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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들 이탈로 칼비노 전집 9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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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기억으로 넘쳐흐르는 이러한 파도에 스펀지처럼 흠뻑 젖었다가 팽창합니다. 자이라의 현재를 묘사할 때는 그 속에 과거를 모두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 (<도시와 기억 3>,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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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008)

폭력은 타인을 침묵시키고, 타인의 목소리와 신뢰성을 부정하고, 내게 타인이 존재할 권리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 방법이다. 미국에서는 매일 약 세명의 여자가 배우자나 옛 배우자에게 살해당한다. 미국에서 임신부의 주요한 사망 원인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것이다.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가정폭력, 직장 내 성희롱을 법적 범죄로 규정하려고 애써온 페미니즘의 투쟁에서 핵심 과제는 우선 여성을 신뢰할 만하고 경청할 만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18-19쪽)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중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하나는 무엇이 되었든 문제의 주제에 관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말할 권리, 생각할 권리, 사실과 진실을 안다고 인정받을 권리, 가치를 지닐 권리, 인간이 될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싸우는 전선이다. (24-25쪽)


<가장 긴 전쟁>(2013)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떤 남성이 성적 접근을 거부한 여성을 칼로 찌른 사건)

그 남자는 자신이 고른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녀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살인자는 당신이 죽을지 살지 결정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살인을 통해서 단언하는 셈이다. 이것은 타인을 통제하는 궁극의 수단이다. 설령 당신이 고분고분하게 굴더라도 아무 소용없을지 모르는데, 통제의 욕망은 순종으로는 좀처럼 달래기 힘든 격렬한 분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행위의 이면에 모종의 두려움과 취약함이 깔려 있을지라도, 아무튼 그런 행위는 타인에게 괴로움을, 더 나아가 죽음을 부여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식이 범인도 피해자도 비참하게 만든다. (45-46쪽) 


강간을 비롯한 폭력적 행동들, 극단적으로는 살인에까지 이르며 폭력을 쓰겠다는 위협까지 포함하는 이 모든 행동은 일부 남자들이 일부 여자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펼치는 방어막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폭력이 두려워 스스로를 제약하며, 그러다보면 자신도 익숙해져서 그런 상황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50쪽)


<거미 할머니>(2014)

어머니들이 사라지고, 그 어머니들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이 사라진다. 점점 더 많은 삶들이 세상에 살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면서 숲이 나무로, 그물이 직선으로 다듬어진다. 혈통이나 영향이나 의미의 내러티브를 단선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는 예술사에서도 그런 일을 줄기차게 보았다. 삐까소(Pablo Picasso)가 폴록(Jackson Pollock)을 낳고 폴록이 워홀(Andy Warhol)을 낳는 식으로, 예술가는 반드시 다른 예술가에게서만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듯한 설명이다. (104쪽)


<울프의 어둠>(2009)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이 선언은 예사롭지 않다. 이 선언은 우리가 거짓된 점괘를 믿거나 울적한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내러티브를 미래로 투사함으로써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 선언은 어둠을 칭송하며─'나는 ... 생각한다' 부분이 암시하듯이─스스로의 선언에 대해서조차 기꺼이 불확실함을 인정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둠을 두려워한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캄캄한 것을 두려워하고, 어른들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르는 것, 못 보는 것, 모호한 것이라는 어둠을 겁낸다. 그러나 무언가를 구별하고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물들이 합쳐지고, 변화하고, 매료되고, 흥분하고, 충만해지고, 사로잡히고, 풀려나고, 재생되는 시간이다. (122-123쪽)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 완결된 지식을 가진 척하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실패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담하게 단언하는 언어는 뉘앙스와 모호함과 성찰을 간직한 언어보다 더 간명하고 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후자의 언어에서라면 울프는 달리 비길 상대가 없었다. (125쪽)


<#여자들은다겪는다>(2014)

