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퍼온글] 우리시대의 명저 50

연초부터 각 매체마다 책읽기에 유난한 관심들을 보이고 있다. 경향신문의 '사회적 독서' 운동에 이어서 한국일보에서는 '우리시대의 명저 50' 시리즈를 연재한다고 한다. '명저'라고는 돼 있지만 목록을 보면, 당대의 베스트셀러들도 많이 망라돼 있다. '명저'라는 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책이란 뜻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한 듯싶다. 아무튼 이 50권에 대한 해제가 다 게재되면 올 한해도 다 가는 게 아닌가 싶다(하냥 섭섭할까?). 50권의 면면들을 구경해볼까라는 '무모한' 욕심도 품어봄 직하지만, 이미 펌글에 도서(상품) 이미지를 집어넣지 말도록 재차 당부를 받은 터라 자제하기로 한다(이러한 펌글도 가급적 자제할 예정이다). 맨숭맨숭하긴 하지만, 목록만을 한번 일람해보는 것으로 '책구경'을 대신해야겠다(시간이 남아서 좋긴 하군).  

한국일보(07. 01. 04) 우리시대의 명저 50

우리 저술의 숲은 건강하고 우람했다. 지성의 숲을 거니는 일은, 굳이 한 그루 한 그루의 결을 더듬고 껴안아보지 않고서도, 황홀하고 뿌듯했다. 책의 전문가들이 전해온 목록의 갈피에서 밀려오던 희열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또 저자와 책이 갖는 이름의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기획팀은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 고통마저도 행복했다.

추천ㆍ자문단과 기획팀은 선행 연구로 불모의 땅을 일군 선구적 저서와 학문적으로 고전의 무게를 지닌 책, 지식 대중화를 선도한 책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또 특정 저서의 가치 못지않게 해당 저자가 우리 지성사에 미친 영향을 높이 산 경우도 있다. 시대적 담론과 이슈의 중심에 섰던 문제적 저작들도 놓치지 않으려고 고심했다.

식민지 사관과 실증 사학을 넘어 지배집단의 교체라는 독자적 사관으로 한국사를 정립한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고난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의미로 나아가고자 했던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서양 신학과 전통 종교사상을 대비하며 우리 문화의 보편적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한 유동식의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재야 학자로서 학문적 엄밀성과 함께 역사의 빈틈을 성실히 메워준 이이화의 <한국사이야기>, 서양고대철학 연구의 수원지로 여전히 마를 기미 없이 푸르게 출렁이는 박홍규의 <희랍철학논고>, 우리 역사에서 ‘자생적 근대화론’ ‘자본주의 맹아론’의 학술적 근거를 실증해 그 문제 의식을 지금까지 이어온 김용섭의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 해당 분야에서 아직도 이들의 업적을 넘어서는 저작이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김두종, 전상운, 김용준, 유민영 등의 노작들이 그렇게 선정됐다.

암울한 군사독재의 억압을 뚫고 비판적 저널리즘의 시각에서 지성의 균형점을 잡아준 리영희, 1980년대의 질곡에 <민중신학>이라는 독보적인 신학적 응답을 제시했던 안병무, <전태일 평전>으로 1970년대와 80년대 변혁운동의 맥을 이어준 조영래, 마당극이라는 전통 연희의 현대적ㆍ변혁적 연구와 실천으로 당대 문화의 큰 정신을 구축했던 채희완, 억압의 시절을 몸으로 살았고 몸의 고백으로 시대를 움직인 서준식 정수일 홍세화의 저작들도 놓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저로 꼽혔다.

경제학이 강단을 벗어나 어떻게 현실과 만날 수 있는지를 가슴으로 보여준 정운영의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고도의 과학 전문 연구분야를 대중적 글쓰기로 선도한 최재천의 <개미 제국의 발견>, 20세기 신화 열풍을 주도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동양미술의 오주석, 서양미술의 이주헌, 한시의 정민, 미학의 진중권 등은 인문학 대중화의 전범으로 꼽혔다. 또 우리 글과 우리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아프게 일깨운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 우리 문학의 오랜 딜레마였던 ‘근대’의 숙제를 성실히 풀고자 한 김윤식 김현의 <한국문학사> 등도 목록에 들었다.

기획팀의 어두운 눈과 선택의 편의로 막판에 누락된 소중한 책들도 수두룩하다. 이들 책에 대한 응당한 예우는 눈 밝은 독자들의 몫으로 넘기고자 한다. 우리는 저자들이 먼저 닦은 저 편한 길을 최대한 힘들여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고자 한다. 인문학을 사랑하는 지성의 독자들과 함께.

● 추천 위원 기고: 무엇이 책을 숨쉬게 하는가

광복 이후 '나라 세우기'와 상응하는 '학문의 토대 쌓기'는 광복 직후의 혼란상과 한국전쟁의 상흔 탓에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김두종의 <한국의학사>, 김원룡의 <한국미술사>, 전상운의 <한국과학기술사> 등이 대표적이다. 수용자, 즉 독자 측면에서 보면 60년대는 전집 출판의 전성기였다. 외판원에게 구입한 문학이나 사상 전집을 거실에 꽂아두는 허영심이 팽배했으나, 그 허영심이란 바꿔 말하면 일종의 지적 허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의 60년대는 배만 고팠던 게 아니다.

