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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2006년 마무리 인사 겸 논술 도서 추천하고 갑니다.

짧으면 한두 달...다소 길어지면 내년 8월까지 잠수할 생각입니다.
어쩌면 중간에 이벤트 겸 논문 자료 수집 겸해서 컴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잠수탈 이유가 없기 때문에(사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좀 있습니다.) 언제 변심하여 돌아오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입니다. 떠나기 전에 요새 아이들 책 읽기에 논술이 화두인지라 짧은 시간에 생각을 키우는데 괜찮은 책 3권만 추천하고 가려고 합니다.

엊그제 시사저널 별책부록을 보니 "유레카논술"팀의 논술 별책을 만들었더군요.(별책 치고 내용이 알차보입니다. 없어지기 전에 미리 한 권 사두세요.) 논술이란 것이 참 애매합니다. 평소에는 교과서와 참고서 이외에는 거들떠 보지도 못하게 하더니 갑자기 장자니, 니코마코스윤리학이니 하는 것들을 읽으라고 한다고 읽어질리도 없고, 읽는다고 이해가 쉬울리도 없겠죠.

한 십여년 전쯤에 사촌동생이 대학입학시험을 치르는데 논술 가르쳐 줄 사람이 없다고 해서 너 혼자는 못 가르치니까, 주변의 친구들을 데리고 오면 더부살이로 배울 기회를 주겠노라 해서 1년 정도 고등학교 3학년생 3명과 재수생 1명해서 논술을 지도해준 경험이 있습니다. (교재도 제가 직접 만들어서 가르쳤는데, 지금 읽어보니 우스워요. ^^ 제 논술과외 성적표는 일단 3명 합격에 한 명 불합격이었으니까...)

우리의 논술 시험은 외국의 논술형 시험에 비해서는 쉬운 측면과 어려운 측면 두 가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쉬운 측면은 철학적 주제를 휙 던져놓고 그에 대해 에세이(경수필 말고)를 쓰라는 외국의 시험에 비해 해당 텍스트를 주고 그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묻는다는 점에서 쉽다는 겁니다.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기는 아니니까요.)

어렵다는 건, 일단 해당 텍스트를 먼저 이해하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해당 텍스트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력이 동시에 요구되기 때문이겠죠. 전자에 비해 후자가 까다로운 점은 텍스트가 이미 주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변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까다로운 것은 변별력이라는 것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거죠. 일설에는 논술교사의 첨삭지도를 받은 글들은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정형화되어있기 때문에 오히려 점수가 깍인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일설에는 지나치게 튀는 글은 그만큼 다듬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감점 요인이 된다고도 합니다.
글이라는 것이 누가봐도 잘 썼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드물기도 하지만 그만큼 개성적으로 쓰기도 어렵습니다. 또 개성적으로 썼다고 해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보장도 없으므로 안전한 길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쓰다보니 글이 또 길어지려는 경향이 있네요. (때로 긴 글보다 짧은 글쓰기가 더 어렵습니다.)

아이들이 누가 키워줘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라는 것처럼
글쓰기에 왕도는 없습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 이외에는 말이죠. 그런데 많이 생각하는 것은 많이 생각할 거리를 얻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죠. 사는 것이 고단하고 힘들어서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도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세상의 이면을 들여다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결국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많이 읽는 것이겠죠. 그런데 우리나라같이 문화적 기초 인프라(특히 도서관)가 열악한 사회에서 아무나 많이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시간도 없지요.

그래서 나온 것이 논술 앤솔로지나 다이제스트 출판물들이겠지요. 서울대를 비롯해 나름대로 이름있는 대학출판부들이 제각각 추천도서목록을 발표하고 이와 관련한 책을 펴내는 것도, 입시 때 원서 판매대금으로 재미가 쏠쏠한 것처럼 논술 팔아먹기 경쟁의 일환인 듯 합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은 실제로는 부피감이 너무 적습니다. 부피가 적으면 파 먹을 것도 적은 책들인 거죠.

생각을 키우기 위해선 앤솔로지나 다이제스트라도 어느 정도 부피감이 있는 책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음의 3권을 연이어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일반인들의 경우에도, 특히 인문학, 사회과학 분야의 책들에 대한 길라잡이가 필요한 분들이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한길사에서 자체적으로 기념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펴낸
"역사와 지성", "사람과 사상 - 역사속의 인간과 지성을 탐구한다", "명저의 세계" 모두 3권이 하나의 시리즈물인 책입니다. 이중에서 1권은 현재 품절 상태로 나오는데 교보나 다른 곳(헌책방)을 뒤져보면 혹시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목에 이미 책의 내용이 상당수 나와있지만 차례로 읽어보시고... 그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생각의 폭이 넓어질 수 있을 듯 하군요. (어쩌면 지금 당장 고3 수험생에겐 별 도움이 못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고2에서 고3 올라가는 "결이"가 읽으면 좋겠습니다. 이 3권을 읽는데만도 시간이 꽤 걸릴 테니까. 지금부터 차근차근 읽고, 모르는 말은 밑줄 긋고, 나중에 선생님께 묻고, 멋있는 말은 일기장에 옮겨적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곳 문망에 물어봐도 좋겠지요. 10년 전 책이니까, 이 책들이 논술 시험 열기에 대비한 책, 급조된 책이란 오해도 피할 수 있겠죠?)

그럼....
나중에 컴백하게 되면 인사드리겠습니다.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길... 안녕...

책 제목은
역사와 지성 - 김재용 외 / 한길사 / 1996년 11월
사람과 사상 - 김재용 외 / 한길사 / 1996년 11월
명저의 세계 - 김재용 외 / 한길사 / 1996년 11월

역사와 지성
김재용 외 / 한길사 / 1996년 11월

 

 

 

 

사람과 사상
김재용 외 / 한길사 / 1996년 11월


 

 

 

 

명저의 세계
김재용 외 / 한길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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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Grammar in Use 시리즈

2002년도 쯤에 학원 홈페이지에 올렸던 칼럼 글입니다. 요즘 제가 네이버 지식인 놀이(?)에 열중인데, 문법 공부로 질문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Grammar in Use 책 이야기도 종종 등장하구요. 그래서, 예전 글이지만 여러모로 참고될 것 같아 다시 옮겨 놓습니다. 좀 더 궁금하신 분들은 꼬리글을 달아주시거나, Q&A 게시판에 질문해 주세요. 제 학생분들은 수업중에 궁금하신 점을 올려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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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법, 바로 이 책, "Grammar in Use" Series

 

 Grammar in Use 는 Cambridge의 유명한 영문법 교재입니다. 그냥 유명한 것이 아니라 그 유명세에 걸맞는 알차고 훌륭한 내용을 가진 책이라 저도 첼시에서 강의 교재로 사용하고 있지요.