T. M. 루어먼(Luhrmann)은 지난해(2013) 신문에 실은 멋진 기고문에서, 인도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환청을 들을 때는 머릿속의 목소리가 집 청소를 하라고 말하곤 하는 데 비해 미국 환자들은 폭력적인 행동을 하라는 말을 듣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화는 중요하다. 형사사건의 피고 측 조사관으로 일하기 때문에 정신이상과 폭력에 관해서라면 속속들이 잘 아는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현실과의 접촉을 잃기 시작하면, 병든 뇌는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집착적으로, 망상적으로 매달리기 마련이야. 주변 문화의 질병에." (178-179쪽)


내가 최근에 읽은 글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1964년에 뉴욕 퀸스의 주택가에서 살해된 그 유명한 캐서린 '키티' 제노비스(Catherine Kitty Genovese) 사건을 이야기한 『네이션』 기사였다. 기사를 쓴 피터 베이커(Peter Baker)가 우리에게 환기해준바, 제노비스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광경을 자기 집 창문으로 목격한 이웃들 중 일부는 낯선 남자가 저지른 야만적인 폭행을 남편이 '자기' 여자에게 권리를 행사하는 장면으로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남자가 아내나 연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대체로 사적인 일로 치부되었던 것, 그것이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1964년의 법률적 시각에서 남자가 아내를 강간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따는 것이 분명 중요한 문제였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같은 용어들은 만들어지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188-189쪽)


우리는 폭력과 권력 남용이 성희롱, 협박, 위협, 구타, 강간, 살인 같은 범주들로 서로 깔끔하게 분류되는 것처럼 다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던 것인지 이해하겠다. 나는 그것이 자칫 미끄러지기 쉬운 비탈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우리가 여성 혐오의 다양한 양태들을 구획하여 각각 별도로 다루기보다 그 비탈 전체를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그것이다. 구획화란 큰 그림을 조각냄으로써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 보게 하는 것이다. (197-198쪽)


<판도라의 상자와 자원경찰들>(2014)

혁명은 사실 특정 체제에서 권력을 확보하는 일이 주가 되는 사건이 아니고, 그보다는 파열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과 제도가 탄생하고 그 충격이 퍼지는 사건이었다. 그레이버는 "1917년 러시아혁명은 소련 공산주의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뉴딜 정책과 유럽 복지국가들을 낳았다는 점에서 세계적 혁명이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인즉 러시아혁명이 재앙만을 낳았다는 종래의 가설을 뒤집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대열의 맨 마지막은 1968년 세계혁명이었다. 1848년 혁명과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1968년 혁명은 중국에서 멕시코까지 거의 모든 곳에서 터졌고, 그 어디에서도 권력을 잡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그것은 국가관료주의에 대항하는 혁명이었고, 개인적 해방과 정치적 해방을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혁명이었으며, 그 혁명이 남긴 가장 영속적인 유산은 현대 페미니즘의 탄생일 것이다." (213-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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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능동적인 시민의 혁명적 활동이 성과를 거두어 국민국가의 틀 속에서 (국민으로서) 시민의 권리가 확립되고, 시민의 대표로 이루어진 의회를 중심으로 정치가 움직이게 되면,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가하고 선거 때 투표할 자격이 주어진다. 그렇게 되면 역설적으로 이미 국내에서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긴장감이 사라진 결과, 정치를 남의 손에 맡겨도 괜찮다고 여기는 수동적인 사람들도 늘어난다. 19세기 후반에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복지와 공공사업이 정비되자, 수동적 시민은 정치의 소비자로 변했다. 이것이 '대중'에 깃들어 있는 일반적 이미지다. (60쪽)


전체주의는 현실 세계의 불안이나 긴장감을 견딜 수 없게 된 대중이 도망갈 수 있는, 그야말로 '총체적' 공상세계를 구축한다. 총체적인 공상적 세계 안에서 대중은 편안함을(at home) 느낄 수 있다. 다만 이 공상적 세계는 전면적으로 현실세계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상당히 왜곡시킨 형태로 가공됨으로써 전체주의적 공상의 기반이 된다. (63쪽)


그런데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그러한 공감의 '정치'는 토론을 활성화하거나 관점을 다양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불행한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것을 인간적이고 올바른 모습이라고 강요하는 배타적 가치관으로 기울기 쉽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지 않는 자들을 비인간적이라고 손가락질하며 배제하려는 경향마저 낳는다. (...)

