대학교의 대학언론사 기자인 후배는 나에게 특강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순간 단어들이 끊기면서,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돌출되었다는 표현이 더 ‘영상’적일까. 아직...석사....공부 중...무엇을...강의...교육..대학..언론...옛날..추억..글쓰기...커뮤니케이션.. 후배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뒤로 한 채. 고민에 빠졌다. 나에게는 암튼 첫 강의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강의에 관한 전체적인 틀을 부탁하는 또 다른 후배의 메일을 받고 나서, 나는 집에 있는 책들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무심코 집어든 책이 장 도미니크 보비가 쓴 [잠수복과 나비]다.

‘커뮤니케이션과 사회’라는 주제 아래, 사회와 ‘나’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을까라는 제법 무거운 강의 주제를 던져주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 이런 좋은 주제, 진지한 주제에 관해 멋진 말을, 의미 있는 말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대학원에 들어 와서, 마음속으로 챙겼던 그 순진하고 정결했던 맹세들은 사라지고,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넘쳐나는 ‘학구적 체취’였다. 타인에게 공격받지 않기 위해, 학문이라는 좋은 테두리로 나를 감싸고, 하루를 연명하는 지식 노동자. 아직 대학원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밥이나 사주면서, 헛된 자랑을 일삼는 어눌한 지식인. 그건 정말 내가 원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겸손해지고 싶었다. 아니, 좀 더 무거운 표현을 쓰자면, 나 스스로에게 겸허해지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책 이전에 영화로 먼저 접한 이 이야기의 이미지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만약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면?이라는 진부한 자기계발서 식의 달콤한 물음표를 만들어보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러나, 달콤한 물음표마저 사치로 만들어버리는 깊이 있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영화의 ‘이미지’가 책의 글자를 한 톨, 한 톨 따라가며 내 머릿속을 스치는 이미지와 겹쳐질 때, 장 도미니크 보비의 얼굴과 그의 역할을 맡은 마티유 아맬릭의 얼굴이 함께 떠오른다.

요즘 나는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을 다시 읽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재도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양이 많을수록, 빨리 이 책을 정복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 책에 들어있는 두터운 진리를 속도로 짓눌러 보겠다는 욕심이 생긴 첫 경험. 나는 그 경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그 가운데 깨달음이 다가오고, 그 다가옴은 지금 내가 매만지고 있는 장 도미니크 보비의 흔적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말들을 하고 산다. 정치꾼들은 그 말로 신뢰를 생성하며,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그러한 정치가들의 말을 둘러싼 신뢰와 기대치가 바로 ‘정치 언어’, 공약이라고 설명한다. 어디 이런 말과 신뢰, 혹은 말이 다루고 있는 수많은 현상들이 정치가들에게만 해당하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수없이 말을 하고 산다. 그리고 그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사물(현실)이 된다. 말이 존재를 획득할 때, 우리는 그것에 기대를 걸거나, 후회를 하거나, 슬픔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침묵을 원하고, 그 침묵이 우리 인간의 영원한 희망이 되리라고 본다. 장 도미니크 보비에게 주어진 조건은 얼마 남지 않은 삶 가운데, 주어진 소중한 침묵이다. 그리고 그 침묵으로 말미암아, 보비는 내면 속에서 수없이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그 내면 안에 생성된 사물은 자유롭고 감동적이다. 우리의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이 사물화되어, 이리저리 여행을 다닐 때, 우리는 행여 그 말을 꺼내기 전 타인이 상처나 받지 않을 지, 걱정하지만 보비에게 그런 걱정은 오히려 소망과 같은 위치에 있다. 그가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은 그래서 소중하다. 표현이 넘치는 이 세상에, 말이 과다해서, 살기를 불러일으키는 이 세상에. 그의 신체적 제약이 주는 불가피한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말과 글의 과잉 시대에 ‘다시’말하기 그리고 ‘다시’ 글쓰기를 생각하게 만든다.

첫 강의로 어떤 텍스트가 고려되고 있는지 묻는 후배의 메일에 나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이 책 [잠수복과 나비]를 영화와 함께 책으로 읽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달했다. 대학 언론의 위기 같은 아주 급급한 의제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아마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내 위치에 맞는 주제와 관련된 책 혹은 자료들을 소개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상하게 이 책의 가치를 그저 나만 알고 싶지는 않았다.

장 도미니크 보비가 그려내는 마음 속의 풍경은 그의 신체적 증상이 주는 아픔과 반비례하는 편안하고 애잔한 그 무엇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그런 편안함과 애잔함을 표출하는 과정 속에서, 그가 글이라는 것으로 자신의 고통을 담담하게 전달하거나, 때론 유머러스하게 드러내는 것은 삶이 주는 그만이 획득한 깨달음의 진실인 듯하다. 나는 그 진실을 오직 그만이 가지기를 바란다. 그 진실의 깊숙한 부분을 내가 다 가지겠다는 것은 과욕인 것 같다. 학문이라는 것을 하면서, ‘지식노동자’라는 명칭이 붙으면서, ‘사회과학자’라는 범주가 주어지면서,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는 정말 사람을 챙기고 가려는 의지가 있는 걸까?’ 


