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톰슨의 <노동계급의 형성>을 보면. 참으로 멋드러진 표현이 많다. 멋드러지다는 것은 "나도 언제 이런 표현을 써 보나"라는 단순한 감탄의 차원이 아니라, 그 표현을 볼 때마다 가슴에 스며드는 아련한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톰슨은 당시 영국 사회의 노동자들을 둘러싼 심리를 일원화시키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두 왕국이 있었다. 이 두 왕국은 노동자 개인에게 일정한 긴장감 혹은 무기력을 안겨다준다. 내면의 왕국에서 끓어오르는 삶에 대한 의지가 있지만, 그 의지가 체감하고 있는 부정적 현실들. 그리고 그 현실들을 아우르는 억압의 세력에 대한 존재가 주는 부담감은 지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부과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부담감을 주는 존재를 역사가 톰슨은 '정신의 경찰'이라고 명명하는데, 이것은 내가 미셸 푸코의 책을 대학교에서 처음 접했을 때 스스로 떠올려 본 표현과 거의 유사하다. 내 안에 들어있는 경찰.  

대학원 석사과정 2학기가 생각난다. 나는 대학원이 갖고 있는 제도화의 모순에 대해 상당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의 분노를 어리석게 보는 이 대학원이란 곳에 대하여 나는 어느 정도의 회의감 또한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오늘 통과된 미디어법 관련해서, 정작 언론학을 전공하는 이웃 친구들은 해장국 집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며 '쯧쯧쯧' 혀 차는 소리 차원에서 이 시대에 대한 유감을 표명할 뿐. 사실 언론학을 전공한다고 해서, 언론의 현실에 그 어떤 의지를 갖고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기대한다는 것은 어떤 과잉된 패배주의가 아니라, 현실임을 점점 수긍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씁쓸하다.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의 지식은 오히려 점점 소외될 수 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연대할 수 있는 지식. 수평적 차원의 지식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내면의 경찰들은 대학원이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의 습속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술자리에서 제자들에게 "교수님, 와 어떻게 그런 연구를 하세요..선생님 멋있어요"라는 말 한 마디 듣는 위안, 자신을 키워준 인연들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명함을 건네며, 사회적 자본의 항문을 핥아주는 '자족'의 삶 뿐이다.  

아는 후배에게 근조 대한민국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미디어법이 너무나 어이없게 처리되고 텔레비전을 껐을 때, 후배가 전화를 해 "오늘 일식 봤어?"라는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차라리 일식을 정면으로 보고 눈이나 멀어 버릴 것을. 그래서 이 더러운 세상. 그리고 깨끗한 진리를 생산한다고 자위하는 대학원이란 공간의 추태와 무기력을 더 보지 말것을. 지금 여기는 너무 조용하다. 의미없는 뒷담화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한 칭찬들. 말의 향연이 시작될 것이고, 그것이 계속될 수록 그들은 그 향연의 위상을 거대하게 포장하고 말 것이다. 내면의 경찰이 잘 지켜줄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라는 내면의 경찰에 저항하는 그 순간의 즉결 효과를 바라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나 스스로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의지가 담긴 학문적 실천의 소망이 있는 지를 굳건히 점검 또 점검하는 계기들을 우리 모두 공유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그 진부한 토익 시험, 바쁘다는 핑계, 20대들을 그만 좀 둬라라는 진부한 핑계거리를 집어치운 채, 그 내면의 경찰이 주는 이상한 보호막들을 다 부셔버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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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대딸방'과 '술안주'로 전락한 문화연구>라는 제법 과격한 글을 준비중이다. 사실 곧 있을 어느 학술대회의 발표용으로 생각중인데, 그냥 내 '딸딸이'에 그칠 공산이 커 허무한 마음에 끄적거려본다. '문화연구'라는 말을 스무 살때부터 들었고, 곧 십 년을 바라본다. 그동안 문화연구를 공부하면서, 나는 어느 교수의 말처럼 문화라는 것이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데, 이 자체가 학문적 제도화로 나타난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소감에 동의한다. 그래서 문화연구자들은 늘 '정체성 찾기 게임'을 즐긴다. 한국의 문화연구는 이래야 한다 등, ~이다', '~한다' 놀이는 사실 문화연구자들의 진부한 논쟁 거리가 되어 왔다. 이것이 진부할 정도라는 말은 나의 자의적 판단일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나만의 냉소가 들어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학술 공간의 지적 다툼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수록 '인간'이 빠져있는 문화연구의 비극은 갈수록 커져만 갈 것 같다.  

