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책읽다말고 (플러스펜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7716124</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https://brunch.co.kr/@pluspenreview브런치에도 올리고 있어요. 참고해주세요.</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Wed, 28 Oct 2026 17:23:05 +0900</lastBuildDate><image><title>플러스펜</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0.gif</url><link>https://blog.aladin.co.kr/717716124</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플러스펜</description></image><item><author>플러스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체코문학 내겐 아직 너무 낯설다 - [너무 시끄러운 고독]</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95322</link><pubDate>Tue, 27 Oct 2026 08:1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9532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41547&TPaperId=1759532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715/79/coveroff/8954641547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41547&TPaperId=1759532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너무 시끄러운 고독</a><br/>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07월<br/></td></tr></table><br/>1914년 체코에서 태어난 작가의 소설이다. 최초에는 1977년 체코에서 지하 출판됐다. 경악스러운 글이다. 분명 정치적인 검열과 제노사이드에 폭로가 담긴 이야기고, 주인공 한탸의 자살로 끝을 맺는 불편한 글이다. 오락적인 면모는 어느 한 구석 찾아보기 어려운 이 글을 어떤 점부터 쫓아가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일단 왜 이렇게 오물과 똥에 대해 많이 얘기할까? 보후밀 흐라발 말고 내가 알고 있는 유이한 체코 작가인 밀란 쿤데라와 프란츠 카프카 중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는 키치에 대한 논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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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gt; “6부 대장정”에서는 똥에 대한 부정을 놓고 벌어진 신학 논쟁을 소개한다. 기독교 인류학에서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신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2세기 그노시스파의 대스승 발랑텡은 예수는 “먹고 마시지만 절대 똥을 싸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똥은 악의 문제보다 더욱 골치 아픈 신학 문제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따라서 인류 범죄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을 창조한 신, 오직 신에게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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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이것은 감성적이었던 19세기 중엽에 생겨나 그 이후 다른 모든 언어로 퍼졌던 독일어 단어다. 그러나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함에 따라 그것이 지닌 원래의 형이상학적 가치가 지워졌는데,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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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나는 키치를 싫어한다. 사비나가 마주한 가장 거대한 키치는 공산주의였다. 공산당은 자본주의와의 변증법적 대립에서 결국 도래할 유토피아를 약속하며, 사유재산과 이에 대한 동기를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연대를 강조하며 연쇄 혁명 아래 국가들의 주권을 박탈한다. 이는 개인이 지닌 사물에 대한 소유욕을 본질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고, 사람에게 그가 지금껏 살아온 세계를 빼앗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동의하거나 거절할 수 없다. 2차 대전 동안 나치의 제3제국과 스탈린의 붉은 군대가 이중 점령하였던 동유럽 지역의 역사이다. 너무나 넓은 지역을 도망쳐야만 했기에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한탸의 이야기는 다시 체코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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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는 이 넓은 땅에서도 중심이 되는 도시였다. 30년 전쟁의 격전지였던 도시이고 독일어가 유사 국제어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이 지역은 자신만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나 히틀러에게는 독일인을 위한 생존 공간일 뿐이었고, 이를 얻기 위해서 전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2022년부터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격전지들은 2차 대전에서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그때 전쟁이 일어났던 곳에서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는 수백 년 전부터 이 지역을 서유럽을 향한 교두보로서 확보하고자 하고, 독일은 자신의 해외 식민지를 대신할 유럽의 식민지로서 관리하려고 한다. EU 체제 이후로 독일은 동서 유럽의 교통로 역할로 경제적인 이점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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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와 폴란드 경계를 넘어 있는 이 넓은 땅에는 체코, 우크라이나, 헝가리 외에도 여러 나라가 있고 제노사이드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로 인한 유대인 피해자도 독일과 그 이웃인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의 서유럽 지역에서보다 동유럽 지역에서 많았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보다 그 너머 펼쳐진 광활한 숲과 들판에서 죽은 유대인과 집시가 많다. 공을 들여서 가스실을 짓고 그곳으로 포로를 이송해서 살인하는 학살 공장이라는 정책은 충격적이지만, 실제로 이뤄진 학살의 일부일 뿐이었다. 더 많은 인구가 들판과 숲에서 구덩이에 묻혀 죽었다. 2차 대전 동안 이 지역에는 이중 점령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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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점령은 한 지역을 두 정권이 번갈아가며 점령했던 것을 말한다. 마치 6.25 전쟁 때 서울을 인민군이 한 번 장악하고 이후 국군이 수복하고 다시 인민군이 장악했던 일이 벌어진 것처럼 주요 거점을 놓고 독일 국방군과 소련의 붉은 군대가 쟁탈했다. 두 군대는 현지에서 가능한 모든 식량과 연료를 징발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키이우에서는 굶어 죽었다. 나치 독일은 이를 '굶주림 계획(Der Hungerplan)'이라고 불렀다. 410만 명에 이르는 인구가 단 몇 해 만에 사라졌다. 이는 붉은 군대에 의해서도 이뤄졌다. 티모시 스나이더의 &lt;블랙 어스&gt;는 이러한 소련의 전쟁범죄 성격을 밝히는 역사서고 그 책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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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기간 동안에도 소련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지녔던 서방 세계의 지식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주로 들었던 근거는 동유럽에서의 독일군의 좌절은 소련의 기여라는 점이었다. 이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전세를 기울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일 국방군의 정예들이 동유럽에서 소련의 제파 공격에 의해 녹아내렸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전제를 공유한다. 그러므로 지금 유럽의 자유에는 소련의 기여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과 함께 단 5개뿐인 UN의 상임이사국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동유럽의 국가들의 민족주의자들은 이후 소련 시기의 정치적 박해나 수탈과 별개로 2차 대전 과정에서의 이중 점령으로 인해 자신들이 겪은 학살의 책임을 소련에게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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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탸에게 거대한 산업적 압착기라는 것이 등장하고, 사회주의 노동자인 젊은 청년들이 자신의 일터에 고용되었다. 한탸는 대체되고 지워질 오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운명을 수용한다. 압착기에 들어가서 스스로 죽어버리는 이 장면은 몹시 충격적인데, 마치 가축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알면서도 순순히 걸어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도 닮았다. 아직 최신 압착기 공장이 들어서기 이전에 자신에게 익숙한 조건에서 죽는 것이 그나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전쟁 기계가 휩쓸었던 땅을 이제는 산업 기계가 지배한다. 조판기에서 태어난 책들은 압착기에서 죽음을 맞기 위해 더미를 이루고 야적장에 쌓여가고 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한탸의 꿈은 이뤄질 수 없었다. 망신살을 타고난 만챠의 꿈이라도 이루어질 수 있었기에 위안을 얻는다. 죽어서 일론카를 만날 수 있길 바란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715/79/cover150/895464154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7157963</link></image></item><item><author>플러스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치타델레를 얻는 법 - [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77879</link><pubDate>Sun, 18 Oct 2026 00: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7787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6776637&TPaperId=1757787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942/0/coveroff/899677663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6776637&TPaperId=1757787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a><br/>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09월<br/></td></tr></table><br/>슈테판 츠바이크의 시대가 몽테뉴의 시대와 닮은 만큼 나의 시대도 그들의 시대와 닮았다. 나의 시대는 전 세계적 재블록화와 정체성 정치로 인해 분열하고 있다. 내가 처한 시대로부터 물러나는 ‘체념과 물러섬’을 몽테뉴로부터 얻었다. 역사의 광기는 반복되고 있지만 휘말리지 않기를 선택하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 이것이 주는 위로가 깊다.