[잠수복과 나비]는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떠난 어느 한 남자의 이야기다. 우리는 이것을 아주 소소하게 추억해도 좋고, 때론 격정적이고 교훈적인 허밍으로 음미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 삶에서 나는 얼마나 나를 챙기고 가려는 의지가 있는 것일까. ‘나’에게 주어진 잠수복, 그 제약 속에서 나에게 허락된 그 들숨과 날숨의 순간들. 그 순간들로 연명되는 삶의 귀엽고 세심한 한 자락들. 피아노의 선율이 갑자기 굵어지고, 키보드 소리가 지금 내 방을 가득 채우고, 아직 커피 자욱이 진하게 묻은 하얀 색 커피잔이 놓여진 내 앞, 그리고 내 안의 풍경을 보면서, 나는 장 도미니크 보비처럼 잠시 한 눈만 뜨고 세상을 바라본다. 억지로 감은 눈이 아프고 떨린다. 다른 한 눈마저 감고 싶다. 결국 두 눈을 감았다. 보는 것은 행복하다. 다시 눈을 떠 보니 알겠다. 상실의 아픔 속에서 나비여 찾아오기를. 아직 내 삶에 꽃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나비여, 헬로우. 그 나비가 나의 첫 강의를 들을 친구들에게 찾아왔으면 좋겠다. 사회를 비판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은 바로 내가 얼마나 사회에 애정이 있냐는 물음의 생성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사람을 챙기고 싶은 사회과학도가 되고 싶으니까. 세상을 향한 글쓰기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나는 나비를 나눠주는 강의를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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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 지음, 윤미애 외 옮김 / 새물결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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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 대해서 시기를 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거나 같이 점심을 먹는다. 그들은 구체적인 이해 관계와 전혀 상관없이 서로 공감하거나 또는 반감을 가지면
서 접촉한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기도 하고, 서로는 서로를 위해서 옷을 입고 치장을 한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연결되는, 순간적인 또는 지속적인, 의식적인, 덧없는 또는 중대한 이 모든 무수한 관계들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함께 묶는 것이다. 매일같이 그리고  매 시간마다 이와 같은 관계들이 형성되고 소멸되며, 새로이 시작되고, 다른 관계들에 의해서 대체되고, 그것들과 뒤섞인다.
(중략)
여기에 오로지 심리학적인 현미경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한 사회의 원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이들 상호 작용이야말로 명백하지만 불가해한 사회적 삶이 지니는 모든 끈질김, 유연성 그리고 모든 다양성과 통일성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 게오르그 짐멜, 감각의 사회학 중에서 -

 

 

내가 사실 이 책을 알게된 것은 게오르그 짐멜보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 중 한 명인 사회학자 김덕영 때문이다. 예전에 <논쟁으로 보는 사회학>이란 책과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라는 책에서 풍긴 날이 선 문장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에서 그가 게오르그 짐멜이란 학자를 어떻게 한국식으로 소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하자면, 게오르그 짐멜이 발표했던 글들 일부를 취합해 만든 것이다. 고로 게오르그 짐멜을 맛보고 싶은 사람을 위한 학술적 에세이라고 보면 되지 싶다. 학술과 에세이라는 표현이 만났다고 해서, 에세이라는 표현이 학술의 진중함을 상쇄시킬 것이라는 우려는 일찌감치 놓아두는 것이 낫다. 우리는 어차피 게오르그 짐멜이 당시 사회학의 장 안에서 ‘요상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의 기이한 사회학적 관심이 주류사회학적 관심의 변두리에 위치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앎 속에서 사후적으로 주목받게 된 짐멜의 풍성한 지적 여정 가운데, 우리는 차분하게  그의 매력을 음미하면 되는 것이다.

사회학의 골수분자들이라는 표현을 무례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해준다면, 나는 그들이 게오르그 짐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단순히 오늘날처럼 이제 “재평가받아야 할 우리 시대의 사회학자”라는 평이한 수사를 붙이기 이전에 말이다. 사실 문화연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정통 사회학의 장 안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 내부에서 게오르그 짐멜을 둘러싼 담화들이 궁금한 듯하다. 나는 그런 호기심으로 이 책을 읽었다. 맑스와 베버, 뒤르켐에서 출발하는 사람들, 그 혈맥을 짚고, 여기저기 사회학적 피들을 분출해 보려는 한국의 사회학도들에게 게오르그 짐멜은 “어떻게 이런 것이 사회학적 주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의 입장인 것인지, 혹은 “이런 사회학적 심미안을 가진 짐멜을 당대가 몰라주었던 것은 무척 서글픈 일이다”라고 평가하는 것인지. 난 그 미묘함을 체득하고 싶었다. (하긴 전자의 입장은 사회학을 피상적으로 아는 독자들도 가질 의문일 것 같다)