사실 이건 비단 문화연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원이라는 공간 자체에 대한 내 경멸이기도 한 것 같다. 늘 내가 이 글들의 연속을 통해 주장하는 것이지만, 인간을 '이용과 충족'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명성 유지를 위해 삼키고 뱉어버리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선을 인식하는  윤리의 도달은 머나먼 이야기일수도. 무서운 것은 처음부터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대학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사람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연구자들의 '정체성 찾기 게임'이 신물나는 것은, 결국 이들의 성찰이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과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들 간의 경계 유지에 골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술 영역 안에서 '업'으로서의 학문을 추구해야, 자신의 생존이 보장되는 사람들. 그렇기 때문에 '문화연구'는 내가 존경하는 어느 지인의 말처럼, '대기업의 소비자 마케팅 조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고로 문화연구자들은 갈수록 이런 지적에 괴로워하면서도, 다시 돌아온다. 그들의 '정체성 찾기 게임'은 '기계적 관행'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요즘 항상 이 문제로 분노해 있고, 갈수록 시민들과 멀어지는 문화연구를 이야기할 때, 불쌍하게 동석한 한 지인에게 이 분노를 배설한다. 그러면 지인은 말한다. "어이, 자네 학문 세계에 염증 생긴 것 아냐?" 나는 웃었다. "그런가?"라는 어색한 말 하나와 함께. 데이비드 로지의 <교수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등..잡히는 책들을 보면 지인의 지적도 맞는 것 같다. 왠지 부르디외의 '재귀사회학적' 정신을 구현하자는 나만의 선언 자체도 구차해 보인다. 나는 단지 대학원이라는 곳이 이렇게 폐쇄적인 줄은 몰랐다는 솔직한 심정에서 꾸준하게 이 곳의 비밀들을 말하려는 것 같다.  

나에게 지금 이곳은 이상한 감옥 같다. 대중들과 함께 뉴스를 보면서 시시각각 소식들을 접하는데도, 문화연구자들은 그 속에서 연구거리를 찾을 때, 논문으로 쓸 만한 것, 그렇지 않은 것이란 분류 체계를 작동시킨다. 그들의 문장은 유난히 호들갑스러울 수밖에 없다. 마치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유난법석을 떠는 문화연구자들의 '오버'는 그들만의 경계가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심리선 강화에 일조한다.  문화연구자들은 이제 '문화연구라는 제도 영역의 환영에서 벗어나 시민들과 연대해야 한다.(문화연대는 우리는 예전부터 그렇게 해왔다 주장하겠지만, 나는 그것 이상의 노력을 말한다) 문화연구자들의 정체성 찾기 게임에서 나타나는 고뇌의 수준이 "왜 대중들에게 우리 문화연구는 힘이 없을까?"라는 '영향'의 차원으로 간다면, 문화연구자들간의 쟁투는 '그들만의 리그'가 될 것이다. 나 스스로 문화연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문화연구에게 던지는 문제적 화두는 '시민과의 연대', 지식인과 시민이 '평등한 자리'에서, 그 어떤 이론의 확정지음이 갖는 학술적 폭력의 횡행 없이 평등한 이성을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결국 문화연구자들은내가 배운 윌리엄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내가 알고 있는 홀은 그러지 않았다로 귀결된 반복된 문장들을 읊고 말 것이다. 과연 문화연구자들은 시민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혹시 그 노력을 학술대회에서, 혹은 제자들과의 술자리에서 받는 "교수님, 연구 테마 참 좋습니다. 어찌 그런 테마를 연구하시나요?"의 차원으로 즐기고 있지는 않은가.  

'무지한 스승'들의 '기계적 관행'만이 계속될 때, 문화연구와 시민은 갈수록 멀어질 것이다. 남은 것은 문화연구자들의 정액, 애액, 토사물, 쓰러져있는 소주병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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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09-12-04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고맙습니다.
 


히히
  

어제 한국언론학회 50주년 기념 행사가 있었는데, 대학원생 우수논문상 시상식에서 장려상 

을 받았습니다. 기분이 좋네요. 연구에 참여했던 분들께 가장 감사한데, 무엇으로 보답해드려 

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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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9-06-06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마늘빵 2009-06-06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축하드립니다. ^^ 큰 상이네요.

hnine 2009-06-06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자랑하실만 합니다. 축하드려요. 앞으로의 행보에도 도움이 많이 되겠는걸요 ^^

어느멋진날 2009-06-06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무해한모리군 2009-06-07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앞으로가 더 기대가 되네요 ^^

얼그레이효과 2009-06-07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다들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영롱 2009-08-26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씨네21에서 뭐 좀 찾아보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네요. 잘 지내시죠? 너무 오랜만이다~^^ 아, 이게 접때(꽤 오래 전...) 통화할 때 물어봤던 내용, 그에 관련된 논문이죠? 와.. 좋은 성과가 있었군요. 축하축하!^-^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대학원 탈출기'라니. 정말 대학원으로부터의 물리적 탈출이라도 있었던건지!