특기할 만 한 것은 1970, 71년에 나온 김용섭의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다. 이 책은 우리 역사에서 내발적(內發的) 근대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고 김현, 김윤식의 <한국문학사>도 김용섭의 연구 성과에 크게 자극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70년대는 근대화의 기치 아래 개발 독재와 정치적 억압으로 점철된 시대였고, 출판과 책도 그러한 시대 상황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사회과학의 시대로도 불리는 1980년대에는 좌파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많은 지식인들이 정당성 없는 권력의 폭압적 전횡에 맞서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한완상의 <민중사회학>, 이진경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등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되찾은 우리 글과 말로 토대를 쌓고 틀을 짓는 시기, 어떤 의미에서는 각 분야에서 개척자적 노력이 요구되었던 시기가 1950, 60년대라면 1970, 80년대는 학문과 출판과 책이 시대와 현실의 요청에 충실히 응답하려 했던 시기다. 무너뜨려야 할 우상도, 싸워야 할 대상도, 이뤄야 할 목표도 분명했던 시대, 그래서 일종의 전선(戰線) 시대라 칭해도 좋을 그런 시대였지만 1990년대가 되면서 전선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잃은 것은 전선이었고 얻은 것은 다양성이었다. 우리 출판과 책의 지형도는 매우 다채로워진 것은 물론 훨씬 더 독자 지향적으로 바뀌었다. 개성 넘치는 문장 스타일, 입말에 가까운 글쓰기, 엄숙한 강의가 아니라 정겨운 수다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저자들이 부각됐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미학 오디세이>의 진중권이 그러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윤기가 그러했다.

최근 들어와 많은 이들이 책을 걱정한다. 그들이 보기에 독자들은 더 이상 책의 존엄을 경외하지 않는다. 어떤 주제의 얼개와 뜻을 깊이 파고드는 책은 좀처럼 환영 받지 못한다. 책의 위기, 책의 죽음까지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출판과 책의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언제나 책은 위기였다. 다만 위기 속에서도 시대의 중추를 정확히 건드리며 한 획을 그은 소수의, 아니 극소수의 책들이 있었기에 책의 역사는 단절되지 않았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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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기술속사상] #3 기술 발전 거역할 자유도 허하라

[기술속사상] 기술 발전 거역할 자유도 허하라!/손화철
‘기술비관론자’ 자크 엘륄의 진단 “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
기술은 인간 통제 벗어나 자유 억압하면서 ‘효율성의 법칙’ 따라 발전
더 빠른 컴퓨터, 더 얇은 휴대폰 기술이 필요 창출…그의 대안은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하라

 

기술 속 사상/③ 기술 시스템과 자율적 기술 - 쟈크 엘륄

인간복제나 생각하는 로봇의 생산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가?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면서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바램과 무관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약간 다른 문제다. 실제로 대학 수업 시간에 물어보면 학생들 중 2/3 이상은 인간복제같이 찬반이 분분한 기술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은 개발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대한 긍정인데, 그 가운데 묘한 체념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술발전과 그에 따른 변화들은 ‘시대의 흐름’이고 거기에 잘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지하철 곳곳에 붙은 소프트웨어 광고가 심상치 않다. “당신도 OOOOO만큼 진화하셨습니까?”

기술발전이란 시대의 흐름 앞에 수동적이 되는 것은 과학자, 공학자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기술발전을 직접 이끌어가는 전문가들에게도 기술발전의 완급이나 방향을 조절한 권한은 없다. 자기의 전문 영역 외에는 잘 모를 뿐 아니라 자기가 개발하는 기술이 장차 어떻게 쓰일지도 모른다. 설사 안다 하더라도 살벌한 시장 경쟁의 한복판에서 어떤 기술을 개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기술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 혹은 ‘인간은 기술의 주인’이라는 말이 좀 허탈하게 들린다. 인간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사용하는 것이 맞긴 한데, 발전시키지 않을 자유도 사용하지 않을 자유도 없다면 인간은 기술의 주인인가, 하인인가?

프랑스 보르도 출신의 학자 쟈크 엘룰(Jacques Ellul, 1912-1992)은 이러한 현대사회의 상황을 “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뒤틀려진 기독교>,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등 1990년대 젊은 기독교인들이 많은 읽었던 책들의 저자로만 알려졌으나, 엘룰은 과격한 현대기술 비판론자로 더 유명하다. 1964년 미국에서 <기술사회>(The Technological Society)가 출판된 이래 엘룰은 ‘기술비관론자’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은 1954년에 나온 프랑스어판 <기술 혹은 우리 세기의 도박(내기)>(Technique ou l'enjeu du siecle)을 번역한 것으로, 프랑스에서는 별로 빛을 못 보았지만 영문판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팔리고 있다. 제목의 번역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기술사회(technological society)’라는 말이 현대를 표현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이게 되었고, 이후 출판된 <기술 시스템>(The Technological System)과 <기술담론의 허세>(The Technological Bluff)도 프랑스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많이 읽혔다고 한다.