게오르그 짐멜의 생각은 여기저기 접합이 가능한 또 하나의 사회학적 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다루는 짐멜의 생각들을 좇아가다보면, 미국 시카고학파들 중 조지 허버트 미드의 상호작용론이나 어빙 고프먼의 연극무대론이 연상된다. 특히 본 책으로만 미루어보건대, 짐멜의 기술 방식은 어빙 고프먼의 저작과 무척 유사하다. 어빙 고프먼은 게오르그 짐멜을 참조한 것일까?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이 책이 ‘의례’에 관한 사회학적 관심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이 책에서 흐르는 혈류는 미셸 마페졸리 등이 창안한 ‘일상생활의 사회학’과도 닮았다. 행여 우리가 진부하게 치부할 수 있는 일상의 요소들을 짐멜은 ‘사회학적 미학’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서 이는 드러난다.

짐멜은 ‘문화의 비극’이란 개념을 통해, 사람들이 생산하는 객체들, 즉 예술, 과학, 철학 등을 포함하는 사람들의 객관적 문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과 달리, 시간과 함께 사람들의 창조적 능력이 적어도 조금은 성장하겠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 문화의 생산량 증가는 객관적 문화의 양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진단을 내린다. 어쩌면 ‘사물을 철학하기’라는 또 다른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은 이 책은, 게오르그 짐멜이 현대 사회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를 조금 알 수 있는 입문서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혹은 짐멜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편하게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게오르그 짐멜이 일상에 갖는 관심은 사회학이라는 영역을 확장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짐멜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학자라고 생각한다. 특히 오늘날 게오르그 짐멜이 보여주는 사유의 힘은 바로 일상의 분절화, 다원화 속에서 사회적 개인이 사회라는 풍경에 가치를 찾아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도,  그는 재독해할 필요성이 있는 학자임 또한 분명하다. 짐멜의 사회학은 ‘형식사회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와 개인의 상호결합된 삶의 스타일들을 사회학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유형화된 삶의 근거들을 추출한다는 점에서, 사회학이 추구하려는 기본적인 자세 또한 유념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오늘날 소비사회학을 비롯하여, 특히 문화/예술 사회학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사회학적 신체’라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갖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나타난 짐멜의 시선은 어찌 보면 너무 흐물흐물한 사회학자, 안이한 태도를 가지고 사회를 편하게 바라보는 학자가 아니냐라는 반문을 받을 수 있겠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게오르그 짐멜은 집요하고 또 집요하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현상을 사회학적 개념으로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학자가 가져야 할 어떤 신념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분명 ‘사회학적 신체’를 가진 학자이다. (어떤 면에선 사회학적 관심사에 있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와 유사한 학문적 신체를 가진 것 같다)   

 

 

역자도 강조한 부분이지만, 게오르그 짐멜을  '미시사회학자'라고 섣불리 단정짓는 것은 좀 고려해봐야 할 문제다. 그것은 마치 이정우가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번역하면서, 각주에 적어 놓은 문제제기처럼, 푸코를 쉽게 포스트구조주의자,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변자로 몰아가려는 경향과 유사한 것이다. 게오르그 짐멜의 심미안은 그런 점에서 ‘현미경’이라는 비유를 끌어오는 것이 적당하다고 본다. ‘사회학적 현미경’. 물론 이런 ‘현미경’적인 자세는 학자라면 누구나 견지하고 싶은, 견지해야 할 태도이지만, 적어도 게오르그 짐멜의 세계에서, 이러한 자세는 짐멜이 만들어놓은 사회학적 의의로서 존중받아야 할 것 같다.  그는 미시와 거시의 가교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음을 잊지 말자. 그는 사회학이라는 풍경 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고전사회학의 토대가 된 사람이다.  오늘날 사회와 개인 속에서 ‘문화’라는 매개를 주목할 때, 에밀 뒤르켐과 함께  그는 충분히 숙고해야 할 ‘문제적 학자’라고 주장하고 싶다. 
 

 


덧붙임) 게오르그 짐멜 선집은 다들 알다시피 여러 권으로 출간되었다. 예의상 그 선집을 낸 출판사는 언급하지 않겠다. 이후 다른 리뷰를 통해, 게오르그 짐멜의 생각들을 더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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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단턴의 문화사 읽기 역사도서관 교양 12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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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때,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면서, 나는 줄곧 한 명의 학자를 떠올렸다. 로버트 단턴. 그는 우리 시대가 보존해줘야 할 학자임이 분명하다. 시사주간지 <시사인>의 2009년 도서출판 예정목록을 보고 반가웠던 저자 중 하나였던 단턴의 책은 나에겐 반드시 구매하고 싶었던 저서 중 하나였다. 만약 당신이 책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날 책과 관련된 많은 연구 성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단턴의 이름은 기억해두는 것이 좋다. <고양이 대학살>의 성과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니콜라 콩테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희귀한 사연을 얻은 이상의 지적 보람을 얻었고, 그것은 단턴이 갖고 있는 책에 대한 사랑, 그리고 더 나아가 매체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단턴의 <문화사 읽기>는 사실 그가 새로 낸 책은 아니다. 그가 예전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 하나로 묶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책이 어떤 주제를 가지고 집중된 논의를 펼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늘 관심을 갖고 있던 책의 사회문화사를 중심으로 그것에 파생된 매체의 사회문화적 의미에 대한 고찰, 또 그가 몸담고 있는 역사학 진영 내부의 증인으로서 기술된 역사학의 역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책의 목차는 더 자세히 분류되어 있다)