생애 말년 슈테판 츠바이크는 16세기 인문주의자 중 한 명인 몽테뉴의 삶을 담은 책을 유고로 남겼다. 이 유고 덕분에 몽테뉴가 겪은 종교전쟁의 시기와 슈테판 츠바이크가 겪은 파시즘의 시기라는 유럽사의 두 극단의 시대를 두 인물 사이의 대화로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나치의 승기가 꺾이지 않던 1942년 망명지 브라질에서 자살을 선택했다.유고로 남은 미완성 원고를 읽는 것은 생전에 출간된 저서를 읽는 것과는 다른 친밀함이 있다. 때문에 내게 이 책은 두꺼운 편지로 여겨진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의 선생님이 화자 ‘나’에게 책 한 권 분량의 편지를 유서로 남긴 것과 같은 비감함과 내밀함이 있다.그의 유고는 위로하는 정신의 공간으로 남았다. 그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나는 이 지면에 남긴다. 몽테뉴처럼 어느 나이에 성벽 속의 성채로 물러나지 않더라도, 잠시 내 시대로부터 ‘체념하고 물러서는’ 용기를 지닌다면 나의 치타델레에 머물 수 있다. 나의 치타델레를 갖기 위해서 재력도, 타인의 성채를 빼앗는 일도 필요하지 않다. 만나고 대화하는 시간 뒤에 우편을 주고받는다면, 우편의 그 지면이 치타델레이겠다. 우정이란 자신의 치타델레에서 타인의 치타델레로의 편지 교환이다.<br>“나는 어떤 믿음과 이상을 따라서 격하고 부조리한 망상을 쫓아서 지혜와 멀어졌는가?”<br>나의 치타델레를 갖고 싶었다. 나는 고전과 역사에서부터 해법을 얻고 싶어서 책을 사 모았다. 골동품 수집가의 창고처럼 내 방이 어지러워졌다. 골동품과 고서를 모아두는 일에 내 정력을 소진했다. 나의 서재가 작아 보였다. 박물관을 꾸려놓지 않으면 탐구를 시작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더 좋은 박물관은 어디에 있는가를 검색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할 작품이 갖고 싶었다. 나만이 내 공간에서 관람한다면 어쩌면 내가 다른 사람은 모르는 대단한 것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나는 학교를 찾아서 그곳의 사람이 되어야 했다.그러나 이 지식에 대한 탐욕은 인문주의자들의 길이 아니다. 지난 시대의 형이상학적 욕망을 나의 시대의 이해의 대체품으로 삼을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우월한 텍스트란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자기 자신으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라면 족하다. 치타델레는 성벽 속의 성채도, 사원들의 사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축재로부터 치타델레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기만이고, 이것은 마술적인 사고에 가깝다고 하겠다.나는 글을 잘 쓰고 싶었다. 그래서 고전을 열심히 많이 읽었다. 저절로 글을 잘 쓸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었다. 주문을 암송하는 것과 같았다. 몽테뉴의 길과는 다른 길이었다. 나와 닮아 보이는 대가를 서둘러 찾고 그를 닮으려고 들었다. 그와 나와의 동일시 아래서 읽은 텍스트는 모두 내 것이 된 것으로 보였다. 도스토옙스키가 내게는 그런 작가였다. 서재를 더 채워서 만족감을 누렸지만, 이 길 또한 살아가며 우정을 쌓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을 만들어 그에게 의탁하기였다. 그가 나를 가르칠 수 없는 것까지 나는 그에게 바랐다. 그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은 내가 그를 통해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내 감정만큼 컸다. 몽테뉴는 내게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서 내가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을 일깨워준다. 그는 내게 다정한 우정의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나를 위해 쓰는 기쁨을 느껴라.몽테뉴는 누구도 그가 “유명하다”, “다들 좋아한다”,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되도록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 시간을 보내고자 했던 그는 내게 너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라고 한다. 기억력을 괴롭히고, 좁은 방을 더 좁게 만들고자 책을 사라고 하지 않는다. 자신과 대화하는 때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 생각의 흐름을 느낄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내 마음이 흐르는 곳에서부터 내게 편지를 쓰듯 쓰면 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942/0/cover150/899677663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9420014</link></image></item><item><author>플러스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독서 모임을 가졌던 모임질문들 -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77876</link><pubDate>Sun, 18 Oct 2026 00: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7787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3254&TPaperId=1757787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93/80/coveroff/895460325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3254&TPaperId=1757787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a><br/>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 문학동네 / 2007년 06월<br/></td></tr></table><br/><br>아래 글은 독서모임을 위한 모임자료를 게시글로 정리한 것입니다.아즈마 히로키의 &lt;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gt;의 원문 발췌는 박스처리 하였고 페이지만 표기하였습니다.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나온 본서 1판 8쇄를 사용하였습니다.&nbsp;<br><br>1.&lt;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gt;은 발전한 일본의 미래가 세계의 미래라는 희망적인 전망이 저물고 잃어버린 10년이 1991년부터 진행되어 10년이 흐른 2001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때로부터 다시 25년이 흐른 시점입니다. 우리는 이 책이 출간될 당시의 일본인 독자들과는 다른 사회현실과 문화산업을 경험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왜 이 책을 읽는지에 대해서 대답해야겠습니다. 제가 처음 이 책을 찾아 읽은 이유는 아래 질문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br>"현대의 인간은 서사를 엄청나게 많이 소비하는데, 왜 ‘문학’이라는 제도화된 서사는 상대적으로 적게 소비하고, 웹소설·웹툰·드라마 같은 서사물에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가?"<br>제가 처음 갖고 있던 질문이었고 아직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굳이 아즈마 히로키의 비평처럼 복잡한 설명이 필요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이론에서 텍스트의 소비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가 주목한 2000년대 초반의 웹과 PC 환경은 텍스트뿐 아니라 이미지·캐릭터·음성·분기 등 서로 다른 기호를 데이터베이스에서 호출하고 조합하는 소비 방식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오타쿠 현상을 만화나 애니메이션, 동인지와 같은 기성문화 생산/소비의 틀을 넘어서 2000년대 초반의 웹과 PC환경에서 비롯된 콘텐츠의 첨단성과 연결지어 접근해 들어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따라서 저자는 1990년대의 애니메이션을 넘어 "미소녀 게임"이라는 콘텐츠 양식에 툭히 주목합니다. 이 이형(異形)이고 이질적인, 그러나 동시에 최-첨단인 문화현상에 대한 젊은 아즈마 히로키의 비평은 동물화 하는 오타쿠들에 대한 절망과 함께 그들이 품은 희망의 감정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YU-NO를 집중 비평하는 "3장의 초超평면성과 다중인격"에서 엿볼 수 있는 지점입니다).&nbsp;지난 선정도서인 &lt;지의 관객 만들기&gt;를 통해 "겐론"의 창립과 경영 과정을 알고 있습니다. 겐론의 여명기는 2010년부터입니다. 제게 있어서 &lt;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gt;은 늦어도 2013년도 정도부터 알고 있던 책이었고, 그 이전부터 오타쿠론을 다른 서적을 통해 접해왔기에 "잘 분석했고 흥미롭지만 대단치 않은 책"이라고 생각됐습니다. 그러나 이후 아즈마 히로키의 경영실천 과정인 겐론에 대해 알게 되고부터는 조금 더 의미 있는 책이라고 평가해 봅니다.<br><br>
&nbsp;&nbsp;&nbsp;왜 “데이터베이스적 동물”로 적응했을까?<br>우선은 아즈마 히로키의 논지와는 다를 수 있지만, 제가 정리한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의 사회적인 기원에 대해서 제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패턴에서 주목하는 주변성은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적 획득 경쟁에서 물러나 새로운 욕망 충족 체계에 접속하게 되는 하나의 중요한 경로라고 추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nbsp;&nbsp;&nbsp;주변부에 머물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고독을 즐긴다. Nobody가 아닌 Somebody가 되고 싶다면 획득한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 체념하고 물러서야 한다. &nbsp;&nbsp;무엇이 내게 만족과 위안을 주는가?분노하지 않고 후퇴할 수 있는 이유는 만족, 또는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미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성실한 자에게 분배될 복을 기대하고 다음 기회를 추구하는 것과 같은 오래된 태도가 있겠다. 그렇지 못하다면 기존의 세계관, 가치관을 다른 것으로 변경, 대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체념과 물러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쁨의 박탈'보다 '고통의 억제'가 마음의 우선순위로 자리잡는다. 행복했던 시절의 회상, 더 안 좋은 삶을 짊어질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 명백한 환상임을 알지만 몰두하여 즐김 등의 접근이 있겠다. &nbsp;&nbsp;그 중에서도 어떤 콘텐츠가 싸고 빠르게 작용하는가?내가 속한 집단에서 전염성이 있는 것, 내가 오랜 시간 접해와서 익숙한 것, 호모소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현실의 도피로 오독될 수 있지만 오히려 현실의 강한 순응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도태론이 나온다. 이 지점으로부터 이형(異形)의 서브컬처를 단지 여가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접속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욕망체계가 축적된 데이터베이스로 소비하는 인간형이 있는 것은 아닐지 추정해 볼 수 있다.<br>모임 질문 1. 오타쿠 문화는 어떻게 서브컬쳐로 형성되었으며,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진 이후에도 왜 주변부적 성격이나 혐오의 대상이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가?<br>저는 이번에 재독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통해 처음의 질문, 즉 사람들이 왜 ‘문학’보다 웹소설·웹툰·드라마와 같은 서사물을 훨씬 많이 소비하는가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다시, 아즈마가 말하는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이 일본의 잃어버린&nbsp;수십 년 동안 어떠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적응해 왔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br><br><br><br>