  지금 시중에 볼 수 있는 Grammar in Use가 아마 다섯종일 겁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분들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헷갈려 하시는 것 같아서 다섯가지의 구분을 중심으로 이 책을 소개할까 합니다.

  그동안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아마 남색 표지에 'English Grammar in Use'라고 타이틀이 적힌 것일 겁니다.


 
 

   그리고, 이 책과 비슷한 디자인인데 색깔만 빨간색으로 'Essential Grammar in Use'라고 된 것도 함께 잘 알려져 있지요.

 

 

   이 두 권이 바로 Grammar in Use 시리즈를 대표하는 소위 original이지요.

  보통 파란색은 intermediate(중급학습자)용, 빨간색은 Elementary(초급학습자)용으로 구분되는데, 단지 level의 구분을 떠나서 각각의 유용함과 특징이 있는 좋은 교재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세가지 Grammar in Use는 무엇일까요?

  전에는 자주빛 커버였다가 이번 2002년 판으로 CD가 딸린 은보라빛 Grammar in Use가 있죠? 이 책은 앞서 말한
파란색 Grammar in Use의 미국영어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Cambridge가 영국계 출판사지요? 영문법이나 영작 쪽으로는 전통적으로 영국쪽이 강세지요. 원래의 Grammar in Use 시리즈는 영국 철자와 영국식 표현이 사용된 영국 영어판입니다. 예문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이름도 잘 살펴보면 영국 version은 영국적인 내음이 물씬 나는 이름들이, 미국 version은 보다 미국적인 이름들이 사용되었습니다. 2002년 은보라색 미국판은 약간의 편집 순서와 구성도 조금 더 바뀌었습니다.

  영국판이 몇년간 별 변화가 없는 반면, 미국판을 이번에 새로이 CD까지 포함하여 발간한 것을 보면 앞으로는 이 책을 주력적으로 마케팅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들더군요. 적어도 한국에서는요. 인터넷 서점들을 봐도 일찌감치 미국판 구판은 깨끗이 사라지고 없더라구요. 저도 그래서 지금 중급 Grammar in Use 수업 시간 중의 교재로 이 2002년 은보라색 미국판을 사용하는데, 예전에 쓰던 파란색 영국판에 익숙해서인지 조금 낯설고 헷갈립니다. 하지만 미국식 철자나 표현에 보다 익숙한 한국 학생들에게는 아마 미국판 쪽이 좀 더 편안할지도 모르겠군요. 영국판의 경우 종종 책 속의 낯선 스펠링이나 표현 때문에 학생들이 질문을 하던 기억이 나거든요.

  영국판 빨간색 Essential Grammar in Use는 미국판에서 은색커버의 Basic Grammar in Use로 나왔습니다. 제가 Basic Grammar in Use 시간에 교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영국판의 Advanced Grammar in Use 입니다. 저자도 Edmond Murphy가 아닌 Hewings로 바뀌었고, 보다 깊이 있고 확장된 문법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고급 학습자나 문법을 심도있게 연구하려는 학생이 아니라면 파란색 혹은 은보라색 Grammar in Use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이 책은 그리 널리 쓰이지는 않지요. 그래서, 보통 Grammar in Use 시리즈라고 하면 전자의 두권(영국판/미국판 모두)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도 대개 그렇게 얘기하구요. 어쨋거나 이 책은 약간 탁한 자주빛 커버로 되어 있습니다. 미국판은 본 적이 없구요.

 

   여하튼 이 Grammar in Use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반드시 level에 의한 구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의 문법이 필요한가에 따라서도 각각의 의미와 효과를 지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난이도면에서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만, 단지 난이도만으로 책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현재 영어 공부에 있어서의 문법 필요성의 의미를 알고 선택할 경우 효과를 배가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Essential 혹은 Basic Grammar in Use는 특히 말하기에 있어 기본적인 문법 실수가 잦은 학생들에게 좋습니다. 기본적인 문법 이해가 적은 학생이라면 상황과 해당되는 문법 사항을 좀 꼼꼼히 다져가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좋고, 문법에 대한 이해는 있는데, 말하기에 있어서 좀처럼 적용이 잘 안되거나 생각이 나지 않는 학생이라면 연습문제를 일일이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보자마자 바로 바로 입으로 답을 말하는 연습을 함으로써 정확성을 기르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2002년판에 포함된 CD는 예문들을 모두 녹음한 것인데, 이렇게 일정 패턴으로 계속 해당 문법이 사용된 예문들을 자꾸 듣고 따라하는 것도 입에 영어 문장의 구조를 배이게 하는 훈련이 됩니다.

  
파란색 혹은 은보라색 Grammar in Use는 이제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되지만, 내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의도나 뉘앙스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분들이나, 무턱대고 그런 줄 알거나 외우기만 하던 문법에 한계를 느끼신 분들에게 영어라는 언어의 감각과 구조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어주는 좋은 책입니다. 제 경우에 한국말이 가지는 이러이러한 느낌과 뉘앙스가 영어 문법적으로는 이렇게 표현된다라던지, 영어에서 이렇게 표현되는 것들이 한국말의 이러이러한 것과 어느정도 일맥상통한다던지, 영어에는 이러한 것이 분화되어 있지만 한국말은 그렇지 않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등등을 다양하게 전달하는 것을 이 교재를 사용하는 문법 강의의 주된 줄기로 삼고 있지요.