얼그레이효과 2009-10-28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이팅입니다.
 

며칠 전, 대학원신문에서 우석훈 선생이 오늘날의 20대를 진단하는 기고문을 올렸다. 글의 말미를 제외하고는, 모두 우석훈 선생이 그동한 줄곧 주장해왔던 이야기인지라, 별 낯설음은 없었지만, 글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상징자본'이 가장 많은 20대 대학원생들에게 우리 사회에 대한 희망을 걸어본다는 언급을 보고, 나는 그가 한국의 20대 대학원생들에게 행여 너무 큰 기대를 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물론 우석훈 선생도,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들이 교수들의 '시다바리'로 살아가는 그 인생을 모를리 없는 바, 그 부분을 얕게라도 지적해 준 것은 고마웠지만, 문제는 사실 오늘날 대학원을 둘러싼 존재의 여건들보다 '인식의 전환'이 얼마만큼 대학원생들 스스로에게 있는지를 묻는 데서 출발할 것 같다. 예전에는 대학생들에게 '지식인'이라는 명명이 참 친숙해 보였지만, 난 오늘날 대학원생들에게 이러한 표현을 붙여주고 싶다. '기능인'. bk 프로젝트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논문을 공장 기계돌리듯이 '찍어내는' 현실 속에서, 그 어떤 좋은 사유가 나올 수 있을까. 사회를 진단하고, 자신의 학문 영역 속에 뿌리 박은 고착된 불편함을 제대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긴 할까.  문제는 대학원생들 스스로도 '성과주의'와 학문의 장 안에서 내가 어떤 모델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의 지향점을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나머지, 자신을 둘러싼 학문적 환경의 다양한 문제와 제도의 생성에 대한 의식적 성찰을 거의 포기한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원에 다니는 모든 20대 동료 연구자들이 자신의 '교육사'를 써보길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교에 들어와서 대학원 사회에 진입하기까지, 내가 반드시 청산해고 가야했던 것은 없었을까를 묻길 바란다. 이른바 오늘날 20대들의 가장 큰 문제는 '연장된 폐해'를 거부하지 못하고,계속 가져간다는 점이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대학교에서 대학원으로. 한 단계 밟아나가는 가운데, 그 어떤 습성의 존재들이 우리를 계속 '순응하는 아이'들로 만들어버린다. 나이는 점점 먹지만, '어린이' 그 상태로 머물게 하는 사회적 구조들. 머리에  든 이론의 조각들은  많지만, 그것을 사회 현실 속에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은 전혀 없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대학원생들이라면? 죄송하게도 나는 과감하게 말하건대, 이 질문에는 어느 정도 우리나라 대학원생들에 대한 어두운 기운이 깔려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들어갔다고 시인한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먹구름이 빨리 사라지길 그 누구보다 희망하지만,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을 오늘날 20대를 둘러싼 진단의 지형, '누구누구탓의 정치'로 돌린다면, 그것만큼 무책임한 것은 없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 20대들은 새로운 지식들을 접속하는 능력만큼은 뛰어난 듯하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론과 정보들을 '알고 있다고' 나타낼 수 있는 능력도 좀 괜찮은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지식의 정치학'의 부재다. 이것은 지식을 현실 정치와의 교전을 향한 무기로 사용해야 한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지식을 늘 움직여줘야 하는 태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푸코의 통치성을 알았다고, 베버의 이해사회학을 알았다고, 부르디외의 장 이론을 알았다고. 그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가 의심할 수 없다고 여기는 지식들에 대한 의혹을 나타내야 한다. 그 다음, 그런 의혹의 태도와 더불어 우리는 우리 사회를 성찰할 수 있고, 부당한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살아있는 지식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나라에서 대학원이란 곳은 단지 비싼 돈을 주고, 자신의 몸에 '지식 액세서리'를 둘렀다고 자랑하는 패션쇼 공간일 뿐일게다.  