실제로 프랑스혁명 과정에서는 '공감하지 않는 무리'를 대량으로 숙청하는 공포정치(Terror)가 이루어졌고, 똑같은 일이 20세기 좌파적인 '해방'의 '정치'에서도 되풀이되었다. '공감'을 '정치'의 무대 위로 끌고 들어오면 자신들과 똑같이 공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 대해 관용이 없어지는 한편, '사이'를 두고 논의할 수 없게 된다. (152-153쪽)


요컨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법정에 들어가는 것은 자연적인 자아가 아니다. 법 앞에 드러내는 모습은 법에 의해 만들어지고 권리와 의무를 가진 인격(person)이다." persona를 벗겨내 버리면 남는 것은 권리와 의무가 없는 개인(individual)이며, 아마도 '자연인'일 것이다. 한마디로 본래적 의미의 인간(human being)이자 사람(homo)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는 노예처럼 법의 영역과 시민의 정치조직 외부에 놓은 사람을 의미하는데,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존재다.

- 한나 아렌트, 『혁명론』(이 책 164쪽에서 재인용)


'자유의지'를 말할 때 우리는 타인의 강제나 압력에서 '자유로운' 의지 같은 것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사에서 전통적으로 문제 삼아온 '자유의지'는 그 이상의 것, 도는 그것과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그것은 자연계를 지배하는 물리적인 인과법칙에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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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스템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는 쌓이지 못한다. 고작해야 `선거 혁명`이다. 즉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
(1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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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진스키가 살았던 시대에, 사람들은 대체로 철학을 어떠한 실제적 중요성도 없는 것으로, 심지어는 대상조차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 어떤 시대에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세계관을 가장 널리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 세계관이 그 사회의 경제와 정치와 풍속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9쪽)

그는 카프카가 그리고 있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수치심으로 얼룩진 그 슬로 모션의 세계, 존재와 존재가 별들 사이의 텅 빈 공간만큼이나 막막하고 허허로운 공간에서 마주치기만 할 뿐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도 맺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세계, 그것은 바로 브뤼노의 정신 세계였다. 이 세계는 느리고 차가웠다. 그래도 따뜻한 것이 있기는 했다. 여자들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었다.
(68쪽)

과거를 회상하다 보면, 모든 게 다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기 쉽다. 십중팔구는 틀린 생각인데도 말이다.
(75쪽)

인간이 하나의 동물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자각하는 것은 먼저 고통을 통해서다. 하지만 사회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완전하게 자각하는 것은 <거짓말>을 매개로 할 때이다. 개별적인 삶은 사실상 이 거짓말과 혼동될 수 있다. 아나벨은 열여섯 살 때까지 부모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다. 미셸에게도 비밀로 하는 것이 없었다(그것이 아주 드물고 소중한 일이었음을 그녀는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그날 밤 아나벨은 몇 시간 만에 인간의 삶이 거짓말들의 끊임없는 연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84-85쪽)

새벽녘에 갑자기 천둥이 치고 사나운 돌풍이 불었다. 그는 자기가 조금 겁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이어서 천둥 소리가 잦아들고 비가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들이 텐트의 천을 투덕투덕 때리고 있었다. 얼굴 바로 위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그의 몸에는 빗방울이 닿지 않았다. 문득 자기 인생이 그 상황과 비슷하리라는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앞으로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 사이로 지나가게 될 것이다. 때로는 그것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으리라. 다른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불행을 느끼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감정들 가운데 어떤 것도 나에게 닿거나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리라.
(93쪽)