  
이 Grammar in Use의 가장 큰 특징은 말로써의 그 느낌과 의도를 충실히 표현하기 위한 문법책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말로서의 느낌이나 감정없이 시험을 위해서만 외워야하는 사항이나 감흥없는 단편적인 지식으로서의 문법이 아닌, 피부로 느끼고 공감하는 문법이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책들은 그냥 문법서가 아닌 말하기, 듣기, 쓰기, 읽기 등 모든 영역에 있어서의 영어로 다가가는 가장 탄탄한 받침대가 될 수 있는 다양하고도 효과있는 종합 학습서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책의 풍부한 예문들은 실제 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공감가는 상황을 기초로 하였기 때문에, 그것만을 추려도 좋은 회화 구문 모음이 되고, 어휘 또한 가장 우선적이고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로 사용되어 그것만으로도 별다른 단어장등을 갖출 필요가 없습니다.

  Essential 혹은 Basic Grammar in Use의 경우에는 정확도를 연습하는 학생이라면 독학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극적인 학습자나 제어가 잘 안되는 초급 학생이라면 좀 더 스피디하게 말하기를 훈련시키는 가이드가 있는 편이 더 낫습니다. 친구와 둘이 서로 교대로 빠르게 문제를 입으로 풀어간다던가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죠.

  Grammar in Use의 경우에, 저는 강사가 가르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무조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책에 나온 문법 사항들을 보다 학생에게 공감되게 전달할 수 있고, 어떻게 그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지를 예시할 수 있으며, 책에 연관된 여러가지 배경이나 지식등을 함께 전달 할 수 있는 경우에 그렇습니다. 가능한 모국어에 가까운 공감대를 외국어에게서 끌어내어 학생의 입 언저리나 머리 가장자리에서 맴돌고 마는 영어가 아닌, 가슴과 머리에서 정말로 표현되어 나오는 언어로서의 영어가 될 수 있게 하는 가이드가 있을 때, 이 교재는 몇배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서적은 또한 한국어와 영어라는 두개 언어 자체에 대한 이해가 고루게 갖춰진 강사가 강의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또한, 더 효과를 배가하자면, 그렇게 학습한 뒤 반드시 실습을 하여 체화시키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외국인을 통해 실제 상황에서의 회화를 통한 적용을 시도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스스로 영작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스스로 이해된 것을 바탕으로 생산해 내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아홉걸음을 걷고 마지막 한걸음을 디디지 않아 목표한 곳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Essential 혹은 Basic Grammar in Use로 집에서 혹은 스터디 그룹등을 통해 지속적인 훈련을 하면서, 학원이나 학교에서의 Grammar in Use 를 통해 보다 깊은 이해를 다지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대개의 학습자들이 실제 말하기에 있어 문법이 많이 불안하기 때문에 (고급학습자도 알면서 끊임없이 틀리는 문제들을 보면 그렇죠) 쉬워보여도 우선 한단계 쉬운 Grammar in Use를 통해 그런 불안 요소부터 제거하는 것도 권하고 싶습니다.
  그런 뒤에 다음 단계의 Grammar in Use를 공부하는 것이, 그렇지 않고 하는 것보다 더 체화되고 공감될 수 있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기본기는 튼튼하게 다지면 다질 수록 나중에 금이 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는 공식은 여기서도 예외가 없지요.

  어떤 단계의 어떤 책을 선택하시더라도 중요한 것은, 머리속에만 넣고 마는 지식이 아니라, 내가 말로 글로 표현하고 써 먹을 수 있는 도구를 습득하는 것이라는 사실임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이미 퀴즈대회용의 vocabulary나 시험용의 문법등은 지겨울대로 접하신 여러분이 아니신가요? 이제는 말하고 쓸 차례입니다.

 

 

  - 첼시앤서울 영어학원 Julien -


출처 : http://cafe.naver.com/BoardRead.do?cluburl=satcafe&clubid=10672964&menuid=15&listtype=M&boardtype=&page=&articleid=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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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르페브르와 일상의 영구혁명

이번주 경향신문의 21세기 책 깊이 읽기는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1901-1991)의 <현대세계의 일상성>(1968)을 다루고 있다. 그 친숙한 '일상성'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도록 한다.

 

 

 

 

경향신문(06. 08. 19) 로봇화된 일상…탈출구를 찾아라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 앞에서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알 듯하다. 하지만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하려 들면 말문이 막히고 만다.” ‘일상’도 마찬가지다. 일상이란 너무 자명해서 굳이 장황한 설명이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일상이 무엇인지 말해보라고 하면 어떨까. 너나 없이 손사래치며 뒤로 물러날 것이다.

-성긴 언어의 올로 일상을 붙잡으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거칠게나마 윤곽마저 그려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일상은 철로 만든 새장 같다. 새장 안은 온갖 자질구레한 물품들로 꽉 차 있다. 옷장, 냉장고, 침대, 주방기구, 장난감 따위의 물품 목록은 끝이 없다. 거기에서 줄거리 없는 인생들이 하품나는 나날을 견디고 있다. 일상은 지루하고 공허하며, 일상의 삶은 초라하고 지리멸렬하다. 권태와 환멸은 일상에 딸린 부록이다.

-일상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상은 내동댕이쳐진 채 부패해왔다. 일상이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보들레르는 현대 도시의 세속적 일상을 생생한 감각으로 묘파해냄으로써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불렸다. 발터 베냐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19세기 파리의 일상을 거대한 몽타주로 재현하려 했다. 비록 미완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현대적 이미지들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했다(*여기에도 베냐민 지파 사람이 또 있군).



-현대의 일상에 대한 가장 방대하고 체계적인 분석과 성찰은 앙리 르페브르의 ‘현대세계의 일상성’을 기다려야 했다. 이 책은 현대의 일상을 치장하고 있는 가면을 벗겨내고, 그 밑에 감춰져 있는 현대 세계의 내면을 폭로한다.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나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는 르페브르의 저작에서 풍부한 영감을 얻었다. 1960년대 유럽 사회가 분석 대상이지만, 르페브르의 문제 의식은 시간의 풍화를 견뎌내며 여전히 유효하다.

-르페브르는 왜 하필이면 일상을 문제 삼았을까. 그가 보기에 일상의 견고성은 혁명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렸다. 더구나 일상을 문제 삼지 않는 태도 자체가 문제였다. 일상을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게 르페브르의 문제 설정이었다. 그는 현대인을 ‘호모 코티디아누스’(Homo Quotidianus, 일상인)로 명명한다. 일상인은 로봇을 닮았다. 특정한 행위만을 반복하도록 프로그램화된 로봇 말이다.