2. 아즈마 히로키의 두 질문<br>2010년대 정도부터 급격히 발달한 SNS로부터 인공지능 대한 논의가 이 저작에는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아즈마 히로키는 2010년대부터는 겐론을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원래 전문분야라고 할 수 있는 영역으로부터 점차 벗어나는 경향을 보입니다. 미소녀 게임과 오타쿠론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보이지만, 점차 첨단 사상을 바탕으로 사회를 해석하는 데에서 ‘어떻게 시민사회를 만드는가’로 문제의식이 되돌아가고, 경영실천에 분투합니다.지금 2026년에는 그의 아래 두 질문에 대한 답변이 매우 바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AGI가 완성되기 이전까지는 인공지능이 어디까지나 도구에 머물겠지만, 지금의 인공지능은 데이터베이스를 연결하는 핵심 실체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포털에 직접 검색하는 경험이 사라져가는 현상이 주된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대학의 기능과 위상에 있어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의 스타트업 신화는 기성 교육의 후진성을 중퇴자 출신 창업가라는 신화로 이야기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피터 틸과 같은 투자자가 직업 개설하는 창업 시스템에 ‘진학’하는 현상이 주목받고 있습니다.<br>1. 포스트모던에서는 오리지널과 복제의 구별이 소멸하고 시뮬라르크가 증가한다. 그렇다면 그 시뮬라르크는 어떻게 증가하는 것일까? 근대에서 오리지널을 창출하는 것이 ‘작가’였다면, 포스트모던에서 시뮬라르크를 창출하는 것은 무엇일까?<br>2. 포스트모던에서는 커다란 이야기가 실조되고 ‘신’이나 ‘사회’도 쓰레기junk 같은 서브컬쳐에서 날조될 수 밖에 없어진다. 그렇다면 그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근대에서는 신이나 사회가 인간성을 보장하며 구체적으로는 종교나 교육기관이 그 실현을 맡고 있었다면, 그 양자의 우위가 실추된 후에 인간의 인간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br>모임질문2. 질문 (1)은 인공지능이 등장해서 실생활에서 작동하는 이상 미국 빅테크의 사업이 창출한다고 대답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어 보입니다. 그에 비해서 두 번째 질문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 봅시다.<br><br><br>3. 데이터베이스적 동물에서 해리적 인격까지<br>코제브는 전후 미국에서 대두한 소비자의 모습을 ‘동물’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강한 표현이 쓰인 것은 코제브의 독특한 인간 규정과 관계가 있다. 헤겔에 의하면(더욱 정확하게는 코제브가 해석한 헤겔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는 그 자체로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주어진 환경을 부정하는 행동이 있어야만 한다. 바꾸어 말하면, 자연과의 투쟁이 있어야만 한다.&nbsp;이에 비해 동물은 항상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 따라서 소비자의 필요를 그대로 충족시키는 상품에 둘러싸여, 또 미디어가 요구하는 대로 모드(mode)가 바뀌어 가는 전후의 미국의 소비사회는 코제브의 용어로는 인간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동물적이라고 불리게 된다. 거기에는 군주도 투쟁도 없는 대신 철학도 없다. “역사의 종언 이후 인간이 그들의 기념비나 대성당이나 터널을 건설한다 해도 그것은 새가 집을 짓고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며, 개구리나 매미처럼 콘서트를 열고 새끼 동물이 노는 것처럼 놀며 다 자란 짐승이 하는 것처럼 성욕을 발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코제브는 초조하게 기술하고 있다.&nbsp;다른 한편, 스노비즘이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 그것을 부정하는 행동 양식이다. 스놉은 환경을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거기에 부정의 계기가 전혀 없다고 해도 스놉은 그것을 굳이 부정하고 형식적인 대립을 만들어내어 그 대립을 즐기고 애호한다. 코제브가 그 예로 들고 있는 것은 할복자살이다. 할복에는 실질적으로는 죽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도 명예나 규율이라는 형식적인 가치에 입각하여 자살이 행해진다. 이것이 궁극의 스노비즘이다.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부정의 계기가 있다는 점에서 결코 동물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은 또 역사시대의 인간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르다. 스놉들은 자연과의 대립(예를 들면 할복할 때 본능과의 대립)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도 역사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의식적으로 수행되는 할복은 아무리 그 희생자의 시체가 쌓여도 결코 혁명의 원동력이 되지 않는 것이다. 119<br>‘그렇기 때문에 더욱’이라는 냉소주의지젝은 그 긴 이행기의 정신을 훌륭하게 반영해 그 구조를 가장 알기 쉽게 이론화한 사상가일 것이다. 20세기란, 한마디로 말하면, 초월적인 커다란 이야기는 이미 없어졌으며 또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것의 가짜를 날조하고 커다란 이야기의 겉모습을, 즉 사는 것에 의미가 있다는 겉모습을 믿어야 했던 시대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어저쩡하게 포스트모던적인 시대였던 것이다. 산다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무의미하기 때문에 산다는 역설은, 지금이야 이미 그 무게를 잃어버렸지만 지난 냉전시대에는 지극히 절박한 사고방식이었음에 틀림없다. 127<br>스노비즘이란 생물학적 욕구나 생존의 필요를 넘어,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 자체를 위해 행동하는 태도이다. 코제브에게서 스노비즘은 인간이 자연적·동물적 욕구를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다.<br><br><br>해리적 마음의 움직임은 어쩌면 독자에 따라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근대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작은 이야기는 반드시 그 배우의 커다란 이야기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소설은 하나의 결말밖에 갖지 못했고, 또 그 결말은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었다.이에 비해 포스트모던의 노벨 게임에서는 주인공의 작은 이야기에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 각각의 이야기는 데이터베이스에서 추출된 유한한 요소가 우연의 선택에 의해 조합된 시뮬라르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얼마든지 재현 가능하지만, 시각을 바꾸면 한번 던진 주사위의 결과는 우연인 동시에 필연이라는 의미에서 역시 필연이며 재현 불가능하가도 말할 수도 있다. 커다란 이야기에 의한 의미 부여를 운명으로 생각할 것인가, 유한한 간으성의 다발에서 선택된 조합의 희소성을 운명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여기에는 소설과 노벨 게임의 차이에 그치지 않는, 근대적인 삶의 기법과 포스트모던적인 삶의 기법의 차이가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는 지면 관계상 오타쿠계 문화밖에 검토할 수 없지만, 보다 넓게 시뮬라르크 수준에서 생겨나는&nbsp;작은 이야기에 대한 욕구와 데이터베이스의 수준에서 생겨나는&nbsp;커다란 비이야기에 대한 욕망의 이 해리적인 공존이야말로 포스트모던을 사는 주체를 일반적으로 특징짓는 구조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147<br>예를 들어 한 인물의 사랑이나 실패, 성장과 몰락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계급사회, 근대화, 가족제도, 인간의 자유와 같은 더 큰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경우겠습니다. 이때 인물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감동을 주는 동시에 더 큰 문제를 이해하게 하고, 반대로 그 사회적·역사적 맥락은 인물의 운명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준다.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까요?<br>저의 경우 주로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웹을 접하지 않은 19세기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저작들을 소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차이점을 &lt;근대의 책읽기&gt;(천정환)의 일제시대 독자의 독서를 연구한 책을 읽으면 무수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2005~2009년도에 ‘읽는’ 것을 즐기는 학생은 거의 웹소설과 NT노벨과 노벨게임을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특징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1)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읽거나 &lt;레 미제라블&gt;을 읽더라도 이들이 그런 서사물을 소비하는 까닭은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이 원작으로 삼거나 래퍼런스하고 있는 작품을 소비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잦았습니다. 단적인 사례는 &lt;길가메시 서사시&gt;라고 하겠습니다. 나스 키노코의 어반 판타지 세계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영령 길가메시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나온 기사도 있으므로 공유드립니다(막내 편집자-게임 유저가 합작해 만든 ‘15년 만의 역주행’). (2) SF, 판타지, 스릴러 장르의 고전 서사물들이 웹에서도, 제 또래의 학생들 사이에서도 독서 정전의 위치 취급을 받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lt;유년기의 끝&gt;, &lt;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gt;는 말 할 것도 없고, 톨킨을 넘어서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가 유행을 하고, 본격적인 의미에 미스테리물이 유통됩니다. (3) 마지막으로 NT노벨 원자의 애니메이션 &lt;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gt;의 공전의 히트, &nbsp;타입문, 리프, 키와 같은 회사들으 노벨 게임이 불법다운로드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통된 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즈마 히로키가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은 저의 경험에서 의문점 하나를 해소해주었습니다. “왜 텍스트를 그토록 많이 읽는 친구들이 19세기의 저작물들을 읽지 않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어려워서라거나 장르가 달라서라고 보지 않습니다. 난해하고 어려운 서사를 갖기로는 오히려 노벨 게임이 더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보다는 애당초 다른 텍스트였다고 봐야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범주를 나누어서 다른 텍스트 상품이라고 생각하곤 있었습니다. 그치만 이러한 분류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나누는 기준에 따른 편의적인 구분일 뿐이었습니다. 근본적인 설명을 원헀습니다.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는 말을 신뢰한다면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은 그다지 과격한 이론은 아닐 수 있다고 봅니다. PC게임과 그 시대의 캐릭터 노벨은 다른 인간형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nbsp;<br>모임질문 3. 아즈마 히로키가 강조하는 지점은 여기로부터 이탈해 있습니다. 그가 주목하는 오타쿠는 시큘라르크 레벨의 작은 이야기를 욕구하고, 데이터베이스적인 욕망을 갖고 커다란 비야야기를 욕망하는 인간입니다. 