 

단턴의 본 책에 호감이 가는 이유는 그의 글쓰기에서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써내려간 문장은 진지함을 담보로 하고 있지만, 그 진지함을 부드럽게 풀어가려는 노력을 놓치지 않는 듯하다. (번역자의 노고도 있었음은 분명하다) 단턴은 이 책을 통해 세밀한 학자의 관점을 고수하며, 자신의 경험담을 역사학 내 이론의 진정성과 결부시킨다.  뉴욕타임즈에서 기자로 잠시 일할 당시, 그가 간파하고 있던 뉴스생산조직의 사회학적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은,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는 학부생이라면, 게이 터크만의 <메이킹 뉴스>와 함께 익혀두면 좋을 내용이다. 또 신문방송학 진영 안에서 문화연구를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최근 몇 년간 국내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좋은 성과들을 나타내고 있는 미디어조직의 생산자 연구를 참고할 때, 단턴의 설명은 연구주제의 확장을 위해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신문방송학이란 전공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이 분과학문 자체가 그리 깊이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있는 친구들에겐 상당히 미안하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은 더욱 견고해질 것 같다. 나는 나중에 더욱 자세히 이 부분을 글을 통해 밝힐 계획이지만, 약간 내 견해를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신문방송학은 운명적으로 오늘날 학문 세계 안에서 가장 많이 들려오고 있는 ‘융합적’성격의 학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중론이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선배들이 이 사실을 알고 사회학을 향해, 철학을 향해, 심지어 관련이 전혀 없을 것 같은 문학을 향해 나아갔다. 왜 그럴까. 신문방송학이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표면적인 이유? 그것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학문 자체에 대한 본원적 사유를 펼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나는 결핍이란 코드를 통해, 사회학을, 철학을, 그리고 현재 역사학을 손대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 역사학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다. ‘역사’에 무지하고, 무관심하다는 세대론적 질타의 편견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 또한 있다는 점에서, 나는 로버트 단턴 같은 학자들을 롤 모델로 삼고 싶었다. 내가 속해 있는 분과학문의 한계를 어쩌면 ‘공간의 확장’을 위한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추세’라는, 어쩌면 상당히 ‘사후’적인, 중요한 현상이 와야, 그 현상을 실효적으로 분석하는 데 재미를 들인 이 신문방송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을 더욱 성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역사학과의 조우가 아닐까 싶다. - (이것은 리뷰어인 제가 
가진 생각입니다.)

 

 당신이 서점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서점 곳곳에 진열된, 요즘 더 자주 눈에 띄는 역사 관련 서적들의 풍경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풍경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이 가진 ‘맥락’의 힘은 조금 보탬이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은 독자들에게 “당신, 역사를 얼른 공부하시오!”같은 극성스러운 선교사적 멘트를 남발하지 않는다. 단턴은 자신이 아주 열정적인, 그리고 진지한 역사학자라는 것을 그 어떤 경력의 과시도, 그 어떤 학문적 성과의 자랑도 아닌, 자신이 맡고 있는 연구 대상에 대한 애정으로 쏟아낸다. 그리고 그 애정의 재현엔 역사를 통해 알게 된 수많은 망자의 소중한 고백과 사연들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단턴의 이 고백은 참 멋있다.

“죽은 자를 방문하기 위해 역사가들에게는 방법론 이상의 어떤 것, 믿음의 도약이나 불신의 유예 같은 어떤 것이 필요하다. 다가올 삶에 관해 아무리 회의적이어도 우리는 사라진 모든 생명들 앞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신비주의나 조상 숭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려 할 때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죽은 자를 올바로 다룰 수 있을까? 내가 만약 단 한 번이라도 그 일을 제대로 했다는 자족감에 젖어 있었다면 뭔가 예기치 않은 일, 라무레트의 입맞춤 같은 어떤 것이 내 감각에 충격을 되돌려주었으면 한다.”