-로봇화된 현대 일상인의 행태를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은 소비의 영역이다. 르페브르는 현대 세계를 ‘소비 조작의 관료 사회’로 이름 붙인다. 현대인들은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상품을 소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바깥의 힘과 의지에 종속된다. 그 ‘바깥’은 자본가나 기술관료, 정치권력이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등이다. 소비 조작 사회에서는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보다 우월하고, 이미지나 기호가 상품의 본질을 집어삼킨다.

-르페브르는 소비사회의 전형적 표본으로 자동차를 꼽는다. 자동차의 쓸모는 이동수단이다. 현대인은 이동 목적으로만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는다. 자동차에는 여러 겹의 이미지와 기호가 포개져 있다. 그것은 신분과 위엄, 안락과 힘, 모험과 속도의 상징이다. 소비자들은 자동차에 덧씌워진 상상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또한 자동차는 도로교통법으로 자신의 법을 일상에 강제한다. 이처럼 자동차는 현대인의 욕망을 비틀고 일상을 정복한다. 상품의 이미지를 조작하는 것은 광고의 마법이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광고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상품의 언어다. 그것은 소비자를 유혹한다. 블루진은 영원한 젊음으로, 고급 주택은 부와 성공으로, 다이아몬드는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첨단 가전제품은 가정의 행복으로 변주되어 일상을 포위한다. 광고 이미지의 후광을 빌리지 않으면 상품은 빛을 잃는다. 오늘날 광고는 이미지의 독재자로 군림하며 지배 이데올로기를 설파한다.



-소비 조작 사회에서 벗어날 탈출구는 과연 있는가. 르페브르는 마르크스의 정신적 후예답게 유토피아주의자다. 그람시의 어법을 빌리면 ‘지성의 비관주의자, 의지의 낙관주의자’다. 르페브르의 기획은 영구 문화혁명이다. 문화혁명의 강령은 간결하다. “일상이 작품이 되게 하라!” 자신의 육체와 욕망, 시간을 타인에게 저당 잡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되찾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소외를 넘어 인간의 총체성을 회복하자는 선언이다(*강령만을 놓고 보자면, 나는 '르페브르주의자'에 속하겠다).

-르페브르의 어떤 명제들은 이미 진부해져버렸다. 상품의 이미지와 기호가 소비세계를 지배한다는 주장은 오늘날 문화분석의 상투어로 통한다. 장 보드리야르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은 르페브르의 통찰을 넘어섰다. 그것은 선구자의 운명이기도 하다. 일상의 냉혹성과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르페브르의 탁월한 안목이었다. 오늘날 일상의 성채는 더욱 견고해지고 아무도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거꾸로 혁명은 일상을 꿈꾸는가?). 그럼에도 인간의 총체성을 향한 열망은 결코 훼손되지 않는 가치로 남아 있다. 우리가 르페브르를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박천홍|도서평론가)

06. 08. 19.

P.S. 르페브르의 주저들이 더 소개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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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세계지성대담] 피에르 부르디외/ 세계화 뒤켠엔 '세계지배'

[세계지성대담] 피에르 부르디외/ 세계화 뒤켠엔 '세계지배'

때 : 2000년 1월26일

곳 : 파리 콜레주 드 프랑스

피에르 부르디외는 1930년생으로 프랑스의 명문 고등사범학교(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현재 파리 사회과학대학원(EHESS)과 프랑스 최고 학술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 교수이며, 유럽사회학연구소를 창설해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부르디외 사회학'의 명성은 “과학의 주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학문의 비밀주의를 깨고 자신의 이론 수립 과정까지도 밝히는 특수한 방법론에서 비롯된 바 크다. 그는 또 10년 전 현실사회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기존의 태도를 공개반성한 이후 다양한 사회운동을 이끌거나 참여하고 있다.

정성배=현재 인류 앞에 제기되고 있는 기본문제는 세계화에 대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먼저 세계화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부르디외=세계화라는 말 자체가 매우 모호하여 지성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말이다. 일종의 통일, 평화적 통합이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각되고 있는 것은, 통합이란 흔히 지배조건이라는 사실이다. 유사한 예는 유럽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2세기의 프랑스나 영국 등 유럽대국의 탄생은 지배의 조건이 충족된 탓이다. 통일을 수행한 사람들이 국가를 창건하고 민족을 통합함으로써 권력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직자·귀족 등이 이들 권력자였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통일이 반드시 조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옛날에 국가 차원에서 일어났던 일이 지금 세계 차원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즉 시장, 특히 금융·문화시장의 통일과 함께 관세장벽 등 모든 장벽의 해체가 진행중이다. 그리고 신통신기술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 통신의 가속화 등이 중요한 현상으로 부각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가 통일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러한 세계통일은 몇몇 경제금융 강대국에 의한 세계지배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의 교파통합인 것 같은 환상 때문에 세계화의 제국주의, 즉 현재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소수금융가 인터내셔널'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대한 강요가 가리워져 버린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점이 있는데 이것이 함께 파악되어야 한다. 첫째, 세계화 이데올로기는 지배욕이 그 통일 속에 은폐되어 있었으며 둘째, 지배는 역설적으로 통일의 조건이라는 것을 다들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철학은 국경해소를 요구하고 국가의 약화, 관세장벽 인하, 자본의 자유유통 및 외국투자 장애물의 전면처리를 주장하고 있다. 세계화의 옹호자들에게는 국가가 방해물이다. 국가는 경제개혁과 국내시장의 발달을 도모하여 자립경제정책을 지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들은 모든 형태의 보호주의를 막으려 하나 단 지배자 미국의 보호주의는 예외다. 미국이 보호주의를 시행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또한 국제통화기금(IMF)의 이데올로기는 채무국들을 규탄하는데 미국이야말로 지구상 최대의 채무국이다. 그렇다면 피지배국을 위한 기준이 따로 있고 지배국을 위한 기준이 따로 있다는 의문이 생긴다. 자유주의철학의 모순은 그것이 한편으로는 일방통행 격이라는 것(피지배국은 자유주의국가로, 지배국은 보호주의국가로)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져온 가시적 결과가 엄청난 경제력 집중이라는 점이다. 자유주의 경제체제란 신고전파이론이 말하는 평등한 경제인간의 순수하고 완전한 경쟁이 아니라 극소수 기업간의 경쟁인 것이다.

