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한편에선 우리는 위기를 본다. 지난 30년 간 나는 관객이 줄어들고 있다는 걱정을 줄곧 들어왔다. 물론 그것은 어느 한 종류의 영화 -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말한다 - 에 닥친 위기일 뿐이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영화를 보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영화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본다는 것뿐이다. 텔레비전으로,비디오로, 비행기 안에서, 기차 안에서, 아마 조만간 우리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서 영화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완전히 개인화된 스크린의 출현을 눈앞에 두고 있다. 특수한 안경 뒤에, 헬멧 내부에 스크린이 자리잡을 것이다. 마치 워크맨 덕분에 홀로 음악을 듣는 것이 가능해졌듯이, 이제 기술의 발전으로 해변가든, 지하철에서든 어느 곳에서든 영화를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304쪽
영화관도 자체적으로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의 TV 수상기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영사 장치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극장들도 옴니맥스Omnimax,360도 화면, 초당 6프레임 영사기등 새로운 기술을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 전쟁의 결과는 아직 팽(304)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관객들이 기술과 맺는 상호 작용으로 인해 관객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사실 기술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설계된 것이다). 이제 곧 레이저 비디오 디스크 덕분에 영화관은 텔레비전의 뒷마당인 가정에서 텔레비전과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아파트는 영화관으로 변할 것이며, 우리가 원한다면 여러 개의 스크린을 갖춘 영화관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홀로그래픽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이미지 가구과 유령 시설들과 함께 이미지 벽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304,305쪽
우리가 "영화 cinema"라고 부르는 그 단어, 다른 언어들에서는 다른 사물을 의미하는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과연 "바로 그 영화 cinema"에 대해 역사를 생각할 수 있는가? 나는 거기에 회의를 가지고 있다. 이미 우리는 대차 대조표와 예(306)측을 휘두르며 과도하게 역사를 떠들어 왔다. 어떤 대상을 역사로 전환시킨다는 것은, 만약 그 대상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경우, 그것을 마비시키는 짓이나 다름없다. 영화는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분명히 아직 "과거"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의 눈부신 기술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것의 힘이 예전에 믿어 왔던 것만큼 무한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영원한 확장대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영화가 필름의 물리적 속성에 불가피하게 종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해서, 영화의 영역이 실제로 줄어 들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지나간 1백 년은 그저 아직도 유년기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질문은 한 가지로 요약된다. 영화는 아직 젊은가, 아니면 이미 늙어 버렸는가? -306,307쪽
기술의 개선은 정상적인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어떤 예술 형식이 "진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인 것이다. 진보라는 단어는 무의미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그 함정에 빠져들곤 한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다음과 같은 얘기를 읽어 왔는지를 생각해 보라. "감독들이 이러저러한 일은 할 수 없었던 그 시절로부터 우리는 참 먼 길을 걸어 왔다"라든가 "이제 곧 얼마 안 있어 영화는 마침내 이러저러한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지금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유행과 취향을, 진화와 진보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국민이든 사물에 대한(307) 독특한 설명 방식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망각 속으로 묻혀져 간다. 그런 운명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시대 - 언제나 모든 것이 살아 남으리라고 가정하는 시대다-에서 "무엇이 살아 남을지"를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시대든 처음 시작할 때는 모든 것이 신선한 법이다. 영화를 포함해 모든 것이 그렇다. 영화는 죽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원기왕성하게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미래의 영화가 어떤 형식을 갖추게-307,308쪽
되건,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건 간에, 그것은 영원히 왕좌를 차지할 수도 없거니와 금방 폐위될 운명에 처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영화도 변해 가며, 또한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308쪽
두세 해 전에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던 감독들의 회의에서 누군가 내게 일상적인 질문을 던졌다. "기술적 진보"가 영화에 도움이 되었는가? 진보의 결과로 매체 자체가 변화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누군가 플로베르에게 물었다던 그 질문을 떠올렸다. 그는 플로베르에게 거위 깃털이 강철 펜촉으로 바귐으로써 문학이 바뀌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플로베르로 하여금 대답하게 했다.(그가 나를 용서해 주기를!).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거위의 인생은 바뀌었지요." "기술적 진보"는 어떤 것이든 잃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거위 깃털의 경우에도 금속 펜으로 대체되면서 종이와의 좀더 유연하고, 좀더 인간적이고 좀더 동물적인 접촉을 잃어야 했다. 그 하얀 깃털의 순수함. 그 불규칙한 펜촉의 감미로움, 그것을 쓰기 위해 필요한 윤활제의 부드러움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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