독설이 이어져서 미안하지만, 나도 그렇고, 내 주위 대학원 동료들도 그렇고 이런 지식의 신상품들을 소유했다고, 지식의 액세서리를 몸에 둘렀다고 으시대는 '패션모델'들이 너무나 많은 듯하다. 지식 자체를 앎에서 그치고, 지식 자체를 내 안에 소유했다고 느끼는 데서 그치는 것을 너무나 잘 하는 오늘날 20대들의 현실 속에서, 우석훈 선생의 <88만원세대>또한, 기업의 면접 질문 중 하나로 들어가버리는 이 상황을,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정말 '정답'처럼 술술 외우며, 사유는 커녕, 성공하기 위한 진입의 기능적 도구로 이용해버리는 태도에 대해 그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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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과 여름을 뒤덮은 촛불 행렬 가운데 나도 있었다. 당시 대학원 사람들에게도 참석을 호소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난 '신기한 사람'으로 취급받은 것 같다. 광장은 뜨거웠지만, 연구실마저 뜨거워질 수는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저녁이 되면 나의 발걸음은 자동적으로 청계광장을 향했다. 발걸음을 내딛었을 때, 동료 연구자 한 명이라도 "같이 가!" 라는 말을 할 줄 알았지만, 그러한 기대는 너무나 컸던 것 같다. 어느 날은 비가 너무 내려서, '헛탕'을 치기도 했다. 문자가 왔다. 비가 와서 어떡하냐는 그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끼리 광장에 간 나를 자신들의 저녁 식사 이야깃거리로 올린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신자유주의'에 관한 토론 수업이 벌어지던 시간이었다. 당시 '촛불'이 활활 타오르던 그 때, 자연스럽게 수업 시간에는 '촛불'이야기가 나왔다. 토론이라는 것은 물론 '반대'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반대 의견이 나오지 않는 토론이란 재미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마음 속에는 남모를 서운함도 있기 마련이다. 다들 이렇게 어떤 의지를 분출하고 있는데, 그 의지를 '무섭다', '너무 진지하다'와 같은 표현으로 몰아가는 동료들의 표현에 따가운 '언침'을 놓고 싶었지만, 그 정도에서 참았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또 이 세상을 바꾸어보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수고'를 "어휴..난 그런 무리..그런 막 일제히 움직이는 거..나 원래 그런 것 싫어해서.."류의 표현 등으로 김을 새게 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튀는 '사람들의 논리라든지, 표현 양식같은 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러한 사람을 '멋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비겁한 사람' 혹은 '예의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의 유리한 공간을 만들어놓고, 다원주의를 얄팍하게 포장한 상태를 드러낸 것 밖에는 안 된다. 어설픈 냉소주의라고 할까. 상대방이 뜨거운 논리로 나온다면, 자신 또한 뜨거운 논리로 맞부딪히는 것이 이야기 주고 받기의 '예의'가 아닐까.  

'촛불'당시를 상찬하던 수많은 지식인들의 덕분인지, '촛불'의 달콤함은 어떤 미래를 낳았다기보다는, 2008년의 유행이 되어버린 것 같다. '촛불'은 우리에게 물론 긍정적 함의들을 주었지만, 연구자의 위치에서, 나는 그러한 긍정적 함의만을 주고 사라지는 지식인들, 학자들의 태도가 많이 아쉬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한 상찬의 행위 속에는 '머리 좋은 구경꾼'의 위치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대학원생들이 모인 논문 발표회를 갔더니, 많은 대학원생들이 촛불을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촛불'을 든 사람들의 의지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연구자들의 글은 없었다. 모두가 '현학'의 꼬리표만 달고, 이 현상을 어떤 고급스러운 이론으로 분석할 것인가에 골몰한 것 같았다. '촛불'은 좋은 연구 주제일지언정, 그 이상을 추동하는 기운은 대학원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많이 배우고, 많이 얻은 사람일수록, 그만큼 나눠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고로 '지성의 최전선'에 있다고 생각되는 대학원이란 공간에 있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어떤 '책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좋은 연구 주제로서의 '촛불'이 광장의 진심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의문이 들었다. 참 많은 이론들이 나왔고, 참 다양한 견해들이 나왔지만, 결국 이러한 이론과 견해들이 사그라진 촛불과 함께 잠들어버린 것에서 나는 오늘날 무력해진 지성인들의 기운을 짚어본다.   

혁명이 지식이 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혁명은 우리에게 진중한 의미를 던져주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것을 '역사적 상식' 이상으로 이야기해보려 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촛불'도 마찬가지다. '촛불'이 사그라들 2008년 말 당시, 누가 그랬다. "누가 요즘 '촛불' 을 이야기합니까?" 무엇인가를 바꾸어보려는 인간의 의지가 마치 유행타는 교회 프로그램처럼 간주받는 세상 속에서 자기 검열의 기운은 개인의 냉정과 열정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미안하게도 지금 한국의 대학원생들에게 이 세태를 진단하는 의견을 묻는다면, 당신은 '헛탕'을 칠 것이다. 대학원생들에게 학문은 '기능'이 된 지 오래이며. 이러한 나의 냉소는 당분간 변하지 않을 듯하다. 모든 이론을 섭식하는 데는 참 능수능란하지만, 그것을 현실 속에서 사유해보려는 노력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금. 이것이 오늘날 대학사회의 현주소이자, 대학원의 그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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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4-19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마음이 곧 제 마음이군요! 촛불 든 거리와 다시 돌아온 일상의 터전은 많이 달랐죠. 몸이 먼저 느끼더군요.

얼그레이효과 2009-04-19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이 먼저 느껴지더라는 말씀..깊이 새기고 싶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