 

 


이 책은 역사학의 한 획을 그은, 한 역사가가 역사학의 내부자로서 내비친 증언이다. 이 증언은 이 책 한 권으로 인해 파생될 또 다른 책들을, 그리고 그 책에 담긴 테마들을 독자로 하여금 찾아보라고 설득하는 듯하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한 말처럼, 책은 여러 번 읽어야 그 속의 보물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책은 공부라는 것을 할 때 가까이 아껴보며 참고하고 싶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책이며, ‘글쓰기’에 대한 책이자, ‘글읽기’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그것이 시간을 경유하여 ‘역사’라는 개념으로 발전될 수 있음을, 단턴은 책을 통해 손수 보여주고 있다. ‘컨텍스트’와 ‘메타’라는 개념을 챙기고 간다면, 이 책에 깔린 가치를 더욱 생생히 접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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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피에르 리비에르 - 내 어머니와 누이와 남동생...을 죽인
미셸 푸코 지음, 심세광 옮김 / 앨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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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그는 우리가 알다시피 '정통'이라는 표현을 쉽게 갖다 댈 수 있는 역사학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분과학문 상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문제의식과, 이후 역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전의식을 심어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로버트 단턴과 피터 버크의 저작을 번역했던 조한욱은 "미셸 푸코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아날 학파를 비롯하여 모든 현상을 하나의 중심 주위로, 즉 하나의 원리, 하나의 의미, 하나의 세계관, 하나의 종합적 형태 주위로 수렴시키려는 기존 역사학의 시도를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면서, 의미가 변형되고 확산될 수 있는 '일반사 general history'를 제기하였다"고 설명했다. 이런 맥락 아래, 이 북 리뷰는 미셸 푸코의 저작을 통해 푸코의 '역사의식'을 이해하려는 데 일차 목적을 둔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연구자가 시도할 '역사-쓰기'작업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를 모색하려 한다. 이런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나는 푸코의 많은 저작 가운데, 『나, 피에르 리비에르(1973)』를 선정했다.

이 책은 1835년 6월 3일, 프랑스 오네 읍 라 폭트리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실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미셸 푸코를 비롯하여 알렉상드르 퐁타나, 로베르 카스텔, 필리프 리오 등 콜레주 드 프랑스 세미나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20살 농부 출신의 피에르 리비에르가 저지른 존속살인과 이후 행동에 대하여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고, 본 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을 심층적으로 탐독하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은 왜 피에르 리비에르에 집착했을까. 그것은 살인범 리비에르를 둘러싼 담론의 다양한 층위들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견해와 견해의 충돌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러한 충돌을 통해, 우리는 한 사건을 통한 다양한 시선으로 이루어진 두터운 글쓰기의 효과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역사의식의 효과를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나, 피에르 리비에르』가 갖고 있는 위치를 푸코의 작품 세계 속에서 봐야할 것 같다. 이 책은 미셸 푸코의 박사학위논문이기도 했던 1963년 저작 『광기의 역사』와 1975년에 발표한 『감시와 처벌』그 중간에 위치하여, 양 저서의 특성을 점유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푸코는 책이 나온 1973년 당시, '정신의학의 권력'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열기도 했는데, 각각의 키워드를 추출하자면 본 저서에는 광기, 감시, 처벌, 정신의학, 권력 등의 문제가 등장한다. 『나, 피에르 리비에르』는 역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알맞은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임의대로 이 책의 차례를 크게 나눠 보자면 이 저서는 1부 사료의 공개, 2부 사료에 대한 해석으로 짜여 있다. 책의 실제 목차와 나의 분류를 종합해 볼 때, 1부 사료의 공개는 살인범 피에르 리비에르의 범행과 체포, 예심, 피에르 리비에르의 수기, 법의학 감정서, 재판 기록, 피에르 리비에르의 죽음 및 추가 기록 등 연대기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2부 사료에 대한 해석 부분은 피에르 리비에르를 둘러싼 연구자 각각의 시선들을 사건과 유관한 자료들을 토대로 체계적으로 풀어놓고 있다. 

피에르 리비에르는 1835년 라 폭트리라는 마을에서 농부 일을 하던 스무 살 청년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상당했으며, 반면에 아버지를 늘 하찮게 대했던 어머니를 싫어했다. 어렸을 때부터 피에르를 봐 왔던 동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동물을 심하게 학대하고, 동생의 다리를 불에 지지려는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특히 리비에르는 성장기를 통해 종교 서적을 읽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후 이런 행동들은 리비에르가 왜 자신의 어머니, 누이, 남동생을 낫으로 죽였는지, 왜 리비에르가 자신의 살인 동기를 종교적 질서에 기대어 합리화하려는지 설명하는 데 배경이 된다. 하지만 이 책이 '문제화'하고자 하는 것은 리비에르가 ‘왜 살인을 저질렀느냐가 아니다. 푸코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살인범 리비에르를 둘러싼 각계각층의 담론들이었다. 리비에르를 가까이에서 본 주민들의 증언, '리비에르 사건'을 맡은 판사의 소견과 리비에르의 범행과 그의 이후 행위를 조사했던 의사들, 그리고 이 사건을 보도하는 신문사의 견해는 각각 자신의 위치를 재현하고 대변한다. 무엇보다 푸코가 관심을 가진 견해는 리비에르의 살인 행위를 면밀히 조사하면서 그를 광인으로 볼 것이냐, 혹은 정상인으로 볼 것이냐에 주목한 의사들의 견해였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리비에르의 모습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기능을 수행하는 신문사의 보도 행태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푸코가 늘 관심을 가졌던 문제이자,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1976)』에도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지식과 권력이 개인과 연관되었을 때, 그 개인은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가는 이 책에 드러나는 중요한 주제다.