엘룰은 현대기술은 과거의 기술과 전혀 다른 특징들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우선 전통 기술은 상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의 다른 활동들 (예를 들어 종교적 활동)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되었는데, 현대에는 기술의 발전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또 기술의 제작에 있어서는 자동화를 통해 인간의 개입을 배제하면서, 사용에 있어서는 사용하지 않을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엄청난 발전의 속도와 지역의 문화와 상관없이 전지구적으로 사용가능한 보편성, 그리고 여러 기술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루는 것도 현대기술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 시스템은 자연을 대상으로 했던 전통적인 기술의 영역을 넘어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으로 침투해 간다. 엘룰은 정부의 조직이나 회사의 마케팅과 광고, 그리고 대도시의 놀이시설 같은 것들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인간기술’이라 부른다.

이러한 현대기술에 대한 분석은 철저히 관찰에 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철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관심은 추상적인 본질에 있지 않고 현실의 정확한 파악에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는 기술사회의 현실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물론 전통적 기술의 발전도 한 개인이나 집단이 완전히 통제한 적은 없다. 그러나 과거 기술의 발달은 매우 느렸고 공간적 제약이 많아서 사람들은 그 변화에 억지로 자신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현대 기술사회의 문제는 컴퓨터와 핸드폰과 은행카드를 사용해야만 하고, 때가 되면 바꿔야만 하고, 바꾸면서 나의 삶이 더욱 나아진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술이 ‘자율적’이라는 표현은 자동차가 운전자 없이 혼자 돌아다닌다거나 기계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기술발전이 기술 시스템의 관성에 의해 지속되고, 그 과정에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기술사회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기술 시스템은 인간들에 의해 조정되기보다는 ‘효율성의 법칙’에 따라 운영되고 발전한다. 인간의 가치나 필요는 효율성의 논리 앞에 무력하다. 더 빠른 컴퓨터와 더 얇은 핸드폰이 꼭 필요해서 구입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에 의해 기술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필요를 창출한다. 누가 지하철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그렇게 간절히 소망했던가?

물론 기술 개발에 소비자의 의견이 반영되기도 하고, 특정 기술의 윤리적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두 기술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는 현 상황에서 그와 같은 개별 사례들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나아가, 앞서 본 것과 같이 기술발전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위성 뿐 아니라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까지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술사회 전반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술발전을 모두 포기하고 산업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말인가? 기술이 자율적이라면, 인간의 자율성은 어떻게 되는가? 엘룰은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보았다. 말년에는 “이제 기술사회에 사는 인간에게는,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자유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술사회의 문제를 극복할 현실적인 대안도 없고, 그 구성원은 이미 자유롭지도 못하다고 하니, 그를 따라다니는 ‘기술비관론’의 꼬리표는 거의 정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엘룰 자신은 비관론자를 자처하지도 않았고, 비관론자의 삶을 살지도 않았다. 그가 남긴 50여 권의 저서와 1000여 편의 논문은 자기의 시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열정의 산물이다. 그 외에도 엘룰은 90 평생을 시골 목사, 레지스탕스, 보르도 대학 교수, 사회학자, 정치학자, 평신도 신학자, 보르도 시장, 청소년 운동가, 환경운동가 등으로 활약하며 그야말로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 갔다.

기술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우울한 시각과 그의 적극적인 삶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삶을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하라 (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말로 정리했다고 한다. 학자로서 현대 기술사회 전체를 폭넓게 조망하고 분석한 결과 비관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 결론 때문에 자기가 속한 삶의 터전에서 해야 할 일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평생을 보낸 고향 보르도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운동가의 삶을 살면서 작은 일에 보람을 느끼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기술사회가 확 변할 것이라는 환상을 경계하면서도, 자신의 작은 노력들을 통해 기술사회가 위협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개인적으로나마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엘룰의 사상과 행적을 그가 믿었던 기독교와 연관시키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자신은 기술사회에 대항하는 개인적 노력이 신앙과 상관없이 행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엘룰의 저서를 읽고 평생을 자기 마을 공동체를 위해 봉사한 사람도 있다.

“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후에 일본 소니(SONY)의 세계 경영 전략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같은 제품을 팔더라도 각 지역의 문화와 전통, 구매자의 요구사항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대기술을 비판한 대표적 학자가 좌우명으로 삼은 말이 첨단 전자기술 회사의 모토로 둔갑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엘룰이 경고하는 기술 시스템의 무서운 힘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19433.html

* 자크 엘룰은 나에게 {뒤틀려진 기독교}라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 내 방 책 꽃이 어딘가에 꽂혀져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유명한 학자라는 사실은 이제서야 알게되었다. 뭐 이것도 큰 행운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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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기술 속 사상 #2 : 하이데거의 기술철학

 