그의 세계관은 대속이나 은총 같은 기독교의 개념과도 거리가 멀었고 자유나 용서와 같은 개념과도 무관했다. 그의 세계관은 기계적이고 비정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초기 조건이 주어지고 초기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에 매개 변수가 정해지면, 사건들은 인간의 마음과 무관한 텅 빈 공간에서 전개된다. 이 사건들이 결정론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그 밖의 가능성은 없었다. 그 일에 대해 누구도 책임질 수 없었다.
(97쪽)

사실, 육체적인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종교와 과학을 융합할 수 있다는 기대는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고, 인간의 허영과 잔인성은 갈수록 심해질 수밖에 없지. 사랑이 작은 위안은 되겠지만, 그것도 희망이 될 수 없기는 마찬가지야.
(175쪽)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사람살이가 추잡하고 험악하다는 생각을 키워 온 바 있었다. 그가 보기에, 세상은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하나의 싸움터였다. 이 짐승들은 견고한 우리에 갇혀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 지평은 분명히 지각할 수는 있으나 도달할 수는 없다. 그 지평의 다른 이름은 도덕률이다. 하지만 혹자는 말한다. 사랑에 도덕률이 포함되어 있고, 사랑을 통해 도덕률이 구현된다고 말이다.
(222쪽)

인간의 행위가, 특히 개인의 정치적 행동이 이성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된다는 믿음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토대다. 하지만 이 믿음은 아마도 자유와 예측 불가능성을 혼동한 결과일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다가 교각 주위에 다다르면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이 강물의 소용돌이는 구조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용돌이를 놓고 <자유롭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44쪽)

인생은 혼미하고 긴 우수(憂愁)의 시간대로 점철되어 있다. 사람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맥이 빠진 채로 보낸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267쪽)

현대인들의 의식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인간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주 오래오래 줄기차게 자기들 나이에 대해서 생각한다. 일찍이 어떤 시대, 어떤 문명에서도 나이에 대한 생각이 이토록 집요했던 적은 없다. 현대인들 각자의 머릿속에는 미래에 대한 한 가지 단순한 전망이 들어 있다. 자기의 남아 있는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육체저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을 밑도는 때가 오리라는 전망 말이다. 사람에 따라 이르거나 늦거나 하는 차이는 있지만, 현대인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남아 있는 쾌락과 고통의 양을 비교하는 때를 맞게 된다. 인생의 어느 고비부터 이런 성찰은 자살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267쪽)

현대인들의 특성을 잘 보여 주는 예가 하나 더 있다. 사람들에게 물어 보라. 만일 폭탄 테러를 당하게 된다면 자기가 어떻게 되기를 바라느냐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팔다리가 잘리거나 얼굴이 흉해지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그들이 삶에 조금 지쳐 있다는 것도 물론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된 이유는 불구가 되거나 몸의 기능을 잃고 살아가는 것이 죽음을 포함한 그 어떤 것보다도 끔찍해 보인다는 것이다.
(268쪽)

어떤 사람들을 몇 년 동안, 때로는 몇십 년 동안 자주 만나다 보면, 개인적인 문제나 정말 중요한 화제를 회피하는 것이 서서히 버릇처럼 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더 좋은 기회가 오면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은 끝없이 뒤로 미루어지지만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인간관계도 좁고 고정된 틀에 완전히 매여 있는 것은 아니기 대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그 기대는 몇 년동안, 때로는 몇십 년 동안 유지된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떤 결정적인 사건(대개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서 이미 때가 너무 늦었음을 일깨워 준다. 우리가 품었던 <진정한>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가 실현되지 않았음을 말이다.
(288쪽)

유머는 사람을 구하지 못합니다. 따지고 보면 거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죠. 유머를 가지고 인생사를 대하는 게 몇 년 동안은 가능할 겁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죽음이 임박하는 순간까지 유머를 잃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결국 인생은 사람의 마음을 부숴 버립니다. 평생에 거쳐 용기나 침착함이나 유머 같은 특성을 키워 왔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이 되면 마음이 허물어지고 말죠. 그러면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십니다. 결국 남는 것은 고독과 추위와 침묵뿐입니다. 종당엔 그저 죽음이 있을 뿐이죠.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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