특히 푸코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리비에르가 심문을 당할 때 쓴 자필 수기를 꼼꼼히 읽으면서, 리비에르의 행위를 둘러싼 중층적 시선의 재배치를 도모하게 된다. 리비에르는 초기에 '정신병적'인 자세를 지향하였지만, 판사와 의사들의 끊임없는 질문에 그러한 태도를 포기하고, 수기를 통해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고 싶다는 것을 밝힌다. 여기서 리비에르는 초기와 달리 아주 논리적인 고백을 써내려 가는데, 푸코와 연구자들은 여기서 하나의 틈새를 발견한다. 여기서 틈새란 곧, 리비에르를 인식하는 의사들의 견해이다. 어떤 의사는 이를 통해 리비에르는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하기 위해 '편집광'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탄로났다고 지적하는가 하면, 어떤 의사는 이와 달리 이런 이성적인 리비에르의 행위가 편집증적인 자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리비에르 사건'을 통해 소식을 접할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사들의 의제 설정에도 영향을 끼친다. 푸코는《칼바도스 신보》등의 신문사들이 내비치는 담론의 속성을 간파하면서, 이들이 독자로 상정한 대중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도덕성을 강화하려는 신문사의 행태를 꼬집는다. 이런 행태는 리비에르가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범주에서 틀 지워지도록 기능한다. 푸코의 역사의식은 여기서 획기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즉 푸코의 역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틀의 내용이 아니다. 그런 틀 자체의 위치가 어떻게 구성된 것이며, 그 구성은 어떤 존재에 의해 이루어졌는가라는 점이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담론일 것이다. 담론은 단순한 사실을 넘어, 사실의 '위치'를 부여하고, 그 위치는 각각의 입장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입장'의 존재는 하나의 사건을 더 나아가 이런 사건들이 개개별로 모인 우리의 삶을 '중층적'으로 만든다. 이는 곧, 역사가 일상과 가깝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우리의 일상이 복잡화, 다원화 되어있음을 인식하는 동기로 작용한다. 푸코는 '리비에르 사건'을 둘러싼 입장들을 수집하고 배치하면서, 그러한 '배치의 효과'들을 노렸다. 이것을 푸코의 전략이라고 표현했을 때, 푸코가 정작 노린 것은 자신의 전략으로 인해 드러나게 될 역사 속 개인의 전략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개인의 전략이라는 개념이 승인된다면, 이것을 추동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둘러싼 개인과 지식의 문제, 그리고 그 두 요인의 연관성을 통해 입장을 가지는 '나' 가 스스로의 권력을 승인, 확대시키려는 의도의 내재화가 아닐까.

 

  역사 연구를 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작업은 성실한 사료 수집과, 사료를 꼼꼼하게 읽고 이해, 해석하는 것이리라. 그런 점에서 미셸 푸코는 역사학자 이영남의 말처럼, 상당히 성실한 역사가였다. 그의 이런 지적 성실성은 우리나라에도 큰 주목을 받고 있는 미시사와 신문화사적 흐름과도 유관한 듯 보인다. 우리 중등교육이란 잡지의 정윤경 기자는 미시사와 신문화사의 특성을 '두껍게 읽기', '다르게 읽기', '작은 것을 통해 읽기', '깨뜨리기'로 보면서,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 린 헌트의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 카를로 진츠부르크의 『치즈와 구더기』등이 보여준 중요한 역사 연구의 특성을 소개한다. 역사 연구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는 이 저작들을 통해 우리는 역사가들의 성실성을 교훈적으로 체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러한 체득의 심층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지점은 연구자 자신에게 우연, 필연적으로 다가온 사료들의 배치와 그것으로 인해 발생된 효과의 예견을 따져보는 작업의 분석이 아닐까 싶다.  

 