기술 속 사상/②

[기술속사상] 현대기술아 제발 ‘닦달’하지 마/손화철
하이데거 ‘도구 이상의 그 무엇’ 첫 사유 “현대기술의 본질은 닦달(강요)” 주장
자연에게는 자원 내놓으라고 인간에게는 부품이 되라고 채근
씨를 다그치지 않는 농부처럼 겸손하게 ‘존재의 드러냄’ 기다려야
하이데거의 기술철학

돌도끼로부터 휴대전화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손에서 기술이 떠났던 적은 없다. 하지만 수천 년 철학사에서 기술이 철학적 탐구의 주제가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묻지 않아도 될 법한 당연한 일들에 대해서도 “~란 무엇인가” 혹은 “왜 ~한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철학자들이 기술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기술은 인간이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라고 하면, 더 이상 물을 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용의 주체인 인간이나 사용의 목적에 대해서는 몰라도, 사용되는 기술에 대한 철학이란 무의미해 보이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 (1889-1976)가 기술의 문제를 자기 철학의 한 축으로 삼은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그는 20세기 서양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철학사에 큰 영향을 미친 대사상가다. 1927년에 출간된 <존재와 시간> 이후의 철학자들은 하이데거의 사상을 알든 모르든 그의 그림자를 피해갈 수는 없다. 이렇게 중요한 철학자가 여태껏 외면당하던 기술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니 철학의 무대에서 기술도 마침내 한 번 뜬 셈이다.

물론 그가 아무 계기도 없이 기술을 주제로 삼은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산업혁명 이후 현대기술의 급격한 발달을 온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다. 그가 태어나기 7년 전인 1882년에 에디슨은 뉴욕시에서 최초의 전등을 켰고, 1886년에는 최초의 자동차가 제작되었으며,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와 무성영화는 그가 태어난 뒤에 각각 발명되었다. 이들 분야에서의 눈부신 발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외에도 핵폭탄, 컴퓨터, 텔레비젼 등 우리 시대를 바꾼 수많은 기술들이 그가 살았던 시절을 장식했다.

산업혁명기 체험이 ‘탐구’ 계기

기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시각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다. 하이데거 이전에도 여러 사상가들이 현대기술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우려를 표명했지만, 정밀한 이론적 철학에 근거해서 현대기술이 비인간화를 초래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기술에 대한 논구>라는 비교적 짧은 글에서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의 본질이 “닦달”(Ge-stell)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 말의 의미는 현대기술이 존재하는 것들의 특성과 다양한 측면들을 무시하고 그들 각각의 의미를 기술적 맥락에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기술은 자연에게 에너지와 원자재를 내 놓으라고 강요(닦달)한다. 현대 기술 앞에서 모든 존재자는 필요하면 언제라도 갖다 쓸 수 있고 대체 가능한 “부품”이 되어 버린다. 강물은 수력 댐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하는 자원일 뿐이고 울창한 숲은 신문을 만들 종이의 재료일 뿐이다.

옛날의 기술은 그렇지 않았다. 농사를 지을 때 농부들은 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씨가 절로 나서 자라는 것을 잘 돌보는 것이다. 강 위에 다리를 놓는 것은 강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리는 강을 건너기 위해 만들지만 그것은 강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하고, 전에는 익명의 존재였던 강 건너 마을을 이웃으로 드러나게도 한다. 기술은 인간이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맞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하이데거는 기술을 인간의 도구로 보는 인간적, 도구적 정의가 맞기는 하지만 기술의 본질을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한다. 기술은 예술과 더불어 숨겨진 진리가 드러나는 통로, 혹은 존재가 자기 자신을 내 보이는 한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던 기술이 현대에 와서 닦달의 성격을 가지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현대기술과 하이데거 존재철학의 연결점을 보게 된다. 하이데거의 핵심 사상은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이다. 그는 플라톤 이래로 서양 형이상학이 언제나 존재자, 즉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었지 동사적 의미에서의 존재, 즉 있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고 비판한다. 플라톤 이래로 서양 형이상학은 신, 인간, 자연을 인간 인식의 대상이 되는 “있는 것”들로만 파악하였다. 그러면서 동사적 “있음”에 대한 관심, 즉 그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점점 약해졌다. 플라톤이 모든 사물의 이데아, 곧 불변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이나, 중세의 신학자들이 신의 본성을 물으려 했던 것은 “있음”보다는 “있는 것”에 치중한 대표적인 예이다.

파시즘·나치즘, 인간을 도구화

이러한 태도는 근대에 와서 훨씬 더 심화되었다. 근대의 사상가들은 존재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질서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진리가 있음을 부인하고, 이성적인 인간 주체를 절대화했다. 존재자들의 진리를 인간이 밝혀내고, 그 상호연관성과 전체적인 질서까지 인간이 부여한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렇게 존재의 드러냄을 망각한 것의 최종 결과가 바로 현대기술이다. 현대기술의 태도는 씨가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을 돌보는 농부보다는 농약을 뿌리고 온도를 포함한 모든 조건을 임의로 조절해서 생산량을 억지로 높이는 식품생산 시스템에 비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기술의 “닦달”이다.