정=세계화의 전망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일종의 유일사상이 되어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는가?

부르디외=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은 그들만이 진리의 독점적 보유자인 것처럼 자처한다.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그들의 독점적인 인상은 극도에 달했다. 마치 대안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언자적·종말론적 큰 모델들 때문에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았으므로 그런 것과 조금이라도 흡사한 것을 제안할 의향은 없다. 그러나 현재 국제적 집단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 연구는 아직 암중모색이고, 모순이 많고 어려움도 많다. 연구비 부족도 문제다. 공동연구를 위해서는 국제학술회의도 필요하다. 주지하다시피 자유주의 모델이 유일사상처럼 보이는 이유는 1930년대부터 두뇌집단(싱크탱크), 연구그룹들이 구성되어 부단하고 체계적인 노력을 해온 덕분이다. 미 중앙정보국(CIA)이나 사설기금의 지원이 흔히 있었다. 역사가 케이스 디슨은 데처와 블레어의 신자유주의 사상에 관하여 책을 썼는데 여기에서도 신자유주의 사상을 형성하기 위해서 그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이에 대항하는 쪽은 이들에 비해 물질적 수단이 약하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서 우리 쪽에도 많은 것이 있다. `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실현행동'(아탁·ATTAC), 시애틀 현상…, 그리고 현재 하나의 국제정치의식이 형성중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프랑스의 사회운동가들은 한국의 상황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또 현재 우리 주변에는 노조협회 등으로 구성된 유럽차원의 그룹이 있으며 차차 일종의 인터내셔널이 되고 있다. 오는 9월에는 브뤼셀에서 국제사회운동 총회를 열어 행동원칙과 전략을 채택할 예정이다. 프랑스는 서방선진7개국(G7) 속에 들어가 있는 나라이지만 현재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 대단히 강하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영국의 블레어 수상도 집권 이후 신뢰도가 12% 떨어졌다. 남미에서도 대중이 크게 동원되고 있다. 우리는 아시아의 사회운동 단체와도 연락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잠재적 세력을 국제비판운동 세력으로 본격적으로 조직해야 한다(신자유주의의 힘의 하나는 이를 바로 `사회주의자'들이 적용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보충적 힘이 되며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데 공헌한다).

정=미디어와 문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현재 위협받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부르디외=위험은 포장이 점점 내용물을 지배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책, 영화, 기타 여러 가지 문화산물의 전달을 지배하는 거대기업들이 생산을 지배하는 것이다. 모든 지식인, 연구가, 예술가들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그들의 작품이 밖으로 전달되지 않을 때 과연 얼마 동안이나 견디어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현대 한국 영화가 국제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파리에 외국영화 수용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적인 이유 때문이다. 파리는 문화적 국제주의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 국제주의 기능은 점점 위협을 받고 있다. 파리는 끝났다, 파리는 죽었다 하는 소리가 무성하다. 만약 파리가 정말로 죽는다면 한국, 터키, 인도영화의 수용시설도 없어져 버린다. 또 국제작가로서 보편성 있는 작품을 쓰는 사람은 그들의 작품을 낼 출판사를 찾을 수 없게될 위험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아방가르드 문화의 기초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정=국가의 미래는 무엇이며, 세계화에 저항함에 있어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가?

부르디외=오늘날 스무살이 된 사람이 국제주의자가 아니라면 장차 비싼 값을 치를 것이다. 국제주의자가 되고 모든 비판적 사회운동과 연대한다는 것은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 또 나아가 아주 중요한 것들―문화, 문학, 과학 등―을 생존시키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세이다. 인류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국제세력으로써만 통제 가능한 눈먼 국제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나에게 어째서 몇 년 전부터 그렇게까지 깊이 사회운동에 참여하는가 라고 사람들이 묻는다. 나는 사실은 항상 참여해왔다. 그러나 내가 학자의 전통적인 역할에서 빠져나와 정치 현장에서 나의 입장을 밝히는 이유는, 상황이 중대하고 우리들 연구가들이 일반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이해하고 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주식시장의 위기는 예견하지 못해도 세상의 큰 경향은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일종의 육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경제제일주의라는 이름으로 현재 세계에서 시행되고 있는 정책의 결과를 언젠가는 발견할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들에게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장차 비싼 값을 치를 것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령 국가의 파괴문제를 보자. 나는 국가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국가란 극히 중요한 여러 가지 기능과 과정을 통제할 수 있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희귀한 무기 중의 하나다. 특히 일반이익과 공공서비스 분야에 관해 그러하다. 나는 초국가 또는 세계국가 창립을 전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유토피아다. 그렇지만 토빈세의 실행은 세계국가로 일보전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케인즈는 세계은행 창설을 주창했는데 이것도 세계국가를 향해 가는 길이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유토피아다. 그렇다면 이 세계국가가 탄생할 때까지는 부자의 수입을 빈자를 위해 합리적으로 재분배하는 유일한 수단은 국가이다. 그때까지는 국민의 경제와 문화에의 접근 기회를 평등화할 수 있는 수단은 국가밖에 없다. 그러므로 국가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하튼 한가지 확실한 것은 국가 파괴의 결과는 20년 뒤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20년 뒤에는 도시의 오염 때문에 암환자의 수가 늘어났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나는 의사들이 왜 지금 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최근 들어 오염 탓에 어린이 천식환자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한다). 또 난폭한 경제발전의 사회적 결과문제도 있다. 빈곤과 범죄의 연관성은 밝혀져 있다. 통계학적으로 볼 때에 범죄,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등은 빈곤과 연관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유일한 대책은 형무소이다. 이것은 미국식 해결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미국은 형무소 분야에 있어서도 리더격이다. 전체 인구 중 감옥에 간 사람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그러나 형무소는 폭력을 낳는다. 내가 `폭력보존법칙'이라 부르는 것의 적용케이스다. 즉 유년기에 폭력을 당한 사람이나, 직장 등에서 폭력을 당한 사람은 그 폭력을 다른 이에게 `갚는다'. 불행히도 폭력은 상실되지 않는 것이다. <끝>