푸코와 동료 연구자들이 『나, 피에르 리비에르』에서 시도한 사료의 연대기적 배치는 사실 상식적으로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배치의 효과를 통해 푸코는 자신이 연구를 통해 노린 목적, 즉 리비에르의 범행과 이후 행위를 통해 나타난 다양한 시선들의 분열을 일정한 논리적 체계로 정리할 수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역사 연구의 결과물들을 접하는 독자들을 푸코가 강조하는 '담론의 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작용을 한다. 만약 '담론의 시장'이란 표현을 무덤에 있는 푸코로부터 허락받는다면, 우리는 '리비에르 사건'을 통해 담론을 표출하는 행위자들의 전략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략은 결국 담론의 가격을 매기기 위한 행위자들의 노력이며, 그 노력의 구체성은 '담론가'를 책정하기 위해 필요한 '담론-공급'과 '담론-수요'의 문제로 정리된다. 푸코의 입장에 충실하자면, 높은 '담론가'를 자랑할수록, 그것을 지탱하는 데에는 수많은 지식의 동원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담론의 시장 속에서 상대적으로 강한 영세성을 띠는 행위자들은 자신의 입장을 굳건히 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렇다면 역사의 한 장면으로 들어가 연구자 본인이 높은 '담론가'를 확보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차적인 대답으로 연구자가 다루고 있는 대상들의 견해와 직접 투쟁하여, 그 견해를 압살할 정도의 강한 주장을 만들어내기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푸코의 저작들을 통해 보건대, 푸코는 이러한 대답을 교묘하게 '포월'하는 것 같다. 즉, 일차적인 대답을 통해 나온 연구자와 사료 속 연구 대상자들의 견해와의 직접적인 쟁투는 푸코에게는 어쩌면 당장의 실리가 없을 것이라는 점으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푸코는 『나, 피에르 리비에르』에서 사료를 '그대로' 소개하려 노력했고, 그것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는 데 책의 반 이상을 할애했다. 그가 이 사료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내비친 것은 '이야기되는 살인'이라는 제목의 22쪽 분량의 글뿐이다. 결국 푸코 자신의 높은 ‘담론가’를 책정하기 위해 벌인 전략은 성실한 사료 탐독이란 일차 작업 이후, '리비에르 사건'을 에워싸고 있는 담론들의 위치를 자신의 사유 체계 안에서 재조정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은 미셸 푸코의 저작이라고 해놓고, 푸코의 글이 왜 이렇게 없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푸코는 '타자'의 언어 행위를 통해 자신의 말을 줄곧 하고 있는지 모른다. 푸코는 과연 '복화술사'인가. 하지만, 우리는 이런 수사를 통해 푸코가 차려놓은 다양한 견해의 장들을 한 연구자의 전체적이고 완벽한 주장으로 환원할 위험은 점검해야 한다. 푸코는 다만 자신의 기나긴 지적 여정 가운데, 늘 관심을 가졌던 지식 - 권력 - 개인의 관계 속에서 타자의 입을 대여했을 뿐이다. 다만, 우리는 이런 푸코의 테크놀로지를 보다 지혜롭게 원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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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멜랑콜리아 - 서동진의 디자인문화 읽기
서동진 지음 / 디자인플럭스(현실문화연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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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덮는 순간, 많은 지성인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표현하는 중 하나인, ‘~적’이란 것을 여기서 끌어온다면, 이 책에 대한 나의 소견은 ‘푸코’적이며,‘르페브르’적이며, ‘그람시’적이다. 그리고 ‘보드리야르’적이기도 하다. 사실 ‘전문가’라는 명명 아래, 우리의 학문 세계는 늘 한 모서리에 들어가 그것만을 파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정상적인 것임을 일반화시켜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셸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서문에 밝힌 것처럼, 지성인들의 지적 여정을 하나로 환원시키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리라. 오히려 우리는 다양한 여정을 통해 일관성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법을 이해해야 하며, 그 다양한 지적 여정의 혈류들을 짚어볼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디자인 멜랑콜리아』의 저자인 서동진 교수의 지적 여정은 인상적이다. 그리고 진부하지만 불가피한 물음을 던져본다. “왜 디자인인가?”

(이 질문은 쉽게 던져진 듯하지만, 전혀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된다. 우리는 이 책이 나오기 이전, 서동진이라는 이름을 한국의 문화판에서 익숙하게 봐 왔던 것을 되짚어보고, 그의 예전 인식들을 끌어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던진 문제 의식과 비교, 조합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을 감안한다면, 본 책의 미덕은 예전부터 우리의 일상을 휘감던 ‘노하우(know-how)’의 횡포를 벗어버리고, ‘노와이know-why)'의 실천적 사유를 도모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아마도 내 부족한 추론이 맞다면 저자는 ’디자인‘을 하나의 인식적 대상으로 간주하고, '디자인’의 개념을 확장시키고자 한다.

 『디자인 멜랑콜리아』는 바늘을 가지고 풍선을 톡톡 터뜨리려는 ‘악동’의 심보가 느껴지는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악동’이라고 하여, 당장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이 ‘디자인’에 거는 시비는 사실 저자 본인도 고백한 부분이지만, ‘디자인’이란 무궁무진한 세계에 입문하여, 아직 탐구해야 될 것이 많다는 겸손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적이다’라는 표현을 다시 끌어오자면)  ‘들뢰즈’적으로 말하자면, 본 책은 ‘디자인’을 ‘문제화’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어떤 사건을 문제화한다는 것은 고요하게 흐르던 일상의 흐름에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디자인’을 친숙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디자인을 문제적으로 사유하라고 촉구하는 듯하다.