문제는, 이 닦달의 대상이 자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술사회에서는 사람들 역시 부품으로, 에너지의 출처로 전락하고 만다. 기계 부속처럼 인간도 잔뜩 쌓아놓고 필요하면 가져다 사용하고 시간이 지나면 버린다. 근대 이후의 인간은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하지만, 그 지배의 대가는 자기 자신의 철저한 대상화다. 그 결과 현대의 인간은 눈부신 성취 가운데 공허하고 지배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 속에 권태롭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다른 존재자를 대상화했는데, 결국 주체는 없어지고 지배하려는 의지만 남았다. 존재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은 존재를 망각함으로써 그 특별함을 잃고 말았다.

기술사회의 끊임없는 닦달과 팽창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닦달이, 존재가 기술시대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에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부품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스탈린주의나 파시즘, 그리고 그가 잠시 몸담았던 나치즘과 현대 시장 자본주의에서 현대기술의 닦달을 본다. 이들은 끊임없는 발전과 지배의 추구 속에 인간이 인간을 비인격적 도구로 취급하게 된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도덕률은 하이데거의 눈에는 별로 유용하지 않다. 존재의 드러냄을 망각하고 인간의 주체성만을 강조한 결과가 현대기술이라면, 도덕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다시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필요한 태도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씨가 자라 열매를 맺는 과정을 돌보는 농부처럼 겸손하게 그 드러냄에 참여하는 것이다.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처럼 존재자들이 스스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태도, 존재자들을 드러나게 하는 빛과도 같은 존재를 사유하려는 노력을 통해 인간은 그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예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깊은 애착은 이러한 생각에 기반한다. 예술을 통해 예술가를 초월하는 진리의 장이 열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상반된 평가에도 ‘기술철학’ 핵심

» 손화철/성균관대학교 강사·기술철학
하이데거의 기술철학에 대한 평가와 반응은 극과 극을 달린다. 현대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정통으로 지적한 사상이라고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기술에 대한 아무 실증적 근거도 없이 비관주의, 회의주의에다 신비주의까지 엮었다는 혹독한 평가도 있다. 존재의 드러냄을 기다리고 가꾸라는 말의 의미가 명확하지도 않거니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로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을 환경윤리적으로 해석하여 모든 존재자의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여러 상반된 해석들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이데거를 통하여 철학에서 기술의 문제가 문제라는 사실을, 그리고 기술이 단순히 인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그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하이데거처럼 현대기술의 중요성을 즉각 인지하고 정면으로 씨름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그를 기술철학의 핵심 사상가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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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기술 속 사상 #1

기술속사상] 기술이 언제나 사람에게 지고 만다고?/홍성욱
기술, 인간 돕는 ‘도구’에서 종속시키는 ‘기계’로
세상을 변형시킬 ‘인간 의지’ 각인되지만
때론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발전
꼼짝없이 예속 당한다
때문에 ‘기술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다

» 산업혁명 당시에 공장 시스템을 분석한 앤드류 유어는 공장이 노동자들의 생활수준과 교육수준을 향상시키며, 기계가 비싼 숙련노동을 값싼 비숙련노동으로 대체함으로써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주장했다. 그의 기술철학에서 기술발전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이 완전히 배제된 채로 가동되는 공장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기술 속 사상/① 기술이란 무엇인가

그 동안 연재해온 ‘의학속 사상’이 지난 3월31일치 24회로 끝나고, 이번 호부터는 새 연재 ‘기술속 사상’을 시작합니다. 30여회 나갈 ‘기술속 사상’은 이 분야 전문가 10분의 글을 매주 한차례씩 싣게 됩니다. 앞서 의학속 사상에 참여해주신 강신익, 신동원, 여인석, 황상익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문자기능을 없애주세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시 긴 연애편지를 쓰도록.”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무선통신회사의 광고 카피다. 광고는 “기술은 언제나 사람에게 지고 맙니다.”라는 가슴 찡한 메시지를 남기며 끝난다.

이 광고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것의 진실성에 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편지지에 꾹꾹 눌러 쓰는 연애편지를 쓰지 않게 되었다. 우리들 대부분이 중독이라고 할 만큼 핸드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기술이 사람에게 진다는 광고 카피가 감동을 준다. 통신 서비스로 이익을 남기는 회사가 스스로의 서비스를 구매하지 말아 달라는 역설은 기술에 휴머니즘의 외피를 입힘으로써 이에 대한 작은 거부마저도 무력하게 만든다.

기술이란 대체 무엇인가? 핸드폰과 같은 형체가 있는 대상이나 통신 회사가 제공하는 무형의 서비스도 기술이다. 이러한 대상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이 기초가 되는 공학 지식도 기술의 일부이다. 핸드폰이 상징하는 우리가 사는 세상도 넓은 의미의 기술로 포함되며, 핸드폰을 통해서 사람들의 관계를 바꾸려는 의지도 기술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술에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의지가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술은 대상, 과정, 지식, 상징, 의지라는 다섯 가지 층위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한다.