출처 : http://www.hani.co.kr/section-007000000/2000/0070000002000020317220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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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을 검색해보니 부르디외가 직접 저술했거나 책 제목에 그의 이름이 들어간 책이 모두 31권이나 된다.
"구별짓기(상하권)",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부르디외사회학입문", "텔레비젼에 대하여", "재생산" 만 가지고 있는데, 그나마도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

좋은 독서방법이 따로 있을리는 없겠지만 무엇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지... 아시는 분은 충고 좀 해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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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인정투쟁'과 민주화 시대: 호네트와 강준만

'인정투쟁'은 흥미로운 주제이다. 이 주제의 원천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개인적으론 지젝 이전에, 읽히지 않는 헤겔을 그래도 읽어보려고 애쓰면서 자료들을 모으고 했던 건 순전히 이 테마에 관해서 뭔가 글을 써보기 위해서였다. '주인과 하녀의 변증법'이란 제목으로(조만간 실현되지는 않겠지만 아직도 유효한 프로젝트이다). 이 주제에 관한 가장 간명한 소개서는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동녘, 1996)이고, 이와 관련한 연구서 서너 권을 나는 갖고 있다.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1949년생이고, 하버마스의 수제자로서 현재는 프랑크푸르트 소재 사회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소위 3세대 프랑크프루트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이다(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방한한 적이 있다). 물론 예전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아니지만. '사회와 철학연구회'의 사회와 철학 시리즈 중 <한국사회와 모더니티>(이학사, 2001)에 그의 대담이 실려 있다. 내용 중 푸코와 하버마스를 종합하고자 하는 자신의 이론적 기획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잠시 옮겨본다.

질문: 당신은 <인정투쟁>에서 인정투쟁 개념이 푸코의 이론적 성과를 의사소통 이론 속에 통합시키는 개념적 장치라고 주장했다. 어떻게 인정투쟁 개념으로 하버마스와 푸코를 통합시킬 수 있는가? 하버마스와 푸코의 이론적 결함은 무엇인가?



 

 

 

답변: 나는 인정투쟁 이념을 통해서 하버마스와 푸코의 이론적 관심을 매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푸코의 관심사는 근본적으로 모든 형태의 공동체, 모든 형태의 사회를 항구적 투쟁의 일시적 휴전상태로 보려는 데 있다. 즉 푸코의 근본이념에 따르면 사회적인 것은 투쟁이며, 기존의 질서는 단기적인, 일시적인 휴전상태일 뿐이다. 그러나 푸코에게는 투쟁의 동기에 대한 납득할 만한 분석이 결여돼 있다. 홉스와 니체의 유산을 이어받은 푸코는 사회에서 투쟁하는 이유를 자기본존을 위해서나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서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인간학적으로나 사회이론적으로 충분하지 않을 뿐더러 아마도 잘못된 생각이다.

 



 

 

나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주장의 타당성을 의사소통적으로 인정받길 원한다는 하버마스의 이념에 헤겔적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보다 분명한 투쟁모델을 만들고자 했다. 인간은 개별자로서든 집단으로서든 자기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한 사회 속에서 투쟁한다. 이 점이 바로 하버마스와 푸코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즉, 인정투쟁 모델은 의사소통이념과 투쟁이념을 결합시킨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모델을 갈등이론과 충분히 결합시키지 못했다. 하버마스는 개인의 사회화 과정이나 상호작용 속에 존재하는 갈등이나 투쟁의 요소가 자주 사라지곤 한다. 하버마스는 부명 의사소통 능력을 과신하고 있다. 우리는 의사소통이 빈번히 인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때문에 요구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푸코의 최대의 결함은 그가 투쟁의 동기를 너무나 홉스적으로 본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사회를 자기보존을 위해 싸우는 개인들의 집합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니까 호네트의 이론적 기획을 요약하면 푸코(투쟁이념)과 하버마스(의사소통이념)를 접속시키는 것이겠다. 덧붙여서, 그의 학문적 '아버지' 하버마스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하버마스에게서 성장한, 이제 어른이 된 제자이다. 그러나 배신자이거나 살부를 감행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성장한, 그러나 자립적 사고를 감행한 그의 아들이다. 이런 점에서 나의 생각은 계승발전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보완은 아니다. 결코 보완이나 단절은 아니다. 나는 하버마스가 기초한 프로젝트를 자립적으로 계속해서 사고한 것뿐이다..."

호네트가 푸코나 하버마스보다 더 멀리 가기를 기대해보지만, 아직 '후속타'에 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아 아쉽다(우리 '통신원들'이 직무를 게을리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주제에 관하여 내가 당장에 보탤 말은 없고, 대신에 작년에 여름 <한겨레21>(05. 08. 11)에 실렸던 '우리시대의 마당발' 강준만 교수의 기고문 "인정투쟁’ 민주화시대의 명암"을 옮겨놓으면서 몇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추려보겠다. 부제로 붙어 있는 건 "왜 간호조무사는 신생아를 학대했을까, 왜 사이버 삐끼들은 횡행하는가. 인정욕구가 매우 강한 한국의 네티즌들, 티티테인먼트로 흐를까 염려된다."였다(인용문에서의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편 그의 책들이 예외없이 올해도 '행진'을 시작했는데, 첫타자로 나선 책은 <대중문화의 겉과 속3>(인물과사상사, 2006)이다. '사람들은 왜 인정투쟁에 빠져드는가"란 꼭지가 들어 있는데, 아마도 이 글과 관련된 것일 성싶다. 나머지 책들은 관련서들과 '인정'을 모티브로 한 처세서들.

