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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보다 Vol. 1 얼음 ㅣ SF 보다 1
곽재식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SF 보다―Vol. 1 얼음』, 문학과지성사
(가제본 서평단)
<소설 보다>, <시 보다> 의 ‘보다 시리즈’를 발행해 온 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단행본 시리즈, <SF 보다>입니다. 운이 좋게도 <SF 보다>의 첫 번째 작품인 『SF 보다―Vol. 1 얼음』의 가제본 서평단으로 활동하게 되었어요.
(현재는 정식 출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서점에서 정식 도서를 구매하실 수 있어요! )
이 책은 ‘얼음’에 관련된 6가지의 단편 SF를 묶은 소설집입니다. 얼음에 대해 생각하면, ‘단단함’과 ‘깨짐’이 공존하는 물성이 생각납니다. 상당히 모순적이지 않나요? 얼음처럼 냉랭하면서도 쉽게 부서지는 사회의 면들을 소개하는 6편의 단편을 소개합니다.
「얼어붙은 이야기」 곽재식
형식이 정말 특이해서 눈이 가는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이 작품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전지적 작가’로서의 소설을 전개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다가온 ‘얼어붙은 순간’에, ‘생사귀’를 만나며 삶의 시공간에 대해 논합니다. 모든 것이 익명의 작가로부터 결정된 소설같은 인생을 살아간다면 어떨지, 생각해볼 수 있던 흥미로운 단편이었어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이 모든 것은 사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이게 다 무슨 짓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의 내용이라고요. 선생님은 그 소설의 등장인물이고요.”
“그리고 나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다.”
「채빙」 구병모
세계의 얼음이 대부분 사라져버린 사회에서 얼음 속에 갇힌 ‘나’는, 생존을 위해 얼음을 떼어가는 채빙꾼들을 마주합니다. 생존을 위한 이기성이 사회를 지배함에도, 그 안에서도 ‘얼음새꽃’ 한 송이처럼 피어나는 존재가 있지만, 그 존재마저도 부서져버립니다. 얼음같은 차가움으로 표상되는 사회,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따뜻함이 그 냉기 속에서 부서지는 모습이 비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추위도 강풍도 거두어 가고, 눈은 커녕 진눈깨비도 뱉어내지 않고, 단 한 조각의 얼음도 이 세상에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얼음새꽃이 없는 이 세상에서는.’
「얼음을 씹다」 남유하
‘딸이 죽었다’라는 차가운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단편은 첫 문장만큼이나 섬뜩한 스토리로 전개됩니다. 사회가 어떤 요인으로 인해 파괴되면 그 사회의 윤리 또한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윤리가 들어섭니다. 인격에 위반되는 윤리라 할지라도, 다수가 받아들이는 순간 저항하지 않은 자들을 비윤리적인 사람들로 만들어 버립니다. 혹한기처럼 섬뜩하고 차가운 사회의 양상을 보여준 소설이었습니다.
“왜 어떤 이는 규범에 순응하고, 어떤 이는 규범에 저항하며, 어떤 이는 규범 위에 군림할까.”
「귓속의 세입자」 박문영
우주에서 왔다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나를 당신 몸에 잠시 머무르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며 다가오면 어떨까요? 그렇게 반투명의 매우 작은 생명체는 해빈의 귀 안에 들어가 ‘세입자’가 됩니다. 이 세입자는 시공간을 얼음처럼 멈추게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해빈은 열망으로 가득 찬 세계를 회의주의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물이고, 세입자는 시공간을 얼림으로써 세계의 순간들을 포착하여 보여줍니다.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는, 무언가를 향한 열기와 애정이 삶을 추동할 힘을 주는 것 같아요.
“애정은 불안정해요. 순식간에 광기로 넘어가요. ??? 그러니까 외계에서는 축구 따위 하지 않을 거에요. 지성체들은 애정이라는 감각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니까요. 아마 사랑을 넓고 묽게, 과열되지 않는 형태로 발전시켰을 거예요.”
「차가운 파수꾼」 연여름
서론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얼음’이란 모순적인 성질을 동시에 띠고 있는 물체인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단편에서는 얼음같은 아이러니함이 등장합니다. 여름이 뜨거워졌지만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냉정해진 사회의 냉랭함. 그리고 엄청난 한기를 내뿜으면서도 ‘선샤인’이라는 햇살 같은 이름을 가진 존재. 세계를 살아가는 일은 모순의 연속에 직면하는 일과 동의어인 것 같습니다.
“세상은 뜨거워졌지만 사람들은 반대로 차가워졌다. 타인을 믿기 어려운 세상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을 붙들고 살기 어려웠다.”
「운조를 위한」 천선란
주인공 운조는 수의사입니다. 작은 생명의 목숨을 책임지는 일을 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운조는 생명을 끊는 일을 할 때가 더 잦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은 인간의 필요와 이기심에 의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생명체의 생명 윤리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천선란 작가님의 『천개의 파랑』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는 작품인 것 같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운조는 그날 낮에 소를 죽이고 밤에 고양이를 얼렸다. 어떤 것은 기묘하게 빨리 죽여버렸고, 어떤 것은 불필요하게 오래 살렸다. 메리는 이 병원 지하실 냉동 보관함에 오래도록, 제 주인이 죽을 때까지 마지막 숨을 간직한 채 얼어 있을 거였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