이 중 ‘의지로서의 기술’은 조금 낯선 개념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기술을 “인간이 자연세계와 관계를 맺는 특정한 방식” 혹은 “세상을 드러내는 양식”으로 정의했다. 기술의 본질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게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인데, 하이데거는 기술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계산가능성, 유용성, 효율성의 잣대로 평가해서 결국은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자원(리소스)으로 만드는 ‘의지’라고 간주한다. 존재들을 인간에게 유용한 자산으로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데, 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과학이다.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보면 기술이 과학을 낳았으며, 따라서 기술은 과학보다 선행한다.

기술, 사회적 권력관계 바꿔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서 꼭 하이데거의 입장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20세기 기술은 연관 과학의 발전을 기반으로 해서만 발전하는 것이 많다. 그렇지만 지금의 기술이 상당 정도 과학화되었다고 해도 기술에는 아직도 과학과 다른 점이 있다. 기술은 물질적 생산에 관련되어 있으며, 인위적으로 무엇을 만들고, 이를 통해서 인간의 가능성과 목적하는 바를 확장한다. 기술은 자원에 기초해서 자원을 확장하고, 과학의 응용만이 아닌 시행착오에서 복잡한 실험에 이르는 나름대로의 지식을 활용한다. 기술 디자인과 선택에는 경제, 정치, 문화적 고려가 개입하고, 이러한 경제, 정치, 문화적 요소는 기술에 의해 다시 형성되면서 변화한다.

우리가 기술을 만들지만, 기술은 우리 경험과 인간관계 및 사회적 권력관계를 바꿈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만든다. 어떤 기술은 인간 사회를 더 민주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지만, 다른 기술은 독재자의 권능을 강화한다. 라디오와 같은 동일한 기술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어떤 환경에서 사용하는 가에 따라서 이렇게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민주적으로 사용하고 싶어도 그렇게 사용할 수 없는 기술도 있다. 핵무기를 평화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낙타를 바늘구멍에 넣는 것 보다 힘들다. 내가 시계태엽을 감아야 시계가 작동하듯이 인간은 어떤 기술에 대해서는 이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시계로 상징되는 시간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 듯이, 어떤 기술에게는 꼼짝달싹 못하게 예속되어 버린다. 모든 기술이 예측불능인 것은 아니지만, 일부 기술의 궤적은 그것을 발명한 사람도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발전한다.

19세기 독일의 기술철학자 에른스트 캅은 모든 기술이 인간 몸의 연장(延長)이라고 주장했다. 갈고리, 그릇, 칼, 창, 노, 삽, 괭이와 같은 기술이 인간의 손, 이빨, 팔이 연장된 것이며, 철도는 인간 순환계의 연장이고, 전신과 같은 통신기술은 인간의 신경계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유명한 미디어학자 마샬 맥루헌도 텔레비전과 같은 미디어나 컴퓨터가 인간의 대뇌와 신경계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1964)에는 ‘인간의 연장’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 19세기 독일의 사상가 에른스트 캅은 전신 케이블과 같은 기술이 인간 신경계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기술과 인체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모든 기술을 인간 몸의 연장으로 볼 수는 없다. 기술 중에는 해시계나 철조망처럼 자연을 모방하거나 자연을 체화한 기술도 있다. 그러나 캅이나 맥루헌의 기술관은 전근대적인 기술과 근대 기술의 차이를 무시한다는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전근대적 기술은 화살처럼 인간의 육체를 대체하고, 망치처럼 인간을 강화시키거나, 바퀴처럼 인간을 편하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근대기술은 자연적인 물질을 인공적인 물질로 대체하거나(제련기술), 자연적인 힘을 기술의 힘으로 대체하는 것(증기기관)이다. 간단히 말해서 근대 기술은 인간 몸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자연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근대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도와주는 ‘도구’였다면, 근대 기술은 인간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기계’의 외양을 지닌다.

기술은 개별 기술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되어 ‘기술 시스템’(technological system)을 이루기도 한다. 19세기 이후 철도와 전신, 전력의 보급 이래 기술은 점차 통합된 시스템을 이루면서 확산되었다. 여기서 보듯이 기술 시스템 속에서는 기술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의 경계가 희석된다. 기술과 사회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기술의 진보가 사회의 진보로 자동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 거대한 기술 시스템은 이미 그것에 투여된 수많은 사회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 발전 방향을 바꾸지 않으려는 관성을 가지게 된다.

기술의 진보-사회의 진보 혼동

개별 기술처럼 보이는 것이 시스템의 일부인 경우도 많다. 우리가 매일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개별 기술이 아니라 자동차 시스템의 한 구성물이다. 자동차 시스템은 자동차의 디자인 및 연구, 핵심 부품 및 기타 사양 생산, 조립, 도로 건설, 도시·토목 공학, 국토개발에 관한 장단기 계획, 도시구조, 주택구조, 주유·정유체계, 신호체계, 주차 등 수많은 제도와 인적 자본이 얽혀있는 시스템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현대 산업사회의 직장 중 20%가 자동차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자동차가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지금까지 대체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이유도 자동차 시스템이 가진 엄청난 관성 때문이다.