그는 이러한 인간을 해리적 인간이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의 의미가 이해가 되시나요?<br><br><br>4.&nbsp;아즈마 히로키는 2010년 정도부터 겐론(ゲンロン) 경영을 시작합니다. 그가 만들고자 하는 겐론은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nbsp;(1) 오프라인의 중요성(‘사람이 모이는 곳’)과 오배송이 있는 공간이 하나로 묶이고,&nbsp;(2) 다른 하나로는 좋은 관객이 좋은 문화를 만든다, 계몽의 강조이 하나로 묶인다고 보겠습니다.아즈마 히로키 본인의 내적 성장으로는 호모소셜과의 결별을 고백하고, ‘나와 같은 사람’을 모으는 내부지향적인 공간을 만들기를 포기합니다.그는 &lt;존재론적, 우편적&gt;을 통해 1999년 제21회 산토리 학예상(사상·역사 부문)을 수상하고 데뷔한 28살의 비평가였습니다. 그 후 2년 뒤인 2001년 &lt;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던&gt;을 간행하며 오타쿠로부터 본 일본 사회론을 제시합니다. 그의 일본 사회론은 오타쿠라는 특정 집단의 문화를 바탕하기 때문에 비약하는 지점이 있을 수 있고, 미소녀 게임의 소비와 제작과 같은 소재 자체의 성격과 지나친 미사적 분석인 점은 그의 사회론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후 꾸준한 활동으로 저작들을 발표하면서 흥미로운 일관성을 보여주는 점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단순한 인포테이먼트 성격의 인물로 자리매김하지 않은 점, 본래 그의 강점인 최첨단의 논제와 그의 팬층인 맹우들에 대한 서비스에 갇히지 않고, 더 넓은 층의 사람과의 교류를 통한 사회관계를 만들고자하는 시도가 주목됩니다.<br>모임 질문4. 나의 생활에서 어떤 경험을 선택해야&nbsp;할까요?]]></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93/80/cover150/895460325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38000</link></image></item><item><author>플러스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The Good Earth - [대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58356</link><pubDate>Wed, 07 Oct 2026 01:2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5835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24894&TPaperId=1755835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54/72/coveroff/893102489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24894&TPaperId=1755835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대지</a><br/>펄 벅 지음, 안정효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04월<br/></td></tr></table><br/><br>안후이에 닥친 기근은 왕룽이 가족과 대지를 떠나 남쪽 도시로 이주하게 한다. 노인인 아버지, 어린 첫째와 둘째 아들, 갓난쟁이 딸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화차를 탔고, 도시의 성곽 아래 구호소에 의존한 채 난민으로 기약 없이 입에 풀칠을 하며 버틴다. 왕룽은 오란과 결혼하고부터 재산을 쌓는 재미로 왕성하게 노동했다. 그 결과 황 대감으로부터 비옥한 논마지기를 사들였고, 풍족한 몇 해를 보냈다. 그러나 이곳 대지는 짧게는 5년, 길게는 7년 사이로 극심한 기근과 홍수가 번갈아 들었다. 이번 가뭄에 왕룽 가족은 모든 걸 버리고 오직 땅만을 말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남쪽 도시 성곽 아래 거렁뱅이로 전락했다.<br>2년의 극빈 생활을 아내 오란 덕분에 견딜 수 있었다. 오란은 굶주림이 극에 달했을 때조차 단호하게 땅을 팔지 않는다. 미련없이 가구와 집안 물품을 모조리 팔아치워 여비로 삼았다. 남쪽 도시에 도착한 직후 여자인 자신과 아이들은 구걸로 먹고 살 수 있으니 남편은 돈을 모아 집으로 돌아갈 대책을 세우라고 조언한다. 만약 필요하다면 딸아이를 팔아서라도 모두 살아남아 돌아가는 방법도 있다고 말한다. 왕룽은 오란이 마찬가지로 굶주린 처지의 부모가 노예로 팔아넘겨 황 대감댁 계집종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너무 부유해진 부자들이 혁명으로 몰락할 때 기회가 생겼다. 피난한 도시 부자의 집에서 왕룽은 금화를, 오란은 보석주머니를 노략질했다. 이를 밑천 삼아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br>대지는 펄 S. 벅의 대표작으로 &lt;아들들&gt;, &lt;분열된 집안&gt;으로 이어지는 3부작의 첫 소설이다. 이야기는 왕룽이 오란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시작한다. 왕룽을 중심으로 그의 집안 가족들의 생애를 따라가고 있다. 안후이 농촌의 전근대적인 중국 가족의 삶과 풍습이 생생하다. 딸을 노예로 팔아치우는 부모, 전족을 강요받는 여성의 삶, 지주의 축첩과 축재라는 사회 문제를 놓치지 않고 다루지만, 이야기는 농부 왕룽이 대지와 맺은 “풍요의 약속”을 신화의 이야기처럼 전한다. &lt;대지&gt;는 도시화 이전의 삶, 농촌과 농사, 땅과 인간의 풍요와 생명력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농촌문명의 풍습을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성장하고 변모하는 인물인 왕룽의 시야를 따라서 모험하듯 체험해 볼 수 있다. 이야기의 인물들은 개성적이고 특출나다기보다는 관습적이고 전형적이지만 생생하고 강렬하다.<br>오란의 죽음 이전과 이후로 왕룽의 인생의 챕터가 나뉜다. 1부는 고난과 축재, 2부는 풍요와 병폐라고 할 수 있겠다.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서 황 대감 댁에 들렀던 가난한 농부 왕룽은 2부에 들어 대감 댁의 땅뿐 아니라 집까지 모조리 자기 것으로 사들일 수 있었다. 이제 자신도 대감의 입장에 선 것이다. 왕룽은 고민을 겪지만 평온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아들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왕룽은 계집종 출신이었던 오란을 소중한 아내로 맞았고 땅에서 노동하며 스스로 일어선 인물이다. 그의 첫째와 둘째 두 아들은 어린 시절 남쪽 도시에서의 극빈을 경험했으나 이후 왕룽이 재산을 쌓으면서 노동이 면제되고 간단한 글공부를 배우며 땅으로부터 멀어졌다. 터울이 있는 막내 아들은글공부를 시키지 않고 농부로 키웠다. 막내 아들은 형들과 다른 처우에 피해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모습에 있어서 아버지보다 어머니 오란을 닮았고 말수가 적은 점까지 물려받았다.<br>맏아들의 혼례를 보고 오란은 죽었다. 왕룽에게 오란은 몹시 가난하고 어려울 때 고생을 함께 겪은 아내로 말 그대로 조강지처(糟糠之妻)이다. 이어서 늙은 왕룽의 아버지가 죽었다. 옆집 남자였고 자신을 잘 따르며 집사 역할을 했던 칭도 죽었다. 이 집에서 이제 과거 가난한 시절을 기억하는 세대가 사라졌다. 둘째 딸은 시집 보냈고, 백치 딸을 돌볼 사람이 없어 자신이 돌본다. 집안에서 오란이 묵묵하게 맡았던 조화는 사라졌다. 첫째와 둘째 아들의 며느리가 싸우고,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로 인해 골치를 썩지만 아편을 제공해서 무마시켜나간다. 위협이 되던 종제가 전쟁터를 찾아 떠났기 때문에 왕룽은 한시름을 덜었다. 이런 그에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친다. 막내 아들이다. 막내 아들은 배움을 원했다. 왕룽은 농사일을 맡겨 막내 아들만은 농부로 키우려던 생각을 접었고, 가정교사를 붙여줬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br>왕룽의 말년은 조용히 흘러갔다. 종제의 위협마저도 지니고 있는 재산이라 할 수 있는 계집종을 한 명 내주면서 파국을 피했다. 늙은 롄화 대신 몸종이던 어린 리화를 취했다. 평온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고 체면이 조금 상하지만 원하는 건 모두 가졌고 표면적으로는 두 아들도 자신의 뜻을 따랐다. 그러나 막내 아들만은 달랐다. 자신에게 대드는 막내 아들에게 원한다면 계집종을 줄 수 있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농엔과 눙웬에게는 어린 리화를 애첩으로 삼은 것을 보이는 것이 껄끄럽지 않았다. 막내 아들에게는 달랐고 두려움을 느꼈다.&nbsp;“전 이제 군대에 가겠어요. 이제 전 떠나야겠어요.”막내 아들은 리화를 애첩으로 삼은 것을 문제 삼고 대들지는 않았지만 “왕룽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별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이 아들이 갑자기 두려워졌다.”<br>&lt;대지&gt;의 후속편 &lt;아들들&gt;로 이어지는 30장의 이 부분은 이야기의 경첩이 되는 부분일 것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1) 왕룽과 막내 아들의 관계가 어떻게 끝났지, (2) 막내아들이 두 형 농엔과 농웬과 어떤 다른 감정과 동기를 지니고 살아갈 것인가를 어렴풋하게 가늠해보게 한다. 오란은 26챕터에서 죽었고, 30챕터에서 막내 아들이 농부 역할을 면제받았다. 왕룽은 가부장으로서 자식들의 인생을 자신 뜻대로 결정해 왔으나 자식들은 대체로 따라주지 않았다. 장남은 위신을 위해서 가르치고 재물을 대주었고, 차남은 잇속을 챙기기 위해 곡물상으로 밀어줬다. 그 결과 장남 농엔은 허례허식과 허영으로 가득한 놈팽이가 되어갔고, 차남 농웬은 자기 결혼식 하객에게도 고기와 음식을 아끼는 재산만 쫓는 자로 성장했다. 왕룽이 베풀어준 도움이 좋게 작용한 적이 별로 없고 아들들의 본성의 나쁜 면이 더 무성하게 자라나게 했다. 그에 비해 어머니가 죽기 전까지 막내 아들은 하인이나 일꾼처럼 농사일만 하고 컸다. 오란과 막내 아들이 닮은 지점들이 연결된다. 참고 견디는 이들에게 왕룽은 무심했고 이들은 굳은 결심을 가진 채로 세월을 견뎠다.<br>&lt;대지&gt;의 풍요는 정의로움과 관련이 얕다. 자연이 주는 벌과 선물은 짧은 인생사를 예측불허하게끔 만든다. 누가 부를 쌓을지, 누가 번성할지에 있어서 대지가 요구하는 자격 조건은 무엇일까? 아무튼, 왕룽은 대지의 풍요를 누렸다. 재산과 처첩, 자손과 수명에 있어서 은혜를 입었고, 그렇기에 그는 두 아들이 땅을 팔아치울 생각임에 분노한다.&nbsp;대지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시대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nbsp;펄 S. 벅의 필체는 다음 시대를 예고했다.&nbsp;막내 아들은 천하를 주유하는 삶으로 나아간다.&nbsp;중국 역사의 최대 혼돈기이기도 했던 이 시대 왕룽의 자손들은 무엇을 마주할 것인가? 왕룽과 오란에게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찾았던 남쪽 도시였고, 맏아들에게는 향락과 도피의 장소였던 남쪽 도시였다. 작가의 펜은 막내 아들의 발걸음을 따라 남쪽 도시를 향해 천천히 옮겨가고, 수많은 도시와 전장의 사람들이 쏟아내는 젊고 빠른 말 속으로 뒤섞이며, 그들이 말했던 것보다 더 거대한 현대의 태동을 향해 약진할 것이다.<br><br><br>추기
&lt;대지&gt;의 배경은 어림잡아 1900~1910년대 초반이다. 이때 중국의 도시화율은 10%에 미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UN이 추정한 2025년 기준 세계 인구의 45%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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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아들이 친모 오란에 대해서 더 깊은 정을 느낀다는 것이 소설에 표현된 부분은 없다. 부자가 된 이후 왕룽은 아이들에 관심을 잃고, ‘롄화’라는 첩을 들이고 재산의 즐거움을 느끼는 데 몰두한다. 막내 아들은 이 시기 사춘기를 겪으며 성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롄화 사건이 정점을 치고 수그러들즘에 오란은 병으로 수명이 다하고 재산을 누려보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 가부장질서에 따라서 글공부를 했던 농엔과 농웬에 대해서 어머니 오란은 자신이 모셨던 황 대감댁의 도련님들처럼 엇나가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왕룽에게 돈을 받아 서당에 다니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첫째와 둘째 아들은 어른대우를 받으며 오란의 품을 벗어난다. 오란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세번째인 백치 딸과 그 아래 막내 아들, 막내 딸이 많았을 것이다. 백치인 딸과 시집으로 떠난 막내 딸의 이야기를 알 수 없고, 막내 아들만이 가부장 왕룽에 대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막내 아들의 입장에서 볼때, ‘자신이 겪는 것보다 부당한 대우에 순종하는’ 어머니 오란의 죽음 다음인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오란의 죽음 이후 막내 아들의 이탈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된다. 