 

 

 

 

-인간이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너무나도 깊고 근원적이어서 인류의 역사 발전에 원동력으로 작용해왔다(*그러니까 인정욕구는 생물학적 본성은 아니더라도 이차적 본성쯤은 되는 듯하다). 옛날에는 전쟁터에서 이러한 욕구가 발휘되었지만, 오늘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군사 영역에서 경제 영역으로 옮겨졌다. 우리가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동기는 먹고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경제생활이 물질적 풍요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인정을 얻기 위해서 추구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상호 의존성은 명백해진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체제인바, 오늘날 사실상 모든 선진국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를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인류 사회의 폭넓은 진화라는 마르크스주의적·헤겔주의적 의미의 역사는 이제 끝났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리플’의 본질

-국내 언론이 대서특필해준 덕에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론을 요약해본 것이다. 후쿠야마는 좀 독특한 유형의 본질주의 함정에 한 발을 담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들 밥은 먹고 살잖아?” 사람 사는 걸 ‘밥’이라는 본질로 환원해버리면, 그 밥의 값이 천차만별이라는 건 사소해진다. 극심한 빈부 양극화 체제에서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도 그 세계에선 나름대로 ‘인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겠지만,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데 부유층이 추구하는 ‘인정’과의 엄청난 괴리에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컨대 ‘인정의 빈부격차’가 다시 문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정의 빈부격차’는 아직 심각한 화두로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새로운 대안이 아주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에 의해 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티티테인먼트’(tittytainment)라는 개념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세계화’로 인해 ‘20 대 80’(부유층 20%, 빈곤층 80%)이 이루어진 세상에선 티티테인먼트가 판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entertainment’와 엄마 젖을 뜻하는 속어인 ‘titty’를 합한 말인데,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을거리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좌절한 사람들을 기분 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게임에 몰두하면서 흥분한 나머지 괴성까지 질러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그게 괜한 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요즘 그렇게 말했다간 시대착오적인 인간으로 몰매 맞기 십상이다. 게임은 ‘국민산업’이 아닌가.(*내가 이 글을 치고 있는 PC방 옆자리들에도 초등학생들이 죽 늘어앉아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나 같은 '비정규직 지식노동자'나 백수들 외에 PC방에 죽치고 있는 아이들은 대개 저소득층 자녀들인 듯싶다. 집에서 오락을 할 만한 처지가 못되는 수준일 테니까. 해서 이들의 안쓰러운 유해환경은 '오락'이 아니라 오락실의 '탁한 공기'이다. 한번이라도 동네 PC방에 들러본 부모라면 담배 연기 자욱한 이런 곳에 아이들을 내돌리지 않으리라. 요즘 떠오르는 화두대로, 건강의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을 반복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애를 쓰는 ‘인정투쟁’의 민주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아니 언제는 그런 시대에 살지 않았단 말인가? 이렇게 정색을 하고 전투적으로 묻는다면, 인류 역사 이래로 그랬다고 한발 뒤로 물러서야 하겠지만, 겸손한 자세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을 것이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간호 조무사가 신생아를 학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건으로 경찰서에 출두한 어느 간호 조무사는 “싸이월드에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예쁘게 꾸미고 싶었다. 영아들의 인상을 특색 있게 해 주변 다른 간호 조무사 또는 간호 관련 종사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 이거 아주 중요한 ‘인정투쟁’이다.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연예인 누드 사진을 보고 싶으면 내 홈피로 오세요”라는 글을 올려 작은 소동을 빚었던 주인공도 자신의 홈피 방문자 수를 늘려 인정을 받고 싶어했던 초등학생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리플’의 본질도 인정투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최근의 ‘성기 노출’ 사건도 그랬지만, 무슨 사건만 터졌다 하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삐끼’들이 나타나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놀러 오세요. 보러 오세요. 화끈해요. 죽여준다니까요.” 아니다. 삐끼는 아니다. 삐끼는 돈을 벌기 위해 그런다지만, 우리 시대의 사이버 삐끼는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 조회 수를 올리려는 소박한 마음에서 그러는 것뿐이다.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거짓말로 유혹하는 삐끼들도 있다지만, 행여 화를 내선 안 될 일이다. 조회 수 올리는 걸로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그 소박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몸부림에 감히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인터넷 이전과 이후가 이렇게 달라졌다. 과거 보통 사람들의 인정투쟁은 수단이 미비했다. 인정투쟁의 주요 수단이라 할 미디어는 엘리트의 독무대였다. 학생들의 경우 공부를 빼놓곤 기껏해야 소풍이나 수학여행에서 뭔가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 이렇다 할 수단이 없었다. 운동을 잘하거나 주먹을 쓰거나 연애박사가 되는 길로 빠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돈질도 부유층 자제에 국한되었다.

유희주의에서 공동체주의까지

-인터넷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인터넷이 ‘규범 테크놀로지’로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파급 효과가 인터넷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으며 앞으로 어떻게 더 달라질 것이란 말인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보자면 ① 유희주의 ② 다문화주의 ③ 극단주의 ④ 공동체주의 등 네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첫째, 유희주의다. ‘유희주의’란 말은 없다고 시비를 걸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 유희주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찜쪄 먹을 수준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좋겠다. 인터넷의 본질은 유희다. 사람에 따라 ‘오락’이라고도 하고 ‘엔터테인먼트’라고도 한다.

-‘엔터테인먼트 경제’는 이미 주류로 등극한 지 오래다. 인포테인먼트, 에듀테인먼트, 폴리테인먼트, 도큐테인먼트, 마켓테인먼트, 이터테인먼트, 처치테인먼트, 워크테인먼트, 쇼퍼테인먼트, 볼런테인먼트, 티티테인먼트 등 엔터테인먼트를 물고 들어가는 수많은 합성어들이 양산되는 게 그 위력을 잘 말해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미래연구소 소장 폴 사포는 “디지털 기술은 너무나 흡인력이 강해서 ‘모든 것’을 유희의 도구로 만들어버릴 위험성이 크다. 로마제국의 멸망에서 읽을 수 있듯이, 위대한 문명의 몰락은 모든 것을 유희화한 데서 비롯됐다”고 경고했다.

-그대로 믿을 말은 아니지만, 유희 아닌 것들이 이젠 유희와 더욱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지 않을 수 없다는 건 분명해졌다. 유희는 인정투쟁의 주요 수단으로 등극하면서 전투성을 획득했기에 더욱 그렇다. 예컨대 정치가 무슨 수로 유희와 경쟁할 것인가. 하긴 그래서 정치가 자꾸 유희화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사주간지마저 유희와 타협하지 않고 이렇게 골치 아픈 이야기 하면 문을 닫아야 하는 건가? 생각해볼 점이다.