기술 시스템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에게 거역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듯 보인다. 자크 엘룰이나 루이스 멈포드와 같은 초기 기술철학자들은 이러한 거대 기술 시스템의 특성을 인지하고 이를 각각 ‘테크닉’(technique)이란 개념과 ‘독재적 기술’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미국의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는 이를 ‘자율적 기술’(autonomous technology)이라고 불렀다. 최근에는 기술 시스템의 불확실성과 위험이 강조되고 있다. 기술 시스템이 복잡해지면서 그것이 세분화되고 쪼개져서 그 각각이 전문가들에 의해 다루어지는데, 이러한 전문화와 파편화는 종종 전체를 볼 수 없는데서 기인한 큰 사고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경우 책임이 실종되는 결과가 종종 생긴다.

» 홍성욱/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과학기술학
기술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기존의 가능성 중 일부를 소멸시킨다. 따라서 이렇게 도입된 기술은 우리를 둘러싼 ‘기술 환경’을 바꾸고, 결과적으로 사회 세력들과 조직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바뀐다. 새로운 기술 때문에 더 힘을 가지게 된 그룹과 힘을 잃게 된 그룹이 생기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구조의 변화가 수반된다. 이렇게 변화된 사회구조는 다시 새로운 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 하는 조건을 만든다. 기술 중에는 우리가 잘 이해하고 통제하는 기술도 있지만, 대규모 기술 시스템은 한 두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 이럴 경우에 기술은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고, 자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술이 언제나 사람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믿다가는 기술의 지배와 통제를 벗어나기 힘들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술에 대한 철학과 사상이, 그것도 비판적이면서 균형 잡힌 철학과 사상이 필요한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BOOK/1156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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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기술 속 사상 #5: 기술(비인간)도 인간과 같이 행동한다

[기술속사상] 기술(비인간)도 인간과 같이 행동한다/홍성욱
총(비인간)과 사람이 만났을 때
» 요르단강 서안 헤브론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이스라엘군 병사 앞으로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지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총이 사람을 죽이는가 아니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가를 놓고 논쟁하곤 했다. 라투르는 총과 사람을 따로따로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총을 쥔 사람’이라는 잡종적 존재가 사람과 총 모두의 목적을 바꾸면서 새로운 행위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갈파했다. 헤브론/ 로이터 연합
[관련기사]

쏘는 행위는 총도 사람도 아닌
총과 사람의 합체인 새 ‘행위자’가 하는 것
사회결정론·기술결정론 모두 비판
인간과 기술, 주체-객체 아닌 대칭관계로

기술 속 사상/⑤ 급진주의자-브뤼노 라투르

기술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인간은 의지를 가진 살아 있는 주체이고 기술은 자체 생명력이 없는 기계덩어리다. 인간은 자신의 뜻에 따라서 기술을 바꾸고 목적을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가 간파했듯이 어떤 기술은 인간을 옭죄고 지배한다. 미국의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는 이렇게 자체 생명력을 가진 기술을 ‘자율적 기술’이라고 명명했다.

프랑스의 과학기술학(STS)자인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는 기술이 사회적 필요에 따라서 마음대로 바뀔 수 있다고 보는 시각과 기술이 자율성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한다는 시각을 모두 비판한다. 전자는 기술이 사회적 필요에 따라서 전적으로 구성된다는 사회구성주의적 시각이고 후자는 기술이 거꾸로 인간의 필요와 행동을 결정한다는 기술결정론적인 시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라투르의 비판은 이 두 입장의 중간을 취하는 식이 아니다. 그는 기술을 이해하는 훨씬 더 급진적 시각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기술과 같은 비인간(nonhuman)을 인간과 같은 행위자(actor)로 보는 것이다.

과속방지턱 고통경찰 대체

라투르가 좋아하는 예는 우리가 아파트 단지나 학교 앞에서 자주 보는 과속방지용 둔턱이다. 마음이 급한 운전자들은 “이웃이나 학생들을 위해서 과속을 하지 맙시다”라는 도덕적인 문구가 씌어진 표지판을 무시하고 속도를 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골목골목마다 교통경찰을 배치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발명된 것이 과속방지용 둔턱인데, 운전자들은 둔턱 앞에서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인다. 그런데 운전자가 이렇게 속도를 줄이는 이유는 그가 이웃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속도를 내서 둔턱을 넘었다가는 자기 차의 서스펜션에 무리가 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즉 둔턱은 “이웃이나 학생들을 위해서 과속을 하면 안된다”라는 (사람들이 잘 지키지 않는) 도덕적 심성을 “과속을 하면 내 차의 서스펜션이 고장날 수도 있다”라는 (사람들이 잘 지키는) 이기적 태도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둔턱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라투어는 둔턱을 “잠자는 경찰”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둔턱은 교통경찰이 했던 역할을 대신한다. 그 결과 교통경찰은 다른 일을 하거나 다른 곳에 투입될 수 있다. 또 둔턱은 훌륭한 도덕선생님의 역할도 수행한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과속을 하는 운전자들과 주민 사이의 갈등과 싸움을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이렇게 기술은 인간이 했던 역할을 대신 수행하고 이를 통해 인간의 역할을 바꿈으로써 우리 사회의 훌륭한 행위자가 되는 것이다.