오란의 죽음은 이미 싹트고 있던 막내 아들의 이탈과 결단이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는 서사적 경첩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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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란의 존재는 훗날 토지개혁을 다룬 중국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들이 형상화한 ‘고대구심한 노동인민’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그러므로 중국 현대문학의 혁명적 서사와 비교할 때 펄 S. 벅의 접근은 다른 방향에 서 있다. 오란과 같이 가장 미천한 사람이 때론 가장 강인하고 지혜로운 존재로 그려지고, 주목받지 않던 막내 아들이 미래를 열어가는 점에서 그러하다. 《대지》의 후속편 《아들들》의 서사 구조는 약한 자가 뒤집는 성서의 문법과 닮았으리라.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54/72/cover150/893102489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2547290</link></image></item><item><author>플러스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 [모래의 여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53256</link><pubDate>Sun, 04 Oct 2026 01: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5325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0556&TPaperId=1755325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42/coveroff/s93293478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0556&TPaperId=1755325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모래의 여자</a><br/>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br/></td></tr></table><br/>‘사회’는 어떤가? 만 28살 남자는 결혼을 했고 교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라는 별명의 친구와 이런저런 강연을 들으러 다니고 곤충 채집과 모래 연구가 흥미를 가진 인물이다. 정신적인 성병을 앓고 있었지만, 그것도 특별한 질환은 아니었다. 8월 어느 날, 곤충 채집을 위해 모래 마을을 향했던 이 남자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가 실종된 진정한 이유를 모르는 채 7년이 지나, 민법 제30조에 의해 끝내 사망으로 인정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모래 마을’은 어떤가? 그곳에서 남자는 모래의 여자와 어느 구덩이에 감금당했다. 처음은 도망가고자 하는 원초적 욕구로 가득했다. 이곳에 갇혀 있는 것 자체가 벌이었다. 그러나 지금 남자는 유수장치에 관해 느끼는 흥분에 도취했다. “도주 수단은, 그다음 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무인도를 문명화하려고 분투했던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남자는 모래 환경의 생리를 발견-탐구하는 유희를 즐긴다.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모래를 파헤치는 사이 7년이 넘는다. 남자는 실종선고를 받는다. 니키 준페이, 1927년 3월 7일생. 만 35세 때다.<br>‘사회’와 ‘모래 마을’은 어떤가? 결말에 도착한 남자에게는 더 이상 ‘사회’와 ‘모래 마을’을 서로 다른 두 공간으로 나눌 이유가 없다. 이 점은 탈출할 동기가 사라졌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회’와 ‘모래 마을’을 분절된 두 공간으로 인식하기를 멈춘다. 남자는 이전까지 사회와 모래 마을의 관계를 중심과 주변, 안과 밖처럼 인식했고 자신이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기대했다. 그러나 남자가 놓인 이 초현실적인 공간의 구조가 뫼비우스의 띠와 닮았다면 어떨까? 더 이상 어디로 이동해도 탈출할 수 없다. 더욱이 이 공간에서는 물리적인 공간의 이동을 통한 탈출이라는 개념의 의미 자체가 부재한다.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도 ‘밖’이라는 다른 영역에 도달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이다.<br>구덩이에 갇힌 남자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적다.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그의 기억 속 두 명의 인물과의 에피소드가 전해지는 게 전부이다. 그는 모래 마을 이전에도 인생이 만족스러웠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있고, 두 번째로 뫼비우스의 띠라는 별명을 가진 동료교사 친구가 있다. 남자는 단출한 인간관계만을 자랑하지만 특이한 에피소드를 전달한다. 남자는 아내와의 관계에서는 반드시 콘돔을 사용하는 규칙을 지키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아내에게 ‘상품 견본을 교환하는’ 그런 거나 다름없는 관계를 갖는다는 섹스에 대한 불평을 듣는다. 그가 콘돔 없이는 발기부전에 빠지는 불능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으나… 직장에서 만난 친구와는 활발한 교사노조 활동을 하고 있다. 사복 경찰이 감시하는 강연에도 참석했던 적이 있다. 그 친구의 이름은 뫼비우스의 띠이다. 이유는 친구의 ‘직장과 사생활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br>&lt;모래의 여자&gt;의 공간에서는 “곤충 : 모래 = 인간 : 사회”라는 유비의 비례식이 성립한다. 곤충 포획을 위해 모래 마을을 찾은 남자는 포획당한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신원을 묻더니 관청에서 나온 사람이 아니란 것을 확인했다. 그는 모래의 여자가 사는 구덩이에 갇혔다. 이곳에 온 까닭은 Cicinaledela Japana Motschulsky라는 학명을 지닌 곤충을 찾고자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모래에 갇혔다. 모래: 암석의 파편의 집합체. 때로 자철광, 주석, 그리고 간혹 사금을 포함하고 있다. 직경 1/16~2mm. 채집하고자 하는 곤충의 생태를 연구하면서 모래라는 물질에 대해서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이다.<br>남자는 며칠이 지나도 구조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은 그가 아무리 절규해도 들을 채 하지 않았다. 이곳에 완전히 붙잡혔다. 인간이 모래 구덩이에 갇혀 살 수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도주하였으나 실패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살려달라” 애원하여 구조되어 다시 모래의 여자의 구덩이로 돌아왔다. 모래의 여자는 라디오를 살 수 있을 돈을 모으고자 구슬을 꿰는 부업에 열심이다. 남자는 희망을 갖고 새를 잡기 위한 장치를 만들었다가 우연히 “유수장치”를 개발한다. 모래 구덩이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됐고, 왜 이 모래가 나무집을 부패하게 하고 무너뜨리는지도 납득하였다.<br>남자는 모래의 여자가 마치 곤충의 개체처럼 모래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사실에 경악한다. 강제로 제압하고 마을 사람들을 유인해서 탈출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나서 남자는 모래의 여자와 강압적인 섹스를 한다. 모래의 여자는 순응하고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다고 밝힌다. 전 남편과 아이의 뼈가 이곳 모래 어딘가에 묻혀 있으며, 폐허의 시대 끊임없이 걷다가 겨우 도착한 이 모래 마을을 떠나서 어딘가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한다. 모래의 여자는 돈을 벌어서 라디오를 사고 싶다는 욕망을 거듭 말하고 결국 산다. 마을 사람들은 모래를 퍼내서 도시의 건축업자들에게 팔고 있다고 한다. 남자는 소금기 많은 이 모래를 사용하면 부실공사이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하지만, 여자가 말한다. “무슨 상관이에요. 그건 남의 일이야. 어떻게 되든!”<br>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다. 탈출하고자 했던 남자가 모래 마을을 더 이상 탈출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끝난다. 물을 얻을 수 있는 “유수 장치”를 통한 실험에만 관심이 사로잡혀 있다. 왜 그의 태도가 바뀌었을까? 정신질환적인 해석도 가능할 테지만 나는 지양한다. 그가 지내면서 모래의 여자와 쌓은 관계 때문에 떠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모래의 여자와의 섹스에서는 콘돔이 없이도 원만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다른 그 무엇보다 그가 모래에 대한 탐구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구덩이에 감금된 이후 모래의 여자와의 관계에서 노동과 섹스를 충족했으나 그가 이 모래 마을에 처음 찾아온 까닭인 관찰과 탐구의 유희는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점은 결말에서 충족된다. 그리고 남자는 탐구를 계속해 나간다. 마치 곤충이 자신에게 주어진 생태환경에 맞춰서 다른 독특한 형태로 자신의 종을 진화시켜 나가듯이 남자는 모래 마을에서 변모한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42/cover150/s93293478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4293</link></image></item><item><author>플러스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파티마의 성모 - [연금술사 - 최신개정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44826</link><pubDate>Wed, 30 Sep 2026 00: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4482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130492&TPaperId=1754482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02/10/coveroff/k02213049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22130492&TPaperId=1754482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연금술사 - 최신개정판</a><br/>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북다 / 2026년 07월<br/></td></tr></table><br/>산티아고는 순례자다. 우리는 그를 폐교회에서 처음 만난다. 사제가 되어야 할 재목이었다. 여행을 꿈꾸기에 소명을 거부했다. 사제는 교회를 위해 살아간다. 마치 양치기가 양을 위해 살아야 하듯 메여 있다. 아버지는 허락한다. 아들에게 재물을 주고, 아들의 바램대로 양을 살 수 있게 해준다. 아버지의 눈에 산티아고는 그다지 다른 삶을 살지 않는다. 안달루시아를 떠나지도 않았고, 선한 목자가 되었다. 금새 마을 소녀와 눈이 맞아 정착할테지. <br>그러나 신은 다시 산티아고를 부른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날 것을 허락했던 아버지에게 산티아고의 여흥은 기다릴만 했지만, 양들에게 메여 음식과 물만을 찾아 다니는 산티아고는 가여웠는지, 꿈을 보낸다. 소년은 지상의 기적을 꿈꾼다. 사막과 피라미드가 보이는 꿈. 그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집시 여인은 그곳에 보물이 있다고 한다. 살렘의 왕을 만나게 된다. 아불싸, 정착하긴 틀렸군. 이때 양 10분의 1을 내놓는다.<br>해협을 건너 탕헤르 항구에서 남은 양을 모두 잃는다. 사막을 건너긴 틀렸다고 생각이 들었을쯤 살렘의 왕의 조언과 두 돌맹이가 아직 남아 있단걸 상기한다. 크리스탈잔을 팔고 돈을 모아서 다시 떠날 준비를 한다. 아랍어도 배운다. 이때, 전재산을 지불한 대가로 얻은 것은 다른 장소에서 사는 경험, 여행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익힘, 메카로 떠나는 것이 꿈이지만 결코 떠나지 못하는 중년의 인생과 마주함이다. 양치기를 버리니 사막을 건널 준비가 조금은 되었다.<br>산티아고는 되돌아가서 다시 양치기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상의 기적과 보물에 이끌려 사막을 건넌다. 책에 파묻힌 영국인을 만나다. 그는 연금술을 공부한다고 한다. 산티아고도 연금술을 배워보려 하지만, 그에겐 사막이 더 유혹적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정과 밤의 휴식과 모닥붉. 