-둘째, 다문화주의다. 최근 인터넷엔 “님의 노예로 부려주시옵소서” “어린 ‘주인님’을 찾습니다” “내 속옷도 팔아요” 등을 외치는 카페가 많아졌나 보다. 가령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발’이란 단어를 치면 발을 탐닉하는 카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한 포털 사이트에는 이런 카페가 600개 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은 이런 카페를 ‘변태 카페’라고 이름 붙였지만, ‘변태’의 경계 설정은 이제 날이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그간 다문화주의는 소수자의 권익 옹호라는 점에서 좋은 의미로만 여겨져왔다. 인터넷 이전엔 당당하게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소수자들 중심으로 소수자를 이해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소수자’의 폭발을 몰고 왔다. 인터넷 이전엔 뭉치기 어려웠던 소수자들까지 대거 인정투쟁을 위해 독자적인 동아리 또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늘 보수파의 공격 대상이었지만 이젠 일부 진보파도 다문화주의 공격에 합세했다. ‘성향의 소수자’건 ‘취향의 소수자’건 이들의 특성은 자신의 열악한 위치를 타개하기 위해 ‘단일 이슈 정치’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슈 한 가지만을 보고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진보파는 이런 정치 행태가 소수 집단간 ‘연대’를 파괴해 진보 정치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게 바다 건너 다른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점점 한국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사이즈’와 ‘주목’의 문제

-셋째, 극단주의다. 인터넷은 대중의 전폭적인 참여와 그들의 인정투쟁 욕구로 인해 전반적으로 보아 반지성주의로 흐르게 돼 있다. 지성주의는 좋고 반지성주의는 나쁘다는 게 아니다. <한겨레> 문화생활부장 이인우는 “반지성주의·반지식인 정서는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 문화의 특징적 흐름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다고 본다”며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인터넷을 지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렸는데, 이게 중립적인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인쇄술이 지식의 생산과 소유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과 같이 지식과 정보가 급속하게 전파되고 공유되고 가공되는 인터넷 문화가 지식과 정보의 평균화, 지성의 평등화가 가능한 것 같은 착각을 대중들에게 확산시키고 있는 것 같다.”

-화끈한 해결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반지성주의에도 좋은 점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반지성주의와 사이버 폭력이라는 극단주의가 상호 무관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정부는 사이버 폭력을 일소하겠다며 ‘인터넷 실명제’를 들고 나왔는데, 흥미로운 건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네티즌들의 의견이 반대하는 의견보다 최대 4배 가까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야후 조사에서는 찬성 79%, 반대 20%로 나타났으며, 20~30대 이용자가 많은 네이버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5%가 실명제 도입에 찬성한 반면 반대 입장은 32%에 그쳤다. 이게 과연 무얼 의미하는지 심층 분석해볼 필요가 있겠다.

-넷째, 공동체주의다. 지금은 무분별한 사용으로 오염된 단어가 되었지만 초기의 ‘해커’를 떠올리면 되겠다. 해커는 원래 ‘인정’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도덕성 수준도 높았다. 남들이 자신의 기술 수준을 인정해주는 기쁨 하나로 돈도 받지 않고 폐인이 될 정도로 자신을 혹사해가며 프로그램 개발에 헌신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사이즈’와 ‘주목’의 문제다. 누군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할 때에 남들이 얼마나 주목해주느냐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생각해본다면 간단히 풀리는 문제다. 내가 무슨 희생을 하건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면 희생하고 싶은 마음도 약해질 것이다. 반면 나의 희생이 영웅적 행위로 널리 알려질 수 있다면 애초 마음먹었던 희생의 정도보다 ‘오버’할 수도 있다. 인터넷은 ‘사이즈’와 ‘주목’의 경계를 깬 열린 공간으로 이타성과 협동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주의의 가능성을 활짝 열었다.

‘인터넷 강국론’은 정말 허구가 아닐까

-이렇듯 인터넷을 주요 무대로 삼은 인정투쟁엔 명암이 있다. 세계 각국의 인터넷을 두루 살펴보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한국 인터넷 문화의 독특한 특성 중 하나는 네티즌들의 인정 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간 한국은 보통 사람들의 인정 욕구 충족에 무심한, 아니 억압적인 사회였다는 점에 주목해보는 게 좋겠다. 대중의 인정 욕구 충족은 다양성을 생명으로 한다. 인정 욕구 충족의 방식이 획일적이라면 도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사람들의 인정 욕구가 충족되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 사회는 인정 욕구 충족에서 일렬 종대로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유별난 문화를 갖고 있다. 돈,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명품, 골프 등 모두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한 가지 잣대만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데에 익숙한 문화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무지막지한 위계가 “한국에선 인간답게 살려면 어찌어찌해야 한다”는 수많은 속설들을 낳았고, 또 이것들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미친 듯이 공부하고 일하게 만든 동력이 된 게 아닌가 싶어, 과거의 민주화 투사들조차 자랑스럽게 뻐겨대는 ‘세계 10대 경제강국론’에 흔쾌히 박수를 치기가 어려워진다.

-인터넷이라는 축복이 인정 욕구 충족의 다른 출구를 열어준 것은 그 어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러운 일로 여겨야 마땅하겠건만, 다문화주의의 일부와 공동체주의를 제외하곤 이것마저도 혹 ‘티티테인먼트’가 아닌가 싶어 주저하게 된다. 인터넷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는 많은 인터넷 기업가·전문가들이 한국 인터넷은 세계에서 가장 유희 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른바 ‘인터넷 강국론’은 허구라고 주장하는 걸 보면, 그런 주저가 시대착오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인정투쟁 민주화의 내실화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끝)

 

 

 

 

전반적으로 시의적절하고 발빠른 진단이다. 더불어 또다른 숙제까지 떠맡게 하는. 내가 임의로 골라본 참고서들이 숙제 해결에 도움을 줄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티티테인먼트와 더불어 자라날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염려하고 공부해야 할 주제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06. 01. 24.

P.S. 이렇듯 자주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도 나대로의 '티티테인먼트'가 아닌가 문득 반성하면서, 이성복의 '서시(序詩)'를 떠올려본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류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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