라투르는 총기의 예도 즐겨 사용한다. 미국에서 총기의 사용을 엄격하게 규제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총이 사람을 죽인다”라고 외친다. 총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을 살인 사건이 총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총기 사용의 규제에 반대하는 그룹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총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강조하는데, 이들의 얘기는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총은 중립적인 도구이고 용도에 따라서 좋은 목적으로도 혹은 나쁜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는 총이 아니라 사람에 있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전자를 기술결정론, 후자를 사회결정론으로 분류하면서 이 두 가지 입장을 모두 비판한다. 그의 해법은 사람이 총을 가짐으로써 사람도 바뀌고 총도 바뀐다는 것이다. 총을 가진 사람은 총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달라지고, 마찬가지로 총도 사람의 손에 쥐어짐으로써 옷장 속에 있는 총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즉 총과 사람의 합체라는 잡종이 새로운 행위자로 등장하며, 이 잡종 행위자는 이전에 사람이 가졌던 목표와는 다른 목표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원래는 다른 사람에게 겁만 주려 했는데, 총이 손에 쥐어져 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식이다.

‘비인간’의 번식 깨닫는 게 근대

라투르는 서양의 학문이 자연, 사회, 인간만을 다루어왔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한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사회과학은 (자연의 일부로서의) 사회를 다루고, 철학과 같은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했는데, 라투르에 따르면 여기에는 모두 기술과 같은 ‘비인간’이 빠져 있다. 과학은 자연을 탐구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든 기기와 실험실에 의존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기술인데, 사회과학자들은 기술에는 관심이 거의 없다. 철학자들은 주체/객체의 이분법에 빠져서, 기술을 저급하고 수동적인 대상으로만 취급한다.

기술과 같은 비인간이 빠져버린 자연과 사회는 ‘근대성’의 골자이다. 결국 라투르에게 기술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행위자로서의 이들의 능동적인 역할을 드러내는 것은 서구의 ‘근대적’ 과학과 철학이 범했던 자연/사회, 주체/객체, 인간/비인간의 양분법을 극복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라투르에게 근대를 극복하는 방법은, 탈근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시작되던 시점부터 자연과 사회 모두에 기술과 같은 비인간이 엄청난 속도로 번식했음을 인식하는 것, 즉 “우리가 근대인 적이 없었다”(We have never been modern!)는 것을 깨닫는 것부터 시작한다.

과학/기술의 이분법도 라투르의 비판의 화살이 꽂히는 과녁이다. 라투르는 과학과 기술을 대체하는 용어로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기술이 과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과학과 엔지니어링의 접점이 확산되는 것을 생각하면 과학/기술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주체/객체의 구별도 비판한다. 사람은 대상과 관계를 맺고 대상은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에만 진정한 의미의 행위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을 주체, 대상을 객체라고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액터’(actor, 행위자)라는 말 대신에 ‘액탄트’(actant)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이분법 외려 강화했다 비판도

프랑스 과학기술학자 라투르는 미국 소크 연구소에서의 인류학적인 관찰 경험을 바탕으로 1979년에 <실험실 생활>이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화려하게 학계에 데뷔했고, 이후 <행동하는 과학> <우리는 근대인 적이 없었다> <아라미스> <판도라의 희망> <자연의 정치학> 등 주목받는 연구업적을 끊임없이 출판했다. 최근에 그는 인간과 사물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 집중한 예술전시 기획을 총괄하기도 했고, 그 결과를 <아이코노클래시>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안타깝게도 라투르의 책은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것이 없다.

라투르의 관심은 실험실의 민속지학에서 파리의 실패한 지하철 프로젝트를 거쳐 아마존의 열대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그렇지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비판하는 그의 입장은 초기 연구에서 가장 최근의 연구까지를 관통하고 있다. 물론 그의 주장에 대한 비판도 많이 제기되었다. 라투르는 기술이 마치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자신을 대변하는 주체처럼 서술하지만, 사실 그런 서술은 라투르라는 인간이 기술에게 부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라투르가 기술에게 부여한 특성은 ‘인간다운’ 특성, 즉 마치 인간처럼 행동하고, 반응하고, 실행하는 특성이라는 것이다. 비판가들은 라투르의 이러한 시도가 인간의 역할을 더 강조함으로써 라투르가 부숴버리려고 했던 주체/객체의 구분을 더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라투르의 기술철학은 아직 미완이다. 그의 업적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인간/비인간의 구별을 없애고 이 둘을 대칭적으로 생각하자는 라투르의 주장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이 인간/기계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사이보그들이 급속도로 번식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잘 보여주는 것은 인간사회가 기술 없이는 구성될 수도 없고 유지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인간관계, 권력관계)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건과, 기술과, 무생물과, 비인간과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우리가 더 민주적이고 더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의 기능과 역할에, 즉 “물건의 정치학”(politics of things)에 훨씬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이점이 라투르의 기술철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핵심 메시지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246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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