부족간의 전쟁이 이어지는 두려운 땅. 양들마저도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땅. 광야이다. 아랍어를 배웠듯 사막에서 사막을 배운다. 살렘(오아시스)에 도착한다. <br>왜 피라미드일까? 예루살렘은 무너졌기 때문일 것이다. 신이 함께 한다면 어째서 로마에게 무너졌겠는가. 피라미드를 향해 떠나는 여정은 오아시스 마을에서 잠시 멈춘다. 파티마를 만난다. 소년과 소녀는 사랑한다. 매의 오멘(표지)을 읽는다. 습격이다. 사랑하는 소녀와 살렘을 지키기 위해 소년은 목숨을 건다. 마크툽. 낙타잡이에게 배운 아랍의 아멘. 산티아고는 쓰여진 것을 바꾸었을까? 그가 쓰여진대로 지켜낸 것일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연금술사가 나타나고 그에게 말한다.<br>너는 누구이길래. 감히 오멘을 읽는가. 어째서 이곳에 있고 어디로 향하는가 말한다. 파티마를 두고 떠난다. 재회를 꿈꾸며 더 깊은 사랑을 느낀다. 파티마는 무하마드의 넷째, 막내 딸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녀의 위상은 그리스도교의 성모에 비견될 만하다. 오아시스에 다다른 소년은 자신이 이미 지상의 기적들을 마주하고 있다는걸 여렴풋하게 느낀다. 파티마의 가호였을까? 산티아고는 예언을 행했다. 연금술사는 어린 예언자에게 길을 인도하기 위해 사막을 건넌다.<br>사막에 갇힌다. 부족 전쟁에 휘말렸고, 모든 재산을 내놓았고 간신히 사흘을 벌었다. 연금술사는 담담하게 말한다. 충분한 시간이다. 바람이 되어여라. 나는 이미 바람이 될 줄 안다. 소년은 기적을 행하여야 살아남는다. 오랜 성서의 숱한 예언자들처럼. 다행하게도 바람이 되기만 하면 된다. 불도 물도 대지도 아닌 바람이다. &nbsp;연금술사는 물질만이 아니라 영혼을 꿰뚫어보고 연성하는 대가인듯 하다. 산티아고는 그는 본디 순례자이고 그는 살아 숨쉬는 이상 여행하고자 한다.<br>숨을 쉬는 것과 바람이 되는 것은 산티아고에게 있어서 같다. 모두 여행이란 자아 신화를 향한다. 납이 금이 되는 연금술의 변환처럼 둘은 서로 뒤바뀔 수 있다. 사막의 인간은 사막을 통해 이 진리를 느끼지만, 이것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죽는다. 인간은 진리의 문을 오직 죽음 다음에서야 마주하게 되고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하며 잊는다. 그러나 그 진리가 어딘가 쓰여져 있단 것은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창조를 보고 싶고, 완성을 보고 싶고, &nbsp;연금술을 보고 싶어한다. <br>바위 산에 오른 소년은 모르는 사막을 부르고, 사막은 바람을 부르고, 바람은 태양을 부른다. 이들에게 소년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자연은 진리를 안다. 그러나 사랑을 모른다. 소년은 자신의 목숨과 사랑을 알려주겠다는 약속을 통해 신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산티아고의 여러 여정 중 하나의 여정이 이곳에서 끝난다. 신을 향한 여정이 완성된다. 기적이 완성되고 바람이 된다. 소명을 거부했던 이유는 교회가 아닌 신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일까? 그렇기에 파티마가 인도해줬던 걸까.<br>이후 여정은 피라미드를 향한다. 연금술사가 납으로 금을 만드는 연금술을 보여주지만, 소년은 배우지 못한다. 산티아고는 숨쉬는 생명으로부터 바람이 되어, 원소가 되어 자신의 연금술을 보여줬다. 굳이 더 배워야 할 이유도 가르쳐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연금술사 자신이 금을 연성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둘은 헤어진다. 소년을 아들이라 부른다. 연금술사에게 천사가 깃들 것일까? 알 수 없다.<br>이때, 소년에게 연금술사는 그리스도를 만난 로마의 백인대장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어째서 이 기도가 널리퍼졌는가. 연금술사는 그때 평범한 사람이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았다. 신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기적이다. 소년이 바람이 되는 것 또한 잊혀지지 않을 이야기가 될 것이라 말한다. 소년의 일생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기도할 때 마음 속에 그리는 이야기로.<br>마지막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꿈을 꾸었지만 안달루시아 교회로 떠나지 않은 청년은 아무 것도 겪지 않았다. 그는 보물이 그곳에 묻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악한지 선한지 알수 없을 유혹에 따르지 않았다. 나 같은 놈들이 세상에 널렸는데, 그곳까지 간다고?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 산티아고는 바람보다 빠르게 재회하고 싶은 사막의 여인을 만났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보물은 거기에 있다. <br><br><br>여기서부터는 나의 추측이다. 1. 파티마는 성모 마리아다. 산티아고는 그 소녀를 다시 만나진 못한다. 이 소설의 모든 인물들은 산티아고를 제외하고는 보통명사로 이름붙여져 있다. 파티마 예외일까? 아닐 것이다. 그녀는 사랑을 가르친다. 기적을 향하게 한다. 그리고 널리 여행하게 한다. 파티마는 포르투칼의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다. 코엘료는 포르투칼어로 글을 썼다. 아래는 위키피디아 파티마 항목이다: “파티마의 유명한 성지인 대성당은 1917년 세 어린이가 파티마의 성모를 목격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름이 무엇이냐는 어린이들의 물음에 대해, 여인은 “나는 로사리오의 성모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린이들은 코바 다 이리아라고 불리는 목초 지대에서 성모 발현을 경험한 것이었다.”<br>2. 보물은 폐교회에 있거나 없거나 알 수 없다. 신은 결코 부를 약속하진 않는다. 스스로 일궈내는 것이다. 건강과 생명의 은총만을 내려주지 부를 내려주진 않는다. 낙태잡이 아저씨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첫 장면의 폐교회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째서 산티아고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까. 나는 그곳에서 산티아고가 파티마를 만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아시스를 지나서 파티마를 데리고 교회로 가도 되는 것인데, 어째서 먼저 보물을 얻고 파티마와 재회할 것을 꿈꿨을까?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보물은 파티마다. 소녀로 발현했던 성모가 이번엔 진정한 모습으로 산티아고를 기다린다. 내가 생각하는 엔딩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02/10/cover150/k02213049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021013</link></image></item><item><author>플러스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가족 로맨스 - [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44821</link><pubDate>Wed, 30 Sep 2026 00: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4482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216272&TPaperId=175448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826/11/coveroff/890121627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216272&TPaperId=1754482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a><br/>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04월<br/></td></tr></table><br/>제목의 뜻을 밝히고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프로이트가 남긴 많은 개념 중에 '가족 로맨스'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이쯤된다고 해둘 수 있겠습니다.<br>'가족은 자신들의 기원을 사실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들을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nbsp;<br>나에게도 가족사에 얽힌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스님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의심쩍은 이야기다. 큰 아버지가 세 번 장가를 들거라는 것이 하나고, 내 아버지가 단명할 거란 것이 둘째다. 마지막으로는 이 집안에 큰 인물이 날 거라는 말이다. 나는 도시화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부모세대에서 이촌향도하여 도시에 적창했다. 내게 시골 산골은 부모의 고향으로서만 기억에 있다. 저 전설도 마찬가지다. 체감할 수 있는 증거물이 아무 것도 내겐 없어 말뿐인 미신이다. 향토에 대한 기억이 없다시피 하지만, 이런 나 또한 가족사를 거슬러 근대사를 접하고 체감한다. 먼 귀경길을 밟아 내려간 땅의 기억이 내게도 남아있다. 나의 외가, 친가 두 할아버지 모두 대한민국의 남한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오사카와 원산에서 태어났고, 어떤 경위를 거쳐 벌교와 해남에 정착했다. 나는 인천 만수에서 태어났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동암의 실공장에서 만났다고 한다. 가리봉동에서부터 인천 동구의 항만 근처까지 영세한 작은 공장들이 수없이 자리잡았었다. 이 경공업 지대에서 근로했던 것이다. 각각 부산과 서울을 거쳐 이곳 인천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이런 토양으로부터 성장하여 사회로 나가야 했다.<br>마쓰사부로 집안의 이야기를 소개하기 앞서 더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 집안의 이야기를 언급한다. 그의 집안은 테베의 왕가이지만, 일찍이 신탁에 의해 버려져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간통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는 이 사실을 깨달고 자신을 두 눈을 찔러 눈이 먼다. 마쓰사부로 집안의 두 형제도 눈이 멀쩡치 않다. 다카시는 엽총탄에 두 눈을 잃고 즉사했다. 오이디푸스보다 과격한 신체파괴를 자행하고 자살했다. 만엔 원년의 풋볼의 이야기는 다카시의 이야기다. 그도 근친상간자였으나, 술에 취해 정신박약의 여동생과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여동생은 이후 자살했다. 그는 오이디푸스처럼 기개에 넘치는 삶을 살아보지 못 하였고, 언제나 수치심에 시달리며 왜소한 삶을 산다.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치부를 괴로워하다 봉기를 일으키고 죽었다. 다카시의 남은 형인 마쓰라부로(이하 소설의 화자 ‘나’)는 한 쪽 눈을 아이들의 돌팔매 놀음에 잃었다. 망막이 손상되서 눈의 형체는 남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마쓰사부로는 자신의 한쪽 눈이 내면을 향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런 심안은 그에게 어떤 위안을 주는 평화로운 내면세계를 관조하지 못한다. 망가진 눈은 망자와 장애인, 퇴형적인 자신과 중독에 빠진 삶에 고정된채 감기지 않는 물고기의 눈처럼 항상 떠있다.<br>두 명의 형과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으나 먼저 죽었다. 고향 시골마을처럼 집안도 쇠락했고, 패전한 일본을 살아내야 할 짐에 마쓰사부로와 다카시도 신음한다. 근대화가 실패한 것이다. 1860년 만엔 원년, 일본이 막 개국과 근대화의 격류로 들어서던 시기에 고향 마을에서는 징세에 저항하는 농민 봉기가 있었다. 중간관리층을 맡은 마쓰사부로의 집안은 증조부와 증조부 동생으로 분열했다. 동생은 농민을 조직하고, 죽창으로 무장시켜 영주에게 맞섰고, 형은 그런 동생을 단칼에 베어 진압했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남았다. 마쓰사부로가 생각하는 진실은 마을사람들이 믿는 그런 무사 이야기 같은 것과는 다르다. 정황을 통해 볼때, 동생은 도망쳤을 것이다. 봉기가 답보 상태에 빠지고 진압군에 쫓긴 상황에서 증조부 동생이 곶간채에서 화승총을 들고 항전하다 죽었다는 전설도 있으나, 이 이야기 또한 신빙성이 낮다. 만엔 원년의 봉기는 이 마을 절에 지옥도란 불화와 마을 축제의 염불춤이라는 행위로, 즉 민속유산으로 남았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만엔 원년으로부터 100년(1860년부터 1960년), 이 100년은 개화가 들이닥치고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지는 긴박한 격량의 시기였다. 역사가 멈출지 모르고 전진했다. 