 예전부터 우리의 일상에 침투한 것은 ‘방법적 삶’이었다. ‘방법적 삶? 그게 무엇일까. 혹은 이 표현에서 나타나는 낌새를 어느 정도 알아차린다면, 이 표현이 뭐 어때서?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맞다. 우리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술자리에서, 카페에서 말한다. “너 앞으로 어떻게 살거니?”, “너 이제 뭐 하고 살거야?” 사람들은 여기서 “글쎄..”, 혹은 ’앞으로‘이후의 청사진을, ’뭐‘라는 괄호에 채워진 단어들을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현대인들이 이런 순간에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방법적 삶’을 찾으러 서점에 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자기-계발’이라는 장르에서 찾는다. 저자는 이제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조직하는 체계들을 하나의 목소리로 획책하려는 ‘자기-계발’의 담론을 디자인과 묶으려한다. “요즘 시대는 왜 이렇게 우리의 삶 자체를 디자인하려는가?”, “왜 꼭 우리의 삶들이 몇몇의 방법으로 정의되고 분류되어야 하는거야?” 이 책은 우리를 둘러싼 ‘방법적 삶’에 대하여 시비를 건다.

 이 책에 깔린 논조를 보자면, 우리는 국가가 주도하던 (‘선동’에 가까운) 기조들을 재사유하게 된다.  정부는 세계화, 신지식인, 문화기술 등등의 담론을 통해, 하나의 모델을 선정하고 그 모델에 따라가라고 국민들에게 말해 왔다. 이것은 하나의 ‘방법’을 도모하고, ‘방법적 삶’을 재촉했다. 극성스러운 부모들은 원어에 가까운 발음을 위해, 아이들의 혀를 병원에 맡기었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어-상품’이 되어 사람들을 성공의 결핍자로 간주했다. 내가 앞에서 이 책을 ‘푸코’적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푸코의 ‘통치성’ 개념. 즉 미셸 푸코의 저작들 속에 늘 등장하는 국가 - 권력 - 개인의 관계 속에서 ‘지식’이 기능하는 형태로 가는 것의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식은 오늘날 디자인이 침투한 삶에 자리 잡아, 삶을 디자인하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삶을 디자인한다는 것 자체를 기분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런 디자인을 통해 그려지는 획일된 삶의 방법론을 각개격파할 필요성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쉽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자본주의의 표상들 때문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것. 여기서 이 책은 ‘그람시’적인 면모를 갖는다. 그리고 우리가 ‘헤게모니’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 인식하도록 하면서, 우리의 일상에서 자본주의가 함몰시키는 사유의 ‘다양한 잠재성’을 깨우자고 주장하는 듯하다.

 지금, 텔레비전을 틀어본다. 은행에 가서 여성 잡지를 본다. 서점에 가서 진열된 책들을 본다. 마주치는 이미지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설명하는 방법들. 그 이미지대로 살 것을 명령하는 ‘무서운’ 친절들. 이 책을 읽고 나서 영화 〈파이트 클럽〉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제리 맥과이어〉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책이 말하는 ‘디자인’에 대한 문제 의식이 본 작품들에게 들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저항’마저 디자인되는 이 시대에, 나라는 존재는 자본주의의 그 획기적인 무서움에 치를 떨 수밖에 없음 또한 고백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여기서 중단할 것인가. 발뺌할 것인가. 우리가 아직 “이 좁은 땅덩어리”라고 욕하지만, 그 땅덩어리 안에서도 무궁무진한 일들이 일어나는 기이함에 신기함을 넘은 지적 호기심을 동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이런 맥락에서 따져보자면, 90년대 한국에 문화연구가 들어왔을 때, 나타났던 일상에 대한 연구자적 호기심, 그 열정이 아직 남아 있다. 그리하여 좀 더 노력을 기울여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은 문화를 연구하고 싶은 사람들, 문화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문화연구’의 역사성 또한 되짚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줄 것이다. (물론 그 자리를 이 책 자체를 통해 얻으려는 것은 ‘공짜’심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정리하면서, 도시가 건네는 수많은 기호의 약속들에 너무 쉽게 흥분하고, 잊어버리는 ‘나’라는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결국 이런 현대 사회의 기호의 약속들을 ‘디자인’이란 개념을 통해 짚어보면서, ‘현대사회의 일상성’을 전혀 다른 판 안에서 사유해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를 둘러싼 문화를 비판한다는 것이 마치 진부해진 것 같은 요즘, 이 책이 던지고 있는 ‘문제적 사유’는 그냥 책을 다 읽었다는 ‘기능적 앎’의 올가미에서 우리를 끄집어내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실천적 사유’라는 것은 그래서 필요하지 않을까. 책을 읽고, 그 책과 연관된 영화를 찾아보고, 문학을 찾아보고, 도시를 거니는 것, 그리고 또 다른 책을 접목시켜보는 것. 이런 태도를 우리는 너무나 외면해 왔다. 우리는 지금 다시 우리 행위의 ‘계보’를 그려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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