그러나 이 마을은 관으로부터 도망쳐 산골에 정착하였고, 다시 그곳에서 다시 징세에 저항하여 봉기하길 반복해왔을 따름이다(마을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초조카베 모토치카에게 쫓겨 산골로 들어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창립 신화가 전해진다).<br><br>마을 사람들에게 만엔 원년의 봉기는 오래된 전설과 민속으로 남아 있다. 반면 다카시는 그 실패한 봉기에서 인간 해방의 좌절과 가능성을 읽어내고, 현재에 다시 되살리려 한다. 자신들의 인간 해방의 가능성을 선조들의 봉기로부터 찾는 것이다. 분명 시작은 자유, 해방,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자 했던 근대화였다. 그러나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갔던 메이지 유신마저도 비참한 결말로 끝났다. 세계사에서 작은 산골의 봉기의 실패는 머나먼 고립된 사건이고, 비록 이 마을이 내의 고향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만엔 원년의 봉기는 마쓰사부로가 인식하는 세계, 또는 "지금 여기"를 규정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는 원폭을 맞은 나라, 패전한 나라, 나아갈 길을 찾지 못 하는 나라만이 있다. 안보투쟁으로 좌절한 인민이 있다. 항문에 오이를 박고, 얼굴을 붉게 칠한 채 목을 메달고 죽은 친구가 있다.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 친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퇴형적인 인텔리에게 어울리는 결말일지, 정신병자의 마조히스트적인 발악일지. 나는 사태를 감당하기 앞서 사태를 규정할 도리가 없다. 그런 나는 정화조 구덩이에 파묻혀 죽으려 했던 실패이다. 아내도 나도 죽지도 못하고 있다. 새출발을 하지 못한 채 그래도 썩어가듯 살아있다. 나의 첫째 아이는 정신박약아로 태어났고 보호시설에 위탁하였다. "나" 마쓰사부로는 도대체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br>그런데 ‘진실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0826/11/cover150/890121627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8261188</link></image></item><item><author>플러스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만족스러운 삶이었다 - [아침 그리고 저녁]</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44819</link><pubDate>Wed, 30 Sep 2026 00: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4481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57125&TPaperId=1754481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0027/84/coveroff/8954657125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57125&TPaperId=1754481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침 그리고 저녁</a><br/>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07월<br/></td></tr></table><br/>내게 죽음이란 괴롭고 끔찍한 것이다. ‘아니다, 삶이 끔찍하고 괴롭다’ 말해야 맞다. 나는 깨지기 쉬운 삶이 두렵다. 다른 사람 몫의 불행까지 안고 죽은 망자들이 두렵다. 나도 그처럼 죽어야 할까봐 두렵다. 죽음 자체란 형이상학적인 질문일 것이니 두렵지 않다고 해야하겠다. 깨지기 쉬운 몸이 두려워 하는 폭력이 두렵다. 삶이 끔찍하고 괴롭다고 느낀 때가 언제부터였던가? 역사를 알았을 때부터였겠다.<br>지금의 한강 작가의 소설에 이르기 전에도 들었다. 어떻게 사람을 가두고, 추방하고, 죽였는지. 어떻게 미치고, 자해하고, 희생됐는지. 내가 관심 갖는 인간의 죽음이란, 자연적인 죽음이었던 적이 없었다. 사실 내가 관심 갖는 것은 삶 뿐이고 그 삶이 해방된 것인가, 어디까지 자유로운가, 어쩌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러던 나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죽었다.<br>초소에서 근무를 하던 겨울이었다. 영하의 날씨로 발이 얼어 감각이 없다. 근무가 끝나고 다시 걸을 때면 무릎 바로 아래 정강이로 걷는 듯한 착각이 든다.<br>‘왜 이렇게 근무하는 데 추울까?’<br>‘지구의 공전궤도가 바껴서입니다, 이 상병 님’<br>‘분단국가라서 징병된 것 때문일 수도 있어.’<br>‘아, 그럴 수도 있겠지 말입니다.’<br>어디까지가 자연의 일이고 어디부터는 사람의 일일까? 나는 철저히 현실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덜하다. 죽음마저도 순전한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이지 못 하는 나의 태도 때문이다. 내가 듣고, 내가 보고, 내가 마주할 죽음이 살인이나 자살이 아닐까 두려워 떤다.<br>당장 아침이 올지 저녁이 올지 모르고 인간 세상이 두려워 떠는 삶이 우리에게서 끝날 것이라고 믿고 싶다. &lt;아침 그리고 저녁&gt;(욘 포세)의 세계가 아름답다. 부모는 조용히 저녁을 맞고, 자식은 부지런히 아침을 맞는 세계다. 삶도 죽음이 두렵지 않은 세계다. “마르타가 산고를 치르고 무사한가. 산파 안나가 괜찮다고, 분명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얼른 다음 장에서 마르타와 갓 태어난 아이가 모두 건강하다고 읽고 싶다.” 내가 욘 포세의 글을 읽으면서 바랐던 전부였다. 그는 건너뛰어 요하네스가 잘 살았고 죽었다는 걸 전해줬다. 만족스럽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0027/84/cover150/8954657125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00278468</link></image></item><item><author>플러스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기억은 강물보다 얕다 - [연매장]</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44816</link><pubDate>Wed, 30 Sep 2026 00: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4481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22038527&TPaperId=1754481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54/72/coveroff/k32203852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22038527&TPaperId=1754481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연매장</a><br/>팡팡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04월<br/></td></tr></table><br/><br><br>팡팡(方方, 본명 汪芳)의 장편소설 『軟埋』(Soft Burial)은 2016년 8월 출간되었다. 팡팡은 1955년 난징 출생이고, 2010년 루쉰 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에는 2020년 『우한일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 연매장은 현대사 소설이다. 토지개혁은 1950~1952년 전국적으로 본격화되었다. 소설은 특히나 토지 불평등이 컸던 중국 남방을 배경으로 땅과 강, 재산과 집, 원한과 죽음에 얽힌 인간의 “기억과 망각”을 담고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작가가 그리는 현대는 망각을 선택한 사람들의 인생사라는 점을 밝혀둔다. 연매장은 2017년 루야오문학상 수상 이후 토지개혁 묘사를 둘러싼 논란이 일었고, 그해 5월 인민문학출판사가 인쇄를 중단하고 책을 서점에서 철수시켰다.<br>인간은 거대한 강줄기를 따라 정착했다. 농경이 시작된 다음부터 역사에서 자연의 강물은 그 중요성이 사라진 적이 없다. 칭린 가계도를 답사하기에 앞서 쓰촨과 후베이성 일대의 지리를 답사해 본다. 쓰촨·충칭 일대 공간이다. 장강 상류에서 삼협으로 이어지는 지역으로 중국 4대 분지 가운데 하나인 쓰촨 분지가 자리 잡고 있다. 장강은 청장고원의 탕구라산맥 일대에서 발원한다. 장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며 쓰촨 분지를 지나 충칭에 이르고, 삼협을 통과한 뒤 후베이성 이창을 지나 중하류로 향한다. 쌴샤 댐은 이 동쪽 끝에 놓여 있다. 현대 중국의 위용을 드러내는 국가사업의 결과물이다. 사업은 1994년 착공하여 길이 2.3km, 높이 181m에 이르는 댐을 지었다. 막은 물은 장강을 따라 600km가 넘는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었다. 평균 저수량은 393억㎥에 달한다. 이 과정에서 약 130만 명이 이주했다. 딩쯔타오의 본가 체런루도 이 수몰 지역에 속해있다(류 씨 가문의 싼즈탕은 수몰지역이 아니었음을 혼돈을 피하기 위해 밝혀둔다).<br>인간은 역사에서 인간을 중심에 두고 기억하고자 하지만, 언제나 인간의 역사는 표층에 머물러 왔다. 땅 위에서 인간은 강물보다 얕다. 강물은 산천을 바꾸고 강산을 이루지만, 인간은 우화 속에서나 우공이산을 해냈을 뿐 당장 오늘을 먹고 살기에 급급했다. 줄곧 자연에 순응해서 살아왔고, 그 다음엔 계급에 순응했다. 농민 위에 지주가 긴 시간 군림했다. 그 사이 여러 왕조가 일어서고 무너졌으나 지주는 굳건했다. 마침내 1950년 공산당의 토지개혁이 몰려왔다. 그 결과 류 씨 가문은 싼즈탕에서 집단자살하고 연매장했다. 자연보다 인간의 의지가 역사를 바꾼다는 전망이 컸던 혁명의 시대였다. 마을 농민들은 류 씨 가문의 재산을 재분배했고, 그들의 성 씨까지 가져갔다. 유학 중이던 두 아들은 수십 년 뒤에 찾아왔고, 혈족이 아닌 류 씨들에게 인사를 했다. 싼즈탕에 연매장된 묘들을 이장하지 않고 두기로 하였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화를 입을 것을 염려해 손을 놓았고, 후손들은 연매장을 그대로 두었다. 멸문을 받아들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토지개혁은 중국 공산당의 근간이 되는 사업이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이미 완공된 쌴샤 댐을 무너뜨릴 수 없는 것과 같다.<br>싼즈탕은 류 씨 가문이 쌓은 재산의 정점이었다. 어떻게 이런 깊은 산중에 대저택이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 거대한 총안과 포대를 갖춘 망루가 서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아름다운 월문과 정원을 동시에 갖췄던가? 그들 류 씨 가문은 오래전 양귀비를 재배해서 야편을 만들어 팔아 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여느 지주들처럼 축재하길 멈추지 못했고, 여느 지주들처럼 농민과 비적떼에 대한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다. 외부와의 단절을 선택했다. 누구든 막아낼 수 있는 높은 벽과 견고한 포대를 갖췄다. 집은 농민과 지주 사이는 이만큼 멀었다. 밖에서 어떤 환란이 펼쳐지든 안에서 버틸 수 있도록 우물을 파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집안도 진뎬에 의해 무너졌다. 어리석게도 연민을 품고 원수의 자손을 들였던 것이다. 진뎬은 류 씨 가문으로 인해 몰락한 지주의 자손 출생이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어서 지주들을 벌했다. 류씨 가문의 딸 후이위안을 원했으나 결코 갖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이윈(딩쯔타오)는 경고했다. “너와 우리 가문은 원수지간이다. 결코 통혼할 수 없다. 가난만이 문제가 아니다.” 진뎬은 용서하지 않았다.<br>모두를 연매장하고 다이윈은 비밀통로를 통해 탈출한다. 작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도피했다. 배는 난파되고 아들 딩쯔를 잃었다. 다이윈은 급류에 떠내려 발견됐다. 강은 다이윈에게 새 삶을 주었다. 대신 다이윈은 기억을 잃었다. 함께 공포를 얻었다. 우자이밍을 만나서 아들 칭린을 낳았다. 우자이밍은 자신을 구해준 의사였다. 그가 먼저 떠나고 나서야 자신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걸 느끼고 딩쯔타오는 평온을 얻는다. 평생을 남의 집 갖어부로 살았으나 그것이 제일 좋았다. 아들이 장성하고 어머니를 위해 저택을 샀다. 아버지의 유훈을 따라 칭린은 효자가 되고자 했다. 저택에 딩쯔타오를 모신 첫 날 어머니를 혼수상태에 빠져 2년을 보내고 사망한다. 소설은 두 축을 다룬다. 딩쯔타오가 다이윈이던 시절의 기억을 열여덞개의 지옥으로 형상하여 그녀가 잃어버린 기억을 혼수상태 속에서 다시 겪고 있음을 표현한다. 다른 한 축으로는 칭린이 답사와 우연한 만남을 통해 어머니와 아버지의 과거 정체에 다가가는 과정을 전달한다. 칭린의 선택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것, 아버지의 유훈을 따르는 것이다. 과거에 다가는 과정에서 노인이 된 혁명 영웅 류진위안 가족과 칭린의 가족의 깊은 인연이 회복된다.<br>류정치위원은 과거 비적 소탕을 함께 했던 동지들을 위한 증언에 나선다. 죽을 날이 얼마 노병들은 혁명 공로를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달려나갔다. 류정치위원은 칭린의 회사 사장 류샤오촨의 아버지이고, 사장의 부탁으로 칭린은 급히 후수이당 답사를 멈추고 여정에 동행한다. 답사와 여정 모두 토지개혁 시기의 혼돈과 연관되어 있고, 그 시대에 남은 흔적들이었다는 점이 칭린의 시야에 정리된다. 결정적으로 우자이밍이 남긴 유고 노트를 읽고나서 칭린은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투쟁대회를 통해 몰락한 지주 계급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어머니의 친족을 찾아 만나게 해준다면 어머니가 깨어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기대로 칭린은 어머니의 과거를 찾아 떠난다. 류샤오촨은 자신이 칭린의 어머님 딩쯔타오의 손에 자랐으며, 두 집안의 인연이 깊다는 사실을 알고 칭린을 지원한다. 그렇게 칭린은 산쯔탕에 도달했고, 더는 조사를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작가가 표현하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류정치위원은 마지막으로 귀향할 때 완저우에서 유람선을 타고 강물을 따라 돌아간다. 이때 어렴풋이 칭린과의 인연을 느끼지만,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사망한다. 사람의 집은 자연과 어우러져야 한다. 사람은 인생은 강물처럼 사는 것이 좋다. 칭린이 느끼는 소회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54/72/cover150/k32203852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2547243</link></image></item><item><author>플러스펜</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니˝ - [이처럼 사소한 것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44811</link><pubDate>Wed, 30 Sep 2026 00:3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7716124/1754481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72936042&TPaperId=1754481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938/68/coveroff/k47293604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72936042&TPaperId=1754481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처럼 사소한 것들</a><br/>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br/></td></tr></table><br/>크리스마스 이브다. 이때 교회에서 구유에 작은 아이 예수를 꾸미고 미사를 드린다. 펄룽은 아이를 낳은 한 소녀를 구출한다. 그 소녀는 펄룽의 엄마 이름과 같은 '사라'라는 이름을 갖고 있고, 14주 된 아이를 빼앗겼다. 수녀원의 차가운 창고에 감금되어 있었다. 펄룽은 며칠 전 소녀를 데려오지 않고 수녀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소녀는 숨바꼭질 장난 때문에 창고에 숨어들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펄룽은 배로강에 빠져 죽어버리고 싶다는 소녀의 말을 들었다. 수녀원장은 크리스마스 보너스 봉투를 챙겨 펄룽을 돌려보낸다. 이 소설은 구조에 복종하지 않은 작은 사람의 이야기다.<br>처음 소녀를 목격했을 때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경고했다. 미시즈 윌슨처럼 부유한 사람이나 남을 도울 수 있는 거라고. 세상에는 사고를 치는 여자들이 있다고.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펄룽이 세탁소 소녀를 목격했다는 소문은 작은 마을에 금세 돌았다. 야적장 근처에서 식당을 하는 미시즈 케호는 조언했다. "그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해." "이 근방에서 잘 풀린 여자애 중에 그 학교 안 다닌 애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야." 펄룽은 야적장에서 외국인들과 일한다. 석탄, 토탄, 무연탄, 분탄, 장작의 무게만큼 돈을 벌었다. 크리스마스에 다섯 딸이 원하는 선물을 챙겨 줄 수 있는 것도 이 덕분이다.<br>펄룽은 어째서 얼어붙은 맹꽁이자물쇠처럼 가만히 있지 못했을까? 일요일만 되면 반추가 계속된다. 정신없이 일을 할 때는 괜찮지만 "[나는] 왜 다른 남자들처럼 미사 마치고 맥주 한두 잔 마시면서 쉬고 즐기고 저녁 배부르게 먹고 불가에서 신문을 보다가 잠들 수 없는 걸까?" 어린 시절 그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빠 또는 농장을 담은 지그소 퍼즐을 받고 싶었다. 미시즈 윌슨은 『크리스마스 캐럴』 책을 주었다. 몹시 서운해서 울었다. 엄마 사라는 미혼모지만 박대받지 않고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나를 낳고 키울 수 있었다. 펄룽은 가난한 태생이지만 부유한 집에서 자랐고 빌이라는 개신교 이름을 얻었다. 어린 시절부터 물었다. 학교에서 펄룽은 아빠가 없는 아이라는 이유로 비웃음과 놀림을 당했다.<br>내 아버지가 누굴까? 네드가 아프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니까 인사하고자 네드를 들렀다. "닮았어요. 네드가 삼촌이에요?" 미시즈 윌슨 집에 새로 일하는 여자가 펄룽에게 물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네드가 아버지일 수도 있겠다고 알아차렸다. 농장 일꾼으로 살았지만 네드는 만족하고 살았다. "일요일이 되면 미시즈 윌슨은 (…) 네드가 운전하는 포드 자동차를 타고 교회에 갔고, 네드는 엄마와 아이를 태우고 조금 더 가서 성당으로 갔다." 만약 네드가 아버지라면 아버지는 엄마와 나를 버리고 떠난 게 아니었다. 항상 곁에 있었다. 왜 그렇다면 말하지 않았을까? 사라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지 않았을까? 아마도 사정이 있었을 거다.<br>몇 년 전 미시즈 윌슨에게 아버지에 대해 묻기 위해 방문했지만 없었고 부엌에서 담배를 피던 네드를 만났었다. 네드의 방으로 따라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펄룽의 아빠가 누굴지에 대해서 묻고, 엄마에게 어떤 남자가 있었을지 물어보았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이날 네드가 노래했던 〈까까머리 소년〉을 기억한다. 뒷머리가 쭈뼛 섰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펄룽은 생각도 못 했다. 네드가 자신의 아버지일 수 있다는 걸. 그토록 닮아 보이는데 어째서 몰랐을까? 네드가 함께 지내면서 아버지라는 걸 안 밝혔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엄마도 왜 얘기를 안 했던 걸지도. 이제는 미시즈 윌슨과 어머니는 죽었기에 물어볼 수 없고, 네드는 아마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처연한 노래만 기억에 남는다.<br>펄룽은 그날 네드를 못 만나고 돌아왔지만, 평생을 궁금해하던 답을 찾은 것 같다. 자신은 버려진 아이가 아니었다. 숨길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을 거다. 미시즈 윌슨의 친절에도 이야기가 있었을 거다. 농장 일꾼과 하녀가 자신의 집에서 아이를 낳고 살도록 해줬다. 그 덕분에 펄룽은 잘 자랐고, 결혼을 해서 아내와 딸아이를 다섯 두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수녀원에서 소녀를 구출해 왔다. 자신이 받은 친절을 되돌려주고, 누군가 자신의 어머니를 구출했듯이 펄룽이 사라라는 소녀를 구출해 나온다. 소녀를 구조했기 때문에 "평생 지고 살아야 했던 일은 지나갔고" 두려웠으나 "순진한 마음으로 어떻게든 해나가리라고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br>펄룽은 소녀 사라를 구출하면서 어머니와 자신을 구출했고, 자신의 평생의 짐을 내려둘 수 있었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버려진 아이라는 수치심.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혼돈이 정리됐다. 네드에게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 네드를 받아준 미시즈 윌슨에게도 이야기가 있을 거다. 그 이야기를 알 수 없어도 괜찮고 꼭 알아야 하지도 않다. 수녀원에 맞섰기에 딸들의 미래가 저당 잡힐 수 있어 두렵지만 이 소녀를 돌보기를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최대한 용기를 내서 맞서기로 했다. '나는 건장한 체격을 지녔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사내가 아닌가?' 불량품이 아니다. 부모에 더해 미시즈 윌슨의 사랑까지 받고 자라났다.<br>네드의 정체에 대해서 가설을 세워서 추론해 볼 수 있다. 왜 아버지란 정체를 숨겼는지, 미시즈 윌슨은 뻔히 알 수 있었을 텐데 이 아이를 왜 보호했을지. 네드가 〈까까머리 소년〉을 부른다는 점에 착안해 볼 때, 그는 1920년대 아일랜드 내란과 혼돈기를 겪고 은둔한 인물로 보인다. 미시즈 윌슨에게 네드가 단지 농장 일꾼이었다면, 자신의 집에서 하녀 소녀 사라와 통정해서 아이를 낳는 걸 용인할 이유가 적다. 미시즈 윌슨은 일요일이면 네드가 자신의 포드 자동차로 매번 사라와 펄룽을 태우고 미사에도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네드는 방탕자라서 혼외자를 만들고 나 몰라라 하는 남자가 아니었고, 네드와 사라 사이에 혼전 실수로 아이가 생긴 거라도 해도 미시즈 윌슨은 도움을 줄 만큼 친절해 보인다. 게다가 펄룽처럼 네드도 “건장한 사내”였다. 수녀원장의 압박 아래서도 펄룽은 두렵지만 용기를 갖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아직 옛날이던 이때는 남자가 힘들지만 열심히 일한다면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네드는 대체 무엇이 두려워서 자신이 펄룽의 아버지고, 사라의 남편이라고 밝히지 못했을까?<br>나의 가설은 이렇다: 네드는 아일랜드 저항 운동가였을 수 있다. 그렇기에 영웅적인 행적을 갖고 숨어 지내는 걸지 모른다. 하지만 이 가설은 그가 왜 개신교 집안인 미시즈 윌슨의 집에 의탁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는 다른 추측이 가능하다. 네드는 아일랜드 저항운동가들에게 어떤 연유로 인해 “밀고자”로 낙인찍힌 사람이다. 도주해서 새 삶을 사는 중인 인물이다. 1920년대 아일랜드 독립운동은 분열되어 내전 양상을 띠었다. 혼돈의 시기가 왔고, 지주들과 개신교도들에 대한 테러의 위험이 고조됐다. 네드도 아마 그때는 평범한 사내였을 테다. 그도 가톨릭교도고 아일랜드 저항전선과 약한 연결관계가 있었던 평범한 사람일 테다. 그도 여느 청년처럼 민족정서를 갖고 있고 독립을 원했고 오랜 세월 박해받았던 기억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부르는 노래 〈까까머리 소년〉이 전해온 오래된 아일랜드인의 반란 기억과도 겹쳐진다. 그렇지만 네드는 들불처럼 번지는 방화와 테러 앞에서 대의보다 양심을 선택을 했을 테다. 개신교 지주 또는 부역자로 낙인찍힌 아일랜드인들을 도왔다. 도주를 도운 것일지도, 더 적극적으로 구출한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영웅적 행적이 있었는지가 아니다. 네드가 선택한 것이 큰 대의가 아닌 작은 사람이라는 점이고, 이 때문에 가톨릭교도고 아일랜드인이며 지극히 정상인 건장한 사내였던 그는 숨어든다. 부유한 개신교인 미시즈 윌슨의 농장에 의탁해 산다. 아내와 정당한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자식의 곁에 머물 수 있음에 만족한다. 결혼은 교구 문서를 필요로 하고 자신의 행적이 밝혀질 수 있다.<br>소설은 이런 큰 이야기를 재구성할 근거는 제공하지 않았다. 나의 가설일 뿐이다. 그러나 클레어 키건이 남겨둔 펄룽과 딱 붙은 이야기 밖 공간의 바람이 유혹한다. 배로 강이 흐르는 이 땅의 구슬픈 노래, 양심의 고뇌를 느꼈을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싶어진다. 그들은 글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아름다운 작은 단어들만이 남았다. 이 어휘들이 가끔 고개를 내밀고 말을 건넨다. Adeste Fideles 같은 라틴어도, 『크리스마스 캐럴』을 적은 디킨스의 영어도 아닌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 입에 붙은 말이 있다. 펄룽이 소녀에게 건네는 말에서도 이 말이 고개를 내민다.<br>"Is there anything I can do for you, a leanbh?"애야,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니?]]></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938/68/cover150/k47293604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9386807</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